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칼 구스타브 융 / 정명진
출판 : 부글북스
출간 : 2019.06.25
읽는다는 행위도 숙련될 수 있는 것일까?
노화라는 기능 저하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노년에도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것이 가능하듯이- 반복이 주는 경험치라는 것이 있는 듯하다. 아직 한국어 이외의 문서를 읽는 속도는 여전히 지지부진하지만, 그나마 한국어 자료는 속도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생각했던 순서는 아니었지만 표지에 끌려 <꿈 해석>부터 읽었다. 엘리아데가 <이미지와 상징>에서 언급한 '단 한 명의 환자의 꿈을 몇 백 페이지에 걸쳐 분석하기도 하는' 책이 이 책이었다. 한 지적인 신사의 꿈을 약 1년 반에 걸쳐 분석해나가는데, 그중 후반부를 떼어 출간한 것이 <꿈 해석>이다. 몇 부분은 흥미로웠고 몇 부분은 지루했다. 융이 자신이 주장했던 이론들을 실제로 어떤 식으로 적용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했다.
15년간 분절적으로 이어진 세미나를 정리한 것이니만큼 집중도가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었고, 더 깊게 다뤄줬으면 하는 세부 사항들이 흘려 넘겨지기도 했다. 또한 약간씩의 모순도 등장하는데, 그런 점이 재미라면 재미였다. 이어서 읽는다면 <내면의 그림>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당분간은 다른 것부터 읽을 예정이다. '분리는 과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그러나 일련의 꿈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거기서 어떤 순환적인 움직임 또는 나선형의 움직임이 발견된다. 더욱이, 해석을 엉터리로 한다 하더라도 그 같은 사실이 그 다음 꿈들에서 확인되거나 바로잡아진다는 것을 알면 자신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 당신 안에 당신이 모르는 또 다른 당신이 있다. 이 또다른 당신은 꿈을 통해 당신에게 말을 건다. 당신의 꿈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당신의 꿈을 기록하며 나름대로 분석하는 일은 곧 당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연히,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고, 또 당신이 현실에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잠재력도 찾아낼 수 있다.
- 그것이 황도를 통과하는 태양의 뱀 같은 길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황도의 뱀은 곧 "내가 길이다."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뱀이며, 그래서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태양이며, 황도대의 별자리들, 즉 사도들은 1년의 열두 달이다.
- 사고는 사물들이 의미하는 바를, 감정은 사물들의 가치를, 감각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직관은 어떤 상황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그러나 근처의 고대 로마 정착촌을 발굴했을 때, 곰들에 둘러싸인 어느 켈트족 여신의 형상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뿐만 아니라 이슈타르, 아스타르테, 소아시아의 어머니 여신 마그나 마테르, 이집트의 신 이시스와도 관계가 있다. 그러면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 이전에 바빌론의 역사까지 닿는 시바인의 별자리 숭배와 관계가 있다. 꿈 해석의 기술을 안전하게 발휘하기 위해선 이런 종류의 지식이 필요하다. 또 이런 지식은 인간 정신이 보편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우리의 작은 마음들은 원형적인 패턴들을 재현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달은 자비로운 측면과 불길한 측면을 함께 갖고 있다 달은 병과 치료를 낳고, 또 마음의 광기와 치료를 낳는다. 그리고 달은 건강에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남녀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언어에서도 이런 이중성을 볼 수 있다. 달을 남녀 성별로 분류하는 것을 안다면 문헌학에서 꽤 깊은 공부를 성취했을 것이다. 과반의 경우에 달은 여성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예외도 아주 많다. 남성적인 달의 신은 특별히 지리적인 분포를 보인다.
- 원자들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물리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 보라. 교육 수준이 높았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으며, 물질에 관한 모든 사상이 순간에 용해되어 버렸다. 분명히, 어느 수준의 미소에 이르면 거기선 법칙이 완전히 사라진다. 인간의 경험은 나이가 겨우 3개월밖에 안된다. 인간 경험의 나이가 6개월이 될 때면, 돌이 떨어지지 않고 솟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우주의 근본적인 비합리성에 대한 인식은 아직 서양인의 세계관에 스며들지 않았다. 서양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물들은 합리적인 규칙에 따라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품고 있다.
