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작자미상] 가윈 경과 녹색기사

일루젼 2021. 8. 2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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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작자미상 / 이동일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 :  2010.02.26


<그린나이트>의 영화 리뷰부터 작성하길 잘했다.

책을 중반 정도까지 읽다가 영화를 보고 왔는데, 순서를 바꾼 덕에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https://illusionofmoon.tistory.com/631

 

[데이빗 로워리]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정말 매력적인 영화다. 영화관에 간 게 거의 1년 반 만인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어서 내려가기 전에 관람했다. <그린 나이트>는 14세기 후반 영문학 시 <가윈 경과 녹색 기사>

illusionofmoon.tistory.com

 


 

영화와 연결한 이야기부터 잠시 하고 넘어가자.

버틸락이 말하는 모건 르 페이는 대상이 명확하지는 않으므로, 나는 여전히 아내라고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가 모건이라고 생각했지만, 검은 머리의 가웨인의 어머니와 흰 머리의 늙은 여인은 '눈을 가렸다'는 공통점으로 암시되는 자매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은 마법적인 언행을 하므로, 굳이 영화 안에서 누가 모건 르 페이인가를 정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노력일 듯 하다.

 

나는 영화 안에서의 그린 나이트가 보였던 흐뭇함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원작을 읽고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가윈 경과 녹색기사>에서의 가윈은 완성된 기사이며, 그럼에도 영화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녹색기사가 그의 용기와 담대함에 내심 기뻐했다는 표현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한 반전으로 결국 '인간의 한계'와 '운명적 패배'를 그리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어째서 <그린나이트>에서 다른 가웨인과 다른 결말을 설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중세 도상학에 따르면 여우는 '세계'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런 여우를 시종의 대체물로 설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대사와 행동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영화 리뷰를 쓰며 생각했던 점들을 다시 되짚어 보려면 아무래도 영화를 한 번 더 봐야할 것 같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알게 된 <가윈 경과 녹색기사>. 

사실 번역된 책이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있다는 걸 알고 정말 놀랐다. 두운 시를, 그것도 현대 영어가 아닌 중세 영어로 쓰여진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막상 읽고 나니 절로 감사와 찬사가 터져나왔다. 부디 많이 번역해주소서. 

 

당대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볼 때 기독교적 영향이 강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펜타클과 미덕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종교적 시각과는 사뭇 다른 점이 느껴진다. 

 

<가윈 경과 녹색기사>는 특정 단어로 은근하게 표현하는 멋도, 잘 짜여진 구조와 재치있는 대화도 매력적이다. 원문으로 시가적인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게 읽었다.

 


- HONI SOYT QUI MAL PENSE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지닌 이여, 부끄러워할지어다)

 

-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중세 로망스인 <가윈 경과 녹색기사>는 작품에 담긴 중요한 상징, 주제와 소재의 절묘한 조화, 두운이라는 독특한 운율의 효과 등으로 인해 로망스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14세기 후반에 쓰인 것으로 보이며, 누가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지은이가 중세 귀족 사회의 예법, 건축, 사냥, 종교 절기, 향연, 축제, 의상, 무구, 궁중 화술, 크리스마스 게임 등에 정통하며 이전의 고전문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비록 귀족 신분은 아닐지라도 중세사회의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 식자층의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작품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16~17세기)의 고문서 수집가였던 코튼 경의 장서에 속한 수서본에서 발견되었다. 코튼 경이 요크셔의 한 도서관에서 이 수서본을 수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1839년에 처음으로 중세 철자가 아닌 당시 철자로 편집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 그리고 그들은 가윈에게 방패를 내보였는데
그 방패는 화려한 붉은 바탕에 순백색의 오각형 별 모양으로 도안된 것이었다.
그가 견식대로 그것을 훌쩍 들어 올려 그의 목에 둘러매자 
그것은 기사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비록 시간이 지체되긴 하지만 왜 오각별 모양이
이 고귀한 기사에게 속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진중하게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옛날에 솔로몬 왕이 진실의 징표로써 고안한 형상인데
그 모양은 다섯 개의 꼭짓점을 가지고 있고
각 선이 서로 겹쳐지고 맞물려서 어느 곳에서도 끝없이 연결되니
영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영원한 매듭'이라 불렀다.
그런즉 이 징표는 이 기사와 그의 흠잡을 데 없는 무구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유인즉 가윈이 다섯 가지 점에서 다섯 가지 방식으로
한결같이 진실한 것이 마치 정제된 순금과 같았으니
모든 불순한 흠으로부터 벗어나 기사도적인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방패와 갑옷 위에 걸친 겉옷에 새로 채색한 
오각 별표를 품고 있었으니 
자신의 말에 가장 진실된 자이자 
예법에 있어서도 가장 공손한 자였다.

