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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위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중세 유럽을 지배한 매혹적인 여인

일루젼 2021. 11. 2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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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앨리슨 위어 / 곽재은

원제 : Eleonore d'aquitaine 
출판 : 루비박스
출간 : 2011.03.20 


 

역사서로 분류가 되어있지만, 전기문학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왕비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한 여인의 일생을 흐름대로 그려내고 있는데, 인물들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읽고 있는 게 소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흥미롭다. 당시 인물들의 감정 상태 등을 추정해 저술하고 있으므로 일종의 소설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한다.  

(물론 첨부된 자료문헌이나,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펼 때 인용한 다른 학자들의 의견들을 종합해볼 때 완전히 근거가 없는 내용들은 아닐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등장 인물의 외모나 성격에 관해서는 사료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인지 통설과는 다르게 묘사하는 부분들도 있는데, 필리프 2세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또 혼외자나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는 깊게 다루지는 않는데, 최대한 엘레오노르에게 집중한 서사로 표현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즐겁게 읽었던 부분들은 당대의 일상생활이나 풍습에 관한 묘사들이었다. 여관에서는 간판 대신 문에 푸른 가지 다발을 걸어 표식을 삼았다거나, 성 내 사람들의 식사 형태나 예법 등에 대해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었다. 당시의 파이프 롤스에 기록된 내역서를 근거로 해당 시기에 이러저러한 물품을 구매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상황은 이러저러했을 것이다 등으로 살펴나가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즐거웠다. 

 


 

-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비를 지냈고, 열 명의 자식을 낳아 잉글랜드 두 왕의 모후가 되었으며 시칠리아와 카스티야 두 왕국의 왕비를 딸로 두었던 12세기 유럽의 한 여인이 있었다. 그 후로도 그녀의 자손들은 대대로 유럽제국의 왕과 황제, 왕비를 지냈고 그 가운데 두 명은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그녀가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다.     

 

- 트루바두르의 시대는 알비파 십자군으로도 알려진 카타르파 이단의 대대적인 박해와 함께 13세기 초에 막을 내린다. 몽세귀르 학살로 정점에 달했던 이 박해는 남프랑스를 완전히 피폐하게 만들었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그 선조들의 비호 아래 융성했던 문화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 물론 중세 여인들은 공적인 교육을 받는 일도 드물었다. 귀족 가문의 어린 소녀들은 가정이나 수녀원에서 신부수업을 받는 것이 전부였을 뿐, 읽기나 쓰기를 배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소녀들이 글을 알게 되면 연애편지를 쓰거나 추잡한 소설을 읽는데 재능을 허비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매우 예외적이었다. 기욤 공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딸이 어느 정도 공식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고, 엘레오노르는 모국어 읽는 법을 배웠다. 엘레오노르에게 많은 상송을 알려준 베르트랑 드 보른은 '엘레오노르가 읽기를 터득했기 때문에 그 곡들이 낯설지 않았다' 고 썼다. 또한 라틴어 교습도 받았다. 이 어린 소녀는 트루바두르들의 연애 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역사가들의 주장처럼 엘레오노르가 조부의 시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낭만적인 문학과 시를 사랑했던 기욤 9세의 성향이 그녀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으며, 훗날 그녀는 베르나르 드 벤타두르 같은 음유시인을 후원하게 된다. 

 

- 교회의 보물 목록은 엘레오노르가 루이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던 크리스털 꽃병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모든 봉건영주들로부터 온 선물들로 더욱 풍부해졌다. 교회의 높은 제단에는 앞으로 3백 년 동안 오리플람, 곧 생드니의 성스런 깃발이자 프랑스 국왕을 상징하는 태양의 군기가 보존될 것이다. 생드니는 이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와 상파뉴 백작 테오발드를 비롯한 수천 명의 방문객과 순례자들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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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크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1차 십자군 전쟁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고, 예루살렘에 라틴왕국이 통치하는 네 곳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노르만인과 프랑스인이 다스렸던 이 국가들은 유럽인들에게 우트르메르, 곧 해외령으로 불렸다. 팔레스타인의 성지를 지키고 순례자들을 보호하려면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으므로, 수도사들로 구성된 두 개의 종교 기사단이 생겨났다. 1099년에 창설된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구호 기사단)과 1118년에 창설된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청빈 기사단(성전기사단)이 그것이었다. 두 기사단은 성지순례자들의 안전을 수호하는 한편, 특히 예루살렘에 근거를 두었던 막강한 성전기사단은 유럽 왕들의 은행 역할을 했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앙주의 조프루아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어린 아들 앙리를 처음 본 순간 끔찍한 예감을 했었다. 베르나르두스는 '그들은 악마로부터 와서 악마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이 명망 높은 성직자는 앙주 가문의 극악무도한 선조들을 일컬어 말한 것이었다. 이 가문의 먼 선조 백작 가운데 한 명은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멜뤼진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왔다고 한다. 멜뤼진은 네 명의 아이를 낳았고, 단 한 가지 결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그 유일한 단점은 아무리 설득을 해도 멜뤼진은 미사를 드리는 동안 절대 교회 안에 머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곤혹스러웠던 남편은 비밀리에 기사 네 명을 보내어 미사를 드리는 동안 아내의 외투를 밟고 서서 미사가 끝날 때까지 아내를 붙잡고 있도록 했다. 기사들은 명령받은 대로 했다. 하지만 사제가 성체를 드는 순간 멜뤼진은 기사들을 밀쳐내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두 아이는 남겨 두고 두 아이만 품에 안은 채였다. 그 이후로 그녀의 행적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멜뤼진이 악마의 딸이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체를 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라고 수군댔다. 12세기 무렵 이 전설은 꽤 널리 알려졌고, 양주의 백작들은 이 멜뤼진의 자손이라고 여겼다. 그 외에도 악명 높은 뤼지냥 가문을 비롯하여 비슷한 전설을 몰고 다닌 백작 가문들이 꽤 있었으나, 그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앙주 가문이었다. 

 

- 1135년 무렵 런던은 윈체스터를 능가하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왕궁은 각지의 성들을 옮겨 다니며 순회를 했고, 그때마다 주요 정부기관도 같이 움직이곤 했다. 그러나 헨리 2세 때부터는 행정기관들이 웨스트민스터에 정착하게 된다. 이와 함께 왕실의 의식과 의례는 1065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리고 색슨 왕조 시절까지 역사가 거슬러 오르는 웨스트민스터 궁에 집중되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초기 앙주 가의 왕들을 보필했던 최고위 관료는 최고 사법관이었다. 이들은 사법과 정치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국왕의 부재 시 국왕을 대리했다. 또한 왕실 재무를 담당하는 '익스체커', 곧 재무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의 수장이기도 했다. 이 재무 법원은 세입을 징수, 배분하고 그와 관련된 재판을 진행했으며, 왕실 회계를 감사했다. 왕실의 보물은 삼엄한 감시하에 하급 익스체커에 보관되었고, 상급 익스체커에서는 '체크무늬' 천을 깔고 주판이 달린 탁자 앞에 재무 관료들이 모여, 주처 재정을 총괄하는 수석 관리 셰리프가 올린 세입을 확인했다. 징수된 세액의 합계는 엄대에 홈을 새겨 기록했고, 기다란 양피지 두루마리에 세입과 세출 내역을 적어 파이프 더미처럼 쌓아 보관했다. 현재 영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공문서 파이프 롤스는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 국왕은 사법의 중심이었다. 윌리엄 1세와 그 후계자들은 색슨 왕족의 법을 받아들여 몇 가지 수정을 가했고, 헨리 2세는 과감히 클래런던 헌장을 공포한다(1164). 헨리 2세는 이것이 증조부 헨리 1세 시절의 법과 관습을 재진술해 놓은 것이라 주장했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유럽 전반에 법전과 시민법의 수정이 있었던 시기에 헨리는 잉글랜드 전역에 적용되는 공통법인 '보통법'을 발전시키고 사법 행정에 중요한 변화를 몰고 온 핵심인물이었다. 국왕은 또한 국가와 교회의 요직을 임명하고 외교 정책을 결정하며, 전쟁을 일으키거나 평화협상을 하고, 군대의 최고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실행하기 위해 왕령지 수입, 봉건적 부과조, 세금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했다. 또한 왕에게는 법과 질서를 공포하고 유지하는 책무가 있었고, 최고법정인 국왕 법정, 곧 '쿠리아 레기스 curia regis'를 주재했다. 

