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미르치아 엘리아데 / 강응섭
출판 : 숲
출간 : 2006. 04. 30
추천을 하기도, 하지 않기도 애매하다.
이 책은 기존의 발표작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해서 거의 대부분이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이미지와 상징>에서 다룬 내용들과 중복되는데, 해당 저서에서 한 두 문장으로 언급만 되었던 내용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기도 하므로 함께 읽으면 좋은 점이 있겠다.
다만, 원문을 확인하지 못해 조심스러우나 전반적인 문장과 주석에서 번역자의 신학자로서의 성향이 묻어나므로 결을 조금 다르게 잡고 읽는 것을 조심스레 권한다. 역자는 이 책이 엘리아데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적합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과 속>에 비하면 수월한 면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나 <이미지와 상징>을 먼저 읽고 읽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저서들에서 원형과 회귀, 본질적인 어떤 것에의 추구를 다루었다면 이번 책의 핵심 테마는 '진정한 죽음'이라는 느낌이었다. 모든 생과 시간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며, 그 죽음은 순환을 위한 필수 요소이며 또다른 탄생이다. 저자는 모든 입문 의례 - 가입 의례가 죽음을 상징하는 기간이나 고행을 거친다는 점을 주목하며, 풍요와 생산의 어머니의 이미지의 이면에 존재하는 죽음과 재생에 대해 바라보려 했다.
총 9장으로 이루어진 구성인데, 각 장의 배열의 순서가 영향을 준 것인지 마지막 문단들의 정리 문장들이 그런 뉘앙스를 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중심, 원형, 회귀, 변형, 상승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를 가리키고 있고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이자 죽음 그 자체이다'가 반복되는 인상이었다.
인과의 개념은 시간의 개념을 필수적으로 요한다. 인과란 선행되는 것이 후행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간극이 사실은 선형이 아니라면 어떨까?
많은 이들이 어렴풋이 어떤 감정, 어떤 상태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순간의 이끌림으로 선택하곤 한다.
'아닐 수도 있으니까', 혹은 '지금은 지금이니까.'
하지만 그가 의식했건 아니건 그는 이미 그 이후의 결과까지도 함께 선택-허용-하고 있다.
행위의 결과를 동시에 지각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결과에 대한 정확한 예측-혹은 선지-와 개인의 활동성은 비례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이 많은 이들이 행동력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바꿔 말해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표현이라 본다.
호기심만이 유일한 동력은 아니지만 상당히 강한 동력인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연구와 위대한 도전들이 존재해왔다. '알 기 위해서'.
만약 결과를 알면서도 행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있다면, 아마도 쾌와 불쾌일 것이다.
행동의 결과가 나에게 쾌이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욕망이다.
앞서 가정한 '결과를 동시에 지각하는' 경우, 사실 이는 욕망하는 동시에 성취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 사이에 간극이 존재해야 하는걸까? 달성의 과정을 알기 위해서인가, 욕망을 알기 위해서인가? 이건 나중에 더 다루어보자.)
'될 것을 알기에' 행하는 것과 '될 때까지' 행하는 것은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그래서 목표를 이룬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 '성공'인가?
'결과적으로'라는 말의 어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결과'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본 것인가?
그 과정과 달성의 모든 영역은 순수하게 '원하던 대로'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안다는 말은 그것이 나의 전 생애에 걸쳐 미칠 나비효과까지 일시에 지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순간 알게 되는 세상은 일종의 꿈이다. 모든 순간이 고정되어 있지 못하다. 생각하는 순간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현실을 살고 있는 자로서, 매 순간을 충실하게 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감각에만 사로잡혀 표류하지 않기 위해- 매순간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장기 목표의 중간 지점들에 단기 목표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의 달성과는 별개로 내가 감각하고 느껴나가는 보너스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가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보물은 내가 떠나온 집 안 구석, 냄비 뒤에 있었듯이. 하지만 그걸 알기 위헤서는 반드시 떠났어야만 했듯이.
결론 : 사람은 결국 죽을 걸 알면서도 산다. 처음과 끝이 정해져있다면 그 사이를 어떻게 채우는가는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며, 알기 위해서는 멀어져야 한다.
