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존 엠슬리 / 김명남
원제 : Elements of murder : a history of poison
출판 : 사이언스북스
출간 : 2010.08.30
1권에 2권 목차까지 삽입된 것을 보면 단권을 분권 출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찾아본 바로는 거의 확실한데, 개인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한 권으로 묶기에는 상당한 분량인데, 벽돌 책은 대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양장이 주는 무게감을 넣기에는 조금 더 가볍고 재미있는 책이다.
1권은 수은과 비소, 2가지 물질을 다룬다. 다양한 화합물로 존재하는 두 원소가 각 시대별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했는지, 그것이 일으킨 유명한 사건들은 무엇인지를 상세히 저술했는데 무척 재미있다. 가십성이 짙은 사건들도 많지만,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조각들이 긴 시간이 흐른 후 밝혀지는 것을 보는 것은 항상 모종의 짜릿함이 있다.
수은과 비소에 관해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그린 나이트>에서 이들의 독성을 언급한 바 있어 더 흥미롭게 읽었다. 원래는 1권까지만 읽을 생각이었는데 2권의 안티모니와 납, 탈륨도 궁금해졌다. 하지만 언제 읽을지는 미정.
- 사람이 죽는 방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죽하면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라는 추리소설 제목이 있겠는가. 죽이는 방법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목 졸라 죽이는 교살, 총으로 죽이는 총살, 쏘아 죽이는 사살, 베어 죽이는 참살, 쳐서 죽이는 격살, 던져 죽이는 척살... 그러나 그 모든 방법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였던 방법은 독물을 먹여 죽이는 독살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독당근 추출물을 사약으로 받고 죽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식물에서 추출한 독물을 사용해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세도가 체사레 보르자 집안도 독약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연금술사들, 치과 의사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매드해터와 같은 모자 제조공들, 그리고 탐정들. 중구난방인 이 직업군들의 공통점이 바로 수은이었던 것.
- 연금술은 중국, 인도, 중동, 유럽 등 금이 귀하게 여겨지고 금에 대한 수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번성했다. 서구 연금술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였다. 우리가 아는 최초의 연금술사도 이집트에 살았다. 기원전 200년경 나일 강 삼각주에 살았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B.C. 370년)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책 <자연물과 신비한 물건들에 관해(Physica et Mystica)>에는 유용한 염료와 안료 제조법들이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금법에 관한 내용도 실려 있다. 하지만 암호처럼 모호한 말로 적혀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아마 가짜 금을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듯하다. 뒤를 이은 이집트 연금술사로는 300년경의 인물인 조시모스(Zosimos)가 있다. 조시모스는 증류나 승화 같은 화학 과정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런 작업들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유대 여인 마리아라고 밝혔다. 마리아 역시 100년경에 이집트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수은과 황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런데 정작 그녀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은 흔히 중탕에 사용되는 이중 냄비 '뱅마리에'다. 조시모스 또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방법에 대해 모호한 설명을 남겼고, '팅크(tincture, 丁幾)'와 분말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후대의 연금술사들은 이것이 각각 영약과 철학자의 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조시모스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아가소데몬(Agathodiamon)은 나트론(천연 탄산나트륨)과 섞이면 '불 같은 독극물'이 되는 광물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물에 투명하게 녹는다는 그 독극물은 아마 삼산화비소였을 것이고 아가소데몬이 사용한 광물은 비소 광물인 계관석이나 웅황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용액에 구리 조각을 담그자 구리가 아름다운 초록색으로 변했다고 그가 적었기 때문이다. 아비소산구리가 형성되는 과정이 바로 그렇다. 이 초록 안료는 그로부터 1,500년 뒤에 다시 등장해 실내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 이야기도 뒤에서 하겠다.
- 연금술은 조시모스의 시대부터 이미 시들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쇠망과 맞물린 무렵이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 교라는 비정통 기독교파 사람들이 400년경에 페르시아로 피난을 떠나면서 연금술 문헌들을 가져갔고, 이 정보가 아랍인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아랍인들의 손에서 연금술은 다시 융성했다. 연금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알케미'도 아랍어에서 온 것이다. 초기 이슬람 통치자들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장려했고, 700년경에 그들의 제국이 에스파냐까지 뻗자 서구 유럽 사람들도 새로운 연금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아랍인 연금술사로는 2명의 위대한 인물이 있다. 유럽에 게베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부 무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Abu Musa Jabir ibn Hayyan, 721~815년), 유럽에 라제스라고 알려진 아부 바크르 무하마드 이븐 자카리야 알 라지(Abu Bakr Muhammad ibn Zakariya Ar-Razi, 865~925년)다. 두 사람의 저작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읽혔으며 후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게베르가 썼다는 책은 2,000권이 넘는다. 그에 따르면 만물은 불, 흙, 물, 공기의 네 요소로 이루어졌고, 이들이 수은 및 황과 결합함으로써 모든 금속이 생겨났고, 금속 사이의 차이는 기본 성분들의 비율 차이에서 비롯한다. 게베르는 수은과 황이 결합하면 진사(황화수은)라는 붉은 화합물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는데, 만약 완벽한 결합 비율을 찾아낸다면 결과물이 금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믿었다.
- 라제스가 쓴 <비전의 서의 비밀(Secret of Secrets)>은 영향력이 대단했던 책으로, 수많은 화학 물질, 광물, 실험 기구 등을 나열해 소개했다. 유리 기구도 몇 종류 포함되어 있다. 라제스는 알코올을 증류해 소독약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수은을 설사제로 권장하기도 했다.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설사제는 설사를 멎게 하는 게 아니라 설사를 일으키는 약을 말한다. -옮긴이) 라제스는 흔히 승홍이라 불리는 염화수은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승홍으로 만든 연고는 이른바 '가려움증', 그러니까 현대에는 드문 피부병인 옴을 치료하는 데 쓰였다. 옴은 옴진드기가 피부를 파고들어 생기는 병으로, 특히 생식기 부위에 극심한 가려움을 일으키고 성교 중에 전염될 수 있다. 수은은 강력한 독성으로 피부를 파고들기 때문에 옴 치료에 효과적이었다. 인도에서도 700년 무렵에 연금술사들이 활발히 활약했다. 그들의 전승 지식은 800년경에 씌어진 <라사라트나카라(Rasaratmakara)>, (보물의 바다'라는 뜻이다. -옮긴이)라는 책에 갈무리되었다. 주로 수은의 속성 및 다른 화합물들과의 반응에 대해 다룬 책이었다. 책은 수은에 금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수은이 '넥타' 형태로 변형될 때 불로장생제가 얻어지리라고도 했다. 인도의 민간요법에서는 아직도 수은과 수은 화합물들이 재료로 쓰인다. 중국도 그렇다.
