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일루젼 2021. 7. 1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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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르치아 엘리아데 / 이재실

원제 : Images et symboles
출판 :  까치글방
출간 :  1998.01.12


하나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전에 읽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서 이어지는 부분도 있고 입장이 조금 다른 부분도 있는데,

다루고 있는 내용과 구조적인 측면 모두에서 상당히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순환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를 보면 총 5장으로 각각의 핵심 주제는 '중심' - '시간' - '결박과 매듭' - '조개와 물' - '상징체계'의 순이다. 그러나 다 읽고 보면 각 장은 모두 이어져 있으며 다시 '중심'으로 회귀한다. 개별적인 장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게 쓰여져 있지만 각각을 연결해서 읽으면 새로워진다.

 

1장의 '중심'은 말 그대로 중심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현시대를 넘어선 전체 인류의 '공통된 원형'이란 과연 존재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2장은 그것을 인정할 경우에 생성되는 '시간'의 흐름에 관한 내용이다. 본질적인 중심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시간'을 뛰어넘어 '대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중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창조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감각하는 '시간'의 벽을 관통하여 '중심'과 연결되는 것은 가능한가? '시간'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의 부분은 크게 다루지 않았으나, 그에 관한 인도와 유럽, 그리스도교의 입장 차이에 관한 내용으로 충분히 갈음 가능하다. 

 

3장의 '결박'과 '매듭'은 그 내용 자체로도 매우 흥미로웠다. 마법적, 주술적 의미로서 공격과 수비 모두를 상징하는 '매듭'은 '경계 지음'으로써 단절시키고 풀어내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연결된다. '생명의 끈'이며, 삶이라는 천을 짜고 있는 '운명의 실'이다. 

 

4장의 '조개'와 그로부터 나오는 진주는 상징이 힘을 잃고 흡수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실재적인 가치는 상징을 훼손시킬 수 없다. 그에 담겨 있는 원형은 기실 '물'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가지는 탄생과 죽음, 재생과 부정형의 이미지는 '씻김'과 '정화'로 이어져 그리스도교와 연결된다.  

 

조금은 현학적일 수 있었던 1장과 2장에 비해 확연히 독립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3장과 4장은 2장에서 언급된 인드라의 깨달음과도 같다. 독립적인 사례 같았던 개별적 상징들이 결국은 어떻게 '중심'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미지'와 '상징'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가 되어준다. 개별자에게 작용하는 상징과 이미지는 결국 '입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가?

현재의 우리가 시작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면 이 이후는 어떠할 것인가. 5장에서 다시 2장의 시간의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4장에서 '물'과 '세례', '하강'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된 그리스도교를 통해서이다. 종교가 차용한 이미지와 상징, 그리고 그에 덧입힌 의미들은 '차원을 달리할 뿐', '본질'을 훼손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런 세부적인 덧붙임은 오히려 '이미지를 완성'할 뿐이다. '역사적인' 덧칠을 통해 오히려 각각의 지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이미지들은 '보편성'을 획득하며 퍼져나간다.

 

이미지와 상징은 그것을 접한 자가 '이해'하느냐의 여부와 별개로 작동한다. 그렇게 우리는 '대시간'을 반복하며 개별자로서 '역사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란 것 역시 마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요가와 명상에 관해 관심은 있었지만 실천 수행보다는 문헌 수집에 (심지어 제대로 읽지도 않는다) 집중하는 편이었다.

슬쩍슬쩍 <사자의 서>나 <바가바드 기타>, <기탄잘리> 등을 뒤적여는 봤지만 '읽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지와 상징>을 읽으며 오히려 방향성이 잡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다시 도전한다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생명나무, 세계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기도 하지만 책 속의 인용, 발췌문들은 확실히 세피로트와 연관된 부분이 많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다.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카발라에 대응시켜 보면 새롭다.

(다만 중심으로의 상승에서 금속 대응이나 행성 대응이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건 해당 도서를 접해봐야 할 것 같다.)

 

더듬거리는 손 끝에 닿는 것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으나, 걸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 즐겁다. 

 

 

 셋

 

겨우 몇 권을 읽고 각 저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할 계제는 못된다는 것을 알지만. 

 

미르치아/미르체아 엘리아데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종교사가'로서의 정체성과 프로이트나 융 등의 '심리학자' -종교심리나 심층심리 포함-, 프레이저 등의 학자들에 대한 태도를 보면 '패기로운 디스'를 느끼게 된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서는 보다 조심스럽게 느껴졌다면 이번 <이미지와 상징>에서는 상당히 각을 세우는데 아무래도 <이미지와 상징>을 더 젊을 때 쓴 게 아닌가 싶다.

