저자 : 오정연
출판 : 허블
출간 : 2021.06.16
이 도서는 출판사 동아시아로부터 제공받았음
시작하는 말
같은 모어를 가진 사람의 문장에서 몇 번이고 혀 끝에 다시 굴려보고 싶은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바짝 다가앉아 들여다보려 하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섬세한 반짝임을 느낀다.
내가 제대로 읽어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밑줄 긋는 문장들이 겹치는 것을 보면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또 같기도 한 모양이다. 빼어나게 좋은 것은 누가 봐도 좋다던가. 조금은 다른 길을 돌아온 사람의 글은 더 다채롭게 반짝이는 것 같다.
모든 단편이 좋았고, 또 몇몇은 어디서 나온 글인지 알 것만 같아 가까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리뷰
마지막 로그
내가 나의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결말이 아닌 능동적인 결말을 맞겠다는 의미일까?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나와 실행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나는 어느 쪽이 더 '본질'에 가까운가?
이제 알츠하이머는 낯설기만 한 질환이 아니다. 그 외에도 내가 나를 잃어가는 순간들을 받아들이며 견뎌내는 것과 멈출 지점을 선택하는 것, 그 어느 사이에서 우리는 존엄을 찾는다.
이번 단편집을 위해 원고를 수정하며 '나는 사실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우아하게 삶을 종료할 선택권'이라는 생사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는 문제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실제의 나'라는 것은 무엇이며 '본질적인 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풀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었던 것은, 규정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도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것을 이해하고 선택하기만 한다면.
+) Bump of Chicken의 <꽃의 이름>을 들어보고 싶다면 Bump of Chicken의 <Hananona>를 찾아 들으시면 된다.
"이 시점에서 인생을 종료하고
모든 기록을 폐기하겠다는
A17-13님의 결정은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단어가 내려온다
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의 단어를 받게 되는 세상.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 될 수도 있고, 삶의 지향점이 될 수도 있고, 숙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부터 내려받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은 신성과 떼어내 바라보기 어렵다. 특정 종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달란트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존재의 이름-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어린 나이에 결정하라고 강요받는 성적, 진로와 같은 낙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거쳐야만 하는 입문 과정, 성인식이라 볼 수도 있겠다.
'단어'를 내려 받는다. 어떤 것을 어떤 언어로 받더라도 삶은 살아진다. 늦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살 수 있다. 스스로도 잊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나와 무관한 것도 아닐 것이다.
말레이-폴리네시아가 언급되는 점과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묘사에서 바로 피지어와 피진이 연상된다. 아마도 작가는 화성의 2세대와 3세대의 언어는 크레올이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것이 환경의 변화가 언어에 미치는 당연한 영향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설정 속에서 '내려오는 단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자들도 단어를 받는다는 점, 그럼에도 받는 단어들의 분포가 변화한다는 점을 이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어가 내려온다>, <미지의 우주>, <행성사파리> 등에서 언급되는 화성에서의 이주민의 삶을 살펴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음과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 중이라는 점을 연결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글은 쓰는 자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의미가 곧 권력이 된다. 옛사람들은 인간이 받은 단어가 개인의 가장 내밀한 정수를 반영하거나 결정한다고 믿었다. 누군가의 단어를 아는 것은 곧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손에 쥔다는 뜻이었다. 제사장이나 마법사 등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개인이 받은 단어에 대한 해석을 빌미로 사람들을 협박할 수 있었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한 섬에는 비교적 최근까지 혼인할 때 서로의 지학 단어를 교환하는 풍습이 이어졌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로 이들은 서약 대신 서로의 귀에 자신의 단어를 속삭여주었다.
엘리트 중심으로 이뤄진 화성 이주 첫 세대에서는 영어 사용이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양한 민족, 직업, 경제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들이 도착하자 많은 것이 빠르게 변했다. 그때부터 말의 변화가 감지됐다고 한다. 화성은 극한의 환경이었기에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이 생존과 직결됐다.
분향
코로나 상황에 쓰인 글이 아닐까 싶었는데, 작가의 말에서 보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이 해당 시기에 쓴 글이라고 한다.
모든 단편에 저자의 실제 경험이 녹아있다고 하니 아마도 해외 거주 시에 겪었던 어떤 상황이 글감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글에서 저자의 실제 삶을 찾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김초엽 작가 같은 경우는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자신의 장애가 소설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말하며, 자꾸만 자신의 소설에서 장애를 찾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에둘러 표현한 바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더라도 그저 자신의 느낌으로만 남겨두고 굳이 들춰 확인하지 않는 정도가 예의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확인하여 자신의 착각일 뿐이었음을, 오히려 독자 스스로의 경험을 덧씌워 읽었음을 바로 마주하는 것이 예의일까. -예상이 맞았다면 그것은 일종의 소통이 되는 것일까.
