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조산 라 밸리 / 현혜진
원제 : The Vine Basket
출판 : 내인생의책
출간 : 2016.06.30
원제 '포도덩쿨 바구니'를 '어떤 여자가 왔었다'로 바꾼 것은 메리걸의 재능을 알아봐 준 카젠 부인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의 꿈을 지켜줄 수 있는 작은 손길, 혹은 꿈의 씨앗을 심어주는 발견자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길 바랐던 것일까. '메리걸'이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전문작가가 아닌 조산 라 밸리는 자신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약간의 각색을 가해 이 소설을 썼다.
자신들의 말과 문화를 빼앗기고 강제로 만다린 어를 배워야 하는 아이들.
그나마도 빠듯한 생계를 위해 학교를 나가지 못할 형편인 아이들은 징집되어 먼 지역의 공장으로 보내진다.
잊혀지기엔 너무 가까운 우리의 기억과 닿아있는 삶이다.
신장 위구르 족의 삶, 그리고 그 속에 휩쓸린 한 소녀의 이야기.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
바람결에 마음을 실어 보낼 수 있다면.
- 메메트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과 그들의 체제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메메트는 위구르족이 자유롭게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갖춘 독립된 나라가 되길 바랐다. 그들이 사는 땅은 한때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렸다. 그 이름으로 다시 불리는 것이 메메트가 바라는 바였다. 메메트는 대놓고 한족을 흉보고 다녔다. 수상한 사람들 앞에서만 입조심했다. 아버지는 이런 메메트에게 화를 냈지만, 아버지 또한 독립을 바라는 듯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실 때 말조심을 할까?
- "남자가 제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지, 하지만 마법을 부리는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너란다. 우리 손녀딸, 특별한 재능이지. 너를 쭉 지켜봐 왔단다. 우리 가족의 전통을 이을 사람은 네 아버지도, 메메트도 아니야. 바로 너란다. 네가 너만의 특별한 바구니를 만들 준비가 된 것 같아 기쁘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할아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게는 칼도 없어요. 칼이 있다고 해도 부인 마음에 드는 바구니를 새로 만들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요. 언제 시간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삼 주 안에 만들어야 하거든요."
"내 칼을 빌려주마."
할아버지가 웃옷에서 낡은 가죽 칼집을 꺼내더니 잉지사 칼을 빼냈다. 수백 년 동안 칼을 만드는 비법이 대대로 전수되어 온 잉지사 마을에서 만든 칼이었다. 메리걸이 본 칼 가운데 가장 수수하면서 아름다웠다. 청동 손잡이에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과 은색 칼날만 봐도 위구르 장인의 뛰어난 솜씨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 메리걸은 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내 가슴에 꼭 품고 알맞은 줄기를 찾아다녔다. 위성류 나무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아 할 수 없이 대나무에 소원을 빌어야 했다. 대나무보다 위성류 나무가 더 신령스러웠지만 말이다. 위성류 나무는 사나운 바람을 피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사막에서 살아남을 줄 아는 나무였다. 마치 위구르족처럼, 하지만 이제 오빠와 함께한 비밀 장소의 힘을 믿어 볼 수밖에 없었다. 메리걸은 위성류 나무와 비슷하게 가늘고 기다란 줄기를 골랐다. 그 줄기 맨 꼭대기에 자기만의 징표로 흰 천을 묶었다.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신에게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부디 제 손이 아름다운 작품을 빚을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세요.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주저앉지 않고 나아가도록 용기를 주세요."
메리걸은 서서 나직이 읊조렸다. 신이 자신의 말을 듣고 응답해주리라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징표의 힘을 믿는 위구르족과 자신이 하나라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메리걸은 기도한 대로 이루려면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 같아야 함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법을 터득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양보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 다 메리걸 탓이었다. 어째서 지난밤 폭풍이 몰려올 낌새를 알지 못했을까? 아버지와 메메트라면 알아챘을 텐데. 그랬다면 식량을 모두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메리걸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메리걸은 이기심에 빠져 있었다. 일찍 일어나 바구니를 만들려면 밤에 푹 자는 것 말고 뭐가 중요했겠는가? 메리걸의 머릿속은 온통 새로 만들 바구니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빨갛고 파란, 화려한 펠트 조각으로 무늬를 넣은 바구니를 말이다. 메리걸은 바람 소리의 변화, 먼 곳에서 느껴지는 동요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새들의 움직임도 건성으로 보았다. 사막 폭풍을 피하려면 산으로 날아가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친구들이 바로 새인데, 척 보기만 해도 버드나무에 달린 나뭇잎들이 위로 향해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할아버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메리걸은 멈칫했다. 벌로 모래가 얼굴에 몰아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할아버지는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분이었다. 할아버지가 알았을 리가 없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처방해 준 진정시키는 차를 메리걸이 어머니에게 직접 주었으니 말이다.
- 메리걸은 바구니를 다시 내려놓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메리걸이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두 손이 바구니를 만들어 냈다. 다만... 100위안의 값어치에는 못 미치는 바구니였다. 메리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든 바구니는 세련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왜지?"
자신에게 물어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메리걸은 메메트가 있을 때 만들었던 원뿔형 바구니를 떠올려보았다. 마음의 눈으로 그 바구니를 또렷이 보자, 메리걸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면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 메리걸은 깨달았다. 그때 메리걸은 메메트 오빠를 위해 행복을 엮어 바구니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메리걸은 앞에 놓인 원뿔형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이 바구니를 엮은 것은 분노였다. 메리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구니를 발로 짓뭉겠다.
