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정창
원제 : El amigo de la muerte (La Biblioteca de Babel)
출판 : 바다출판사
출간 : 2011.03.31
즐겁게 읽었다.
스페인 문학은 낯선 분야라, 나도 모르게 '칼비노'나 '페소아'와 묶어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물의 대사에서 특유의 화려하고 활달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창백함과의 대비가 더욱 선명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때로 섭리와 상상은 어떤 관계인가 몽상해보곤 한다. 상상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재 이루어지지 않은',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꿈꾼다는 점에서 상상은 섭리에 반한다. 그렇다면 상상은 섭리의 실현을 꿈꾸어야 하는가, 그를 넘어선 새로운 것을 꿈꾸어야 하는가?
방향을 잃은 극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면 힘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힘은 무엇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꿈꾸는 것이 현실이 된다는 가정하에,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을 꿈꿀 것인가가 아닐까.
<죽음의 친구>는 세상에 절망한 한 청년이 인격화된 죽음을 만나며 겪는 기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로, 환상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꼭집어 말하기 힘든 매력이 있는 글이고, 저자가 사는 동안 사상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음을 기억하고 읽어보면 또 새로운 부분들이 있다. 재미있었다.
- "그대가 거기 있을 거란 말인가? 방금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어디 있을지는 확실치 않아. 나는 동시에 여러 곳에 머무르거든. '저 위'의 지시를 받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 아무튼 곧 그대를 보게 될 거야. 어디를 가든..."
- "난 그대한테 할 말이 없어... 그대는 아직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이봐, 죽는 게 뭐지? 그대는 죽음을 이해하나? 삶이 뭔지, 이해하나?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한테 그대가 살지 죽을지를 물을 수 있지?"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이해하지 않겠어?"
- 그러나 힐은 평온한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 여행으로 인해 힐이 깨달은 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최종적으로 도작한 북극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우리의 주인공이 대기권 여행을 따라나선 때는 9월 초순이었다. 그리고 며칠 만에 도착한 북극은, 알다시피 9월 중순 이후로는 다섯 달 이상 태양이 뜨지 않는다.
- "이제 몇 시간 후면, 창조주가 꿈꾸는 세상이 열리겠군."
- '죽음' 과 함께 가는 동안 그는 어떤 사람도 느끼지 못했던 지구의 이중의 움직임, 즉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과 스스로를 축으로 도는 자전을 동시에 감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자기 심장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우울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융처럼 부드러운 빛을 띤, 죽음의 화신처럼 신비한 평온함이 투영된, 무덤을 장식한 설화 석고와 눈만큼이나 창백한 얼굴. 그것은 까마귀 날개처럼 길고 숱 많은 검은 머리와 대조를 이루며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표정, 그의 행동,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어 권력자들과 최강의 전사들, 도도한 여성들 앞에서도 지존의 위엄을 뿜어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 "네놈이 마법사라도 된단 말이냐?" 왕이 어떤 식으로든 힐의 약속을 다잡아 둘 속셈으로 다그쳤다.
"폐하, 이제 마법사 따윈 없습니다." 힐이 대답했다.
"마지막 마법사가 루이 14세였고, 마지막으로 마법에 걸린 자는 카를로스 2세였으니까요. 그건 폐하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 "동물들도... 아니 짐승들도... 그러니까 우리가 비이성적인 것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 그것들은 자유와 책임이 없는 영혼이거든. 그건 그렇고, 어서 가도록 해!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지? 자,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난 지금 어떤 귀족 집에 가는 길인데, 거기서 자네한테 은전을 베풀 생각이야."
- 또한 왕실의 한쪽은 병상에 누워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어린 왕의 신하들로, 다른 한쪽은 프랑스 통치자의 길들여지지 않는 딸이자 몽팡시에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왕비의 신하들로 채워져 있었다.
(리뷰자 주 : 루이스 1세의 친모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녀는 몽팡시에 공작부인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후에 더 살펴볼 것.)
- 그리하여 그날 오후에는 천체들의 신비스런 조합이, 창조된 사물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사물의 죽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합이, 그것을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소생하게 만드는 조합이,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 조합이, 모든 게 동일화되는 조합이, 모든 것을 혁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조합이 해체되고 있었다. 힐과 엘레나.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직관적이면서 착각적인 두 사람 역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이 겪는 비극의 마지막 날인 그날의 장엄한 죽음에 집중한 채 서로의 우상인 서로를 쳐다보면서,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세상이 영원히 멈춰 버린 것도 모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두 점의 그림처럼, 마치 두 개의 석상처럼, 두 구의 시신처럼.
- 두 사람은 거기 있었다. 서로의 눈길을 마주한 채, 서로의 손과 손에 행복의 잔을 들고서, 그러나 감히 입술은 포개지 못한 채, 모든 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른 채, 다시 서로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면서....
- "그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지. 여기서 잠시 멈춘 것은 시간이 자정이고, 이 시간이면 난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이야."
"왜?"
"그야 나 역시 우주의 창조주를 받드니까."
- 새벽이 열렸다는 건 우리의 여행자들에게는 밤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그곳에는 이전의 별들과는 다른 형태의 별들이 창공을 장식하고 있었다. 달이 동쪽을 향해 빛을 비추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그들을 실은 마차가 자전 중인 지구보다 더 빨리 날고 있었다.
- "그대의 심정은 이해해. 그대한테는 진짜 같았을 테니까... 어쩌면 그런 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꿈은 현실 같고, 현실은 꿈같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래서 엘레나와 내가 이긴 거야. 그대가 꿈속에서 경험한 과학과 경험과 철학이 그대의 마음을 순화시켰고, 그대의 영혼을 고상하게 변화시켰고, 허영심이 난무하는 세상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그대는 죽음으로부터 피신해 있는 바로 이곳이 그대가 영원한 사랑을, 불멸의 사랑을 간구할 수 있는 곳임을 깨달은 거야. 어쨌든 그대는 구원받은 거야!"
- 몇 시간 후, 지구가 폭발했다. 석류가 터지는 것처럼. 지구와 가장 근접해 있던 행성들까지 그 폭발에 빨려 들어갔고, 대홍수가 났고, 지축이 이탈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지구는 빻은 가루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달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어떤 별의 위성이 되었다. 금성의 위성인지 목성의 위성인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 그 사이 아담과 이브의 가문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여호사밧의 분지가 아니라 '카를로스 5세'라 불리는 혜성에서 행해졌는데, 그중 지옥으로 떨어진 이들의 영혼은 다른 행성들로 옮겨져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형벌인가? 새로운 삶에서 정화된 자들은 그 행성들이 사라지는 날에 하느님의 품에 돌아가는 영광을 얻는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서도 정화되지 못한 자들은 다른 백 개의 세계로 옮겨 갈 것이고, 거기서도 이승과 똑같이 방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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