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에릭 재거]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일루젼 2021. 12. 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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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에릭 재거 / 김상훈

원제 : The Last Duel
출판 : 오렌지디
출간 : 2021.10.20  


 

오래 기다렸다.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이 개봉한다는 소식도 나를 설레게 했지만 '김상훈' 역의 <라스트 듀얼>이 출간된다는 소식은 더욱 설레었다. 그리고 12월 말에 와서야 겨우 이 책을 읽었다. 

 

너무나 흥미롭고 긴박감 넘치는 내용들인데, 다소 교양서처럼 보이는 편집이 아쉽다. 가볍고 가독성이 좋다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팩션을 표현하기에는 조금 딱딱한 편집이지 않았나 한다. 

 

중세 프랑스의 기사 문화와 계급, 주종관계의 역학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결투'의 절차와 의미에 대해서도 시간에 따른 변화까지 부연한다. 등장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지급된 급료 영수증 명단까지 뒤져가며 사료를 확인해 저술한 저자의 열정과 집념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마르그리트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사료가 부족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역사가들의 해석에는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가 확인한 사료들에는 해당 주장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 있지 않으며, 추정 근거로 사용하기에도 미진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그녀가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은 선택을 하고도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는 점을 높이 사는데 개인적으로도 이 지점이 놀랍다. 당대에는 마녀사냥이 시작되고 있던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입증이 어려운 일에 귀부인의 신분으로 추문과 화형을 각오하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토록 강렬한 집념을 착각으로 품을 수 있을까? 또 저자의 주장처럼 공범을 함께 지목했다는 점 역시 신빙성을 더해준다. 

 

건조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표현법이 멋진 문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자 특유의 세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전투 장면이 백미인데, 그려내듯이 장비 하나하나를 풀어내는 설명을 읽고 있자면 눈앞에 그 인물들이 떠오르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글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해주신 김상훈 역자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수많은 SF 작품들이 역자분의 노고를 통해 국내로 들어와 빛났다. 테드 창, 로저 젤라즈니, 그 외 많은 책들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 한 번쯤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다시 <라스트 듀얼>로 돌아와서, 이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모든 이에게 각각의 사실을 남긴다. 그 누구도 진상 -사건의 모든 면을 내포한 진실- 을 알 수는 없다. 일련의 조각들만이 나타날 뿐이다. 사실 삶 자체가 그러하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각자에게 제각각의 의미와 기억으로 흔적을 남길 뿐이다. 

 

이런 시각으로 이 사건을 그려낸 것이 영화 <라스트 듀얼>이다. 특히나 리들리 스콧이 감독이니 더욱 기대가 크다. 안타깝게도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는데, 해외 OTT에 떴다고 하니 곧 국내에서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보고 싶은 영화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 이미지의 문제로 책을 먼저 읽는 편을 선호한다. 양쪽 모두가 만족스러운 경우는 잘 없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행복하게 읽었다. 

 


   

- 내가 이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은 10년 전, 장 드 카루주(Jean de Carrouges)와 자크 르그리(Jacques Le Gris) 사이에서 일어난 전설적인 다툼을 기록한 중세의 문서를 읽던 중의 일이었다. 그 이야기에 매료당한 나는 카루주-르그리 사건에 관한 사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노르망디와 파리로 가서 필사본 보관소를 샅샅이 뒤지고, 6백여 년 전 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직접 방문해 보기까지 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본서는 연대기와 소송 기록 등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원본 자료들에 기반한 실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장소, 날짜 및 그 밖의 상세한 정보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한 발언과 행동, 그들이 법정에서 한 종종 모순되는 주장들, 서로에게 지불하거나 수령한 금액, 심지어는 날씨까지도- 들은 모두 실존하는 사료에서 인용했다. 사료들의 기록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는 가장 개연성이 높아 보이는 기술을 채택했다. 

 

- 1066년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기사단을 이끌고 도버 해협을 건넜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왕의 군대를 무찌른 후 스스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후세의 역사서에 정복왕 윌리엄으로 기록된 바로 그 인물이다. 잉글랜드 왕이 된 노르망디 공작의 위세는 프랑스 왕의 그것에 맞먹었다. 향후 1세기 반에 걸쳐, 번창한 성읍들과 부유한 수도원들을 다수 보유한 노르망디의 반은 잉글랜드 왕가의 소유로 남게 된다. 

 

- 전설에 의하면 카루주가는 유혈과 폭력의 기운으로 점철된 가문이었다. 이를테면 카루주 가문의 조상 중 한 명인 랄프 백작이 어떤 여자 요술사와 사랑에 빠져서 숲속의 작은 공터에서 그녀와 밀회를 거듭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질투에 눈이 먼 백작의 아내가 단검을 쥐고 그곳에 있던 연인들을 습격했을 때까지 말이다. 다음 날 그곳에서 목을 따인 백작의 시체가 발견되었지만, 백작 부인은 얼굴에 생긴 기묘한 빨간 자국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얼마 후 그녀는 카를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는데, 카를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얼굴에 어머니와 똑같은 빨간 자국이 나타났고, 그 이후 그는 카를 르 루주(Karle le Rouge), 즉 '빨간 얼굴의 카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7대에 걸쳐 이 가문에서 태어나는 아이의 얼굴에는 줄곧 빨간 점이 나타났고, 이현상은 백작의 연인인 여자 요술사의 분노가 누그러진 8대가 되어서야 멈췄다고 한다. 이 '카를 르 루주'라는 이름이 변해서 후대의 가명인 '카루주'가 되었다는 것이 이 전설의 골자이며, 빨간색과 인연이 깊은 가문답게 카루주 가의 문장(紋章)에도 진홍색 바탕에 은빛 백합이 아로새겨져 있다. 

