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완] 죽은 자의 집 청소

일루젼 2021. 12. 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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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완 
출판 : 김영사
출간 : 2020.05.30 


 

벼르고 벼르다 이번에서야 읽게 되었다. 

두고 떠나고 나서의 일이야 내 일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일이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떠나고 남은 자리도 그럭저럭 괜찮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받았던 것들보다 더 많이 갚고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가면서조차 손과 품이 많이 들지는 않았으면 하는. 

 

예전에야 친구에게 '부탁한다'며 농을 걸었지만, 이제는 이게 우스갯소리만은 아니게 되고 말았다. 

무거운 책이 한 가득, 잡동사니도 한 가득한 상태를 줄여나가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듯 하다.

내가 나를 바라보듯, 미래의 나를 위해 준비하듯, 조금씩 조금씩.

 

특수 청소 전문가인 저자는 사후 시간이 많이 흘러 발견된 현장, 범죄 현장, 쉽사리 손대기 어려운 지저분한 곳곳을 의뢰받아 청소해준다. 필요하다면 장판과 벽지, 천장 벽지까지 뜯어내는 '초기화'까지 진행하는 모양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이가 숨쉬던 공간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그 사람을 이해해보려 한다. 아니, 이해하게 된다는 느낌과 함께 그를 통해 자신을 본다. 청소라는 행위가 갖는 힘이다. 

 

그런 도움들이 필요한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떠한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읽기 전부터 이런 저런 평들을 많이 들어 기대치가 높았으나, 만족스러웠다.

 


   

- 거대한 철문 뒤에 또 다른 옹벽이 서있어서 그를 가로막은 것 같다.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마주했던 암담한 거울이 다시 내 앞을 가로막는다. 막막함은 또 다른 눈을 뜨게 한다. 그를 들여다보려다가 결국은 나를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이해 불가의 쓰레기를 수습하러 온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 나는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는가?
그는 왜 나라는 인간에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굳이 내 판단의 사슬에 그를 옥죄어야만 하는가?

그의 쓰레기를 대신해서 치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삶에 산적한 보이지 않는 쓰레기를 치우는 것 같다. 내 부단한 하루하루의 인생은 결국 쓰레기를 치우기 위한 것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해답도 없고 답해줄 자도 없다. 면벽의 질문이란 으레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 언제나 고통이란 더 극심한 고통에 순위를 내주곤 잠잠해지게 마련이다. 

 

- 스스로 지하에 유폐한 생활. 어둠 속에 칩거하며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무엇에 몰두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에 대한 의문을 거듭할수록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든 그것은 그저 내 생각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 이 집을 치우며 지독한 고독을 보았다면 그것은 결국, 내 관념 속의 해묵은 고독을 다시금 바라본 것이다. 이 죽음에서 고통과 절망을 보았다면, 여태껏 손 놓지 못하고 품어온 내 인생의 고통과 절망을 꺼내 이 지하의 끔찍한 상황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한 불행한 남자를 보았다면, 마치 인생의 보물인 양 부질없이 간직해온 내 과거의 불행함을 그 남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고는, 나는 결백하답시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이 지하 방에 관해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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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는 이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두께 사 밀리미터의 강인한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들어진 상자 안에는 여러 가지 보호 장구가 들어 있습니다. 파란색 수술용 글러브와 역시 파란색 신발 덮개, 그 안에 덧신는 투명한 파란색 비닐로 만들어진 또 다른 신발 덮개, 하얀색 방진마스크와 연한 회색의 방독마스크, 그리고 현관문을 여는 데 요긴한 공구 따위가 손잡이가 달린 두 상자에 나누어져 담겨 있습니다. 이런 보호 장구들은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피부와 같습니다. 콘돔이 생명의 잉태를 막듯 이런 보호 장구의 얇은 막이 나를 감염과 오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막아준다고 믿습니다.

 

- 이미 심장에 드리웠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심장을 옥죄던 어둠은 '실체의 구체적인 직시'라는 강렬한 태양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곤 합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내 안에서 비롯되어 내 안으로 사라집니다. 한 번도 저 바깥에 있지 않았습니다.
 

- 자살 직전의 분리수거라니,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이전에 다른 자살자의 집에서 번개탄 껍질을 정리해둔 광경을 본 적은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본격적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착화탄에 불을 붙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에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고? 그 상황에서 대체 무슨 심정으로? 자기 죽음 앞에서조차 이렇게 초연한 공중도덕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얼마나 막강한 도덕과 율법이 있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마저 이토록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는가. 