 

-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나누기를, 
"운 좋게도 우리는 고귀한 궁중 화술에 나오는 
기사도 예의범절의 품위 있는 표현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소. 
여기 이렇게 훌륭한 혈통의 완벽한 기사를 모셨으니
이제 우리는 좋은 화술을 통해 어떠한 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을 통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을 것이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자비로운 은총을 베푸사 모든 이들이
기쁨으로써 그분의 탄생을 노래하며 앉아 있는 이러한 때에 
가윈 경과 같은 그러한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군요.
이 기사가 우리들에게 진정한 고상한 예법이 무엇인지 알려줄 터인즉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는 누구든지 사랑의 화술에 대한 
기교를 배울 수 있으리라 확신하오.
 

-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가윈과 그 아름다운 성주의 부인이 
동석해서 전혀 저속함이 스미지 않은 채로 세련되고 예의 바르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으니 
진실로 그들의 여흥은 그 어떤 귀인들의 화려한 오락보다도 
훌륭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 "한 가지 더 약속을 하기로 합시다. 
내가 숲에서 얻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의 소유가 될 것이니,
그대가 이곳에서 얻는 것은 무엇이든 내 것과 교환하는 거요.
그러니 훌륭한 친구여, 우리가 교환하는 것으로 이득을 얻든 손해를 상관없이
무조건 이러한 방식으로 교환하기로 진심으로 맹세하시오."
가윈이 말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동의합니다.   
당신께서 그러한 게임을 원하신다면 저도 진심으로 만족합니다."
"우리의 약속을 봉인할 술을 들여오라. 우리의 서약이 이루어졌도다."

 

- "진심으로 말하건대, 그대가 멋진 거래를 성사시켜서 좋은 물건을 얻는다면, 그대는 행운아요."

 

- "진실로, 내 쪽에서 한 모든 약속은 선의와 함께 신속히 이행될 것이오."

 

- 그대에게 사실대로 말하리라, 
버틸락 더 오우트드저- 이곳에서는 나를 이렇게 부르오. 

내 집에 기거하는 모건 르 페이는 힘과 
계략으로 많은 마술을 배웠고, 
그대의 고향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아는 바와 같이 
한때 그분이 그 뛰어난 마법사와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분은 머린의 신비한 마법을 습득했소. 
그분이 바로 여신 모건이라오. 
아무리 지고한 자긍심을 지닌 자라도
그분 앞에서는 완전히 기세가 꺾이게 되는 것이오.

 

- 중세의 동물 도상학에 의하면 사슴은 육 flesh을, 멧돼지는 악 devil을, 여우는 세상 world을 뜻하게 되는데, 세 번째 날 이상주의를 뒤로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녹색 띠를 숨긴 가윈 경의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판단은, 세 번째 날 사냥터에서 자신의 민첩함으로 덫을 잘 피해 가다 결국은 함정에 빠져버리는 세상의 상징인 여우의 행적과 일치하게 된다.

    

 

더보기

- 왕비 귀느비어의 눈을 회색이라고 표현된 것은, 전통적인 중세 로망스에 등장하는 미인의 눈빛이 회색이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 표현된 회색 눈이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푸른 눈빛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푸른 눈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고 원색의 푸른 눈은 극히 드물다.

(리뷰자 주 : 그러나 어원적으로 접근했을 때 회색과 푸른색이 같은 단어로 표기된다.)

 

- 아그레베인: 가윈의 형제. 이들 둘은 롯 오프 오크니 왕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안나이다. 안나는 아서왕의 어머니와 첫 번째 남편 틴타젤 공작 사이에서 난 딸이며 아서왕의 이복누이이다. 아서왕의 오른쪽에 자리한 볼드윈은 성직자 중 최고의 지위인 주교였다. 그 옆에 앉은 이웨인은 작품 후반에 중요한 인물로 밝혀지는 아서왕의 또 다른 이복누이인 모건 르 페이 Morgan le Fay의 아들이다.