 

- 1380년에 장은 네 명에서 많을 때는 아홉 명에 달하는 하급 종기사들로 이루어진 자신의 부대를 지휘하며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 군을 쫓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공을 세워 명성을 떨칠 뿐만 아니라, 전리품을 노획하고 몸값을 받을 수 있는 포로를 생포 -이것은 14세기 유럽에서 가장 수지가 맞는 장사 중 하나였다- 함으로써 사복을 채우는 목적도 있었다. 기사로 승격해서 급료를 두 배 올려 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카루주 가문의 영지에서는 매년 400에서 500 리브르에 달하는 소작료 수입이 있었지만, 당시 전쟁에 출정한 기사가 받는 일급은 1 리브르였고 종기사의 경우는 그 반액에 불과했다. 

 

- 프랑스 귀족에는 세 개의 주요 계급이 있었다. 대귀족(pair), 기사(chevalier), 종기사(escuier)이다. 페르슈 백작 가는 대귀족이었고, 장 3세는 기사, 그 아들인 장 드 카루주는 종기사였다. 

 

- 마르그리트의 초상 역시 호전적인 남편의 모습과 함께 캉에 있는 수도원 벽화로 남아 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을 그린 벽화 역시 세월의 풍상에 닳아 스러졌고, 현재 그녀의 외모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글이나 회화를 보면 당시 여성에 대한 미의 기준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노르망디가 위치한 프랑스 북부에서 이상적인 귀부인이란 금발에 가까운 엷은 머리 색깔과 백옥처럼 흰 이마, 호를 그린 눈썹, 회청색 눈동자, 모양이 좋은 코, 작은 입에 도톰한 빨간 입술, 향기로운 숨결, 보조개의 소유자였으며, 가냘픈 목에 눈처럼 흰 젖가슴, 균형 잡힌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주된 옷은 샹스(chainse)라고 불리는 긴 리넨 가운 -보통 흰색이지만, 축일 따위에 입기 위한 화려한 색상도 있었다- 이었다. 대다수의 귀부인들은 브로치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로 치장했고, 보석이 박힌 금반지를 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프랑스법에 의하면 국왕에게 친히 상고하는 귀족은 소송 상대방에게 사법 결투, 즉 결투 재판을 신청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모욕한 상대와의 다툼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쓰이는 명예 결투와는 달리, 사법 결투는 어느 쪽의 결투 당사자가 거짓 선서를 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정식 법 절차였다. 당시 이런 결투의 결과는 신의 의지와 부합하는 진실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연유에서 결투 재판은 judicium Dei, 즉 '신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결투에 의한 재판은 프랑스, 특히 노르망디에서는 유서 길은 관습이었고, 장과 마르그리트의 조상들 중에는 보증인, 즉 선서를 한 입회인 자격으로 그런 결투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중세 초기에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결투 재판을 신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뿐만 아니라 농노나 도시민들 사이에서도 공개 결투가 종종 벌어졌다. 유럽 일부에서는 여성조차도 남성을 상대로 결투를 할 수 있었다. 결투는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사법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죄의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는 수단으로써도 쓰였다.

- 민사소송의 경우, 결투 당사자는 '챔피언'이라고 불리는 대리인을 고용해서 대신 싸우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형사사건에서는 당사자들이 직접 결투에 나서야 했다. 왜냐하면 그런 결투에서 패한 사람은 보통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의 경우에도 결투에서 챔피언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여성이나 노약자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몇 세기에 걸쳐 결투는 상고의 한 형태로도 기능해 왔고, 판결에 불만을 가진 소송 당사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선서 증인에게 결투를 신청함으로써 그 증언을 몸소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지방 법정에서 판사 역할을 맡은 영주들조차도 판결에 불복한 봉신들로부터 결투 신청을 받을 위험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가 되자 결투 재판이라는 관습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교황들은 결투 행위가 성서가 금기시하는 신을 시험하는 행위라면서 비난했고, 대귀족들의 강대한 권한을 삭감함으로써 왕권 강화에 나섰던 왕들도 자신들의 사법권을 침해하는 결투 재판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서기 1200년경부터 결투는 프랑스의 민사 절차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형사재판의 경우에도 귀족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식으로 축소되었다. 1258년에 루이 9세는 프랑스 민법에서 결투를 아예 삭제했고, 증거와 증언을 수반하는 공식적인 심리(enquéte)로 이것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런 뒤에도 결투는 형사재판에서 주군이 내린 판결에 불복한 귀족에게는 최후의 상고 수단으로 남았다. 
 
- 결투 신청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카루주와 르그리는 좌우에 측근들을 대동한 채로 법정 앞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섰다. 전통에 입각해서 원고는 왕의 오른쪽에 섰고, 피고는 왕의 왼쪽에 섰다. 
 