 

- 상담원과 통화를 마치고, 어둠 속에서 촬영하느라 초점도 잘 맞지 않고 형태가 흐릿한 사진 몇 장을 의뢰인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전화를 걸어와, 도리어 나에게 이 사진 속 정체가 무엇인지 되물었다.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상상 밖의 일이란 소설이나 영화처럼 일정한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허구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의도 없이도 매우 구체적이고 엄연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암흑 속의 집안 상태와 계량기가 철거된 자초지종을 길게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휴대전화 저편에서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듣는다. 침묵은 때때로 상대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줄이거나 보탬 없이 그대로 전하는 힘이 있다. 그녀는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으레 듣곤 하는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말 대신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라는 성경 구절이 진짜 기적처럼 이루어지리란 믿음을 간절히 품고 나를 초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 안에 쓰레기를 모으고 버리지 않는 사람들인데, 쓰레기를 쌓고 또 쌓다가 결국 집 안에 작은 언덕과 산을 만들고는 이사를 앞두고 전전긍긍하다 결국 나 같은 청소업자를 부른다. 나는 부름에 따라 어디든지 기꺼이 찾아가서 강철로 만들어진 특제 쓰레받기를 굴착기의 버킷처럼 요령껏 휘두르며 쓰레기의 산을 깎고 포대에 주워 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 

 

-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산지 십 년이 넘은 애묘인으로서, 개인적인 바람이야 고양이가 벗어놓은 양말이 있다면 몰래 다랑어 캔이라도 넣고 가는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지만 어쩌다 보니 고양이가 죽으면 들이닥치는 그림리퍼 grim-reaper가 된 것 같다. 

 

- 아이깁투스. 이집트의 옛 명칭. 부바스티스 시의 고양이 장례에 대한 내용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도 실려 있다. 부바스티스 시민은 고양이를 비롯해 여러 동물에게 예우를 갖췄다. 함께 기르던 개가 죽으면 주인이 머리카락을 비롯한 온몸의 털을 깎았으며, 따오기나 매를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사육사가 동물의 종별로 각기 배정되었으며 이 직업은 세습되었다.  

 

- 이집트 고대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상인 사람 몸에 자칼 머리를 한 아누비스 Anubis는 장례 집전과 방부 처리, 미라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아이깁투스의 신성은 고양이라고 인간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 "네, 물론 저희가 그런 일도 합니다."

 

- 어른인지 아이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앳된 목소리의 여성이 집에 있는 죽은 동물을 치워줄 수 있는지 물었다. '고양이들'이라고 했으니 분명히 한 마리가 아니라는 뜻이리라. 천진난만한 음성에 현혹되지 말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대개 막 통화를 시작한 처음 몇 마디에 가장 객관적인 정황이 드러나게 마련. 그리고 상대의 설명에 의존하기보다는 감성을 느끼는데 집중하는 편이 그곳에 놓인 구체적인 사실에 다다를 가능성을 높인다.

 

- 고양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는 정설을 깨트리러 세상에 왔다. - 록밴드 '슬립낫 slipknot', 폴 그레이 Paul-Gray
Cats were put into the world to disprove the dogma that all things were created to serve man. 

 

- 두꺼운 솜이불을 모두 걷어내자 또 한 번 낯선 광경이 펼쳐진다. 장판에 얇은 담요 여러 채가 어지럽게 깔려 있고, 마치 마술사가 남긴 원형의 결계나 마법진처럼 수많은 양초와 향초가 다 타고 녹아서 파라핀의 밑동만 남긴 채 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그 안에는 핏물에 전 공책 여남은 권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자잘한 글씨가 써 있는 종이들이 흩어져 있다. 티브이나 컴퓨터도 없다. 냉장고 안은 텅 비었다. 다만 플러그가 뽑힌 채, 검붉은 핏물이 양갱처럼 굳어가는 장판 바닥에 널브러져 반쯤 잠겨 있다. 냉동칸을 열어보았지만 그 속에는 냉기조차 없다.

- 사람이 진짜 살던 곳인가? 무소유를 추구하는 불자 같은 삶인가? 플라스틱 서랍장에는 고작 얇은 티셔츠 몇 벌과 허리띠 하나, 그 위쪽 칸에는 흰색 약 봉투 뭉치가 가득 들어차 있다. 처방전에는 한 대학병원의 신경정신의학과가 진료 기관으로 기재되어 있다. 누군가 이 지경으로 살아야 했다면 그 마음은 지옥 같았으리라.

