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출판 : 열린책들
출간 : 1994.09.01
읽은 순서상으로 따지면 11월의 첫 책은 <타나토노트>인데, 어쩌다 보니 리뷰 순서로는 좀 뒤로 밀리게 되었다.
나는 90년대 후반에 일반 판본으로 이 책을 처음 읽었었다. 대강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놓쳤던 부분이 너무 많았다. <요가난다> 외에도 그 후로 찾아 읽었거나 읽을 예정인 많은 문헌들이 이미 이 책 안에 발췌의 형태로 실려 있었다.
본문 중 '호기심의 토양이 내게 마련되었을 것이고, 훗날 라울 라조르박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그 토양에 광기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울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어쩌면 어린 시절 내가 접했던 책들이 만들어둔 토양에서 지금의 관심사가 싹을 틔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면 그땐 오히려 겁이 없어서 기서들을 잘 찾아보곤 했었는데, 당시에 지금 같은 인터넷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다면 좀 더 일찍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빨리 그만뒀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알 수 없는 일이다.
<타나토노트>는 <천사들의 제국>으로 이어지는 소설로, 일종의 전편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 읽는 경우에는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재독이라 순서를 바꾸어 읽었는데 매우 만족스럽다.)
프랑스의 현직 대통령이 암살자에게 피습되어 생사를 오간다. 대통령은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당시 경험한 강렬한 임사 체험으로 인해 비밀리에 사후 세계에 관한 연구를 지시한다. 처음에는 약물을 통해 강제로 심장 박동을 조절하여 임사 상태를 만들던 연구팀은 그들의 연구 주제가 전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자 각국의 연구팀들과의 교류를 통해 보다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을 알게 된다. 명상, 종교적 의식 등을 통해 사후 세계 체험에 성공하는 이들도 나타나는데, 결국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제시하는 사후 세계에 관한 설명들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작중 인물인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연구를 통해 강조된다.
지금 와서 의아한 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영성이나 오컬트와 연결해서 언급되는 건 못 본 것 같다는 점이다. 아마 내가 자세히 찾아보지 않아서 몰랐던 것이겠지만 'SF소설', '환상소설', '기발한 상상력' 같은 수식어 정도만 본 것 같은데... <타나토노트>는 특히 나름대로 당시에 꽤 인기를 끌었던 책이었는데도 관련해서 별 다른 언급을 보지 못했다. 이제 와서 다시 읽으니 그 점이 오히려 의아하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즐겁게 읽었다.
- "미카엘, 책 좀 더 읽는 게 좋겠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하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책을 읽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야.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게 아마 훨씬 좋을걸."
"지금 그 말도 어떤 책을 읽고 하는 얘기지?"
나는 그렇게 반박했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구실이 있는 법이다. 라울은 무게를 잡고 아주 당연한 진리를 말하곤 했고, 나는 그것에 대해 곧 잘 농담을 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나 우스갯소리를 하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 망자는 누구나 남이 자기 내장을 훔쳐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살다 보면 이따금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지. 그 두려움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를 때 생기는 거야."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라울은 2프랑짜리 백동전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택을 하지. 행동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하고 말이야."
- "죽음이 임박하면 인체는 종종 다량의 생 모르핀을 만들어 냅니다. 그 모르핀 때문에, 빈사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에 도취 상태에 빠지지요. 화학적인 성찬을 먹고 마지막 불꽃놀이를 하는 셈이지요. 환각이 일어나고 <경이로운 대륙> 같은 것을 보게 되는 이유가 틀림없이 거기에 있습니다. 수술대 위에서 각하께 일어났던 일도 그런 것인 듯합니다."
- 나는 라울에게 전화하기로 결심하기에 앞서 2프랑짜리 백동전 세 개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라울이 내게 가르쳐준 방법은 주화를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세 개를 사용함으로써 라울의 방법을 개선했다. 그렇게 하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는 두 가지 대답보다 더 뉘앙스가 많은 의견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뒷면-뒷면 -뒷면이 나오면 <절대적으로 찬성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뒷면-뒷면-앞면이 나오면 <찬성하는 편>, 앞면-앞면-뒷면이 나오면 <반대하는 편>, 앞면-앞면-앞면이 나오면 <절대 반대>를 의미했다. 백동전 세 개가 하늘에 날아올라 의견을 묻고, 차례차례 땅으로 내려왔다.
-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데, 어찌하여 우리 믿음은 피와 내장으로 채워진 이 커다란 가죽 부대에 생명이 돌아오게 하는 작은 기적조차도 이루어 내지 못하는가?