 

- 12세기에는 많은 목조 성들이 사각형 탑을 갖추고 방어에 훨씬 유리한 석조 성으로 개축되었다. 석조 성들은 두툼한 몸집을 자랑했고 작은 화살 구멍들로 창문을 대신했다. 외풍이 심하고 습기가 많았으며, 사람들은 별도의 바닥재 없이 군데군데 골풀을 흩뿌려놓은 흙바닥 위에서 생활했다. 난방을 위해 홀 중앙에 불을 피웠고 천정의 통풍구로 연기를 빼냈으며, 작은 방은 화로로 난방을 대신했다. 탑의 설계를 바꾸어 굴뚝을 설치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실내 벽난로는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원체스터 성에 벽난로를 설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성들은 '컨스터블'의 통제하에 있었다. 컨스터블은 성주가 성을 비울 때는 성주를 대신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고, 평상시에는 해당 지역의 사무를 보고 재판을 하며 행정을 감독했다. 기사들은 비교적 낮은 계급의 군사 엘리트에 속했다. 기사들은 돈을 받고 전쟁에 나갔다. 12세기 내내 기사가 받는 일당은 꾸준히 올라 1189년에는 1실링 정도가 되었다. 또한 상대편 기사를 인질로 잡거나 전리품을 통한 이익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 서임식은 조금씩 형태가 바뀌면서 점점 정교해졌다. 이 무렵의 잉글랜드에는 약 7천 명의 기사가 있었다. 기사들이 가장 즐겼던 행사 가운데 하나는 마상시합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11세기에 마상시합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잉글랜드에는 1194년이 되어서야 리처드 1세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된다. 초기 마상시합은 무자비한 싸움판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 '주스트'라 불리는 개인별 창시합에서 시작하여 '멜레'라 불리는 격렬한 단체 모의전투로 끝이 났다. 죽거나 부상을 입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대신 승자가 되면 큰 상과 상금을 거머쥘 수 있었다. 마상시합에 보다 엄격한 '에티켓'과 신사적 규율이 생겨나게 된 것은, 13세기에 접어들어 기사도 개념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 한발 더 나아가 교회는 당시의 교육 전반을 지배했다. 모든 학교는 주교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성당이나 수도원에 부속된 문법 학교들이 많았고 여기에는 소년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중세의 3학(문법, 수사, 논리학)과 4학(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을 배웠다. 수업은 라틴어로 이루어졌고 매우 엄격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집안의 영특한 소년이 이런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혜택을 받고 고위 성직자로 오르는 것을 안 좋게 보는 편견은 없었다. 실제로 교육에 가장 큰 관심을 쏟은 주체는 소작농 계급이었다. 이들은 비천하고 낮은 신분의 자식에게 학문을 가르치느라 서로 경쟁했다. 반대로, 귀족들은 너무 오만하거나 너무 게을러서 자식들을 가르치지 못했다. 상류층 소년들은 전투 기술 같은 남성적 기술과 지식을 배웠고, 주로 수습기사 신분으로 다른 귀족의 집에 보내졌다. 상대 귀족으로부터 아들이 미래의 명예와 이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에서였다. 따라서 학교나 대학에 아들을 보낸 부모들은 주로 농부, 상인, 장인 계층이었다. 

 

- 기릴두스 캄브렌시스는 헨리가 이따금 성직자들을 조롱하고 걸핏하면 신성모독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헨리를 루이 7세와 비교하면서, 루이는 결단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루이의 문장은 곰, 표범, 사자 따위가 아닌 순결한 백합이 있다고 적었다. 표범이나 사자는 당사 막 만들어지기 시작한 왕실 문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헨리의 문장은 아마도 부친으로부터 사자 한 마리를, 그리고 결혼을 통해 나머지 한 마리를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문장이 붉은 바탕에 황금 사자였기 때문이다. 이 두 마리의 사자는 나중에 헨리의 딸과 결혼한 색소니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방패에 등장한다. 그리고 헨리의 아들이 즉위한 뒤에야 세 마리의 사자 혹은 표범이 나오는 플랜태저넷 가의 문장이 완성되었다. 

 

House of Anjou(Plantagenet) - Henry II (1133–1189) / europeanheraldry

 

- 엘레오노르가 모욕적인 수감 생활을 견디는 동안, 헨리는 정부 로사문드 클리포드와 공공연한 동거를 시작했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못마땅한 어조로 이렇게 기록했다. '오랫동안 비밀리에 간통을 저질러왔던 왕이 이제는 아예 뻔뻔스럽게 모든 사람 앞에서 정부를 내보였다. 그 여자는 허영심 많고 멍청한 자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세상의 장미(로사 문디)가 아니라 음란함의 장미(로사 임문디)이다. 그리고 온 세상이 왕을 모방하기 때문에, 왕은 그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나쁜 모범을 보인 것으로도 죄를 저질렀다.' 1174년 왕은 워터 드 클리포드에게 장원을 하사했다. 그의 딸 로사문드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 리처드 1세는 사자심왕(Richard I, The Lionheart)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실패자였다. 재위 기간 내내 그가 잉글랜드에 머문 것은 채 열 달에 불과하며. 십자군 원정과 대륙의 전쟁들에 온 신경을 쏟느라 왕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왕은 영어를 할 줄 몰랐으며, 모든 면에서 철저히 남프랑스 인이었다. 부왕만큼 행정가로서의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왕의 잔인하고 포악한 품성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의 뛰어난 무훈을 존경했고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되찾으려는 거의 강박에 가까운 몰두와 집착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냈다. 왕의 적수들조차도 리처드를 당대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라고 불렀다. 

 

- 문장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매가 앙주 가문의 초기 문장이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앙주 백작 다섯 명의 이름 '풀크'와 매를 가리키는 단어(falcon)의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매가 아키텐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을 뒷받침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매 문양은 14세기에 에드워드 3세가 처음 쓰기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한 번도 군주의 상징으로 쓰인 예가 없었다. 12세기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상징으로 쓰였다는 증거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벽화가 왕조사적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벽화 제작 시기가 1190년대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러 증거들을 살펴볼 때 이 그림은 1196년 말에 완성되었고 그해에 일어난 어떤 중요한 사건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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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텐의 주민은 로마와 바스크 출신이 주를 이뤘으며 그 지역 풍경만큼이나 다양했다. 12세기의 <콤포스텔라 순례자의 책>이 묘사한 바에 의하면, 푸아투 사람들을 잘생기고 활달하고 용감하고 우아하며 재치 있는 통 큰 훌륭한 군인 또는 기마병이었다. 그런가 하면 생토냉 출신은 다소 거칠고, 가스코뉴 주민은 경박하고 수다스럽고 냉소적이고 성적으로 좀 문란하지만 형편이 허락하는 한 대개 인심이 좋았다고 한다. 사실 상위 주군인 공작의 개입에 거세게 저항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 지역은 공통점이라고는 거의 없는, 아주 이질적인 영주와 신민들을 모아놓은 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래서 아키텐의 공작들은 수도인 푸아티에와 보르도의 인접 지역에서만 가까스로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제아무리 샤를마뉴 대제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고 푸아투의 주화에 샤를마뉴의 초상을 새겨두었다 한들, 결국 이들의 군사적 힘의 원천은 봉신이 제공하는 기사에 있었기 때문에 아키텐 너머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만한 부와 자원을 축적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아키텐은 북프랑스에 비해 정치적, 경제적 발전이 뒤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와인과 소금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소득이 막대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생활은 부유했다. 그리고 종교가 가장 번성했던 곳도 이 지역이었다. 통치자들은 훌륭한 교회와 수도원을 수도 없이 건립하고 후원했다. 유명한 클뤼니 대수도원, 푸아티에와 앙굴렘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들이 대표적이다. 

