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원제 : L'empire des anges
출판 : 열린책들
출간 : 2003.08.30
쓰기보다 읽기가 우선되는 지점이 왔다. 일단은 병행한다.
초등학교 때 <개미>에 빠져 있었는데, 명절에 방문한 친척집에 <타나토노트>가 있어 머무는 동안 신나게 읽었었다. 이후 <천사들의 제국>도 출간되고 거의 바로 구해 읽었다.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당시 <퇴마록>이나 <타나토노트>, <람세스> 등을 좋다고 읽던 나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건 좀 신기하다.)
최근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이 계속 생각났다. 재독을 하는 게 좋겠다 싶어 <천사들의 제국>부터 새로 출간된 양장본으로 읽었는데, 아주 예전이지만 일독한 책이고, 큰 줄거리는 기억이 남아있어 수월하게 읽었다.
다만 다시 읽는 동안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천사들의 제국>을 단순히 환상 소설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일식>에 버금가게 영성적인 소설이었다. 일독할 당시에는 사후 세계와 유체 이탈에 관한 내용을 다룬 <타나토노트>나 진화에 관한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더 와닿았었고, 오히려 환생이나 천계, 수호천사에 관한 <천사들의 제국>은 SF소설치고 상상력이 지나치다는 느낌이었는데... 한동안 이런 저런 책들을 읽고 다시 읽으니 대령과 스타시드, 수호자의 개념부터 합일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깊게 연결되어 읽힌다.
저자가 뇌와 아틀란티스, 신계에 관해 썼던 <나무>, <파피용>, <신>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사실 <개미>에 반해 쭉 챙겨 읽다가 <인간>과 <신> 이후로는 지나치게 환상적인 이야기만 쓴다고 생각하고 그 후로는 더이상 읽지 않고 있었는데... <기억>, <죽음>, <잠>, <고양이>, <심판>, <문명> 등등도 다 읽어볼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참 꾸준하게 다작을 하는 작가인데, 소설 속 '자크 넴로드'와 '미카엘 팽송', '에드몽 웰즈'는 각기 기록자들로서 저자를 투사한 인물들로 보인다.
보고 싶은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항상 있다.
하지만 그걸 잊지만 않는다면, 읽는 동안의 즐거움은 온전히 내 것이다.
- 어쨌거나 비행기가 벽을 뚫고 들어와 내 거실을 박살 내는 것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 이런, 느낌이 참 묘하군! 내가 날아오르고 있다. 은빛 줄 하나로 나는 아직 예전의 육신에 연결되어 있다. 탯줄과도 같은 이 줄은 내가 위로 올라갈수록 자꾸 팽팽해진다.
- "지옥? 미안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소. 천국 아니면 지상이 있을 뿐이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지상에 돌아가 환생하도록 되어 있소."
"어찌 보면, <지상이 바로 지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 "환생이란 고등학교 학생들이 치르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과 같은 거요. 낙방하면 재수를 하게 되어 있소. 당신들은 낙방이오. 따라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오."
- 생명의 의미 : 애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4권
세상 만물의 목적은 진화하는 것이다.
태초에 0, 즉 허공이 있었다. 그 허공이 진화하여 물질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1, 즉 광물이 생겨났다.
그다음에 광물이 진화하여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생겨났다. 그럼으로써 2, 즉 식물이 생겨났다.
그다음에 식물이 진화하여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생겨났다. 그럼으로써 3, 즉 동물이 생겨났다.
그다음에 동물이 진화하여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4, 즉 인간이 생겨났다.
그다음에 인간이 진화하여 의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지혜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럼으로써 5, 즉 영적인 인간이 생겨났다.
그다음에 영적인 인간이 진화하여 물질에서 해방된 순수한 정신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6, 즉 천사가 생겨났다.
- 천사? 미안하지만 난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한낱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천사가 유행하고 또 어떤 때에는 외계인이 유행한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미신을 잘 믿는 사람들이 그것들의 존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는 실업도 경제 위기도 잊어버린다.