- 종기사 르그리의 이름을 거명하고, 고발하고, 결투를 신청한 장 드 카루주는 결투 신청을 상징하는 소지품 -전통적으로 갑옷용 장갑이나 가죽 장갑이 선호된다- 을 바닥에 내던질 필요가 있었다. 법정에 모인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카루주는 르그리 앞에 그것을 내던짐으로써 방금 한 결투 신청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서약했고, 사법 결투가 행해지는 전통적인 장소인 울타리로 에워싸인 닫힌 결투장(champ clos)에서 피고와 대결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도전의 표시를 던진다(jeter le gage)는 것은 결투에 수반된 고래(古來)의 의식 중 하나이다. 
 

- 이 사건에 관해 르코크가 남긴 마지막 견해는 가장 시사하는 점이 많다. 법적인 절차에 관해 숙지하고 있는 데다가 의뢰인을 지척에서 관찰하고 그에게 직접 질문을 할 기회를 수없이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신중한 변호사는 자기 지식의 한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 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사건에 관한 그의 논평을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술로 끝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상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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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천 삼백 팔십육 년, 크리스마스에서 며칠 지난 날의 추운 아침, 두 명의 기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몇천 명이나 되는 군중이 파리의 한 수도원 뒤쪽에 있는 넓은 공터를 가득 채웠다. 장방형 결투장은 높은 나무 울타리로 에워싸여 있었고, 그 주위를 창으로 무장한 위병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열여덟 살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결투장 한쪽에 설치된 호화로운 관람대에서 신하들과 함께 앉아 있었고, 결투장 주위에는 엄청난 수의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전신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허리에 장검과 단검을 찬 두 기사는 결투장 좌우 끄트머리에 하나씩 있는 육중한 출입문 바로 앞에 거치된 왕좌를 닮은 의자에 앉은 채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출입문 옆에서는 각자의 종자(從者)들이 흥분해서 말굽을 구르는 군마의 고삐를 잡고 대기 중이었고, 결투를 할기사들이 방금 선서를 마친 곳에서는 사제들이 제단과 십자가를 황급히 치우고 있었다. 
 

 - 흑사병은 약 10년 단위로 재유행하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대의 화가들은 검은 죽음이 국토에 만연하는 상황을 거대한 큰 낫을 들고 수의로 몸을 감싼 채 지상을 활보하는 해골로 묘사했다. 수없이 많은 마을의 종탑에서 흑사병이 발발했음을 경고하는 검은 깃발이 나부꼈다. 신은 프랑스를 완전히 저버린 것처럼 보였다. 1378년, 로마와 프랑스 추기경들의 대립으로 촉발된 서방교회 대분열은 전 유럽을 긴장케 했고, 기독교국들은 각각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이끄는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서 혈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로마 교황은 사리사욕에 의해 시작된 잉글랜드 군의 잔인한 프랑스 침략 전쟁을 축복하기까지 했고,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은 교회에서 이 새로운 '십자군' 운동에 참가하라고 설교하며 프랑스의 '이단자들을 도륙하는 성전(聖戰)'의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 정복 전쟁에 착수한 잉글랜드 군 뒤를 따라 유럽 전역의 범죄자와 무법자들이 프랑스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유 용병을 의미하는 루티에(Routiers) 또는 '신의 재앙'이라고 불리던 이 사나운 사내들의 무리는 전원 지대를 제집처럼 활보하며 성읍이나 마을을 약탈했고, 민중을 협박해서 공물을 강탈했다. 이런 폭력과 무질서의 와중에서 프랑스는 미친 듯이 스스로를 요새화 했다.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토벽을 쌓고 그 주위에 방어용 도랑을 팠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농가와 헛간 주위를 석탑과 물을 채운 해자로 에워쌌다. 성읍이나 수도원들은 원래 있던 방벽의 높이와 두께를 늘렸고, 성당은 마치성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될 때까지 요새화 되었다. 

 

- 일천 삼백 십 년 가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사망하자 열한 살이었던 아들 샤를 6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당시의 프랑스 국토는 현대 프랑스의 3분의 2에 불과했고, 통일된 국가라기보다는 개개의 봉건영주들이 지배하는 봉토들을 누덕누덕 기운 연합체에 가까웠다. 어린 왕에게는 질투심이 깊은 다섯 명의 숙부가 있었는데, 왕이 성년에 달할 때까지 섭정 역할을 맡은 이들은 각기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외의 지역은 적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부르고뉴 지방은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숙부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용담공(擔公) 필리프의 영지였고, 그는 머지않아 프랑스 왕국 자체에 맞먹는 왕조의 창시자가 될 운명이었다. 앙주 지방은 왕의 또 다른 숙부인 루이 공작의 영지였다. 프로방스는 독립국이었으며 아직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고, 귀엔 지방 일부는 잉글랜드 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브르타뉴는 거의 독립된 공작령에 가까웠고, 노르망디에 서는 여전히 침략자인 잉글랜드 군이 들끓고 있었다.  