- 아무것도 모를 때는 질문할 것도 별로 없는 법이지만, 일단 알듯 말듯한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걸 알고 이해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 삶은 잠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 길들이고, 꿈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 엘리파스 레비
-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잡념을 버리고 숨결이 척추를 따라 흐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육체를 벗어나 창문을통해 이륙할 수가 있어요."
"무엇을 느꼈지요?"
"그걸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어요. 그냥 느껴질 뿐이에요. 그런 질문은 소금의 맛이 어떠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 단맛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소금의 맛을 설명하기란 참 난처한 일이에요. 어떤 말을 사용해서 그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요? 소금의 맛이 어떤 것인 줄 알려면 직접 소금 맛을 보는 수밖에 없어요. 명상이 뭔 줄 알려면 명상을 해봐야죠."
- 라마승 하나가 빈사자에게 다가가 목 언저리에 손을 대는데, 그 손놀림이 기이했다. 스테파니아가 우리에게 설명했다.
"지금 목동맥을 압박하고 있어요. 맥박이 멎고 영원한 잠이 찾아올 때까지 저러고 있을 거예요. 숨이 위로 올라가서 중심 통로를 떠나고, 곁순환의 통로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면 브라마의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 실제로, 첫 번째 장벽을 넘은 사제들은 저마다 자기 종교의 상징물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암흑 구역에 들어가면 자기 기억과 마주치게 되므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네딕트파 수도사들은 옛날의 화가들이 성인들의 초상에 후광을 그려 넣은 까닭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후광은 심령체가 머리 꼭대기로 빠져나오기 시작할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당시의 화가들은 성인들이 육체를 벗어나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 했을 거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 한 사람의 운명이 변화하려면 황도 12궁을 다 거쳐야 한다. 동양의 몇몇 전승에 따르면, 12궁의 각 별자리에서 적어도 열두 번씩, 통틀어 144번의 환생을 거쳐야 운명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삶을 거침으로써 사람은 각 별자리에 속한 모든 선조들의 삶을 두루 겪어 보게 되고 인생 역정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인격을 다 경험하게 된다. 순수한 영혼이 되려면 모든 종류의 성격과 모든 형태의 삶을 겪어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144번의 환생만으로는 부족하다. 석가모니 같은 이도 해탈을 하기 전에 5백 번의 환생을 경험했다고 하니, 우리네 중생의 대부분은 1천 번째 환생에서 2천 번째 환생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점성술에서는 황도 12궁을 시계 숫자판의 열두 시간에 비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침은 우리의 별자리를 가리키고 분침은 우리의 선조를 가리킨다. 시침과 분침이 함께 우리의 현생이 치러야 할 업보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어야 할 <총체적인> 삶 가운데서 몇 시 몇 분에 도달해 있는 것일까?
- 켈트 신화에 따르면, 아일랜드에는 켈트 사람들이 와서 터를 잡기 전에, "쑤아하 데이 다난"이라는 신족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쑤아하 데이 다난은 다나 여신의 자손들로서 세계의 북단에 있는 섬들에 살다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검은 구름을 타고 공중을 날아서 아일랜드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섬의 지배권을 놓고 악신 부족인 포모레와 전투를 벌였다. 애꾸눈에 외다리인 포모레는 전투에 패하여 호수, 수렁, 우물 따위의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쑤아하 데이 다난은 오랫동안 아일랜드를 지배하다가 지상 세계를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지하 세계에 살면서 요정들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그 지하 세계를 시(평화) 또는 티르 나 노그(청춘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마력을 지상으로 보내 사람들이 개화하도록 도와주었다. 켈트족의 제사장 하나가 그들의 도움을 청하러 가자 그들은 마력을 지닌 네 가지 신보를 내주었다. 그 네 가지 신보란, 어떠한 대군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다그다 신의 가마솥,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적을 죽일 수 있는 루그 신의 창, 일단 칼집에서 나왔다 하면 누구도 당해 낼 수없는 누아다 신의 검, 그리고 아일랜드의 왕이 될 만한 사람이 발을 올려놓으면 외침 소리를 내어 그가 왕임을 알려 주는 팔의 성석이 그것이었다.