 

"프레이저 같은 학자가 "미신"밖에는 보지 못했던 거기에 이미 하나의 형이상학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종교사가의 참고 자료는 심리학자나 문학비평가의 것보다 훨씬 완벽하고 통일성이 있다. 상징적 사고의 근원에서 인용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종교사이다. 심리학자나 문학비평가가 관계하고 있는 원형은 그저 유사한 변화형일 따름이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 자부심을 갖고 어느 정도의 오만함을 보이는 것도 학자의 소양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그만큼 옳다'는 절대적인 확신의 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일종의 균형점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참고문헌'일 테고. 받아들이는 것은 읽는 자의 몫이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신화. 꿈. 신비>를 읽고 있는데 몇 장 읽지 않아 묘한 괴로움이 느껴졌다. 살펴보니 역자가 다른 분이었다. 신학 쪽의 역자라 그런지 선택한 단어나 번역한 문장이 조금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속도가 나지 않아 약간 고민 중이다. 바꿔 말하면 내게 '익숙한' 단어 선택이라는 기호가 생겼다는 말이라 웃프기도 하다. 

 


 

-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19세기가 예감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상징, 신화, 이미지가 정신적 삶의 본질을 이룬다는 사실, 이것들을 은폐하고 훼손하고 가치를 하락시킬 수는 있어도 결코 근절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19세기를 통해서 위대한 신화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은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보잘것없이 축소되고 끊임없이 깃발을 바꾸어 달 수밖에 없었던 신화들이 특히 문학에 의해서 어떻게 이 동면을 견뎌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적으로 볼 때, 이미지의 “기원"과 “진정한 해석"의 문제는 무의미한 것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해석된 어머니에 대한 애착(자신의 어머니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어머니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반대로 이것이 어머니의 이미지의 문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욕망은 많은 것들을 동시에 의미하게 된다. 이 욕망은 우주론적, 인류학적 등 수많은 발전 방향의 가능성을 지닌, 아직 “형성"되지 않은 살아 있는 물질에 대한 자기만족을 회복하려는 욕구이자, “물질”이 “정신”에게 행하는 매혹이자, 원초적 통일성에의 노스탤지어, 즉 대립과 양극성을 소멸시키려는 욕구이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고 또 후에 다시 지적하게 될 것이지만, 이미지는 그 구조 자체상 '다가적'이다. 사물의 궁극적 실재를 포착하기 위해서 정신이 이미지를 이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실재가 개념에 의해서 표현되지 못하고 모순되는 방식으로 표명되기 때문이다(서양과 동양의 각종 신학과 형이상학은 이미지와 상징에 의해서 쉽고도 풍부하게 표현되는 '대립의 일치'라는 존재 양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해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따라서 의미 작용의 집합으로서의 이미지 그 자체가 '진실'한 것이지, 이 '의미 작용 가운데 어느 하나, 또는 관계되는 수많은 차원 중의 어느 하나'가 진실한 것은 아니다.

 

- 만약 인류 사이에 전체적 연대성이 존재한다면, 사실상 그 연대성은 이미지의 차원에서만 감지될 수 있고 “유효"할 수 있다(여기에서 이미지의 차원이라는 말 대신에 잠재의식의 차원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초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가장 곤란한 중심문제는 물론 해석의 문제이다. 원칙적으로 해석학의 타당성 여부의 문제는 항상 제기될 수 있다. 다양한 재편성에 의해서, 명백한 주장(문헌, 의례, 형상이 새겨진 기념물)과 모호한 암시를 통해서 어떤 상징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증거에 입각해서 증명해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즉 상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이론적인 함축을 모두 이해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우주목의 상징을 연구하면서이 나무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우주목을 아는 사회에 소속된 개개인들이 과연 모두 “중심"의 종합적 상징을 의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인식의 형태로서의 상징의 유효성은 어떤 개인의 이해 정도에 좌우되지 않는다.

 

-더구나 상징체계의 해석학의 정당한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헛될 뿐이다. 사람들은 신화가 타락하고 상징이 세속화되는 것을 보아왔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19세기라는 가장 실증적인 문명에서 조차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상징과 신화는 너무도 먼 곳에서 왔다. 상징과 신화는 인간 존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우주 속에 있는 그 어떤 인간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라도 이것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샤먼의 집회 중에 이 북이 가지는 중요한 역할은 익히 알려져 있다. 특히 이 북의 힘으로 샤먼들은 엑스터시에 도달한다.