- 무의식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착각이라는 점을, 그 모든 것은 위대한 강의 유희이며 그의 삶은 그 큰 강의 수면에 퍼지는 파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그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 띠들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무를 의미한다. 그것이 동양의 관점이다. 그런 관점 앞에서 인간의 중요성은 금방 녹아 버린다. 그는 자신이 전체 대양인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당연히 그는 작은 대양일 뿐이다. 한 알의 모래가 전체 사하라 사막이듯이 말이다.
- 그러면 그 다음 꿈은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마치 나 자신이 전체 문제를 상급의 권위자에게 넘긴 것처럼.
- 나선형 움직임은 삶의 완성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나선형 움직임을 통해서 전체 바탕을 두루 다 차지하게 되면, 아마 사람이 자신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동쪽 면에 있다면, 그 사람은 그쪽 면만 발달시키고 다른 면에서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현대인이 처하고 있는 심리적 상황이다.
- 만다라 댄스라는 것이 있다. 원운동과 공간의 위치 때문에 아름답다. 중심은 주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가운데에는 가끔 황금 그릇이 놓여 있으며, 거기서 불꽃이 올라오고 주위에 4개의 기둥이 서 있다. 운동 신경이 발달한 사람은 그 모티프를 바탕으로 매우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다.
- 슐레겔 박사의 다른 문제는 우리 시대에도 원형이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 하늘로 오르고 있는 불붙은 전차들에 의해 표현되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비행기일 수 있다.
- 그때 그가 자신의 생각과 환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 것이 상징이며, 그는 십자가와 뱀, 달의 원형을 이용했으며 이 경우엔 그것은 기호가 아니고 상징이다. 이 차이는 철학에는 늘 알려져 있었으나, 프로이트는 두 가지를 혼용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쓰는 상징이라는 단어는 정말로 무의미하다.
- 그런 것이 내가 이 꿈에 대해 말해야 하는 내용이다. 나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신비적 참여를 통한 상호 침투라는 현상 말이다. 당신이 그 이론을 즉시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 가설을 고려하지 않으면, 일부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 우리는 그런 생각을 싫어하며 최대한 깊이 억압하려 한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 안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우리의 뇌 회로에 우리 외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어느 누구도 우리의 방향이나 결정을 간섭할 수 없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열려 있는 문이 많이 있으며, 어떤 것이 들어와서 우리를 방해할 수 있다. 당신이 친밀한 관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때에도 그런 방해가 일어날 수 있다.
- 누군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외적 요인에 침투 당한다. 예를 들어, 호텔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옆방에 살고 있는 사람의 특이한 심리가 벽을 뚫고 그 사람의 꿈에 반영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어느 남자는 어떤 방에 자면서 살인과 자살 장면이 나오는 무서운 꿈을 꾸었는데, 알고 보니 그 방에서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주위 분위기에 침투당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 곳에서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전염될 수 있다. 어떤 정신적 감염은 놀랄 정도로 강하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싫어하며 최대한 깊이 억압하려 한다.
(리뷰자 주 : 싸이코메트리 개념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문단이었다.)
- 어떤 일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질 때, 사람은 결국엔 똑같은 패턴을 살게 되어 있다. 무의식적인 것은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 생활에서 이 신비적 참여가 의식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경우엔 결혼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이 의식적인 상태에 있을 때엔, 개인의 의지가 약간만 개입되어도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것들은 일곱 악마에 의해 수행된다.
(리뷰자 주 : 벗어날 수 없는 일곱 영향력이라면 7 대죄보다는 7 행성이 생각난다.)
- 그런 신비적 참여가 파괴될 경우에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아마 똑같은 것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같은 상황을 다시 창조할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평형 상태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면, 당신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당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 분석을 하다 보면 신비적 참여가 어느 한쪽에 의해서만 의식에서 동화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예는 새로운 전위를 창조하게 된다. 의식적이게 된 사람은 "이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어, 당신도 이리로 나와서 의식적인 존재가 되어야겠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둘 중 한 사람만 의식적인 존재 일지라도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 환자의 아내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녀도 언제나 분석 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그 상징을 신들을 강제하는 일종의 마법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신들을 적절한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우리는 신들이 오도록 하고 신들의 귀에 까지 닿고 신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고대엔 신이 응답할 수 있는 정확한 이름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심리적 사실을 정확히 표현한 진정한 상징은 무의식의 요소에 그런 특이한 효과를 발휘한다. 무의식적 요소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줄 때 나타나는 효과이다.
