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토드 메이 / 이종인
원제 : A Decent Life
출판 : 김영사
출간 : 2020.07.09
<겨울서점> 5주년 기념을 맞아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급히 읽었다. 근 1년여를 묵혀두었던 것이 단 이틀 만에 결심부터 완독까지 해결(?)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일단, 어째서 김겨울 작가가 그렇게 행복하게 추천했는지 확실하다. 저자의 지나치지 않은 유머와 삶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지침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하는 태도는 매우 매력적이다.
(지금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상당한데, 내가 비슷한 주제로 리뷰를 했던 적이 있던가?)
개인적으로는 조금 당황스러운 사실은 내가 피터 싱어와 도덕적 개별주의에 가까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삶 속에서 그 가치를 적절히 구현하고 있느냐와 별개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그에 가까웠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와는 거리가 있는 '차선에 만족하는 사람들 satisficers'가 되자는 것이다. 저자가 고안한 satisfaction과 sacrifice의 합성어는 그것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나'를 축소시키고 '남'을 '나'로 받아들이는 이타주의와는 선을 긋는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성인에 가까운 자기희생이 아니며, 보통의 삶을 살아가며 생각해볼 지점들을 말한다. 즉, 절대 악과 절대 선 사이 어딘가에서 적절히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다수의 일반인들이 잠깐씩 생각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일상 속의 품위'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영향력들은 동심원을 이루며 자신, 자신의 주변인과 환경, 더 먼 관계, 비인간 동물, 그리고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간다. 저자는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일상에서의 사례들을 제시하며 때에 따라서는 정언명령, 공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모두 녹여 정리한 세 유형 "결과론, 의무론, 덕 윤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들이 제시하는 이상은 일반인들이 실천할 수 없는 머나먼 곳에 있으므로, 이들을 적절히 배합해 '조금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의식하고 있었건 아니건 간에 자신의 이야기들 속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녹아있다는 주장도 인상 깊었다.
-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 당신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다른 이들에게 품위 있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잠시 매트 웨이지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 다니는 촉망받는 학생으로 철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철학으로는 이 세상에 충분한 기여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여 월가의 차익거래 중개인이 되었다. 그는 중개인으로 벌어들인 수입의 절반 이상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또 다른 사례로 알렉산더 버거의 경우를 보자. 스탠퍼드 대학에 다니던 그는 조사를 통해 비록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는 하지만 신장 한쪽을 기증해도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신장 기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버거는 신장 한쪽을 내주기로 결심했다.
-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철학책이다. 하지만 방금 말한 매트 웨이지나 알렉산더 버거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은 아니고,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철학책이며 도덕을 논의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나는 도덕적 생활 방식의 틀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그런 생활 방식을 '품위 있음 decency'이라고 명명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우리는 도덕적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성인이 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품위 있는 언행에 대하여 고찰하지만, 전통적 도덕철학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최선의 삶' 혹은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생활'을 요구하지 않는 도덕적 향상의 길을 가리킨다.
- 거지에게 동냥을 주어야 하는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가? 내가 보이지도 않는 듯이 지나가버리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어야 하는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도 정치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책에서 이타주의에 비하면 다소 소박한 목적을 가진 삶, 그렇지만 도덕적 평범함은 벗어난 인생을 논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된다.