- 중세 초기에 유럽에서는 여러 뛰어난 연금술사들이 등장했다. 아비켄나(Avicenna, 이븐 시나, 985~1037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년),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20~1292년), 토머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년) 등이다. 몇몇은 신학 저술로 더 유명하다. 다른 누구보다도 이 시기에 가장 유명했던 연금술사는 스스로 게베르라 칭했던 한 에스파냐 사람이었다. 그가 전설적인 게베르의 이름을 자처한 것은 권위 있어 보이고 싶어서였고,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아주 널리 읽혔다. 그는 질산, 질산은, 붉은 산화수은 제조법을 처음으로 기록했다. 그가 직접 설계한 기구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사용법이 적혀 있다는 점이 그의 책들의 인기 비결이었고, 덕분에 그의 글은 연금술의 영역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끼쳤다. 게베르 덕분에 연금술이 존경할 만한 작업으로 승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서히 유럽 연금술사들도 스스로 화학 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쿠아 레지나, 즉 왕수(水)였다. 왕수는 질산과 염산을 혼합한 것으로서 금을 녹일 수 있는 용액이다. 사람들은 금이 녹는 것을 보고 금 또한 변형 가능한 물질임을 새삼 확신했다. 왕수에 로즈메리 기름을 타서 묽게 하면 금이 계속 용해된 채로 있었다. 사람들은 이 음료를 아우룸 포타빌레(액체 금)라 불렀고, 만능 약인 양 여기저기 처방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연금술사들이 비밀 문자 기록을 고집했던 탓에 우리가 그들의 원고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이 하나의 물질을 여러 이름으로 불렀던 것도 문제다. 가령 수은은 문지기, 오월의 이슬, 어머니의 알, 초록 사자, 헤르메스의 새 등으로 불렸다.
- 니콜라스 플라멜(Nicholas Flamel, 1330~1418년)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연금술사였다. 사람들은 그가 철학자의 돌과 영약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플라멜이 아주 장수한 데다 막대한 부를 쌓아서 교회에 기부하거나 병원을 짓곤 했기 때문이다. 1382년 1월에 플라멜이 수은을 은으로 바꾸었으며 3개월 뒤에는 다량의 수은을 금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실상 플라멜의 재산과 긴 수명은 쩨쩨하고 금욕적인 생활 습관에서 비롯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자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초년에 연금술사였다라는 것,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자기 부의 근원이 연금술 덕인 양 위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국에도 유명 연금술사들이 있었다. 요크셔 브리들링턴 출신의 조지 리플리(George Ripley, 1400년대 초에 출생했다.) 같은 인물이다. 리플리는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한 끝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전속 신부가 되었다. 1477년에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 리플리는 <연금술의 화합물, 또는 철학자의 돌을 만들기 위한 열두 관문(The Compound of Alchymy, or the Twelve Gates Leading to the Discovery of the Philosopher's Stone)>이라는 책을 냈는데, 열두 관문이란 증류나 승화 같은 화학 기법들을 가리켰다. 리플리 역시 무척 부유했기에 동시대인들은 그가 연금법을 알아낸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리플리는 임종 직전에 진실을 고백했다. 자신이 헛된 추구에 평생을 낭비했고, 자신의 글은 실제 실험이 아니라 추측에 의거해 씌어진 것이니, 자기 책을 모두 태워 버려야 마땅하리라는 고백이었다. 10대 초부터 철학자의 돌을 찾기 시작해 85세에 죽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한 이탈리아 사람 트레비소의 베르나르도(Bernard of Treves, 1406~1491년)도 있다. 그는 부잣집에 태어난 덕분에 평생 연금술사로 살면서도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연구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기꾼에 불과했던 것 같다. 베르나르도가 1464년에 빈에서 만난 장인 헨리도 그런 조력자였다. 베르나르도가 헨리와 함께 수행한 실험은 대실패였다. 장인 헨리는 베르나르도한테서 받은 금괴 42개를 수은과 올리브기름과 함께 용기에 넣고 봉한 뒤 21일 동안 가열했다. 용기를 열어 보니 놀랍게도 금괴가 16개만 남아 있었다.
- 사실 연금술사들의 화학은 수준이 낮았다. 수은을 황이나 손에 들어온 다른 재료들과 함께 가열하는 일이 거의 전부였다. 수은은 철을 제외한 모든 금속을 녹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연금술사들은 수은에 다른 금속을 녹인 합금, 즉 아말감을 만든 뒤 황과 함께 가열했다. 그러면 다양한 색조를 띤 물질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산화비소를 넣으면 색이 더욱 다채로웠다. 그것은 하나의 물질이 다양한 깊이의 색을 보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연금술사들은 각각이 다 다른 물질이라고 믿었다. 요즘도 인터넷을 통해 연금술 재료를 사거나 이른바 금 제조법을 배울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아들레이드에 위치한 파라셀수스 칼리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그런 주제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웹사이트 http://levity.com/alchemy/parcoll.html에 가 보면 중세 연금술사들의 저술을 번역한 자료도 볼 수 있다.
- 수은은 황 원자에 대한 친화력이 크다. 두 원소가 결합하면 불용성인 황화수은(HgS)이 되는데, 이것이 밝은 붉은색 진사의 형태로 수은 광석에 많이 들어 있는 물질이다. 진사로 만든 안료를 버밀리언(주홍색)이라고 한다. 버밀리언은 무려 2만 년 전의 에스파냐나 프랑스 동굴 벽화에도 사용된 물감으로, 로마 인들이 특히 좋아해서 방 전체를 이 색깔로 칠하고는 했다. 로마 작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와 플리니우스(Pliny)가 수은에 대해 적은 글을 보면 두 사람은 에스파냐의 광산에서 발굴된 천연 수은이 진사를 배소시켜 얻은 수은보다 품질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자는 아르젠툼 비붐(살아 있는 은)이라고 하고 후자는 히드라지룸(은색 물)이라고 불렀다.