 

- 남부의 호화로운 궁에 익숙했던 어린 왕비는 자신의 새로운 거처가 된 이 왕궁이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시테섬 서안에 자리한 시테 팔라스는 화살 구멍이 유일한 환기구였고, 낡고 널찍한 대리석 계단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는 오래된 석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들은 작고 어둡고 외풍이 심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왕궁보다는 수도원에 가까웠다. 엘레오노르는 곧 불만을 드러냈던 것 같다. 이듬해 겨울에 루이가 왕비의 거처를 확장하고 세련되게 꾸미도록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외풍을 줄이기 위해 화살 구멍에 나무 덧문을 달고, 벽에는 프랑스 왕궁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시설인 벽난로와 굴뚝이 설치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직접 부르주의 공방에 다양한 디자인의 주단을 주문하기도 했다. 궁중 정원은 엘레오노르의 취향에 맞는 듯했다. 벽과 격자 모양 덩굴로 둘러친 정원 내부에는 아칸서스로 경계를 만든 오솔길이 나있었고, 버드나무, 무화과, 사이프러스, 감나무 등이 우거졌다. 화단에는 장미, 백합, 양귀비 등이 만발했고 박하와 루타, 물냉이, 쑥 향기가 가득한 식물원도 있었다. 프랑스 궁정에는 문학적 전통이나 오락이 없었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자료에 의하면, 엘레오노르는 라틴어 연극을 공연하도록 명하고 트루바두르와 프랑스 음유시인들을 초대하는 등 자신이 익숙했던 환경을 궁 안에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보수적인 프랑스 인들은 트루바두르들이 노래하는 사랑의 이상을 듣고 움찔하긴 했지만, 새로운 왕비가 궁중에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나무 널빤지 위에 테이블보와 냅킨을 올려놓게끔 제안한 것도 그녀였고, 시종들에게 식사 시중을 들기 전 손을 씻도록 한 것도 그녀였다. 궁 안에 있던 생 니콜라 예배당의 성가대 지휘자를 보고서는 당장 해임하고 직접 임명한 사람으로 대체시키기도 했다. 물론 성가대를 지휘하는 실력만큼은 월등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 왕비의 궁중생활이란 숨 막히는 일상의 연속일 뿐이었다. 엘레오노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란 남편의 장식품, 후계자의 모친, 그리고 고상한 취향과 정숙함의 귀감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도와 자질구레한 일들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화창한 날이면 왕비는 귀부인들과 함께 궁중 정원에 앉아 있거나, 사냥을 나가곤 했다. 루이 왕은 여름이면 때때로 궁중 정원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대학자 피에르 아벨라르는 자신의 이 야외 강연에 수많은 귀부인들이 참석했다고 기록했지만, 그 가운데 엘레오노르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 귀족 가문의 부모와 자녀 관계는 대부분 친밀하지 않았다. 왕녀와 귀부인들은 직접 젖을 물리지 않고 젖이 나오는 유모에게 갓난아이를 맡겼고, 자신들은 언제든 다시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사내아이는 다른 귀족 집안으로 보내 기사 교육을 받았고, 여자아이들은 결혼 전까지 수녀원에서 자라는 것이 관례였다. 왕실 자녀들에게는 따로 집이 주어졌고, 어쩌다 여건이 허락할 때나 바쁘고 출타가 잦은 부모와 대면할 수 있었다. 마리 공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자료가 없다. 하지만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볼 때 엘레오노르 역시 딸에게는 소원한 엄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8개월 동안 엘레오노르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당시의 연대기 작가들은 아무 언급도 남기지 않았고, 왕비의 행적과 순례에 얽힌 일화들은 후대의 이야기 속에나 등장한다. 일설에 의하면, 엘레오노르가 갈리카계 장미를 성지에서 가지고 들어왔으며 이것이 나중에 랭카스터 왕조의 상징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방에서 아키텐으로 누에를 들여왔다고도 한다. 이런 전설들이 전적으로 허구였을 것 같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성지에서 그녀가 어떤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의 생활 경험은 엘레오노르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여러 가지 면에서 그 흔적을 남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마틸다와 조프루아는 세 아들에게 가장 뛰어난 교육을 제공하는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전적인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이를 계획하는 것은 조프루아의 몫이었다. 조프루아 자신이 대단히 '훌륭한 교육을 받은' 교양인으로, 라틴어로 대화가 가능하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사에 큰 관심을 보여 고대를 두루 꿸 만큼 박식했고, 항상 전쟁에 나갈 때는 과거에 성공을 거둔 전략들을 자신에게 조언해 줄 학자를 말에 태워 바로 옆에 대동했다. 아들의 스승 콩셰의 기욤은 조프루아 백작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기르고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쏟아붓는 정성에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그의 혼외자식들도 이 혜택을 받았다. 딸 마리는 영국 도싯의 샤프츠버리 수도원의 여자 대수녀원장이 되었고, 추측컨대 뛰어난 시와 번역으로 유명한 신비의 인물 '마리 드 프랑스'가 그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높다. 마틸다는 아들들의 교육에 대해 그다지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1139년 마틸다는 응당 자신의 권리라 여겼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향했다. 

 

- 리무쟁에 있는 리모주에 도착한 공작과 공작부인은 처음에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공작 부부는 도시 성벽 바깥에 천막을 쳤다. 하지만 첫째 날 저녁, 엘레오노르의 요리사가 리무쟁 측에서 관례에 합당한 설비를 갖춘 부엌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불평을 했다. 성에 차지 않는 식탁에 언짢아진 앙리는 그 이유를 물었고, 생 마르시알의 거만한 대수도원장은 공작부인이 도시 성벽 안에 머물 때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경멸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하지만 대수도원장의 무례함은 악명 높은 앙주 가문 혈통의 검은 담즙 가득한 성미를 건드리고 말았다. 앙리는 개축한 지 얼마 안 된 리무쟁 도시 성벽들을 모조리 부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주교도 앙리에게 응당 제공해야 할 것을 내놓지 않기 위한 변명으로 성벽을 이용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엄포했다. 이 일로 남부 봉신들은 입을 다물었고, 여행은 별다른 사고 없이 계속되었다. 가스코뉴에서 앙리는 잉글랜드 정복에 동원할 인력을 충원하고 물자를 모으고 배를 전세 낼 수 있었다. 