- 메리걸은 덩굴줄기를 손질하는 느낌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손으로 뭔가를 만든다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지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바구니를 만들면서 평온을 찾았다. 메리걸도 평온을 찾게 될까? 메리걸은 할아버지가 준 기다란 줄기를 들어 올렸다.
"지금 이대로도 아름다워요, 할아버지."
메리걸이 감탄했다.
"덩굴줄기나 버드나무 가지만큼 다루기 힘든 것도 없을 게다. 네 손이라면, 이걸로 간단한 바구니 정도는 엮을 수 있을 것 같구나. 만드는 이의 영혼과 정신이 바구니에 아름다움을 입혀 줄 거란다. 네 손 한번 잡아 보자, 메리걸."
메리걸은 줄기를 무릎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눈이 침침하다 해도,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챌 터였다. 사실 두 손 모두.
"따끔거릴 게다. 그래도 작업은 해야지."
- 메리걸은 꿈을 꾼 죄로 어떤 벌을 받을지 잘 알고 있었다. 사과처럼 잘려서 사막에 버려지거나, 남쪽 더 멀리 내던져지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리석은 몽상가에게는 양쪽 모두 적절한 벌로 여겨졌다.
- "카젠 부인은 우리 위구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줬어요. 손으로 만든 펠트 깔개와 나무 그릇, 손으로 짠 이카트 실크를 사죠. 부인은 메리걸이 만든 바구니의 가치를 잘 알고 있어요."
메리걸은 압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가 그런 훌륭한 공예가들과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쁨에 흠뻑 젖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다시 믿을 수 있을까? 아버지도 그런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 "할아버지, 제게 가르쳐 주세요.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가르쳐 주신 걸 전부 배우고 싶어요. 엮는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요. 어떻게 해서든 사막에서 위성류를 모아 올게요. 우리 민족의 영혼을 바구니로 엮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할아버지만이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그런 건 배우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메리걸, 넌 이미 알고 있단다. 네 바구니에서 그걸 봤거든. 그래도 배워야 할 게 많긴 많지. 봄이 오면..."
할아버지가 말을 멈췄다. 이내 눈길을 돌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을 게다."
- 랄리가 메리걸의 팔을 잡고 대야 쪽으로 끌었다. 메리걸은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해 주는 성스러운 의식을 불안감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메리걸이 손을 위로 올렸다. 어머니가 붕대 위로 물을 세 번 뿌렸다. 메리걸은 손을 세 번 문지르면서, 의식에서 힘을 얻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랄리가 수건으로 젖은 붕대를 가볍게 닦고는, 식사용 깔개로 메리걸을 데리고 가 할아버지 옆에 앉혔다.
- 메리걸이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 찻잔의 온기를 느낄 때였다. 온 가족이 하나같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
메리걸이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를 불렀다.
"메리걸이 제 얘기를 내가 해 주길 바라는군."
아버지가 말했다. 메리걸은 찻잔에서 손을 거두어 무릎에 내렸다. 아버지의 비아냥대는 말투가 싫었다. 아버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안 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적어도 돈 얘기는 꺼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패티 모녀가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메리걸은 어머니가 숨을 가다듬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깔개에 돈을 펼치고 있었다. 100위안짜리 지폐 20장이었다. 아버지가 가져온 양고기와 스카프는 메리걸의 돈으로 산 게 아니었다.
- 메리걸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메리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네, 아버지. 모두가 도와준다면, 누군가가 사고 싶어 하는 바구니를 만들 수 있어요."
메리걸은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자신이 가족의 전통을, 할아버지의 전통을 이어 가도록 선택된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메리걸은 표식에 담은 소원이 이뤄지기를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빌었다. 자기 손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전통을 이어 갈 힘을 주기를. 메리걸은 비밀 장소를 새로 마련하여, 하늘에 닿을 만큼 쭉 뻗은 나뭇가지에 천을 또 하나 묶어 놓기로 했다. 이번에는 자유를 염원하는 위구르족의 소원이 바구니에 깃들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신께 기원할 참이었다. 포도나무 덩굴을 엮어 가면서 바구니마다 그 비밀스러운 바람을 담을 생각이었다. 때로는 패티가 준 펠트 조각을 섞어 화사하고 다채로운 바구니를 만들 참이었다. 위구르족의 본성이 담기도록 말이다. 한족이 이해할 수도, 총으로 파괴할수도 없는 의미가 담긴 바구니를 말이다. 메리걸이 만든 바구니가 좋아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의미를 알게 될 터였다.
- 가족 모두 다시 메리걸을 쳐다보고 있었다. 메리걸은 이렇게 온 가족의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양팔을 옆구리에 바짝 붙이다가 꾸러미가 만져졌다. 주머니에 넣어 둔 아버지의 선물. 메리걸은 꾸러미를 꺼내 가족이 모두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아버지가 주신 거예요."
"우아! 예쁘다."
랄리가 스카프 끝을 만지고는 말했다.
"게다가 엄청 부드러워요."
어머니가 일어나더니, 메리걸 머리에서 낡은 스카프를 벗겼다. 그러고는 메리걸의 까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돋보이도록 새 스카프를 뒤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주었다.
"사랑스럽구나."
어머니가 감탄했다. 기본적인 생필품 말고 뭔가를 나눠 본 경험이 없는 가족 사이에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버지가 랄리에게 라왑을 가져오라고 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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