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성진]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 뜨개질하는 남자의 오롯이 나답게 살기

일루젼 2021. 12. 19.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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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이성진
출판 : 샘터(샘터사) 
출간 : 2021.11.15 


무용한 것들의 아름다움.

얼마나 실용적인지, 합리적인지, 효율적인지를 계산하는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무용한 것은 곧 쓸데없는 것-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사회악적인 것- 이 되곤 한다. 가성비가 중요한 문화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설사 그를 통해 얻어낸 경험이 다음 선택을 좀 더 나아지게 배양할 수 있더라도, 다음의 일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치이므로 평가는 냉혹하다. 그런 기조 아래 사람들은 선택을 망설이고, '정답'을 찾기 위해 선택을 유예한다. 가장 효율적인 '정답' 이외의 것들은 모두 오답이므로. 

 

왜 많은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지 알지만, 나는 다른 것을 원한다고 표현했을 때 쏟아지는 질타의 절반은 '나도 사실 이걸 원해서 선택한 건 아니야'라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주류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공포는 사회적 안전망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주류는 아닐 것이다. 보다 다양한 선택과 경험을 허락하는 사회에 창의적인 비전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를 위해 풀어가야 할 것은 막막할 정도로 많다. 

 

그래도 포기해버리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당장의 삶 속에 작은 순간들을 모아보자. 

모진 구석이 되어 정을 맞더라도 '이게 나'라는 생각이 들면 버텨보자.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부산 지하철 1호선에서 노란 실을 대바늘에 걸고 뜨개질을 하고 있을 저자의 모습을 떠올리면 웬만한 것에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으로 내가 행복하다면'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 오래전부터 '~답다'는 말에 달콤 쌉싸름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군인은 군인다워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번번이 순종의 자세를 취했다. 소수의 반항아를 상대로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목매지 말라고 같잖게 조언하는, 어지간히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자기다움을 외치던 그들에게 이런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 '나다움', 어쩌면 영원히 닫지 못할 종착점이자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여정은 설령 무용할지라도 빛이 난다. 그런 이유로, 나답다는 말의 상자를 들여다보는 연습의 자취를 여기에 소복하게 담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날 수 있어야 한다는 시인의 말이 마지막 장까지 당신에게 쓸 만한 책갈피가 되어줄 것이다.  

"너는 너다울 때 가장 빛난다. 품사가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것처럼, 어디 두어도 변하지 않을 당신을 찾아가기를." 

    

- 일차원의 선을 이차원의 면으로 짜내는 작업.

 

- 정해진 틀 혹은 표준이라는 단어는 어느 낱말의 상대가 되느냐에 따라 사뭇 느낌이 달라진다. 자유의 반대편에 놓일 때는 기어코 벗어나고 싶은 족쇄겠지만, 익숙지 않은 상황이 불러일으킨 막막함 앞에서는 오히려 구원의 손길이 된다. 창의력이 부족한 사람이 미지의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정해진 양식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다. 

 

- 슬픈 일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자판기처럼 내놓던 입은 칭찬이나 찬사 받을 일에도 같은 말을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겸손이라는 번듯한 명분 하나로 그 밀을 견고히 떠받치며. 말은 인간의 사고를 거쳐서 나온 산물임에도 거꾸로 사고방식을 통제하는 힘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누차 뱉을수록 생활의 조각 하나하나가 별것 아닌 듯한 무게로 느껴졌다. 삶의 의미라는 것이 공기와 접한 물 분자가 증발해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공중분해되는 듯했다. 슬픔의 강도를 속이기 위해 만든 찜에 제가 넘어가 도리어 속고 있는 형편이었다. 

(리뷰자 주 : 색채가 점차로 사라지고, 고저가 잦아드는 플랫한 삶.)

 

- 지나간 삶에 후회가 없다는 건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곳, 같은 시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예감. 그 모습이 최선이라는 확신이다. 

 

- 자유는 자신이 어디엔가 묶여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꿈꿀 수 있다. 

 

-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러니까 어딘가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고 무언가를 자의로 할 수 없다는 건 딛고 선 공간과 떼어 설명하기 어렵다. 공간은 비단 물리적인 특성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 Yi-Fu Tuan의 말을 빌리자면 공간이란 마치 여지 room와 같다. 어떤 물체를 놓아둘 수 있는 여지, 어딘가에 방해받지 않고 갈 수 있는 여지,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할 수 있는 여지 말이다. 딴은 그럴법한 소리다. 