어떻게 하면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 내가 자란 뉴욕에서의 당시 경험은 사뭇 달랐다. 뉴욕에서는 기다리던 승객들이 빨리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달했고 나 역시 그러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줄에서 옆으로 빠져나와 지하철 안의 승객들이 아직 내리고 있는데도 불쑥 자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으로 하차하는 사람과 맨 처음으로 승차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1초간의 머뭇거림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했더라면 우리는 '저 사람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관광객이거나 지하철을 처음 타봐서 뭘 잘 모르는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으리라. 코펜하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은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렸고 꼭 지하철 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줄을 서 있다가 앞에 있는 사람을 밀거나, 상대방이 머뭇거린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도시에서 비난 비슷한 것을 받아본 경험이라고는 실수로 자전거 도로에 잘못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슬쩍 나를 쳐다본 게 전부였다. 자전거 도로에 서 있으면 자전거 통행에 방해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려면 당연히 자전거 탄 사람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 이런 질서 정연한 현상을 낭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낭만적인 일도 아닌 데다가 그런 시각은 나의 논지와 어긋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여러 면에서 코펜하겐은 다른 여러 대도시들과 비슷하다. 코펜하겐 시민들은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 기차, 버스, 그 외의 다른 환경에서 눈에 띄는 유대감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에 조그마한 배려나 당연히 받을 서비스를 받아도 '타크 tak(고맙다)'라는 말을 다양하게 자주 사용한다. 덴마크 사람들은 심지어 타크라고 말할 기회를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한다. 다른 대도시들을 거닐어본 사람이라면, 코펜하겐의 사회적 느낌이 다른 대도시와 다를 바 없어 아주 익숙할 것이다. 즉, 코펜하겐 시민들이나 덴마크 사람들이 다른 대도시 사람들에 비해 유달리 남들에게 더 따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사실 나는 아테네에서 더 따뜻한 환대를 받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차분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다).
- 내 말은 코펜하겐 시민들은 남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더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즉 남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일정이 있고, 달성해야 할 계획이 있으며, 추진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살아가야 할 삶, 즉 필요에 의해 지금 이 순간 나를 이 도시의 지하철 역으로 나오게 한 생활이 있는 것이다. 또 방금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도 그런 계획과 생활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것을 내 행동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러한 남들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내가 앞으로 '도덕적 품위'라고 부르는 태도의 바탕, 즉 도덕적 핵심이다. 이 책은 그런 도덕적 품위 혹은 시민적 품위를 설명한 것이다.
- 나의 관심은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평범한 사람보다는 약간 나은 사람, 그렇지만 이타주의자는 아닌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도덕적 생활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도덕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나는 도덕적 생활의 한 가지 방식으로 '품위'라는 말을 사용했다. 내가 말한 품위는 의무, 옳음, 공리, 의도, 의무, 선과 같은 도덕철학의 전통적 개념들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도덕적 품위는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나는 여기서 궁극적 선은 무엇인가, 우리의 의무 사항은 어떤 것들인가,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도덕적 인격을 도야할 의무가 있는가 등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나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철학자들이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이런 문제들을 논의해왔다.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들은 그보다 평범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 횃불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도덕적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비록 뒤죽박죽이기는 하지만 품위를 지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도덕적 품위의 틀을 잡아주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가 마주한 순간들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도덕적 품위의 틀, 동시에 그런 순간들을 유지하거나 더욱 많아지게 만드는 생각의 기준을 잡아주는 틀.
- 우리가 엄격한 도덕에 대하여 펴고 있는 두 가지 반론은 결국 합쳐진다. 첫 번째 반론은 이런 것이다. 만약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목적이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을 돕는 데 있다면, 나 또한 나 자신을 위하여 유의미한 삶을 영위할 허가를 받은 것이다. 두 번째 반론은 만약 모든 사람이 엄격한 도덕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아주 의미 있는 삶을 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이 두 반론을 종합하면 피터 싱어와 다른 엄격한 도덕철학자들이 제안하는 행위와 도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된다.
- 나는 여기에다 세 번째 고려 사항을 추가하고 싶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제안이지만 그래도 거의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 제안은 앞의 두 반론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둘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사실을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보통 사람들 대부분은 싱어와 그 밖의 다른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종류의 엄격한 도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 설사 그런 도덕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굶주림을 종식시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우리 자신을 극단적 형태의 이타주의에 전적으로 헌신시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도덕에 신경 쓰지 않는 자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도덕과 무관한 일들에 너무나 강하게 몰두해 있으므로 도덕이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해도 포기할 수가 없다.