- 오늘날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기원전 6, 7세기에 번성했던 칼데아 문명의 장인들은 안티모니를 다룰 줄 알았다. 1887년에 프랑스 화학자 피에르 베르텔로(Pierre Berthelot, 1827~1907년)가 칼데아의 화병을 분석한 결과, 그 재료는 순수한 안티모니 금속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화병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의 야금가들이 휘안석에서 안티모니를 추출했는지, 아니면 드물게 발견되는 천연 안티모니 광물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인 매춘에 종사했던 이집트 여인들도 휘안석 가루를 애용했다. '코울(kohl)'이라고 불렸던 휘안석 가루를 눈 화장먹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직종의 종사자이자 코울의 사용자로 가장 악명 높았던 여인은 성경에 악행이 기록되어 있는 요부 이세벨이다. 성경에는 눈을 검게 칠하는 여인들을 경계하라는 말이 <열왕기>(9장 30절)와 <에스겔서>(23장 40절)에 두 차례 나온다.
- 1941년에 미국의 모자 제조공 544명을 검사한 결과, 59명이 만성 수은 중독 기미를 보였다. 원인은 작업장의 공기였다. 언뜻 생각하기에 모자 만들기에 수은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 같다. 모가는 1960년대에 인기가 떨어지기 전까지 장장 수백 년 동안 남녀를 가리지 않는 패션용품으로 사랑받았다. 모자는 주로 펠트로 만들었는데, 펠트는 집토끼나 산토끼, 사향 뒤쥐, 비버 등 털이 매끄럽고 탄력 있는 짐승의 모피를 이용해 만들었다. 그게 문제였다. 펠트를 만들려면 털을 압축시켜 서로 엉기게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질산 수은 산성 용액으로 화학 처리를 했다. 모자 제작 산업에서 이 공정 이후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수은에 노출되었다. 처음에 모피를 가공하는 사람부터 마지막에 모자 모양을 잡는 사람까지 말이다. 펠트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었고(털 불어넣기, 형성, 경화, 풀칠, 형성, 다림질, 받침 대기, 방수 가공, 굽기, 압착) 매 단계마다 천에서 나온 먼지가 작업장을 오염시켰다. 어떤 작업장에서는 공기 중 수은 농도가 1세제곱미터당 5밀리그램이나 되었다. 모피 재단 담당자 중 40퍼센트가 만성 수은 중독에 걸린 것으로 확인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전형적인 수은 중독 증상들을 보였다. 성마른 태도를 보이고, 남이 자기를 감시한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주절주절 말이 많아지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했다. '모자 제조공처럼 미친'이라는 오래된 영어 표현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 메리 베이트먼(Mary Bateman)의 별명은 요크셔의 마녀였다. 그녀는 치사량의 수은을 희생자들에게 먹여 감쪽같이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이 교수대에 올랐다. 범죄를 저지를 당시에 베이트먼은 요크셔의 리즈에 살았다. 점을 봐주고 어수룩한 고객들에게 사기를 쳐 재물을 뜯어내는 게 생계 수단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미스 블라이스라는 영매로부터 초자연적 정보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미스 블라이스의 영이 씌운 베이트먼의 입에서 나오는 조언은 언제나 고객들에게 돈이나 값나가는 물건을 내놓으라고 이르는 내용이었다. 미스 블라이스가 시키는 대로 하면 행운이 찾아와서 바친 것 이상을 얻게 된다고 구슬렀다.
- 사이안화수은은 최고로 치명적인 두 독극물의 결합으로 보인다. 사이안은 효과가 빠르고 치명적인 독이므로 사이안화 수은의 독성은 수은보다 사이안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수은과 사이안기 사이의 화학 결합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이 희생자를 죽일 것인가는 희생자 위의 산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 요즘은 비소가 우리 건강에 위협이 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비소가 영향을 미쳤다. 얄궂게도 비소가 몸에 좋은 물질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장제 삼아 정기적으로 비소를 섭취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의사들은 갖가지 질환에 비소를 처방했으나, 점차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실태에 우려를 품기 시작했다. 1880년에 런던 의사 협회는 당시의 상품들 가운데 비소 염료가 사용된 것이 얼마나 있는지 조사해 목록으로 발표했다. 정말 아주 많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카드놀이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방을 상상해 보자. 카드에 비소가 함유된 것은 물론이고 초록 베이즈 천이 덮인 카드 테이블도, 벽지도 비소 염료로 인쇄되었을 것이고, 창문의 블라인드나 커튼도 그랬을 것이다. 바닥의 리놀륨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도, 옆의 탁자에 놓인 화병 속 조화 이파리들도 초록색 비소 염료로 칠해진 것이었다.
- 흘러간 그 옛날, 화가의 팔레트에는 세 가지 비소 화합물이 들어있었다. 밝고 아름다운 색조의 노랑, 빨강, 그리고 특히 멋진 초록 물감이었다. 노랑과 빨강은 천연 안료인 노란 웅황과 붉은 계관석에서 온 것이었다. 둘 다 황화비소지만 웅황의 화학식은 As2S3이고 계관석은 As4S4이다. 웅황을 뜻하는 orpiment(오피먼트)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우리(auri, 금)와 피그멘툼(pigmentum, 페인트)에서 왔다. 웅황은 고대에 널리 사용되었고 특히 중동에서 인기가 높았다. 연금술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금과 관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웅황이 유럽에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합성 웅황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였다. 웅황은 왕실의 노란색 또는 왕의 노란색으로 불렸고 크로뮴옐로(크로뮴산납)나 카드뮴옐로(황화카드뮴)로 대체되기 전까지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노란색 물감이었다. 자연 웅황 광맥 속에서 붉은 계관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계관석을 뜻하는 realgar(레알가)는 아랍 어 라지 알 가르(rahi al-gar)에서 왔는데 동굴의 먼지라는 뜻이다. 안료로 쓰일 때는 색조의 깊이에 따라 붉은 웅황, 붉은 비소, 비소 오렌지 등으로 불렸다. 이집트 파라오 시대의 예술가들부터 한참 후인 1600년대의 네덜란드 화가들까지 모두 계관석을 썼다. 루비 황이라는 이름의 합성 계관석도 인기가 많았으나 이것은 태양빛을 쬐면 한층 안정한 상태인 웅황으로 바뀌고는 했다. 그러면 붉은빛이 퇴색해 오렌지색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노란색이 되었다.
- 초록색 안료로는 공작석이라 불린 탄산구리 등 천연 광물도 몇 가지 있었지만, 화가들은 공기 중에 내버려 둔 구리 표면에 서서히 형성되는 녹청을 주로 활용했다.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 초록색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카를 셸레(Karl Scheele, 1742~1786년)의 이름을 따 셸레그린이라 불린 아름다운 초록색 화합물의 등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이 삼산화비소산구리였다.