- 현대인이 경험하는 지도, 교육, 교훈적인 교양 등에서 고대 사회 구성원들이 경험한 신화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진실이다. 왜냐하면 신화들은 변형되지 않고 내려오는 규범과 전통의 총체이고, 전승되는 신화들(회복되는 신성한 시간, 가입 의례)은 어느 정도는 현대 사회의 공식적인 '교육'과 대등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화와 교육의 기능은 사회에 의해 인정되고, 유럽 교육에 의해 제안된 모범적인 모델의 기원이 된다. 고대 사회에서 신화학과 역사 사이에 간극은 없었다. 역사적인 인물들은 그들의 원형인 신들과 신화의 영웅들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한다.
-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가 여러 저서에서 잘 밝힌 것처럼 신화학적인 주제들을 얼마든지 많다. 또 서정시가 신화 속에서 다시 취해 확장시킨 주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시는 언어를 재창조하기 위해, 달리 말해 일상 언어를 파괴하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시적 창작은 언어학적인 창작처럼 언어 속에 농축된 역사와 시간의 폐지를 내포하며, 태초의 낙원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나아간다. 시적 창작에서는 우연적인 창조도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시간의 길이를 기억하거나 시간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간단하게 설명해보면, 괴로움이란 카르마에 의해, 즉 속사에 의해 세계 속에 뿌리내리고 무한히 연장된다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윤회를, 즉 존재에게 괴로움으로의 영원 회귀를 강요하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이다. 카르마의 법칙으로부터의 해방과 마야의 베일을 찢는 것은 치료와 대등하다.
- '마야의 베일'이라는 것이 세계와 모든 인간 경험의 존재론적인 비현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제시된 형식이라는 것만을 기억하자. 우리는 그것을 존재론적이라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세계도, 인간의 경험도 절대적 존재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삼단논법의 추상적인 의미 안에서 죽게 될 운명이라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무자비하게 삼켜짐으로써 죽고,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 이러한 행동은 때때로 집단적이다. 중국에서 구황신(환국, 밝나라의 아홉 왕, 숯불 위로 걷는 구황신 축제가 있음)을 섬기는 이들은 불위로 통과하는 의식을 행한다. 의례는 '불길에서 산책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사원 앞에서 열린다. 의례를 주관하는 이가 먼저 잉걸불 위로 걸어가면, 더 젊은 그의 동료들이 따르고, 그다음에 관중들까지도 그 뒤를 따른다. 벌겋게 달구어진 돌 위를 집단적으로 통과하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잘 연구된 예는 피지 군도에서 발견된다. 어떤 가족들은 이 능력'을 소유하고 세습적인 방법으로 자손들에게 전해 준다. 의례 동안에 수많은 비가입자들 그리고 심지어 외국인들도 불타는 숯덩이 위로 무사히 걸어간다. 이러한 '신념'은 정말 놀라운 것이며, 이러한 의례 상징을 존중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 이 철학적 노력의 예기치 않은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일종의 '목적론적 본능'이라고 이해된 무의식(prakriti)이 영혼의 행위를 모방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 무의식이란 무의식의 활동을 통해 미리 보여준 영혼의 존재방식이라고 이해된다.
- 따라서 성(聖)은 마찬가지로 어떤 힘, 어떤 능력이라고 표명된다. 성을 드러낸 행위를 지칭할 때 히에로파니 (hiérophanie)란 용어를 제안한다. 이 용어가 편리한 것은 어떤 보충적인 정의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어원에 담긴 내용 그 자체로서 설명 가능한데 이 용어 자체가 성스러운 어떤 것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가장 진화된 것까지의 종교의 역사는 상당수의 성현과 성스러운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성현-돌이나 나무 등 어떤 대상 안에 성이 드러나는 것-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이 성육신하는 성현에 이르기까지 연속성 문제가 해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역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면만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각각의 종교에서 비의적인 행동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연적'이고 '비종교적'인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대상들, 이런 대상들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발견한다.
- 우리는 성스러운 것이 돌 안에 드러날 때 어떤 점에서 제한되는지를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면서 제한되고 역사화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커다란 신비인 동시에 두려운 신비다. 이것은 성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도, 중국어로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삶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제한되는 것을 수락했다. 그가 신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전능자의 모습으로의 신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성스러운 존재가 어떤 돌이나 나무 안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전지전능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제한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수많은 성현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지만 성현들이 동일한 구조와 변증법을 따른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초기 인류'에게서 모든 천공신들은 지혜, 지식, '예지'를 외연으로 나타내는 속성과 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천공신은 모든 것을 보고, 따라서 모든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 질서의 지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능이다. 폴리네시아 인들의 지고신 아이호(Iho)는 영원하고 전지하다. 크고 강하고, 만물의 기원이며, 신성하고 불가사의 한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더 발전된 종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혜, 전지, 예지는 천공신이 갖는 속성일 뿐 아니라 권능이다.
