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스티븐 배철러]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 - 환생과 업의 교리를 거부하며 인간 붓다의 삶을 다시 그려낸 어느 불교도의 이야기

일루젼 2021. 12. 12.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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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스티븐 배철러 / 김옥진

원제 : Confession of a Buddhist atheist
출판 : 궁리 
출간 : 2014.01.20 


 

예기치 않게 이어진 불교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표지가 눈에 띄어 집어 들었던 책인데 개인적으로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아키텐. 크렘드망트. 몽중몽. 게세. 고엔카. 

 

10여 일 동안 읽었던 책들과 겹치는 키워드들이다. 여기에 조금 더 예전에 읽었던 책들까지 더하면 훨씬 많은 것들이 나타났다.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연결되는 것을 볼 때 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낀다.

 

스코틀랜드-영국에서 출생한 저자는 젊은 시절 히피즘의 영향을 받아 동양 사상으로 빠져들고,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약 7년 간 달라이 라마를 모셨다. 탄트라에도 입문하여 관정을 받았으나 환생과 윤회 및 영혼에 대한 생각과 불교의 교리 사이에서의 갈등을 겪다 족첸 수행과 일본의 젠, 한국의 선종 사이에서 한국을 택하고 3년 정도 송광사에 머무른다.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팔리 경전을 비롯해 철학과 심리학, 정신 분석과 여타 종교를 오가며 치열하게 탐구하고 고뇌한 저자가 풀어놓는 자신의 삶(1부)과 환속 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인 붓다의 삶(2부)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융 연구소에서 칼프에게 모래 치료를 받기도 하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연에 참가하기도 한다.) 

 

저자의 고민과 의문들 중 일부는 굉장히 공감하며 읽었고, 또 일부는 당황스럽게 읽었다. 저자가 '의식'하는 주체로서의 실체를 육체 혹은 감각과 구분하는 부분을 수용할 수 없어 좌절하는 대목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믿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동양권에서는 허용 범위가 넓은 것일까? 개인차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의 존재 이유, 가르침의 목적과 영역 등에 관한 접근방식과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에서 저자는 상당히 현실-실존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삶을 내려놓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에 가치를 두느냐, 바른 가르침을 통해 지금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가느냐에 있어 저자는 확고하게 후자를 선택한다. 이는 어느 종파를 택하더라도 불교적 교리와는 큰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불교에 강하게 이끌렸던 것인 만큼 환속을 할 지언정 다른 종교로 개종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납득되지 않는 영역에 대한 접근법과 해결을 위한 노력, 치열한 사유 등은 본받을 점이 많았다. 또 그가 느끼는 대부분의 의문과 고민은 불교가 아니더라도 유신론에 가까운 가치관을 지닌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것들이라 깊게 와닿았다. 스와미나 다른 수행자들에게 요구되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에 대한 거부감 - 혹은 의구심- 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반면 한편으로는 다른 종파의 교리로 또다른 교리를 파훼하려는 저자를 보며 길을 섞어서는 안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일정 정도 이상의 답을 얻기 전까지는 판단하지 말고 스며들어 길을 걸어야 한다면, 스며들 수 없는 길은 가야하는 길이 아니란 말인가? 도합 10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수행을 지속하면서도 이런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면, 그 길은 저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길이 아니었던 것일까? 나에게 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경전과 역사적 기록, 행적 답사를 통해 저자가 더듬어간 붓다의 삶에 관해서는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었다. 

 


   

 

-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게세 랍텐은 높은 수준의 명상 상태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곧장 알게 된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환생의 '증거'는 비-정상적인 자각의 상태에서 비-물질적인 실체의 주관적 경험에 달려 있었다. 내가 직접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내 자신보다 더 뛰어난 명상가의 말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생의 증거가 결국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 말한 것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신비주의자들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 신을 직접 경험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무슨 근거에서 나는 기독교 신비주의자, 아니 그렇게 보자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켄타우루스 알파별 너머에 세워둔 우주선으로 끌려갔었다고 주장하는 이보다 불교 명상가를 더 믿어야 하는가? 그들 모두 똑같이 도덕적이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들로, 자신이 경험한 것이 진실이라고 열정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그것을 믿는 성향을 이미 갖고 있는 사람들만 설득하게 될 것이다. 

