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석류
출판 : 좋은땅
출간 : 2014.12.12
읽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된 이유를 찾자면야 찾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였겠거니 한다.
처음 발간되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행 중이던 때의 저자, 글을 정리해 책을 내던 때의 저자, 그리고 지금의 저자는 각각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본다. 매 시기의 내가 조금씩 달라지고 여전히 그대로이듯, 아마 그렇게 변해가지 않았을까 짐작만 한다.
여행지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 만났던 사람들, 눈에 담겼던 풍경들에 대한 꾸밈없고 편한 문장들이다. 남에게 보일 것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그래서 조금은 일기에 가까운- 글은 여행 중인 20대 저자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하다. 해서 타인의 여행 일기를 몰래 읽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크게 즐기지 않는 편이다. 어린 시절에는 여행 자체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고, 지금은 스스로 만족도가 높지 않다는 걸 안다. 제각기 생각하는 '여행'의 정의는 다를 테지만, 내게 '여행'은 '일탈'과 동의어가 아니므로 무언가를 '얻겠다'는 목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듯하다. 해서 순수하게 여행을 사랑하는 저자를 보며 신기한 마음도 조금 들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읽고 있으니 나 역시 즐거운 기분이 든다.
"경험을 가성비와 대체품을 따져 소비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미식과 여행이다. 음식을 먹거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당장은 좋아도 남는 게 없으며, '그 돈이면 차라리 ㅇㅇ을 할 수 있다'는 계산부터 하는 게 그때 나와 내 주변의 상식이었다." - 정문정, <더 좋은 곳으로 가자>
얼마 전 읽었던 <더 좋은 곳으로 가자>에서 이런 표현이 있었다. 여러 면에서 와닿았던 글이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다시 생각이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20대 초반의 나는 어느 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 역시 한 때 먹는 것에 진심이었던 때가 있었으므로, 그 대상을 여행으로 바꾸어 상상해보면 조금은 알 듯도 싶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면서도 묘하게 닮아있다.
사회적 페르소나는 누구에게나 요구되지만,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저자에게는 특히 그랬던 듯하고, 여행이 그에게는 일종의 탈출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저자는 자신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곳에서 페르소나에 갇혀야만 했던 현지인들이 보인다. 그에 대한 저자의 보다 깊은 생각, 그리고 지금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자국민의 세금을 소모시키는 불청객에 관한 의견을, 자국민의 자산을 (관광으로) 소모시키는 여행객에게 적용시킨다면 어떨지- 같은.
여행지에서 기록한 글들을 정리했기 때문인지 등장인물이나 장소가 휙휙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행을 하는 현장감을 더해주는 느낌이었다. 길에서 잠시 만난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고 그대로 흘러가듯이, 그리고 다시 마주치기도 하듯이. 여러 번의 여행과 여러 명의 여행 메이트들이 큰 구분 없이 이어지지만 매 에피소드는 그 순간 그곳이라 의미가 있었고, 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독립적인 감정과 경험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저자의 앞으로의 여정 역시 응원한다.
그때라면 어려웠을 것임을 인정하며. 조금이나마 나누는데 7년이 넘게 걸렸음을 미안해하며.
- 학교를 떠나 누비안 박물관과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작은 악어들이 어항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기해서 사진을 찍자 악어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악어를 만지게 해 주고 사진도 찍으라 했다. 악어 뱃가죽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익숙한 가죽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근육도 느껴졌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나니 바쿠시시를 요구해 왔다. 바쿠시시란 불쌍한 사람을 도우면 사후세계에서 도와준 만큼 대가를 받을수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는 일련의 팁으로, 이집트인들은 상대가 나를 도와주지만 나를 돕는 행위가 상대에게도 도움이 되므로 당당하게 바쿠시시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바쿠시시로 2파운드를 주자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호의에 대한 예의 혹은 자신의 사후를 위한 기부인 바쿠시시는 제대로 지켜지면 기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페루인들은 친절한 사람에게 더 큰 친절을 베푼다. 물론 이런 사실은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일 것이다.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 나는 얼마나 친절하고 행복한 사람이었던가. 처음 만나는 사람이 아닌 내 주위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가.
- 하얀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 내리자 온 세상이 그저 희기만 했다.
-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졌다는 것은 결국 여행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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