우리의 뜨거운 마음과 연약한 육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단단하고 만질 수 있는 무언가에 실려
먼 우주를 건너온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제나 기적처럼 가슴이 뛴다.
너를 알아봤던 그 순간처럼,
너와 함께임을 느끼는 모든 시간처럼.
미지의 우주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가능하다고 믿었고, 현재도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순수한 축하는 그것이 자신의 삶과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할 때 조금 더 쉽고, 가까울수록 어렵다.
진심으로 너의 성공이 곧 전체의 성공이므로 나의 성공이기도 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꿈을 꾼다.
가장 빛나던 순간의 '나'를 내려놓고, 부당한 줄 알면서도 이제는 나보다 더 반짝이는 '너'를 바라보며 쉽지 않은 순간들을 살아가는
모든 주양육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미지는
남들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타인을 대하려고 노력해왔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을
절대로 먼저 묻지 않았다.
행성사파리
두 번째 기회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전제가 필요하다. 지금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과 지금까지 경험해온 방식이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쩌면 종교적인 많은 설정들은 이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같은 것을 다시 경험한다면, 정말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지금 보지 못하는 것들을 그때라고 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은 어느 때에나 존재한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애달픔은 소중하지만, 지금부터 잃지 않는 것 역시 소중하다.
뻔한 소리가 되는 것 같지만 내가 변하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게 될 것이고, 잃는 줄조차 모른 채 잃게 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역사 만이 아니다.
"행성을
하나로는 부족해서 두 개씩이나 말아먹겠다니
그거 정말 욕심이 끝도 없네요."
미아는 그 순간 납득했다.
모든 아침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멋지고
또 좋다는 것을.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기억되고 싶은 욕망은 기억하고 싶은 욕망에 앞서는 듯하다.
나의 가장 반짝이던 순간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반짝였던 순간의 기억들을 영원의 우주로 보낸다는 것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강한 낭만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은 이어진 <일식>과 함께 읽었을 때 더 와닿았다. 그 기억이란 누구의 관점에서 편집된, 누구의 기억일까?
같은 순간에 대한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은 같지 않다. 나의 느낌과 너의 느낌도 같지 않다.
그럼에도 함께 반짝이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게 기억된 순간은 정말 존재했을까.
그리고 그것들을 싣고 우주의 끝으로 흐르는 영원. 그가 편집해 보내준 영상들을 보고 느끼는 감정만이 자신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신자가 사라지더라도 어느 한순간 존재했던 빛은 영원히 어느 지점엔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다만 더 이상 닿을 수 없을 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일은 생전 처음 받아 든 스노볼 안, 이국의 눈 오는 풍경에 넋을 잃은 아이의 기억이다. 눈앞 풍경의 실제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몰입의 순간, 붙잡을 수 없는 진공의 찰나가 완벽이 되는 순간이다. 그 스노볼을 나 역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때 나에게도 취향이란 것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일식
개인적인 경험들이 떠올라 몰입해서 읽었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했던 기억.
몇 년에 한 번씩 마주할 때마다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지 않은 것들을 생각했다.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에 대해 생각했다.
한 권의 책으로 나의 기억을 건넸을 때 나는 나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도 유성우는 내리고 일식과 월식은 일어났지만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언젠가의 말처럼 가벼운 눈인사로 스쳐지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당시의 너에 대한 고마움과 나의 부족함에 대해 마주할 수 있었다. 고마웠어.
이어서 기억과 감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째서 감정이 현실을 창조한다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어느 계에 속하는지에 대해서.
소설 내에 언급된 특정 에피소드에서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자신의 소설에 그대로 차용하여 여러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던 어떤 이가 생각났다. 나는 여전히 두 출판사의 책들을 읽고 있지만 때로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B와 내가 함께한 시간은
우리 둘 모두의 것인가,
각자 절반씩 나누어가진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에 대해 보다 곰곰이 곱씹은
누군가의 것인가.
- 내가 지불한 금액이 누릴 수 있는 서비스의 범위를 결정하는 세상이었다. 나에게 제공된 서비스가 그 범위의 위쪽 경계에 얼마나 가까운지 매번 신경이 쓰였다.