- 몇 가지 범례를 통해 볼 때 이른바 '초기의' 종교들도, 다신교로 지칭 한 종교들도 전지전능한 창조자 신을 모르지 않았던 듯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최상의 신들이 종교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개혁에 엄청난 종교적인 생명력을 가한 아후라 마즈 다신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바루나도 제쳐놓고 지금은 '초기의' 지고신들만을 다뤄보자.
- 그들은 더 이상 제의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먼 곳에 있는 신들처럼 여겨지고, 따라서 수동적이고 무관심하고 진실로 텅빈 신이다. '초기 인류'는 지고존재자들이 가진 본래의 힘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신이 세계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한 신화를 읽어보면 얼마 후 이 최상의 신들과 창조자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 은둔하기 위해 땅을 버리고 만다. 그들에게 종속된 아들, 전령, 다른 신을 그들이 있었던 땅에 남겨두고 그들로 하여금 창조를 계속하게 하고 창조된 것을 온전케 하고 관리하도록 했다.
- 이 현상은 보편적이다. 우리는 「종교형태론」에서 어떻게 천공의 옛 신들이 더 역동적인 신들에 의해,. 태양신 또는 천둥신과 다산의 신에 의해 도처에서 쫓겨났는지를 증명하고 연구했다. 인도-아리안의 옛 천공신인 디아우스(Dyaus)는 베다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아주 옛날에 그 자리는 베루나와 파자냐, 폭풍의 신이 장악했다. 이 후자의 신은 베다의 신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 된 인드라(고대 인도의 영웅신, 신의 왕) 앞에서 소멸된다. 왜냐하면 인드라는 모든 힘과 풍부함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우주적이고 생물학적인 에너지와 생명의 충만을 구현한다.
- 특히 한 명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띈다. 말하자면, 가장 영리한 우두머리 포샤이얀키아가 신의 조건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신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태양이 물 위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태초에는 물아래에 나타났다. 분명히 밤의 태양을 상징하는 이 위대한 현인은 대지의 네 '동굴-자궁'을 가로지른 후에 온전히 혼자의 빛으로부터 솟아오른다. 그는 땅의 표면에 다다른다. 땅의 표면은 습하고 불안정한 거대한 섬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하의 인간을 해방하도록 간청하기 위해 '아버지-태양'에게로 향한다. 이렇게 태양은 창조의 과정을 반복하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질서의 창조가 문제 된다. 태양은 영리하고, 자유롭고 힘 있는 존재들을 생산하기를 원한다. 그는 다시 어머니-대지의 거품으로 스며들고, 이 거품으로부터 두 쌍둥이를 만든다. 태양은 그들에게 모든 종류의 주술적인 힘을 부여하고 선조들과 인간들의 주인들에게 그들을 바친다. 그다음에 그들은 사다리를 가져왔고,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들은 두 번째 동굴까지 기어오른다. 도중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떨어진다. 이들은 영원히 땅 속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괴물이 되어 지진과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리뷰자 주 : 짐줌과 클리포트, 네 개의 동굴로 구성된 세계와 4계를 생각해보자.)
- 그 후 두 쌍둥이들은 그들을 '발견할 수 있는 최후의 동굴 또는 분만의 자궁'이라 부르는 마지막 동굴인 네 번째로 데려갔다. 그곳의 빛은 새벽빛 같았고, 사람들은 세계를 감지하고, 각각 그 자신의 속성에 맞게 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들처럼 사람들을 돌 보면서 두 쌍둥이는 그들을 교육해간다. 무엇보다도 쌍둥이는 그들에게 '아버지-태양을 찾도록 가르친다. 태양은 그들에게 지혜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 어쨌든 야금술과 조산술 사이의 은밀한 조화가 존재한다. 고광물을 추출하는 가마에서 사용하는 제물(광석)은 조산 술에서 사용하는 제물(태아)과 유사하다. 가마는 자궁과 비슷하다. 비록 광물이 땅 속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고 해도, 비록 태아의 씨가 자궁 밖에서 존재한다고 해도, '태아-광물'이 성장할 곳은 바로 가마와 자궁 그곳이다.