- 그리고 만약에 그런 간청이 불가능하다면, 상징을 갖는 것, 즉 무의식적 사실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상징의 진정한 본질은 언제나 어떤 무의식적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상징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의 무의식적 사실이며, 상징은 무의식적인 것인 한 제대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 그럼에도 우리는 더욱 신성하게 된다. 무서운 역설이지만, 당신은 심리학과 철학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심리학이다. 심리학에서 우리는 정말로 역설들 사이를 걷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신성할수록 땅에서 멀어진다. 그것을 바탕으로, 신이야말로 가장 비효과적인 존재라는 결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형이상학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진리일 수도 있고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 인간이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 신들이 성공하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 하는 문제는 한편에서 보면 인간의 시도이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 아시다시피, 이런 무의식적 내용물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나 완전한 깨달음은 절대로 한 번 만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 같은 인식 또는 깨달음은 언제나 파도처럼 온다. 중간에 멈춤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파도처럼 거듭해서 밀려오다 보면, 마침내 그것에 대한 치열한 깨달음이 성취된다.
- 그런데 이처럼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지 않는 현상이 매우 일반적이다. 사람들이 듣고 보도록 하는 데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아주 간단한 것도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려면 아마 스무 번은 반복해야 할 것이다.
- 당연히 사랑은 감정 유형만 가진 능력이 아니다. 여자의 감정, 아니 여자의 사고까지도 에로스의 도움이 있어야만 분리가 가능하다. 남자의 생각이 로고스의 도움을 받아야만 분리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이로운 힘들이 가장 높은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에로스나 로고스이다. 남자에게서 일어나는 최고 형태의 사고는 로고스와 일치하고, 여자에게서 일어나는 최고 형태의 감정은 에로스와 일치한다.
-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을 야기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지혜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당혹스럽다. 사람의 가장 깊은 어리석음이 곧 가장 큰 디딤돌이다. 끔찍할 만큼 어리석지 않고는 누구도 현명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사람은 에로스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죄를 통해 미덕을 배운다. ... 중대한 죄인만이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다. 죄인이 되지 않고는 성인이 되지 못한다.
- 자비로운 사람들은 사람들을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기 위해 분석이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콤플렉스가 없으면 에너지가 있을수 없다고 주장한다. 콤플렉스는 에너지의 초점이고 에너지의 어머니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콤플렉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분석의 과제가 될 수 없다. 콤플렉스는 열정 때문에 생긴다.
- 사고-감각 유형에게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며, 약점이며, 열등한 영역이고, 그 사람이 충격과 상처를 받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대조적인 본질을 가진 사고와 감정이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서로를 엎어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생각할 때엔 느끼지 않는 것이 더 좋고, 거꾸로 느낄 때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 로마에 지금 성 베드로 성당이 서 있는 자리에서, 아티스 숭배는 '타우로볼리움' (taurobolium)이라는 의식을 치렀다. 입교자를 땅 속의 구덩이에, 말하자면 솔 같은 곳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 다음에 그 구덩이 위에 창살을 얹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수소를 죽였다. 그러면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가 입교자 위로 흘렀다. 이어 입교자는 구멍에서 나와 씻긴 다음에 흰 옷으로 갈아입고 8일 동안 우유를 먹었다. 입교자가 아기이고 자신의 막내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교황(Pope)인 고위 공직자는 '파파스' (Papas)라 불렸다.
- 솥은 켈트 족의 상징이다. 그것은 연금술 장치에서 도가니에 해당하며, 자궁이고, 죄의 단지이다.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영지주의 보석들 중에 양쪽에 끈이 달린 자궁인 "죄의 단지"를 표현하고 있는 암포라가 있다. 그것은 변형의 단지이며, 예수에게 "인간이 어떻게 자기 어머니의 자궁으로 두 번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니고데모(Nicodemus)가 들어가지 않을 자궁이다. 그것은 포도주와 물을 섞는 용기인 크라테르였다.