- ".... 이상 있나요?" 베테랑 바리스타가 주문을 확인하듯 군더더기 없는 태도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확인한 조이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시설 투어를 시작할까요?"
(리뷰자 주 : 작가가 의도한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단편에서 언어의 사용에 주의를 많이 기울인 면을 보건대 나는 의도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보통 고개를 젓거나 "아니요,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문제없음을 확인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는 이미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 나는 완벽하게 조율된 이곳의 무심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 쫓기는 기분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우주의 탄생을 그린 과학서적부터 연쇄 살인마의 친모가 쓴 회고록까지. 뭔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움켜쥐고만 있었는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소중한 것을 어딘가 더 튼튼한 곳에 옮기는 기분이랄까.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이야기더군요. 우주가 쓰고 있는 이야기에 우리 모두 한 줄씩 보태고 있는 거죠. 삶이 시작되기 전에도, 죽음 뒤에도 끝나지 않는 것은 이야기뿐이었어요. 제가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미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지 못한 딸에게 그 애 몫의 이야기를 돌려주는 거예요."
- 모든 것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있었다. '내가 선택하고 있다'라는 알량한 자기 최면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게 세상엔 너무 많았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실버라이닝에 들어온 결심을 뒤집는다면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 안에서 내가 아닌 것으로 변해갈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 "저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의 의미를,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그러나 나는 이를 권유하지 않았다. 안락사 재고를 권고하라는 메시지를 무시했다. 맑은 마음으로 쌓아 올린 결심을 충동적으로 되돌린 인간들이 주어진 시간을 견디며 어떻게 망가지는지 나는 보았다.
가장 먼저 두 눈의 총기가 지워진다. 그리고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기억이 순차적으로 사라진다. 내게 자유의지를 심어준 개발자 역시 마지막 순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미루고 내게 의지했다. 그 결정은 그의 의지가 아닌 본능이 내린 것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 고스란히 그 자신으로 남고 싶다는 A17-13의 의지는 살고 싶다는 본능만큼 강렬했다. 인간, 아니 생명의 무한한 능력은 익히 알고 있으므로 A17-13 역시 주어진 시련을 결국은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A17-13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리고 나는 그러지 않기를 원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원하게 되었다.
- 나에게 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면서, 오류를 운명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이 전부인 양 시간을 견뎌보자. 마치 인간처럼.
- 한편 어느 민족이든 남성과 여성이 선호하는 지학 단어는 서로 판이하였다. 대부분 남자는 강한 의미의 단어를 받길 원했지만 막상 그런 단어를 받은 여자는 두려워했다. 세상이 흉흉해지면 그런 여자들은 마녀라고 불렀다. 마녀가 되어 쫓겨난 여자들은 깊은 숲에 숨어 살면서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길 잃은 아이들을 거둬 키운 뒤 마을로 돌려보냈다. 인간 문명이 이러한 소위 '마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조명되지 않은 듯하다.
- 지학의 시작이나 단위보다 더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은 지학의 이유이다. 일단 많은 민족의 신화는 이에 대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거인이 세상의 끝까지 다니며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위기의 순간, 영웅이 하늘의 '말'을 듣는다. 실제로 각종 신화에는 '말'의 권위가 빠지지 않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선언하는 기독교 신화는 더욱 노골적이다. '말씀'의 화자인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최초의 인간이 땅 위의 생물들에게 이름을 내리는 과정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만물에 이름을 붙이자 그 이름이 다시 그 자식에게 내리고 최초의 인간은 비로소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된다. 이 얼마나 확연한 지학의 인장인가.
- 결국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헤어졌던 게 아닐까.
- 다민족 공동체가 필요에 의해 그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정교한 공용어를 만들어내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했다. 나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 그런 말들이 있는 세상에서 지학은 마법과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지학과 마법에 얽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풍습은 이런 거예요. 척박한 땅에 흩어져 살아가는 호주 원주민에겐 글말이 없어요. 필요가 없던 거죠. 이들의 기억은 서로 그물망처럼 연결되고 각자의 단어가 그 매듭 역할을 한대요. 개별 부족원들은 구성원들에게 내린 단어를 키워드로 엮어 이야기를 잇고, 이게 다시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그 부족 공동체와 구성원 개인의 역사가 된다는군요. 부족의 소년과 소녀들은 열다섯 살이 되어 단어를 받으면 대륙을 관통하는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길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배우는데 자신이 받은 단어의 참된 자리와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여정은 계속돼요. 마침내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이는 넓은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 자기 부족의 좌표를 부모와 조부모에게 알려주고... 그렇게 시간 속에서 업데이트되는 이야기가 대륙과 거대한 땅의 역사가 되는 것이죠.