 

- 그의 삶이 진짜 지독한 수행 같은 것이었다면 죽을 만큼 혹독한 고행의 결과로 마침내 도달한 진리는 무엇일까?

 

- 동반 자살하려던 둘 중 한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돌리고 혼자라도 살려는 의지를 보이면 그것을 막고 같이 죽을 것을 강제하기 위해 준비한 것일까? 후자의 목적이라면 굳이 칼이 두 자루 준비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 언젠가 당신의 동생처럼 내 형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울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형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어깨를 들먹이며 울어줄 수 있을까요? 

 

- 오늘 우리가 떠나고 다음 주가 되면 인테리어 업자들이 찾아와 낡은 조명을 걷고 효율이 뛰어난 밝은 전등으로 바꾸고, 새 모노륨 장판과 실크 벽지로 이 집을 단장할 것입니다. 당신 동생의 계획대로라면 곧 이 집은 부동산 중개인이 나서서 매각되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겠죠.

(리뷰자 주 : 누군가의 집, 그리고 또 누군가의 집.)

 

- 이곳에 머문 며칠 동안 염치도 없이 당신이 집에 남기고 간 모든 것을 보았고 그 흔적을 지우고자 애썼지만 사실 당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같은 해에 이 나라에 태어나, 당신이 좀 더 일찍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서둘러 경험한 죽음을 향해 나 역시 잠시도 지체하지 못하고 한 걸음씩 다가설 뿐입니다.   

 

- 남겨진 책을 보면서 죽은 이에 대해 생각한다. 서가에 꽂힌 압도적인 양의 책, 지독하게 읽으면서 이 생을 건너간 사람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다만 분야나 저급과 고급, 입문과 심화를 가리지 않고 무던히 읽어나간 남독형 독서가라는 점은 명백하다. 

 

- 책이란 언제나 요령 없이 무겁다.    

 

- 책을 만드는 자들은 책장에 꽂힌 채 제목을 보이는 면을 등, 펼치는 쪽을 배라고 부른다. 책을 사람에 빗대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다. 서구에선 책의 등을 아예 '척추 spine'라고 부르고, 우리가 책의 배라고 부르는 부분을 일본에선 '작은 입'이라고 부른다. 책은 그것을 사서 읽는 사람의 문신 같다. 문신들은 언뜻 주군을 섬기는 것 같지만 저마다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며 등을 민다.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시길 통촉하옵나이다." 그 주장이 그럴듯할수록 독서가는 더 많이 밀린다.

 

- 2018년에야 비로소 대한민국 <직종별 직업사전>에 처음 등재된 '유품 정리사'라는 직업도 독립적인 지위를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 직업사전의 개정 발간을 맡은 한국 고용정보원으로부터 유품 정리사에 대한 직무분석 자료를 검토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우리 실정에 맞게 직업 개요와 업무 내용을 바로잡아 공식 의견으로 제시했다. 또 미국 노동성 직업안전 위생국 Occupar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의 실례를 들며 표준직업분류상에서 신규 색인어를 추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제시한 의견 대부분은 받아들여졌지만 '배관 세정원 및 방역원'이라는 직업분류의 하위 카테고리에서는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가 사전에 일러놓은 대로 배관 세정원이나 방역원을 불러서 사람이 홀로 죽은 채 오래 방치된 집을 청소해달라고 부탁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하다.  

 

- '특별한 일을 하시니까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수고한 일이잖아요.' 
부단히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평범한 내가 점점 특별한 사람이 되고, 하는 일마저 대단해지는가? 천만에. 행여나 그런 달콤한 착각이 있다면 홀로 죽음을 맞이한 이의 집에 도착하는 순간 산산이 조각나게 마련이다. 또 마음 한구석에 그 특별함의 조각들이 미련처럼 쌓여 여전히 반짝거리면, 청소하며 집 안팎을 분주히 드나드는 동안 더욱 잘게 바스러지고 결국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어질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 죽는 자가 늘어날수록 활기를 띠는 비즈니스. 그 직업적인 아이러니를 떼어놓고는 이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죄책감이 내가 발을 디디고 선 땅이다. 뒤돌아보면 언제나 죄책감 위에 새겨진 기나긴 발자국이 저 멀리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다. 움푹 들어간 자국이 깊고 선명하다.  