 

-세계는 허망한 것이고, 실재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베단타 등의 인도의 관념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 야만 한다. 세계에 실재성이 없는 것은 그 지속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비지속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이 테이블이 비실재적인 이유는 말 그대로 지금 존재하지 않아서, 우리의 감각으로 볼 때 환각이어서가 아니다. 테이블은 지금 환각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테이블은 존재한다. 하지만 1만 년, 10만 년 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테이블은 허망하다. 우주적 리듬의 차원에서 보면 역사적 세계는 순간의 공간을 지속할 뿐이기 때문에 수천 세대의 노력으로 힘들게 쌓아 올린 역사적 세계, 사회, 문명, 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 베단타 철학자, 불교도, 선인, 요가 수행자, 현자들은 무한한 시간과 영원회귀의 가르침에서 논리적 결론을 이 끌어냄으로써 세상을 등지고 절대적 실재를 추구한다. 절대의 인식 만이 그들을 환상에서 해방시키고 마야의 베일을 찢어버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가바드기타」, 가운데 크리슈나가 설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길이다. 팔라트르슈나바이라갸라고 불리는 이 길은 곧 "행위의 결실에 대한 포기"로,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익의 포기를 의미한다. 우리가 앞서서 이야기한 비슈누와 인드라 신화에 이어지는 결말에서 밝혀주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방금 보았듯이, 순환하는 무한한 시간의 신화는 시간의 단조 리듬, 즉 역사적 시간에 의해서 엮어진 환상을 깨고 세계의 불안전성과 비실재성 그리고 해탈의 길을 우리에게 밝혀준다. 사실상 속세를 떠나 고행과 신비술을 행하는 명상적 방법에 의해서, 혹은 속세에 몸을 담되 “행동의 결실”을 향유하지 않는(팔라트르슈나바이라갸) 능동적 방법에 의해서 마야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느 방법이든 간에 요점은 시간 속에서 피고 지는 형태의 실재성'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들은 그들 자체를 기준으로 볼 때에만 '진실'일 뿐이고 존재론적으로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 "사고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시간의 흐름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현재, 정지된 지금에 산다.

 

-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절대적 현재, 영원한 현재는 적정이자 비지속이다.

 

- "이승에서 피안 세계로 가고 싶은 사람, 그 반대로 하고 싶은 사람은 대립적이되 명백한 힘들 사이의 일차원적, 무시간적 틈을 이용하여 통과해야 한다. 이 힘들 사이를 통과하는 것은 순간적으로만 가능하다”

 

- 어쨌든 요가의 형식은 모두 세속인(무력하고 정신이 산만하며 육체의 노예이자 진정한 정신적 노력은 모르는 인간들)을 영광된 인간으로 우선 변모시키는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영광된 인간이란 완벽한 육체적 건강을 가진 자, 자신의 육체와 심리적-정신적 삶의 절대적인 지배자, 자기 집중이 가능한 자,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를 말한다. 요가에서는 궁극적으로 세속인, 일상적 인간을 초월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완전한 인간까지도 초월하려고 한다. 

 

- 우주론적 용어로 말하자면(인도적 사유를 통찰하려면 항상 이 열쇠를 사용해야 한다), '요가가 우주적 조건 자체를 초월하려고 할 때,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완벽한 우주이다.'

 

- 대립과 대극적 긴장관계를 초월하고 실재를 통합하고 원초의 단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도적 정신의 갈증을 이해한다면, 이 모든 것이 놀라울 것도 없다. 마야로서의 시간이 신의 현현이라면, 시간 속에 산다는 것 그 자체는 “악행”이 아니다. “악행"은 시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시간이 인간을 집어삼키는 것은 인간이 시간 속에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시간의 실재를 믿고 영원성을 망각하거나 경멸하기 때문이다.

 

- 마야(환상의 세계를 만드는 신의 힘, 환상의 힘, 환력/역주)는 시간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마야 그 자체는 절대 존재(시바, 비슈누)의 창조력, 특히 우주 창조의 힘에 불과하다. 즉 '우주의 위대한 환상도 하나의 신성현현이라는 점이다.' 

