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S.N. 고엔카] 고엔카의 위빳사나 10일 코스 - 내면의 평화에 이르는 여행

일루젼 2021. 12. 26. 14:14
728x90
반응형

 

저자 : S.N. 고엔카 / 윌리엄 하트 / 담마코리아

원제 : THE DISCOURSE SUMMARIES of S.N. Goenka
출판 : 김영사
출간 : 2017.07.12


 

약 2주 전쯤 불교 서적들을 한창 읽으면서 궁금해져 상호대차를 신청해두었다가 이제 읽게 되었다.

불과 며칠의 시간차를 두었을 뿐인데, 그때는 그렇게 물 흐르듯 읽히던 책들이 문장마다 눈이 헛돌아 당황스러웠다. 읽기에도 흐름이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의지로 읽어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시와 지금 약간의 달라진 점들이 존재하긴 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상태라고 콕 집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해야 할 일'이란 감각이 생겼다는 점이 차이점일 것이다. 이를테면 쌓여있는 책들을 읽고 정리하겠다거나,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겠다거나, 기왕 물이 들어온 김에 노를 저어보겠다거나 하는 등의 현실적인 목표들이 생긴 상태이고, 그것들 간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이냐를 고민 중이다.

 

그래서일까? 비워내고 정돈하고 알아차리는 담마의 글이 자꾸 헛돌았다.

최대한 바르게, 그리고 적절한 방향성을 갖도록 의식하며 노력해볼 일이다.   

 


 

- 이 시간, 이 기회, 이 수행법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 "해탈은 토론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라고 고엔카 S.N. Goenka 님은 말했습니다. 위빳사나 명상 코스는 해탈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실제적인 기회입니다. 이 코스의 참가자는 일상의 흐름을 깨트리는 편견과 긴장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참가자는 매 순간 평화롭고 생산적이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마음의 정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인간이 바라는 최상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킵니다. 호흡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의 길에서 모든 발걸음은 종파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합니다. 

 

- 호흡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여러분은 사실 경험의 단계에서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모릅니다. 몸의 겉모양, 각 부분들 그리고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몸의 기능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통제를 벗어나서 작동하는 내부 기관과 몸 전체를 구성하며 매 순간 변화하는 세포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무수한 생화학 반응, 전자기 반응들이 온몸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이 수행의 길을 걸어가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흡은 도움이 됩니다. 호흡은 알고 있는 것에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으며, 의도적일 수도 있고 자동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육체적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순수한 정신적 자질을 계발하기 시작하면, 동시에 여러분은 천상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 동시에 자신까지도 돕는 것이며,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해치면 동시에 자신까지도 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담마이고, 진리이며, 자연의 보편적 법칙입니다. 

 

- 이 실상을 단지 감정적으로 혹은 신앙 때문에 혹은 지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마음이 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사실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체의 감각 관찰을 통해 영원하지 않음을 직접 경험한다면, 거기서 계발되는 이해는 참된 지혜, 자기 자신의 지혜가 됩니다. 이 지혜와 더불어 여러분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설령 통증이 남아있더라도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식물과 같은 인간이 되어 타인이 해를 끼쳐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빳사나는 반응하는 대신, 행동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반응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반응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참된 행동을 하는 건강한 인생을 사는 법,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감각을 관찰하는 사람은 삶에서 어려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응하는 대신에,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유지한 채 몇 초 기다리고 그리고 결단하고 행동의 방향을 선택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균형 잡힌 마음에서 일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타인에게 이로운 창조적 행동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찰함에 따라 차차 반응하는 것이 멈추기 시작합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반응의 오래된 습관은 무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안의 실상을 관찰한 적이 없는 사람은 깊은 내부에서 무엇이 발생하는지, 갈망과 혐오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나아가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긴장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모릅니다. 

 

-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 이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고통을 만들어내는지를 경험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 즉 몸과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양자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몸에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고서 몸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마음에 떠오르는 것, 즉 생각을 떠나서 마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 첫 번째 친구는 믿음, 헌신, 신뢰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항상 의심과 회의로 동요되어 있어서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맹목적이라면, 이 믿음 또한 무서운 적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식별력이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됩니다. 신이나 성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이 타당한 이해를 가진 올바른 믿음이라면, 여러분은 신이나 성자가 지닌 훌륭한 특성을 자신 안에서도 계발하려고 하는 영감을 얻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의미 깊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믿음의 대상인 그분의 특성을 자신 안에서 계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맹목적 믿음이며 해로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붓다에 귀의할 때 여러분은 붓다의 특성을 기억해야 하며 자신 안에서 그 특성을 계발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붓다의 본질적인 특성은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귀의처는 실제로 자신 안에서 계발해야 할 그 깨달음에 있습니다.   