 

- 차라리 여기 있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 가운데 특별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 특별하다는 관념은 언제나 가치 없는 것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모든 것이 가치 있고 귀중하다면, 지금 여기에서 특별하지 않은 것이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면 무척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 같다.  

 

- 당신이 하는 일처럼 내 일도 특별합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귀중한 사람이 죽어서 그 자리를 치우는 일이거든요. 한 사람이 두 번 죽지는 않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뿐인 그분에 대한 내 서비스도 단 한 번 뿐입니다. 정말 특별하고 고귀한 일 아닌가요? 

 

- 사실 '힘들지 않은가?'라는 질문 자체에 이미 '그 일은 힘들 것'이라는 전제가 눅진하게 깔려 있어서, 기대에 부응해 그저 힘들다고 답하면 왠지 진실의 절반은 묻어둔 채 성의 없이 얼버무리는 것 같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다고 답하면 상대를 되려 미궁 속에 빠뜨리는 것만 같아 난처하다. 그래서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혹시 미처 돌아보지 못한 측면이 있는지 매번 자가 심리분석을 하듯 필사적으로 내면을 더듬어본다.  

 

- 그리하여 오랜 생각 끝에 속으로만 뇌까릴 뿐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지만 내가 들려주고 싶은 대답은 이것이다. 
"힘들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 어느 날 또 누군가 '일할 때 괴롭지 않은가'라고 물으면 언젠가 한 번쯤은 이렇게도 대답해보고 싶다.
"글쎄요., 그게 말이죠. 즐겁지 않다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 사람이든 고양이든 척추를 가진 포유류가 썩는 냄새는 한번 경험하면 다른 냄새와 오인하지 않을 만큼 고유하다.

 

- "제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점입니다. 일상에서도 늘 죽음과 연결된 느낌이 들어요. ... 죽음이라는 관념에 늘 접속 중인 것 같아요.

 

- "글쎄, 바로 그것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생각이 진짜 힘들고 괴로운 것인지... 늘 스위치가 켜져 있는 것 같아요. 언제나 죽음에 관해 생각하다 보니 이것을 단순히 '괴롭다' 또는 '즐겁다'는 감각으로 나눌 수 없는 것 같아요. 전등이 환하게 켜져 있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밝아도 여봐란듯이 쉽게 잠들곤 하잖아요. 제 경우는 이제 스위치를 켜 둔 채 잘 자는 편이 된 것 같아요."  

 

- "보오, 우리 밭 있지. 그쪽으로 가로등이 들어오면 안 돼. 밤에 불 들어오면 작물이 못 살아. 들깨가 다 죽는단 말이오. 그쪽으로는 가로등 하나라도 넣으면 안 돼. 내 말 알았는가?"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할머니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벌써 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그날 밤 전화를 받고 느꼈던 당혹감이 생생하다. '어두컴컴한 산골 마을이야 밝아지면 좋을 테지.' 하는 생각은 얼마나 농사를 모르고서 하는 깜깜하고 막연한 것이었나. 밤새 꺼지지 않는 대낮 같은 조명 아래 입 없는 식물은 아우성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시들어갈 것이다.  

 

- "사실은 잘 잔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이제 괴로운지 어떤지도 모르고 그냥 버티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스스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냥 견디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자주 받는 질문인데도 언제나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도 사실은 그런 점을 무의식 중에 외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 도권보다는 인구가 적은 소도시나 면과 읍, 리 단위의 작은 마을의 호출이다. 뒤늦은 부름을 받고 바람 따스한 남도나 햇살 서늘한 강원도 시골집에 도착하면, 냄새를 제거한답시고 오곡을 태운 흔적이 있고, 액막이한답시고 깨뜨린 박 부스러기가 마당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창가에 향을 꽂아 피워 올리거나 현관문 앞에 굵은소금을 뿌려둔 모습은 어디서나 예사롭다. 소독한답시고 방 모퉁이마다 소주를 잔뜩 뿌려놓아서, 집주인에게 부연 설명을 듣기 전에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못 이겨 죽은 집이라고 지레짐작한 곳도 있다. 

 

- 지역마다 고유한 제사 음식이 있는 것처럼 죽음 뒤의 민간 처방도 지방색이 있는 것 같다. 남해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을 달래겠다며 뜻인지 모자반인지 알쏭달쏭한 마른 해초를 태웠다. 산등성이 아래 비옥하고 널따란 농경지로 둘러싸인 농가에서 마른 쑥을 태우는 것은 흔한 일, 악취를 잡고자 얻어온 커피의 원두 찌꺼기를 종이컵에 담아서 원룸 건물의 계단 곳곳에 두는 서울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보건과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효과적인 처방은 아닐지라도, 대도시보다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맞닥뜨리는 처방에서 뭔가 원초적이고 심지 깊은 태도, '이것 참 인간적이구나' 싶은 소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비록 들끓는 파리와 구더기의 행렬은 유감이지만...