(리뷰자 주 : 어머니가 같으면 이부누이가 맞는 표현이나, 흔히 이복이라 한다.)

 

- 중추의 보름달 the Michaelmas moon: 성 미카엘을 기리는 축제로서 9월 29일. 이날은 모든 빚과 채무 혹은 대여한 것을 돌려주는 날이기도 하다. 가윈에게 있어서 이날은 바로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면서 그녀는 붉은 빛을 띠는 금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반지를 주었는데, 
반지의 가운데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알맹이가 그의 눈앞에서 
눈부신 태양처럼 밝은 빛을 발했다.
그것은 누구라도 분명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보물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확신할 수 있을 바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신속히 말했다.
"아름다운 부인이시여, 맹세하건대, 저는 지금 그 어떤 선물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부인께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사오며, 또한
부인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리뷰자 주 : 붉은 빛을 띠는 금이라면 별의 아이의 '적금, 또는 현자가 떠오른다. 또한 결합의 이미지가 있다.) 

  

- 기사님, 제가 당신을 이곳으로 모셔왔고, 
이제 기사님이 그토록 간절히 물어 찾아왔던 
그 유명한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사님을 잘 알고, 
모든 사람 중 너무나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진실로 기사님께 말씀드리건대, 
제 충고를 따라 행하시는 것이 기사님께 훨씬 좋을 것입니다.

......

그러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기사님이 말안장에 몸을 얹고 그곳에 들어간다면, 
확신하건대, 던져버릴 목숨이 스무 개가 있다 한들, 
그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 "맹세코, 슬퍼하거나 울지 않으리. 
나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것이며 
내 자신을 그에게 온전히 바치리라!"

 

- "아, 주여! 이곳이 바로 녹색 예배당이란 말인가? 
이곳은 악마 따위가 새벽 첫 예배에 주문을 외우기에 합당한 곳이구나!"

      

- "그대는 가윈 경이 아니오. 
가윈 경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용사의 무리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훌륭한 기사로 여겨지건만, 
어떤 상해도 입기 전에,
지금 그대는 두려운 나머지 몸을 움찔하고 있지 않은가.
그 기사의 그런 비겁함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소.
그대가 나를 도끼로 내려쳤을 때
나는 겁에 질려 움찔하지도 않았고,
아서왕의 거처에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소.
머리가 발밑에 떨어져 나갔을 때조차도,
나는 전혀 움찔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대는 
어떤 상해도 입기 전에 마음속으로 겁을 먹고 있구려.

일이 이러하니 내가 더 나은 자로 인정받은 것은 당연지사일 거요."
그러자 가윈이 말했다.
"내가 한 번은 움찔했지만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이오. 
비록 내 머리가 돌 위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오."

 

- ㅡ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지금 느낀 행복의 절반만큼도 그는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ㅡ

 

- 녹색기사는 무구를 갖추고 일체의 두려움도 없이 담대한 표정을 지으며 

그곳에 당당히 서 있는 가윈을 발견하고,
 그 모습에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 처음에 내가 슬쩍 치는 척 위협하며 
그대에게 응당한 대가인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은 것은 
우리가 첫째 날 밤에 행한 합의 때문에 그런 것이오. 
그대는 신의를 다해서 약속을 지켰고,
선한 사람의 도리대로, 얻은 것을 모두 주었소. 
두 번째에도 치는 척만 했던 것은, 그다음 날을 생각해보면 
내 아름다운 아내에게 키스했듯이, 
나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소. 
이런 이유로 나는 그대에게 두 차례에 걸쳐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치는 시늉만 했던 것이오. 
진정한 기사는 자신이 빚진 것을 갚는 법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치 않소. 
그런데 세 번째 날 그대가 그 점에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내 일격을 맞게 된 것이오. 

그대가 걸치고 있는 잘 짜인 그 띠는 바로 내 것이오 
확신하건대 내 아내가 그대에게 준 것이오. 그래서 잘 알고 있소.
그대가 키스한 것과 그대가 행동한 것,
아내가 그대에게 구애를 한 것까지 나는 모두 알고 있소: 

그 모든 것은 내 착안이었소.