- 마나의 원천을 표현하는 정확한 형태가 십자가라는 직관이 인간에게 있었던 것 같다. 플라톤(Plato)은 「티마이오스」 (Timaeus)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세상을 창조할 때 세상을 네 개로 나눴다가 다시 붙였으며, 그래서 4개의 이음매가 십자가 형태로 남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플라톤보다 앞섰던 인물인 피타고라스는 근본적인 숫자가 '테트락티스'(tetraktys), 즉 4라고 말한다. 이 숫자는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신비한 실체로 여겨졌다. 이집트에서는, 여덟 신으로 구성된 오그도아드(Ogdoad)가 최고로 신성한 신들의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곳에서 세상의 기원을 지켜본 것은 4마리의 원숭이와 4마리의 두꺼비였다. 떠오르는 태양인 호루스는 네 아들을 두었다. 생명의 원천인 4개의 강이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낙원 전설에서도 4를 발견한다.
- 그리스에 그것을 입증하는 B.C. 3세기의 증거가 있지만, 그 신은 또한 여성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물과 이슬, 비, 습기를 의미했다. 그 신은 신탁의 신이 고, 과일을 익게 하는 신이고, 전쟁에 유익한 신이고, 건강과 질병을 관장하는 치료의 신이었다. 카론이라는 곳에 달의 신을 숭배하던 신전과 그 신의 보호를 받던 의학 아카데미가 있었다. 달의 신의 역할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사후 영혼의 문"이라 불렸다. 이런 특성들은 남성적인 달의 신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달과 관련 있는 모든 사상의 특징이다. "달” (moon)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도 이 특성들 중 일부가 다양한 언어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 그런데 영어의 'mind'를 정확히 뜻하는 독일어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독일어로 '마음'을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 마치 사람들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이 행성들의 진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당혹스런 것은 점성술적 사실들과 심리학적 사실들 사이에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가 정말로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개인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을 추론할 수 있고, 어떤 시기로부터 사람의 특징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적 동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소 별의 위치와 일치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 그보다는 정신의 역동성은 시간의 한 현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더 낫다. 시간의 개념 속에서 그 두 가지가 함께 결합한다.
- 에너지를 설명하는 데엔 상반된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에너지는 상반된 것들이 작동하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어딜 가나 똑같은 온기가 있을 때, 말하자면 세상 전체가 평면 같은 것일 때, 그런 경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한다. 만약에 모든 대조가 다 씻겨나간다면, 만약에 세상에 화학적 긴장이 전혀 없다면, 거기엔 보다 높은 수준이 전혀 없고 전위가 전혀 없다. 그러면 에너지는 흩어지고, 우리는 독일인들이 "열죽음"(Wametod)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 말해 동일한 기온에서의 죽음을 직면하게 된다.
- 그렇다면 양과 음과 같은 두 개의 상반된 원리들은 에너지 개념에 피할 수 없는 전제이다.
- 그리스도는 기본적으로 치료자였다. 그리스도가 속했던 종파인 에세네파는 치료자들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 기독교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우리는 알지 못한다.
-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옛 신들은 죽어가고 있거나 죽었으며, 옛 종교들과 옛 신전들은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다.
- 시간과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설명이 다소 어려웠을 것 같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창조적인 에너지와 동일하다. 그리스의 아포리즘에 "창조가 있는 곳마다 시간이 있다."는 것이 있다. 크로노스는 빛과 창조와 시간의 신이었다. 또한 '원초적 온기'(primordial warmth)라는 스토아 철학의 개념은 사실상 시간과 동일하다. 별들의 충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 '헤이마르메네'(Heimarmene)는 원초적 온기, 원초적 창조력과 동일하다. 시간과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주장이 좀 낯설 것이라는 점을 나도 인정한다.
- 그 시절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별들이 바뀔 때, 신들도 바뀌었다. 여기서 양이 물고기로 변했으며, 신은 양으로 죽고 물고기로 태어났다. 태양이 황소자리에 있을 때, 신들은 수소의 뿔을 갖고 있었다. 태양이 양자리에 있는 동안에, 신들은 양의 뿔을 가졌다. 기독교가 물에서 세례를 치르는 것은 이 상징 표현과 관계있다. 교황은 지금도 어부의 반지를 끼고 있다. 교황의 반지는 물고기를 기적이라 할 만큼 많이 잡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보석이며, 모든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자궁으로 모으는 것을 상징한다.