 

- 다음 날인 7월 19일 나는 모터스쿠터를 타고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제네바 호수 위쪽 산악지대 마을 자닌넨으로 갔다. 인도의 반 구루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또 다른 천막으로 모여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였다. 소년 시절 크리슈나무르티는 블라바츠키 여사의 신지학회에 의해 새로운 '세계의 스승'으로 선포되어 그 역할을 맡도록 교육받았다. 1929년 서른넷의 나이에 그는 "진리는 길이 없는 곳"이며, 그것은 본래 체제로 조직되거나 종교 조직이 통제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신지학회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었다. 그 후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모든 우리와 모든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종교나 새로운 분파를 세우지 않고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철학도 만들어내지 않기를 원한다." 

 

-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자유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 시간에 전보다도 더 폭넓게 독서하고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더욱 비판적으로 심사숙고하면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0월 22일 나는 이렇게 썼다. "어젯밤 잠이 들기 전 이 모든 기도와 진언을 아무 생각 없이 암송하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즉각 멈췄다. 오늘은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았다.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것들의 암송을 그만두었다. 기계적인 음성화의 마지막 혼적이 이제 막 떨어져 나간 것이다. 나는 무시무시한 지옥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삶이 더 풍요로워지도록 도와주지 않는, 틀에 박힌 일을 계속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종교는 스스로 살아가는 생명이다. 위협과 두려움 때문에 교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난 7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탄트라에 입문하면서 내가 했던 엄숙한 서약을 모두 버렸다. 

 

- 나는 고타마에게 내가 선호하는 모든 것들과 가치를 투영하려고 하는 경향도 경계해야만 했다. 나는 역사를 통해 모든 불교도들이 자신만의 싯닷타 고타마를 만들어냈으며 나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또 인정해야 할 것은 불교도 대다수가 그들의 종교를 세운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는 관심을, 그나마 있더라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고 이상화된 인물을 숭배하는데 만족했다. 나는 이 먼 역사적 인물에 대해 내가 발견한 모든 것이나에 대한 어떤 것 역시 드러내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알아낸 붓다가 당신의 붓다보다 좀 더 진실하다거나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내가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팔리 경전, 그리고 또 다른 어딘가에 문여 있는 자료들이 고타마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아직 다 소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5일 뒤 나나비라는 브래디에게 이렇게 썼다. "현대 과학이 붓다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환호하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바보 같은 실수입니다. 여기서는 붓다가 과학자들의 비인격성의 태도를 예측함으로써 초월(자아 혹은 신)의 문제 전체를 풀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쓰레기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은 단지 담마를 일종의 논리적 실증주의로, 내 자신을 일종의 승복 입은 버트런드 러셀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경험은 성관계나 낭만적 사랑, 혹은 미적 경험만큼이나 진짜입니다. 반드시 답해야 하는 질문은 이런 것을 일종의 초월적 실재의 증거로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그것이 가리키는 영원이 망상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나비라 테라가 누구였건 간에 나는 그에 대해서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나는 <길을 치우다>를 집으로 가져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나는 그 산문 -장난스럽고 냉소적인 어조, 폭넓은 학식, 블랙유머에 가까운 풍자- 에 마음을 빼앗겼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반항적인 솔직함에 빠졌다. 내가 영어로 쓰인 불교 서적에 그토록 강한 충격을 받은 적은 결코 없었다. 