 

- 신하의 예를 의미하는 영어의 hommage는 프랑스어의 homme(남자, 사람)에서 유래하며, 충성을 의미하는 영어 명사 fealty는 프랑스어의 fealte(신뢰)에서 왔다. 

 

- 그리고 노르망디만큼이나 토지를 두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곳은 없었다. 노르망디는 고대부터 유혈로 점철된 투쟁의 교차로였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군이 충돌하기 훨씬 전에, 켈트족은 노르망디에서 로마 군단과 맞서 싸웠다. 로마 군단은 프랑크족과 싸웠고, 프랑크족은 바이킹들과 싸웠다. 북방인(Normanni)이라고 불리던 바이킹들은 최종적으로는 노르망디에 정착했고, 프랑크족의 토지와 아내들을 빼앗고 프랑스어를 말하는 노르만인이 되었다. 서기 911년에 창립된 노르망디 공작 가는 프랑스 왕가의 봉신이 되었다. 

- 1200년대 초에 프랑스 국왕은 길고 힘든 전쟁을 치른 끝에 노르망디 대부분을 잉글랜드 국왕으로부터 재탈환했다. 그러나 노르만인의 피를 물려받은 잉글랜드의 왕들은 여전히 노르망디 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노르망디의 대귀족 가문 다수는 프랑스 화하기 전에는 노르만인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변화의 징조를 찾으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백년전쟁이 발발하고 잉글랜드 군이 노르망디를 재정복 하기 시작하자 노르만인 귀족들 다수는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 카루주 가문의 폭력적인 역사는 민간 전설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 혈통에서 용맹스러운 전사들이 꾸준하게 배출되었다. 카루주 가문 초기의 영주였던 로베르 드 빌레르는 1200년대 초에 당시의 프랑스 국왕이었던 필리프 2세의 휘하에서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해 싸웠다. 1287년에 그의 후손 중 한 명인 리샤르 드 카루주는 어떤 결투 재판의 보증인이 되었고, 피보증인인 결투 당사자가 출두하지 않을 경우 대신 싸울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장 3세의 장남인 장 드 카루주 4세는 타고난 전사였다. 그의 호전적인 풍모가 노르망디주의 도시 캉(Caen)에 위치한 생테니엔 수도원의 벽화에서 주위를 조망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전신 갑주를 두르고 육중한 군마 곁에 서서 장검과 랜스를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묘사한 이 벽화는 세월의 풍상에 닳아스러져 버렸고, 용맹스러운 북방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 전사의 강인하고 결연한 이목구비 또한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가 남긴 문서에 본인의 서명이 아닌 카루주 가문의 인장만 찍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릴 때부터 말안장 위에서 자라다시피 한 젊은 장은 아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1380년에 장 드 카루주의 계급은 기사 아래의 수습기사(squire)를 의미하는 종기사(從騎士)였다. 수습기사라는 단어에서 곧잘 연상되는 '용감한 젊은이'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굳은 백전노장이었고, 이미 불혹의 나이에 달한 터라 "그의 중후한 풍채는 누가 보아도 기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장 드 카루주는 가차 없고 야심적이며 무자비하기까지 한 사내였고, 목적 달성을 방해받는 경우는 쉽게 격앙했으며, 한 번 원한을 품으면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 

 

- 한때 잉글랜드 군이 지배했던 고대의 성채 아르장탕은 1170년의 성탄절 직후, 이곳에 머물고 있던 헨리 2세가 부하 기사 네 명이 비밀리에 영불해협을 건너 귀국한 다음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베케트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곳이었다. 1380년대에 이 성새 도시는 두터운 석조 방벽과 열여섯 개의 거대한 둥근 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루주가 경계가 엄중한 성문으로 다가가자 위병들은 피에르 백작의 정신인 그를 알아보고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카루주는 백작의 성관을 향해 말을 몰았다. 4층 높이의 이 성관에 딸린 세 개의 거대한 탑은 피에르 백작이 1372년에 아르장탕을 매입했을 때 개축한 것이었다. 피로로 녹초가 된 기사는 성관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고,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맡긴 다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리뷰자 주 :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 해당 일화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 현대인들은 중세에는 강간이 만연했으며, 강간은 아예 범죄로 인식되지도 않았다고 상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중세의 강간 피해자가 이따금 가해자와의 결혼을 강제 당했으며, 가해자가 그런 결혼에 동의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간은 합법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결혼에 의한 '빚'을 지고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불과 열두 살밖에 안 되는 소녀가 가족의 의향으로 자기보다 나이가 몇 배나 되는 남자와 결혼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고, 그럴 경우 남편은 어린 아내에게 얼마든지 성적인 교섭을 요구할 수 있었다. 전시에도 여성은 자주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1350년대에 프랑스 북부에서 일어났던 농민 봉기인 자크리의 난에서 농민들에게 강간당한 귀족 여성들이나, 1380년에 잉글랜드 군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강간당한 브르타뉴의 수녀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중세의 법전과 실제로 열린 재판 기록들을 보면 강간은 중죄이며 사죄(死罪)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르망디를 포함한 프랑스의 법은 주로 고대 로마법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로마법에 의하면 강간 -혼외에서 강제 교섭이라고 정의되는- 을 저지른 죄인은 사형에 처해졌다. 13세기에 프랑스법의 권위자였던 필리프 드 보마누아르는 강간범에 대한 처벌은 살인범이나 대역죄인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바꿔 말해서, 강간범은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조차도 지휘관들은 부하들의 그런 행동을 제지하려고 노력했다. 1346년에 캉을 점령한 잉글랜드 병사들이 캉 시내의 여성들을 해치면 즉결 처분당할 것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좋은 예이다. 병사들 다수는 이 경고를 무시했지만 말이다.