- 물고기들은 황도대에서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이 물고기들은 서로 꼬리를 마주하고 누워 있으며, 꼬리와 꼬리는 이음매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중적인 배열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전설은 AD.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를 형제로 두었다는 사상이다. 춘분점이 첫 번째 물고기를 전부 통과했을 때, 그때가 AD. 900년이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 그래서 만약에 어떤 행성이 우리가 태어난 시점에 지났던 바로그 장소를 다시 지나치게 된다면, 아마 20년 뒤가 될 것인데, 그것이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낳는다. 점성가들은 여전히 행성들의 실제 위치를 고수하고 있지만, 우리는 오늘날 행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위치와 행성들이 하늘에서 실제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B.C.100년 이래로, 춘분점은 양자리 0도에 인위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천문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실제로 보면, 분점 세차로 인해 춘분점이 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로 이동했으며, 곧 물병자리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계산은 단순히 자의적이다. 오직 시간 하고만 관계가 있고, 별의 실제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시간을 다루는 또 다른 그리스 단어인 '아이온'(Aion)에 대해 논하고 싶다. 생명의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아이온'은 흥미로운 연결을 갖고 있다. 라틴어로 이와 동일한 단어는 'Aevum'이다. 영원을 의미하는 한편으로, 생명의 지속 또는 역사 속의 한 시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 그리고 '아이온'과 관련해서 페르시아의 'ZrvanAkarana'가 훗날 신 '아이온'이 되어 미트라 숭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다소 어렵다.'아이온'은 사자의 머리를 가진 신이라 불리며, 아이온의 조각상은 종종 지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미트라 숭배는 지하의 성격을 띠었으며, 그래서 모든 교회는 적어도 반은 지하에 있었으며, 원래 교회는 동굴에 있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지하가 아티스의 동굴 신전이었다는 설도 있다.) 조각상에서 아이온 신은 사자의 머리를 한인 간으로 묘사된다. 아이온 신의 몸통은 뱀에 감겨 있고, 뱀의 머리가 사람의 머리 위로 튀어나와 있다. 또 하나의 미트라 상징은 사자와 뱀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암포라이며, 종종 그 암포라에서 불꽃이 나온다. 사자는 7월이고 불 같이 더운 여름의 열기이며, 뱀은 땅의 어둠과 냉기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양과 음이다. 아이온은 상반된 것들의 결합을 이루는 신이고, 사물들이 함께 모이는 시간이다. 이젠 시간과 에너지와 심리 사이의 특이한 연결에 대해 충분히 논했다고 생각한다. 심도 있는 논의였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환자의 꿈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인간의 확장처럼 보일 것이고, 그러면 그 인간 자체는 더 이상 뚜렷한 형상이 아닐 것이며 그 인간은 시간 속에서 확장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현재 육체에, 그가 지금까지 가졌던 다른 모든 육체들이 더해질 것이다. 내가 어제 가졌던 육체와 그 전에 가졌던 육체들이, 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띠를, 연속적인 일련의 육체들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을 한 마리 뱀처럼 만들며, 시간은 한 마리 뱀과 같다. 4차원에서, 인간은 한 마리 벌레이며, 우리의 길이는 미터로 측정되지 않고 햇수로 측정된다.
- 그리스도는 자신의 등에 12개의 별자리를 지고 다니는 위대한 뱀으로 표현된다. 물론 그 별자리들은 황도대의 별자리들을 의미하고 또 동시에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황도대의 뱀이고, 열두 사도들은 월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인간을 뱀으로 보는 사상은 그다지 독특하지 않다.