 

- 두 번째 친구는 노력입니다. 믿음처럼 이 노력 또한 맹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방법으로 수행하거나 예상된 결과를 얻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노력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리뷰자 주 : 같은 문구를 이어서 만났다. 방향성을 재고할 타이밍인가?)

 

- 평정심과 알아차림은 마음의 정화로 이끌어갑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무엇을 경험하든, 유쾌함이나 불쾌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갈망과 혐오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갈망과 혐오는 오직 괴로움만을 만들어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향상을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는 여러분이 계발했던 평정심입니다. 마음 깊은 곳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신체 감각의 차원에서 평정심을 계발해야 합니다.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과 그에 대한 평정심의 유지를 배우면, 내면에서뿐만 아니라 외적 상황에 대해서도 쉽게 균형을 유지하게 됩니다. 

 

- 그리고 그 올바르고 긍정적인 행동은 틀림없이 타인을 도울 것입니다. 균형 잡힌 마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 올바르게 위빳사나를 수행한다면 삶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이 길에서 여러분의 진보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요컨대 일상의 상황 속에서, 행동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행동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대신 그들을 돕기 시작했는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생겼을 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마음에 부정성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얼마만큼 빨리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가? 부정성과 함께 일어난 감각을 얼마만큼 빨리 알아챌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그 감각을 관찰하기 시작하는가? 얼마나 빨리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가? 그리고 얼마나 빨리 사랑과 연민을 일으키는가? 이런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해보면서 이 길에서 계속 진보하십시오. 

 

- 진지하게 수행하십시오. 어떤 것을 착실하게 밀고 나가지 않고 가볍게 이것 다음에 저것을 시도해 보는 명상 게임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어떤 수행이든 초보적 수준을 넘어 진보하지 못할 것이며, 결코 최종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기 위해서 다른 수행법들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두세 번의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단지 시도해 보는 것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에게 적합한 수행법을 발견하면, 그것을 진지하게 수행하십시오. 최종의 목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고통받는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더보기

 

- 고엔카 님이 인용한 붓다와 그의 제자들의 말씀은 빠알리 pali 경전의 경장인 숫따 삐따까 Sutta-pitaka와 율장인 위나야 삐따까 Vinaya-pitaka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어떤 인용문들은 경장과 율장 모두에서 발견되지만, 여기서는 경장을 참고했습니다.) 또한 빠알리 경전 주석 문헌들에서도 인용한 것도 있습니다. 강의에서 고엔카 님은 이 구절들을 번역할 때 빠알리어 단어 하나하나를 풀이하기보다는 종종 의역으로 설명했는데, 그것은 위빳사나 명상수행과 관련된 내용을 강조하고 일상 언어로 구절들의 핵심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 수행을 하다 보면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호흡으로 시작해서 자연적이며 일반적인 호흡을 알아차리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보다 미세한 진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모든 발걸음은 실제와 함께하는 걸음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보다 미세한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더 깊이 꿰뚫어 봅니다.

- 오늘 여러분은 육체적 기능인 호흡만 관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마음도 관찰했습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본질적으로 마음 상태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순함이나 번뇌가 마음에 떠오르자마자, 호흡은 비정상적으로 됩니다. 약간 빨라지고 거칠어집니다. 번뇌가 사라지면 호흡은 다시 차분해집니다. 이렇게 호흡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 오늘 여러분이 경험한 마음에 관한 사실 하나는, 이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항상 다른 대상으로 떠도는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호흡이나 어떤 단일 대상에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마음은 제멋대로 돌아다닙니다. 

 

- 이 담마의 길은 여덟 가지 성스런 길(팔정도)이라고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고귀한 마음을 지닌 성스런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성스런'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 여덟 가지 성스런 길은 세 부분 즉, 실라 sila, 사마디 samādhi 그리고 빤냐 paññā로 나뉩니다. 실라는 도덕으로, 말로든 몸으로든 불건전한 행위를 삼가는 것입니다. 사마디는 마음의 통제력을 계발하는 건전한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를 수행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실라와 사마디만으로는 마음에 쌓인 모든 더러움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완전히 정화하는 지혜의 계발, 통찰의 계발을 뜻하는 여덟 가지 성스런 길의 세 번째 부분인 빤냐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막 시작했기 때문에 표면 부분에서만 감각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 이 수행은 감각을 통해 감각의 경험 너머의 궁극적 실상에 이르게 합니다. 여러분이 감각의 도움을 빌려 마음을 정화해 나간다면, 반드시 궁극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어리석을 때 감각은 괴로움을 증식하는 수단입니다. 갈망과 혐오로 감각들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실제로 일어날 때, 긴장이 신체의 감각 5단계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의 습관적 패턴을 바꾸기 위해 수행해야만 하는 곳이 신체의 감각 단계입니다. 실체가 없고 변화하는 감각들에 반응하지 않으며, 모든 다른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습관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으며 괴로움으로부터 자신을 해탈케 할 수 있습니다. 