- 열렬한 신자들이 마침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영계 탐사에 사용하는 방식을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상과 탈육과 심령체를 이용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의 적을 과소평가한 게 분명했다. 벽이란 벽은 다 뚫고 들어오고 우리의 살가죽마저도 뚫고 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당한단 말인가?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천국 탐사 때문에 격분한 광신자가 내 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 자는 성직자이니까 내가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 내 몸에서 떠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공포의 순간에 이상하게도 언젠가 들은 활쏘기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녁을 명중시키려면 과녁을 머릿속에 그려 넣어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활과 과녁의 중심과 화살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화살이 과녁의 중심과 만나게 된다.
- 길굴림(환생).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가장 중요한 문헌인 <조하르> 즉, <광휘의 책>에는 환생의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 결혼하지 않는 것도 들어 있다. 또 어떤 사람이 결혼은 했는데 아이를 낳지 않고 죽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환생을 통하여 내생에서 다시 결합한다고 되어 있다. 카발라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육체적이고 감정적이고 영적인 세 가지 차원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신에게로 나아가는 주요한 길이 된다고 한다.
- 자아는 우주의 특별한 하나의 점도 아니고 교차점도 아니다. 자아는 사람마다 다르며 같은 사람에게서도 발전 단계에 따라 다르다. 삶의 초기 단계에서는, 아주 높은 수준의 지력과 정신이 거의 발현되지 않고 발현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기 때문에, 자아의 삶은 거의 육체적인 삶에 국한된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성장해 감에 따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혼의 초월적인 본질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한 고양은 영적인 삶의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감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는 동물적인 영혼으로부터 참 생명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참 생명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아댕 슈타인잘츠 <꽃잎 열세 개 달린 장미: 유대교의 카발라>
- 고깃집 주인 뒤퐁 씨의 죽음을 설명하려던 어머니의 그 어설픈 시도 때문에 죽음에 관한 호기심의 토양이 내게 마련되었을 것이고, 훗날 라울 라조르박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그 토양에 광기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울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 "예를 들면 대충 이런 식이야. 우선 한 남자가 등장해. 그 남자가 어떤 괜찮은 여자를 만나지. 그는 그 여자와 자고 싶어서 안달을 해. 그러면 그 여자가, <저는 당신이랑 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해. 그렇게 한 8백 쪽쯤 지나고 나면 마침내 그 여자가 안 자겠다는 뜻을 알리기로 결심을 하는 거야."
"그런데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책들을 뭐하러 쓰는 거지?"
"사상이 없고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허구한 날 전기, 자서전, 자전적 소설, 소설적 자전 따위나 쓰는 거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작가들은 결국 자기들의 세계를 묘사할 수밖에 없지. 자기들 세계가 아무리 빈약하다 해도 달리 방법이 없잖아? 문학에서조차 발명가들은 더 이상 없어. 내용이 없으니까 작가들은 문장이나 핥고 형식에 공을 들이는 거지. 너도 부스럼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가지고 10페이지쯤 길게 써봐라. 혹시 아니? 공쿠르상이라도 타게 될지?"
- 라울은 스스로 판단하는 드문 능력을 타고난 아이였다. 그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서 주입된 남의 생각을 유식한 체하며 흉내 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그 정신의 자유로움, 어떠한 영향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기 아버지의 공으로 돌리곤 했다. 라울은 자기 아버지가 철학 선생이었고, 책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고 강조하곤 했다. 라울은 거의 하루에 한 권 꼴로 책을 읽었다. 특히 신비스러운 내용이 담긴 책이나 공상 과학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정신의 자유로움을 얻는 비결은 책을 많이 읽는 거야." 그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 "이번에 사자가 마주하게 될 신은, 정의의 여신 마트와 따오기의 머리를 가진 지혜와 학문의 신 토트야. 토트 신은 사자의 증언을 서판에 기록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
- 그들은 여러 가지 기도와 주문을 더 옮고 나더니, 초 다섯 자루에 불을 붙여 별 모양으로 늘어놓았다. 그들이 뼛가루에 불을 붙이자, 그것이 타면서 연보랏빛 연기가 한 덩이 피어올랐다. 그 일이 끝나자, 그들은 자루에서 검은 수탉 한 마리를 꺼냈다. 수탉이 자루 밖으로 안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바람에 깃털이 적지 않게 빠졌다.
- "너 임사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구나? 미국 사람들이 NDE, 즉 near death experiences라고 부르는 것 말이야."
"그래 맞았어. 임사 체험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거야."
임사 체험이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한때 그 말이 대단히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주제를 다운 베스트셀러도 몇 권 있었고, 주간지들이 그것을 특집 기사로 다룬 적도 있었다. 그러나 유행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그것 역시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그럴듯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을 뿐, 믿을 만한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탓이었다.