 

- 바로 내가 저지른 과실의 징표로서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서요. 
즉, 내가 명예에 사로잡혀 말을 달릴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내 자신에게 

사악한 육신의 허약함과 결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또한 죄의 오점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오.

 

- 일 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두 번에 걸쳐 '목 베기 게임'이 전개되는데, 이 사이에 가윈 경은 '유혹'이라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목 베기 게임'과 '유혹'은 별개의 소재로 간주되지만 '자아성찰'이라는 대주제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구도는 끝과 시작이 분명하지 않은 채 일정한 무늬를 형성하는 켈트인들의 얽힘 무늬 interwoven pattern를 연상케 하며 동시에 작품 속에 언급된 솔로몬 왕의 오각별표를 상기시킨다. 또한 이러한 복합적인 구도는 작품 혹은 각각의 소재가 지닌 표면적 의미와 얽혀 궁극적으로 작품에서 노리는 '자아성찰'이라는 내면의 의미를 형성한다. 실타래같이 얽혀 있는 '얽힘 구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말로 작품의 이해를 돕는 첩경이라고 간주된다.

 

- 작품의 핵심 소재로 간주되는 '목 베기 게임'은 전형적인 아서왕 로망스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잉글랜드가 아닌 아일랜드에서 그 출처를 찾아볼 수 있다. 가윈 경과 녹색기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목베기 게임'과 유사한 또 다른 '목 베기 게임'이 8~9세기에 씌어진 아일랜드 서사시 <플래드 브리크랜드: 브리크리우의 향연 Fled Bricrend: Bricriu's Feast>에서 나타난다. 아일랜드의 전설적 영웅인 쿠흐크레인 Cuchulain은 '공포의 아들'이라 불리는 우아스 맥 이모메인 Uath mac Imomain과 게임을 벌인다. 먼저 쿠흐크레인이 우아스의 머리를 절단하고 약속에 따라 다음날 우아스가 쿠흐크레인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다. 우아스는 세 번에 걸쳐 쿠흐크레인의 머리를 겨냥하지만 그의 머리를 절단하지 않고 쿠흐크레인을 게임의 승자로 인정한다. 이 서사시 속의 우아스는 거칠고 난폭한 야만인이다. '야만인'의 뜻을 지닌 아일랜드어 바흐라흐들셉 Bachlachdlsep은 <가윈 경과 녹색기사>에서 가윈 경과 게임을 벌인 성주의 이름 버틸락 Bertilak과 같은 어원으로서 발음 및 철자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가윈 경과 녹색기사>에 등장하는 녹색기사는 양면성을 지닌다. 거인을 연상시키는 우람한 체격, 긴 머리와 턱수염, 전신에서 반사되는 눈부신 녹색 그리고 소름 끼치는 도끼를 든 녹색기사의 모습은 일부 민담이나 설화 혹은 로망스에 등장하는 숲 속의 야만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 녹색기사는 다른 한 손에 평화의 상징인 서양 호랑가시나무 sprig of holy를 지니고 있으며, 균형 잡힌 완벽한 몸매와 함께 문명사회의 세련된 복장을 갖추고 있다. 아서왕의 궁궐에서 그가 보여준 화술과 태도 역시 궁중예법에 따른 정중함을 반영하는가 하면 동시에 야만성과 무례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양면성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파생되는 갈등구도-어느 한편의 도덕적 가치관만을 적용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목 베기 게임'은 아서왕과 그의 명성을 다룬 12세기-13세기의 프랑스 궁정 로망스에서도 발견된다.

 