- 강간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궁정 시인들은 여성의 명예를 지켜주는 고결한 챔피언으로서의 기사들을 찬양했고, 봉건귀족들은 귀족 여성을 강간한다는 행위를 "죄 중에서도 최악의 죄"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세의 수많은 시와 이야기들은 기사들이 우연히 마주친 신분이 낮은 처녀들의 처녀성을 무심하게 빼앗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경우는 1342년에 솔즈베리 백작 부인을 강간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현재는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그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여성들은 실은 성폭행당하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는 당대의 속설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론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중세 여성들은 많지 않았다.

 

- 강간범에 대한 기소와 처벌은 강간 피해자의 사회적 계급과 정치적 영향력에 크게 좌우되었다. 중세 프랑스에서 여성이 절도처럼 소소한 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에 처해졌지만, 강간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남성들 다수는 단순 벌금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 벌금은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아버지나 남편에게 합의금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강간이라는 범죄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보호자인 남성의 재산권을 침해한 기물파손 죄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법원의 기록을 보면 강간 혐의로 기소당한 가해자들 중에는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성직자들의 수가 다른 직종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데, 그들이 속세의 법정이 아닌 교회 법정의 재판을 받는 '성직자 특권'을 요구함으로써 중형 선고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 강간을 둘러싼 정황은 증인이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강간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극히 힘들었다. 특히 중세 프랑스의 경우,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남편이나 아버지, 또는 남성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피해 여성은 범인을 고소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강간 피해자는 그 사실을 밝혀 보았자 얻는 것은 수치와 불명예밖에는 없다는 범인들의 협박에 굴복해서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간 사실을 공개하면 본인이나 가족의 평판이 땅에 떨어질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강간은 이론상으로는 중한 처벌을 받는 중죄였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처벌을 받게도 않고, 고소당하지도 않고, 보고조차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 마르그리트가 기억에 의존한 것은 설령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해도 쓰는 법을 모르는 탓일 가능성이 있다. 중세의 글쓰기는 글 읽기와는 완전히 분리된 별도의 기능이었고, 당시 글을 깨친 사람들 다수는 글 쓰는 법을 아예 배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 그러나 생마르탱 수도원에서 가장 장려한 재판의 장은 시합장(試合場)이었다. 시합장은 수도원 건물들의 동쪽에 위치한 편평한 지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로 결투를 할 수 있는 시합장을 갖춘 수도원은 파리에서도 생마르탱을 포함해서 단 두 곳밖에는 없었고, 과거 몇 세기 동안 수없이 많은 결투 재판이 바로 이곳에서 시행되었다. (또 다른 시합장은 파리 남쪽의 방벽 바로 바깥쪽에 있는 생제르맹 데프레 수도원에 있었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결투 재판은 드물어졌기 때문에 생마르탱 수도원의 시합장은 당시에는 주로 오락을 목적으로 한 마상 창시합(tilt)에 쓰였다. 말에 탄 기병들이 기마 창이나 장검 따위를 써서 승부를 겨루는 형식이었는데, 경기에 쓰이는 무기의 날이나 선단(先端)은 시합 중에 중상자나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디게 뭉개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투 재판에 쓰이는 표준적인 시합장은 가로 80보 세로 40보의 직사각형 공터였고, 이 수치를 피트로 환산하면 가로 200피트에 세로 100피트가 된다. 그러나 생마르탱 수도원의 시합장은 마상 창 시합을 위해 조정된 탓에 "가로길이가 90보나 되었지만, 세로 길이는 24보"에 불과했고, 이것은 대략 가로 240피트에 세로 60피트 크기의 공간에 해당한다.   

 

- 우선 발에 천이나 가죽 신발을 신기고, 그 위에 쇠고리들을 엮어 만든 사슬(maille) 신발이나 금속판을 두드려 만든 판금 조각들을 신발 모양으로 겹쳐 이은 사바통(sabaton)이라는 쇠 구두를 신겼다. 그런 다음 쇠사슬로 만들어진 레깅스인 쇼스(chausses)를 양다리에 신기고, 그 위에 정강이와 무릎과 넓적다리 앞쪽을 보호하는 판금 가리개를 순서대로 부착했다. 상체에는 몸통을 보호해 주는, 소매가 없는 사슬 셔츠인 오베르종(haubergeon)을 입고, 가죽띠로 허리를 단단히 조였다. 그리고 그 위에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판들을 누비 윗옷에 꿰어 붙인 어린갑(魚鱗甲)을 입거나 강철로 된 일체형 가슴받이를 착용했다. 양어깨와 상박부를 판금으로 된 가리개로 덮고, 팔꿈치와 팔뚝 역시 전용 가리개로 보호했다. 손에는 사슬과 판금 조각들을 교묘하게 이어 붙여 만든 쇠 장갑을 꼈는데, 무기를 잘 쥘 수 있도록 쇠 장갑의 손바닥 부분은 가죽이나 천으로 된 안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강철제 목가리개를 목에 두르고, 완충재가 들어 있는 가죽 캡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경첩으로 여닫는 식의 얼굴 가리개인 면갑(面甲)이 달린 바시네(bacinet)라고 불리는 투구와, 목 부분과 어깨를 가리개처럼 덮어서 보호하는 사슬 갑옷인 카마이유(camail)를 뒤집어쓰면 끝이었다. 새 부리처럼 뾰족한 면갑에는 밖을 내다보기 위한 좁고 긴 틈새와 숨구멍들이 나 있는데, 면갑을 내리면 기사의 얼굴은 완전히 감춰져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사는 갑옷 위에 자기 가문의 문장이 자수된 소매 없는 겉옷인 코트다르뮈르(cotte dirmure)를 입었다. 이렇게 전신을 완전히 감싸는 갑주의 무게는 무기나 다른 장비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약 60파운드(27킬로그램)에 달했다.