 

- 나나비라 테라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나는 스리랑카에 있는 승려들에게 묻기도 하고, 잉글랜드에 있는 불교센터 도서관과 자료실을 조사하고, 그에 대해 들어봤거나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접촉하고, 런던에 있는 그의 조카 손녀를 찾아봤다. 나는 나나비라 테라가 잉글랜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20년 상류층 군인 가문에서 해럴드 머선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외동아들로,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자기 성찰의 성향을 지녔던 그는 햄프셔의 회색 화산암 저택에서 성장했다. 1938년 케임브리지의 맥덜린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그다음엔 현대 언어들을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했으며, 1941년에 정보부대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알제리에서, 나중에는 이탈리아에서 복무했는데, 그의 임무는 전쟁 포로들을 심문하는 일이었다. 1945년 그는 소렌토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인 율리우스 에볼라가 쓴 <깨달음의 교리(La dottrina del risveglio)>라는 신간 불교서적에 푹 빠졌다. 겉으로 보기에 율리우스 에볼라는 도저히 진짜일 것 같지 않은 불교 옹호자였다. 스물다섯의 머선 대위가 소렌토의 병원 침대에서 <깨달음의 교리>를 읽고 있는 동안, 그는 몰랐지만 에볼라는 베네치아 -무솔리니의 몰락 이후 그는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에서 아리아 인종의 역사적 우수성을 정립하는 데 전념했던 나치의 싱크탱크인 히믈러의 아넨에르베(Ahnenerbe)를 위해 프리메이슨의 텍스트를 번역하고 있었다. 아넨에르베는 싯닷타 고타마가 훌륭한 아리아 혈통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으며, 1938년 그 증거를 더 찾기 위해 나치 친위대(SS) 에른스트 새퍼 대위를 대표로 하는 탐사단을 티베트에 보냈다. 독일인들은 1939년 초 라싸에서 2개월을 보내며 티베트인들의 두개골과 얼굴 모양을 측정하고 불교 텍스트를 수집했다. 그들은 새로 찾아낸 네 살배기 달라이 라마를 만나지는 않았다. 

 

- 의식은 유기체가 어떤 환경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색을 띤 형상에서 반사된 빛이 눈을 때리면 시각 의식(인식)이 일어난다. 그러나 물체가 시각의 장을 빠져나가거나 사람이 눈을 감으면 그 의식은 즉시 그치고 만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의식에서 마찬가지이다. 고타마가 사티에게 설명했다. "불이 그 연소를 좌우하는 특정한 조건에 따라 간주 -장작이 타는 불, 풀이 타는 불, 똥이 타는 불 등- 되듯 의식도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특정한 조건에 따라 간주된다." 의식은 새로 나타나고 조건에 따라 발생하며 비영구적인 현상이다. 의식은 그것이 튀어나오는 사건들의 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술 같은 능력이 없다. 

 

- 다시 말하자면,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용케 자신의 삶의 일부분이 되게 만든 가치와 수행 이라는 것이다. 붓다나 상가(공동체),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혼자다. 

 

- 1929년 별의 교단(Oder of the Star)을 해체하면서 젊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3천 명의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어쩌면 악마와 그의 친구가 함께 길을 걷다가 그들 앞에서 어떤 사람이 몸을 굽혀 땅에서 뭔가를 주워 살펴보더니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가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주운 게 뭐야?' '한 조각의 진리를 주웠지'라고 악마가 말했습니다. 그의 친구는 '그렇다면 너한테는 아주 나쁜 일이군'이라고 말했습니다. '오, 전혀.' 악마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그것을 체계화해서 조직하도록 놓아두려고 해.'" 

 

- 조로아스터교는 차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오르마즈드(신)가 어떻게 쌍둥이를 낳았는지 가르쳤다. 쌍둥이 중 하나는 진실을 따르기로 선택한 반면 또 다른 하나 -아리만(악마)- 는 거짓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조로아스터 텍스트는 아리만을 '파괴자... 온통 사악함뿐이고 죽음으로 가득 찬 저주받은 파괴적인 악령,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묘사한다(마라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살인자'를 뜻한다.). 아리만이 오르마즈드에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는 서로 반대되는 선과 악의 힘 사이의 원초적 긴장에 뿌리박고 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말은 <우파니샤드> 철학에는 완전히 이질적이지만 붓다와 마라라는 양극단의 인물이 묘사되는 방식과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고타마가 자신의 가르침에서 그런 생각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는 과연 그런 것들을 어디서 접할 수 있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이르러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 황제들의 궁에서 믿는 종교가 되었으므로 그가 탁실라에 있을 때 알았던 이들이나 그곳에서 자신이 직접 만난 스승들로부터 그런 생각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 "출가한 사람은 두 개의 막다른 길을 추구하지 않는다. 어떤 두 가지인가? 쾌락에 탐닉하는 것, 그것은 저속하고 미개하며 무의미하다. 그리고 고행, 그것은 고통스럽고 미개하고 무의미하다." 