- 이것을 합성한 셀레는 새로운 안료로 팔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셀레그린은 1778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셀레는 한 편지에서 물질의 독성이 걱정된다는 뜻을 내비쳤고, 비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구매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그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게 되었다. 아마 워낙 색깔이 생생하니 잘못 쓰일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곧 유럽 전역의 화가들이 셀레그린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터너가 1805년에 이 물감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50년 동안 인기가 지속되어 마네는 1860년대까지도 사용했다고 한다. 셀레그린의 제일가는 경쟁자는 에메랄드그린이었다. 에메랄드그린은 1822년에 만들어진 물감으로서 터너가 1832년까지 썼다고 한다. 에메랄드그린은 아세트산구리를 산화비소산구리와 섞은 것으로, 다양한 색조의 초록색을 만들 수 있었다. 첫 생산은 1814년에 슈바인푸르트의 빌헬름 염료 및 백랍 회사에서 시작되었다. 에메랄드그린은 셀레그린보다 더 인기를 끌었고 곧 종이, 옷감, 심지어 과자류를 염색하는 데까지 쓰였다. 에메랄드그린이라는 이름 외에 슈바인푸르트그린, 패리스그린, 빈그린 등으로도 불렸다. 비밀에 붙여졌던 제조법은 1822년에 독일 화학자 리비히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이때 독성도 함께 알려졌다. 제조업자들은 색을 밝게 하는 다른 원료들을 넣는 방식으로 제조 기법을 바꿨고, 속성을 숨기기 위해 이름도 바꿨다. 에메랄드그린은 페인트, 벽지, 비누, 전등갓, 장난감, 초, 실내 장식용 천, 심지어 케이크 장식에도 쓰였다.
- 정치 목적으로 독살하는 행위는 1500년대와 1600년대 이탈리아에서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랐다. 가장 악명 높은 독살자들은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6~1507년)와 그의 누이 루크레치아(Lucrezia, 1480~1519년)였다. 이들의 이름은 지금도 악행의 동의어처럼 여겨진다. (루크레치아가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근친상간해 아이를 낳았다는 말도 있다.) 남매는 라 칸타렐라라는 흰 가루를 애용했는데, 분명 삼산화비소였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들은 에스파냐의 무어 인들에게 독약 제조법을 배웠다. 1492년에 교황이 된 아버지가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라는 이름의 에스파냐 추기경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들의 아버지는 1503년에 아들 체사레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뒤에 사망했다. 체사레가 다른 사람을 독살하려고 마련한 음식과 포도주를 실수로 먹고 죽은 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체사레도 함께 앓았던 것을 보면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라 칸타렐라가 정말 삼산화비소였는지 이제 와서 확인할 길은 없으나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루크레치아는 1519년에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악평이 자자한 삶을 뒤로한 채 종교에 투신한 성스러운 신분이었다. 오빠 체사레는 1507년에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 삼산화비소 독살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부의 상류층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신사 계급에서도 유행했는데, 시칠리아의 토파나(Toffana)라는 악명 높은 독약 판매상이 그들에게 약을 팔았다. 그녀는 당시의 한 성수(聖水)의 이름을 따서 '성 니콜라스의 만나'라는 이름으로 삼산화비소 용액을 팔았다. 명목상은 화장품이었고 실제로 혈색 개선을 위해 이것을 사용한 여성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여성들은 이른바 토파나의 물, 즉 아쿠아 토파나를 성능 좋은 독약으로 사용했다. 아쿠아 토파나 때문에 제 명을 다 못한 사람이 최소한 500명은 되었다고 한다. 토파나는 1650년쯤에 팔레르모에서 사업을 시작해 1659년에 나폴리로 옮겼다. 나폴리에서 아쿠아를 유통하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많은 중개인들을 통해 50년 이상 성공적으로 사업을 운영했다. 결국 나폴리 총독이 그녀의 사업을 중지시켰다. 새 도시의 이름을 따 아쿠에타 디 나폴리라고 불렸던 그녀의 상품이 유독 물질임을 알아챘던 것이다. 용액은 독성이 아주 높아 포도주 한 잔에 여섯 방울만 섞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체포 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된 토파나는 수녀원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잡혀서 감옥에 투옥되었다. 고문을 당하고 모든 것을 실토한 그녀는 1709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 수은은 중국, 인도, 이집트의 초기 문명부터 알려져 있던 물질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수은 금속 시료는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년)이 쿠르나의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발굴한 것으로, 기원전 1600년 무렵의 것으로 보인다. 수은(mercury, 水銀)이라는 이름은 행성 수성(Mercury)에서 딴 것이고, 수은의 용도를 최초로 기록한 사람은 기원전 300년경의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였다. 로마 인들은 수은을 히드라지룸(hydragyrum)이라 불렀다. 수은의 화학 기호 Hg는 여기에서 왔다. 옛날 영어에서는 퀵실버(quicksilver)라 불렸는데, 이것은 살아있음을 뜻하는 고대 영어 단어 퀵(cwic)에서 왔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뜻의 영어 숙어 '더 퀵 앤드 더 데드(the quick and the dead)'에서의 '퀵'이다. 로마 인들은 진사를 가열하면 액체 수은 덩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구 반대편의 중국인들도 같은 현상을 목격했고, 중국 연금술사 갈홍(葛洪, 281~361년)은 밝은 붉은빛의 진사를 단지 가열하기만 해도 은색 수은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수은은 황 원자에 대한 친화력이 크다. 두 원소가 결합하면 불용성인 황화수은(HgS)이 되는데, 이것이 밝은 붉은색 진사의 형태로 수은 광석에 많이 들어 있는 물질이다.