 

- 독서뿐일까. 앉아서 하는 여행으로 외부 세계를 탐험한다면 뜨개질로는 마음속 세계, 소우주를 유랑할 수 있다. 

 

- "돌이켜 보면 무용한 것은 유용한 것과는 다른 결의 값어치가 있었다. 나라는 인간이 세상을 지탱하는 쓸모 있는 기둥임을 알려준 게 유용이라면, 나라는 인간이 나로서 그저 존재한다고, 그거면 됐다고 담담히 일러주는 건 무용이었다." 

- "그 어떤 것에도 존재의 설명을 기대지 않고 자유로이 살겠다는 건 한날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부의 언어를 전부 떼어내고도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다면, 무용할지라도 그게 바로 나의 알맹이가 아닐까. 알맹이를 불리고 키우는 일은 시루에 콩나물을 키우는 일보다는 어렵겠지만, 수확의 기쁨은 비길 데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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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목도리를 뜨는 일처럼, 준비된 사람이 되려는 이는 미래의 전망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면한 상황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준비를 끝마친 이상적인 모습만을 넘겨보다 당장 눈앞에 맞닥뜨린 것들을 흘쳐버린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무너진 흙집을 물 부어 다시 짓듯, 미래의 누군가를 위한 준비를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주체는 오늘의 나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미련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건 그만 됐고, 지금의 나와 나란히 걷고 싶을 뿐이다.

 

- 실용적인 뜨개질? 웃기는 소리다. 가성비 좋은 공산품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대바늘을 잡는 것부터가 무용한 일이 아닌가. 기계가 찍어내는 중국산 목도리의 판매가는 비슷한 크기의 수제 목도리 하나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룟값보다 싸다. 그뿐인가. 웬만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그 중국산 목도리보다 수제품 쪽이 질이 떨어진다. 구멍이 나 있거나 마감이 치밀하지 못한 부분을 다 뜬 뒤에 발견하면 한날 기계에 못 미치는 제 설핀 실력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여하튼 적당히 '있어 보이는' 취미. 그게 손뜨개의 현주소다. 

 

- 그럼에도 유일무이한 작품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은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경험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일수록 고유함을 빚는 행위는 빛이 난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좋든 싫든 경제적 가치라는 척도로 평가받지만, 고유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달콤한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한 겹 한 겹 나만의 경험을 얹고 그 사이사이에 나만의 작품으로 채워 바른다면 나는 나다운 사람으로 비로소 완성일 테다. 뜨개질의 쓸모를 '실제로 쓰기에 알맞은' 데에서만 찾을 이유는 없다. 고유한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제각기 자신만의 척도를 가지기 때문이라면, 그에 따라 뜨개질은 과정부터 결과까지 오롯이 쓸모 있다. 어차피 창작의 고통에서 비롯된 애착을 타인에게 온전히 느끼게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만든 사람이 바라는 작품의 쓸모와 받는 사람이 느끼는 쓸모의 무게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만 받아들이자. 없어 보이는 것보다는 있어 보이는 게 낫고 못난 쓰레기보다는 예쁜 쓰레기가 낫다. 작품에 새겨진 시간과 정성을 예쁘게 봐주는 것으로 그들은 말은 바 임무를 다한 셈이다. 예쁜 쓰레기, 이렇게 보니 듬쑥하게 쓸모 있는 녀석이지 않나. 

 

- 현대 주류 경제학에서 노동 가치는 쉽사리 인정받지 못한다. 더 중요한 대접을 받는 건 소비자의 효용, 희소성 따위다. 

 

- 도시를 배우는 일 역시 하나의 면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도시의 물리적 요소가 토지이용계획 도면과 같은 평면 종이에 담기는 까닭도 있지만, 사람 사이의 연결을 다룬다는 점에서 보다 그러하다. 도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상호작용하는 공간이자 그들이 함께 발을 맞춰 춤을 추는 무대나 다름없다. 잘 갖춰진 무대 위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삶의 개성을 뽐내며 연극을 이어가고, 그에 따라 드러나는 다양성은 예로부터 도시의 강력한 힘이자 무기였다. 점과 점의 단순한 이어짐이 아닌, 선의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혀 있는 도시는 한 단계 높은 차원 위에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도시 문제는 해결되나 싶다가도 삐끗하기 일쑤며, 실마리가 풀린다 해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인 경우가 많다. 인간의 삶 또한 마찬가지. 시간의 실로 뜨는 삶의 편물은 끝없이 확장하는 나선은하다. 은하의 이랑과 고랑을 넓혀가는 동안 우리의 생활은 무미건조해지고 돈은 항상 부족할 것이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건 헛된 소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지금' '여기서' 일상의 기쁨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슬픔을 묵묵히 감내하는 건, 그게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가 아닐까. 