- 내가 병원 안에 들어가 본 건 그것이 두 번째였지만 얼떨떨한 느낌은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흰 옷을 입은 마법사들과 알몸에 정결한 가운을 걸친 젊은 여사제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순백의 사원에 무단으로 침입한 느낌이었다. 고대의 제의 절차를 따르듯이, 모든 일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급차 운전기사들이 더러운 시트에 싸인 제물을 내려놓으면, 젊은 여사제들이 그것을 풀어서 네모진 받침대가 있는 방으로 옮긴다. 거기로 들어가면 네모난 입마개를 쓰고 투명한 장갑을 낀 대사제들이 점괘를 읽어 내려는 듯 제물을 만지작거린다.
- 라플란드 사람들에게 생명이란 뼈대를 덮고 있는 부드러운 살과 같은 것이다. 영혼은 그 뼈대를 이루는 뼈들 속에만 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를 잡으면, 가시 하나도 다치지 않게 살을 아주 조심스럽게 발라낸 다음 물고기를 잡았던 같은 장소에 뼈를 내다 버린다. 그들은 <자연>이 그 뼈대에 다시 살을 붙여 주기 때문에, 며칠, 몇 주 또는 몇 달 후에 그 자리로 돌아가 보면 새 물고기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 콩라드 형에게 앙갚음을 하기도 불가능했다. 복수를 하려면 그의 일기장을 폭로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일기장 따위가 없었다. 형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삶을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살기만 하면 될 만큼 그는 행복했다.
-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그렇게 깨달은 자들과, 숲에 살면서 자기들 믿는 것이 진실임을 깨달을 자들은 불꽃 속으로 들어간다. 그 불꽃 속에서 나와 하루가 지나고 빛나는 보름이 지나고 태양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동안 여섯 달을 보내면 신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런 다음, 신의 세계에서 나와 태양 속으로 들어가고 태양에서 나와 번개의 세계로 간다. 번개의 세계에 다다르면 영적인 존재가 나타나 그들을 브라만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 세계에서 그들은 영겁의 세월을 살게 된다. 그들에게 이승으로 돌아오는 일이란 없다. - <브리하드 아라냐카 우파니샤드>
- 우파니샤드는 힌두교 신앙의 토대가 된 고대 인도의 성전 베다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베다에는 <리그 베다>, <야주르 베다>, <사마 베다>, <아타르바 베다> 네 가지가 있는데, 각 베다는 성립 연대와 형식이 다른 몇 부분을 한데 묶어 놓은 것이다. 즉, 신들에 대한 찬가와 축문 등을 모아 놓은 산히타를 근간으로 삼고 거기에 제사에 관한 설명서인 브리흐마나와 일종의 철학 논문이라 할 만한 아라냐카와 우파니샤드를 덧붙여 집성한 것이 바로 베다이다. 이 네 부분은 서로 독립되어 있기도 하고 통합되어 있기도 하다. 브라히드 아라냐카 우파니샤드는 야주르 베다의 바자사네이 산히타(야주르 베다는 산히타가 둘이다)에 붙어 있는 것으로 우파니샤드 중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다.
-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우주가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 활의 과녁이 몇 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각각의 세계는 저보다 더 작은 세계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 과녁처럼 생긴 우주의 중심에 그리스인의 세계, 즉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다고 믿었어."
- "아니, 괴물들의 세계 다음에는 바다가 나와. 거기에 복 받은 사람들의 섬이 있어.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머무는 낙원이지. 그 바다에는 꿈의 섬도 있어. 밤에만 흐르는 강이 그 섬을 가로지르고 있지. 섬은 망우수 꽃으로 덮여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문 네 채가 붙은 도시가 자리 잡고 있어. 두 대문은 악몽이 들어오는 문이고 다른 두 대문은 길몽을 위해 있는 거야. 잠의 신 히프노스가 그 네 문을 통제하지."
- "자, 우리는 당신이 탐험할 대륙을 <새로운 오스트레일리아>라 부르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면 옛날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을 보냈는지 생각해 보세요. 누구죠? 도형수, 일반 죄수, 악질적인 부랑배들이었지요. 하필이면 왜 그들을 보냈을까요?"
그제야 메르카시에는 얽힌 실타래가 풀리는 듯한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그건 오스트레일리아가 위험한 대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없어져도 그 사회에 그다지 손실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거요."
