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설흔] 공부의 말들 - 수많은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배움을 위하여

일루젼 2021. 12. 23.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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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설흔
출판 : 유유
출간 : 2018.01.04 


 

처음 만나는 저자였다.

 

왼쪽 페이지는 옛 이들의 문장을, 오른쪽 페이지에는 저자의 글을 실은 편집인데 호흡이 길지 않으면서도 완결성이 있어 좋았다. 읽는 내내 피식 웃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하며 신나게 읽었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느낌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책제는 <공부의 말들>이지만 내용을 파고 들어가면 삶에 대한 말들이고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말들이며 인간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106개의 문장들은 모든 이들에게 적어도 하나 이상의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초반의 글 중에서 헌책방 이야기가 있다. 구하던 책을 찾아 살펴보니 앞장에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듯한 메세지가 적혀있었는데, 아마 그 마음은 선물을 받는 이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이 책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을 것이라면서. 

 

어라.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나는 책의 검수를 거치는 중고서점을 이용했으니 사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저자와 의도치 않은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글을 읽는 동안 입술을 앙다문 채 힘주어 꾹꾹 타자를 치는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공감가는 바가 많았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 내심 짐작이 되고 말아 나 또한 입술에 힘이 꾹 들어갔다. 읽으면 읽을 수록 위로인지 공감인지 서글픔인지 모를 것들이 뒤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발췌독과 통독을 권하는 독서법들이 많다. 여러가지 장단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결국 계속 읽다보면 다시 일독일지라도 완독을 목표로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어찌 되었든 그 책을 읽기로 했다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번은 쭉 다 들어줘야 나도 할 말을 할 수 있지 않나 싶은 마음에 그렇다. 그런고로 이곳에 글을 남기는 책들은 모두 완독한 책들이다. (읽은 모든 책들의 리뷰를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리뷰를 쓴 책들은 한 번은 다 읽었다는 표시다.) 

 

올해보다 나은 내년을 기약하며.  

끝.

 


 

- 집에 책장이 많았다. 빈 책장을 그대로 둘 수 없어서 한 권 두 권 책을 채워 넣었다. 책장이 많았기에 채워 넣은 책도 많았다. 어느 날 무료해진 나는 책을 세었다. 책장이 많았고, 책장은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꽂힌 책의 권수는 일정치 않았기에 정확한 숫자를 산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편법을 쓰기로 했다. 평균 크기로 보이는 칸을 골라 그 칸에 꽂힌 책의 권수를 썼다. 그 숫자에 책장의 칸 수를 곱했다. 삼천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다섯 수레는 충분히 채울 만했다. 왠지 뿌듯했다.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뼈가 단단해진 것 같았다. 똑똑해진 것 같았다. 

 

- 며칠 전 책 한 권을 찾으려고 책장을 뒤졌다. 책장은 많았고 칸은 더 많았고 책은 더, 더, 더 많았다. 먼지투성이 미로 속에서 나는 끝내 원하는 책 한 권을 찾지 못했다. 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거리는 꼴이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였다. 그날 밤 책장 뒤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껄껄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흐흐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득도한 물고기를 닮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리뷰자 주 : 남일이 아니다...)

 

- 나는 다독多讀하는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캡슐 커피로 머리를 깨우고 한 시간 정도 책을 읽는다. 매일은 아니고 거의 매일, 어느 무료한 날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며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남는 수첩이 있기에 기록을 시작했다. 책 제목과 읽은 쪽수를 적었다. 책이 마음에 쏙 들어서 뽀뽀를 하고 싶었거나 어처구니없는 문장과 번역에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을 땐 짧은 글도 한두 줄 끄적거렸다. 육 개월이 지났다. 결과를 확인했다. 나는 오십 권의 책을 읽었다. 삼사일에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뜻, 일 년이면 백 권의 책을 읽는다는 뜻이었다. 잠깐 우쭐했다가 이내 기분이 나빠지고 슬퍼졌다. 최근 십 년만 계산하면 천 권의 책을 읽은 셈인데, 그럼에도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생각은 진부했고 쓰는 글은 뭉툭하고 평범했다. 책을 읽었으나 제대로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없었다. 책상물림이라는 표현도 과했다. 나는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며 책장만 넘기는 자에 불과했다. 

 

- 나는 소설 중독자다. 손에 들면 대부분 끝까지 읽는다. 모든 소설이 다 재미있는 건 아니다. 묘사가 끝도 없이 이어지거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소설, 번역이 엉망인 소설은 읽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웬만하면 다 읽는다. 