 

- 사실 지반 묵타가 획득한 “시간으로부터의 이탈”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입멸이나 엑스터시에 해당된다. 하지만, "시간으로부터의 이탈”이 해탈의 왕도(순간적 깨달음의 상징을 상기할 것)이기는 해도, 이것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가차 없이 무지와 노예의 운명을 젊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드라와 나라다의 신화가 보여주고 있듯이, 환상에서 해방되는 데에는 시간의 존재론적 비실재성을 의식하고 우주적 대시간의 리듬을 "현실화"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 이 세 번째 태도가 시간에 관한 “원시인"의 태도를 연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아즈텍인들에게 달팽이는 보통 수태, 임신, 분만을 상징했다.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의 도판 26에 대해서, 킹스보로는 연체동물(바다달팽이)과 분만 사이의 관련에 대해서 토착민들이 설명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옮겨놓고 있다. "이 바다 동물이 그 껍질에서 나오듯이, 사람도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다." 

 

- 원형적 이미지는 "구체적" 가치부여의 작용이 있더라도 그 형이상학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는 법이다. 진주가 경제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 종교적 상징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적 상징은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회복되고 풍부해진다.

 

- 물은 잠재성의 보편적 총체를 상징한다. 물은 근원이자 원천으로서, 모든 존재 가능성의 저장소이다. 또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받쳐준다. 모든 창조의 모델이 되는 이미지는 물결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는" 섬의 이미지이다. 반대로 침수는 형태 이전으로의 퇴행, 존재 이전의 미분화 상태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물 위로의 부상은 우주 창조의 형성행위를 재현하는 반면, 침수는 형태의 해체를 의미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물의 상징은 죽음과 재생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리뷰자 주 : 그런 의미에서 샘이자 바다인 'marah'가 떠오른다.)

 

- 그러나 천지개벽의 측면에서 보나, 인류학적 측면에서 보나, 침수는 결정적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형태와의 일시적 재통합을 의미한다. 이 재통합 이후에는 우주론적, 생물학적, 구제론적 해당 요인에 따라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인간이 뒤따르게 된다. 구조의 관점에서 볼 때, “홍수"는 “세례"에 비교되어, 사자에 대한 헌주는 신생아의 재계의식 또는 건강과 수태를 보장해주는 춘계 목욕 의식에 비교된다. ... 몇몇 종교집단에서 물은 변함없이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어서, 형태를 해체, 소멸시키고, 정화와 재생 기능으로 “죄를 씻어준다."

 

- 물은 고유의 양식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에, 즉 형태를 통해서 표명될 수 없기 때문에, 창조를 선행하고 또 창조를 소멸시키는 것이 그 운명일 수밖에 없다. 물은 가능성, 배아, 잠재성의 조건을 초월할 수 없다. 모든 형태는 물과 분리되어 물을 초월하여 표현된다. 반대로, 모든 “형태"는 물에서 분리되는 것과 동시에 잠재적인 존재이기를 멈추고 시간과 생명의 법칙 밑으로 들어간다. 즉 형태는 한계를 획득하고, 우주 생성에 참여하고, 역사를 체험하고, 부패하며, 결국에는 주기적인 침수에 의해서 재생되거나 "천지개벽"이라는 필연적 귀결로 이어지는 “대홍수"를 반복하지 않는 한, 그 실체를 잃게 된다. 

 

- 재계 의식이나 물에 의한 의례적 정화는 창조가 있었던 무시간적 순간(in illo tempore)을 전격적으로 실재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의식들은 세계의 탄생이나 "새사람"의 탄생에 대한 상징적 반복인 것이다. 

- 한 가지 핵심적인 특징이 여기에 나타난다. 즉 물의 신성성뿐만 아니라 물에 의한 천지창조나 세계의 종말에 나타난 구조는 '물의 상징성에 의해서만 전모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물의 상징만이 무수한 신성 현현 각각의 계시를 모두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체계”이기 때문이다.(『종교사 개론」」 p. 383 참조) 그런데 이 법칙은 모든 상징에 대해서도 타당한 법칙이다. 즉 상징적 '총체'는 여러 신성현현의 다양한 의미 작용에 가치를 부여한다(또한 교정해주기도 한다).

 

- '용이 길가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노리고 있으니,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정령의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 반드시 이 용을 통과해야만 한다.'(베르나르, p. 272에서 인용) 곧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하강 그리고 바다괴물과의 결투는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확인되는 통과의례적 시련을 구성한다.

 

- 초기 교회의 사제들은 오로지 전조론(신약에 기술된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시, 상징되어 있다는 설/역주)으로서 상징을 고찰했다. 즉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 대응관계를 발견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현대의 저술가들은 그러한 예를 따라가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 상징을 비기독교권의 종교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확인된 “일반적” 상징의 틀 속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약성서에만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 저자들에 의하면, 기독교적 상징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상징의 일반적이고 직접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서적인 가치부여 작용이다. 