- 고대 종교에서 신성한 결혼 신화가 부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번째 가설을 살펴보자. 즉, 지고존재자들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 하늘인 동시에 땅인 양성구유였다. 이것은 신성한 결혼 신화가 창조될 필요가 없었음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태초의 신성한 존재 자체가 신성한 결혼 신화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가설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고대인의 지고신들이 양성구유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나 신의 양성 구유 현상은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공존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신적 존재 안에서의 두 성의 융합을 의미한다. 양성구유는 전체를 표현하기 위한, 즉 역의 합일을 표현하기 위한 고대적이고 범우주적인 형식이다. 양성구유는 충만과 성적인 자급자족 이외에도 제약받지 않는 태초의 완벽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성구유가 지고존재자에 한정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주의 거인들이나 인간이 정리한 신화의 선조들 역시 양성구유이다. 예를 들어 아담은 양성구유로 여겨졌다. 「베레쉬트 라바」 에는 아담은 "오른쪽은 남자이고 왼쪽은 여자였으나, 신이 절반으로 쪼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신화에 따른 조상은 새로운 존재양식의 시작을 상징하며, 모든 시작은 존재의 충만함 속에 이루어진다.
- 중요한 것은 결국 어머니-대지는 불(태양과 동등한 것)을 낳으면서 죽고, 그의 육체로부터 식물과 대지의 다산성의 신들이 태어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특히 이 마지막 동기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성한 결혼 신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신들의 육체 자체로부터 식용 식물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 죽은 자의 여신으로서 어머니-대지의 무서운 특성은 제물의 우주적 필요성에 의해 설명된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보장하면서 다른 존재양식으로 통과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 '어머니-대지'의 모든 속성들, 그것과 관련된 모든 신화과 중요한 의례를 하나하나 거론한다는 것은 우리가 계획했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범위를 제한하고, 불가피하게 어머니-대지의 어떤 측면들은 거론하지 않겠다. 우리는 죽음의 여신으로서의 어머니-대지의 밤 그리고 장례에 관한 측면은 강조하지 않았다. 우리 는 공격적이고, 소름끼치고, 두려운 측면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이고 두려운 측면들에서도 한 가지 사실만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땅이 죽음의 여신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땅이 모든 창조의 지칠 줄 모르는 근원인 우주적인 자궁이라고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리뷰자 주 : 어머니의 창조와 생산은 동시에 죽음과 회수다.)
- 지원자는 신생아가 아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질서를 드러내는 신비를 아는 그리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다. 훈련에 임하는 동안 그는 성스러운 비밀을 배운다. 그 비밀이란 신들과 세계의 기원에 관계되는 신화들, 신들의 진짜 이름, 의식용 악기에 관한 진실과 의례에 사용되는 칼 등이다. 가입 의례는 영적인 성숙과 동등하며, 우리는 인류의 모든 종교사에서 항상 이 주제를 만난다. 가입자. 즉 신비를 경험한 자는 현자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카라데리족의 가입 의례는 바가짐비리 형제가 행한 전형적인 행동을 재생산한 것일 뿐이다.
- 할례와 절개 같은 특수한 수행뿐 아니라 가입 의례 때의 절단(이빨 뽑기, 손가락 절단 등)을 제외한 또 다른 외적인 표시들(문신 새기기, 박피 등)은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다. 불가사의한 재탄생의 상징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때부터 지원자들은 그들의 진정한 이름이 될 다른 이름을 받는다.
- 일반적으로, 그들은 가시덤불 속에서 새로운 언어 혹은 가입자들만이 접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언어를 배운다. 살펴본 것처럼 가입 의례와 함께 모든 것이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두 번째 탄생의 상징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 가입 의례 때 절단하는 행동 그 자체는 죽음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절단은 달의 신들과 관계 있다. 왜냐하면 달은 사흘 밤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주기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말해 죽기 때문이다. 달은 죽음이 모든 신체적 재생의 최초 조건임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 이 상징은 수많은 우주 발생론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간을 실 잣듯이 뽑는 것은 달이며 인간의 현존을 '잣는' 것도 달이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들은 실을 잣는 거미다. 이 행위는 한편으로 세계의 창조 또는 재창조, 시간과 운명의 실잣기고, 다른 한편으로 밤의 일, 여성의 일, 빛과 멀리 떨어져서 비밀스럽게. 거의 숨어서 행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우리는 불가사의한 현실의 두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연계성을 알 수 있다.
