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보영] 천국보다 성스러운

일루젼 2022. 1. 2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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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보영 / 변영근
출판 : 알마 
출간 : 2019.03.28 


 

지금까지 읽어본 바, 김보영은 기획에 맞춘 프로젝트성 글에도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심사에 더 자주 등장하는 중견 작가시지만 보다 다양한 엔솔로지에서 단편들을 읽을 수 있다면 싶다. -앗. 그렇게 활동 중이신데 내가 모르는 건가?-

 

글의 핵심 주제를 교묘하게 비켜가는 내용이란 생각은 들지만, "밀키트가 세상을 구원하고 있다."

사실 스스로를 잘 돌보고 있는가 하면 썩 잘해내고 있지는 못하다. 매 끼니를 준비하는 일이 숙제처럼 부담스럽고, 가능하면 제공되는 식사를 활용하고자 한다. 일상을 일상답게 유지하며 운용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 해결해나가는 방법은 각자의 가치관과 선택에 달린 문제겠지만,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강압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일텐데- 개인적으로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최소한으로 간소하게 해결하려는 편이다. 한 편으로는 이것조차 못하면 노년의 삶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싶기도 하고, 이런 반복적인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설사 내가 해방된다고 해도 노동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기계와 로봇에게 이 천형 같은 부역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 것인가? 먹고사니즘이란 가장 중요하기에 기본권이 되었으면서도, 언제나 고단하다. 

 

신성과 비합리, 소수에 대해 함께 묶어 생각해보는 일은 신선하면서도 낯익었고, 기묘한 기분이었다.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주류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영원한 주류 또한 없었다. 합의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없기만을 -그것이 너무 sf적이라면- 최소화되기라도 하기를 바라본다. 

 

당장은, 이대로는 십 년 정도는 너끈히 걸릴 것 같은 내 책탑들부터 좀 어떻게.... 

 


 

- 부모님은 그저 그녀가 보통의 여자아이 같기만을 바랐다. 그들은 그것이 소박한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불가능한 꿈이다. 

 

- 그렇게 과한 뜻이 아니라 치자. 그래도 그녀는 삼십억 인구를 통계 내어 나온 평균값에 수렴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의 속성은 하나가 아니다. 키, 외모, 성격, 지능, 취미, 버릇, 운동신경, 밥을 먹는 방식이며 달리는 자세며 웃는 모습 등등 인간의 모든 속성을 따져 삼십억 인구의 평균치를 기록하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나 있겠는가.   

 

- 어쩌면 사람이 이토록 초라한가. 초월자로서의 능력도 지혜도 교양도 후광도 초능력도 거대함도 위엄도 없는 사람이, 신과 고작 단 하나의 닮은 점밖에 찾지 못한 하찮은 피조물이, 고작 그것 하나를 두고 신이 자신과 동류라는 확신에 젖어 말한다. 제 옆에 있는 가족더러 너는 그렇기에 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겠느냐고, 너는 나보다 열등하지 않느냐고, 받아들이고 나를 경애해달라고 애처롭게 눈을 빛내며.  

 

- "여러 번 해봤지만 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살해당했어. 가난을 택한 게 그나마 최선이었다고. 그것도 몇 년 못 버텼지."

"그리고 가난의 교리마저 남지 않았지. 저 휘황찬란한 신전들 좀 보라고."

 

- "세타θ도 데려가자. 이 근처에 살아."

그 말에 델타와 엡실론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하긴, 세타도 자격이 있지."

델타의 말에 엡실론은 혀를 차며 말했다. "걔가 우리 중 누구보다도 자격이 있어."

 

- "야, 넌 그래도 성별이라도 있으니 대충은 남아 있잖아. 여신 신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다못해 알파만 죽어라 모시는 곳에서도 말야. 날 봐, 난 삼위일체라고 박아놓고도 비중이 완전 공기라니까."

"우리 다 세타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엡실론의 말에 셋 모두 영희를 돌아보았다. 영희는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자각했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뿌려진 신의 파편인 넷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수염이 하얀 알파를 포함해, 자신을 포함해, 여기 이들이 모두 하나이자 전체이며 신의 각기 다른 면을 반영하는 신의 파편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신의 파편은 옥상에 있는 다섯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아래 군중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인간으로 태어난 무수한 신의 파편들이 자신의 신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루고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알파, 네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내 기록도 세상에 남아 있었겠지." 영희, 아니 세타가 입을 열었다.

