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장용민] 부치하난의 우물

일루젼 2021. 10. 13.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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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용민
출판 : 재담미디어
출간 : 2021.08.05 


 

장용민의 이번 신작을 두고 그가 로맨스물로의 변신을 꾀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궁극의 아이>도 <불로의 인형>도 사실은 일종의 로맨스였음을 떠올려보면, 그는 어떤 면에서는 늘 한결같은 작가다. 

 

그의 작품들에는 거의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만큼 바르고 선한 남성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투사된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미스테리와 얽힌 거대 조직과 (야쿠자보다는 삼합회를 선호하는 듯하다) 환생과 관련된 설화 역시 세 작품의 공통점이다. 그에 반해 여주인공들은 등장하지 않거나 (귀신나방) 상대적으로 비밀의 열쇠이면서도 보호받는 입장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여주인공의 주체적인 면을 강조하려 했다고 본다.  

 

(그의 이상적인 남성 캐릭터가 남성과 여성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이는데에 반해 여성 캐릭터의 경우는 여성성이 확연히 강조된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작가를 투영했다고 생각한다.)

 

부치하난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 이야기로만 한 권을 채워주었다면 조금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저자가 다소 일그러진 현실과 전설을 대비시킨 것에는 '실재하는 전설'과 '이상으로서의 전설'을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등장인물 중 하나의 입을 빌어 전설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고 표현하는 장면을 넣었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전설대로 현실을 완성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아래 또다른 하늘이 보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읽으면 절망적이고 바스러질 것 같은 현실이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라기엔 꽤나 음울해서, 그런 꿈이라도 꿔야 살아갈 수 있다는 반어법 같기도 하고.)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장용민의 남성 캐릭터들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아마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아가페적인 가치에 가깝다. 그외 대다수의 인물들은 희노애락의 감정보다는 이해득실-욕망에 충실한 면을 보이는데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의 한 단면이다. 흔히들 '감정적인 선택'을 한다고들 하지만 한꺼풀 아래를 살펴보면 욕망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 않느냐는 작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

 

저자는 이와 같은 시각을 벗어나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의 조금은 서늘한 시선으로 삶을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래를 좋아하는 편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늘을 나는 고래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실존하는 생물로서보다는 가공된 이미지로서지만, 그래도 꽤 강한 '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소설은 세부적인 설정이 모두 맥거핀이더라도 '고래의 후손'이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강렬하게 취향이었다. 

아직도 장용민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뭐냐고 묻는다면 <궁극의 아이>라고 답하겠지만, 가장 취향인 소설이 뭐냐고 묻는다면 <부치하난의 우물> 중 전설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에서 고래 편에 대해 읽은 내용이 하루 이틀 사이에 연결된 느낌이라 조금 더 강렬하게 느낀 것 같다. 

 

즐거웠다.  

 


   

 

- "아주 먼 옛날 이 사막은 바다였대요. 거대한 고래들이 지배하는 바다. 그들이 다스리던 바다는 평화로웠대요. 그래서 모든 동물이 신보다 고래를 따랐대요. 질투와 허영으로 가득 찬 신과는 달리 고래는 공평하고 현명했거든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신은 어느 날 바다를 없애버리고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막으로 만들었대요. 덕분에 동물들은 고래 곁을 떠나 먼 바다로 사라졌죠. 사막에 버려진 고래는 팔다리가 생기고 인간이 되었대요. 그리고 사막을 떠돌면서 물을 찾기 시작했대요. 마치 고향을 그리듯 물을 찾아 헤맸대요. 그들이 바로 부란족이에요. 시간이 지나자 부란족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대요. 제아무리 메마른 곳에서도 물을 찾아내는 능력이었죠. 그들의 피는 본능적으로 물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을 끌어낼 수 있었대요. 그들은 그 능력을 이용해 사막을 돌아다니며 사물에서 물을 뽑아낼 수 있었대요. 심지어 사막의 바위에서도..." 

 

- "부란족은 고래의 후손이에요." 
"고래?" 사막에서 평생을 보낸 부치하난은 고래를 알지 못했다.
"바다에서 사는 동물이에요. 몸은 산만큼이나 크고 한 번 물을 들이켜면 일 년은 버틸 수 있을 만큼 엄청나대요. 그리고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대요. 심지어 신의 비밀마저도. 백 년도 넘게 사는데 고래의 눈을 본 사람은 정신을 잃게 된대요. 너무나 깊고 신비로워서." 

