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토스카 리 / 조영학
원제 : The Line Between
출판 : 허블
출간 : 2022.01.19
이 도서는 동아시아로부터 제공받았음
<The Line Between>과 <A Single Light>를 묶어 <라인 비트윈> 시리즈로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독립된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다.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화려한 문체와 유머 포인트가 자칫 밋밋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장면들을 실감 나게 살려준다. 다른 작품들도 좀 더 찾아 읽을 생각이다.
이야기는 주로 22살의 윈터 로스라는 여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패턴 직물을 짜 나가듯 그녀를 중심으로 엮여나가는 씨줄과 날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렵게 만든다. 가볍게 스쳐 지나갔던 장면이 복선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미처 그런 의미인 줄 몰랐던 장면이 다시금 재조명되기도 한다.
사건은 크게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간다.
먼저 영구동토층에서 사육되던 만갈리차 돼지가 이상 증상을 보인다. 해당 돼지의 샘플을 구해 연구하던 한 대학생의 연구자료와 샘플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로도 약속을 깜빡하는 과장과 고대 씨앗을 발굴해내 복원하려는 씨앗 사냥꾼, 위험한 거래를 성사시키고자 하는 브로커들과 사태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연방 헬기들까지 소소하거나 커다란 사건들이 겹쳐진다.
7살 때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종교 기반 공동체 엔클라베에 들어간 이후, 그 세계 밖에 모르는 채로 살아왔던 윈터 로스.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사랑하는 언니 재클린과 조카 트룰리를 두고 혼자 외부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에는 엄청난 누명까지 쓰고 마는데... 그녀는 낯설고 두려운 외부 세계에서 누구를 믿을지, 믿는다는 행위를 해도 되는 것인지 두려워하며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인다. 이전에 자신이 믿어왔던, 더는 보이지 않는 기억들과 싸워가면서.
급성 조기치매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환자들로 인해 일상은 무너지고, 도시는 손쓸 수 없는 공황 상태로 빠져든다. 그나마 초기에 인구밀집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떠난 사람들만이 길 위를 흐르고 있지만 그나마도 연료가 떨어지기 전까지일 뿐이다. '도착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모든 곳은 '길 위'일 뿐이다. 안전한 장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은 존재하는가?
충분히 있을 법한 조각들이 맞물리며 벌어지는 거대한 감염의 비극과 참상. 현시대와 맞물리며 주인공의 감정들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온다. 특히나 <라인 비트윈 : 경계 위에 선 자>는 상당히 구조가 잘 짜인 소설이라고 느꼈다. 과거 회상과 현재를 오가는데도 긴박감을 놓치지 않는다.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라인 비트윈 - 경계의 선 자>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설정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료와 추위, 음식 등의 문제들이 부각된다. 맞물리는 사건들도 그 하나하나만 떼어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런 조각들이 모여서 어떤 그림이 나올 수 있는가? 저자가 책 속에서 제시하는 의문 역시 "적어도 아직까지는"이라는 단서가 붙은 듯 느껴져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서늘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윈터가 맞을 6개월 뒤의 세상도, 우리가 맞을 미래의 세상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진 -단 한 발만큼이라도 나아간- 현실이기를 바란다.
스포주의!!!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진정한 용기에 관해서였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그런 빛이 될 수 있기를.
프라이온 병 얘기는?
고대 바이러스가 독감 바이러스와 결합한다면서?
걱정하지 말자.
이건 소설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인적으로 좀 놀랐던 부분은 윈터가 줄리의 차를 가지고 떠나는 장면이었는데... 켄의 전화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상태에서 여분의 차를 확인하지 않고 -운전면허가 있는지도 의문인데- 바로 출발한다. 이는 나중에 켄의 상태에 대한 암시와 그것을 윈터가 알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두 배로 충격적으로 다가오는데... 사태의 위급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면, 그만큼 캐리어가 중요했고 재클린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었다는 걸로 이해해볼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작가 역시 이점을 의식했던 듯 후반부에 줄리와 로렌을 다시 등장시키지만, 아들들에 대한 부분도 크게 없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재등장의 의의는 이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 읽은 다음 그 의미를 깨달으며 '앗!' 싶었던 장면이 후추 그라인더를 주문하는 의대 교수였다. 그가 자신의 약속을 깜빡하고 아마존에서 쇼핑을 하게 되는 장면은, 일상적인 노교수의 건망증이 아니라 벨뷰 13 감염에 대한 복선이었다! 물론 그 장면을 나중에 다시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열린 관계성이다. 깨달은 다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 외에 6개월의 봉쇄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 이미 용품이 부족하다는 식의 표현도 의문이다. 전체 사건은 아직 6개월 전이지 않은가? 최초의 돼지 사건이 6월에 일어났고 노아가 시드니(미국)에 위치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봉쇄 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6개월을 대비해 물품을 채우기가 어렵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또 항체에 관해서도 추론은 가능하지만 상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자신의 차가 발각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가정하고 보관했다고 치더라도, 바이러스와 항체를 구분해서 처리했다는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결과를 확신할 수 있었는지도, 보관했는지도. 복선을 위한 장치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몇 번 다시 읽게 되었다.