 

- 자는 습관 하나 고치기도 이렇듯 쉽지 않은데 인류의 생활 패턴을 통째로 바꾼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느낀다. 전구와 시계의 탄생이 대표적이다. '에디슨이 전구만 발명하지 않았다면'으로 시작하는 가정법은 으레 그렇듯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야근과 철야 작업, 밤샘 공부에 시달리는 한국인에게는 대상이 누가 됐든 투덜거릴 표적이 하나쯤 필요한 법이다. 남 탓하지 말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라는 말은 냉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충고다. 

(리뷰자 주 : 그러니 이 말은 스스로만 되뇌일 것.) 

 

- 들쭉날쭉한 힘으로 실을 당긴 게 편물에 그대로 드러나는 시절을 거쳐 한없이 고르고 너끈한 편물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뜨개질하는 사람은 초보 티를 벗을수록 힘을 빼는 법을 배운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고 푹 기죽어 있을 필요는 없다. 계속하기만 한다면 시나브로 고쳐질 습관이다. 처음이라 긴장해서 힘이 들어갔을 뿐이다. 얼마 동안은 뻑뻑해서 작아진 구멍 찾기가 버겁겠지만 그 또한 나아질 일이다.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때에 넉넉해진 구멍과 느슨해진 편물이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 무늬가 어긋난 부분을 찾아 실을 줄줄 풀어갔다. 선반 위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어느덧 드뷔시의 <달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좌로 우로 실을 당기다 문득 생각했다. 삶에도 이런 단수링 하나쯤 있다면 어떨까 하고. 내가 맞는 자리에 서 있는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길라잡이. 여기서는 다소 굳세게 전진하고, 거기서는 잠깐 멈춰서 호흡을 고르라고 말이다. 방향을 바꾸는 방법과 생활의 두께를 키우는 요령까지 친절히 알려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어리숙한 초보는 헤매는 일은 있을지언정 불안하지는 않을 테다. 단수링은 답을 명확히 내어주니까. 스톱 그리고 고. 그저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 대바늘 뜨기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혹자는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뜨개질은 대바늘 뜨기 knitting와 코바늘 뜨기 crochet로 나뉜다. 그중 대바늘 뜨기라는 푯말을 따라간다면 당신은 두 갈래 길에 당도할 수 있다. '컨티넨탈 continental 뜨기' 대 '아메리칸 american 뜨기'. 둘을 가르는 기준은 뜨는 방식에 있다. 복잡 미묘한 뜨기 세계의 기법을 책의 활자로 나타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컨티넨탈 뜨기는 왼손으로 실을 잡고 뜨는 기법이고 아메리칸 뜨기는 오른손으로 실을 잡고 뜨는 기법이다. 우리가 기술·가정 시간에 교과서로 배운 것이 다름 아닌 이 아메리칸 뜨기 기법이다. 명칭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메리칸 뜨기는 미국 사람들, 또한 그들과 뿌리가 같은 영국 사람들에게 기원을 두고 있고, 컨티넨탈 뜨기는 유럽 대륙 사람들에게 기원을 두고 있다. 뜨개질과는 평생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잡학 지식 하나쯤 알아두어 나쁠 건 없다. 대바늘을 실제로 손에 쥘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 뜨는 것이 더 좋은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일 것이다. 아메리칸 뜨기와 컨티넨탈 뜨기의 대표적인 차이점은 아무래도 속도다. 컨티넨탈 뜨기에서는 실을 왼손으로 잡은 채 진행하기 때문에 고를 뜨는 데 필요한 동작이 하나 줄어든다. 다시 말해, 같은 속도로 손을 움직였을 때 아메리칸 뜨기보다 빠르게 떠나갈 수 있다.  

 

- 문득 떠오르는 이가 한 명 있다. 대바늘을 아메리칸 뜨기로 처음 배운 내게 컨티넨탈 뜨기를 종용했던 사람. 하긴, 그의 마음도 넉넉히 이해는 간다. 한쪽 기법에 오랜 기간 익숙해질수록 다른 기법이 쉬이 손에 익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가엾은 아메리칸을 하루빨리 컨티넨탈로 갈아타게끔 하는 것은 그가 구도자로서 가야 할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세계를 맛본 인간이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은 체험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대부분 순전한 선의에서 온다. 그들은 가끔 계몽가의 입술로 인습에 젖은 이들을 깨우치기도 하고 이따금 어머니의 손길로 아이에게 하듯 라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기도 한다. 이게 얼마나 좋은 줄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면서. 