- 기사들이 갑옷을 입고 있는 동안, 그들의 군마도 결투를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세의 군마는 사냥이나 승마나 농사나 그 밖의 목적을 위해 사육되는 말들과는 품종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군마는 언제나 수말 -기사는 전투 시에는 결코 암말을 타지 않았다- 이었는데, 14세기경의 군마는 키 16 핸드(64인치)에 무게는 최대 1,400파운드에 달하는 "대형마(equus magnus)"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 군마는 기사와 갑주와 안장과 무기를 포함해서 300파운드까지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고, 빠른 돌격, 도약, 급회전 등의 전투 기동을 가능케 하는 지구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 대비해서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예를 들어 쇠 편자를 박은 발굽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죽이는 훈련을 받은 군마들도 있었다. 좋은 군마는 엄청나게 비쌌고, 사역용 말이나, 심지어는 웬만한 승마용 말보다 몇백 배나 더 비싼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옛날부터 말 사육이 성했던 노르망디 지방에는 아라(haras)라고 불리는 종마 사육장이 여기저기에 있었고, 여기서 산출된 종마들은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 1300년대가 되자 쇠고리를 엮어 만든 사슬 갑옷은 점점 리벳으로 고정하는 식의 강철판들로 보강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갑옷을 관통해서 착용자를 축일 수 있는 노궁 화살이나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달린 전투용 망치 같은 신무기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전신을 금속판으로 완전히 덮는 판금 갑옷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380년경의 일이지만, 다수의 중기병들은 여전히 사슬 셔츠와 사슬 레깅스에 금속판을 조합한 갑옷을 입었다. 사슬 갑옷은 양팔과 양다리와 관절 부분의 뒷면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곧잘 쓰였다. 

- 마상용 장창인 랜스는 고대나 중세 초기의 투창보다 훨씬 길고 무거운 무기였고, 제1차 십자군 원정(1095 ~ 1099) 당시 전쟁의 양상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았다. 그때 말을 탄 프랑스 기사들은 조직적인 집단 돌격을 감행해서 적군인 사라센인들을 공황에 빠트렸다. 랜스와 그 사용법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전쟁과 마상 창 시합과 결투 재판 등 상황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다. 랜스의 길이는 12피트에서 18피트였고 무게는 30파운드 이상 나갔다. 랜스 끝에 부착된 강철 촉은 나뭇잎이나 마름모 모양이었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자루의 쥐는 부분에는 사용자의 손을 보호해 주는 둥근 날밑(vamplate)이 달려 있었다. 말에 탄 기병은 수직으로 세운 육중한 랜스를 퓨터(fewter)라고 불리는 전용 받침대에 올려놓고 이동했다. 돌격 시에는 랜스를 아래로 내려 수평으로 꼬나잡고, 랜스 자루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우는'‘카우치드(couched)' 방식을 채택했다. 당시의 기사는 랜스 자루를 방패 가장자리에 낸 홈에 끼우고, 그 방패를 자기 가슴과 안장 머리에 대는 방식으로 충격에 대비했다. 방패의 홈을 통과하는 랜스 자루 앞쪽에는 가죽제 미끄럼 막이가 달려 있어서 충돌 시에 랜스가 뒤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해 주었다. 높은 전투용 안장에 딸린 등자를 딛고 선 기사가 수평으로 꼬나 잡은 랜스를 상술한 방법으로 고정한 채로 군마를 질주시킨다면, 군마와 기사의 전체 중량이 랜스의 육중한 자루와 날카로운 강철촉에 실리면서 그 기사는 글자 그대로 '인간 투사물'이 된다. 이 영어 표현의 어원은 '배치한다'는 의미를 가진 중세 프랑스어의 coucher이다. 
 