 

- 토착 색슨 족은 어쩔 수 없이 소위 '노르만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했다. 1100년 헨리 1세는 색슨 혈통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 정복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경멸 어린 비웃음만 샀을 뿐이었다. 잉글랜드 사회를 나누는 구분선은 확고하고 분명했다. 노르만 귀족들이 토지 대부분을 소유했고 색슨 백작들은 축출당했으며, 노르만 법률이 사회를 지배했고 노르만 프랑스어가 14세기 말까지 궁정, 상위 귀족계층, 법정에서 쓰였다. 1066년 이후 관료들의 공식어는 라틴어였다. 오늘날 우리가 중세 영어라 부르는 토착어를 쓴 사람은 잉글랜드 현지인들뿐이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현지 언어로 쓰인 중요한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것을 계기로 점차 영어가 모국어로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의 시대에는 두 민족이 조금씩 융화를 이루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가령, 과거 노르만 잉글랜드의 왕들은 백성을 지칭할 때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13세기 무렵부터는 단독으로 '잉글랜드인'이라는 호칭만 쓰이게 되었다. 

 

-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 이전까지만 해도 통치 연도를 계산하는 기준은 항상 왕의 대관식 날짜였다. 중세 초 군주들이 부활절이나 성신강림절, 성탄절에 연도를 하며 엄숙한 분위기에서 왕관을 쓰는 의식을 행했던 것은 이처럼 왕권의 신성한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군주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은 중세 기독교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이었다. 헨리 1세 이후로 모든 국왕은 자신의 손길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으며 연주창 환자의 몸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국왕은 백성에게 지켜야 할 의무도 있었다. 대관식에서 국왕은 교회와 국가의 평화를 유지하고 폭력과 악행을 금지하며 공정과 자비로서 모든 것을 판단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물론 이 맹세를 실현하는 방식은 철저히 군주 개인의 해석에 달려있다.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이며 정치평론가 중의 하나인 솔즈베리의 존은 '군주는 오직 자신의 마음이 내리는 판단만을 따른다'고 적었다. 또한 그는 모든 국왕은 반드시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신의 법을 읽고 매일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은 대법관으로, 법률과 행정상의 공문서를 발행하는 관청의 책임자였다. 대법관은 국왕의 고문일 뿐 아니라, 왕의 비서이며 국새를 관리하기도 했다. 대법관은 익스체커 회의에 참석했고, 왕실의 행정업무를 책임졌다. 국왕이 자문을 구한 대상 중에는 고위 귀족들도 있었다. 사실상 군사 귀족정치의 핵심을 이루었던 이들은 각자의 땅을 가지고 그곳에 성을 지은 다음, 권력의 기점으로 삼았다. 잉글랜드에 성이 등장한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였다. 초기 성들은 망루나 요새 역할을 하는 목조탑 형태의 단순 구조였으며, 내부에는 넓은 홀과 영주의 방이 있다. 홀보다 위쪽에 있던 이 방들에서 영주와 그 가족이 잠을 잤고, 나머지 사람들은 홀 바닥에 짚 자리를 깔고 잤기 때문에 사생활 보호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성은 '모트', 곧 인공으로 만든 낮은 둔덕 위에 세워졌고, 목책과 해자로 주위를 둘렀다. 목책 안쪽에는 작업장, 마구간, 부엌 등이 자리한 안마당인 베일리가 있었다. 부엌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항상 이렇게 건물 바깥에 따로 설치했다. 영주에게 신변의 보호를 의탁한 평민이나 농노들이 외부의 침입이나 공격이 있을 때 가축을 데리고 피신해 와 있곤 했던 장소가 바로 이 베일리였다. 

 

- 성탄절 기간에는 열 이틀간 종교의식과 축제가 이어졌다. 모든 잉글랜드 국왕은 이 기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 집회를 열었다. 교회의 분위기가 가장 들뜨는 때도 이 무렵이다. 성탄절 기간 동안에는 '소년 주교를 임명하고, 고위 성직자들을 익살스럽게 풍자하는 바보 축제'를 열었다. 하지만 이교적인 성격의 행사는 엄중하게 다스렸다. 

 

-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대교회와 병원의 설립자이며 흉내 내기의 달인이었던 레허러는 헨리 1세의 어릿광대 출신이다. 

 

- 1180년 무렵의 런던은 번잡하고 번화한 도시였다. 한 채의 으리으리한 석조 성당, 13채의 수도원, 126개의 교구, 영주들의 거처, 길드 집회장, 학교 등이 들어섰다. 런던은 교역의 가장 큰 중심지였고, 다마스쿠스 비단이나 리모주 법랑 같은 다양한 사치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선 대로들이 상당수 있었다. 상인들이 유럽 전역에서 수입한 상품을 파는 시장과 노점들도 있었다. 조리된 음식을 사갈 수 있는 음식점도 강변에 들어섰다. 인구는 끊임없이 불어났고, 매주 토요일마다 말 시장이 열렸던 스미스필드 같은 교외 마을들이 점차 성벽 너머로까지 팽창해갔다. 이런 교외 마을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시민들이 훌륭한 정원을 가꾸고 목골 구조의 집을 지어 살았다. 런던에는 즐길 거리도 많았다. 매년 카니발이 열렸고, 사람들은 곰과 개의 싸움인 베어 베이팅, 닭싸움, 경마, 활쏘기, 레슬링 등에 참여했다. 소년과 젊은이들은 축구를 즐겼고, 어른들은 말을 타고 와서 경기를 구경했다. 사순절 기간에는 매주 일요일마다 마상시합이, 부활절에는 템스 강에 배를 띄우고 벌이는 창 경기가 개최되었다. 겨울에는 동물 뼈로 스케이트 날을 만들어 꽁꽁 언 북쪽 습지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푸른 가지 다발을 대문에 걸어 간판처럼 표시를 했던 여관, 선술집 등도 성행했다. 

 

- 잉글랜드는 천연자원이 풍부했다. 석탄은 13세기 이후에 채굴되기 시작했지만 철, 납, 은, 숯, 그리고 데본과 콘월의 주석은 잉글랜드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스태퍼드셔는 이미 도기류의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고, 양모 산업은 12세기 이후 잉글랜드 국부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링컨셔를 중심으로 가내수 공업으로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직물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벨벳은 15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으므로, 당시 생산된 가장 고가의 직물은 심홍색으로 염색된 천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헨리 2세와 그 왕족에게만 독점적으로 공급되었다. 초록 염색 천은 심홍색의 절반 가격이었고, 더 부드러운 질감을 자랑했으나 심홍색만큼의 인기는 끌지 못했다. 줄무늬 직물도 었고, 시토 수도회 수도사와 가난한 민중들이 입었던 흰색의 거친 옷감도 있었다. 월트셔에서 생산된 리넨은 여성들의 머리쓰개와 남녀 모두의 속옷을 만드는 데 쓰였다. 

 

- 교역은 주로 서신 왕래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 이 시기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를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실제로, 왕족, 귀족, 기사, 상인, 장인, 순례자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육로 또는 해로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이동했다. 물론 이 여행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워틀링 가도, 어민 가도, 포스 가도 같은 로마시대의 도로와 이크닐드 길 같은 선사시대 도로들이 그대로 쓰였다. 12세기에는 이 모든 도로들이 '왕의 도로'로 지칭되었고 국왕의 보호를 받았다. 이 같은 도로들은 두 대의 마차가 마주 지나가거나 무장한 기사 열여섯 명이 나란히 옆으로 걸을 수 있을 만큼의 폭을 확보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었다. 왕의 노로들은 자갈 포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타거나 마차, 포장마차 등을 타고 이동했다. 