- "나는 막다른 길로 이르게 하지 않는 가운데 길을 깨달았다. 그것은 선견과 자각을 일으키는 길이다. 그것은 평온, 통찰, 깨달음, 해방에 이르게 한다. 거기에는 여덟 갈래의 가지가 있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이 그것이다." 

 

- 텍스트의 끝에 가서 붓다는 이렇게 말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내 마음의 자유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 출생이다. 더 이상 반복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번역을 하면서 "이번이 마지막 출생이다."라는 구절을 없앴다. 

 

- 잉글랜드인 앨런 베넷은 1901년 랑군에서 계를 받고 안난다 멧테이야 스님이 되었으며, 이어 1904년 독일인 안톤 구에트가 계를 받아 나나틸로카 스님이 되었다. 나나틸로카는 스리랑카의 아일랜드허미티지의 설립자이자 해럴드 머선(나나비라)과 오스버트 무어(나나몰리)의 스승이었다. 

 

    

   

더보기

 

- 2009년 9월 아키텐에서. 

 

- 그러나 불교에서 'monk(수도사, 수사, 승려 혹은 nun(수녀, 여승))'라는 용어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쓰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monk에 해당하는 팔리어 단어 '빅쿠(bhikkhu, 비구)'는 말 그대로 '거지'를 뜻한다(nun은 빅쿠니 (bhikkhuni, 비구니)이며, 같은 뜻이다). 비구나 비구니는 붓다의 가르침을 행하는 데 자신을 바치기 위해 주류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다. 계를 받을 때 비구와 비구니는 200가지가 넘는 서원(그중 많은 것들이 매우 세세한 행동 계율이다)을 한다. 그들은 순결하고 청빈한 삶을 사는 데 전념하며, 최소한 전통적으로는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고 보시를 구걸하며 살아가는 것이 권장된다. 소박함, 고독, 명상의 삶을 추구하는 것 외에도 비구나 비구니는 요청을 받으면 가르치기도 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종교 지도자로서 조언과 상담도 해줄 것이다. 불교에서는 monk와 priest를 구분하지 않는다.  

 

- 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이었을 때 불교 승려들은 그 어떤 벌레도 죽이지 않기 위해 풀 위로 걷는 것을 피한다고 하던 어느 BBC 라디오 프로그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승려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첫인상이 훗날 내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한 것인지, 아니면 되돌아보니 그것이 승려가 되기로 한 나의 특이한 결정을 합리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기억을 하기로 한 것인지 종종 궁금했다. 

 

- 이런 과외 활동에 푹 빠지면서 나는 학교 공부를 거의 팽개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엄청나게 읽어댔다. 올더스 헉슬리의<인식의 문>,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앨런 워츠의 <선의 길(The Way of Zen)> 등을 읽었고 한편으로는 <바가바드기타>, <도덕경>, <티베트 사자의 서> 등에 조금씩 손을 댔다.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구슬을 걸고 다녔으며, 팔러먼트힐필즈에서 사이키델릭 조명 쇼와 함께 밤새 열리던 록 콘서트에 가서 소프트 머신, 핑크 플로이드, 에드가 브로턴 밴드의 음악을 듣곤 했다. 1971년 4월 나는 꿈속에서 또 꿈을 꾸었다. 

 

- 여기 공기는 사실상 참을 수가 없었는데, 멍할 정도로 달고 강했다. 공기는 크렘드망트의 색을 띤 것 같았고 그 밀도는 대략 동일했다. 벽은 매우 연하지만 자연스러운 밝은 색을 띠고 있었고 모든 것이 점이 약간 맞지 않았으며 빛과 공기는 쪼개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수백만 개의 분자들로 북적거리는 듯했다. 