출처: 가두 설문 조사에서 무작위로 질문을 받은 행인
- "바로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생기는 재앙을 말하는 걸세. 자유 의지란 인간이 자기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지. 따라서 이것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권리가 될 수도 있어. 또 누구도 고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재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기야.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게 인간이지. 자네에게 부탁하는데, 그 <자유 의지>라는 것을 조심하게."
- "조심하게. 무엇이든 자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자네는 자네 의뢰인들에 대해서 한 가지 큰 의무가 있어. 자네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네. 한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한다는 말일세."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소원까지도 들어주라는 건가요?"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이 지닌 자유 의지는 엄청난 특권이 되는 셈이지. 자네는 그들의 자유 의지를 거스르면 안 되네. 그들의 욕구가 아무리 황당무계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자네의 의무일세."
라울이 옳았던 셈이다. 우리의 적은 악마도 아니고 천상의 어떤 못된 존재도 아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인간의 자유 의지이다.
- 자기 내면에 기쁨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모든 인간의 의무이다.
- 다가가서 보니 네 구체들의 크기는 똑같지만 내용물은 각기 다르다. ... 두 번째 구체는 식물 세계의 영혼, 세 번째 구체는 동물 세계의 영혼, 네 번째 구체는 인간 세계 영혼의 전체적인 상을 보여 준다. 나는 첫 번째 구체로 가서 안을 들여다본다. 핵이 반짝반짝하면서 가만가만 움직인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가이아, 즉 자체 조절 구조를 지닌 살아 있는 지구, 고대인들이 말하던 <알마 마테르>의 영혼이 바로 이것일까?
"지구에도 영혼이 있다는 건가요?" 내가 그렇게 묻자 지도 천사가 대답한다.
"그렇다네. 만물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영혼을 갖고 있네." 지도 천사는 나의 놀라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덧붙인다.
"그리고 영혼을 가진 것은 모두 진화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네."
- "자네 그가 <신비적 교의의 종말>에 대해서 말했던 거 기억나나? 그때 그는 분명히 말했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 필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비밀이든 대중에게 다 알려 주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깨닫고 싶어 하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이든 다 알려도 좋다고 했지만, 7의 비밀은 예외일 거야. 아무려면 에드몽 웰즈가 지상의 어떤 인간을 영매로 삼아 천국의 비밀을 어떤 책에 옮겨 적게 했겠어?"
-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는 동의어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이 많아서 사물의 미묘한 차이를 잘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언어는 외교 분야에 대단히 유용하다. 또 중국어는 단어의 성조가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어에는 여러 수준의 존대법이 있어서 대화자들은 사회적 위계 속에 자기가 차지하는 자리를 대번에 확인하게 된다. 한 언어에는 교육과 문화의 형태뿐만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 예의범절 등 한 사회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들어 있다.
- 영문을 모르는 파파도풀로스는 라울에게 묻는다. "왜 천사님이 제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시죠?"
라울은 나를 돌아보며 푸념한다. "자네도 봤지? 이 영매는 우리의 메시지보다 떠돌이 영혼들의 메시지를 더 쉽게 감지한다니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옛날에 많은 예언자들이 천사와 대화를 나누었노라고 주장했지만, 그들 중에는 천사가 아니라 천사를 사칭하는 떠돌이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눈 자들도 더러 있지 않았을까?
- 나는 인간이었을 적에 환생을 별로 믿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전생에 장군이나 탐험가, 예술가, 스타, 궁녀, 사제 같은 역사의 주역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알기로는 1900년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농업 노동에 종사했다고 하는데, 다들 그렇게 영웅이고 천재였으면 농사는 누가 지었던 것일까? 나탈리의 전생을 조사해 보니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 하나의 삶을 마치고 다음 삶으로 환생하기 전에 대개 연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 우리는 나탈리의 이전 카르마들을 차근차근 다시 검토해 나간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날짜가 이상하다! 사망 날짜들과 출생 날짜들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 우리는 이 영혼이 그 기간들을 연옥에서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그 기간들이 너무 길다.