한 마리 암늑대의 신으로서. 몇 개의 나라의 시조신으로서. 

"짐승과 자연에 대한 신앙이,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경이 말이야. 정말로 인류가 자연을 파괴하는 게 싫었다면 나를 남겨두었어야지. 짐승에 대한 신앙을 지워버렸으면서.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이니 신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생물이니 하는 오만을 불어넣었으면서. 넌 이제 와서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할 자격이 없어." 그 말에는 오메가와 델타와 엡실론도 할 말이 없는지 침묵했다.

"넌 신의 다양한 면 중에서 오직 너라는 파편 하나에 권위를 집중하기 위해 이 모든 비합리를 초래했어."

"바로 그 비합리." 알파는 턱을 괴고 말했다.

"인간이 비합리적이 되는 것 외에 저놈들을 사멸시킬 방법이 있겠어?"

"이 녀석, 말이 안 통한 지 한 사천 년은 됐다니까."

 

- "마지막 경고야, 알파. 지금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시간을 되돌리고 신계로 돌아가. 초월자는 자연에 개입하지 않아. 우리가 자연에 개입할 때 원칙은 단 하나야. 자연에 편입해 그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살아가는 것. 그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고 같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워가는 것. 우리들처럼 말야."

 

- 그 모든 과정마다 싸움이 있었다. 그 싸움이 끝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간단히 잊혀졌다. 모든 싸움마다 사람들은 세상이 신의 분노에 의한 심판으로 망할 것이며 세상의 질서가 다 무너질 것이라 했다. 하지만 신은 그 과정 어디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신의 분노를 말했던 이들은 유사 이래로 있었고 언제나 역사에 패배했다. 신의 의지는 언제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본인 자신이 신이기에 신을 소환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뿌려진 신의 파편이며 지상에 내려온 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는 정말 모든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이 도래할까. 지금 여기에 만연한 혐오, 가부장 질서, 종교적 신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가 아닌 먼 미래의 시공간을 상상해본다. 진보의 끝을. 모든 존재가 평등한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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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TV의 깜빡임 속에서 여생을 보낸다. 밤이면 TV를 켠 채 잠이 든다. 누가 끌라치면 그 기척에 깨어 다시 채널을 돌리다가 TV가 켜져 있는 것에 위안을 받으며 잠을 청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밥을 하지 않는다. 영희는 오늘따라 그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 퇴근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부엌에 들어온 참이었다. 그녀는 밖에서 일을 해야 한다. 누구도 그녀 대신 돈을 벌어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에서 밥을 해야 한다. 누구도 그녀 대신 밥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따라 그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 영희는 가끔 새 가정을 상상한다. 다정한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은 그녀의 고단함을 두 배로 혹은 세 배로 늘릴 것이다. 남편은 제 한 몸 건사할 돈밖에 벌어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밥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아무도 그녀의 아기에게 밥을 지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밥하는 일 따위는 대단치 않은 일이라 생각하기에 그녀가 얼마든지 쉽사리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 중 아무도 그 대단치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국에 간장을 풀며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 영희의 아버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는 오십 세에 은퇴했고 일을 하지 않은 지 올해로 십 년이 되었다. 그는 소박한 사람이라 삶에 그다지 바라는 것이 없다. 부귀영화도 좋은 집도 세계 일주도 원치 않는다. 단지 삼시 세끼 따듯한 밥과 된장국이 그의 방 앞에 놓이기를 바란다. 그는 이처럼 소시민적인 꿈을 이루기가 왜 이토록 고단한지 매일 의문한다. 어쩌면 강성주의자들이 젊은이들을 홀렸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이 뭔가 했거나 정부 차원에서 모종의 음모가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처럼 선량하고 무해한 사람이 이토록 구차하게 살 리가 있는가. 그의 아내는 그 대단찮은 노동을 참 힘들어했다. 참 게을러빠진 사람이었지. 남들 다 하는 일인데 뭐 그리 힘들다고. 평생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살았으면서 말이지.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밥하는 게 시원찮아졌다. 언제부터인가는 시들시들하며 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누가 내 밥을 해주느냐고 육성으로 말하며 울었다. 딸애는 새벽녘에 나갔다가 저녁에야 돌아온다. 한동안은 여동생이 와서 밥을 해주었고 또 한동안은 조카애들이 왔다. 하지만 다들 슬슬 발이 뜸해지더니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무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는 신세 한탄을 한다. 요새 세상이 어떻게 되어먹었기에 아내까지 잃은 불쌍한 늙은이 하나 돌볼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는 채널을 돌리며 구차함을 잊고자 한다. 그는 선한 사람이고 사는 게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다가도 고작 삼시 세끼 먹기가 왜 이리 서러운가 싶어 울화통이 터지곤 한다. 