 

- 조용하고 나른한 맥그로드간즈 마을로 들어서자 간간히 종이 쨍그랑거리는 하얀 돔 모양의 스투파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색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성긴 머리를 땋은 구부정한 티베트 여인이 깨달음을 상징하는 이 건축물의 둘레를 돌면서 벽에 장착된 삐걱거리는 마니차를 돌렸다. 

 

- 승려가 되고 3개월이 지난 후 나는 티베트 도서관에서 열린 S. N. 고엔카라는 인도인 선생의 10일짜리 위파사나(비파사나) 수련에 참여했다. 고엔카 씨는 만달레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공한 기업가로 미얀마 독립 후 초대 정부의 장관이었던 우 바 킨으로부터 위파사나 명상을 배웠다. 그는 50세로 턱 아래 살은 축 처지고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그는 사롱을 입고 가부좌를 튼 채 자신의 부인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소승' 불교의 명상 강좌가 대승불교 기관에서 매일 실시하던 수업을 대체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달라이 라마의 지지를 받아 이뤄진 것 같았다. 게세 다르계이는 수련 기간 동안 마날리에 있는 온천에 갈 기회를 얻었다. 

(리뷰자 주 : 고엔카에 관한 다른 책에서는 '위빠사나'는 어느 종교에 속하지 않으며, 대승도 소승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그때 내게 보여준 것은, 지금이라면 내가 삶의 연기적 토대로 이해했을 뭔가를 알아차리는 방법이었다. 이 점에서 나는 고엔카 씨에게 영원히 감사하는 바이다. 위파사나와의 만남은 완전히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것이 내가 공부하고 있던 티베트 도서관에서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수련은 티베트 불교에 대한 나의 믿음 체계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들었다. 

 