"그건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지상에 있지도 않았고 천상에 있지도 않았어.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우주라는 시계 장치의 부속품 하나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거야. 지상이나 천국 말고 영혼들이 가는 다른 곳이 있는 거라고..."
"그곳은 나탈리처럼 특별한 영혼들만 가는 곳일까? 그게 바로 7의 존재들이 사는 세계가 아닐까?"
- 각기 전쟁 대리인을 내세운다. 말하자면, 맹세로 결합된 제3의 씨족을 대신 내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A 씨족은 C 씨족에게 싸움을 부탁하고, B 씨족은 D 씨족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중개 제도에 의해서 전투가 벌어지긴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직접적인 원한이나 불만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죽이면서까지 치열하게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처음 격돌로 약간의 부상자가 생기고 나면, 이들은 동맹 씨족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싸움을 그만둔다. 이렇게 해서 바누아투에는 전쟁은 있으되, 단지 증오 없는 전쟁,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악착같이 싸우는 일이 없는 전쟁만 있을 뿐이다.
- "자네에게 한 가지 가르쳐 줄 게 있네. 이 세 영혼들은 우연히 자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닐세. 이들은 자네 자신의 특성과 자네 영혼의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 주네. 이들 각자는 자네가 개선해야 할 측면들 중 하나에 해당하네. 천사가 맡은 세 의뢰인들의 인격을 합친 것이 바로 천사의 인격일세. 이고르 더하기 자크 더하기 비너스는 미카엘인 셈이지. 자네는 세 인격의 통합체란 말일세"
그랬구나! 결국 나는 나의 세 영혼을 돌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초정신 분석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내 지도 천사는 그런 사실을 알려 줄 때의 효과에 익숙해져 있는 듯 내 팔을 잡으며 덧붙인다.
- "그와 마찬가지로 자크는 자네의 소심함이고, 이고르는 자네의 난폭성, 비너스는 자네의 자아도취이기도 하지. 자네는 의뢰인들을 통해서 자네가 진정으로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될 걸세. 그들의 영혼을 개선시킴으로써 자네 스스로가 구원을 얻는 거지."
결국 나는 그들에게 작용함으로써 나 자신에게 간접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들 일의 복잡한 규칙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지도 천사가 멀어져 가자 라울이 다가온다.
"그가 말했지? 이제 알겠어? 저 위에서 누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취미도 고약해, 7인지 신인지 하는 그 존재들은 우리를 갖고 장난을 치고 있어.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다양한 측면들과 대면하게 해 놓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하고 있는 거야."
- 여기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어떤 남자가 병원에 갔다. 그는 운두가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모자를 벗었다. 의사는 머리털이 빠진 환자의 머리통에 개구리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개구리는 살갗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의사가 놀라서 물었다.
"이게 붙어 있은 지 오래됐습니까?"
그러자 남자가 아닌 개구리가 대답했다.
"참 희한한 일이지요, 선생님? 이게 처음엔 내 발 밑에 난 작은 종기일뿐이었는데, 이렇게 커졌으니 말입니다.">
이 농담은 관점의 차이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따금 어떤 사건을 분석함에 있어, 자명해 보이는 어떤 하나의 관점에만 얽매임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하곤 한다.
-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만일 당신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그랜드 슬램을 이루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당신의 작은 기업이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식의 문제를 던지면서 승리를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막상 승리가 닥쳐오면 사람들은 지표를 잃고 갈팡질팡하면서, 대개는 익히 알고 있는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패배를 준비하기 십상이다.