- 검은 귀족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였고, 랜스를 쓴 전투가 끝난 뒤에는 말을 탔든 안 탔든 간에 검을 이용한 검투가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프랑스 왕가의 어떤 태피스트리(지금은 소실되고 없다)에는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가 "대형 단검처럼 생긴 짧고 튼튼한 검을 대퇴부에 차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카루주-르그리 결투가 벌어진 날에서 불과 며칠 전에 브르타뉴에서 벌어진 결투에서 사용된 무기 목록에는 장검 두 자루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 검은 "날의 길이가 2.5피트"에, 양손으로 잡는 방식의 길이 13인치의 칼자루가 달려 있었다. 두 번째 검의 경우는 도신(刀身)의 길이가 처음 것보다 조금 짧았고, 길이 7인치의 한 손용 칼자루가 달려 있었다. 두 손으로 쥐는 방식의 긴 장검은 날을 이용한 베기 공격(coups de taille)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손용의 짧은 검인 에스톡(estoc)은 도신이 더 두꺼운 데다가 칼끝이 송곳처럼 뾰족해서 찌르기나 스러스트 공격에 적합했고, 칼끝으로 찌르는 방식의 공격(coups de pointe)에 특화되어 있었다. 결투에서는 여러 개의 무기를 지참하는 것이 허용되므로,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 그리는 적어도 상술한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결투에 임했을 것이다. 양손용의 장검은 보통 가죽 칼집에 넣어 안장에 매달았고, 그보다 짧은 에스톡은 허리 왼쪽에 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다수의 기사는 오른손잡이였으므로, 칼자루가 왼쪽에 있는 편이 더 빠르고 쉽게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1386년 12월 19일에 낭트에서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두 귀족 사이에서 벌어진 결투는 프랑스 국왕이나 고등법원이 아니라 거의 독립국에 가까웠던 브르타뉴의 공작에 의해 인가된 것이다. 

 

- 아까처럼 면갑을 위로 올린 채로 오른손을 십자가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대방의 맨살을 드러낸 왼손(main sinistre)을 의전관의 손바닥 위에서 마주 잡았다는 점이 달랐다. 이런 식으로 몸을 맞댄 두 결투자는 이제 서로에 대한 선서를 시작했다. 카루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지금 내가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그대, 자크 르그리여, 나는 성스러운 복음과 신이 내게 내려 주신 신앙과 세례에 걸고, 그대를 향한 나의 언동이 진실이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했던 언동 역시 진실이며, 사악한 그대의 대의와는 달리, 그대를 소환한 나의 대의가 선량하고 정당함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노라."

 

- 세 번째의 이 마지막 선서는 결혼식에서 봉신의 충성 서약을 망라하는 중세의 많은 의식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호 서약의 참가자들은 언제나 서로의 오른손을 마주 잡고 의식을 진행한 데 비해, 결투 서약에서는 왼손을 마주 잡았다는 것이 달랐다. 이것은 그들 사이의 유대가 적대적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 1380년대에 몽포콩 언덕은 여전히 파리 방벽에서 반 마일 넘게 북쪽으로 간 곳에 위치해 있었고, 그 자체가 망자들이 거주하는 하나의 도시였다. 살인자와 도둑과 그 밖의 중죄인들의 마지막 종착지로서 악명이 높았던 몽포콩의 나지막한 정상에는 높이가 무려 40피트에 육박하는 거대한 석조 교수대들이 세워져 있었다. 육중한 목재로 이루어진 가로대들은 60명에서 80명의 목을 한꺼번에 매달 수 있었다. 목에 이미 교수용 밧줄을 두른 살아 있는 범죄자들은 사다리를 오를 것을 강제당한 후 목이 매달렸지만, 파리 시내에서 사지 거열형이나 참수형이나 그 밖의 방법에 의해 처형된 죄인들의 시체는 이곳... 

 

- 그로부터 5년 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거병 주문과 함께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가기 전에 카루주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또 다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프랑스는 피에르 드 크라옹이라는 귀족이 프랑스의 관장인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암살하려고 한 사건으로 큰 혼돈에 빠졌다. 왕궁의 정신이었다가 1년 전에 실각하고 추방당한 크라옹은 그가 추방의 원흉으로 지목한 클리송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 크라옹은 어느날 밤 파리의 밤거리에서 말을 탄 무장병들과 함께 클리송을 습격했고, 장검으로 머리를 강타당한 클리송이 자기 말에서 낙마하자 죽었다고 짐작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클리송은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그 결과 범인의 정체가 만천하에 밝혀졌다. 크라옹은 브르타뉴 공작령으로 도주해서 공작의 비호를 받았다. 브르타뉴 공각이 크라옹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샤를 왕은 적인 공작을 굴복시키고 크라옹에게 법의 심판을 내리기 위해 국왕 근위대를 소집했다.

 

-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샤를 왕은 또 생명의 위기에 직면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샤를과 다섯 명의 젊은 귀족은 마치 숲에서 튀어나온 야만인처럼 보이도록 역청과 아마로 뒤덮인 리넨 의상을 차려입고,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연결한 채로 손님들로 가득한 무도회장으로 난입했다. 샤를의 친구였던 젊은 귀족들이 이런 무분별한 여흥을 계획한 것은 우울증에 빠진 왕을 위로하고 고무하기 위해서였다. 덩달아 흥분한 손님 하나가 야만인들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너무 가까이에 양초를 들이댄 것이 화근이었다. 인화 물질인 역청으로 뒤덮인 야만인 의상에 순식간에 양초 불이 옮겨 붙으면서,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산 채로 타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근처에 있던 물통으로 뛰어들었던 한 명과 샤를 본인 뿐이었다. 그때 샤를은 귀부인들에게 자기 모습을 보이려고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왔는데, 온몸에 불이 붙은 장난꾼들이 무도회장 바닥에서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목격한 베리 공작부인이 기지를 발휘, 재빨리 왕에게 자기 치맛자락을 뒤집어씌운 덕에 살아남았던 것이다. '불타는 자들의 무도회'라고 불리게 된 이 지옥 같은 밤은 샤를 6세의 유리 같은 마음을 박살 냈고, 그 이후 그의 정신병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리뷰자 주 : <pesta paling gila pada zaman kuno> 또는 <ball of the burning men>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 확실히 알았다.)
 