저자의 가치관도 많이 녹아있는 소설이었다. 귀환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유독 강조되는 느낌이었는데, 이는 한국인보다는 미국인으로서의 저자가 드러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의무 복무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문화라고 들었다. 미국적 문화와 뉘앙스들이 더 많은 곳에 녹아있었겠지만 외국인으로 번역서를 읽는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아무래도 한정적일 것이다.
끝으로 노아, 셀레스트라는 이름들은 상당히 종교적이다. 저자가 묘사하는 종교 단체의 실상이나 조직 구성 등이 묘하게 현실적이라 더 몰입해서 읽게 되었는데, 엔클라베에서 나온 케스트럴이 노아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저자는 '진정한 자기희생의 실천이 가능한가'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래. 이 병은 프라이온 질환이야. 광우병과 같은. 조기치매가 너무 빠르기는 하지만. 하지만 ..." 그가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아니, 없어."
"하지만 뭐죠?"
"음, 프라이온은 일반 소독 기술로 파괴하지 못해. 내 생각에, 이론적으로, 벨뷰 13 환자 중에 프라이온이 있다면... 열세 명 모두 처치를 받았어. 모두 같은 수술실을 사용했다는 것도 이미 확인했고." 켄이 미간을 찡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샘플이 있다고 했지? 라벨도 붙어 있어?"
"예." 나는 플래시로 상자를 비추었다.
"나한테 읽어줄래?"
나는 용기와 슬라이드를 하나씩 들고 읽어주었다. 마지막이 진흙 덩어리가 담긴 봉투였다.
"돼지(수퇘지 2) 조직과 토양, 페어뱅크스, AK, PrP." 나는 봉투를 돌려 불빛을 비추었다. "이건 젖꼭지처럼 생겼어요."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PrP라고? 확실하지?"
"지금 보고 있는걸요."
"어디에서 왔다고?"
"매그너스는 암거래로 구했지만 USB 드라이브에 신청서가 있어요. 'UC 데이비스'라고 적혀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재키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리뷰자 주 : PrP는 Prion protein의 약자로 프라이온 단백질을 말한다. 또한 UC 데이비스 대학은 유전자 연구 및 바이러스 관련 연구가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국 내 대학 이미지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해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하겠다.)
- "하지만 오버레이크 수술 환자들이 모조리 진드기 감염일 리가 없지 않나요?"
"그야 모르지."
의학도 종교만큼이나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프랭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지도 오래다. 원인을 찾지 못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며 또 각오도 해야 한다. 한때는 그도 열정과 사명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했으나, 지금은 앤지의 눈 밑 주름을 보면서 쟤는 왜 저러고 사나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자빠졌다. 앤지도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미모를 희생했으리라.
"의과대 감염병 과장한테 들여다보라고 할걸 그랬나 봐요."
"오, 마침 첸 박사가 과장이요. 예전에 내 레지던트였으니까 당신이 원하면 불러줄 수 있어요." 프랭크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야 좋죠." 앤지가 점심을 남긴 채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얼마든지."
앤지가 떠나고 10분 후, 프랭크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최신 통화 내역을 스크롤해가며 이름들을 노려보았지만 퍼뜩 '이 사람이야!' 하는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메모장을 열어보았더니, 한 달 전에도 휴게실에 후추 그라인더가 필요하다고 적어놓았다. 아무래도 후추 그라인더 얘기겠지? 그는 아마존 앱을 열고 구형의 스테이크하우스 고급 모델을 검색했다.
- 난 장갑을 챙겨 지프에서 빠져나온 뒤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옥수수 창고 입구에 서서 눈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비스듬히 날리며 땅 위에 내려앉았다. 가만히 있으면 눈 내리는 소리도 들렸다. 다 타버린 별들이 마지막 빛을 발하듯 들릴락 말락 탓, 탓, 탓 소리를 내는 것이다. 어둠과 열려 있는 창고 문, 그리고 짙게 드리운 구름 덕에 소리는 더욱 커졌다.