- 젠장, 기억마저도 파업에 들어간 모양이군. 뇌 속의 도서관 문이 닫혔다. 뇌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난... 나는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생각은 틀린 것 같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생각은 계속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완전하게 의식하고 있다. 모든 걸 다 알 것 같다. 이제껏 이보다 더 정신이 멀쩡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뭔가 중요한 일이 닥쳐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초입의 청색 세계와 공포로 가득 찬 암흑세계 다음에는 나의 성적 환상을 다시 대면해야 하는 적색 세계가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나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감추어 두었던 욕망들이 표면에 떠오른다. 이곳이 바로 제3천계이다. 쾌락, 불, 더위, 습기가 느껴지고, 관능이 흐드러진 세계이다. 자기 안에 있던 가장 터무니없는 성적 환상과 가장 억압되어 있던 욕구들을 대면하는 곳이다.
- 천국의 열쇠 관리자, 천국의 수위인 그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신 아누비스, 인도인들이 사자들의 신이라고 생각했던 야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의 나루지기 카론, 고대 로마인들이 영혼들의 안내자라고 믿었던 메르쿠리우스, 기독교의 성 베드로 등이 바로 그 이름 들이다.
- 심판은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대천사들은 우리가 이른바 영계 탐사라는 것을 하면서 오로지 크게 깨달은 자들만이 알아야 할 저승의 비밀을 너무 일찍 너무 널리 폭로했다고 비난한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그저 호기심에 이끌려서 일곱 천계를 발견했고 그것을 마구잡이로 대중에게 알렸소. 개나 소나 다 알게 말이오."
"이곳의 어느 누구도 당신들에게 그런 비밀 정보를 유포하라고 허락한 적이 없소."
"설령 알리더라도 비유나 신화 속에 그것을 감추었어야 했소."
"하다못해 어떤 입문 의식을 거친 자들만이 그 비밀을 깨닫도록 했어도 사정은 달라졌을 거요."
대천사들은 우리가 저승의 비밀을 성급하게 누설함으로써 어떤 피해가 야기될 수 있는지를 하나하나 지적한다.
- 그는 처음부터 나의 삶을 지켜보았다면서 이런 처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인다.
"소설로 말하자면, 이건 줄거리를 잘 엮어 놓고 대단원을 망친 거나 진배 없어. 자네 카르마는 좋았는데, 심판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단 말일세. 이 재판은 공정하지 않아. 부당하고 반사회적이란 말일세."
천국의 현행 법률에 따르면, 내가 심판을 받을 때 필요한 경우 내 수호천사가 변호사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재판에 참석했어야 한다는 것이 에밀 졸라의 설명이다.
- 내 재판이 비로소 격식에 맞게 이루어진다. 세 대천사는 나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면서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해명하도록 기회를 준다. 내 행동을 심판하기 위한 기준은 진보, 다른 생명과의 공감, 관심, 선행의 의지 등이다. 내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마치 비디오 장면처럼 펼쳐진다. 어떤 대목은 빨리 스쳐 지나가고 어떤 대목은 슬로 모션 화면처럼 천천히 전개된다. 나로 하여금 옛날에 벌어진 일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 이따금 정지 화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침내 나는 미카엘 팽송으로서 내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대천사들이 나를 심판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를 심판하는 셈이다. 기분이 참으로 묘하다. 그러니까 저것이 내 삶이었단 말인가?
- 대천사들은 내가 600점을 얻었으므로 이제부터 6의 존재에 속한다고 알려 준다.
"6이라는 게 뭐지요?"
"의식 수준이 <6>에 달했다는 뜻이오. 이제부터 당신이 원한다면 육체의 감옥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소."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지상에 내려가 크게 깨달은 자로 환생하여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들을 진보시키는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이 경우에 나는 천국에 들렀던 일에 대해서는 희미한 기억만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천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가 뭐지요?"
"인간의 세 영혼을 담당하는 빛의 존재요. 각각의 천사는 자기가 맡은 세 영혼 중에서 적어도 하나를 진보시켜 환생의 순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임무를 맡고 있소. 에밀 졸라가 당신을 위해 그 일을 해냈듯이 말이오."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느 쪽이나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 "그렇지. 에밀 졸라는 자네를 환생의 순환에서 벗어나게 한 덕분에 천사들의 더 높은 진화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네."