(리뷰자 주 : 나는 발췌독을 선호하지 않는다. 미련한 것이기도 하다.)

 

- 현암사에서 나온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를 읽다 보니 이런 문장이 나온다. "처음부터 읽지 않으면 안 된다면, 끝까지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니까요."

 

- 이황은 젊은 벗이자 만만치 않은 적수였던 기대승에게 이렇게 썼다. "진정한 굳셈과 용기는 제 주장을 강하게 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상대의 올바른 말을 그 즉시 따르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굳셈과 용기이지요." 

 

- 이덕무의 글을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더 피곤했던 건 읽지도 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읽고 쓸 때는 그래도 막연하나마 기대가 있었다. 그것들을 놓아 버리자 기대도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읽고 쓰기로 했다. 이덕무에게 찾아왔다가 사라졌듯이 내 슬픔과 고통도 사라지기를 바라며 다시 읽고 쓰기로 했다. 

 

- 책에 빠져 헤맨 자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은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책에 홀리고 사로잡힌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사람은 왜 책을 읽고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길을 잃고, 돌아올 방법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위험하다고? 물론 위험하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독서는, 공부는 없다. 

 

 


 

- 눈과 귀가 열리지 못한 요즈음 사람들은 옛사람의 글을 무덤덤하게 보는 병을 갖고 있다. - 박제가

 

- 천지 사방과 만물은 글자로 쓰지 않은 글자, 문장으로 적지 않은 문장일 것입니다. - 박지원

 

- 배우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르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 박지원 

 

- 같은 소리는 서로 반응하는 법이며, 같은 기운은 서로를 찾는 법이다. - 이이

- 사람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학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오래된 습관에 발목을 잡히기 때문이다. - 이이 

 

- 공부는 느긋해서도 안 되고, 조급해서도 안 된다. 공부는 죽은 뒤에야 끝이 난다. - 이이

 

- 지극한 슬픔이 찾아왔을 때 나는 책을 든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을 위로한다. - 이덕무 

 

너희는 베푼 적이 없으면서 남들이 먼저 베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아느냐? 너희들의 오만함이 아직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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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의 고백은 내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공부의 길이란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길을 걸으면서 늘 딴생각을 했다. 메뚜기처럼 이 길 저 길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뛰어다니기만 했고, 나아가야 할 때 멈추었고,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갔고, 왼쪽으로 가야 할 때 오른쪽으로 갔고, 오른쪽으로 가야 할 때 뒷걸음질 쳤으며, 주머니에 넣어 둔 나침반과 지도는 제대로 읽지도 못했을뿐더러 걷거나 뛰다가 잃어버렸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다른 길을 찾기는커녕 주저앉아 눈물만 찔끔찔끔 흘리곤 했다. 그런 내가 공부에 대해 쓰다니, 나무 위의 물고기가 흐흐 웃고 절반쯤 눈 감은 코알라가 포복절도할 판이다. 그럼에도 '공부의 말들'을 써서 책으로 낸 까닭을 묻는다면 반면교사反面敎師라 답할 수밖에 없다. 공부란 결국 수많은 실패를 통해 배워 나가는 것.  

 

- 하나 더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공부가 뭔지도 잘 모른다. 안다고 여겼으나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음을 글을 쓰며 새삼 깨달았다. '공부의 말들'을 쓰는 시간이 무용하진 않았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공부의 말들>엔 공부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등장한다. 어떤 견해는 공부법에 대한 것이고, 어떤 견해는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고, 어떤 견해는 공부하는 자들이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것이다. 한 견해는 다른 견해와 비슷하기도 하고, 배치되기도 한다. 한 견해는 다른 견해의 부속품이나 부모 혹은 조상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중구난방, 계통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부라는 단어를 아예 잊고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 우리? 그저 냄새나는 가죽 주머니 속에 든 문자가 남들보다 조금 많을 뿐이지. 나무와 땅속에서 들리는 매미와 지렁이 울음소리가 시 외우고 책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겠나? - 박지원 

 

- 오에 겐자부로는 한 명의 작가를 정해 놓고, 대략 삼 년 동안 그 작가의 책이나 관련 연구서만 읽는 독서법을 젊은 시절부터 지켜왔다고 한다. 그는 단테, 엘리엇 등을 독서법대로 읽어 나갔고, 그 결과 단테와 엘리엇에 정통한 아마추어가 되었다. 그를 좋아하는 나는 이 독서법을 훔쳐 쓰기로 다짐했다. 언제 다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십오 년은 되었으리라. 한 해에 대략 백 권의 책을 읽었으니 십오 년 동안 천오백 권 내외의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다섯 명의 작가에 대해 정통해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했다. 당신은 알 것이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임을, 모든 보물을 다 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 산 저 산 번갈아 가며 파고만 있다. 유만주는 차근차근해나가야 비로소 빠뜨림 없이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부를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 장유의 글 -실은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 정자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은 아름답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대나무가 바람을 대하듯 살라는 의미다. 모든 아름다운 행동은 단순해서 더 실행하기 어렵다. 