 

- 잉글랜드는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중해 국가, 플랑드르, 옛 벨기에의 에노 지방,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라인 강변의 독일 공국들과 활발한 무역을 했다. 아라비아에서 금이 수입되기도 했다. 템스 강은 항상 배들로 붐볐고, 런던의 부두들은 상인들이 온갖 나라에서 가져온 상품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상인들은 목재, 모피, 금, 은, 보석, 직물, 쇠사 금갑 옷, 그리고 심지어 왕실에서만 쓰던 사냥 매인 흰 바다매까지 수입했다.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수출한 주요 물품은 주로 푸아투와 가스코뉴, 오세르 산지의 와인이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결혼식은 와인 무역의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잉글랜드 사람들의 식탁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했다. 비옥한 토양에서 몇몇 종류의 토종 작물들이 재배되었고, 초지에서 자라는 야생식물들도 요리에 쓰였다. 여러 과일과 다양한 종류의 새가 요리되어 식탁에 올랐다. 도시와 장터에서는 생강, 육두구, 정향, 계피 같은 동방에서 들여온 향료들이 팔렸다. 육류가 주식이었지만, 신선한 생고기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여름뿐이었다. 가을 이후에는 가축이 도살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류를 냉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중세 사람들은 고기에 훈제나 염장을 해서 겨울을 나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돼지를 키웠고, 부자들은 사슴, 멧돼지, 백조, 산토끼, 심지어 공작을 사냥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생선들이 대량으로 소비되었다. 독실한 신자라면 육류를 금해야 했던 금요일과 사순절 기간에 특히 생선 소비가 집중되었다. 대개의 장원과 수도원에는 물고기를 키우는 연못이나 개울이 있었고, 성 주변의 해자에도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 오늘날 서양인들에게 잘 알려진 요리법 가운데는 12세기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오르는 것들도 있다. 닭고기 스튜의 일종인 '코코뱅 coq au vin', 고기에 야채를 넣고 찐 '뵈프 부르기농 boeuf bourguignon', 생선이나 조개류에 향료를 넣고 찐 '부야베스 bouillabaisse' 등이 그것이다. 허브 향을 첨가한 오블렛이 인기 있었고, 스튜나 파이 종류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감자는 아직 없었고 고기 요리는 두꺼운 나무 접시에 담아 먹었다.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은 접시를 쓸 수 있었지만 이것도 두 사람이 하나를 같이 쓰는 경우가 많았다. 과자류와 디저트도 인기였다. 말린 과일, 설탕절임 과일, 젤리, 비스킷, 타르트, 와플, 고기나 과일을 튀긴 프리터, 생강쿠키, 매커룬 같은 과자가 인기 품목이었다. 

 

-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식사 시간은 계절에 따라 조금 다르긴 했지만 대략 오전 아홉 시에서 정오 사이였다. 성이나 장원 영주의 집에서는 정식으로 형식을 갖춘 식사가 홀에서 의식처럼 행해졌고, 이때 영주와 그 가족들은 높은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수건, 대야, 물통 등이 함께 놓였다. 사람들은 나이프와 스푼을 이용하여 식사를 했고, 아직 포크는 개발되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당시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던 소금을 담은 용기, 와인 잔 등도 함께 놓였다. 하인들이 식사 시중을 도왔고, 사람들은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거나 사업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음악이 연주되기도 했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헨리는 당대의 중세인으로는 대단한 관용을 지닌 인물이었다. 다른 기독교인 통치자들과는 달리, 그는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았고 박해를 피해 건너온 남프랑스의 알비파 이단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통념대로 동성애는 신을 화나게 하는 죄라고 여겼고, 동성애와 그 외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동을 한 혐의를 받은 성전 기사단원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들은 죄를 자백하고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 잉글랜드에서 왕의 인가를 받고 최초로 고문이 이루어졌던 것이 이때였다. 

 

- 하지만 이런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기 작가들은 35년간에 걸친 헨리 2세의 재위 기간을 통틀어 엘레오노르가 공식 행사 때 국왕 옆에 배석했다던가 아이를 낳았다거나 하는 왕비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의 전기 작가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엘레오노르가 왕비로서 정치적 권력을 별로 누리지 못했으며, 헨리도 왕비의 역할을 왕실 내부의 일과 의례에 관련된 것에만 국한시켰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이 시기 공문서들 가운데는 엘레오노르가 상당한 의사결정의 자율권이 있었고, 특히 헨리가 자주 왕국을 비우는 동안에는 비록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더라도 행정에 꽤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발견된다. 더구나 12세기의 잉글랜드 왕비들은 남편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왕비들은 국왕과 왕권을 공유했다. 그러므로 여성이라는 선입견, 그리고 헨리의 뛰어난 치적에 가려 엘레오노르의 역할이 부각되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연대기 작가들은 왕비의 활동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헨리가 즉위한 이후 몇 년간, 엘레오노르는 국왕이 대륙을 방문할 때면 잉글랜드의 섭정 역할을 했다. 정례 업무를 처리하거나 국왕이 해외에서 보낸 지시사항들을 실행하고, 행정 관료들의 활동을 승인하거나 분쟁을 중재했으며, 옥스퍼드의 시장, 콘월의 주석 광상, 우드스톡의 제분소 등의 회계 감사를 했다. 1163년 이전까지는 자신의 이름으로 각종 공문서를 발행했고, 왕비의 전담 대법관이 이를 인증했다. 최고 사법관과 더불어 공동 섭정을 맡았고, 웨스트민스터, 쉘부르, 팔레즈, 바이외, 보르도 등지의 법정에서 재판을 주재하기도 했다. 엘레오노르의 판결문은 왕비의 서기가 작성했고, 왕비의 말을 서기들이 라틴어로 받아 적은 이 문서에는 '신의 은총을 받은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르'라는 서명이 붙었다. 

 

- 먼모스의 제프리가 켈트 족의 전설을 모아 아서 왕 이야기의 최초 베스트셀러를 써냈다면, 웨이스는 모든 기사에게 동등한 서열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아서 왕의 '원탁'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1173년을 즈음해서는 시인 토머스가 최초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헨리의 이복누이로 알려진 마리 드 프랑스 역시 아서 왕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해 다섯 편의 서정시를 썼다. 엘레오노르의 딸 상파뉴 백작부인 마리는 크레티앙 드 트루아를 후원했다. 크레티앙은 아서 왕 전설과 관련하여 퍼시발과 '랜슬롯' 등을 포함한 다섯 편의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카멜롯을 무대로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사랑 이야기를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엘레오노르가 귀네비어의 이야기가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많았고 또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기는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아직 불충분해 보인다. 

 