- 모든 가입 의례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과거를 청산하고 완전히 거듭난 삶을 시작하기 위해 삶에 새로운 용어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입 의례의 죽음은 되풀이되며 결코 끝이 아니다. 어떤 의례나 신화도 가입 의례에서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지 않는다. 또 다른 존재방식을 향한 통과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의 죽음을 만날 뿐이다. 재생하기 위해,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시험인 것이다. 뱃속으로 회귀하는 상징은 항상 우주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자. 다시 창조될 수 있기 위해, 다시 말해 재생될 수 있기 위해 새로운 가입자와 함께 우주의 밤 속에 상징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세계 전체로 돌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 융은 이 모든 것을 집단 무의식과 접촉함으로 생기는 회복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의 분야에 머무르기 위해, 우리는 왜 원시인들에게 가입 의례가 항상 신성한 지식과 지혜의 계시와 관계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 아직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태어남, 죽음, 재생은 똑같은 비의의 세 순간이다. 그리고 고대인의 모든 영적 노력은 이 순간들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 세 순간의 하나에 멈출 수 없고, 죽음이나 발생에 정착할 수 없다. 운동과 재생은 항상 계속된다. 우리는 무엇인가(아이, 집. 영적 소명)를 잘 만든다고 확신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우주 발생론을 갱생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가입 의례에서 우주 발생론의 가치를 늘 만나고 있다.
(리뷰자 주 : 엔트로피, 천상의 삼각형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 고대 시대부터 가치가 부여된 죽음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에까지 연장되어 영적인 면에서 재생의 수단이 되고, 특히 그리스도교에 파급되어 가입 의례의 시나리오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것은 모든 새로운 종교적 경험에 의해 다시 포착되고, 되살아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은 근본적인 비의다. 이제 이 비의의 궁극적인 결과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만일 이미 이승에서 죽음을 경험했다면, 만일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셸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죽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이승에서, 땅 위에서 , 땅에 속하지 않는 성스럽고도 신성한 것에 참여하는 어떤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그는 불멸의 시작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점점 더불멸에 흥미를 가진다. 불멸은 죽음 이후의 생존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창조되는 상황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준비하고이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지 않음, 불멸은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지향하는, 계속적으로 죽으면서 그리고 부활하면서 정복하려고 애쓰는 제한된 상황이면서도 이상적인 상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세상 속에 '꽝' 하고 터진 최초의 존재가 시간 속에 살게 된 이후. 그 존재는 태초 이후의 시간에 이르기 위해 그리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저편 세계의 역설적인 순간과 만나기 위해,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어떤 순간에서 출발해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스스로 드러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는 우주 창조와 일치되는 출발점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지나간 삶을 재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이해하고 모든 죄를'태우는' 것, 즉 무지의 압류 아래 놓여진 그리고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축적된 행위들의 총체를 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의 시작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무시간(Non-Temps)에 합류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태초의 인간 존재가 타락을 경험한 세속의 시간, 그 이전의 영원한 시간에 합류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세속적인 시간의 어떤 순간으로부터 출발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침내 영원이라는 무시간에 이르게 된다. 시간 안에서 인간 조건을 초월하고, 존재들의 바퀴 안에서 추락하기 이전의 제약받지 않는 상태를 회복하는 것은 바로 무시간이라는 지점에서다.
- 유럽인은 인간이 생리학과 유전에 의해서뿐 아니라 역사와 특히 그 자신의 인생에 의해 계속해서 제약을 받아왔다는 것을 이제 막 발견했다. 항상 역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을 말이다. 그 인도 철학자는 이런 '상황을 인도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런 상황이란 마야 안에서의 존재는 허망하다는 것이다. 이 존재는 시간과 역사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에 허망한 존재다. 이런 이유로 인도인은 절대로 역사에 철학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 인간의 경험처럼 물리적 세계도 보편적인 생성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변천에 의해 그리고 세속적인 일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물리적 세계는 시간에 의해 착각을 일으키고 창조되고 폐기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나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신기루 또는 환상이 아니다. 물리적 세상 안에서 생명과 영혼에 대한 나의 경험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시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인도인의 사고에서 볼 때 내일 혹은 지금으로부터 백만 년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존재의 단계에서 판단된 세계와 그 세속적인 일의 모든 경험은 착각을 일으킨다. 마야가 인도인의 사고 속에서 무와 비존재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다.