-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최근 25년간, 성서 연구 및 전조론 연구의 비약적 발전은 혼합종교적인 비의와 그노시스에 의해서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경향에 대한 반동을 나타내는 동시에 몇몇 비교학파의 "혼동주의"에 대한 반발을 나타냈다. 기독교적 예전과 상징은 유대교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기독교는 다른 역사적 종교, 즉 유대인들의 종교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종교이다. 따라서 어떤 성사나 상징을 설명하거나 잘 이해하려면 구약성서에서 그 "형상"을 찾는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 신앙을 발견한 후에야 이 “기호들"을 이해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는 기독교적 체험, 신학, 종교심리학의 관심사이지, 우리의 연구 범위는 아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 중요할 뿐이다. 즉 '모든 새로운 가치부여 작용은 항상 이미지의 구조 자체에 의해서 조건 지어졌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스스로의 의미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 우리는 세계목의 상징을 언급한 바 있다. 기독교는 이 상징을 통합, 확장시켜 사용했다. 선악의 나무를 목재로 해서 만들어진 십자가는 우주목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한 그루의 나무로 묘사된다.(오리게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복음서 강화」는 십자가를 "대지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나무"로 묘사한다. ... 우주목의 이미지가 놀랍도록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다. 십중팔구, 잠언 3:18,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가운데의 그 지혜에서 그 원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지혜는 유대인들에게 곧 법이다.

 

- 그러나 상징을 그 자신의 역사 속에 제대로 “위치”시킨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즉 어떤 상징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아니라 상징 전체가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상징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상호연관되고, 하나의 체계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이미 보았다. 다양한 해석 사이에서 모순이 나타난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는 표면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모순들은 상징을 그 전체 속에서 파악할 때, 또 상징의 구조를 식별해낼 때, 완전히 용해되어버린다. 어떤 원형적 이미지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면 먼저의 가치들은 최후를 장식하고 완성된다.

 

- 모든 문화는 "역사 속으로의 실추”이다. 그와 동시에 모든 문화는 제한을 받는다. 그리스 문화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 기품, 완벽함에 속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스 문화 역시 '역사적 현상으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 역사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 구조와 양식을 통해서 표현되는 문화는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문화에 선행하며,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미지는 영원히 살아 있고,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 이미지는 초역사적 세계를 향한 "입구"이다. 이미지의 가치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미지로 인해서 여러 다른 “역사들"이 소통할 수 있다. 

 

- 기독교의 개화적 역할이 매우 커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영토에 밀착하여 살고 있어 선조들의 전통 속에만 고립될 위험을 안고 있는 토착민들을 위하여 공통적인 새로운 신화적 언어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 예를 들면, 태양의 상징과 신화는 태양이 가진 "밤", "악", “장례"에 관계되는 측면까지도 밝혀주는데, 이런 측면은 태양의 일반적 현상에서는 당장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우주 현상으로서' 태양 속에 숨어 있는 이 '부정적인' 측면은 태양의 상징의 구성요소이다. 이런 사실은 애초부터 상징이 마음의 창조물로서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상징의 기능은 다른 인식 수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총체적 실재를 밝혀주는 데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위의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를 들면 상징에 의해서 극히 풍부하면서도 '단순하게' 표현되는 대립의 일치는 우주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으며, 인간의 직접 체험이나 추론적 사고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 

 

- 그렇지만 상징이 오로지 "정신적" 실재에만 관계한다고 믿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원시적 사고에서 볼 때 이러한 “정신”과 "물질"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두 차원은 상호보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상징은 대상이나 행위에 새로운 가치를 '덧붙이지만', 그렇다고 독자적인 직접적 가치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상징은 대상이나 행위에 적용되면서 이들을 "열어놓는다.” 상징적 사고는 직접적 현실을 “폭발”시키면서도 축소시키거나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상징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는 닫혀 있지 않고, 어떤 대상도 고유의 실재성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상호 대응과 동화의 엄밀한 체계에 의해서 총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원시 사회의 인간은 의미가 풍부한 "열려진 세계"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림"이 도피의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의 진정한 실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는지를 아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 상징에 의한 세계의 변용을 잘 이해하려면, 어떤 물체가 원래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동시에 성(聖)별되는 신성현현의 변증법을 상기해보면 된다.

 

- "상징은 신성현현을 구성한다. 상징은 다른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신성한 우주론적 실재를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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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이 부분은 상징체계 속에 깊이 몸을 담그고 있으며, 원시의 신화와 신학으로 살아간다.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라는 이 값비싼 보물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은 현대인 자신의 몫이다. 이미지를 되살림으로써, 순수한 상태의 이미지를 관조할 수 있고 그들의 메시지를 흡수할 수 있다. 