 

- 이 진리를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영감만을 줄 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경험하고 괴로움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싯다르타 고타마가 붓다가 되기 위해 실행했던 것입니다. 거칠고 표면적인 진리에서 더 미세한 진리로, 가장 미세한 진리로 진행하면서, 실험 중인 과학자처럼 자신의 육체 구조 안에서 실제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는 유쾌한 감각을 유지하려거나 불쾌한 감각을 제거하려는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장 미세한 상태까지 가서 완전히 집중된 마음으로 보았을 때, 다섯 개의 집합체(몸, 의식, 지각, 감각, 반응)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그럼, 왜 이 감각들이 있을까요? 확실히 감각들은 여섯 개의 감각기관과 그 대상의 접촉에 의해 발생합니다. 즉 눈과 시각적 대상과의 접촉, 귀와 소리와의 접촉, 코와 냄새와의 접촉, 혀와 맛과의 접촉, 몸과 감촉할 수 있는 것과의 접촉, 마음과 생각·상상과의 접촉에 의해 일어납니다. 접촉이 있는 순간 반드시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중립적인 감각이 발생합니다. 
 

- 그럼, 왜 접촉이 발생할까요? 전 우주는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것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즉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기관과 마음이 작용하는 한, 감각기관들은 그것들에 대응하는 대상과 반드시 만납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러한 감각기관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것들은 마음과 물질의 흐름에서 나누어질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말하자면, 감각기관들은 생명의 탄생과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럼 왜 생의 흐름, 마음과 물질의 흐름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한 찰나에서 다음 찰나로,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 때문입니다. 그럼, 의식의 흐름은 왜 일어날까요? 붓다는 의식의 흐름은 상카라들, 즉 정신적 반응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요컨대 의식의 흐름은 정신적 반응들인 상카라라는 힘 때문에 흘러갑니다. 그럼 반응, 즉 상카라들이 왜 발생할까요? 붓다는 상카라들이 무지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상카라들을 계속 일으킵니다. 무지가 있는 한 고통은 이어집니다. 

 

- 이처럼 고통을 일으키는 과정의 근원, 가장 깊은 근본 원인은 무지입니다. 무지로부터 우리 스스로 커다란 괴로움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사건의 고리가 시작됩니다. 이 무지를 제거할 수 있다면 고통 또한 소멸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이룰까요? 어떻게 이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나요? 물질과 정신의 흐름, 생명의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자살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괴로움을 낳을 뿐입니다. 감각기관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감각기관이 존재하는 한 접촉은 감각기관에 대응하는 대상들과 함께 발생합니다. 그리고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감각은 반드시 몸 안에서 일어납니다. 바로 이 감각의 연결고리에서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 오래된 습관은 고통스러운 감각들을 밀어내고 즐거운 감각을 끌어당기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통과 즐거움을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게임에 빠져있는 한, 마음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괴로움을 증가시킵니다. 그러나 감각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배울 때, 맹목적으로 반응하여 자신의 고통을 증식시키는 오래된 습관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사라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관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 마음이 물질보다 훨씬 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신 과정은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관찰하는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그 움직임을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혀에 느껴지는 것 등의 외적 대상에 반응하는 착각 속에 놓이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더 미세한 차원에서 실상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외부세계는 그 혹은 그녀가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할 때만, 즉 감각 대상이 감각기관과 접촉할 때만 존재합니다. 접촉이 있자마자 거기에서 진동, 감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지각은 자신의 과거 경험들, 조건들 그리고 과거 상카라들에 기초해서 감각이 좋음 혹은 나쁨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색칠된 가치판단에 따라 감각은 유쾌함 혹은 불쾌함이 되며, 이 감각의 종류에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면서 갈망이나 혐오라는 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만, 갈망과 혐오는 여러분이 명상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갈망과 혐오가 여러분의 마음을 압도한다면, 그때 정화의 과정은 멈춥니다. 여러분이 미세한 감각을 갈망하든, 심지어 닙바나 nibbana를 갈망하든, 이 양자에 차이는 없습니다. 갈망은 갈망입니다. 갈망은 태우는 불꽃이므로, 연료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갈망은 여러분을 해탈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갑니다. 혐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통증에 대해 혐오를 일으키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시 여러분은 궤도이탈을 해버립니다.  