- 뉴턴은 온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다. 뉴턴의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그는 빛과 색의 속성을 설명했고, 중력 이론을 정립했고, 그로부터 태양계의 운행 방식을 추론했고, 운동 법칙들을 만들었고, 미분의 초기 형태를 발명했다. 그러나 뉴턴이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수학 교수로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연금술로 보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250년이나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보관되었던 뉴턴의 서류 상자를 연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게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년)는, 금을 만들기 위한 갖가지 시도가 기록된 뉴턴의 노트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뉴턴은 고대 연금술사들이 실제로 연금법을 알아냈지만 후대에 그 비법이 잊혀져 버렸다고 믿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뉴턴만은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 위대한 화학자 로버트 보일도 그렇게 했고,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04년)도 비슷하게 믿었다. 뉴턴은 남들에게는 연금술에 대한 흥미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보일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처음에 뉴턴은 수은을 질산에 녹인 뒤 여러 물질을 더하는 실험을 했다. 별다른 성과가 나지 않자 이번에는 수은을 다양한 금속들과 섞어 화로에서 가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뉴턴의 조수이자 룸메이트였던 존 위킨스(John Wickins)에 따르면 뉴턴은 밤을 새며 실험하고는 했다. 한 번은 금을 부풀게 만드는 '살아 있는 수은'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뿐, 더 진척이 없자 뉴턴은 안티모니로 관심을 돌렸고, 1670년에는 이른바 레굴루스라 불렸던 특이하고 신기한 형태의 안티모니를 만들어 냈다. 1675년에 뉴턴은 1,200 단어짜리 '클라비스(열쇠)'라는 원고에 발견 내용을 정리했다. 당시 32세였던 뉴턴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벌써 희끗거리는 것은 수은 때문이라는 농담을 하고는 했다. 사실 수은과 흰머리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 하지만 몇몇 금속의 경우 인체 내 잔존량과 머리카락 속의 농도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다.
- 안티모니라는 단어는 어원이 분명치 않다. 일설에 따르면 그리스어로 '혼자가 아니다'를 뜻하는 안티 모노스에서 왔다고 한다. 다른 가설은 이 물질이 미니엄(연단, 검은 납) 광물 대신 눈 화장에 쓰이면서 '안티 미니엄'으로 불리다 '안티모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그럴싸한 설명은 그리스 어로 '꽃처럼'을 뜻하는 안테모니온에서 왔다는 것인데, 주된 안티모니 광석인 휘안석(스티브나이트, 황화안티모니) 결정이 마치 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 안티모니라는 단어를 쓴 것은 1078년에 사망한 아프리카의 콘스탄티누스였다. 그가 이 원소 자체를 가리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이름을 만들어 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슬람 신자로 태어나 바그다드에서 공부했으나 후에 기독교를 받아들여 수도사가 된 인물이다. 안티모니의 화학 기호인 Sb는 라틴어 스티비움에서 왔는데, 고대에 황화 안티모니를 가리키던 이름이다. 일찍이 안티모니에 대해 기록한 사람 중에는 1200년대의 로저 베이컨이 있었다. 베이컨은 안티모니와 안티모니 화합물들에 대해 잘 알았고, 그는 순전히 과학적인 면에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히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은밀한 연금술의 세계에서도 안티모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티모니는 산 중의 산인 왕수에만 녹는다는 점에서 금과 비슷했다. 연금술사들은 금와 안티모니 사이에 무언가 유사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수를 써도 안티모니를 금으로 변성시킬 수 없었다. 안티모니를 영약의 유력한 재료로 보았던 이들 역시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1340년 무렵에 로크타이야드의 장이라는 인물은 안티모니 화합물을 환자 치료에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 중세 시대에 사용된 안티모니 화합물들의 이름은 연금술사의 용어에서 나온 것 같다. 가령 안티모니 자체는 안티모니 레굴루스, 황화 안티모니는 금의 황화물, 염화안티모니는 안티모니 버터, 산화염화안티모니는 알가로스의 가루라고 불렸다. 하지만 안티모니의 실제 족보는 중세 시대 연금술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기원전 604~561년)의 통치 중에 바빌론의 벽들을 치장한 장식 벽돌의 유약으로 쓰였다. 이 안료는 1900년대까지도 제조되었고 나폴리 옐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칼데아 인들의 제조법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모르기는 해도 휘안석과 붉은 납(산화납)을 한데 가열해 화학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얻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안티모니를 납의 한 종류로 여겼고, 널리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의 뒤를 이은 비잔틴 제국은 황화안티모니의 새로운 쓰임새를 알아냈다. 비잔틴의 해군이 적군의 함대에 발사했던 유명한 무기, 이른바 그리스 화약의 원료가 바로 황화안티모니였다. 그리스 화약은 마치 화염 방사기처럼 분사되는 액체 불꽃이었는데, 진화가 안 되는 데다 물 위에서도 탔기 때문에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제조법은 현재까지도 비밀로 남아 있고, 당시에 이것을 누설하는 일은 사형감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쓰인 때는 1453년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방어전에서였다. 그리스 화약은 아마 원유, 휘안석, 초석(질산칼륨)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이런 조성의 화합물은 가연성이 아주 높고 물로는 끌 수가 없다. 여기에 불이 붙으면 황화안티모니가 생성되며 엄청난 열이 발생한다. 황화안티모니는 가연성이 높다 보니 초창기의 성냥에도 사용되었다. 성냥 끄트머리의 붉은색이 바로 이 화합물의 색이었다.
- 수은은 높은 안정성이 요구되는 스위치나 정류기 등의 신기 장치에도 계속 쓰이고 있으며 화학 산업에서는 염소와 수산화나트륨 생산 과정에서 액체 전극으로 쓰인다. 그러나 염화나트륨 용애을 전기 분해하는 이 기법은 수은을 쓰지 않는 다른 기법들로 대체되고 있다. 한편 곰팡이병을 막기 위해 종자용 옥수수에 수은 처리를 하는 관행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진국 사람들이 수은에 가장 쉽게 접하는 경로는 치아용 아말감 충전재일 것이다. 온도계, 펠트 생산, 도금, 무두질, 염색, 의약품 등의 오래된 용도들은 모두 폐기된 상태다.
- 20세기 중반의 미국에서만 3만 명 이상이 수은에 직접 노출되었던 것을 보면 정말 많은 노동자들이 수은에 노출되었던 모양이지만,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관련 질병을 앓은 사람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미국보다 피해자의 수가 적었던 영국에서는 수은 중독으로 공식 확인되는 경우가 1년에 평균 5명 정도에 불과했다. 종사자들에게 수은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악명 높은 직종이 몇 있었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모자 제조업이었다. 모자 제조업 종사자들이 보인 직업병 증상은 영국에서는 '모자 제조공의 떨림', 미국에서는 '댄버리 떨림'이라고 불리며 유명세를 떨쳤다. 미국 모자 산업의 중심지는 코네티컷 주 댄버리 시였고 영국에서는 현재 모자 박물관이 있는 체셔의 스톡포트였다.