 

- 상상력은 규범적 모델- 이미지-을 모방하고 재생시키고 재현실화시키고 무한히 반복한다. 상상력을 가진다는 것은 세계를 그 전체성 속에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개념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지시해주는 것이 이미지의 힘이자 사명이다. 그렇게 보면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의 불행과 몰락이 설명된다. 그는 인생과 자신의 영혼의 심오한 현실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상징체계 연구에 따르는 위험은 성급한 일반화이다. 문외한들은 눈앞에 다가온 최초의 자료들로 만족하고 과감하게 상징체계에 대한 "일반적” 해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는 얼마나 뉘앙스로 가득하고 복합한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상징분석에서 최소한 두 개의 견본을 제시했다. 한편으로 심리학자, 문학비평가, 철학자들에게 풍부한 참고자료를 공급해줌으로써, 필요하다면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심리학 서적이나 문학비평서에서 종교적 고증이 불충분하다 못해 잘못된 경우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인용한 참고 문헌은 대부분의 경우 비판적 감각이 결여된 아마추어의 것이거나 고립된 “이론가”의 것이기 십상이다. 비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민족학자나 종교사가를 대신할 수 없다고, 장시간을 요하는 연구를 할 방법도 여유도 없다고, 그래서 손에 잡히는 "개설서 "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고 당연히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비전문가들은 몹시 “하잘것없는 개설서 ”를 만나게 된다는 점이 불행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좋은 기회가 있어도, 대개는 잘못 읽거나 너무 빨리 읽어버리고 만다. 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참고 문헌을 없애보고 싶은 생각을 억제했다.

 

- 아마도 비전문가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일반적인 독자적 설명을 제시할 생각을 품고 있는 딜레탕트나 “이론가”들의 낡아빠진 한심한 노작을 양식으로 삼기보다는, 민족학과 종교사의 저작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싶은 필요를 느낄 것이다. 심리학 문헌, 특히 정신분석적인 저작은 독자들을 개인적 “사례"에 대한 장황한 보고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어떤 환자의 꿈이나 백일몽을 상세히 설명하는 데 책 한 권을 모두 바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단 한 사람의 “꿈의 신화"에 대해서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출판한 적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모든 개별적 "사례"에 대한 누락 없는 보고가 정말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며, 불가피하게 삭제해야 할 경우가 있다면 항상 마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완전한 사건기록의 출간인 것 같다.

 

- 요컨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딜레탕트, 신 심령주의자, 가짜 신비학자의 엽기 문학일 따름이다. 이 책임은 어느 정도 우리 종교사가들에게 있다. 우리가 '객관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에 준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납득하지 못한 채, 종교의 '객관적' 역사를 무턱대고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약 1세기 전부터 우리는 종교사를 자율적 학문으로 세워보려고 노력했으나 이루지를 못했다. 알다시피 종교사는 인류학, 민족학, 사회학, 종교심리학, 심지어는 동양학과 계속 혼동되고 있다.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권위를 기필코 획득하기를 바라면서도 종교사 역시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현대 과학정신의 전반적 위기를 겪었다.

 

-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많은 종교사가들은 각각의 전문 분야에 빠져 있는 나머지, 그리스나 이집트의 신화라든가, 부처의 법구, 도교적이거나 샤먼적인 기법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이 방면의 독서로 길을 닦은 비전문가에 비해서 오히려 훨씬 아는 바가 적다. 종교사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종교사라는 어마어마한 영역 중에서 극히 작은 한 분야에만 정통할 따름이다. 

 

- 천지간을 잇는 다리나 사다리가 가능한 것은 세계의 중심에 서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바로 그러하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창세기 28:12) 또한 인도의 의례는 하늘에 상승한 후 획득한 불사성을 암시한다. 곧 검토하게 되겠지만, 이외에도 수많은 중심에의 제의적 접근은 모두 불사성의 정복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 샤먼의 나무는 우주의 중심에 서서 그 정점이 최고신이나 신과 태양과 접하고 있는 세계목의 복제일 따름이다. 샤먼의 나무에 새겨진 일곱 개 내지 아홉 개의 홈은 우주목의 일곱 내지 아홉 가지, 즉 신비적 칠천 혹은 구천을 상징한다. 더욱이 샤먼은 그밖의 다른 통과의례의 유사점에 의해서도 이 세계목과 관련되는 것을 느낀다.  