- 그런데 인도인에게서 우주에 대한 환영은 절대적 존재에 대한 연구에 의해 진행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즉, 마야 개념은 브라흐만 없이는 의미가 없다. 이 말을 서양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사람이 조건에 대한 상황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비조건의 상황을 향해 관점을 돌리고 거기서 해방을 찾을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마야는 우주의 놀이, 결국 허망한 놀이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마야의 베일을 찢었을 때 절대적인 존재 앞에, 궁극적인 현실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불안은 우리의 덧없음과 근본적인 비현실성에 대한 자각에 의해 유발된다.
-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당신을 두렵게 만드는 이죽음은 당신이 갖고 있는 환상의 죽음이고 무지의 죽음일 뿐이다."죽음은 거듭남으로, 진정한 정체성의 자각과 존재방식의 자각으로. 제약 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방식의 자각으로 이어진다. 그 인도 철학자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가진 사실적 역사의식이 당신을 두렵게 만드는데 그 의식 속에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왜냐하면 지고존재자를 발견하고 체험하기 위해 역사에서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미 말한 바대로 허망한 세계는 영속적인 변천 속에 놓여 있지만 그래도 신의 피조물이다. 세계는 또한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세계가 신의 '놀이'라는 것을 발견한 후에만 세계의 신성을 발견한다. 소멸하기 쉽고 헛된 세계가 궁극적인 현실을 대표한다는 부조리한 신념 때문에 무지 그리고 불안과 고통은 증폭된다. 우리는 시간에 관한 유사한 변증법을 재발견한다. <마이트리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브라흐만, 즉 절대적 존재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두 극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무지는 브라흐만의 부정적인 측면, 즉 시간만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행동'이란 힌두교도가 말하듯이 시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그리고 역사에 의해 삼켜졌는데, 그것은 우리가 시간 속에 살아서가 아니라 시간의 현재를 믿기 때문이다.
- 하인리히 짐머는 "이렇듯 진정한 보물, 우리의 가난함과 시험을 종식시킬 보물은 결코 멀리에 있지 않으며, 그것을 찾으러 먼 나라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집 가장 은밀한 곳. 즉 자신의 존재 안에 파묻혀 있다"고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파헤칠 줄 알기만 하면 냄비 뒤에, 우리 실존을 작동시키는 생명과 열정의 중심부 뒤에. 우리의 마음 뒤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탐색을 인도하는 이 내적인 목소리의 의미가 먼지역, 낯선 나라, 새로운 땅으로의 경건한 여행 이후에만 해독 가능하다는 것은 기이하고 불변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신비스러운 내적 여행의 의미를 드러내는 자는 그 스스로 다른 믿음을 갖고 다른 민족에 속하는 이방인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덧붙였다.
- 이 사실을 기억하자. 싯디는 성공적으로 수행된 고행과 불가사의한 기술에 잘 나타난다. 만일 불교에서처럼 요가에서 해방이 인간 조건의 실제적인 초월과 대등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한계가 없는 '조건'의 법(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수립된 세속적이고 '자연적인' 존재로 '죽어야만' 하고 '제약받지 않는' 존재로, 즉 완전히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과 부활 경험을 통한 존재론적 변동에 대한 태고적이며 보편적 인상징을 깨닫게 된다.
- 낙원에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우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불을 통과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불에 의해 정화된 사람만이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깨끗이 하려면 우선 신비적인 결합을 해야 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망설임 없이 낙원에 갈 수 있도록 불과 같은 것으로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
(리뷰자 주 : 불의 세례는 어디에 기원하는가?)
- 이러한 영적인 훈련은 '시간으로부터 탈피'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샤먼은 신체적인 죽음을 내부의 시각으로 예상할 뿐 아니라 삶의 시간을 초월한 근원이라 부를 수 있는 뼈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죽을 때 그들의 '생명'은 해골 안에 집중된다. 거기로부터 그들은 영원히 회귀하는 계속되는 주기에 따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계속되는 주기란 뼈 안에 농축된 생명의 정수, 즉 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연결된 바로 그 상태의 시간과 기간을 의미한다.
(리뷰자 주 : 갑자기 DNA가 연상된다.)