- 사실 철학자들은 '좋은 삶'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말해왔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삶 혹은 그와 다른 삶은 거의 주목을 하지 않았다. 사실 세 도덕 이론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도덕에 집중하는 많은 논증들이 나와 있다. "이런저런 유형의 도덕적 이타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 혹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이타주의가 아니면서도 실효성이 있는 도덕은 이러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 그런 대체적인 도덕적 견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분명한 답변이 처음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기존의 세 가지 도덕 유형 중에 한두 가지를 뽑아 들고서 그것을 우리의 약속과 계획에 맞추어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예 다른 도덕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완화된 결과론, 완화된 의무론, 완화된 덕 윤리 같은 것을 채택하자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도덕적 관점을 개발하는 것보다 기존의 도덕 이론을 비추는 조명을 약간 흐릿하게 하여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하면 난국을 헤쳐나가는 요령이 되지 않을까?
- 사실 이 아이디어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나온 것이다. 별로 멋지지 않은 '차선으로 만족하기'라는 용어를 한번 생각해보자(차선으로 만족하기'의 원어는 satisficing인데 satisfaction 만족과 sacrifice 희생의 합성어에다 동명사 어미 -ing를 붙여서 만든 조어이다. 엄격한 도덕론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희생만 요구하는 도덕적 행위를 가리킨다. 번역본에서는 '차선으로 만족하기'로 번역했는데 앞으로 이런 번역어가 나오면 satisficing이 원어임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옮긴이),
- 어느 것도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 사항을 완수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살아가야 할 삶이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런 인식을 합리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해보자면, 도덕적 우아함 moralgracefulness을 간직한 채 이 세상을 헤쳐나가자는 이야기이다.
- 친구를 또 하나의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대한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잡한 태도이므로 잠시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내가 현재 믿고 있는 것을 사실은 내심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누진세를 실시해야 하고, 남녀차별 철폐 조치나 소수민족 우대 정책이 건전한 다양성을 촉진하고, 무료 보건 정책을 실시해도 많은 사람이 그 제도를 악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러나 나의 이런 믿음은 과학자들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다른 객관적 증거가 나타나서 다른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는 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새로운 증거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내 믿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내가 그런 것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내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다. 정치적 반대자와 과학자와의 대화 사이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과학자는 새로운 과학적 증거가 나오면 그의 신념을 바꾼다.
- 그것은 품위 있는 행동의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에서 품위 있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우리 자신을 정치적 행동의 모델로 만들어서 우리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보고 기꺼이 모방하게 하는 것이다. 품위 있게 행동하는 것은 공통의 공간을 멋지게 헤쳐나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한, 당신의 행동을 혐오스럽다거나 당황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방식, 남들이 당신을 따라 해도 난처해지지 않을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남들을 언어나 완력으로 공격하는 것, 남들을 굴욕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 남들에 대하여 거짓말이나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 남들을 협박하게나 강탈하는 것, 사소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들을 위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비폭력적 행동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법한 품위 없는 행동의 사례들이다. 존엄이 다른 사람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관련된다면, 공유된 공간을 헤쳐나가면서 남들의 모범이 될만한 행동을 하고 또 나중에 후회 없이 되돌아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 존엄이 비폭력과 관련된 가치들 중 하나라면 평등 또한 그러하다.
- 조건들을 개선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공통적 공간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품위 있게 행동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이 우리를 극단적 이타주의로 인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질문을 우리 삶 전체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같은 질문처럼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는 우리가 보기에 합리적일 정도로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져야 하고 또 우리의 행동으로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도덕적 품위는 우리에게 그 이상을 묻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이하를 묻지도 않는다.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혹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존재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중에 무결점인 사람은 없다. 남들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지어 자기 자신을 상대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이타주의나 전통적 도덕 이론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도덕적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하며 살아가기는 어렵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하여 갖고 있는 정체성에 완벽하게 부응하며 살아가는 것도 어렵고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만약 이런 점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고, 거기서부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춰 철학은 도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렇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는데), 현대의 도덕철학에서 다루어지는 도덕적 개념들에 대하여 다소간 알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옳은 일을 하려는 의도가 중요하다' 등은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 성찰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다른 용어를 제시하면서 좀 더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철학적 성찰의 뿌리는 언제나 항구적인 인간 관심사로 소급된다.