- 일본에는 아기의 탯줄을 보관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 탯줄로 출생 시의 수은 농도를 분석했더니 정상 아기들보다 높은 평균 수치가 나왔다. 태아는 출생 몇 달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은은 태반을 통해 아기에게 전달되므로, 산모가 오염된 생선을 먹을 때마다 아기도 조금씩 메틸수은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출생 후에는 모유를 통해 아기의 몸에 메틸수은이 들어갔을 것이다.
- 약제사들은 수은에 다른 고체 물질들을 섞은 뒤 절구로 잘 빻아서 이른바 그레이 가루, 그리고 블루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레이가루는 곱게 간 수은을 백악(백색이나 담황색의 부드러운 석회질 암석. - 옮긴이)과 섞은 것으로서 우유에 타서 마시는 약이고, 블루필은 수은을 설탕과 섞은 것으로서 알약이었다. 둘 다 변비에 즉효약으로 여겨졌는데 사실 원래는 매독 치료제로 개발된 것들이었다.
- 그레이 가루는 전혀 의외의 직업 종사자들에게 직업병을 일으켰다. 직업적으로 그레이 가루 먼지를 맡았던 것은 바로 형사들이었다. 20세기 초반에 범죄 현장에서 지문을 수색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은 대개 수은 중독을 앓았으나,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다. 그레이 가루는 여기저기 찍힌 지문을 드러내는 가루로 안성맞춤이었다. 형사는 지문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리에 마구 가루를 뿌렸는데,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가루 막을 아주 얇게 입히는 게 중요했다. 이는 가루 대부분을 공기로 날려 보내야 하고, 형사가 그 먼지를 흡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몸에 들어간 수은은 폐에 붙어 흡수되었다. 지문을 찾아 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형사와 법의학자들은 만성 수은 중독 증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나친 침 분비, 복통, 불면, 떨림, 초조함, 우울증 등이었다. 수은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형사들이 만성 수은 중독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40년대에 들어서였다.
- 바넷이 사이안 중독을 일으키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마신 용액이 산성이 아니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의 위 내용물이 산성이 아니어서였을 수도 있다. 위가 산성을 띠지 않는 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지만 아주 없는 일도 아니다. 악명높은 러시아 수도승 라스푸틴도 1916년에 사이안화칼륨을 먹었을 때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건졌다. 사이안기가 치명적인 독성을 지니려면 사이안화수소(HCN)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산이 필요하다. 완전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몰리뇌는 두 번째 독살에 나섰다. 이번에는 에머슨 브로모셀처 탄산수로 위장한 용액을 해리 코니시(Harry Cornish)에게 보냈다. 코니시는 매디슨 로와 45번 가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유명한 니커보커 체육 클럽의 체육 감독이었다. 예쁜 은제 케이스에 담긴 용액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배달되었고, 코니시는 그것을 미망인인 캐서린 애덤스(Catherine Adams) 이모에게 선물했다. 이모가 비슷하게 생긴 은제 장식품들을 가지고 있는 걸 본 기억이 나서였다. 코니시는 센트럴 파크 근처에 위치한 이모 집에서 이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12월 28일 아침에 이모가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브로모셀처 탄산수를 마셨을 때도 코니시는 이모 곁에 있었다. 그녀는 바로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겨워 하다가 30분 만에 죽었다. 나중에 용기의 내용물을 분석했더니 사이안화수은이 42퍼센트 포함되어 있었다.
- 수은으로 저지른 살인 사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시인 토머스 오버베리(Thomas Overbury, 1581~1613년) 독살 사건이다. 오버베리는 네 차례의 독살 시도를 견뎌 냈으나 다섯 번째에 승홍이 함유된 관장제를 투여받고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과거에 수은 때문에 즉사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수은 함유 의약품을 복용한 뒤 심장이 멎어 죽는 등 수은에 유달리 민감한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버베리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오버베리는 최소한 한 번 이상 수은 치사량을 먹고도 이겨냈고, 수은이 조금씩 첨가된 식사를 여러 차례 먹었다. 1613년 4월 21일, 토머스 오버베리 경은 제임스 1세 왕의 명령에 따라 런던탑에 구금되었다. 왕의 '총신'인 로버트 카(Robert Carr)의 막역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일설에 따르면 세 남자 모두 동성애 성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왕과 카, 카와 오버베리 사이에 성적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왕과 카는 이성애 관계도 맺을 수 있었고 둘 다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다만 오버베리가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료가 없다.
- 토머스 오버베리는 1581년에 글로스터셔의 버턴온더힐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그래머 스쿨(영국의 인문계 중등학교. - 옮긴이)에서 공부한 뒤 1595년 가을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 진학했다. 그는 1598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해 런던의 미들템플로 이사했다. 당시의 미들템플은 오늘날처럼 그저 변호사들의 회합 장소가 아니라 시인과 궁정 조신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오버베리는 산문과 시를 써서 자신의 생각을 공공연히 말하고는 했다. 왕은 왕비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왕비의 의심이 아주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헨리 왕자와 카는 프랜시스 하워드를 놓고 겨루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프랜시스와 왕자가 먼저 연애를 했으나 최근에 그녀가 카에게 마음을 빼앗겨다는 것이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오버베리는 프랜시스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카 대신 써 주기도 했다. 오버베리는 아마 그것이 순진한 연에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랜시스는 이미 결혼한 몸이고 당시는 이혼이 불가능한 시대였으므로 복잡한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프랜시스는 불가능을 이뤄내려 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내로 3년을 살고도 신방에 들지 않을 때는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프랜시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젊은 남편 에식스 백작을 피했고, 그가 강력하게 동침을 주장해도 어떻게 해서든 접근을 막았다. 프랜시스는 앤 터너(Ann Turner)라는 여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터너 부인은 어느 성공한 런던 의사의 아내로, 사교계에서 이름 난 인물이었다. 풀 먹인 노란 주름 깃에 대해 특허를 내고 이것을 당대 최고의 패션 액세서리로 유행시킨 여성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궁정 드레스 제조공이자 디자이너였지만, 마당발을 이용해 다른 일들도 처리해 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터너 부인은 프랜시스에게 유명 점성술사 '사이먼 포먼(Simon Forman)'을 소개했다.