에밀 졸라가 세 대천사를 상대로 왜 그렇게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였는지, 그리고 재판에서 이긴 다음에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를 이제 알 것 같다.
"그 <천사들의 더 높은 진화 단계>라는 건 무엇입니까?"
"자네가 각 단계를 넘을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지식을 얻게 될 걸세. 자네가 더 높은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면 먼저 천사로서의 자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네."
- 하지만 진짜 사람의 동공과는 달리 이 호수는 둥근 형태가 아니라 심장과 조금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천국이 하나의 눈이 되어 한복판의 검은 심장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저건 수태의 호수일세." 우리는 검은 호수로 다가간다.
- "이 숫자들의 형태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닐세. 여기에는 의식의 진화에 관한 비밀과 비결이 담겨 있어. 따라서 이 메시지의 의미를 숙고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세. 세계는 이 숫자들이 상징하는 바대로 진화하고 있네."
"4는 인간일세. 이 숫자 안에 있는 십(+)자가 인간을 상징하고 있네. 인간에겐 선택의 권리가 있네. 인간은 교차로에 놓여 있어. 이 교차로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거지. 동물의 단계인 3으로 다시 내려갈 수도 있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도 있네."
- "이곳은 그저 거대한 관리소일 뿐이야. 지상의 인간들을 관리하고 엿보고 감독하는 곳이지. 이런 곳에서 무슨 기쁨을 느낄 수 있겠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따위 공무원 같은 생활을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라네. 이럴 줄 알았으면, 크게 깨달은 자 노릇을 하러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할걸 그랬어.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야. 천사는 별게 아니라고! 만일 우리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년만년 천사로 남아서 의뢰인들이나 지켜보고 있어야 할 거야. 여긴 도형장이나 다름없다고!"
- 전생에서 미카엘 팽송이었던 나는 정직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불가지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불가지론은 그 유명한 <파스칼의 내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내기를 걸면 이기는 경우엔 영생을 얻고, 지는 경우에도 잃을 것이 없다는 논리로 비신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 위반자
사회는 위반자들을 필요로 한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지만, 그 법률을 위반하는 자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만일 모두가 현행 법률을 준수하고 규범에 따름으로써 교육, 노동, 시민권 행사, 소비 등 모든 것이 규범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떤 사회든 정체를 맞게 된다. 위반자들은 적발되는 즉시 기소되고 제외된다. 하지만 사회가 진보하면 할수록, 사회의 독이 되는 요소를 조심스럽게 관리함으로써 스스로를 위한 항체를 발달시킨다. 그럼으로써 사회는 갈수록 자기 앞에 나타나는 장애물을 점점 더 가뿐하게 뛰어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위반자들은 사회에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희생양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 "어때, 내가 같이 오길 잘했지? 다른 운전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에는 천사가 둘이라도 많은 게 아니야."
- "자네는 자네 의뢰인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하네. 그들이 갈 길은 저마다 다르다네. 그 영혼들의 임무는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어. 저마다 자기만의 특별한 목표가 있고, 매번 삶을 살 때마다 그 목표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걸세. 그런데, 자네는 그 임무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물론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들을 추론할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진보했는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은 오로지 그들이 심판 때에 받는 점수로만 이루어지지. 바른길로 나아가고 있는 영혼은 생을 거듭할수록 점수가 좋아진다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6백 점을 얻은 영혼은 환생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걸세."
- "자네가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은 다섯 가지가 있네. 첫째는 직감, 둘째는 꿈, 셋째는 징표, 넷째는 영매, 다섯째는 고양이일세."