- 가윈 경의 방패에 새겨진 오각 별표는 '솔로몬의 문장 Solomon' s Seal'이라고도 불리며, 이교도 문화권에서는 '건강' 혹은 '완벽'의 상징으로서 자주 인용된다. 다섯 각과 다섯 측면으로 이루어진 이 별표는 솔로몬의 지혜를 상징하며 가윈 경이 열망하는 이상을 나타낸다. 이 별표의 각 선은 서로 간의 중복을 피하면서 단절되지 않고 잘 연결되어 균형과 통합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동시에 시작과 끝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종종 '끝이 없는 매듭 endless knot'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다섯 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와 성모 마리아의 다섯 기쁨, 그리고 기사도의 다섯 덕목을 상징한다. 작품에서 보이는 기사도의 다섯 덕목은 관대함(magnanimity), 신의(loyalty), 순결(clannes: freedom from lust), 예의범절(courtesy and consideration for others), 연민(Christian compassion and devotion to duty)으로서 이들은 도덕률의 최종 목표인 진실(true: truth)의 구현을 위해 서로 결합돼 있다. 오각 별표의 별개 각이 전체의 균형을 위해 존재하듯이, 각각의 덕목은 개별적인 의미를 견지하면서 상호 유기적인 연합을 통해 최종 가치관인 '진실'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한 각이 손상되면 조화롭고 완벽한 별표의 형상을 이루지 못하듯이, 다섯 덕목 중 한 가지 덕목이 그 기준점에 이르지 못하면 완벽한 도덕성에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혹'의 장면에서 가윈 경이 '순결'의 덕목은 완수하지만 녹색띠를 숨김으로써 성주와의 '신의'를 저버리게 되어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남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오각 별표를 둘러싼 다섯 가지 덕목은 모든 여정을 끝낸 가윈 경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 하지만 가윈경이 진정으로 염려하는 것은, 성적 유혹의 결과로 초래될 부인에 대한 결례이기보다는, 성주와 자신 사이의 '신의'와 '순결'이 손상될 것을 더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명예 보존을 위해 부인에 대한 배려를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회적 화술이 가윈 경의 이중성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으나 가윈 경이 처한 상황-성주 부인의 유혹으로 자신의 명예가 손상을 입게 되는 처지-을 고려한다면, 성 밖의 사슴이 덫을 피해 달아나듯이 가윈 경의 지혜로운 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윈 경의 숨은 의도를 파악이라도 한 듯 성주 부인은 정중하게 몸을 굽혀 가윈 경에게 작별의 키스를 건넨다. 결과적으로 가윈 경은 키스를 주는 것이 아니고 받게 되는데(말하자면 얻게 되는데), 이는 자신과 성주 사이에 이루어지는 ''획득물 교환 게임"을 성사시키기 위한 필수 요소로 간주된다. 키스를 받는 가윈 경의 수동석 태도는 작품 구성상의 절묘한 연결고리인 것이다.

 

- '대산 세계문학총서'를 펴내며 

근대문학 100년을 넘어 새로운 세기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 땅의 '세계문학'은 아직 너무도 초라하다. 몇몇 의미있었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나태하고 편협한 지적 풍토와 빈곤한 번역 소개 여건 및 출판 역량으로 인해, 늘 읽어온 '간판' 작품들이 쓸데 없이 중간되거나 천박한 '상업주의적' 작품들만이 신간되는 등, 세계문학의 수용이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분명한 자각과 사명감이 절실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세계문학의 수용 문제는, 그 올바른 이해와 향유 없이, 다시 말해 세계문학과의 참다운 교류 없이 한국문학의 세계 시민화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화적 시야 및 터전의 확대와 그 질적 성숙에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이것은, 후미에 갇힌 우리의 좁은 인식론적 전망의 틀을 깨고 세계 전체를 통찰하는 눈으로 진정한 '문화적 이종 교배'의 토양을 가꾸는 작업이며, 그럼으로써 인간 그 자체를 더 깊게 탐색하기 위해 '미로의 실타래'를 풀며 존재의 심연으로 침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을 둘러볼 때, 그 실천을 위한 인문학적 토대는 어느 정도 갖추어진 듯이 보인다. 다양한 언어권의 다양한 영역에서 문학 전공자들이 고루 등장하여 굳은 전통이나 헛된 유행에 기대지 않고 나름의 가치 있는 작가와 작품을 파고들고 있으며, 독자들 또한 진부한 도식을 벗어나 풍요로운 문학적 체험을 원하고 있다. 새롭게 변화한 한국어의 질감 속에서 그 체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요청 역시 크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어쩌면 물적 토대뿐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우리를 안타깝게 해왔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산문화재단의 과감한 지원 사업과 문학과 지성사의 신뢰성 높은 출간을 통해 그 현실화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우리 문화계의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문학적 지성에 주어진 이 과제가 중실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모든 성실을 기울일 것이다. 

'대산 세계문학총서' 기획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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