- 나는 이런 공부를 굉장히 즐겼다. 게셰 랍텐은 생각을 분명하고 간결하게 전해주었고, 그런 다음 우리들에게 짝을 지어 토론하게 하면서 방금 그가 가르친 것을 면밀히 분석하게 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한 지적 훈련이었으며, 내 생각이 얼마나 뒤죽박죽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철저한 검증에 맡기지 않으면 결국 검토되지 않은 엉성한 가정을 토대로 한 것이 드러날 의견을 갖기 쉬우며, 그런 의견을 갖고서도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분석 훈련은 양날의 칼이었다. 그것은 어느 수준까지만 효과가 있었다. 불교 교리 중 비평을 그리 잘 견뎌내지 못하는 것을 만나게 되자마자 그것은 믿음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위험을 초래했다. 다르마키르티에 대한 나의 열광이 최고조에 달했던 당시에는 내가 몇 달 뒤 한밤중에 식은 법을 흘리며 깨어나 어떤 정신 상태의 주된 원인이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정신 상태인 것은 아닌지를 두고 고민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이틀 뒤(7월 18일) 내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올 연말에 떠나기로 확고하게 결심했다. 먼저 인도로 가서 족첸을 공부하고 천천히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다.” 족첸(Dzogchen, 위대한 완성(대원만, 대구경))은 티베트 불교 닝마파에서 가르치는 깨달음의 수행으로, 어떤 면에서는 위파사나와 비슷하다. 내가 이어서 일본에 가고 싶어 한 것은 마찬가지로 선불교에서 발견되는 덜 정교하고 좀 더 직접적인 종류의 명상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 존재는 우리에게 미스터리, 수수께끼라는 인상을 준다. 이 경험이 '왜?'와 '무엇?'이라는 소리를 만들어내며 우리에게 반향을 일으킨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마찬가지로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사고의 렌즈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몇몇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영감을 받았다. 특히 마르틴 부버, 가브리엘 마르셀, 폴 틸리히, 존 매쿼리의 저작에서 영향을 받았다. 나는 또한 기독교 전통을 '비신화화(demythologizing)'시킨 루돌프 불트만의 사상에도 끌렸다. 그는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맥락에서 원래의 가르침이 뜻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위해 기독교 전통에서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를 벗겨버렸다. 이런 저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유사한 방법을 불교에도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시아의 사원에서 수 세기 전에 가르친 것을 그대로 보전하기보다는 20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남녀의 관심사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현대 언어로 핵심 불교 사상을 다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1979년 샤를 즈누가 동아시아 방문에서 돌아와 내게 송광사라고 하는 한국의 선 사원에 대해 말해줬다. 그곳에는 소수의 서양 비구와 비구니들이 구산 스님이라는 선승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결혼한 성직자들을 수련시키는 학교인 일본의 선 '사원'과 달리 한국에서 승려들은 붓다가 부여한 독신의 승가 규칙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었으며, 이는 티베트와 동남아시아에서 지키는 것과 거의 똑같았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일주일간의 집중적인 선수련인 셋신에 초점을 두는 반면, 한국에서는 승려들이 매년 여름과 겨울 각각 3개월씩 앉아서 중단 없이 명상 수행을 했다. 샤를은 구산 스님이 선에 대해 설법한 것을 글로 옮긴 <구산(Nine Mountains)> 한 권을 내게 주었다.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구산 스님이 가르친 주된 수행법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이뭣고?'라는 공안을, 그가 '큰 의심'이라고 부른 것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삼아 자신에게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 우리가 송광사에 남은 것은 일각 스님의 지도하에 선 수행을 하고싶다는 바람보다는 감사와 의무감에서 우러난 것임을 우리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는 서로에 대한 사랑에 대해 행동을 취하여 함께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갈지, 혹은 서원에 충실하고 계속 더 깊이 수행하기 위해 헤어져야 할지 결정해야만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 해 더 머무르기로 한 결정은 우리에게 이 딜레마를 심사숙고하고 해결하기 위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주었다. 한두 달의 고뇌 어린 망설임 뒤에 우리는 다음 겨울에 절을 떠나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물론 다른 불안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어디서 살 것이고,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 불교에서는 대개 자살을 윤리적으로 살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예류자가 된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수행을 막는 상황에서 허용 가능하다. 고타마가, 뛰어난 승려가 나나비라처럼 치유 불가능한 질병에 걸렸을 경우 자살을 용납한 경우가 팔리 경전에 많이 나온다. 이에 대한 전통적 근거는 일단 '예류에 이르면' 윤회를 영원히 탈출하기 전까지 최대 일곱 번만 태어나면 된다는 보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교 정설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나나비라로 하여금 환생, 존재의 비인간 영역, 업의 도덕률 등의 전통적인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게까지는 만들지 않았다. 그는 비록 신비주의는 거부했지만 명상이 공중부양, 투시력, 전생의 회상 등과 같은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 고타마는 각각의 진리가 그것만의 도전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설명했다. 괴로움은 충분히 알아야 하고, 갈망은 버려야 하며, 그침을 경험해야 하고, 길을 닦아야 한다. 사성제는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라는 제안이다. 앨리스가 병에 붙은 '나를 마셔'라는 표를 보고 그 내용물을 마셨듯이, 고통을 만났을 때 그것에 '나를 알라'라고 표시된 것을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끌어안을 수 있다. 혹은 뭔가를 단단히 잡거나 없애기 위해 갈망이 시키는 것에 자동적으로 따르는 대신 그것이 "나를 놓아줘"라고 속삭인다고 상상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움켜쥔 것을 느슨히 하고 평정 속에서 쉴 수 있도록 고무한다. 사성제는 교조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이다. 그것은 믿어야 할 일련의 교리라기보다는 따라야 할 행동 방침을 제시한다. 이 네 가지 진리는 현실의 묘사라기보다는 행동의 처방이다.