- 많은 사람들은 모성애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19세기 말까지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녀들을 유모에게 맡겨 놓고는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시골의 아낙네라고 해서 아기에게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아기를 얇은 천에 돌돌 말아서 아기가 춥지 않도록 벽난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벽에 매달아 두곤 했다. 유아 사망률은 대단히 높았고 부모들은 자기네 자녀가 청소년기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2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다.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서양의 정부들은 이른바 <모성 본능>이라는 것의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 이익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인구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대받고 매를 맞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게 되면 결국 나라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거였다. 사람들은 육아에 관한 새로운 정보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들을 개발하고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소아의 질환과 관련된 의학 분야에서도 점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럼으로써 부모들은 자녀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을까 봐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애정을 쏟아도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 사정에서 <모성 본능>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 라울은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어떤 문제가 한 생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 해결하도록 자동적으로 이월된다는 것이다.
"펠릭스 케르보스의 영혼은 어머니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초월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고르 체흡으로 태어난 새로운 삶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거야. 아마도 <위쪽 세계에 있는 존재들>, 즉 신들이 그렇게 결정해 놓았을 걸세. 만일 이고르가 이번 생에서도 어머니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는 얼마나 더 악독한 어머니를 만나게 될까...?"
- 내 지도 천사가 전에 했던 말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한 영혼이 고양되면 온 인류가 고양된다>는 그 말이, 혹시 테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정신권 >, 즉 인간의 모든 의식이 한데 뒤섞여 있다는 그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 포커란 정말 굉장한 놀이다. 하룻저녁에도 천당과 지옥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게 하니 말이다. 바실리는 포커 판이 벌어지면 얼굴이 대리석처럼 무표정해진다. 녀석은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패를 갖느냐 나쁜 패를 갖느냐가 아니라, 나쁜 패를 가지고도 게임을 잘하는 거야.> 녀석은 또 이런 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내 손에 들어 있는 패가 아니라, 상대가 내 손에 어떤 패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이다.>
- 그 녀석 덕분에 나는 포커 학교에 들어온 셈이다. 이 학교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뛰어난 관찰 능력을 계발해 가고 있다. 관찰이란 무척 재미있는 것이다. 세상은 작은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신호들은 우리에게 갖가지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해 준다.
- 라울이 옮았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지도 천사는 영매를 이용해서 자기 지식을 전수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자기의 생각이 물질적인 매체에 기록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수도사는 얼른 책을 가져오더니,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팔랑팔랑 넘긴다. 맨 먼저 그가 보여준 것은 타로 카드 게임에서 숫자 7이 상징하는 것에 관한 짧은 글이다. 그 다음 것은 길이가 더 긴데,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7이라는 상징의 중요성에 관한 글이다. 세 번째 것은 야곱의 사다리를 이루는 일곱 가로 막대에 관한 글이다...
- 마르틴의 말에 따르면, 체스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다음의 3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초반에는 말들이 작전을 개시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빨리 방어선 뒤에서 빠져나오게 할 것. 둘째, 중앙을 차지할 것. 셋째, 자신의 약점을 보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의 강점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
- 마르틴과 에드거 앨런 포와 체스는 나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고 있다. 이제 나는 내 이야기 속에 서스펜스를 많이 집어넣고 있다. 내 이야기들은 주로 체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내 인물들은 종종 어떤 게임에 말려드는데, 그들은 그 게임의 규칙을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 "따로 배울 건 없어.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니? 약점을 보충하는 것보다는 강점을 강화하는 게 낫다고 한 거 말이야. 나는 너에게 더욱 효과적인 공격 방법을 가르쳐줄 생각이야.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잖아?"
마르틴은 자기가 말한 대로 했다. 나의 수읽기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체스를 두고 있노라면, 하나의 드라마가 펼쳐지면서 시간과 공간이 체스판에 요약되어 나타나는 듯하다. 한 수 한 수를 둘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생쥐 한 마리가 미로에 갇혀 이리저리 헤매다가 최선의 길을 찾아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생쥐는 길이란 길을 모두 탐색하면서 되도록 빨리 바른길을 찾아내려고 대단히 바쁘게 움직인다.
