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윌리엄 하트]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 자유에 이르는 삶의 기술

일루젼 2021. 12. 1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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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윌리엄 하트 / 담마코리아

원제 : The Art of Living: Vipassana Meditation
출판 : 김영사 
출간 : 2017.07.12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와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었다. 유물론자인 다마지오 역시 '의식'은 '몸 전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위빳사나에 관한 내용들 역시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마음은 감정에서 나오며, 감정은 신체적 감각을 반드시 동반한다. 

 

탁닛한의 <좋은 사람으로 사는 법>에서 설명한 팔정도와 마음, 감정, 감각, 생각의 구분에 관해서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세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잘 읽히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시간이 걸렸는데, 개인적으로는 '깜마(카르마)'에 관한 설명이 인상깊었다. 행동의 대가나 반동이 아닌 '반응'의 개념으로 접근했는데, 크게 와닿는 면이 있었다. 

 

최근 어쩌다보니 계속 위빳사나와 불교 관련 서적들을 읽고 있는데, 사실 그다지 의도한 바는 아닌데 이렇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위빳사나에 대한 관심이 생겨 알아보니 국내에도 진안에 담마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코스가 있었다. 현재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언젠가 10일의 휴가를 만든다면 한 번 체험해보고 싶다. (탈주하지 않아야 할텐데)

 

상향을 위해서는 변화와 도전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유지만으로도 버거운 순간들이 있다.

엄두가 나지 않을 때는 잠시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보자.

때로는 무게에 짓눌리면서, 때로는 설레임에 부풀어오르면서.   

 


 

- 또 다른 놀라움은 자기 관찰을 통해 얻은 통찰들이 모두 유쾌하거나 더없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통 우리는 스스로를 매우 선별적으로 바라봅니다. 거울을 볼 때, 우리는 가장 돋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제일 멋져 보이는 표정을 짓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는 평소에 성격 전체 중 자신의 장점은 최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하며, 어떤 면들은 아예 빼고 만들어낸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현실이 아니라 보고 싶은 이미지를 봅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명상은 현실을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는 기술입니다. 위빳사나 수련생은 자신이 어떠하다는 엄선된 이미지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마주합니다. 어떤 면들은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하지요.   

 

- 우선 명상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명상은 게으른 것이며 휴식이라는 일반적 생각은 명상을 시작하면서 곧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신을 의식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제어하려면 계속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가르침은 긴장감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해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만,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 전까지는 이 훈련을 하면서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몹시 지칠 수도 있습니다.  

 

- 이 책은 위빳사나 명상을 혼자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설명서가 아닙니다. 이 책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위험은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이 명상법은 오직 수련생들을 위한 적절한 환경이 갖추어진 곳에서, 지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는 코스에 참가해서 배워야 합니다. 명상은 중대한 일입니다. 특히 마음 상법을 가볍게 별 생각 없이 시도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 책을 읽고 위뺏사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 날개의 연락처를 보고 언제 어디서 코스가 운영되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오직 고엔카 선생님이 가르치는 위빳사나 명상법의 간략한 내용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책이 붓다의 가르침과 그 핵심인 명상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단지 들었다고 해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이라고 해서, 경전에 나와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다 믿지 말라. 무엇이든, 단순히 추측하거나, 결론에 그렇게 나왔다고 해서, 겉모습만 보고, 혹은 특정한 시각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들리니까, 혹은 스승이 그렇다고 하여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러나 네가 직접 '이 가르침은 유해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며,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 비판받는다. 이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면 해를 입고 고통을 겪는다'라는 것을 알아냈다면, 그때 너는 그 가르침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네가 직접 '이 가르침들은 유익하고 비난할 점이 없으며, 지혜로운 자들이 칭송해 마지않는다. 이 가르침들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곧 행복을 얻게 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가르침들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 <앙굿까라 니까야 III> 

 

- Q.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조차 행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완전 이기적인 것 아닙니까? 
A.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린다는 것이 자신이 슬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침착하게 평정심을 유지해 그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도 슬퍼진다면, 그것은 당신 주변의 불행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돕는 것도, 당신 자신을 돕는 것도 아닙니다. 