- 그러나 칸트의 의무론도 결과론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이런 사례를 보라. 나는 점차 탈모가 진행되었고 이것이 신경 쓰였다. 마침내 나는 '당신이 나를 자르기 전에 내가 먼저 사표 내겠다'라는 심리가 작동하여 내 머리를 밀어버렸다. 하지만 아내는 자비로운 마음의 소유자여서 탈모라는 분명한 사실을 부정해왔다. 아내는 내 머리카락이 별로 빠지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거울이 있으므로 나는 사태의 진상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도 아내는 계속 내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지만 아내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내는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 의무론에는 이것보다 더 심각한 특징도 있다. 철학책에 등장하는 전형적 사례는 이런 것이다. 당신은 교수인데 어떤 학생과 약속을 했다. 이 날 이 시간에 연구실에 있을 테니 최근에 제출한 보고서의 등급을 매기는 작업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실로 가던 도중에 어떤 사람이 차에 치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사람은 길에 누워 있고 당신은 그를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러자면 학생과의 약속을 어겨야 한다. 만약 당신이 칸트의 정언명령을 준수하려면 교통사고 환자는 그냥 내버려 두고 그 학생을 만나러 가야 한다.
- 내가 방금 예시로 든 결과론과 의무론의 기이한 특징들이 두 도덕 이론에 대한 결정적 반론은 아니다.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런 사례들(특히 도덕적 행운의 경우)이 과연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철학책이 집필되었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간단한 사례 속의 도덕 이론으로부터 실제적 도덕의 실천에 이르는 길은 결코 직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 우리가 이어갈 논의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제3의 유형인 덕 윤리 또한 복잡한 문제가 있는 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된 덕 윤리는 지난 30년 동안 철학계에서 커다란 르네상스를 누려왔다. 덕 윤리가 결과론, 의무론과 뚜렷하게 다른 점은 도덕적 관심이 행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도덕적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론과 의무론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덕 윤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가리켜 에우다이모니아 eudaemonia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이 그리스어는 종종 '행복 happiness'이라 번역되는데 '번창하기 flourishing'가 더 좋은 번역어이다.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선은 영혼이 덕에 일치하여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 나는 이 글을 쓰는 시간에 소아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이에게 병문안을 가서 선물을 주고 또 그 아이를 격려해야 하는가? 공장식 축산으로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학대 행위와 그런 축산 행태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생각할 때,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권유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이 이야기는 3장과 4장에서 더 다룬다.) 내가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셈법에 따라 내 인생을 관리해나간다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결과론에서 참으로 여겨지는 것은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칸트의 의무론이나 덕 윤리에서도 참으로 여겨진다. 약간 과장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들보다 좀 더 우대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가? 어떤 사소한 선약이 있었는데, 마침 나의 오랜 친구가 뉴욕에 들러서 함께 아름다운 일몰을 구경하자고 초대하는데도 그 선약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가? 또는 내가 언제나 나의 처신에서 중용을 지키면서 무모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고, 미리 재어보지 않은 열정을 불쑥 표출하면 안 되는 것인가? 사실을 털어놓자면 나는 내 인생의 계획들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과도한 도덕적 이타주의의 제단에다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없다. 내가 방금 제시한 논증들은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기도 하고 아닌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것이 나의 현실이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위한 도덕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도덕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현실적 관점을 바탕으로 도덕적 비전을 세운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 위의 논증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고려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좋고, 우리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엄격한 도덕의 틀 안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논증들은 엄격한 도덕에 대하여 일정한 제약을 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어떻게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적극적인 지침을 마련해주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그 논증들은 이타주의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도덕을 생각하게 하는 대체적인 생각의 틀을 마련해주지 못한다.
- 여기서 잠시 도덕적 우아함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려 한다. 이 단어는 우리가 도덕적 생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다른 방식들보다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종종 도덕은 의무 duties와 의무 사항 obligations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된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진 빚의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사람들하고 맺는 관계에는 도덕적 하한선이 있으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칸트는 의무와 의무사항을 강조했고, 공리주의는 비록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선을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상을 고수한다. 최근에 사회계약 이론으로 불리는 많은 이론들은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규칙을 따른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 어떤 규칙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 만약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생각을 펴 나간다면 우리는 그들의 결과에 부채의식과 뒤이어 죄책감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의무 사항이 있는 곳에는 부채가 있다. 부채가 있는 곳에서 그 부채를 갚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더 나아가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다. 죄책감은 심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단어에 들어 있는 법률적 함의도 감안해야 한다. 의무 사항은 어떤 사람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법률이고, 그 법률은 그 사람들에게 부채를 부과한다. 만약 당신이 의무 사항이 부과한 부채를 갚지 못한다면 의무 사항을 준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도덕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계약 중심적이다.