-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의 궁중 문화에 상당한 지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왕비는 트루바두르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을 꾸준히 후원함으로써 '남프랑스'의 세련된 문화적 전통이 앙주 제국 전반에 확산되도록 했고, 이후에는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유럽 전역까지 그것을 퍼뜨렸다.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엘레오노르에게 작품을 헌정했다. 그 가운데는 몬머스의 제프리가 라틴어로 썼던 <브리튼 왕 열전>을 1155년에서 1157년경 프랑스어로 번역한 로버트 웨이스도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엘레오노르를 '현명하고 뛰어난 미덕을 지닌 여인' 이라며 찬양했다. 헨리 2세 역시 웨이스의 작품들을 사랑하여 그를 궁정 공식 낭독자로 두었다. 1160년에는 웨이스에게 노르망디 공작들의 역사를 운문으로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 결과물이 <루의 이야기>이다. 루는 최초의 노르망디 공작이며 정복왕 윌리엄의 직계 조상인 롤로를 가리킨다. 헨리의 명으로 쓰였거나 헨리에게 헌정된 책들은 자신의 조상들에 대한 헨리의 관심을 반영하듯 대부분 역사서였다. <브리튼 왕 열전>은 1135년을 전후하여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아서 왕의 전설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삽시간에 아서 왕은 당대의 기사도와 군왕의 이상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이야기와 저작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단순한 신화나 전설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라 여겼고, 수많은 작가들과 시인들에 의해 무수히 각색되고 되풀이되었다. 단지 몇몇 소수의 사람들, 가령 리보의 엘레드와 뉴버그의 월리엄 같은 이들만이 제프리의 <열전>에 의구심을 보였다. 헨리와 엘레오노르 두 사람은 아서 왕 전설, 혹은 '브리튼 설화'에 대단히 매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헨리는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들을 배워왔고, 한편 엘레오노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 기사와 귀부인들은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모방했으며, 이야기 속의 기사도 윤리는 12세기 귀족들의 주된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아서 왕과 관련된 장소들, 예컨대 웨일스의 우스크 강이나 서머셋의 글라스 턴베리 등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왕과 왕비 역시 친히 이곳들을 방문했다. 아서 왕이 언젠가는 왕국에 귀환할 것이라는 추측마저 무성해졌다. 이를 듣고 불안감을 느낀 헨리 2세는 글래스턴베리에 있다는 아서 왕의 무덤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1190년 아서와 귀네비어의 뼈로 추측되는 유해가 나왔고, '위대한 왕 아서가 여기 아발론 섬에 잠들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납 십자가도 출토되었다. 이때의 발견으로 아발론섬은 지금까지 글래스턴베리로 알려져 오고 있다. 유해는 성대한 의식을 치른 후 교회에 매장되었다. 

 

- 헨리 2세의 궁은 문화 수준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왕을 중심으로 별별 일과 사건들이 정신없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이기도 했다. 중세의 다른 모든 궁들처럼 헨리의 궁도 곳곳의 성, 궁, 수도원, 장원의 별관, 사냥 별장 등을 순회하며 떠돌았다. 한 곳에 짧게는 며칠, 길어봐야 몇 달 정도 머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관행이 굳어진 것은 정무상의 필요나 왕의 사냥 원정을 위해서, 또는 거처를 비우는 동안 청소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2세기의 위생 상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원시적인 옥외 변소나 요강이 전부였으며, 2백 명이 넘는 상주인원이 한 공간에 머무르다 보니 악취마저 대단했고, 특히 여름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헨리 2세는 12세기의 모든 군주 가운데 가장 여행이 잦았다. 월터 맵의 푸념처럼 왕은 '무슨 전령처럼,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역과 역 사이를 답파하며 쉴 새 없이 이동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궁정 사람들에게 한 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왕들처럼 가만히 궁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지방 곳곳을 샅샅이 훑고 다니면서 그야말로 모든 사람의, 특히 국왕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의 동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헨리를 수행했던 이들은 궁중 생활의 끔찍함에 대해 한탄했다고 한다. 월터 맵은 '우리의 옷은 다 낡아 헤졌고, 우리의 몸과 가축은 골병이 들었고, 우리의 병든 영혼은 한시도 치유받을 틈이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왕은 이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했고, '먼지와 진흙 구덩이의 불편함을 대단한 인내력으로 견뎠다.' 헨리는 여행 일정에 대해서도 도무지 예측 불가능하기로 악명 높았다. 왕은 어떤 궁에서 하루를 머물겠다고 말하면, 이튿날에는 난데없이 아침 일찍 출발을 명하며 모든 일정을 뒤엎어버리기 일쑤였다. 

 

- 궁에 딸린 관료와 시종 만도 2백 이상을 헤아렸고, 동행한 하인들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요리사, 빵 굽는 사람, 과자 굽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과일류, 가금류, 와인, 고깃간, 술 창고, 각종 잔, 접시, 버터 등을 담당하는 급사나 장인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식료품의 공급과 조달, 부엌과 식품저장고의 관리를 책임졌다. 여기에 사제, 서기, 화가, 의전관, 사냥꾼, 뿔 나팔 부는 사람, 파수꾼, 경호원, 궁수, 중기병, 고양이 잡는 사람, 늑대 쫓는 사람, 사냥개 관리인, 왕실 고양이 관리인, 천막 관리인, 촛불 시종, 국왕 침대 운반자, 국왕 재단사, 세탁하는 사람 등이 보태졌다. 특히 세탁 시종 가운데는 국왕의 옷을 말리고 목욕을 준비하는 시종도 있었는데, 이 시종들이 헨리의 목욕 수발을 얼마나 들었을지는 의문이다. 1209년 존 왕은 6개월 동안 여덟 번째 목욕을 하면서 스스로도 놀라 했다고 한다. 여기에 학자, 예술가, 배우, 가수, 주사위 놀이꾼, 도박꾼, 광대, 이발사, 그리고 마임배우, 곡예사, 마법사, 요술사, 점술가, 매춘부와 뚜쟁이들까지 가세했다. 솔즈베리의 존과 월터 맵이 헨리의 궁을 가리켜 추문과 경박함의 온상이라며 경멸적으로 비꼬았던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특히 솔즈베리의 존은 헨리의 궁을 고대 바빌론의 왕실과 비교하면서, 유행을 쫓는 귀족과 한량들의 여성화된 의복, 음탕함을 부채질하는 다성 음악, 그 옛날 신앙 깊은 자들이라면 응당 타락이라고 손가락질했을 문란한 성문화, 정도를 넘어선 춤과 오락, 도박 등을 힐난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추악한 것은 궁에서 행해지는 조야한 마임과 음란한 연극이라고 꼬집었다. 존은 과장된 연기와 저속한 익살로 범벅된 이런 궁중공연들은 관객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모조리 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 엘레오노르 왕비 역시 별도의 궁인과 관료, 수행원을 거느렸다. 왕비는 귀부인들과 귀족 딸들의 시중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모두 보수가 지급되었는데, 급료를 받거나 이따금씩 선물이 내려졌다. 잉글랜드 궁녀의 존재가 최초로 등장한 문헌이 바로 이 여성들에게 보수를 지급한 내용이 기록된 문서이다. 처녀들은 정해진 시간을 두고 정기적으로 왕비를 보필했고, 결혼한 귀부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근무를 했다. 아키텐과 프랑스에서 세련되고 질서 잡힌 궁정 문화를 겪어온 엘레오노르였지만, 헨리의 궁에 그와 비슷한 수준을 강요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몇 가지 예의 규칙들을 마련해놓기는 했다. 가령 누구든 왕비의 면전에서 당장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머리 손질만큼은 말끔히 하고 배알을 청하라는 것 등이었다. 사실, 그 이상의 제대로 된 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 그리고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 왕저에서 왕비는 셋째를 출산했다. 왕자의 이름은 리처드라 붙여졌고, 유모 세인트 앨번스의 호디에르나의 손에 맡겨졌다. 호디에르나는 엘레오노르와 같은 날에 아들을 낳았다. 리처드의 수양 형제인 이 소년은 훗날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자연사에 관한 논문과 유럽인 최초로 자력을 연구한 업적을 남겼다. 호디에르나는 리처드를 정성으로 돌보았고 리처드도 유모를 무척 따랐다. 리처드는 나중에 왕이 되고 나서 자신을 키워준 답례로 유모에게 후한 연금을 내렸다. 리처드는 죽은 형 윌리엄을 대신하여 푸아투와 아키텐의 상속자로 지명되었을 것이다. 디케토의 랄프는 어릴 때부터 리처드가 엘레오노르에게 특별한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멀린의 고대 예언 가운데 하나를 소개했다. 12세기 당시에는 모두들 이 예언이 헨리 2세와 그 가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예언의 내용은 이랬다. '깨어진 서약의 독수리가 세 번째 둥지에서 기쁨을 찾으리라. 여기서 독수리는 엘레오노르를, 깨어진 서약은 루이와 엘레오노르의 이혼을, 그리고 세 번째 둥지는 셋째 아들 리처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리뷰자 주 : 유모의 아들은 Alexander Neckam를 말하는 듯하다.)