 

- 이런 중도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종교 조직에 들어가 깨우친 승려의 도움으로 입문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신비로운 황홀 상태의 순간에 당신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엄청난 의지의 행위에 의해 스스로를 억지로 내모는가? 전법률에서 고타마는 사성제의 수행을 통해 어떻게 중도의 흐름으로 들어가는지 보여줬다. 연기의 원리에 따라 각각의 진리는 다음 진리가 일어나는 조건이 된다. 괴로움을 충분히 안다는 것은 갈망을 놓게 하고, 갈망을 놓는 것은 그것의 그침을 경험하게 하며, 그 그침의 순간은 자유롭고 목적이 분명한 팔정도 자체의 공간을 열어준다. 

 

- 나는 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두툼한 신학 서적들을 많이 읽었지만 아직도 그다지 더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신은 모든 것의 원천이자 근거라고 제시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신은 에세 입숨(esse ipsum), 즉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다. 하지만 '존재 그 자체'는 고사하고 '모든 것은 근원이며 바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나? 신약성서는 신은 사랑이고, 신은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바탕이 어떻게 '사랑' 같은 감정이나 '사람의 모습을 할' 의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떤 가능한 의미에서, 존재 그 자체를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지심에서 당신은, 신은 알 수 없으며 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관념도 완전히 넘어선다고 배운다. 신에 대한 모든 묘사는 아주 불가사의하고 숭고하여 인간의 정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뭔가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불완전한 은유, 비유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빙빙 제자리로 돌려지고 있다는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 이틀간의 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달라이 라마와 두 시간씩 총 여덟 번 함께 할 회합의 첫 모임을 위해 천장이 높고 서늘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우리는 많은 주제를 준비했다. 불교가 서양에 적응하는 문제, 전통대 문화, 분파주의, 심리치료, 승려와 일반 신도, 그리고 계속 머리를 쳐드는 괴물인 스승과 제자 간의 성적 관계 등이 그것이었다. 

 

- 나는 책도 이런 식으로 쓴다. 각각의 책은 콜라주이다. 나는 왠지 나의 관심을 끄는 생각과 문구, 이미지, 소품, 글 등을 갈까마귀처럼 주뒤 고른다. 불경에서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우연히 들은 대화의 조각 속에서도 그런 것들을 찾아낼 공산이 크다. 나는 체계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때때로 마치 꿈을 꾸듯 무작위로 책을 펼쳐 그 페이지에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뛰어오르는 문장과 우연히 마주침으로써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 체계적인 기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참고자료를 다시 찾아내려고 하면서 몇 시간씩 소비한다. 그런 다음에는 이 모든 작은 조각들을 모아 깔끔하게 정리된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말할 것인지 알고 있는 자신 있는 서술자의 환상을 유지시켜야 한다. 나는 콜라주를 만들 때처럼 양식 원칙과 임의의 내용물 사이에서 똑같은 긴장을 경험한다. 

 

- 그러나 팔리 경전에서 붓다와 마라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많은 부분들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우루벨라에서 깨달음을 얻는 즉시 싯닷타 고타마가 문자 그대로 파괴해버린다는 의미에서 마라를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마라는 깨달음 뒤에도 계속 고타마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붓다가 쿠시나라에서 죽기 바로 전까지 다른 위장을 하고 계속 다시 나타난다. 이는 고타마의 존재로부터 갈망과 또 다른 '마라의 군대'가 문자 그대로 삭제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오히려 그는 마라와 함께 살면서 이 악마의 힘을 빼앗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냈다. 마라에 의해 더 이상 조종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로부터 자유롭다는 것과 같다. 붓다의 자유는 탐욕과 증오를 부수는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매달리고 동일시하지 않는 이상 저절로 사라져 버릴 일시적이고 무상한 감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발견된다. 

 

- 그러나 고타마의 담마는 일련의 자명한 이치 그 이상이다. 그것은 단순히 채택되고 믿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 모든 모호함과 단점을 가지고 있고 이 모든 연기성과 특수성을 지닌 세상을 포용하는 것이 수반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수그러들지 않는 솔직함과 자신의 아주 깊은 두려움과 갈망을 기꺼이 대면하는 것, 자신의 '자리'가 준다고 상상하는 안전함으로 도망치는 것에 저항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불화와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습관적인 반응 유형을 따르려는 충동에 저항하고, 자신의 '토대'가 가진 고요하고 온전한 시각으로 반응하게 한다.