 

- 미트라 비의에서 제의용 사다리(클리막스)에는 일곱 계단이 있었고, 각 층계는 각각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켈수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 「켈수스에 대항하여 Contra Celsum」, VI, 22), 첫 번째 계단은 납으로 만들어져 토성의 "하늘"에 해당되었고, 두 번째 계단은 주석(금성)으로, 세 번째 계단은 청동(목성)으로, 네 번째 계단은 철(수성)로, 다섯 번째 계단은 합금(화성)으로, 여섯 번째 계단은 은(달)으로, 일곱 번째 계단은 금(태양)으로 각각 되어 있었다. 여덟 번째 계단은 항성권을 상징한다고 켈수스는 말한다. 이 사다리를 기어오름으로써, 비의 입문자는 칠천을 통과하여 최고천까지 올라갔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의 지쿠라트의 일곱 계단을 올라가 최고천에 도달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고, 그 자신이 우주산이자 세계상인 바라부두르 사원의 층층을 올라감으로써 여러 우주계를 통과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는 도시, 사원, 궁전은 모두 우주 삼계를 떠받치고 있는 우주산, 세계목, 중심주라는 원시적 이미지의 갖가지 복제에 불과할 따름이다.

 

- 다만 신화는 인간을 인간 자신의 시간, 개인적이고 연대기적이며 “역사적인” 시간으로부터 끌어내며, 대시간 속에 투입시킨다. 대시간은 지속에 의해서 구성되지 않은 측정 불가능한 역설적 순간이다. 이 말은 곧 신화는 시간 및 주변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함축하고 있으며, 대시간, 신성한 시간으로의 열림을 실현한다는 뜻이 된다.

 

- 신화를 이야기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속적 시간은 소멸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된다.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신성한 신화적 신화 속으로 투입되는 것이다. 다른 책에서 우리는 표본적 모델의 모방과 신화적 사건의 재현에 의한 세속적 시간의 폐기가 모든 전통사회 특유의 특성이라는 점, 또 이 특성 한 가지만으로 원시사회와 현대사회를 구분 지을 수 있다는 점을 밝힌 적이 있다.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은 우주의 창조를 재현하는 일련의 의례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시간을 폐기하고, 과거를 소멸시키고, 시간을 재생시키려고 의식적, 자발적으로 노력했다.

 

 - '진정한 역사'는 모든 존재와 우주적 사건의 진정한 근원인 대시간, 신화적 시간을 인드라에게 밝혀준다. 인드라가 자신의 오만과 무지로부터 치유된 것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자신의 “상황"을 초월하여 세속의 시간, 즉 자신의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상의 베일을 찢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구원"된 셈이다. 신화가 가지는 이러한 구제적 기능은 인드라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험 이야기를 듣는 인간 모두에게도 작용한다. 세속의 시간을 초월하여 신화적 대시간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궁극적 실재의 계시와 같은 가치를 지닌다. 엄밀하게 형이상학적인 이 실재는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면 접근할 방도가 없다.

- 이것들의 파노라마를 명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두려움에 빠지며, 자신이 수천만 번이라도 이 덧없는 삶을 반복해야 하며 끝도 없는 고통들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결과적으로 해탈의 의지를 강화시켜서 “존재”의 조건을 초월하도록 인간을 이끌어간다.

 

- 아닌 게 아니라 비슈누의 계시에 창피를 당한 인드라는 전쟁의 신으로서의 사명을 포기 하고 산에 은거하면서 끔찍한 고행을 시작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는 세상의 비실재성과 허망함을 발견함으로써 유일한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인드라는 싯다르타 왕자가 카필라바스투의 왕궁과 아내를 버리고 고통스러운 고행에 들어간 직후의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렇지만 신들의 왕으로서 형이상학적 질서에 관한 계시로부터 그런 결론을 끌어낼 권리가 있는 것인지, 그의 은둔과 고행이 세계의 균형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얼마 후, 버림받고 비탄에 잠긴 인드라의 아내 샤시 왕비는 고문 승려 브라스파티에게 도움을 청한다. 브라스파티는 왕비의 손을 잡고 인드라에게 다가가 명상적 삶의 미덕뿐만 아니라 이승에서 중일함을 발견할 수 있는 삶, 능동적인 삶의 중요성을 길게 이야기한다. 이로써 인드라는 두 번째 계시를 받게 된다. 인간 각자가 자기 자신의 길을 따라서 소명을 실현시키고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인드라는 깨닫는다.