 

- 그는 알지 못한다. 아주 간단히 그 구차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족에게서 괄시 대신 사랑을, 멸시 대신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족의 회복과 삶의 풍요가 그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잃어버린 모든 품위와 권위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쌀을 씻어 밥통에 넣고, 냄비에 국을 앉히기만 한다면.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기만 한다면. 빗자루를 들어 집을 쓸고 걸레질을 한다면. 하지만 그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의 비천함은 오직 그가 하루를 온전히 홀로 생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그의 구차함은 오로지 남이 지은 밥을 대가 없이 제 입에 쑤셔 넣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 주위는 천장이 돔 모양인 큰 홀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하얀 납골당에 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벽은 수천 개의 서랍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랍마다 이름과 함께 날짜 두 개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인 듯했다. 방은 온통 순백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이들도 모두 순백이었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창조주시여."

그들은 기쁜지, 슬픈지, 자기를 죽이고 싶은 건지 모를 목소리로 말했다. 

 

- "저희는 이 신전에서 계속 기다려왔습니다. 신께서 강림하시어 지혜의 말씀을 내려주시기를. 신께서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니..."

"아니, 잠깐만. 전능한 건 내가 아냐. 그야 인류의 집합체는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공지능도 만들고 반도체도 만들고 로켓도 만드니까. 하지만 나 같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보잘것없어. 특히 나처럼 회사의 부품 같은 사람은..."

"신은 하나이자 여럿이다.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 영희가 얼굴이 진흙을 잔뜩 묻히고 무릎이 다 까져 돌아오면 부모는 슬프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얘는 보통의 여자아이 같지 않아. 영희가 야생동물처럼 거리를 뛰어다니면 부모는 슬프게 말한다. 얘는 보통의 여자아이 같지 않아. 하지만 영희는 안다. 그녀가 짙게 화장하고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거리로 나서면 부모가 마찬가지로 슬프게 고개를 저으리라는 걸. 얘는 보통의 여자아이 같지 않아. 그녀의 부모는 불가능한 것을 바란다. 영희는 문제가 없는 아이였기에 어릴 때부터 깨닫는다. 자신이 일생 동안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의 부모가 불가능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설사 영희가 자신의 인생을 다 희생하고, 자신의 천성과 재능과 바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모가 꿈꾸는 '보통의 여자아이'라는 환상의 이상향에 기적적으로 자신을 맞추어낸다 한들, 그 일은 영희의 삶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을 것이다. 명예도 행복도 기쁨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일은 부모의 삶에도 아무것도 더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제 욕망을 위해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그 불가능한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일생을 슬퍼한다. 그녀는 오늘따라 이 모순에 대해 생각한다.

 

- "맞아. 잘못이야. 내가 현신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저 알파 녀석이 인류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채로 끝날 수 있었는데."

"현신은 나도 많이 했어, 오메가."

엡실론이 오메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다 일찌감치 살해당해서 그렇지. 그나마 남은 기록도 전부 지워졌고 말이야. 주로 저 알파의 이름으로."

"또한 내 이름으로."

 

- 절대자 신이 여성과 퀴어를 부정하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성평등을 성취한 그런 나중에 대해 말이다. 

 

- 어떤 주제에 맞추어 글을 쓴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 주제가 페미니즘이어서야.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바는 그 문제가 인류 역사를 아우른다는 것이며, 아직 이상적인 모델이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정도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SF의 영역이라는 것 또한 이해한다. 처음에 기획서를 받고 나는 육성으로 웃었다. 신앙과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를 함께 다루라니, 나더러 죽으란 소린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획자가 던진 질문, "내게는 신앙이 있는데 내 생각에 신은 여혐을 한다. 신앙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말에 흥미가 돋았다. 그러게. 신앙은 절대성을 갖고 있다. 절대성을 갖고 있기에 역사를 따라 변하지 못하고 낡은 시대의 교리를 새 시대에 강요한다. 그리고 언제나 존재한다. 만약 절대자가 차별주의자라면, 우리는 그 절대성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습니다. 그 신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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