- 붓다. 파탄잘리 등은 이러한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위험뿐 아니라 그 힘을 소유하는 자가 그 힘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 우려한다. 왜냐하면 요가 수행자는 영적인 작업을 추구하고 종말의 해방을 얻는 대신 마법의 시험에 굴복하고 이 '놀라운 힘'을 향유하는 것에 그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샤먼의 영매 상태가 '성스러움'을 보여주는 최상의 증거로서 보편적으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원시인의 눈에는 샤먼의 영매 상태가 샤먼의 태초 상황에 비교하면 실추된 것같이 보여진다. 전통에 따르면 샤먼들은 실제로 하늘로 여행했다고 한다. 그들은 구름 위로 실제로 날았던 시대에 대한 회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황홀경과 같이 오직 영적으로만 실현되는 불가사의한 경험은 샤먼이 육체만으로 모든 기적들(마법 비행, 하늘로의 승천, 지옥으로 내려감 등)을 실현했던 예전의 상황보다 하위의 것으로 간주된다.
- 우리는 신화학과 민속학에 나오는 '마법 비행'이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고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민속학의 요소 가운데 하나로 마법 비행을 꼽는 데 동의한다.
- 영적인 삶, 특히 지혜의 힘과 관계 있는 상징과 그것의 의미는 '비상과 날개'의 이미지와 동일선상에 있다. 비상은 비밀스러운 것 또는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지혜라는 의미를 갖는다.「리그베다」에 따르면 새들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지혜' (manas)다. 그리고 「판카밤빔사 브라흐마나」에 따르면 "이해하는 자는 날개를 가진다." 비상이 갖는 고대적이고 모범적인 이미지는 새로운 자각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우리는 곧 가치를 다시 부여하는 과정으로 돌아올 것이다.
- 이 주제에 관해서 신앙과 의 례의 체계를 연구한 「샤머니즘」을 참고할 수 있다. '붓다의 7보'는 미트라(페르시아의 태양신)에 대한 비의 속에서 입문자가 오르는 일곱 개의 계단 또는 제의를 위해 자작나무에 만들어놓은 눈금(7,9 또는 12단의 하늘을 상징하는 7,9, 12 눈금)의 도움으로 하늘에 오르는 시베리아 샤먼들의 승천과 유사하다.
(리뷰자 주 : 12가 추가되었다.)
- 탄생 신화는 고통스럽고 더럽혀진 이 세상을 붓다가 어떻게 초월하는지를 보여준다. 브라흐만과 샤먼의 의례들은 신들의 세계에 참여하거나 죽음 이후의 최고의 조건을 보장 받거나 지고신의 도움을 얻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여준다. 미트라에 대한 비의 속에서 입문자는 최고천까지 오르고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호 행성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일곱 하늘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 모든 '모티프'의 구조는 동일하다. '일곱 하늘을 통과하면서 그리고 우주 꼭대기와 극에 다다르면서 세계를 초월한다.'
- 그러므로 태초의 상황, 즉 시간 속에 아직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순수한 상황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과거로의 회귀'가 문제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 세계의 가장 '오래된' 점에 다다르는 것은 기간을 없애버리는 것, 시간의 흔적을 폐기해버리는 것과 동등하다.
- 모든 현현은 힘의 현현, 힘의 표명이다. 우리가 멜라네시아어로 마나(mana)라고 이름 붙여진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의 관념 속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제법 놀랄 만한 일이었다. 마나의 경험을 검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종교적 경험이라는 가설을 세운 것은 다소 조급하고,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채 일반화된 논리였다. 그러나 종교사에서 마나는 충분히 중요한 개념이므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성에 대한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본래적인 경험들을 마나가 회복한다고 믿으므로, 이 문제는 충분히 강조해야 할 것이다.
- 입증되지 못한 많은 가설들이 주는 교훈은 항상 신중해야 된다는 것이다.
- 하나의 현상을 관찰하여 얻게 된 관점은 이 현상 자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과학 이론은 현상을 창조하는 것은 척도라고 단언한다. 이 척도는 말하자면 관점이다. 앙리 푸엥카레는 자문했다. "코끼리를 현미경으로밖에 연구하지 않았던 자연주의자가 이 동물을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그럼에도 그들을 경배하는 사람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초기 인류' 역시-은 모든 대여신들, 모든 태양신들이나 땅의 신들 그리고 모든 조상들과 악마들이 그들을 구할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실제로 비관적인 순간에는 안정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보장할 수 없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들과 여신들은 생명을 재생산하고 증가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평범한' 시대에 한해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우주의 리듬을 감탄할 만큼 훌륭하게 지배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유대인에게는 '역사적' 위기)에 인간사회나 우주를 구원할 수 없다.