 

- "이 세상에 만질 수 없는 건 절대 믿어선 안 된다. 내 눈으로 보지 않은 건 절대 믿어선 안된다. 왜 그런지 알아? 그딴 건 팔자 좋은 새끼들이 만들어낸 헛소리니까. 사랑, 꿈, 희망. 그딴 건 개나 줘버려. 그러니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전설이니 사랑이니 헛소리하지 마. 알았어?"

 

- "왜? 내가 목걸이를 찾아서? 만약 다른 사람이 찾았으면? 그럼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러자 누리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별의 개수를 알고 있는 수학자처럼.
"목걸이 때문이 아니야."

"그럼 뭣 때문인데?"

"널 만나려고 목걸이를 찾은 거야." 

 

- 이것이 전설의 숨겨진 이야기다.

 

 

 

더보기
얼레지 꽃 : Erythronium japonicum (네이버 윤기승) / Erythronium_hendersonii (위키피디아) 

 

한국에 자생하는 얼레지 꽃은 주로 계곡에 서식하지만

일부 종은 초원에도 자생한다고 한다.

 

 

 

- "네가 고른 건 '부치하난의 우물'이란 전설이다. ...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누리야. 이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고 내게도 다시 들을 수 없을 테니까."

노인은 고래가 잠수하기 전 호흡을 하듯 깊이 숨을 마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먼 옛날... 낙타도 갈 수 없는 깊은 사막에 '츄위샤이'라는 부족이 살았단다..." 

 

- 그 모습을 저만치 언덕에서 '만다란투'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츄위샤이를 이끄는 족장이자 '아흘라착'이었다. 아흘라착이란 신과 대화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일종의 신관이었다. 만다란투는 다른 부족뿐만 아니라 동족 츄위샤이도 두려워했다. 그는 뼛속까지 교활하고 잔인한 인간이었다. 그는 같은 동족이라도 눈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죽인 후 식량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마법의 힘이 있었다. 그는 동물과 대화할 수 있었고 사람의 마음을 조종했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인간은 노예가 되어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심장을 꺼내라면 스스로 심장을 도려냈다. 몽낭족의 족장을 유심히 보던 만다란투의 눈빛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는 휘파람을 불어 심복을 불렀다. 그의 애완용 매였다. 휘파람 소리를 들은 매가 만다란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만다란두가 매의 언어로 속삭였다. 명령을 들은 매는 곧장 선봉에 있던 부치하난에게 날아갔다. 

 

- "기억은 사소한 물건들에 묻어 있어요. 얼레지 꽃, 낙타의 갈기, 호박벌 같은. 먼지를 털어낸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색이 더 선명해질 거예요. 자, 그 여인은 누구죠?" 

 

- 곽 사장은 보석계의 대부였다. 우리나라에서 거래되는 보석의 절반은 곽 사장의 손을 거쳤다. 그중에도 다이아몬드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로와 강남의 보석상 중 그를 통하지 않고 결혼반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곽 사장의 수입원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곽 사장의 주 수입원은 국내에 반입되지 않는 진귀한 보석이었다. 케냐에서 발굴된 56캐럿짜리 에메랄드 원석, 마리 앙투아네트가 대관식 때 찼던 블루 다이아몬드 등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엄청난 시가의 보석들을 밀거래하고 있었다. 주 고객은 재벌가와 국내외 유명인들이었다. 그중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할리우드 스타도 있었다. 그만큼 굉장한 인맥을 자랑했다. 그런 곽 사장에게 호화로운 취미가 있었다.
"레인보우 컬렉션." 

 

- 심지어 별처럼 귀한 '화료'로 날 수 있는 대기 패였다. 하지만 남자는 '론'을 부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태경은 돗대의 말을 떠올렸다. 이 자리는 평범한 마작판이 아니었다. 오 이사로부터 좋은 물건을 선점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기 위해선 오 이사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또 다시 세 번째 남자의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예상대로 '론'을 외치지 않고 패를 던지려 했다. 그때였다. 

 

- "우리 영복이 착하지. 그만 울어. 뭐 줄까? 배고파? 아님, 어디 아파?" 
 

- 창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거리까지 비명이 들렸다. 얼음들이 하얗게 김을 내뿜던 얼음 창고 안에선 의자에 묶인 무열이 10분 넘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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