- "아니, 내가 물은 건 어떻게 인체가 하나의 사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냐는 거야. 네 이야기에 나오는 세균은 인체를 하나의 이상 사회로 보고 거기에 들어가 살고싶어 하잖아."
"내가 보기에 우리 인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상 사회야. 그 안에는 경쟁도 우두머리도 없고, 모두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를 보완하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어."
- 원자에든 분자에든 세포에든 그 나름의 구조가 있다. 수준은 다르지만 동물도 지구도 태양계도 은하도 저마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구조는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 원자는 분자에 영향을 미치고, 분자는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며, 호르몬은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동물은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 세포는 ... 살아 있는 존재의 죽음이란 그저 에너지가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가엾은 파파도풀로스는 이제 가는 은빛 줄로만 자기 육신에 연결되어 있다. 그 줄이 팽팽해진다. 그는 스스로 신비로운 황홀경 속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떠돌이 영혼들의 계략에 속아 자기 몸에서 쫓겨나고 있을 뿐이다.
-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도록 도와줄 수 있겠소?"
이윽고 잉카 전사들 중의 하나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그들을 도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우리 천사들의 특권 중 하나이다. 이 떠돌이 영혼들이 천국에 올라가도록 해주려면, 내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게 해주면 된다. 다시 말해서, 내 척주를 따라 올라가서 내 정수리를 통해 솟구칠 수 있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 "천사의 나라 위에는 7들의 나라가 있다고 하는데, 이 7이라는 숫자와 관련해서 뭐 생각나는거 없소?"
"어느 날, 내가 떠돌이 영혼으로 페루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가 아주 특별한 여자아이를 만났소. 그 아이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먼 곳에서 왔다는 느낌을 주었소. 내가 감지한 바로는, 그 아이가 여러 차례 전생을 보낸 곳은 지구가 아니었소. 인간 세계뿐만 아니라 천사 세계보다도 우월한 곳인 것 같았소. 그 아이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지만, 영혼의 깊은 곳에 7들의 세계에 관한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오. 우리가 파파도풀로스에게서 보았듯이, 천사들은 이따금 인간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비밀과 보물을 감추지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그것들을 집어넣어서 그들을 은닉 장소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 "사랑이 부족한 게 문제일세. 나탈리의 영혼은 열정의 위험에 너무나 민감하네. 이 영혼은 남자로 환생하든 여자로 환생하든 언제나 자기의 파트너를 불신하곤 했네. 그 문제에서 한 번도 완전히 해방된 적이 없었지. 물론 대개는 이 영혼의 생각이 옳았어. 하지만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으려 하다 보니, 완전한 사랑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체험할 수 없었지."
라울이 자기 의뢰인에게 대해서 왜 그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더 잘 이해가 된다. 그의 의뢰인은 어리석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똑똑해서 나아갈 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 "난 이제 천사의 일에 대한 신념이 없어. 더 이상 내 영혼들을 돌보지 않고 있네. 너무나 많은 의뢰인들이 나를 실망시켰어. 이젠 그들을 살피고 돌보는 일에 싫증이 나. 인간을 구원한다고? 난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네."
라울과 마찬가지로, 프레디는 인간을 진보시키는 것은 가장 능력 있는 천사들에게조차 벅찬 임무라고 확신하고 있다.
- 그러한 위계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연구자는 착취자 여섯 마리를 함께 우리에 넣었다. 그 쥐들은 밤새도록 서로 싸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식사 당번이 되었고, 한 마리는 혼자 헤엄을 쳤으며, 나머지 한 마리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참아 내고 있었다. 착취자들에게 굴복했던 쥐들을 상대로 역시 똑같은 실험을 했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그 쥐들 가운데 두 마리가 왕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반 리스베트 선생님은 왜 이 글을 나에게 읽히고 싶어 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분 말마따나 <내 자리 찾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내가 소년원에서 배운 두 번째 교훈이다. 사람을 돕더라도 도움 받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 도와야 한다. 도움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면 자기를 도와줬다고 나를 원망한다.