-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언을 떼어내는 일은 실로 마음 아리는 일이다. 진심의 농도가 진할수록 끈적한 테이프 자국은 오래가는 법. 하지만 어른이 되어 홀로서기한다는 건 타인의 진심과 나의 판단이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어긋남에 덤덤해지는 것이다. 편리함과 편안함은 혼용해 쓰일 때가 많지만, 엄연히 다른 함의를 품은 말이다. 편리가 '편하고 이용하기 쉬워서' 이로운 것이라면 편안은 '편하고 걱정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편리함의 반대말은 '불편함'이고 편안함의 반대말은 '불안함'이다.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춰진 대단지 주상복합 아파르에는 편리함이 잘 맞고, 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푹신하게 몸을 감싸주는 가죽 소파에는 편안함이 잘 맞는다. 

 

-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빠르고 간편한 생활을 누리는 우리나라는 어느 쪽이 잘 맞을까? 편리함의 극치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편안함을 갈구하는 삶은 고독한 싸움이다. 편안함은 익숙한 느낌과 결을 나란히 한다. 이전부터 해오던 익숙한 일이라 걱정이 없고 불안하지 않은 것이다. 컨티넨탈 뜨기와 견주어본 아메리칸 뜨기의 위상은 적어도 내게 있어 그러하다. 

 

- 컨티넨탈 뜨기 대 아메리칸 뜨기, 또는 뜨개질 바깥의 무엇이든, 내가 끌리는 그것으로. 어지간히 명쾌해서 의심스럽겠지만, 그게 답이다. 

 

- '탄소 발자국.' 무의식적인 행동을 의식하는 순간은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초코칩 쿠키를 뜯다가도 온다. 와그작. 과자 하나 뜯어먹는 행동이 시시각각 지구와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상상해 봤다. 썩 복잡해 보임에도 그다지 좋지 못한 쪽으로 가는 과정임은 한눈에 알아보겠다. 비단 과자뿐이랴. 거의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물건 하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거쳤거나, 혹은 그 반대편 누군가의 서류에 올라가 있거나, 또는 누군가의 미래를 바꿔놓을 사건의 조각이다. 사람들은 의도와 신념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제껏 몰랐던 걸 알려하고, 알게 된 만큼은 좋은 쪽으로 비워보려 한다. 다만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제 주변을 통제하기는커녕 연결의 흐름을 읽어내기조차 버겁다. 선한 마음으로 한 날갯짓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나비 효과를 일으킬 때 우리의 신념은 그만 회의감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삐끗하면서도 끊임없이 두드리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비건을 자처하고, 공정 무역을 지지하며 윤리적 소비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약속의 씨앗을 뿌린다. 끝끝내 다가올 결실을 그저 낙관할 수만은 없다. 인생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흩뿌려 놓은 조각들이 좋은 쪽으로 맞춰질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우리는 힘닿고 마음 닿는 데까지만이라도 제 앞에 놓인 길이 맞겠거니 여기며 달음질할 뿐이다. 늘어난 인구, 커진 스케일, 복잡해진 시스템 속에서 세계는 촘촘히 연결되었다. 이 관계망을 기반 삼아 인류는 전에 없이 풍요로운 일상을 누리게 됐다. 하지만 사회의 연결이 고도화될수록 한 사람의 생각, 힘, 가치관의 무게는 더없이 시시해진다. 내가 사는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런 말은 한날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됐다. 

 

- 취미가 넓은 외부 공간을 요구하지 않으니 구태여 나갈 이유가 없었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남향 창문을 열고 방 안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게 익숙한 일이 됐다. 집돌이는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은, 여섯 평짜리 방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활발히 밖을 쏘다니던 때보다 작지 않다는 것이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조정래 작가는 말했다. 좁다란 방에 자세를 잡고 앉으면 야구장 같은 광활함은 못 느껴도 지구 반대편까지 갔다 오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었다. 먼 이국 유명한 관광지의 정경을 마음의 눈에 담을 수 있었고, 이제는 흙으로 돌아간 거인들의 어깨 위에도 사뭇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책을 덮기 전 종이 날장 속에는 무궁무진한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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