      

- 야구를 좋아하는 내게 일본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는 감탄과 질투의 대상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신체 구조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한국에서는 오타니 쇼헤이 같은 투수가 탄생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기사를 통해 오타니 쇼헤이의 성공 비결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인생 목표를 세웠다.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일 순위로 뽑히는 것! 오타니 쇼헤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덟 개의 세부 목표(몸만들기, 제구, 구위, 스피드, 변화구, 운, 인간성, 멘탈)를 만들고 각 세부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실천 과제 여덟 가지를 정했다. 스피드를 높이기 위한 실천 과제를 살펴보면 하체 강화, 체중 증가, 피칭 늘리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건 운을 높이기 위해 정한 과제들인데 인사하기, 쓰레기 줍기, 책 읽기, 야구부실 청소 등 야구 능력과는 별반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이 적혀 있다. 오타니 쇼헤이가 목표 달성을 위해 얼마나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해 왔는지를 알 수 있는 항목이었다. 

 

- 나 역시 계획을 세우기는 하는데 그 계획이 매년 똑같다. 더 나은 글을 쓰는 것,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얼마 전엔 시험 삼아 월별 계획을 세워 보았다. 몇 줄 적었을 뿐인데 그 압박감이 실로 대단했다. 나는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느슨한 생각에 지고 말았다. 이이는 말한다. 책을 읽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이고 너는 너일 뿐이라고. 반성한다. 

 

- 내가 즐겨 읽는 작가들 중에 이제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을 질투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바꿔 먹는다. 글을 쓰는 한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나는 어려서 천재가 아니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이 넘쳐나리라는 헛된 기대를 한다. 어리석다고 욕해도 좋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의외로 낙관적인 인간인지도 모른다. 

(리뷰자 주 : 사람의 마음이란 각양각색인 듯하면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 책 내용을 전부 외웠는데도 그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에 읽은 책의 정수를 잘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왜 그럴까? 홍길주는 사람마다 성취가 다른 건 깨달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홍길주를 미워할 뻔했다. 세상에 깨닫기 싫어서 못 깨닫는 사람이 있던가? 물론 홍길주의 의도는 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밀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내겐 어쩐지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오독한 김에 오독을 이어 가자면 나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가 훌륭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똑같이 노력해도 덜 이루는 사람이 있고 더 이루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외면이 올바른 대처는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까지 가 보는 것, 어쩌면 이것이 깨달음이 느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수도 있겠다. 

 

- 조선 후기의 학자 이서구도 그랬던 듯하다. 책장으로 가득한 방에 ‘소완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박지원을 초대했다. 대가의 칭찬과 격려에 대한 기대로 그의 심장은 어린 강아지처럼 빠르게 뛰었으리라. 박지원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질문을 던졌다.

"물속의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네. 그 이유를 아는가?"

심상찮은 질문엔 묵묵부답이 올바른 응대이다. 이서구는 입을 다물었고 박지원은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보이는 게 다 물이니 그런 게지."  

 

- 어쩌다 보니 물고기가 된 것이고, 어쩌다 보니 내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비웃고 전시한다. - 박제가 

 

- 박제가의 생각과 똑같은 소설 한 편이 있다. 훌리오 꼬르따사르가 쓴 <아숄로뜰>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나는 안 그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수족관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소설 내용이 궁금하다면, 물고기와 사람의 관계 혹은 환생에 관심이 많다면 일독을 권한다. 

(리뷰자 주 : 폐단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수족관을 좋아한다.)

 

- 중국 송나라 사상가 장재(호 횡거)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곳곳에 공책과 포스트잇을 놓고 깨달음의 순간에 대비한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정보를 만나거나 표현이 특이한 부분, 참고할 만한 부분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고(때론 귀퉁이를 접는다) 공책에 기록한다. 산책 중에는 핸드폰 메모장에 쓴다. 깨달음은 질서 없이 몰려오므로 어떤 날은 몇 걸음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묘계 질서의 원칙, 깨달음을 얻으면 재빨리 글을 써서 생각을 잡는다는 뜻이다. 