- 뱀은 의사의 신의 원래 형태였다. 아이스쿨라피오스의 신전에 거대한 뱀이 한 마리 있었다. 3세기에, 이 거대한 짐승이 역병의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여러 세기 동안에 성역에 뱀이 있었다. 그것은 곧 뱀 숭배였다. 뱀이 감고 있는 지팡이는 의사의 상징이고 의술의 상징이다. 그것은 또한 마술사 헤르메스의 상징이었다. 아이스쿨라피오스 자신이 한 마리 뱀이었다는 사상이 있었다. 그래서 뱀은 치료의 개념을 전했다. 그리스도가 치료하는 존재였듯이. 구세주와 뱀은 서로 혼용되고 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렸으며, 그렇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영지주의 자들 은진 정으로 정신적인 신이 반의식적인 상태에서 비참하게 지내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보낸 한 마리 뱀이 그리스도였다고 말한다. 그 신이 사람들에게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구분하고 의식적인 존재가 되는 길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를 뱀으로 에덴동산에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특이한 사상이다. 우리가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 열반은 비존재 속의 존재 또는 존재 속의 비존재이며, 자기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위대한 한 존재'에 동화되는 역설적인 상태이다.
- 예를 들어, 동양에선 신성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겐 승원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다가 금욕자의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 그 사람은 거기서 나와서 결혼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그 사람은 승려이다. 단지 그가 승원에서 살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논리적이다. 그는 그 단계를 충분히 살지 않았으며, 그는 태워야 할 것을 다 태우지 않았다. 사람은 어떤 것을 태워야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이번 생만 아니라 다음 여러생에도 거기에 묶이게 된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노력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불교의 사상은 완벽하게 자연적인 사상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머지, 불교는 순수 이성의 종교라 불리고 있다.
- 고대 그리스 저자들의 작품을 여러 번 읽어본 사람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읽느냐에 따라 같은 작품이 완전히 다른 인상을 준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고전 그리스 비극들을 학창 시절에 읽고 나서 20년 뒤에 다시 읽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며 받은 인상은 작품이 대단히 원시적이었다는 점이다.
- 그 전의 꿈들에서 그가 그런 결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꿈 자체를 근거로 하면,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기억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는 이런 온갖 문제들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 인간의 삶이 열등할 때 의식적인 의지가 방해를 받을 때, 그때 무의식을 통한, 강력한 사실을 통한 신의 개입이 나타난다. 당연히 사람은 도덕적 범주들을 전부 무시해야 한다. 신은 반드시 선하고 정신적이라는 사상은 단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편견일 뿐이다. 우리는 신이 그렇기를 바라고, 선하고 정신적인 것이 최고일 것이라고 바라지만, 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원초적인 종교적 현상에 다시 닿기 위해, 인간은 그 같은 기능에 전혀 편견이 없는 상태로,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사람이 종교의 본질에 관한 모든 편견을 포기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어떠한 편견이라도 남아 있는 한, 복종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 우리의 의식은 당연히 제한적이며, 우리는 세상 중에서 작은 한 부분만을 의식할 뿐이다. 우리의 시선은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만 닿을 뿐이고, 우리의 기억도 불충분하고, 우리의 지각도 불충분하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우리는 앞을 보지 못하는 두더지 같다. 우리의 적응에 아주 중요한데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온갖 감각 지각에 대해 생각해 보라. 나는 그 점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기억하고 있다.
-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어?" 예수는 어쨌든 외딴곳에 있었고, 그런 환경이 특히 지적인 소년의 내면에 엄청 난야 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가 악마와 치른 첫 싸움은 그 자신의 권력 악마, 즉 세속적인 야망이었다. 그는 그 야망을 부정할 수 있을 만큼 위대했다. 따라서 그는 정신적 위대함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학교나 수도원에서 사색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세속을 떠난 종파인 '테라페우타이' (Therapeutae)의 학교로 갔다. 그들은 선생이고 치료자였다.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다소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꿈 해석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요세푸스(Tinus 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인들의 역사에 그런 예가 담겨있다.
-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미리암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판디라라는 이집트 군인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Jesu ben Pandira" (판디라의 아들 예수) 불렸다.
- 한 가지 예만 제시하자면, 복음서 텍스트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원래의 텍스트에는 그 표현이 이렇게 되어 있다. "둘이 함께 모일 때 그들이 신 없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만 있을 때 내가 그와 함께 한다." 여기서 당신은 교회가 한 행위를 확인할 수 있다.