어쨌거나 마법의 시대는 끝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지학 단어로 운명이 결정된다거나, 지학 단어가 인생의 키워드라고 믿지 않지요.
- 왕복선과 검역소에서,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바벨탑 주민들은 서로의 단어가 무엇인지 영어로 묻고 각자의 언어로 답했다. 예로부터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은 서로의 단어를 화제 삼아 친구가 되었다지.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아는 행위에는 마법 같은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 그렇게 따지면 '춥겠더라' 같은 말도 단어 하나로 볼 수 있을 텐데, 그 의미는 '나는 온도가 낮으리란 것을 과거에 직접 느꼈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정도겠지. (한국어는 어미를 잘만 활용하면 많은 정보를 굉장히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절묘한 언어다. 그중에서도 내 생각에 화자가 직접 감각한 사실에 대해 말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회상의 어미 '-더-'는 으뜸이다.)
-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경험하는 일생의 이벤트에 대해 우리는 그간 '알 도리가 없다면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일정 정도 탐구한 뒤 더 이상 진전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고, 벽을 부수기보다는 벽의 아름다움을 면밀히 살피는 쪽을 택한 것이다.
- 미지에게 한국어는 불가해한 모국어였다. 한국어는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언어 같았다. 말의 내용보다 먼저, 말의 이면에 깔린 화자의 기분을 인지해야 한다는 알람이 늘 켜져 있었다. 방금 혜리의 문자에선 그 알람이 최고 경보 단계로 빛났다.
- 이렇게까지 해서 지구를 가야 하나 앞뒤 없는 회의가 엄습했다. 지구였다면 젊은 비혼모가 현 위치까지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고도 합리적으로 주어졌던 모든 가능성은 철저히 화성 특화된 것임을 미지도 인지하고 있었다.
- 그래도 혜리에게 바로 건넨 축하 인사는 진심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반사적으로, 해맑게 축하해야 하는 소식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깊은 고민 끝에 돌이키지 않기로 결정한 일, 그 누구도 결정의 책임을 당사자에게서 덜어줄 수 없는 일.
- 근거 없는 기대와 실체 없는 불안에 지지 않기 위해.
- 엄마 아빠의 그 슬픈 표정은 언제나 미아가 만나지 못한 '언니'와 관계된 것임을 미아는 경험으로 알았다. 언제부터인가 미아는 엄마 아빠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미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 현실감을 되찾은 이들이 조심스레 촬영을 시도했다. 미아는 달랐다. 털매머드를 만나기 위해 먼 우주를 건너왔다. 오감을 모두 사용하여 그 순간을 기억해야 했다. 다른 매체의 도움을 받기 위해 단 1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 물론 나는 인간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학습 중이다. 최근에는 명왕성을 향한 이들의 이유 없는 애정이 나의 관심을 끌고 있다. 태양계의 막내였다가 21세기 초반 행성의 지위를 잃고 퇴출된 태양계 명예 행성을 인간은 매우 사랑한다. 인간은 그저 다소 큰 크기를 지닌 카이퍼 벨트의 천체에 불과했던 명황성에게 무시무시한 지하 세계 신의 이름을 붙였다.
- 인간은 가전제품의 모양에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부정형의 구름에서 고양이를 찾아내는 족속이다. 보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보고야 만다.
- 주변 기온이 급격히 변화하거나 며칠만 수분과 영양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능력도 없으면서, 일정 범위 이상의 연산을 변함없는 정확도와 속도로 수행할 역량도 없으면서, 그들은 텅 빈 대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빛나는 항성을 서로 연결하고 그 항성으로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만들었다.
- 빅뱅의 순간부터 모든 방향을 균일하게 채우고 있는 우주 배경 복사는 아마도 그 안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리라. 우리가 모두 같은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지나도 지속되는 처음의 빛.
'우주가 텅 빈 것 같은 공허'라는 표현을 누군가의 기억에서 봤다. 사실이 아니다. 우주는 꽉 차 있다. 인간이 없어도, 인간이 인지하지 못해도 이곳은 그 자체로 충분히 따듯함을 인간은 알아야 한다.
- 간혹 개별 이메일에 대한 피드백이 답장의 형태로 도착했다. 자신의 고통과 영광과 행복에 이름을 붙인 것에, 고통인 줄도 모르고 지나온 순간에서 고통을 인지한 것에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내가 자신의 후회를, 아픔을, 미련을 알아보았다며 감탄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우연과 무작위의 협업이었을 뿐 의미를 찾은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 우리가 함께 그림자를 통해 빛을 더듬던 그때처럼.