말을 하면서 그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내는 어김없이 그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여보, 당신은 신대륙을 탐험하러 갈 항해자들이 누구인지 아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젠 그 항해자들에게 선장을 마련해 줘야 해요."
과학부 장관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문제에 대해선, 내게 좋은 생각이 있소."
- 아즈텍 사람들은 저승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이승의 삶에서 쌓은 공덕이 아니라 죽음을 맞을 때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훌륭하게 죽는 방식은 전투를 하다가 죽는 것이다. 전투 중에 죽은 쿠안테카(독수리의 친구)들은 동방의 낙원인 토나티우히 샨에 인도되어 거기에서 전쟁의 신 옆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물에 빠져 죽었거나, 고름, 콧물, 침 따위로 옮겨지는 나병처럼 물과 관련된 병으로 죽은 사람은 비의 신 틀랄로크의 궁전인 틀랄로칸으로 간다. 아무 신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크틀란이라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4년에 걸쳐 시련을 받고 마지막 분해에 이른다. 그곳은 미크틀란테쿠틀리가 다스리는 지하 세계이다. 그곳에 들어가자면 동굴들을 거쳐 가야 한다. 영혼은 아홉 번째 명계에 다다르기 전에, 여덟 군데의 장애를 통과해야 한다.
- 첫 번째 장애, 시크나후아판 강. 죽은 이는 적갈색 개의 꼬리를 잡고 그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 개는 앞서 죽은 이의 무덤에 바쳐진 제물이다. 장례식 때 바쳐진 동물들은 천도, 즉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 장애, 두 산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서로 부딪친다. 세 번째 장애, 모난 자갈로 뒤덮인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산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 네 번째 장애, 오석 바람. 즉 뾰족한 돌멩이들을 휘몰아 오는 맵찬 돌풍을 만난다. 다섯 번째 장애, 거대한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까마득히 펼쳐져 있는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여섯 번째 장애, 사자를 꿰뚫으려는 화살들이 빗발친다. 일곱 번째 장애, 사자의 심장을 삼키려는 사나운 짐승들이 떼 지어 덤벼든다. 여덟 번째 장애, 좁고 험한 길을 지나가게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는다. 그 시련을 겪고 나면 마지막 분해에 다다를 자격을 얻는 것이다.
-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문득 아에스쿨라피우스가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고안했다는 방법이 생각났다. 정신 의학의 선구자라 할 만한 그는 3천 년 전에 어두컴컴한 터널의 미로를 만들어 그것을 광인을 치료하는데 이용했다고 한다. 그 터널의 미로를 설치했던 곳은 아에스쿨라피온이라는 의료 시설이었는데, 그 폐허가 아직까지도 터키에 남아 있다고 한다. 아에스쿨라피우스가 고안한 방법이란 이런 것이다. 먼저 광인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면서 그동안에 그들에게 최상의 쾌락을 맛보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불어넣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터널 속으로 데려간다. 터널에 들어가자마자 노래가 울려 퍼지고 어두운 미로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선율은 더욱 감미로워진다. 아름다운 음악에 매료된 광인이 가장 어두운 곳에 다다랐을 때, 그를 향해서 어떤 통의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쏟아붓는다. 그 통에는 끈적거리는 뱀이 가득 들어 있다. 그러면 쾌락의 절정을 기대하던 그 불쌍한 광인은 겁에 질린 채 뱀들 속에서 발버둥을 친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거나 멀쩡한 사람이 되어 다시 나온다. 그러고 보면, 아에스쿨라피우스는 오늘날의 전기 충격요법과 같은 것을 고안해 냈던 셈이다.
- "마르모트도 죽음의 세계로 갈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동물들은 거기에서 본 것을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가 없어. 사람들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하기로 했네. 정부가 뒤에서 받쳐 주니까 임사 체험에 관한 연구를 마음 놓고 할 수가 있어. 그리고 지원자들의 도움도 받을 수가 있다네. 그들은 일반법을 어긴 수형자들이지. 바로 여기 이 사람들이 우리의 영계 탐사가들일세. 달리 말하면, 음..." 라울은 마땅한 말을 떠올리려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랄까... 이 사람들은..." 이윽고 라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맞아. 타-나-토-노-트일세. 그리스어의 <타나토스 thanatos>는 죽음을 의미하고, <나우테스 nautes>는 항해자라는 뜻이지. 그 두 단어를 합쳐 <타나토 노트 thanatonaute>라는 말을 만든 걸세. 타나토노트, 정말 멋진 말이지? 만들어 놓고 보니 코스모노트나 아스트로노트와 같은 계열의 말이 되는군 그래."