-  1415년에 헨리 5세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했을 때 로베르는 프랑스를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르그리트는 어린 아들 대신 사촌인 토맹 뒤부아 -과거에 그녀를 위해 아담 루벨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던- 에게 의지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촌이자 생마르탱 수도원의 결투장에서 남편의 서약 입회인 중 한 명이었던 로베르 드 티부빌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마르그리트가 남편인 장 드 카루주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한 것은 1396년 봄의 일이지만,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버림 당해 홀로 남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10년 전에 있었던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 사이의 결투는 법적인 소송을 공식적으로 끝냈지만, 가십과 소문과 이런저런 비판은 그 뒤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훗날 출간된 두 편의 연대기에서는 결투가 있은 지 몇 년 후 어떤 사내 -한쪽 버전에서는 다른 중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다른 버전에서는 병에 걸려 임종 직전이었다고 나와 있다- 가 마르그리트를 강간한 사람은 실은 자기였다고 자백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일화의 근거라든지 세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서술되어 있지 않으며, 두 버전 모두 사실이라고 입증된 적은 없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연대기 작가들과 역사가들이 이 모호한 전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다루어왔다. 혹자는 카루주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것은 바로 이 "진범"이 자백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것이 촉발한 추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또는 르그리에 대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그리트가 엉뚱한 사내를 고발해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큰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수녀원에 칩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기록에는 마르그리트가 수녀가 되어 영원히 정절을 지키겠다고 서약했다고 나와 있고, 또 어떤 기록은 종교적 은둔자가 된 그녀가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독방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황당무계한 전설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부유한 귀족의 과부가 기부를 한 수녀원에 "손님"으로 머문다거나 아예 수녀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몇십 년 뒤에 아들인 로베르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마르그리트가 그녀의 세속적인 부를 계속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그녀가 죄책감에 못 이겨 은둔자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는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리뷰자 주 :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나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에서도 수도원에 몸을 위탁한 귀부인들의 일화들이 여럿 실려있다.)

 

-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결투의 결말은 결투 재판이라는 제도의 종말을 한층 더 앞당겼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의 일부와,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결투 재판을 중세에서 가장 야만적인 사법 관행의 하나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카루주-르그리 결투가 있은 뒤에도 파리 고등법원으로 결투 재판을 허가해달라는 상고가 몇 번 올라왔지만, 법원이 결투를 허가한다는 정식 결정을 내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세기가 되어도 파리 고등법원의 관할권 밖에 있는 프랑스의 일부, 이를테면 브르타뉴라든지 부르고뉴 공작의 지배하에 있는 플랑드르 등에서는 여전히 결투 재판이 시행되었다. 1430년에는 아라스에서 두 귀족이 결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1455년에는 두 명의 도시민들이 운집한 발렌시아 인들이 보는 앞에서 곤봉을 가지고 결투를 벌였다. 1482년에도 낭시에서 결투가 시행되었다. 결투는 유럽의 다른 지역, 특히 브리튼 섬에서도 계속 거행되었는데, 훗날 자연 소멸할 때까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이 특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끊이지를 않았다. 예를 들어 1583년의 아일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가를 받고 결투가 벌어진 적이 있다. 잉글랜드에서 실제로 결투가 금지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1819년의 일이었다. 당시 발생한 어떤 살인 사건이 결투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잉글랜드 의회는 결투를 완전히 폐지했다. 

 

- 일차 사료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라는 르프레보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전문가들은 거의 시작부터 이 유명한 사건 주위에 꼬이기 시작한 신화와 오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11판(1910)은 "결투" 항목에서 카루주-르그리 사건에 관해 몇 줄 언급하고 있는데, 세부에서 많은 오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고발된 강간 사건을 일종의 베드 트릭(bedtrick)처럼 묘사하고 있다.
 
"1385년에 어떤 결투가 행해졌는데, 그 결과가 너무나도 황당무계했던 나머지 가장 미신적인 사람들조차도 그런 식의 신의 심판의 효험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자크 르그리라는 사내가 장 카루주의 아내로부터 고발당했는데,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올 예정이었던 그녀의 남편인 척하고 몰래 침실로 들어와서 그녀를 범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파리 고등법원은 결투를 명했고, 결투는 당시 국왕인 샤를 6세 앞에서 이루어졌다. 르그리는 결투에서 졌고 그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죄를 저지르고 체포당한 범죄자가 자신이 진범임을 자백했다. 이런 식으로 그 효용성을 논파당하는 제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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