 

- 우리나라에 여전히 인간 죽음에 얽힌 다양한 민간 처방과 무속 신앙이 남아 있다. 또 생래적으로 초자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뿌리 깊다. "귀신이 나타나지는 않는가?” “그 집에서 자살한 사람의 혼령이 자기 물건을 치워버린 것에 앙심을 품고 사는 곳까지 쫓아오거나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이 일을 시착하고 나서 뭔가 느낌이 달라진 것은 없는가?" 이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질문은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자연스럽다. 

 

- 옆집에 누가 살든 불편을 끼치지 않는다면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자 예의범절이 된 도시의 고시원과 원룸촌, 오피스텔 같은 거대 집합건물... 혼자 사는 도시인의 사회적 고립 문제는 피치 못한 결과라기보다는 어쩌면 각자가 실리를 위해 선택한 길. 농촌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덜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 어쩌면 나는 그저 누군가가 나와 통화하면서 죽어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살을 막는 선택은 그녀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내가 지금 진실로 원하는 것은 그녀를 살리는 것일까, 죄책감이라는 영벌에서 나를 살리는 것일까? 

 

- 상대에게 얼마간 의심이 든다 해도 내 쪽에선 절대 내색할 수 없다. 만에 하나라는 경우라도 남아 있다면 함부로 상대의 진의를 넘겨짚어선 안 된다. 상대가 말한 것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 것 역시 고객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 현장은 끔찍하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라도 공평하고, 자비가 없다. 

 

- 사건과 사고를 뉴스로만 접하는 평범한 시민에겐 생소하겠지만, 범죄로 부당한 피해를 입은 이들을 보호하고 도움을 주는 취지로 유혈 상해 현장에 특수 청소를 지원한다. 예전에는 각 지방검찰청에 속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주로 맡던 일을 언젠가부터 경찰청 인권보호담당관의 주관 아래 전국 지방 경찰서도 동참한다.  

 

- 공교롭게도 그동안 맡아온 범죄 현장은 대부분 돈에 얽힌 살인과 미수, 상해치사가 일어난 곳이다. 드물게 성범죄나 치정범죄 현장 의뢰도 있지만, 검경이 나서서 피해자에게 청소 서비스라도 해서 도움을 줄 만큼 일반인은 손쓸 도리 없을 정도로 참혹한 사건은 주로 돈과 연관된 것이었다. 

 

- 범죄 현장에 모인 낯빛이 어두운 사람들. 침울하고 굳게 입을 다문 얼굴들. 오늘 한자리에 모인 우리가 이곳을 떠나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을 침상에 누일 때면 어떤 표정일까? 만약 꿈의 신 모르페우스가 그 얼굴을 굽어본다면, 우리의 가장 순진했던 시절 엄마 모습으로 꿈에 찾아와 "아이야, 악몽은 잊으렴." 하고 밤에 자장가를 부르며 머리카락이라도 매만져주면 좋겠다. 

 

- 유독한 연기를 피우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한 줌의 재가 봉투 속에 가볍게 떨궈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죽은 이의 선택을 탓하고 싶은 교만 따위는 어느새 흩어지게 마련이다. 죽은 이의 진심을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감히 누가 함부로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 수많은 자살 현장을 오가며 죽은 자의 직업과 자살을 감행한 도구가 때때로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 낯선 것을 찾기보다는 자기에게 익숙한 것, 일상에서 가까운 것을 자살 도구로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인내했고, 또 일하는 내내 얼마나 빈번히 죽고 싶은 충동에 빠졌을지 생각해보면 내 마음도 어느새 빛을 잃고 어둑해진다.

 

-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등을 맞댔을 뿐, 사람의 생명과 죽음은 결국 한 몸통이고 그중 하나를 떼놓고는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다.  

 

- 그래도 아버지는 늘 너를 생각하셨다. 

 

- 지금 이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일까, 내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이쯤 되면 음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너무나 길고 단절된 리듬과 멜로디다. 하지만 그것이 하찮고 미련한 생각으로 왜소해진 밤을 위로해주는 나만의 피아니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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