 

- 또 다른 적은 게으름·졸음입니다. 밤새 푹 잤지만 명상을 시작하기 위해 앉자마자 졸음이 덮칩니다. 이 졸음도 정신적 불순물에 의해 일어난 것이므로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쫓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명상을 멈추게 하려는 적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적들에 의해 전복되지 않기 위해 싸워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졸음이 올 때 호흡을 약간 강하게 해 보십시오. 혹은 일어서서 눈에 차가운 물을 대거나 조금 걸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앉는 것입니다.  

 

-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평정심은 신체 감각의 단계에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감각은 매 순간 신체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통 의식적 마음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나, 무의식적 마음은 감각을 느끼고 갈망이나 혐오로 그것에 반응합니다. 만일 마음이 육체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식하고 동시에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훈련받았다면, 오랫동안 맹목적으로 반응하던 습관은 깨져 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균형 있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아마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할 수도 있고, 밤새도록 완전히 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침실에 누워서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이것은 매우 훌륭합니다. 몸은 휴식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나은 마음의 휴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불면증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면, 긴장이 생겨서 다음 날 피곤할 것입니다. 혹은 밤새도록 앉은 자세로 있으면서 강제로 깨어있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극단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잠이 온다면 주무십시오. 만일 잠이 오지 않는다면 누워서 몸을 쉬게 하고, 마음 또한 알아차림과 평정심으로 쉬도록 하십시오. 

 

- 붓다는 "수행자가 한순간도 게으르지 않고 감각에 대해 알아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행할 때, 이 사람은 감각을 완전하게 이해하면서 참된 지혜를 계발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수행자는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감각에 반응하며 괴로움을 쌓아가는지를 압니다. 수행자는 또한 감각의 무상한 본성을 이해한 사람이 어떻게 감각들에 반응하지 않으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지를 압니다. 
 

- 담마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담마에 귀의하여 수행하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귀의는 진정한 귀의가 됩니다. 이와 동일하게 상가 sangha에 대한 귀의도 특정 종파와 관계가 없습니다. 실라, 사마디, 빤냐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그리고 적어도 해탈의 처음 단계에 도달하여 성자가 된 분이 상가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외모를 지녔든, 어떤 피부색이든, 어떤 배경을 지녔든지 간에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을 보고 고무되어서 동일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면, 이것이 상가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평정심을 가지고 감각을 관찰한다면, 그 상카라는 힘을 잃고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다음 찰나에 또 다른 오래된 상카라가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떠오릅니다. 다시 이 감각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상카라는 사라져 갑니다.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한, 겹겹이 축적된 오래된 상카라는 마음의 표면으로 떠올라 와서 사라져 갑니다. 여러분은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몸소 이 과정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오래된 습관과 오래된 고통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볼 때에만 소멸의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 이와 유사한 기술이 근대의 금속공학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금속을 정화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순화하기 위해서는 10억 중 하나의 이물질 분자조차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조할 어떤 금속을 막대 모양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미 완전히 순화된 똑같은 금속으로 링을 만듭니다. 링이 막대기를 통과하면서 막대기의 끝부분에서 모든 불순물이 빠져나오게 하는 자석의 힘을 일으킵니다. 동시에 금속막대기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분자는 정렬되고 유연해지며, 펴서 늘릴 수 있어 다루기 쉽게 됩니다. 이와 똑같이 위빳사나 수행도 순수한 알아차림의 링을 신체로 통과시켜 어떤 불순물이라도 녹여내는 유사한 효과를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 어느 한때 붓다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최상의 행복이란 삶에서 다양한 흥망성쇠를 마주함에도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즐겁거나 고통에 찬 상황들, 실패나 승리, 이익이나 손실, 칭찬이나 비난을 만납니다. 누구라도 이런 모든 상황을 틀림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 놓여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마음의 깊은 차원에서 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평정심이 마음의 표면적 상태에서만 유지된다면, 이 평정심은 일상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휘발유통을 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상카라의 한 열매에 불꽃이 일어나면 곧바로 굉장한 폭발이 발생할 것입니다. 미래에 수많은 불꽃, 수많은 고통을 초래할 더 많은 불꽃과 더 많은 상카라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여러분은 연료통을 점차적으로 비워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 상카라 때문에 불꽃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불꽃이 일어날 때 불꽃은 자신이 가지고 온 연료만을 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연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료를 소모할 때까지만 타고 곧 꺼집니다. 