- 포먼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했다고 한다. 1611년 9월 1일에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금부터 이레 뒤에 자신이 죽으리라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날 템스 강에서 배를 타젓던 중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 아직 프랜시스나 카가 살인범으로 지목될까봐 걱정할 시점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심각한 다른 문제가 움트고 있었다. 조지 빌리어스(George Villiers)라는 미청년이 왕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1614년에 빌리어스는 서서히 카를 몰아내고 총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18개월이 지난 1615년 6월, 오버베리 사건을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관장제를 집행했던 리브가 범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 11월 7일에는 터너 부인의 재판이 열렸다. 여기서 포먼의 흑마술이 공개되었다. 성교하는 인형 부적과 포먼이 유명인사들의 연애사를 꼼꼼히 기록해 둔 비밀 문서도 드러났다. (소문에 따르면 코크 판사의 아내 이름도 목록에 들어 있어서 판사가 이 문서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터너 부인은 11월 1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수형 집행인은 종이로 만든 노란 주름 장식을 목과 소매에 둘렀다. 터너 부인 자신이 유행시킨 패션이었다. 이런 조롱을 제안한 사람은 코크 판사였다고 한다. 11월 16일에는 엘웨스의 차례였다. 엘웨스도 유죄 선고를 받고 11월 20일에 타워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음은 독약을 공급했던 프랭클린 차례였다. 프랭클린은 11월 27일에 재판을 받고 12월 9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랜시스와 카의 재판은 5월 24일과 25일에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열렸다. 이미 1월에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 프랜시스는 재판에서 유죄를 시인했고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반면 무죄를 주장한 카에 대한 재판은 5월 25일 하루 내내 진행되었다. 카가 재판정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폭로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왕은 카의 양 옆에 두꺼운 망토를 든 남자들을 세워 여차하면 언제든 입을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사실 불필요한 조치였다. 기소를 맡은 것이 그 유능한 프랜시스 베이컨경이었던 것이다. 베이컨은 카의 입을 막을 필요조차 없도록 능란하게 고발을 진행했다.
- 로마의 작가 디오스코리데스(Dioscorides, 40~90년)는 <약물에 대해(De Materia Medica)>라는 책에서 주로 약초들을 사용한 많은 처방을 소개하면서 광물 종류도 조금 다루었는데, 천연 황화비소물인 웅황과 계관석도 언급했다. 디오스코리데스는 웅황을 아세니콘이라고 불렀고 "이상 증식", 즉 사마귀 등의 피부 발진을 억제하는 데 쓸모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빠지는 부작용이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계관석은 산다라체라 불렀고, "침에 불결한 물질이 섞여 나오는" 사람에게 추천했다. 로진(송진에서 테레빈유를 증류시키고 얻은 황갈색의 천연수지. - 옮긴이)과 섞어 가열한 뒤 거기서 피어나는 연기를 마시면 기침이나 천식이 치료된다고 했다.
- 영국, 파키스탄, 인도에서도 민간요법의 재료에서 최대 100밀리그램의 삼산화비소가 검출되었다. (황화수은도 들어 있었다.) 1975년에 싱가포르에서도 비소 중독 사고가 발생했는데, 원인을 추적해 보니 삼산화비소 10퍼센트의 물질을 사용하는 전통 치료법 때문이었다.
- 비소를 소량 복용하는 것은 건강을 크게 해치지 않을 뿐더러 단기간은 오히려 유익한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실제로 강장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용천수에 비소가 들어 있는 경우도 많다. 아마 비소 때문에 강장 효과가 있을 터이다. 저 유명한 프랑스 비시 온천수도 비소 농도가 2피피엠 가까이 되고, 이보다 농도가 높은 곳도 많다. 하지만 통에 담겨 팔리는 요즘 광천수 제품에는 비소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 비소가 의학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8세기에 파울러 용액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1780년대에 영국 미들랜즈 지방의 스태퍼드 병원에서 일하던 토머스 파울러(Thomas Fowler)는 '토머스 윌슨의 오한, 발열용 무미(無味) 용액'이라는 특허 의약품의 성능에 감명을 받았다. 파울러는 병원 소속 약제사인 휴스와 함께 그 약을 분석해 유효 성분이 비소임을 알아냈다.
- 심지어 1개월 만에 궤양이 완전히 나았다. 이제 에를리히는 새 약물을 사람에게 주입해도 될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싸맸다. 아톡실로 인한 실명 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젊은 두 조수가 자원하고 나서서 에를리히의 시름을 덜어 주었고, 두 사람 모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에를리히는 여전히 주저했다. 그러던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재귀열이 발병하자 에를리히는 그곳의 의사 율리우스 이베르손(Julius Iverson)에게 606을 제공하기로 결심했다. 재귀열은 진드기를 통해 감염되는 열대성 질병이다. 이베르손은 55명의 환자에게 새 약물을 투여했고, 그중 51명이 주사 한 번에 완벽히 나았다고 보고했다. 곧 매독 환자에 대한 시험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4월 19일, 에를리히는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국제 의학 대회에서 새 약품을 공개했다. 에를리히는 606의 일반명을 아르스페나민이라 지었고, 이 물질은 살바르산이라는 상품명으로 시장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실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놀라운 소식이었다. 모두가 새 치료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예 에를리히 606 또는 606이라고 불렀다.
- 웅황 안료도 문제가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특히 응황의 밝은 노랑을 선호했으나, 모든 화가들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웅황에 덧칠을 하면 다른 물감의 색깔이 까맣게 변했기 때문이다. 특히 흰 납을 함께 쓸 경우 웅황 속 황이 납과 천천히 반응해 검은 황화납을 만들었다. 게다가 화가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단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 황화비소가 서서히 산화되어 노란색이 옅어지면서 흰색의 산화비소가 되었다. 또 산화가 진행되면 물감이 캔버스에서 떨어져 나오기도 했다.
- 1800년대 후반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벽지 디자이너가 등장했다.미술 공예 운동을 이끈 예술가들 중 하나로 실내 장식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년)였다. 모리스는 사회주의 신문 <커먼월(Commonweal)>을 직접 발행할 정도로 활동적인 좌파 운동가였다. 그러나 만인의 복지를 추구했던 그도 자신의 부가 잉글랜드 서부의 비참한 환경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잉글랜드 서부는 암석에 구리, 주석, 납이 풍부하게 묻혀 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발굴이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황화비소 철(FeAsS), 즉 유비철석도 많이 발견되었지만 대개 거추장스러운 물질로 여겨졌다. 구리나 주석에 비소가 섞이면 쉽게 부스러지기 때문이다. 광부들은 광석을 화로에서 배소시켜 비소를 제거했고, 삼산화비소가 되어 날아간 비소는 연통에 쌓였다. 광부들은 정기적으로 이것을 긁어내어 쓰레기 더미에 버렸다.