- 역시 이를 두고 몇몇 역사가들은 헨리가 로사문드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우드스톡으로 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3월 16일에 국왕은 다시 사우샘프턴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팔레즈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부터 헨리는 다시 4년간을 해외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곧장 멘으로 말을 달려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을 제압했고, 그들의 성과 거처를 아예 가루로 만들다시피 철저히 파괴했다. 부활절 즈음에는 앙제로 와서 엘레오노르와 만났고,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왕비는 이때 막내를 임신했다. 

 

- 윌리엄은 최근에 작위를 받은 기사였다. 당시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월리엄은 월트셔의 어느 귀족 가문의 넷째 아들이었으나, 그의 몫으로 물려받을 영지가 없었기 때문에 직업군인이 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마셜은 마상 경기에서 이미 여러 차례 우승을 했고 많은 상금도 받았던 터라 명성이 높았다. 엘레오노르 왕비 역시 윌리엄을 어느 멜레 경기에서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큰 키에 갈색머리, 고상한 외모를 지녔던 이 젊은 기사는 앙주 가문에 충성을 바쳐왔고, 어느덧 앙주 가의 사람들도 윌리엄의 충성과 용맹, 인품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엘레오노르 왕비는 그에게 목숨까지 빚진 셈이었다. 왕비는 패트릭 백작을 기리기 위해 푸아티에의 생 힐레르 수도원에서 매년 그를 위한 미사를 올리도록 성금을 전달했다. 그리고 윌리엄의 용맹에 감동하여 기꺼이 뤼지냥 일파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구해주었다. 적진에서 풀려난 윌리엄은 푸아티에 궁에 왕비를 알현하러 왔고, 엘레오노르는 윌리엄을 크게 칭찬하며 그의 이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용감하고 자상한 여인인 왕비는 그에게 말, 무기, 금, 의복을 듬뿍 하사했다. 또, 궁의 모든 문을 열어, 개떼를 상대로 덤비는 한 마리 멧돼지처럼 용감히 싸웠던 그의 패기를 드높여 주었다.' 엘레오노르는 또한 국왕의 승인을 얻어 윌리엄을 헨리 왕자의 경호원이자 기사도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삼았고, 곧 윌리엄과 왕자는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기사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던 윌리엄 마셜은 이렇게 잉글랜드의 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그는 앞으로 다섯 명의 잉글랜드 왕을 모시며 그들의 가장 충직한 친구가 되었고, 50년 뒤 헨리 3세가 즉위했을 때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아 잉글랜드를 통치하기도 했다. 

 

- 엘레오노르의 전기 작가들은 그녀의 푸아티에 궁이 아키텐 선조들의 궁전 모습을 판에 박은 듯 재현한 모습이었다고 묘사한다. 이 궁은 기사도와 투르바두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궁정 연애가 꽃을 피웠다. 최근까지도 역사학자들은 엘레오노르가 딸 상파뉴 백작부인 마리와 함께 푸아티에에서 그 전설적인 '사랑의 법정'을 주재했다고 믿었다.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들이 계속 노년의 엘레오노르를 칭송하는 노래와 시를 지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엘레오노르가 트루바두르와 시인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후원했던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사랑의 법정은 마리 백작부인의 트루아 궁에서 사제로 있던 안드레아 카펠라누스가 만들어낸 문학적 허구에 불과하다. 그는 오비디우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엘레오노르의 푸아티에 궁이 헐리고 난 1174년에서 1196년 사이에 궁정 예절에 대한 책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안드레아는 엘레오노르와 그녀의 딸 마리, 조카 이사벨라, 플랑드르 백작부인 앙주의 엠마, 나르본 백작부인 에르망가르드 등이 이 법정을 주재했고, 젊은 사내들이 궁정 연애에 관한 문제를 들고 올 때 시시비비 판정을 내려주었다고 했다. 안드레아에 의하면 이 법정의 판결은 서른한 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법전'을 기초로 했고, 엘레오노르가 내린 판결 중 하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드레아가 이 책에서 엘레오노르를 언급한 것은 실제 그녀가 했던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명성 때문이었다. 

- 헨리는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이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170년 3월 3일 국왕은 엘레오노르에게 노르망디를 부탁하고 거센 폭풍우를 뚫고 바르플뢰르를 출발하여 포츠마우스로 건너갔다. 엘레오노르는 노르망디의 최고 사법관 르 옴므의 기욤의 도움을 받아 도버 해협의 모든 항구를 봉쇄했다. 베켓과 그의 추종자들이 잉글랜드로 넘어와 왕을 파문시키겠다는 위협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교황의 금지령을 전달하려 했던 우스터 주교는 분하게도 디페에 발이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로사문드가 수녀원으로 들어간 직후부터 헨리가 공공연하고 태연하게 아들의 정혼녀 프랑스의 알리스와 염문을 뿌렸다고 주장한다. 이혼 승인이 떨어질 것을 확신한 헨리는 알리스를 잉글랜드 왕비에 앉히고자 했다. 헨리와 알리스의 관계는 로사문드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추문 거리였다. 알리스는 왕녀인 데다가 헨리의 아들과 정혼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헨리 국왕 부부의 이혼에 대한 갖가지 억측과 소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기랄두스는 헨리가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배제하고, 알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앙주 제국을 물려줄 결심을 했으며, 또한 엘레오노르에게 물들지 않은 유일한 아들인 존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 필리프는 앙주 제국을 산산조각 내고 헨리의 대륙 영지들을 프랑스 왕국으로 통합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그의 모든 정책은 전적으로 이 목적을 집중되었고, 그래서 필리프는 앙주 제국의 가장 위험한 적이 된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형, 붉은 기가 도는 얼굴색, 헝클어진 머리에 위생관념마저 엉망이었던 필리프는 유머나 우아함, 지적 소양 등은 부족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통치자로서는 유능했다. 강단 있게 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영리하고 계산적이고 선왕보다 훨씬 예리했다. 정치적 현실주의자에 실용주의자였고, 수완 좋고 욕심 많은 기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앙주 가 사람을 같은 매력은 없는 대신,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고 소심했으며 신경증적인 구석도 있었다. 온순한 말만 골라 탔고, 모든 나무들마다 뒤에는 암살자가 숨어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군사기술은 뛰어나지 못했지만 책략과 집요함으로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뒀다. 

(리뷰자 주 : 필리프 아우구스투스. 그의 외모에 관해서는 미남이었다는 설도 있다.)