 

- 반응하는 대신에 행동하는 법을 배우세요. 균형 잡힌 마음으로 행동하는 법을 말입니다. 위빳사나 명상가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식물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웁니다. 반응에서 행동으로 삶의 양식을 바꾼다면, 당신은 굉장히 값진 것을 얻은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자기도 따라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건 담마의 길이 아니에요. 진정한 자비심을 지녔다면 온 사랑을 다해 능력껏 최선을 다해 다른 존재를 도우십시오. 만약 실패하면 미소 짓고 다른 방법을 찾아 도우세요. 당신의 봉사로 인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걱정하지 말고 도우십시오. 이것이 평정심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자비입니다. 

 

-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공격할 때, 우리는 이 나쁜 행동이 중단되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우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희생자에 대한 동정과 공격자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입니다. 반면 위빳사나 명상가들은 그 둘에게 똑같이 연민을 느낍니다. 희생자는 자신을 보호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공격자는 불순한 행동으로 자신을 해쳤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행동을 한 후에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자신이 내부에서 평화와 조화를 경험하지 않고 있다면, 다른 누구의 내면에도 평화와 조화가 생기도록 도울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 명상가로서 우리는 자비심을 느끼지만 감정에는 휘둘리지 않도록 헌신적인 초연함을 계발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 자신의 몸을 연구하면서, 붓다는 또한 마음을 연구했는데, 마음이란 크게 네 가지 과정, 즉 의식(윈냐나 vinnana), 지각(산냐 sanna), 감각(웨다나 vedana), 그리고 반응(상카라 sankhara)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 다른 감각기관들도 어떤 정보를 받게 되면 언제든 이와 같이 이 작용은 물질적 실제를 구성하는 소립자들, 그 덧없이 사라지는 소립자들보다 더 재빠르게 일어납니다. 감각들이 어떤 대상을 느끼고 있는 매 순간, 네 가지 정신적 과정이 번개 치듯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그다음 매 순간의 접촉에도 그런 과정들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당사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어떤 특정한 반응이 반복되고 나서, 그것이 두드러지게 심한 형태를 떨 때에야 비로소 의식적 차원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설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그것이 무엇을 포함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빠뜨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양인이건 동양인이건, 기독교인, 유대교인, 무슬림, 힌두교도, 불자, 무신론자든 뭐든 간에, 우리는 모두 지속적인 주체로서의 '나'란 것이 내면의 어딘가에 있다는 타고난 확신을 가집니다. 우리는 10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이 오늘 존재하는 사람, 앞으로 10년간 존재할 사람과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고, 아마 죽음 뒤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별생각 없이 가정하고 삽니다. 어떤 철학이나 이론, 믿음을 가졌든, 사실 우리는 '나는 과거에 이러했고, 지금 이러하며, 미래에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깊이 뿌리박힌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붓다가 말했습니다. "고통의 진리는 끝까지 파헤쳐 보아야 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으려는 날 밤, 그는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제거되는지 이해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하고 앉았습니다.

 