-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유대인에게서 진정한 야훼 종교와 우상으로서의 바알과 아스다롯 안에 구현된 우주의 신성화의 경험 사이에서 알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질서에 속한 종교적 권능 사이의 알력이다.
(리뷰자 주 : high와 low에 대입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 만일 우리가 태초의 종교사의 관점에서 이 과정을 상상해본다면, 권능과 지고존재자를 연합하면서 지고존재자를 다시 역동적이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쉬바는 순수한 영, 절대적 의식의 상징이면서 샤크티와의 결합을 통해 '활발하게' 되려고 노력한다. 그의 이런 노력은 그가 '무능하게' 되었을 때에도 지고존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에 존경과 숭배를 받게 된다.
(리뷰자 주 : 엔트로피의 개념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겠다.)
- 주니족의 한 신화는 시간의 시작에, 태초의 때에 '전쟁의 쌍둥이'가 호수를 통해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그 밑에서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고, 오로지 '수증기와 냄새'만을 먹는 '습기가 많고 불안정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딱딱한 물질을 먹는 쌍둥이를 보고 겁에 질렸다. 그곳에서는 이런 음식들은 먹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모험 이후에 쌍둥이는 그들과 함께 지하에 사는 이 사람들을 땅의 표면으로 데리고 나왔다. 현재의 인류는 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생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이 잘려나갈 때까지 '바람과 냄새' 만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렇게 신생아는 처음에는 우유와 아주 가벼운 음식만을 섭취한다. 그리고 여전히 아주 커다란 어려움의 대가를 치른다.
- 우리는 이 신화가 어떤 의미에서 개체 발생을 계통 발생에 연결시키고 있는지를 본다. 태아와 신생아의 조건은 땅의 품에 안겨 있는 인류 종족의 신화적 존재와 유사하다. 각각의 아이는 태어나기 전의 조건 속에서 태초의 인류의 상황으로 회복한다.
- 이집트의 대중적 문헌에서 '땅바닥에 앉는다'는 표현은 '해산하다' 또는 '해산'을 의미했다.
-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인도 콘드족의 메리아(meriah)와 멕시코 원주민 아스텍족이 제물로 바치는 여성이다.
여기서 이 제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잠깐 살펴보자. 메리아는 공동체에 의해 매수된 자발적인 희생자였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그녀를 살려두었고, 그녀는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제물로 바치기 며칠 전 메리아는 신성화된다. 즉, 사람들이 제물로 바질 신성과 동일시된다. 군중은 그 둘레에서 춤을 추었고 그녀를 숭배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땅에게 간청했다. "오! 여신이여, 당신에게 이 제물을 바치나이다. 우리에게 풍부한 수확과 풍성한 계절과 좋은 건강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사람들은 희생자를 향해 돌아서면서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값을 치르고 그대를 산 것이지, 강제로 납치해온 것이 아니오. 지금 우리는 우리의 관습에 따라 그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니, 어떤 죗값도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리뷰자 주 : 카르마적 선 긋기에 대해 더 살펴보고 싶다.)
-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종교적 생활이 유일한 '원리'에 의해 박탈당했던 적은 드물었고, 그것이 유일한 신 또는 유일한 여신의 숭배 속에서 소모되어버렸던 적도 드물다는 것이다. 우리 가이미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유일한 형태나 유일한 구조로 환원될 수 있는 '순수한', '단순한' 종교를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다. 하늘이나 대지에 대한 제의가 우선시되었다고 하여 다른 제의와 다른 상징과의 공존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형태를 연구하면서, 서로 다른 종교 형태가 때때로 상호 양립될 수 없이 나타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의 종교 형태는 지지하고 어느 한쪽의 형태는 거부하는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대지의 상징과 숭배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간과하기 쉬운 종교 형태라도 그 속에 나타나는 공통된 신앙을 발견하고 그것을 연구해야 됨을 알게 되었다. "나는 땅과 빛나는 천공의 아들이다"라고 오르페우스의 서판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선언은 수많은 종교에서 진실이다.
-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제자들에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이 육체를 떠나면서,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그의 사지가 완비된 또 다른 육체를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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