 - 헨리 왕은 웰스의 대부제 토머스 아그넬을 새럼으로 보내어 엘레오노르에게 장남의 죽음을 전했다. 아그넬은 그녀가 침착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 엘레오노르는 아들의 죽음을 예감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에서 그녀는 장남이 마치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고, 마치 그 모습이 무덤 조각상 같았다고 말했다. 아들의 손에는 커다란 사파이어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엘레오노르는 헨리가 아들에게 이 반지를 보낸 사실을 몰랐다), 아들의 창백한 얼굴 위에는 두 개의 왕관이 보였다고 했다. 하나는 아들이 대관식 때 받은 왕관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순전히 빛으로만 이루어진 원으로, 성배만큼 빛났다고 했다. 이어 왕비는 물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보관이 영원한 축복의 의미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또한 그토록 순수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광휘가 영원한 기쁨의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보관은 이 세상에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네. 복음서의 말씀처럼 말이야. '신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엘레오노르 앞에서 물러난 대부제는 평정을 잃지 않은 왕비의 태도와 그녀가 꿈의 수수께끼를 헤아림으로써 아들의 죽음을 그처럼 분별력 있고 담대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인 것을 칭송했다. 하지만 왕비의 상심은 너무도 깊었다. 십 년 뒤인 1193년 엘레오노르는 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에게 젊은왕의 기억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 한때 존은 헨리와 로사문드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여겨졌었다. 엘레오노르가 존을 사랑하지 않고 퐁트브로의 수녀들에게 맡겨버린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추측했다. 존의 비뚤어진 성격을 이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왕비가 존 왕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훗날 존이 평화적으로 왕위 승계를 하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도 엘레오노르였고, 그 외에도 이 모자의 돈독한 정을 증명하는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존이 유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엘레오노르가 수감 중이었기 때문에, 모친의 손길을 모르고 자란 존을 안타깝게 생각한 헨리가 아들을 응석받이로 만들었을 것이다. 존은 앙주 가 특유의 매력을 많이 물려받았지만, 더 많은 단점들이 이것들을 가려 하나같이 빛을 잃었다. 

 

- 1187년 2월 17일 헨리는 노르망디로 돌아왔고, 엘레오노르는 동행하지 않았다. 3월 29일 낭트에서 제프리 공작의 미망인은 유복자 아들을 낳았다. 헨리 왕은 손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고자 했지만, '브르타뉴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공작을 아르튀르(아서)라고 불렀다.' 과거 브르타뉴를 통치했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을 기리는 의미인 동시에 앙주 가의 통치에서 벗어나겠다는 도전적인 의사의 표현이었다. 필리프 왕은 아서의 상위 주군으로서 즉각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섰으나 헨리에 의해 거부당했다. 필리프가 어떤 식으로든 브르타뉴에 발판을 마련하면 결코 몰아내기 힘들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콩스탕스가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며느리를 믿지 못했던 헨리는 1188년 자신의 사람인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런드빌과 콩스탕스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 엘레오노르는 하는 행동마다 비범한 현명함을 보여주었고, 지혜롭고 자애로우며 정치가다운 통치자의 면모가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감동했고, 대비의 이런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의 그녀를 둘러싼 추문들을 감히 떠올리기 힘들어했다. 훗날 13세기에 매튜 패리스는 리처드 왕이 자주 왕국을 비우는 동안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의 최고 통치권자 자리에 있었던시기를 회고하면서, 대비가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여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오늘날까지 엘레오노르의 명성이 남아있는 것은 말년의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 같은 행보 때문이다. 

 

- 9월 17일 리처드는 이미 자신이 직접 무거운 벌금형을 내렸던 글랜빌을 파직하고, 헨리의 충직한 신하였던 에섹스 백작 맨더빌의 윌리엄과 더럼 주교 휴 드 퓌제를 공동 최고 사법관에 임명했다. 퓌제의 휴는 야심 찬 귀족 출신으로, 스티븐 왕의 누이 블루아의 아녜스가 모친이었다. 그는 1153년에 더럼 주교가 되었고 잉글랜드 북부에서 거의 군주에 가까운 권력을 휘둘렀고, 유력한 퍼시 가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예순넷이 된 그는 더럼 대성당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정치와 외교 분야의 많은 경험을 쌓은 교양 있는 인물이었다. 

 

- 디바이지스의 리처드는 대비가 상당한 고령이었음에도 매사에 여전히 지치는 법이 없었고, 그녀의 힘은 곧 그녀의 연륜에 대한 찬사였다고 말한다. 엘레오노르의 명성은 이제 누구도 넘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하고 정숙하고, 강하고 겸손하고 온화하고, 뛰어난 화술을 지녔고, 의지가 투철하지만 친절하고, 공손하면서도 현명한, 한 여성에게서 좀처럼 한꺼번에 보기 힘든 모든 미덕을 지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도 그 어떤 일에도 지칠 줄 모르고 임했으며, 그녀의 정력은 모든 이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렇게 찬사를 늘어놓은 연대기 작가도 엘레오노르의 파란만장했던 과거, 특히 지난 십자군 전쟁에 관련된 소문들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나마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 외에는 누구도 몰랐으면 하는 일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지금의 대비는 전 남편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었다.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침묵하라!' 

 

- 탕크레드는 조애너의 과부산을 마침내 포기하고 잉글랜드 왕에게 배상금으로 4만 베잔트 금화를 지불하기로 했다. 탕크레드의 갓난쟁이 딸과 브르타뉴의 아서와의 약혼도 결정되었다. 이즈음 리처드는 자신이 후계자 없이 눈을 감을 경우 아서에게 왕위를 물린다고 공포한 바 있다. 두 왕은 서로 선물을 교환함으로써 협상 타결을 축하했다. 리처드는 글래스턴베리에서 출토한 전설적인 아서 왕의 검 엑스칼리버를 탕크레드에게 주었고, 탕크레드는 리처드에게 열아홉 척의 배를 선사했다.

 

- 베렝가리아는 이곳의 그리스인 독재 군주 이삭 콤네누스에게 잡혀 위험에 처했고, 곧장 공주를 구하러 달려온 리처드는 섬을 점령하고 군주를 체포했다. 그리고 바로 이 섬에서 리처드와 베렝가리아는 1191년 5월 12일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스페인 여인들이 쓰는 베일인 만틸라를 착용했고, 신랑은 모후가 골라준 예복을 입었다. 장미색 벨벳 튜닉, 황금빛 초승달과 은빛 태양 문양을 넣어 짠 줄무늬 비단 망토, 황금색 동물과 새들을 수놓은 심홍색 보닛, 금박 박차가 달리고 금색 천으로 지은 편상화 등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예복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에브뢰 주교 존 피츠루크는 그 즉시 베렝가리아에게 잉글랜드 왕비의 관을 씌워주었다. 리처드 왕의 기분은 좋았고, 결혼식을 축하하는 연회가 사흘간 이어졌다. 
 

- 리처드 1세가 고백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추측을 해왔다. 1948년 존 하비가 자신의 저서 <플랜태저넷 왕가>에서 처음 이 문제를 건드린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리처드 왕이 동성애자였는지의 여부를 두고 오랜 공방을 벌여왔다. 1191년에 리처드는 자신이 '자연을 거스른 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지난 과거의 불결함을 공개적으로 뉘우쳤다. 그리고 다시는 '금지된 성행위'에 빠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금지된 성행위'는 혼외정사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리처드의 여성관계가 복잡했음을 보여주는 당시의 문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리처드에게는 적어도 한 명의 혼외자식이 있었다. 금욕적인 연대기 작가들이 혼외정사를 불결함이나 심지어 자연에 거스른 죄로 간주했던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은자가 소돔의 멸망을 거론했던 것 때문에 20세기 역사가들은 리처드가 양성애자였으리라고 추정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은 하나같이 소돔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삼가고 있지만, 1세기 그리스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학자였던 필론은 그의 저서 <아브라함>에서, 그리고 외경의 <유다서》 저자 같은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소돔의 죄가 동성 간의 성행위라고 규정했다. 12세기 무렵이면 소돔은 자연스럽게 동성애를 연상시켰을 것이며, 1300년대 잉글랜드에서는 남색을 '고약한 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리처드가 동성애자였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돔이 멸망한 원인은 비단 동성애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죄목 때문이었고, 은자가 소돔을 거론한 것도 구체적으로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의 난잡한 성생활 전체를, 혹은 여성과의 자연스럽지 못한 성행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중요한 사실은, 1948년 이전에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리처드는 여색을 밝히는 색정광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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