 

- 인드라 신화의 결말부는 균형을 되찾고 있다. 즉 우주적 존재와 합일해보려고 혓되이 애쓴 나머지 자신의 역사적 상황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무를 채워나감으로써 정신 속에 대시간의 관점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준 교훈이다. 대부분의 원시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신화의 주기적 낭송에 의해서 획득되는 이와 같은 대시간으로의 열림은 형이상학적, 윤리적, 사회적인 일정한 질서의 무한한 연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질서는 역사에 대한 맹목적 숭배를 막아주는데, 신화적 시간의 관점은 역사적 시간의 어떤 편린일지라도 허망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 불교도에게도 시간은 지속적인 흐름(삼타나)으로 구성되는데, 시간의 유동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시간 속에서 표명되는 일체의 “형태”는 소멸하게 되어 있고, 존재론적으로 볼 때는 비실재이다.

 

- 복음서를 상기해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4)고 적혀 있다. "좁은 문"이라든가 면도날, 좁고 위험한 다리 등이 이 상징의 풍부함을 다 말해주지는 못한다. 또 다른 이미지들이 명백하게 출구가 없는 상황을 나타내준다. 통과의례적인 동화에서 주인공은 "밤과 낮이 만나는 곳”을 지나가야 하거나, 아무 문도 없는 벽에서 문을 찾아내야 하거나, 한순간만 잠깐 열리는 통로를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야 하거나, 혹은 계속 움직여대는 맷돌 위아래의 틈새를, 계속 부닥치는 두 바위 틈을, 괴물의 위아래 턱 사이를 통과해야만 한다. 이 신화적 이미지들은 궁극의 실재에 접근하기 위해서 대립물을 초월할 필요성, 인간 조건의 특징인 대극성을 소멸시킬 필요성을 표현한다.

 

- 결과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힌 상징이 두 개의 핵심적 사실을 표현하게 된다. 즉 한편으로는 우주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짜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몇몇 신들은 최종적으로 우주의 장대한 "짜임”을 이루게 되는 이 “실"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 굴과 조개의 주력에 대한 신앙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개념의 기원을 이루는 상징은 아마도 “원시적” 사고의 심층부에 속하는 것이었겠지만, 그 후에 “활성화”와 다양한 해석을 거쳤다. 굴과 조개는 농경의례와 혼인의례, 장례에, 또 의상 장식이나 장식적 모티브에 나타난다. 물론 이들의 주술적 -종교적 의미는 반감되거나 퇴화되기는 했어도 말이다. 몇몇 민족에게 조개는 아직도 장식적 모티브가 되면서도, 그 주술적 가치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조개껍질의 신성한 힘은 나선형을 본질적 요소로 하는 장식 모티브뿐만 아니라 조개껍질의 이미지에까지 전파된다. 간쑤 성에서는 "보패문”으로 장식된 마창기 유골단지가 발견되었다. ... 주목할 모티브는 이 모티브가 거의 유골단지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일상적 용도의 항아리에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 유명한 그노시스주의의 저서인 「토마스 행전 Actes de Thomas」에서 진주의 탐색은 인간의 타락과 그 구원이라는 영적인 드라마를 상징한다. 동방의 한 왕자가 흉악한 뱀이 지키고 있는 진주를 찾아 이집트에 도착한다. 이 진주를 손에 넣으려면 왕자는 수많은 통과의례적 시련을 겪어내야만 하는데, 이 일을 성취시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그노시스적 이미지인 왕 중의 왕, 자신의 부왕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이 문헌의 상징은 매우 복잡하다. 진주는 암흑세계에 떨어진 인간의 영혼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구세주” 그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간과 신주의 동일화는 마니교와 만다야교의 많은 문헌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리뷰자 주 : 도마서가 영지주의 저서였나...?? 2장에서 언급된 우주알, 코스믹에그와의 연계성은 없는지 찾아보고 싶다. 흉악한 뱀을 누르고 상승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왕의 도움을 얻는다는 부분은 HGA를 연상시킨다.)

 

- 엘레우시스와 몰러카스 제도의 세람에서는 원시시대의 처녀 코레 페르세포네와 하이누웰레의 신화적인 모험 담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신화는 비슷하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와 세람 문화의 차이는 엄청나다. 문화 형태학과 양식 철학은 특히 그리스와 몰러카스 제도에서 젊은 처녀의 이미지를 취한 특이한 형태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형성물로서의 이들 문화가 각각 독자적 양식으로 구성되어 상호 교환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해도, 이들의 문화를 이미지와 상징의 차원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원형의 영속성과 보편성이 궁극적으로 문화를 “구원”해주는 것이며, 양식의 역사나 형태론을 넘어서는 문화철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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