 

- 팔리 경전에서 발견되는 설법은 다른 불교 전통의 경전 문헌에도 보존되어 있다. 그런 설법의 가장 완전한 모음집이, 지금은 잃어버린 산스크리트어 판본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에서 발견된다. 아가마(아함경)라고 알려진 이 판본은 내용과 구성 면에서 팔리어로 보존된 판본과 아주 가깝다. 팔리 경전과 아가마의 텍스트가 단어 하나하나 모두 다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비교해보면 동일한 1차 자료의 교정본임을 보여준다. 이는 공통된 초기 불교 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중 하나가 팔리어로 보존되어 결국에는 스리랑카에 남게 되었고, 또 하나는 북인도에서 쓰던 불교 '혼성(하이브리드 hybrid)' 산스크리트어로 보존되었다. 신자들이 수 세기 동안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종류의 텍스트가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은 말로 전하는 구전이 글자로 기록하는 문화에서 자란 이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 팔리 경전은 '세 개의 바구니'(티피타카 Tipitaka, 삼장)로 나뉜다. 이 세 가지는 (1) 숫타(Sutta, 경), 즉 붓다의 설법, (2) 비나야(Vinaya, 율), 즉 승가 수련 텍스트, 그리고 (3) 아비담마(Abhidhamma, 논), 즉 설법을 체계화하고 분명히 하려는 주해서이다. 전통적으로 세 '바구니' 모두 붓다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비담마를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팔리 경전에서 발견되는 설법 (경)은, 싯닷타 고타마, 그리고 가끔은 그의 뛰어난 제자들 중 일부가 붓다 생존 당시 북인도 전역 여러 곳에서 말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현대 학자들은 이 모든 설법의 오래된 정도가 다 똑같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데, 경전에서 서로 다른 영의 텍스트의 연대를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팔리 경전의 경장은 다섯 가지 '모음집'(니카야 Nikaya)으로 나뉜다. 

 

- 기원전 5세기 탁실라는 간다라의 수도였다. 탁실라는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 그 영토가 멀리 서쪽으로 이집트까지 뻗어 있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가장 동쪽의 사트라피(주)였다. 이 도시는 붓다가 태어난 카필라밧투로부터 대상 행렬이 두 달 걸려 이동하는 거리인 약 1,13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아시아의 주요 교역로의 교자로 지점에 위치한 탁실라에는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을 비롯하여 다양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 부록 IV의 지도를 보면 갠지스 평원 북부의 북로를 따라 주요 도시중한 곳만 제외하고 모든 도시 (사밧티, 쿠시나라, 베살리)의 젊은 주요 귀족들을 탁실라 대학에 보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귀족을 보내지 않은 유일한 주요 도시는 바로 고타마의 고향 카필라밧투로, 그곳은 사밧티와 쿠시나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붓다의 아버지 숫도다나가 자신의 재능 있는 아들이자 후계자를 탁실라에 보내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보냈다면 고타마는 그곳에서 교육뿐 아니라 코살라국에서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또래들(파세나디와 반둘라)과 함께 교육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친밀한 대화 어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고타마와 파세나디 사이의 친근함은 두 사람이 젊은 나이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아마도 탁실라에서 같이 수학했던- 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타마가 탁실라에 발을 디딘 적이 결코 없다 하더라도 탁실라에 있었던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따라서 갠지스 분지 너머에서 온 사상을 접했을 것이다. 

 

- 당시 인도에는 가마에 구운 벽돌이 없었다. 그 이전 간다라 시대에 인더스 계곡 문명에서는 가마에 구운 벽돌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붓다의 시기에 이르러 그 기술은 없어졌다. 약 100년 뒤인 마우리아 시대까지 인도에 그런 기술은 다시 도입되지 않았다. 

 

- '마라의 군대' 이것은 감각적 쾌락, 불만, 배고픔과 갈증, 갈망, 나태와 무기력, 두려움, 의심, 위선과 고집, 이득, 명성, 명예와 명성, 자신을 격찬하고 남을 폄하하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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