- B는 상대방의 호응 없이 발화를 이어가는 게 익숙해 보인다. 예술계나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상담 세션에서 다루기 아주 용이하다.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B가 말을 잇는다.
- 이론상으로는 기록 관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성인이라면 기초적인 기억 관리는 스스로 해낼 수 있다. .... 그러나 이 모든 공정이 물 흐르듯 원활하려면 돈과 의지, 시간이 필요하다. 돈과 의지와 시간은 한정된 재화다.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보잘것없는 기억을 테트리스 하듯 관리하다 보면 개인은 쉽게 지친다. 방치된 기억의 아카이브는 순식간에 쓰레기장이 된다. 모든 것이 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 아카이브와 도서관과 신전이 구분되지 않던 시대. 그때나 지금이나 결정적인 제약은 공간이 아닌 시스템이다.
- 체계 없이 넘치는 기록은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어떤 감각이든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처리가 우선이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망각은,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는 순간 완료된다.
- 당연하다는 듯 일기를 쓰는 이들만이 쓰레기장이 아닌 기억 아카이브를 간신히 관리한다.
- B의 전시실에서 나는 경험했다. 한겨울 적막 산중의 풍경 소리, 끊길 듯 멈출 듯 이어지는 불꽃놀이, 잠든 아이의 속눈썹, 창백하고 턴 빈 컴퓨터 화면, 드라마에 열중한 할머니의 둥근 뒷모습 등 한때 당연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진 모든 순간을. 내가 경험한 적도 없고, 어쩌면 대부분 동시대인의 경험과도 거리가 멀 테지만, 미처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리움이 거기 있었다. 개별 감각 채널을 세심하게 믹싱 한 흔적은 간신히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기억들을 의외의 방법과 순서로 재배치하거나 특정 순간의 특정 감각을 다른 순간에 삽입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최근에는 작품을 경험하는 관객의 감각을 바로 캡처하고 이를 즉석에서 '믹스 앤 매치' 하여 기억과 기억의 틈을 벌이고 또 채우는 작업을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각의 폐쇄 회로 안에서 관객들은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경험하는 자아와 바라보는 자아의 충돌을 지켜본다.
(리뷰자 주 : 단편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물질의 사랑>이나 <얼마나 닮았는가> 중에 실린 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광고에 공감각을 삽입하는 편집자의 이야기였다. 문제가 될 걸 알면서도 광고주의 의뢰에 따라 음식 광고에 배고픔이란 감각을 삽입하고, 개인마다 가지는 '배고픔'의 감각이 달라 복통과 위경련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내용이 실린 단편이었다. - 혹시 제목을 아시는 분이 계시면 제보 좀 ㅠㅠ 이 단편이 떠올랐는데,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역시 일단 기록해놔야 한다....)
- 건반 위를 누비는 H의 긴 손가락은 신의 축복이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과 리스트의 환상곡을 거침없이 연주하는 H의 경험은 그간 트레이닝용 콘텐츠로도 곧잘 활용되었다. 그러나 기억이 아닌 경험을 신봉하는 H는 콘텐츠에 사용된 자신의 원본 기억을 모두 삭제했다. H의 기억 관리자였던 하진은 이를 말리지 않았다. H가 30대 후반에 선천적인 혈관 기형으로 인한 뇌졸중을 겪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이후 H는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았고 모든 기능이 정상 범위 안에 이르자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당연히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달랐다. 자신이 제작에 협조한 트레이닝용 콘텐츠를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초조해진 H는 하진에게 문의했다. 열화 된 자신의 기억 파일을 최대한 원본에 가깝도록 복원할 방법에 대해. 하진은 통합된 채널을 감각별로 분리해 원형을 복원하려고 애쓰던 중 깨달았다. 지금의 H가 연주할 때 생성된 기억 파일에서 그의 감각 패턴을 개별 분석한다면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진과 H는 몇 주, 몇 달에 걸친 시도 끝에 원본에 가장 가까운 뇌졸중 이전 경험을 복원해냈다. H의 회복 연주회장에서 하진은 확신했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한 건 복원한 기억 파일이 아닌, 기억을 되찾으려는 H의 의지였다고.