- 묘계 질서보다 중요한 건 뒤처리다. 뒤처리란 묘계 질서를 통해 얻은 기록들을 다시 쓰는 일이다.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다가 쓴 기록들은 문장도 완벽하지 않고 핵심 단어만 줄줄이 나열한 경우가 많다. 번뜩 찾아온 깨달음을 적은 것이기에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기록할 때는 굉장한 무언가로 여겼으나 시일이 경과한 후에 다시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적도 있다. 번뜩했던 무언가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살펴서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고 엉성한 문장의 빈 곳을 채우고 감정의 언어를 논리의 언어로 변환해야 비로소 온전한 기록이 된다. 

- 홍길주는 가슴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기이한 문장들, 사물을 보면서 얻은 기발한 비유나 아름다운 언어들을 쪽지에 적어 상자에 담아 두었다. 나중에 글을 쓸 때 써먹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제로 글에 인용한 것은 열에 한둘도 안 된다고 고백했다. 묘계 질서란 그런 것이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사라지는 것,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소나기가 그쳐도 흔적은 남게 마련이다. 꽃과 풀은 활기를 얻고 공기는 미묘하게 변한다. 홍길주는 열에 한둘도 안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한둘이 소중하다. 그 한둘만 잘 매만져도 글과 공부에는 큰 도움이 된다. 문제는 묘계 질서를 무위로 만드는 고질적인 게으름, 이 대책 없는 게으름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몰락하는 자>라는 소설을 통해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처음 접했다. 사실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소설 속 한 인물로 나온다기에 구입한 것이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펼쳐 보았다. 해설을 제외하면 160쪽밖에 안 되었다. 대충 뒤적거려 보니 특이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가 하나의 단락이었다. 행을 바꿔 쓴 곳이 전혀 없었다. 고달픈 읽기가 될 것 같았다. 빡빡한 작가 같으니라고, 혀를 끌끌 차곤 책을 읽었다. 

 

- 조선 시대, 특히 18세기에 이희경 같은 별종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유득공은 비둘기에 관심이 많아 <발합경>이란 책을 썼고, 이서구는 앵무새를 좋아해 <녹앵무경>이란 책을 썼고, 이옥은 담배에 관한 모든 것을 모은 <연경>이란 책을 썼고, 이옥의 친구 김려는 물고기를 관찰한 후 <우해이어보>라는 책을 썼다. 공부란 원래 자질구레한 것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나라를 구하려고, 세상에 내 뜻을 펼치려고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좋다. 

(리뷰자 주 : 흥미와 관심을 넘어 사랑으로 가지 못하는 배회자는 오늘도 서글프다.)

 

- 대학자는 한때 장님이었던 울보에게 답을 주었다.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겠소, 도로 눈을 감으면 그대의 집이 보일 것이오."

훗날 박지원은 장님이 집을 찾지 못한 이유를 사물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감정이 더해져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서경덕의 비법은 박지원에 이르러 망상에 잠긴 이들에게도 유효한 말이 되었다. 욕심에 눈을 감고 분수를 지키는 것, 그것이 집으로 돌아가는 비법이 되었다. 훗날 이용휴는 서경덕의 말을 나이 마흔에 장님이 된 이에게 전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살짝 보탠다. 눈의 기능은 외부가 아닌 내부를 보는 데 있다고. 그러므로 장님이 된 이는 더 환한 눈을 갖게 될 것이며, 뒷날의 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것이라 격려한다. 이용휴의 격려는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못 보는 눈뜬장님 같은 이들에게도 유용하다. 

 

-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내 길은 뿌옇기만 하다. 걸어가는 것도 무섭고 걸어가지 않는 것도 무섭고 돌아서는 것도 무섭다. 길에 끝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설령 끝에 도달한다 해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울보처럼 눈물을 머금고 겁보처럼 몸만 떨고 있다. 내 등을 떠밀어 줄, 아니 내 눈을 뜨게 해 줄 서경덕, 박지원, 이용휴 같은 사람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이들을 만나는 날이 올까? 잔뜩 겁먹은 나는 되지 않는 노래만 부를 뿐이다.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 이익은 수십 년 동안 직접 벌을 키우고 관찰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글이 <벌의 역사>다. 이 글에는 벌통을 만드는 법, 적절한 위치를 고르는 법, 벌의 천적을 퇴치하는 법, 여왕벌과 일벌의 역할 등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벌통은 세밀하게 칠해야 하는데 이는 벌이 바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적은 구절에 이르면 이익의 꼼꼼한 관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이 벌을 기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익의 또 다른 글에서 답을 찾아본다. "선비들은 책에 있는 것을 외우기만 할 뿐이다. 스스로 체험하고 실천해서 세상에 기여하려 하지 않는다." 