-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 여신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화에서 이슈타르로 이름이 바뀌었다. 샛별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사랑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 전쟁의 여신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숭배를 받았으며, 남편인 풍요의 신 타무즈에 대한 이슈타르의 사랑과 질투는 <길가메시 신화>나 <이슈타르 저승 하림>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 티베트 사람들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의 신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아홉 무리의 귀신이 있다고 한다.
1. 스비인 신. 사찰의 수호신이자 돌림병을 널리 퍼뜨리는 귀신.
2. 브두드. 천계의 상층부에 있는 귀신. 물고기나 새, 돌로 변신할 수 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아홉 층으로 된 높은 흑루에 살고 있다.
3. 스린포. 사람을 잡아먹는 거구의 두억시니.
4. 클루. 뱀의 형상을 한 지옥의 신.
5. 브찬. 하늘과 숲과 빙하에 사는 신.
6. 라. 백색의 천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이로 운신들로서 누구의 어깨 위에나 머문다고 한다.
7. 드무. 악귀의 무리.
8. 드레. 저승사자. 종종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리는 귀신으로 여겨짐.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은 모두 이 귀신들이 일으키는 것이다.
9. 간드레. 악신의 무리.
- 켈트 신화에 따르면 저승은 죽음도 노동도 겨울도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다. 거기에는 신들과 정령들과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웨일스 사람들은 그 나라를 <아눈>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소생의 솥과 풍요의 솥이 있다. 소생의 솥은 죽은 전사들에게 목숨을 되돌려 주고 풍요의 솥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마련해 준다. 웨일스 사람들과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눈>, 즉 저승이 물질세계와 똑같이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몇 가지 마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포폴 부흐>. 이거 마술사들이나 보는 마법서 아니야?"
그것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그 책을 낚아채며 쏘아붙였다.
"이건 마법서가 아니라, 마야의 한 부족인 키체 사람들의 성전이야."
"아, 그래? 이건 <역경>이고, 이건 <바르도 토돌 : 저승 길잡이 책>. 아니 이건 또 뭐야! <라마야나>로군. 그러고 보니 이상한 책이란 책은 다 모아 놨군. 이제 <카마수트라>만 있으면 되겠어."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신화에는 눔바쿨라라는 신이 나온다. 어디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언제나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다. 눔바쿨라는 어딘가에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아무것도 살고 있지 않은 땅에 홀연 나타난 신이다. 그가 북쪽을 향해 나아가 지나는 곳마다 산과 강이 나타나고 그것들에 딸린 식물과 동물이 생겨났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 그의 몸에서 나온 불멸의 눔바쿨라는 그 수만큼의 아이 정령이 되어 퍼져 나갔다. <트주룬가>라 불리는 영혼들이 어떤 동굴에다 거룩한 부호들을 새겼다. 그 부호들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트주룬가 하나와 아이 정령 하나가 결합하여 시조가 태어났고, 똑같은 방식으로 잇달아 다른 조상들이 태어났다. 그 조상들에게 후손을 가르칠 책임이 지워졌다. 어느 날 눔바쿨라는 땅 한가운데에 기둥을 박았다. 그는 그 기둥에 피를 바르고 기어오르더니 시조에게 자기를 따라 올라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피를 발라놓은 기둥이 너무 미끄러워 시조는 그만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눔바쿨라는 혼자 하늘에 다다른 뒤 땅에 남겨 놓은 기둥을 거두어 갔다. 눔바쿨라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후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멸성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눔바쿨라가 거룩한 기둥을 박았던 자리는 세계의 축으로 남아 있고, 그가 원했던 대로 그 축을 중심으로 이승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다.
- "우선 이런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죽음은 일종의 생물학적 퇴행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죽음>의 경우에, 대뇌 신피질의 기능이 정지되면 의식은 후뇌 속으로 들어가고 바로 그 순간에 임사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신피질과 후뇌 사이에는 아직 화학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빛의 터널 같은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의식은 파충류의 뇌로 들어갑니다. 신피질과 후뇌 사이에는 관계가 유지되지만, 신피질과 파충류의 뇌 사이에는 더 이상 관계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 단계로 들어가면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합니다. 그 단계의 체험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피질이 기능하고 있을 때, 이 파충류의 뇌에 자극을 주었더니, 꿈과 환각이 일어나고 난쟁이들이 사는 외부 세계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단계를 거치고 나면 의식은 파충류의 뇌에서 세포로 갑니다. 세포 안에서 다시 데옥시리보 핵산(DNA)이 들어 있는 세포핵으로 갑니다. 데옥시리보 핵산은 태초부터 구성되어 있던 것이므로, 의식이 데옥시리보 핵산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일종의 의식 분리 상태에서 태초의 세계를 지각하게 됩니다."