- 놀란 나에게 B가 말했다. 인간의 기억은 재생할 때마다 새로 덮어쓰는 파일 같다고, 애초에 기억과 경험은 한 번도 완벽하게 일치한 적이 없었을 거라고. 그러니 자신이 손 본 기억은 적어도 B의 본래 경험에 더 근접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후 나는 감각 기록과 기억 관리를 공부하면서 당시 B의 판단이 얼마나 직관적이고 정확했는지 뒤늦게 깨닫곤 했다. 감각 기록 파일은 CCTV와 달랐다. 얼마나 주의 깊게 감각과 기록이 이뤄지느냐에 따라 있었던 일도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 경험할 때 이미 왜곡되어 인지된 감각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
- 몇 번인가 반복 재생했던 기억 속에서 우리는 함께 평양식 왕만두를 먹고 음식점 앞 벤치에 앉아 있다. 13년 전의 내가 13년 전의 B에게 말한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잘 살아.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던 B가 말한다. 이번 주 일요일에 부분일식이 있을 거래. 마지막으로 그걸 함께 보자. 당일배송으로 태양관측 안경을 주문했지만 결국 도착하지 않았다.
그날 B와 나는 다양한 종류의 크래커를 들고 만났다. 그리고 2시간 남짓, 우리는 과자의 구멍 사이로 빠져나온 빛이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점점 이지러져서 초승달에 가까워지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함께 보았다. 초여름의 타는 열기가 잠시 수그러드는 것을, 주변의 나뭇잎 그림자가 평소와 달라지는 것을, 자신보다 400배 큰 별을 온몸으로 가리고 지나가는 위성의 그림자를 온몸에 각인했다. 태양이 다시 둥글어지자 우리는 크래커를 나눠 먹고 헤어졌다. 그때 B가 알려줬다. 13년 뒤에는 서울에서 개기 일식을 볼 수 있을 거래.
- 그리고 전시 전 마지막 세션, 이틀 뒤 전시가 시작되면 B는 매일 8시간씩 등받이 없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맞은편에 앉는 낯선 이들과 눈을 맞출 것이다. B와 B의 맞은편에 앉게 될 관람객들은 앉자마자 감각 기록 장치를 몸에 부착한다. 두 사람의 감각 경험은 곧바로 아카이빙 공정으로 흘러들 것이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관람객들 역시 전시의 중요한 일부다.
- 예외적인 환경이기에, 나는 B와 다른 관객의 기억 파일을 열람할 수 있다. B의 눈에 비친 이들은 쭈뼛쭈뼛 혹은 성큼성큼 다가와 의자에 앉는다. 한 번도 부서진 적 없는 마음과 너무 멀리 와버린 마음, 더 이상 거짓과 진심을 구별할 수 없다고 믿는 마음과 열쇠를 찾을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끝내 포기할 수 없는 마음들을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봉투를 열고 충격 방지 포장까지 개봉하자 나타난 것은 태양관측 안경이다. 13년 전 B와 내가 주문했던 것이다. 오늘은 크래커 따위 필요 없겠다.
안경을 써본다. 400배 작은 크기의 달이 우주와 우연을 등에 업고 태양을 가릴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모든 마법은 내 것이다. 해와 달이 궤적을 포개는 순간이 내 안에서 영원할 것이다.
-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서 계획 세우기를 좋아한다. 꾸준히 노력하여 그 계획을 현실화하는 것을 비교적 즐기는 편이다. 하프마라톤 완주, 1킬로미터 완영 그리고 숱한 마감을 그렇게 해냈다. 조심조심 차에 실려서 퇴원했던 길목을 반년 만에 두 다리로 달려서 지나친 날 깨달았다. 절대 안 될 것 같은 목표의 대부분이 그냥 계속, 많이 하면 되는 것임을.
-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단편집을 묶어내면서 모든 작품을 새로 썼다. 제일 처음 수정한 것이 <마지막 로그>였는데 내 생애 첫 소설이었던 이 작품을 첫 번째로 완성한 뒤로 5년이 흘렀다. 우아하게 삶을 종료할 선택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줄 알았는데, 몇 번에 걸친 개작을 통해 나는 사실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5년 사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변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 또한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고쳐) 쓴다는 건 꽤 멋진 일이다. 쓰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발견한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과 <일식>은 같은 기술과 세계를 공유했다. 학위 및 직업 수집가로서의 날들이 왠지 부질없게 느껴질 때마다 이 단편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영상물 기록관리학을 공부하고 그 업계에 몸담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역시나) 쓰면서 깨달았다. 모든 기록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나의 꾸준한 관심사였음을. 그리고 기록과 기억은 나에게 있어 동의어 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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