- 난 체이스를 모른다. 아버지나 매그너스, 셰이보다도 모른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겉모습과 실제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를 만큼의 깊고 넓은 간극. 나는 지프 쪽으로 걸어갔다. 캐리어를 비롯한 소지품을 챙길 생각이었다.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으나 체이스와는 작별할 때가 된 것이다.
- "매그너스가 내내 한 얘기가 세상의 종말이야. 종말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지. 우리는 살아서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불타고 익사한다고. 맞아, 세상의 종말은 나한테 트라우마 같은 말이야. 그래서 포트콜린스에 가려는 거고, 필요하다면 걸어서라도 가야 해."
"탈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했겠군." 체이스가 술잔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래, 그래도 꿈은 꿨어. 무수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삶은 어떨까. 결국 내가 뭘 바라는지조차 모르겠던걸.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삶 같아. 목표가 있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어. 지금, 이 순간...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아. 재키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아냐, 기분 좋은 일 맞아." 그가 푸른 눈을 밝히며 대답했다. "고마워, 윈터 로스, 믿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아."
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재입대를 포기했을 때 나도 어쩔 줄을 몰랐거든. 잠깐 영화 세트 컨설팅 일을 했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어. 격투기를 한 것도 그래서지. 사실 와이오밍주에 가는 것도 그냥 이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니야. 상황을 파악하고 나 자신을 찾고 싶었어. 전기가 들어오고 세상이 다시 돌아갈 때면 뭔가 계획이 다시 생기려나 싶었지."
- 시카고에 살 때 엄마와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다. 가사 뜻은 몰랐지만 그냥 신나게 따라 부르는 게 좋았다. 재키는 후에 그 노래를 잊었다. 아무튼 기억에 없단다. 엄마가 내내 부른 데다 네 단어밖에 되지 않는 후렴을 따라 하고 또 따라 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지? 나는 그 반대로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쪽이다. 그런 걸 '귀벌레 earworm'라고 한다지만 내가 듣기엔 적절하지도 않고, 사실과도 다르다. 그보다는 플레이리스트에 가깝다. 좋든 싫든, 노래 한 곡이 뇌리에 박혀, 한 번에 몇 시간 또는 며칠씩 계속 반복되지 않는가. 귀벌레가 강박 장애와 관계있다는 사실은 불과 얼마 전에 알았다.
- 통념에 따르면 천국과 지옥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영원과 공간이라는 절대적 차원이.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 간극은 5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단 한걸음.
또는 신념의 전환.
(리뷰자 주 : 영원이라는 시간과 무한이라는 공간의 절대적 차원이.)
- 계기반을 보니 연료가 탱크의 4분의 1 정도에서 오르내렸다. 시드니까지 가기엔 연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노 젓는 배라도 있어야겠어.
(리뷰자 주 : 앞서 "그러니까 체이스가 노 젓는 배라도 되겠다는 얘기군."이라는 대사가 나왔었다. 또한 배는 노아와도 연결이 되는데, 이런 소소한 언어유희들이 곳곳에서 보여 즐거웠다.
- 아니, 그럴 리가 있었다. 2년 전이라면 난 그런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줄리가 보고 싶었다 해도 내 믿음은 그보다 더 컸으니까. 나는 여전히 내 주변에서 일어난 불행들을 나 자신의 이해 부족이나 잘못된 본성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 눈을 노려보는 진실과 마주하기보다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을 합리화하는 편이 훨씬 더 쉬웠다.
- 기자들이 직장동료, 이웃사람, 환자 가족들을 인터뷰했다. 다들 낙담하거나 두려워했으며, 어떻게든 회복하기를 기원했다. 기이한 행동을 촬영한 휴대폰 영상이 끊임없이 유튜브에 업로드되고, 은행 열매와 허브 소재의 뇌기능 보조제들이 매진되기도 했다. 그중 몇 개를 보여줬지만 줄리는 코웃음만 쳤다.
"치매와 멍청이는 분명히 다르단다."
말은 그랬지만 줄리도 경보 장치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모두 집에 있을 때도 끄지 않았다.
- "그럴 일 없어. 사례 대부분은 전파와 상관없는 것 같아. 환자들 설명에 따르면 한두 주 아프다가 혼란과 이상 행동 증세를 보이더군. 전파는 주로 바이러스성이고." 켄의 설명이었다.
"정말 조심해야 해. 마스크 절대 벗지 말고, 아예 방호복을 입고 살면 좋겠지만." 줄리는 여전히 걱정이 많았다.
"이봐, 여기서 의사가 누구야? 여보세요? 누구 내 방에서 자격증 본 사람 있나요? 거기에 '의사', '박사'라는 단어가 적혀 있을 텐데?" 켄의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 홈스쿨링 해도 돼?" 로렌이 물었다.