- 그것은 또한 도덕을 떠안아야 할 부담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여기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깃들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도덕 사상의 틀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은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을 때도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도 나는 하기 싫은 행위를 정확히 하도록 요구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남들과의 일상적 관계에서 도덕적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또 다른 사고방식이 있다. 그것은 의무나 의무 사항보다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사고방식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우리를 밀어낸다기보다 끌어당긴다. 내가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볼 때, 그 얼굴을 진정으로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공통성, 유대감, 동류의식(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한다.
- 때로는 경쟁자 역할 때로는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길리건은 배려 윤리학을 개발하면서 오로지 여성만이 이러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 모두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여성의 특징이 된 이유는 여성들은 남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반면에 남성들은 그런 연결 관계에서 벗어나는 개인주의를 강화하면서 행동을 뒷받침하는 원리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배려 윤리학을 선언하고 지지하는 철학자인 버지니아 헬드 Virginia Held는 우리 인간이 언제나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원리 윤리학은 이런 사실을 종종 놓친다. 원리 윤리학은 인간을 연결 관계가 전혀 없는 저마다의 개인으로 여기는 위험에 빠져 있다. 원리 윤리학에서 각 개인은 일련의 도덕적 원리로 무장한 채 상대방을 대하고, 그런 다음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원칙을 적용한다(최소한 우리들이 콜버그가 말한 높은 도덕 발전의 단계에 도달했다면).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 헬드에 의하면 제대로 된 도덕 사상이라면 반드시 이런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가족, 사회, 역사의 맥락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 우리가 여기서 논의한 상상력을 발휘할 경우, 어떤 상황의 결정적 측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며 느끼는 공감이든, 헬드가 말하는 배려든, 주도적 결정을 내리는 이런저런 도덕 원리들은 미리 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이 책에서 틀을 잡고자 하는 품위 있는 생활에서, 원리들이 지침은 될 수 있으나 반드시 결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 성찰을 강요받을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먼저 생각하고 상황을 지적인 도덕철학의 문제로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고려한다. 결국 우리는 그 상황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의 공감, 우리의 대인관계, 우리의 존재 방식은 기계의 톱니들처럼 그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면서 어떤 것이 상관있는지 고려하며 최선을 다하여 행동한다. 그것은 어떤 도덕 이론에 부응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고려대상인지 마음속에서 깊이 생각해본 다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 얼굴을 맞대는 대면 관계에서 이메일 같은 비대면 관계로 시선을 돌려보면,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메일, 문자 등을 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하며 그들의 동작을 읽을 수 없고 그들의 인간성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과 나눈 대화의 단어들 속에 흔적들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는 어떤 사람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해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얼굴을 상상하면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상상된 얼굴은 우리의 관심을 촉발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껏 논의해온 상상력까지는 아니지만 그쪽 방향으로 한 걸음을 뗀 것이다. 상상된 얼굴로부터 어떤 공감이나 배려가 생겨날 수 있고, 비록 느슨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 이제 틈새 문화 niche culture에서 판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외국 영화, 전위 소설, 논쟁적인 역사서, 분류하기 어려운 음악 등이 다 많은 관중과 청중을 만나고 있다. 더욱이 이런 틈새 문화가 있기 때문에 주류 문화의 판로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뉴스나 문화적 아이템들을 질식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틈새 문화에도 부작용의 측면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기존에 갖고 있던 의견들이 계속해서 강화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동의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의견을 깊이 생각해볼 가능성이 적어지고, 불편한 사실들을 대면하지 않으려 하고, 당신의 신념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멀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의 의견을 교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당신은 잘못된 것을 믿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당신의 세상에서는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없으므로 그 어떤 것도 당신이 믿고 있는 것에 도전하고 나서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눈이나 귀에 거슬리는 것은 간단히 처리되어버린다. 그것들은 존재를 부정당하거나 아니면 그릇된 것으로 치부되어버린다.