- "최근의 이론에서 <타키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타키온은 샤클레이 원자력 연구 센터의 입자 가속기에서 최근에 발견한 완전히 새로운 미립자입니다. 그 미립자는 빛보다 빠르다는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장에도 그런 미립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약간 멍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의식의 타키온이 아직 우리 몸속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타키온 이론가들은 그것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미립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물질>이라면, 그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그 타키온일지도 모릅니다."
- "저는 20세기 말에 루퍼트 셀드레이크라는 교수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물리학자는 모든 사물들이 자기의 질료와 독립된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씨앗 속에는 이미 장차 나무가 될 바탕이 들어 있고, 태아 속에는 노인의 모습이 감춰져 있으며, 형식은 움직이는 데이터뱅크처럼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셀드레이크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그 비물질적인 형식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전자기적인 현상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전자기적인 도장이 찍혀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전자기적인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두 손바닥을 접근시키면서 그것을 감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에너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가끔 아주 자그마한 태양 같은 것을 느끼듯 작은 에너지 덩이를 감지합니다. 두 손을 얼굴 정면에 들고 있는다든가, 낯선 사람들의 살갗에 살짝 몸이 닿았을 때, 또는 불시에 감전을 당했을 때에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꼈다면 보이지 않는 외피를 만져 본 것입니다. 결국 영혼을 만져 본 거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 나는 자나 깨나 이륙 방법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자기 전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녀가 이륙을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물어보았다.
"티베트의 명상법을 이용하면서 부스터로는 염화칼륨을 진하지 않게 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간을 상하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티베트의 명상법이라고요!"
라울은 그렇게 소리치다가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목구멍으로 넘기려던 콩나물 세 가닥을 살며시 뱉어 내고 물었다.
"아가씬 신비주의자인가 보죠?"
그 물음에 여류 타나토노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따지고 보면, 영계를 향해 떠나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예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영적인 행위인 것은 분명하죠. 독성 물질이 영계로 떠나는 것을 도와주는 건 사실이지만, 영혼을 단련하지 않고는 멀리 나아갈 수가 없어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영계 탐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껏 우리는 과학적인 실험에 종교를 끌어들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라울과 나는 고대의 모든 신화와 세계의 다양한 신앙 형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든 간에 미신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우리 일을 복잡하고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라울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자였다. 그는 모든 일에서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하기를 바라는 현대인이라면 무신론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내세웠다. 그가 보기에, 회의주의는 유신론보다 한발 더 나아간 태도였다. 한마디로 그는, 존재가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불가지론자에 가까웠다. 나는 스스로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내가 보기에는 무신론조차도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였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그 문제에 관한 하나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오만한 태도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 그런데, 넋 가운데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쁜 넋들은 대개 땅에 닿을락 말락 하게 날아다녀요. 하지만 우리가 지붕보다 높게 고도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넋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낙하할 때는 재빨리 육체로 돌아와서 그들의 공격을 피해야 돼요."
나쁜 넋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이냐는 우리의 질문에, 스테파니아는 그것을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면서, 말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했다. 어쨌든, 스테파니아는 명상 덕분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그녀가 기어코 <신의 노여움>을 사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그 라마교 신자는 그녀를 설득할 마지막 수단으로 환생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는 자기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현생에서 지은 선행과 악행의 과보는 내생에서 치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각각의 삶에서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해. 사랑, 예술, 그런 것에 힘을 쏟아야 하고, 남을 해치기보다는 자기를 드높이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돼. 남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라고 그는 말했다.