"한번 논의해 보자." 줄리가 대답했다.
"코 뚫어도 되지?"
"안 돼!" 이번에는 켄과 줄리가 합창을 했다.
- 재키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보면서 계속 이야기를 해나갔다. "네가 찾아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할 때였어... 난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 우리가 믿은 모든 것이 전부 거짓이라는 얘기가 되잖아. 차라리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어. 너도 미쳤고... 미안하다, 윈터."
"언니, 그러지 마.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다 알아." 내가 부드럽게 재키를 달랬다.
- "매그너스가 상담센터에 나타나 디모인 얘기를 꺼냈을 때, 난 너 때문이라고 직감했어. 나를 어르고 달래야 했겠지. 그런데 집에 돌아올 때까지 네 얘기는 꺼내지도 않더라. 그보다 뭔가를 새롭게 손에 넣겠다고 했어. 이번엔 씨앗이 아니라 300만 년 묵은 박테리아 종류였어. 이제 곧 거래를 할 거라면서."
"박테리아?" 신천국은 박테리아를 취급하지 않았다. 지구가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믿은 적도 없다.
"어떤 미친 러시아 과학자가 시베리아에서 냉동상태의 박테리아를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주사했다. 그 이후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나? 몇 달 전에 매그너스가 관련 기사를 읽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 ..."
- 물론 전에도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문득 이번이 제일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도중에 비명 지르기, 쌓아놓은 접시를 엔클라베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바깥세상의 맛을 볼 양으로 귀엽게 생긴 초심자에게 입 맞추기("신천국에 잘 왔어!") 따위는 예전에 해보았다. 나 자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적 욕망과 두려움의 고요한 태풍 속에 나 자신을 온전히 던져 넣고 싶었다.
- 재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재키의 손가락이 손목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주께선 내가 뭘 원하고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더구나. 물론 너한테도 묻지 않아. 그래도 우리한테는 그것뿐이야. 나한테도. 이 세상은 끔찍한 곳이야. 보자마자 알았어. 일주일에 사흘은 나가니까. 매그너스 말이 맞아. 종말이 다가오고 있어."
"만약 아니라면?" 내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재키가 다그쳤다. 그때 재키의 눈에서 보았다. 두려움.
그간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보았다.
잘못할까 봐 두렵고 잘할까 봐 두렵고 몰라서 두렵다. 미래가 두렵고 신도 두렵다.
나 자신마저 두렵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영혼이 영원히 지옥불에서 타는 건 아닐까? 두려움은 엔클라베와 매그너스의 설교 하나하나에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또 다른 두려움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가 믿고 삶을 의지했던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
주님은 실존하신다. 그건 믿을 수 있다. 재키, 트룰리, 그 둘을 향한 내 사랑도 진짜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다.
- 2016년, 시베리아 야말반도의 동토층이 녹으면서 탄저균이 풀려났다. 원인은 순록의 시체, 그 바람에 스무 명이 병원에 입원하고 소년 한 명과 순록 2,300마리가 죽었다. 2017년 5월, BBC 보도에 따르면, 북극권의 기온이 계속 올라갈 경우, 장기 동면중인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빙산에 잠재 중인 질병이 깨어나고 있다." BBC, 2017년, 5월 4일) 2017년 11월 6일, <애틀랜틱>에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인류 또는 인류의 조상에게 감염균이 [해빙 중인 영구동토층에] 존재한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감염 가능성이 있다."
- 러시아 과학자가 350만 년 전의 박테리아를 자신에게 주입했다는 얘기도 그 기사에 들어 있다. (현실은 정말 소설보다 드라마틱하다.) 2015년, 모스크바 주립대학 동토연구학과 과장이자, 화제의 과학자 아나톨리 브로치코프가 그 장본인이다. 시베리아의 영구동토층에서 발견한 '바실루스 F'라고 명명한 박테리아였다. 그 지역 사람들이 박테리아가 함유된 물을 마시고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였다. 주장에 따르면, 박사는 그 후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다.
- 이 책을 쓰는 현재 프라이온 병에 대한 검사는 없었다. 소설 속에서 켄이 말했듯, 사후에 뇌 조직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치료법도 없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프라이온을 연구하는 조직들이 있기는 하다.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프라이온 연구센터도 여기에 속한다.
- 2015년, 테드 코펠은 자신의 저서 <소등 Lights out>에서, 미국의 전력망에 대한 사이버 테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전 국토안보부 장관 재닛 나폴리타노도 당시 가능성을 80~90퍼센트 수준으로 보았다.) 냇지오 Natheo의 영화, <아메리칸 블랙아웃>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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