- 집착에는 일곱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각적 만족을 원하는 습관에 대한 집착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하는 이유는 마약으로 인한 유쾌한 감각을 경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할수록 더욱 중독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갈망의 상태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한 욕망이 충족되자마자 또 다른 욕망을 일으킵니다. 대상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갈망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갈망이 유쾌한 감각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 감각을 연장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우리가 끊을 수 없는 습관, 중독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점점 내성이 생긴 중독자가 황홀감을 느끼려면 약을 더 많이 투여해야 하듯이,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갈망은 더욱 커집니다. 이런 식으로는 갈망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갈망하는 한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큰 집착은 '나', 자아, 우리 스스로의 이미지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철가루로 둘러싸인 자석처럼 행동합니다. 자석은 자기를 중심으로 철가루를 자동 배열하여 무늬를 만듭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세상을 우리 입맛대로 하려고 합니다. 좋은 것은 가까이 두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 내쫓으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의 '나'는 다른 '나'와 갈등을 겪게 되어있습니다. 각자가 창조하고자 하는 무늬는 다른 사람의 자기장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고, 우리 자신도 갈망이나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 결과는 오직 불행, 고통 뿐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은 끝도 없습니다. 이 집착은 '내 것'으로 확장됩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말이죠. 우리는 소유한 것에 대단한 집착심을 키웁니다. 그것이 우리와 관련되어 있고, 그것이 '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 것'이라고 칭하는 것이 영원하고 '내'가 영원히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이런 집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 안가 '나'는 '내 것'으로부터 분리될 것입니다. 이 분리의 순간은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 순간이 올 때 '내 것'에 매달릴수록 고통은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집착은 우리의 견해와 믿음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실제 내용이 무엇이든, 옳든 그르든 간에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틀림없이 불행해질 것입니다. 모두 자신의 견해와 전통이 최고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판하는 말을 들으면 매우 화를 냅니다.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화를 냅니다. 각자가 자신만의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각이 옳은 것인지 논쟁하는 것은 헛된 짓입니다. 모든 선입견은 일단 내려놓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 갈망과 혐오는 절대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을 긴장시키고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음속에 갈망이나 혐오감을 지닌 채 행동한다면, 훌륭한 목표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불건전한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지요. 겁에 질려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장기적으로 당신을 해치는 두려움의 강박관념을 계발하게 될 겁니다. 마음속에 혐오감이 차 있으면 불의에 대항해서 잘 싸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증오가 해로운 정신적 강박관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불의에 맞서야 합니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긴장감이 없는 균형 잡힌 마음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남들을 위한 사랑으로, 훌륭한 목표를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마음은 언제나 도움이 되고 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갈망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은 당신이 자신의 계획에 집착하고 있는지 아닌지입니다. 누구나 미래를 준비해야지요. 계획이 실패해서 울기 시작한다면, 당신이 그것에 집착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했더라도 여전히 미소 짓고 "뭐, 난 최선을 다 했어. 실패하면 어때? 다시 도전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집착에서 벗어나서 노력하는 것이고 여전히 행복할 것입니다. 

 

- 행복해지기 위해 물질적 부가 필요하고 당신이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없지요. 예를 들어서 당신이 목이 마릅니다. 물을 원하지요. 여기에 잘못된 게 없지요. 물이 필요하면 노력해서 물을 얻고 갈증을 해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집착이 되면 물을 원한다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해치게 되지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세요. 어떤 것을 얻지 못하면 미소 짓고 다른 방법으로 노력해 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면 그것을 즐기되 집착하지 마십시오. 

 

- 마음은 종교적 의식이나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는 진정 정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직접 실제를 경험하고 고통을 만들어내는 무의식적 습관을 체계적으로 없애면 마음은 정화됩니다. 여덟 가지 성스런 길은 실라 sila, 사마디 samadhi, 빤냐 panna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실라는 도덕적 행위, 즉 모든 불건전한 행동이나 말을 삼가는 것입니다. 사마디는 집중, 즉 자신의 정신적 과정들을 통제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빤냐는 지혜, 즉 자신의 본성을 정화할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 이 다섯 가지 계율은 도덕적 행위를 위한 최소한의 필수 요건입니다. 담마를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합니다.  

1.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기

2. 도둑질하지 않기 

3. 잘못된 성적 행위를 하지 않기 

4. 거짓되고 허망한 말 하지 않기 

5. 취하게 하는 물질을 금하기

 

-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 해탈하기 위해서 며칠 혹은 하루만이라도 세속적 일들을 내려놓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런 시간은 담마를 진지하게 수행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보다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자기 정화를 수행하는 데 방해하거나 산만하게 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다섯 가지가 아니라 여덟 가지의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 계율을 포함하는데, 그중 한 가지는 약간 변형되었습니다. 잘못된 성적 행위가 아니라 모든 성적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추가되는 첫 번째 계율은 부적절한 때, 즉 정오 이후에 먹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모든 감각적 오락과 치장을 금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호화로운 침대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적인 금욕생활과 추가된 계율들은 내면을 성찰하는 데 필요한 고요함과 기민함을 길러주고, 외부의 모든 방해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이 여덟가지 계울은 담마 수행을 집중적으로 하는 시기 동안 지키면 됩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재가 수행자는 도덕적 행동을 위한 안내 지침으로써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도록 합니다. 

 

- 실라 없이 영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실라를 지키지 않아도 여러 가지 황홀한 경혐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을 영적 성취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라 없이는 그 누구도 마음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없고, 궁극적 진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실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 길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봐왔습니다. 그들은 매년 코스에 참가해 명상을 하면서 훌륭한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코스가 끝나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놀이들처럼 위빳사나를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여전히 동요되어 있고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실패자입니다. 삶을 더 낫게 변화시키기 위해 담마를 진정으로 활용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은 실라를 가능한 한 주의 깊게 실천해야 합 니다. 