- 틈새 문화 속에 사는 것은 우리가 직접 접촉하지 않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분명한 어려움을 준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도덕적 관계를 맺고 어떻게든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면,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영위되는지 알기 위하여 우리의 거품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앞 문단에서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공통적 상황' 같은 것은 없다. 다른 나라들, 심지어 같은 사회 안에서도 다른 사회적 집단들은 정치적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우리는 인종차별의 역사를 감안하지 않고서는 정치적 상황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인종 문제를 감안하지 않고서 정치적으로 품위 있는 행동 방식에 대해서 물으려 하는 것은 그 상황의 핵심적 양상을 놓치는 게 된다. 반면에 필리핀이나 스웨덴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나라들은 그들 나름의 어려움이 있는 역사가 있지만, 인종 문제가 미국에서처럼 핵심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 이것은 정치적 품위 있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상황만 깊이 생각하면서 얻은 교훈들은 다른 상황들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관계만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미국의 현재 정치 상황에 주로 집중하겠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다른 정치적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과도 관련될 것이다.
-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지만 때때로 자기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이야기를 탐구하는 것은 그런 점을 드러내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이런 사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나는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나 카바레로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의 이야기들 중 상당수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남이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그녀의 책 <이야기하기 Relating Narratives>에서 카바레로는 이 점(이야기는 상당 부분 남에게서 온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그녀가 보기에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고, 남들이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해줄 때 성취감 혹은 완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더욱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 중 많은 것들이 실은 남들이 우리에게 해준 이야기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 나는 카바레로의 이런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나는 내 모든 이야기의 근원은 아니다. 내 이야기들은 내가 남들과 공유하는 인간관계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들은 내가 지지하고, 동일시하고, 구현하기 원하는 가치를 드러낸다. 나의 소망과는 무관하게 이런 이야기들 중 일부는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치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남들이 내게 하는 이야기에 비하여 나의 정체성을 더욱 독특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갖게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보다 반드시 덜 진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기만적인 이야기는 왜곡된 것 혹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한 이야기는 나의 가치를 짐작한 것이지만, 내가 내 입으로 말한 것은 나의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내가 이어서 말하려는 두 번째 교훈은 방금 말한 첫 번째 교훈과 서로 보완되는 것으로서, 전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로 중요하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도덕적 품위를 상기시키고 또 다른 사람도 살아가야 할 복잡한 인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준다. 나 자신이 생각보다 더 복잡한 사람이라면 남들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점인데,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복잡한 사람들이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명심해야 할 사안이다. 특히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은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양극화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 인종차별이 일상적 관계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 상식적 예의는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즉, 다른 인종(젠더, 성적 지향 등)의 사람들도 동료 시민이고 당연히 그런 사람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추는 것이다. 나의 스승이었던 분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우리 모두는 기껏해야 회복 중인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그는 백인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이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인종적 관점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적 관점에서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들과의 상호작용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지혜를 간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공통적 공간의 습속인 인종차별주의로부터 날마다 회복할 수 있다. 인종 문제와 다른 형태의 억압이 특정 형태의 자선행위를 유도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이것이 해로운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3장에서, 우리는 자선행위와 정치적 행동 사이의 갈등, 까다로운 조건들을 완화하는 것과 그런 조건들의 기반에 도전하여 바꾸는 것 사이의 갈등을 살펴보았다(아래에서 우리는 그런 복잡한 관계의 또 다른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자선행위와 정치적 행동은 인종차별주의를 강화하는 위험을 떠안을 수 있다.
- 남들이 우리의 메아리 방이 우리에게 믿도록 유도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존재라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지지하고, 동일시하고, 구현하고 싶어 하는 가치의 적어도 일부를 그들 또한 지지하고, 동일시하고, 구현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남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자신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렀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공통점을 찾게 된다. 이것이 앞 장에서 논의했던 시민적 품위의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함으로써,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시민적 품위 쪽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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