- "퇴행도 해본 적이 있나?"
"아뇨. 그게 뭐죠?"
"자기의 전생을 찾아서 돌아가는 거지."
나탈리 김은 호기심을 느낀 듯하다. 시벨리우스의 권유에 응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모양이다. 나탈리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이렇게 묻는다. "위험하진 않나요?"
최면술사가 머리를 매만지면서 대답한다. "보통 최면과 별로 다를 게 없어."
"그것을 통해서 제가 다시 경험하게 되는 게 뭐죠?"
- "난... 다른 곳에 있었어요."
"어디? 거기가 어디지? 어느 대륙이지?"
그녀가 다시 몸을 바르르 떤다.
"다른 곳이에요. 지구가 아니에요."
라울의 목소리가 시벨리우스의 목소리와 거의 겹쳐서 들려온다.
"지구가 아니라고?"
"예전에... 이 삶이 있기 전의 생에서, 내가 있었던 곳은 다른 행성이에요."
- "다른 행성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이번에는 프레디 메예르의 마음이 동한 것 같다. 물론 인류가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의 호기심은 그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다. 그는 지구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인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자기 파멸이 지능을 가진 모든 중들의 고유한 특성인지, 아니면 지구의 인류에게만 한정된 것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 "그런데 왜 쥐를 주인공으로 삼았지?"
"쥐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고, 중요한 건 집단생활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이지. 나는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게 사는 이상 사회의 모델을 찾고 있어. 어릴 때 쓴 어떤 단편소설에서는 두 백혈구를 주인공으로 선택해서 인체라는 이상 사회를 묘사한 적이 있어. 이제는 그 반대로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잔인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 주고 싶어. 쥐들의 사회는 대단히 효율적이긴 하지만 잔인하기 짝이 없어. 약자와 병자들이 철저하게 제거되는 사회지. 끊임없이 경쟁이 벌어지고 언제나 가장 강한 자가 승리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세계에 대한 나의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자기들 안에 있는 <쥐>의 속성을 의식하게 되기를 바라."
- "하하하! 천사들 일이 그런 거라네. 남들은 편하다고 말하지. 천만의 말씀이야! 한 인간을 그의 조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어떤 광물을 식물 쪽으로 진화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세."
그러면서 라울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어쨌거나 천사들의 일은 인간 세계의 공무원들이 하는 일과 비슷해. 이 일에는 더 이상 모험이라는 게 없어. 우리는 이제 이 미적지근함과 나른함에서 벗어나야 해."
라울의 눈빛에는 예전에 우리가 육신을 가진 존재였을 때 나를 매료시키고 나를 두렵게 했던 그 기색이 담겨 있다. 그의 눈빛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설령 우리가 실수를 범하고 있는 거라 할지라도 끝까지 가보세.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하게 될 거야.>
- 대학 입학 자격시험 <철학> 과목 구두 시험장. 질문은 <사상의 자유는 존재하는가?>이다. 시험관은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말했다.
"학생은 선과 불교와 도교 등의 문헌을 참조해서이야기를 했는데, 참고 문헌을 굳이 동양에 가서 찾을 필요는 없네. 몽테뉴와 스피노자, 니체, 플라톤을 다시 읽어보면, 그들이 모든 얘기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
"제가 동양 사상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그것이 어떤 영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승이 마음을 비우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좌선을 하고, 요가 수행자가 호흡과 심장 박동을 늦추며, 도교 수행자가 황홀경에 이르도록 껄껄껄 웃는 이유는 단지 문장 몇 개로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생생한 체험이니까요."
시험관은 그런 것은 자기가 알 바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대꾸했다.
"이제 됐네. 우리가 학생한테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닐세."
- "그래. 우리 모두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지.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가호가 필요할 때 수호천사에게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난 그렇지 않아.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수호천사를 부르지. 그러면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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