 

- 명상가가 집중의 기능을 계발하는 것은 환희감이나 황홀감의 경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실제를 점검하고, 조건화를 제거하기 위해 마음을 도구로써 단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 그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얀 것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당신의 현실은 언제나 왜곡되어 있을 것입니다. 

 

- 붓다만이 실라나 사마디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그가 깨닫기 전에 널리 알려져서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사실 해탈의 길을 찾으면서 붓다는 그를 가르친 두 스승에게 사마디를 배워 수련했습니다. 붓다가 이 수행법들을 설명하는 방식은 기존 종교의 스승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적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도나 의식, 단식 아니면 다른 금욕적 생활양식이나 여러 가지 명상법 등을 통해 환희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수행법은 그저 깊은 정신 몰입의 상태를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한 '황홀감'입니다. 이런  집중력은 몰입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갈망과 혐오로 반응할 상황에서 주의를 돌려 마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화가 벌컥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천천히 열을 세는 것은 사마디의 가장 기초적인 방식입니다. 더욱 분명한 방식은 아마 단어나 주문을 반복해서 암송하거나 어떤 시각적 대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다 효과가 있습니다. 주의를 다른 대상에 둘 때,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은 고요함은 진정한 해탈이 아닙니다. 분명 집중력 훈련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의식적 차원에서만 작용합니다. 현대 심리학이 만들어지기 전인 약 25세기 전, 붓다는 아누사야 anusaya라고 불리는 잠재하는 무의식적 마음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전환하는 것이 의식적 차원에서 갈망과 혐오를 다룰 때는 좋은 방법이 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들을 제거할 수는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대신에 비록 잠자는 상태이기는 하나 여전히 위험하게 남아있는,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습니다. 마음의 표면에는 평화와 조화의 층으로 덮여있으나, 깊이 속을 들여다보면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어 언제 격렬하게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휴화산과 같은 상태입니다.

 

- 계율과 집중, 즉 실라와 사마디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훈련하는 진짜 목적은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빤냐를 계발해야만 방종과 자기억압의 극단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계율을 지킴으로써 정신적 동요의 가장 거친 상태를 유발하는 행동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거기에서 더 나아가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동시에 자기 점검을 위한 수행을 하도록 마음을 효과적인 도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면의 실제를 꿰뚫고 들어가 모든 무지와 집착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지혜의 계발에 의해서입니다.  

- 바로 감각의 알아차림을 계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체적 감각은 마음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호흡처럼 현재의 정신 상태를 반영합니다. 정신적 대상들, 즉 생각, 견해, 상상, 감정, 기억, 희망, 두려움 등이 마음과 접촉하면 감각이 일어납니다. 모든 생각, 모든 감정, 모든 정신적 활동에 대응하는 감각들은 몸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마음도 관찰하는 것입니다. 감각은 진리를 깊이 탐구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무엇이든 몸에서 감각을 일으킬 것입니다. 감각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교차로입니다. 비록 감각의 성질이 물리적이기는 하나, 이 또한 네 가지 정신적 과정 중 하나입니다(Chapter 2를 볼 것). 이는 몸에서 일어나 마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시체나 무생물은 감각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경험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실제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불완전하며 피상적인 것이 됩니다. 정원의 잡초를 뽑는 것도 숨겨진 뿌리를 찾아내고 그것들의 습성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숨겨진 채 남아있는 대부분의 감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각은 몸 전체에 걸쳐 일어납니다. 모든 정신적, 육체적 접촉이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모든 생화학적 반응이 감각을 일어나게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적 마음은 모든 감각이 아닌,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감각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일단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통해 마음을 날카롭게 다듬어 알아차림의 능력을 계발하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감각의 실제를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호흡의 알아차림을 수련할 때, 그 목적은 호흡을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호흡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빳사나-바와나를 할 때에도 그저 신체 감각을 관찰합니다. 주의집중을 몸 전체에 걸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특정한 감각을 찾아서는 안 되며, 피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각이든 알아차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 그러나 불쾌한 감각이 일어나도 그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상카라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축적물에서 올라온 상카라는 사라집니다. 그다음 순간, 또 다른 과거의 상카라가 감각으로 나타납니다. 이번에도 그가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이런 식으로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쌓은 반응의 축적물들이 마음의 표면으로 차례로 올라와 감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합니다.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과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과거의 조건화를 제거합니다. 혐오의 조건화가 남아있는 한, 삶 속에서 어떤 불쾌한 경험을 겪을 때 무의식적 마음의 경향은 혐오감을 일으키며 반응할 것입니다. 갈망의 무의식적 반응이 남아있는 한, 유쾌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마음은 갈망을 일으키며 반응할 것입니다. 위빳사나는 이런 조건화된 반응들을 서서히 없애는 원리로 작용합니다. 위빳사나 명상을 하면서 우리는 계속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을 마주하게 됩니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모든 감각을 관찰하고, 우리는 점차 갈망과 혐오의 성향들을 약화시키고 무너뜨립니다. 