- 1950년대에는 로마의 미국 대사관에서 기이한 비소 중독 사건이 일어났다. 클레어 부스 루스(Clare Boothe Luce)라는 이탈리아 주재 미국 대사가 중독된 것이다. 그녀는 병 때문에 일을 그만둬야 했다. 그녀가 중독된 것은 분명하지만, 중독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소련의 사주를 받은 사람일까? 당시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세력이 막강했다. 사건의 반향이 클 수 있으므로 CIA는 로마로 조사단을 파견했고, 결국 비소의 공급원이 밝혀졌다. 대사가 침실로 쓰던 방은 예전에는 침실이 아니었는데, 천장 장식에 비소 염료가 사용되었다. 그러면 고지오 병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방 바로 위층에 놓인 세탁기가 바닥을 진동시키는 바람에 비소가 함유된 먼지가 대사의 방에 떠다니게 되었고, 기체가 아니라 그 먼지를 마심으로써 증상이 생긴 것이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년)는 마지막 유서에 이렇게 썼다. "영국의 과두 정치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나는 내 명을 다 못살고 가노라."
- 1990년대에 미국의 환경 운동가들은 식수의 비소 농도 기준을 50피피비에서 10피피비로 낮추자는 운동을 벌였다. 임기 말년의 클린턴 대통령이 먹는 물 안전법의 한 조항으로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환경 보호국은 2006년 1월부터 새 기준을 적용하기로 계획했다. 주로 미국 서부의 주민 1200만 명과 중서부와 북동부의 일부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변화였다. 하지만 뒤이어 취임한 부시 대통령이 2001년 3월에 결정을 번복했다. 환경론자들은 분노했지만 소규모 식수 회사들은 쾌재를 불렀다. 50피피비라는 기준은 1942년에 공중 위생국이 제정한 것이다. 지금은 틀린 생각으로 밝혀졌지만, 비소가 심장병의 원인이라는 생각에서 만든 기준이었다. 사실 비소를 제거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물을 알루미나(산화알루미늄)에 통과시키면 알루미늄이 비소를 흡수해 불용성 비소화알루미늄 염으로 침전한다. 문제는 그런 여과 시스템을 새로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 남은 것은 황제의 뒤를 이을 것이 분명한 황제의 아들 브리타니쿠스(Britaninicus)를 처치하고 황제를 설득해 네로를 그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말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앞당겼다.아그리피나는 54년에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했고, 네로는 약관 16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그리피나는 곧 아들의 애정을 잃었고, 59년에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독살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비소는 1679년에서 1680년 사이에 프랑스 루이 14세 궁정의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독물 사건'에도 등장한다. 온 유럽을 사로잡았던 그 사건은 미약, 마법, 요술, 비소 가루에 얽힌 이야기였다. 소란의 중심에는 라 부아쟁(La Voisi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카트린 드예 몽부아쟁(Catherine Deshayes Monvoisin)이 있었다. 명목상 산파였던 그녀는 비단상 겸 보석상인 남자와 결혼해 자녀 10명을 두었다. 남편이 파산해 직접 가족을 부양하게 된 라 부아쟁은 불법 낙태 시술, 악마의 의식 집전, 미약이나 독약 공급을 통해 돈을 벌었다. 그녀는 엄청나게 부유해져 1670년대에는 상류층들이 살던 파리 교외 빌뇌브 지역에 커다란 저택을 마련할 정도였다. 라 부아쟁은 1679년 3월에 여러 공범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680년 2월 22일에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 헤이든은 9월 10일 화요일에 매디슨 근처의 조합 교회 지하에서 벌어진 재판에 출두했다. 2주의 재판 끝에 그는 메리 스태나드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수많은 지지자들의 응원 속에 법정을떠났다. 하지만 이것은 성급한 판결이었다. 메리가 다량의 비소를 먹었다는 사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예일 의대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교수가 누락된 증거를 채워 넣었다. 교수가 비소의 존재를 확인하고, 메리가 죽은 날 목사가 미들타운에서 비소를 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목사에게 다시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10월 8일에 목사는 다시 체포되었다. 그리고1년 뒤에 다시 재판이 열렸다. 이때는 비소 검사를 위해서 메리의 사체가 두 번이나 발굴된 뒤였다. 헤이든 재판은 미국 전역에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렸다. 목사의 범행을 입증하는 법의학 증거는 수두룩했다. 질적으로도 당대의 평균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했다. 존슨 교수뿐만 아니라 동료 교수인 에드워드 다나(Edward Dana)도 검사 측증인으로 출두했다. 다나 교수는 심지어 비소 시료를 얻기 위해 영국까지 다녀왔다. 미국에서 시판되는 비소는 모두 영국 데본 합병 광업 회사의 생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나 교수가 굳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서로 다른 덩어리에서 나온 삼산화비소들을 구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는 광산에서 좋은 사실을 한 가지 더 배웠다. 비소 결정을 가루로 빻아 수출하더라도 여전히 덩어리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빻더라도 미세한 결정 모양은 유지되고, 그 모양이 덩어리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나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메리의 위에서 발견된 비소는 미들타운 약국에서 판매하는 비소와 같았고,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목사의 향신료 깡통 속 비소와는 달랐다. (누가 깡통에 다시 비소를 채워 넣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목사가 풀려났다 다시 체포되기까지의 2주 동안에 직접 어디선가 새로 비소를 사서 넣었을 수도 있다.) 교수는 서로 다른 비소 결정들을 출처를 가린 채 무작위로 보아도 정확히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다나 교수와 존슨 교수는 모든 시료에 대해 마시 검출법을 수행했고, 그 밖에도 추가로 2명의 교수가 메리의 장기에서 비소가 검출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 하지만 풍부하고 신선한 법의학 증거가 도리어 일을 그르쳤다. 목사의 변호사가 끊임없이 증거에 딴죽을 걸어 배심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바람에, 배심원들은 법의학 증거를 무시한 채 평결을 내린 것 같았다. 변호사는 심지어 메리의 위에서 발견된 다량의 비소는 목사를 모함하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넣어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체에서는 정말 많은 비소가 검출되었다. 간에서 23그레인(1,500밀리그램)이 추출되었는데, 위벽에서 흡수된 비소가 거의 전부 그곳에 축적되었을 것이다. 폐와 뇌에도 일부가 침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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