-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그 대목을 보면 에크하르트는 아주 신성한 상태의 신은 신이 아니라고, 신은 인간의 영혼을 통해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없으면 신은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신성한 깨달음의 상태는 정말로 무수히 많은 거울에 비춰보는 그런 상태이며, 거울에 자신을 많이 비춰보는 사람일수록 본질로부터 제거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아주 탁월한 관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세상 일들에 대한 보편적 통찰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은 어깨를 움츠리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낫겠어. 그러면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터이니."라고 말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모를 것이며, 그 사람은 그냥 보편적일 것이다.
- 나는 당신의 시도가 신성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유는 인간의 시도들을 연구할 경우에 그것들이 그 사람의 의식적 결정에 따른 것이거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런 시도를 반드시 해야 하며, 그것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가 언제나 생각해 왔던 것일 수도 있다. '제발 그런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이렇게 말한 그 사람이 아마 나중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그건 내가 원했던 거야!' 그러나 그 사람은 몇 년 동안 꽁무니를 빼왔다. 그는 아마 그것이 최악의 바보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일들에 노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그의 안에 있는 탁월한 어떤 요소가, 그의 안에 있는 신성한 것이 엄청난 힘으로 그의 손을 강제하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시도의 희생자이다.
- 그것이 그의 끝이었다. 자신에겐 두려움을 추구하는 것이 정직한 시도라는 것을 발견한 한 남자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그런 삶을 평가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에겐 그것이 경이롭거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나는 단지 그 남자가 자신이 두려워했던 일을 어떤 식으로 추구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에게 그것이 옳은 길이었는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 만약에 내가 그 남자를 보았다면, 만약에 그가 분석을 받으러 왔더라면, 그것이 그의 삶인 것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나를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주 묻는다. "내가 이것 또는 저것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당신은 진정으로 생각합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몰라요.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 그 사상은 홀로 즐기고, 홀로 돌고, 끊임없이 순환하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현실은 여느 때나 똑같이 이어지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높은 곳에서 그 경이로운 사상과 동일시하고 있는 남자는 현실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어.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달라.' 그럼에도 엄연한 사실들을 고려할 경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이다. 만약에 그런 남자가 훌륭한 음의 힘을 갖고 있다면, 다시 말해 열등한 실천력 대신에 탁월한 실천력을 갖고 있다면, 그 남자는 당장에 자신이 생각만 할 뿐이지 실천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자신에겐 그런 식으로 생각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당신의 의식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당신은 거기에 적응해야 하고, 당신은 실제로 그렇게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지치거나 기분이 좋지 않게 되면, 옛날의 화가 쉽게 올라오고 그러면 갑자기 당신이 그것을 더 이상 다루지 못하게 된다. 당신이 그것을 다루는 법을 전혀 배우지 않은 상태나 똑같이 된다. 당신의 의식이 다소 약해지자마자, 당신 속의 열등한 인간이 올라온다. 약간만 피곤해져도, 당신이 가진 아름다운 기능들이, 당신이 배운 것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때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아이에게 조상 귀신이 붙었다거나 아이의 핵심이 조상의 정신이라는 사상은 아이의 심리는 정말로 조상의 정신들, 즉 집단 무의식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아이가 자신의 심리를 발달시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 사랑은 하나의 감정이지만, 에로스의 원리가 반드시 사랑인 것은 아니다. 에로스는 미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에로스는 관계의 원리이며, 에로스는 여자의 심리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로고스가 남자의 심리에서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그러나 로고스는 당연히 사고뿐만 아니라 감정과도 관계가 있다. 사람은 로고스의 영향 아래에서나 에로스의 영향 아래서나 똑같이 감각과 직관을 키울 수 있다. 기능들은 로고스와 에로스에 침투당할 뿐만 아니라 이 근본 원리들과 서로 관계도 맺는다.
- 그것은 직관적인 오해일 뿐이며, 그 사람은 육체의 감각과, 사실들의 원리인 감각의 원리를 혼동하고 있다. 라틴 민족에 속하는 나라들을 보면 감각이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언어 자체에 표현되고 있으며, 감정과 감각이 절대로 혼동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어로 오면 감정과 감각은 끔찍할 정도로 혼동된다.
- 로고스는 관계성의 원리인 에로스와 정반대로 구별의 원리이다. 에로스는 사물들을 서로 함께 모으고 사물들 사이에 역동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반면에, 로고스가 초래하는 관계는 유추이거나 논리적 결론이다. 로고스의 관계는 감정적인 활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전형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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