- "오 소중한 아들아, 쇼니이드 바르도(추억의 방울들이 공격을 퍼붓는, 모흐 1 너머 구역?)에서 어떤 무서운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너는 현생의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꿋꿋하게 나아가거라. 이 말을 잊지 말고 그 의미를 마음속에 간직하거라. 그 말속에 깨달음의 비결이 담겨 있느니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현생의 경험이 나를 짓누르고, 허깨비들이 몰려와 공포와 불안과 고뇌가 엄습하는데, 온갖 환영이 다 내 의식의 반영이고 저승의 환영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오. 위대한 결말을 짓는 그토록 중요한 순간에, 나 자신의 생각이 지어내는 갖가지 귀신의 무리 앞에서 어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오 소중한 아들아, 네가 이승에서 지성으로 참선하고 공경을 바쳤음에도, 거기에서 만날 허깨비가 모두 네 생각이 지어낸 것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리고 네가 지금 이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빛이 너를 압도할 것이고 소리가 너를 두려움에 떨게 하리라. 모든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것을 모른다면, 그리하여 빛과 소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너는 업해를 헤매게 될 것이다."
-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망자들도 자기들의 기억과 싸우고 있더군요. 그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자, 마치 백혈구가 세균을 공격하듯이 기억들이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지요. 살인을 저질렀던 자들은 피살자들로부터 앙갚음을 당했고, 자기 일에 태만했던 자들은 뺨을 맞았어요. 또, 게을렸던 자들은 수렁에 던져졌고, 불뚝불뚝 성을 잘 내던 자들은 물결에 휩쓸려 갔어요. 그 광경을 보니 문득 단테의 <신곡>이 생각나더군요. 인색함으로 죄를 지은 자들은 눈꺼풀이 붙어 버렸고, 음탕함으로 죄를 지은 자들은 살이 불탔어요. 어쨌든 죽음은 끔찍한 거예요. 악마처럼 달려드는 기억을 물리치고 주위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검은 터널 속을 계속 갔어요. 어느덧 터널이 보랏빛을 띠고 있더군요. 주위는 여전히 캄캄했고 공포로 가득 차 있었어요. 내벽은 가루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흙을 막 갈아 놓은 듯한 냄새가 났어요."
- 영계 탐사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그래서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도 더 많아졌다.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에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 브레송의 <사고>가 이미 영계 탐사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 바 있었다. 그러나 더 알고 싶어하는 욕구만큼 강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모흐 2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꼭 알고 싶었다.
- 모흐 2에 도달한 사람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다른 라마교 신자들, 도교의 도사들, 이슬람교의 수도승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 여호와의 증인들, 몽 루이 수도원의 트라피스트 수도사들, 생 베르트랑 수도원의 예수회 수도사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차례로 첫 번째 코마 장벽을 넘어 모흐 2에 도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장벽을 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타나토드롬을 여러 군데 찾아가서 그들의 영계 탐사 의식을 배웠다. 따지고 보면 종교들은 본디 자기들 나름의 비행 방법을 간직하고 있었다.
- 쑤아하 데이 다난. 태곳적 황금시대에 아일랜드의 선주 종족인 악신의 무리인 포모레들을 물리치고 그 섬을 오랜 세월 지배하다가 아일랜드의 선조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었다는 신족. 다나 또는 다누 여신이 그 신족의 어머니이다.
- 나는 몸을 일으켜 전투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상대가 누구인지 금방 느껴졌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자그마하고 빈약한 수도사의 심령체였다. 눈을 뜨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눈을 감으면 그가 결투 자세를 한 채 내 앞에 나타났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 눈을 감아야 한다는 그 역설이라니! 눈을 꼭 감고 있으니 적의 모습이 아주 똑똑히 보였다. 나는 그를 내 머릿속에 담고 투명한 활에 화살을 메긴 다음, 사격 자세를 취하고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 심령체가 웃음을 뚝 그쳤다.
- 로즈의 발견 덕분에 우리 일은 새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뇌가 알파파나 베타파 같은 파동을 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렇다면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에 뇌의 파동이 라디오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테파니아의 다음 이륙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과연 스테파니아가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에 파동이 나왔고, 그에 따라 라디오에서 희미하게 <지지직> 소리가 들렸다. 라울은 심령체가 어떤 파장으로 진동하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하여, 모든 주파수대의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장치를 준비했다. 스테파니아가 명상에 몰입하자 <지지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우리는 그 <영혼의 자취>를 오실로스코프로 관측했다. 파장이 아주 길고 주파수대가 무척 낮은 파동이었다.
- 티베트 신화 사람과 사물은 모두 저마다의 파동을 가지고 있다. 진동수는 다음과 같이 종류에 따라 다르다.
광물 : 초당 5,000회
식물 : 초당 10,000회
동물 : 초당 20,000회
사람 : 초당 35,000회
영혼 : 초당 49,000회
죽는 순간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자기를 감싸고 있던 육신의 진동수가 감소하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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