 

- 평가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고, 그는 자신 내부의 변화의 과정을 그저 관찰했습니다. 

 

- 해탈의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첫째로 필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실제를 뚫고 들어가 몸과 마음이 용해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실제를 초월해 꿰뚫고 들어갈수록 갈망, 혐오, 집착을 버리게 되고 궁극적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꾸준히 수행하면 자연히 다음 순간에 닙바나가 일어나는 지점에 도달합니다. 그것을 열망하는 것, 그것이 일어날까 안 일어날까 의문을 갖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담마를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각자 내부에 쌓여있는 불순물의 양과 그것을 제거하려는 개인의 노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지속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감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닙바나의 궁극적 진리를 경험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 "갈망의 소멸, 혐오의 소멸, 무지의 소멸, 이것을 닙바나라 한다." 마음이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운 단계에서 해탈을 경험합니다. 

 

- 갈망과 혐오가 없다는 것이 자신의 해탈을 즐기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신경 쓰지 않는 냉정한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평정심을 제대로 표현하면 '신성한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의 적극적인 표현이며 성질입니다. 갈망과 혐오가 없다는 것은 곧 마음의 창의적, 역동적 자질, 마음의 순수함의 표현입니다. 모든 맹목적 반응의 습관에서 벗어나면, 마음은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창의적이고 효율적이며 유익한, 긍정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평정심과 함께 순수한 마음의 다른 자질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선의와 사랑, 다른 사람의 실패나 고통에 대한 연민, 다른 사람의 성공과 행운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바로 그 자질입니다. 이 네 가지 자질은 위빳사나 수행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 이전에는 좋은 것은 혼자 가지려 하고 나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었습니다. 이제는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희생에 의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남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 자신에게 행복한 일임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어떤 좋은 것이라도 남들과 나누려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평화를 경험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이 좋은 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항상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이 더 이상 다양한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화가가 여러 가지 물감을 짜 놓은 팔레트를 놓고 회색으로만 그림을 그린다거나, 피아노를 갖고 있는 사람이 중간 '다'음만 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평정심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 피아노의 조율이 엉망이어서 우리가 피아노를 어떻게 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표현이라는 이름으로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도 소음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피아노를 조율하는 법과 제대로 연주하는 법을 배우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음에서 높은음까지 모든 건반을 사용해서 우리가 연주하는 모든 음은 오직 조화와 아름다움만을 창조합니다. 붓다는 마음을 정화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그 사람은 "기쁨, 축복, 고요함, 알아차림, 완전한 이해,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평정심으로 우리는 인생을 더욱 즐길 수 있습니다. 유쾌한 상황이 일어나면 완벽한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알아 차림으로 현재를 완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 마음속에 강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그것들은 깊이 억눌려있다가 이제 의식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감정은 감정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떤 감각을 느낍니까? 신체적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감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감각을 관찰하세요. 

 

- 당시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이었던 웨부 사야도가 그 비판을 듣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웃을 수 있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그들의 미소는 집착이나 무지가 아니라 담마의 웃음이었습니다. 마음을 정화한 사람이 찡그린 얼굴로 다닐 리가 없습니다. 해탈로 가는 길을 알면 당연히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감정과 관련된 감각이 몸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온몸의 감각을 관찰한다면, 그 감각과 관련된 감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지요. 

 

-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집중됩니다. 그러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한, 더 깊은 차원에서의 정화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반응이 감각과 함께 시작됩니다. 이것은 항상 일어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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