 

- 나전장, 소반장, 누비장이야 귓전으로 스치듯 들어는 보았지만 갓일, 두석장, 염장, 섭패장은 외국어였다. 그중에서 갓일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갓일은 말 그대로 갓 만드는 일이다. 갓은 모자 둘레 밖으로 둥글넓적하게 나온 양태와 머리 위로 올라오는 부분인 총모자로 나뉜다. 양태 만드는 장인을 양태장, 총모자 만드는 장인을 총모자장이라 부른다. 여기에 양태와 총모자를 맞추고 갓 모양을 가다듬는 입자장이 있어야 갓 하나가 완성된다. 갓 만드는 복잡한 과정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장인들은 실용과는 철저히 담을 쌓은 갓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은 왠지 씁쓸하면서도 고귀한 느낌마저 준다. 오십 년, 백 년 뒤에도 그들이 살아남을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하는 우리의 특성상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긴, 명맥만 유지하는 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실은 달라질 일이 전혀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 공부도 비슷할 것이다. 내 안의 것보다는 내가 갖지 못한 것에 자꾸 욕심을 부리니까. 공부란 결국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다시 보는 일이다. 그렇기에 어렵다.

- 아참, 트집 잡기가 양태를 다듬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당신은 혹 알고 있었는지? 

 

- 과학고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특목고 강연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설렜다. 속물이라 비난해도 할 말은 없지만 성적이 뛰어난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궁금했음을 고백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했다. 내 책을 읽은 아이들은 없었고, 오에 겐자부로나 주제 사라마구 같은 작가의 이름을 아는 아이들도 없었다. 물론 실망한 건 내 책을 안 읽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더 놀란 건 그러고도 아이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랄까, 자기들의 공부와는 무관하다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내 강연, 내가 추천하는 책은 그들의 관심사와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 이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통섭은 그저 허울이었음을 실감했다. 강연을 마친 후 국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과학고 국어 선생님은 일반고 국어 선생님만큼 꼭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힘드시겠다는 말로 선생님을 위로했다. 

(리뷰자 주 : 양자 모두에게 공감한다. 그러나 통섭의 주제로 삼기에 오에 겐자부로나 주제 사라마구는 조금...? 물론 나는 사라마구를 매우 좋아하지만...)

 

- 안대회 선생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에는 박규수가 쓴 신기한 책 <상고도회문의례>가 등장한다. 친구 삼고 싶은 옛사람의 일화를 적은 뒤 간단한 평을 붙인 글 480편이 실려 있다. 박규수는 이 책을 순서대로 읽도록 만들지 않았다. 골패를 던져 숫자를 얻으면 그 항목의 글을 읽도록 했고, 적합한 학습 과제도 제시해 독서와 쓰기를 연결했다. 골패 놀이와 독서와 쓰기가 어우러진 책인 것이다. 19세기에 이런 책을 구상하고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과연 박지원의 손자로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왜 그럴까? 백 명의 사람 중 책을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별로 없다.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 해도 책을 읽을 만한 장소를 갖춘 이는 별로 없다. 장소를 갖췄더라도 책을 읽을 만한 시간을 가진 이는 별로 없다. 기질, 장소, 시간을 다 갖췄더라도 읽을 만한 책을 다 가질 정도로 풍족한 이는 별로 없다. 내 주장이 아니다. 옛사람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리뷰자 주 : 만일 그렇다면 이는 천형이다.)

 

-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을 좋아하기는 하나 몸이 약해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천장은 밝은 별이 보일 정도로 얇고, 벽에는 얼음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장소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병에 걸린 어머니의 곁을 지켜야 했으며, 집안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떠맡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시간을 갖췄다 할 수도 없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사들일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읽었다. 몸이 약해 쓰러질 지경이면서도 책을 읽었고,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읽었고, 어머니와 집안을 돌보면서도 책을 읽었고, 남에게 빌려서 책을 읽었고, 읽을 책이 없을 때는 장부나 달력도 펼쳐서 읽었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꿈을 꾸었다. 천지간에 가득한 책을 모두 다 읽으리라.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서를 멈추지 않았으며 큰 꿈을 품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잊지 않았다. "내가 군자라면 소경이나 귀머거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읽기에 더 몰두해야 하리라. 그러면서도 늘 겸손해야 하리라."

- 책 읽고, 글 쓰고, 공부하는 게 피곤하고 우울하고 짜증 날 때마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이름은 이덕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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