 

- 때때로 일상생활에서 강한 행동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미소 지으며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만 어떤 사람은 단지 거친 말과 행동만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강한 언어적 또는 신체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기 전에 자신 안에 마음의 균형이 있는지,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만을 품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상대에 대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행동은 도움이 될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행동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바르게 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때로 강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한다면 그 결과가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연민을 가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가해자가 자신에게 어떤 해로움을 끼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서 수행자는 가해자가 미래에 고통을 야기할 행위를 다시 하지 않도록 돕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일이 발생한 뒤에 행동들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마음을 점검해야만 합니다. 마음이 불순물로 넘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타인의 결점을 고치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을 개선해야만 합니다. 먼저 자신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타인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 그 어떤 편견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관찰하는 것, 표면적 진리를 관찰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것,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표면적 진리를 관찰해 가는 목적은 '나'라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환상은 우리의 모든 갈망과 혐오의 뿌리이며, 극도의 고통으로 이끌어갑니다. '나'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만, 이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종교적·철학적 믿음과 관계없이 자기중심적인 습관을 고집하는 한, 여러분은 고통스러운 상태로 있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습관을 깨트리기 위해 우리의 통제권 너머에서 항상 변화하는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비실체적 본성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이 경험만이 에고를 녹일 수 있으며 갈망과 혐오로부터 벗어나는 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이끌어갑니다. 

 

- 또 미세하고 유쾌한 감각은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갈망의 상카라들을 제거하는 도구로써 사용합니다. 모든 경험에 대해 평정심과 알아차림을 유지함으로써 마음 깊이 놓여있는 콤플렉스들을 정화하여 닙바나, 즉 해탈이라는 목표에 점점 더 가깝게 접근합니다. 출발점이 어디든 여러분은 닙바나에 도달하기 위해 이 모든 상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얼마만큼 빨리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는 얼마만큼 열심히 수행하는가 그리고 제거해야만 하는 과거의 상카라들이 얼마만큼 축척되어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 또는 모든 상황에서,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에 기초한 평정심이 필수적입니다. 상카라는 육체적 감각이라는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감각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만, 새로운 상카라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또 오래된 상카라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평정심을 가지고 감각을 관찰함에 따라 여러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갑니다. 

 

- 담마의 이 어린 묘목은 지금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행을 누군가 반대할지도 모르는 이론과 구별하면서,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작은 나무를 보호하십시오. 그런 비판이 여러분의 실천을 가로막도록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아침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 명상하십시오. 규칙적인 매일매일의 실천은 필수적입니다. 처음에는 명상하는 데 하루에 두 시간 전념하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머지않아 과거에 헛되이 소비했던 시간을 이제 절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여러분은 잠자는 시간이 덜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일에 대한 능력이 증가하게 되어 당신의 일을 좀 더 빨리 끝마칠 수 있게 됩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도 마음의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즉각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수행법을 확고히 익히면, 아침 수행을 마치고 난 후에 그 어떤 동요도 없이 하루 온종일 에너지가 넘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 밤에 잠들기 전 5분 동안 몸의 어느 부분에서든지 감각을 알아차리십시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다시 5분 정도 감각을 관찰하십시오. 잠들기 직전과 깨어나자마자 행하는 5분 수행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집 근처에 수행자가 산다면,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은 함께 명상하십시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은 10일 코스에 참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매일매일의 수행은 여기서 성취했던 것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반면, 10일 집중 코스는 마음을 더 깊게 탐색하고 수행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조직적인 코스에 참가할 수 있다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참가할 수 없다면 셀프 코스를 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격리될 수 있는 곳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식사를 준비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곳에서 10일 동안 셀프 코스를 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수행법, 시간표, 규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적용해야만 합니다. 

 

- 만일 셀프 코스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선생님에게 알리고 싶다면, 선생님은 당신을 기억할 것이고 그리고 당신에게 멧따 mettā, 즉 선의의 진동을 보낼 것입니다.  

 

-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기꺼이 환영합니다. 담마에는 그 어떤 비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 수행법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의 수행이 무르익어야 하고 가르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을 돕기는커녕 해를 끼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만일 위빳사나 수행에 대해 설명을 들은 어떤 사람이 위빳사나 수행하기를 원한다면, 올바르게 훈련받은 선생님이 이끄는 코스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담마를 여러분 자신 안에 확고하게 수립하는 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담마 안에서 성장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 삶이 담마의 본보기가 될 것이며, 여러분 자신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이 길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선을 위해 담마가 온 세계로 펴져나가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