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우사미 마코토] 어리석은 자의 독

일루젼 2022. 1. 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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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우사미 마코토 / 이연승

원제 : 愚者の毒
출판 : 블루홀식스 
출간 :  2020.12.24


 

재미있다는 추천을 받아 읽었는데,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묘미도 있었지만 사건과 트릭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게 되었다. 보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전부 알 수는 없다고 하지만, 본질이란 어떻게 해도 드러나기 마련인 것 같기도 하다. 

 

2015년이라는 가까운 현재와 1985년이라는 조금 먼 시점을 오가는 이야기는 생년월일도 같고 성도 비슷한 두 여성의 우연한 만남이 시발점이었다. 동시대를 산다는 공통점 외에는 모든 것이 다른 것 같았던 두 사람. 나는 기미에게서 자꾸만 신여성 윤심덕을 겹쳐보게 되었는데, 아마 기미가 뮤지컬 <사의 찬미> 중 윤심덕의 대사와 비슷한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85년대의 일본에 대한 묘사는 경제가 급성장하던 시기의 한국과도 유사하다. 지식층과 노동층의 분리와 경제 발전을 위해 스러져간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동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들, 탄광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들이 어우러져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전 작품들과는 결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전 작품들이 더 취향일 것 같지만 한국에 소개된 것은 최근 작품들인 듯해서 아쉽다.

 

트릭에 대한 복선과 힌트는 충실하게 제공하고, 서사도 촘촘하게 잘 쌓았다. 하나의 사건에도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을 수 있음도 보여주었고, 마지막 부분은 대부분의 이들이 짐작했던 것을 확인시켜주며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음, 그리고, 2부에서 크게 한 방 맞긴 했지만 약간은 억울하다. 작가가 사용한 방법은 편법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화자의 교체라는 익숙한 방법을 이런 형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즐겁게 읽었다. 

 


   

- 야외 자리에 앉자 안뜰에 있는 벚나무가 보였다. 꽃이 진 벚나무다. 벚꽃 만개 시기가 지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올해는 벚꽃을 구경할 여유도 없었다.  

 

- 난 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식후 블랙커피를 마시는 기미에게 약간 흥미가 동했다. 그리고 이런 감정 역시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느끼는 것. 기미는 상당히 똑 부러진 여자처럼 보인다. 전에는 그런 모습을 '세련됐다'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노련하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았다.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기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와 다쓰야를 번갈아 봤다.   

 

- 책을 읽는 유키오 씨의 옆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키가 크고 마른 그가 허리를 약간 숙인 자세로 열심히 책에 적힌 글자를 읽는 모습을 이따금 넋을 잃고 구경했다. 그의 오른쪽 눈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상처에 눈길이 갔다. 부드러운 피부 위에 새겨진 또렷한 상처는 요철이 되어 일종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깊은 사고와 근심, 괴로움, 자제심. 그는 금욕적인 수행자를 연상시켰다.   

 

- "아, 이거." 나는 고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길 지나가면 오래 살 수 있는 거지?"
신고이와에 있는 작은 신사의 여름 축제 때 고리를 지나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쓰야의 손을 잡아끌고 고리를 지났다.
"8자 모양으로 돌아야 좋대." 고리를 들락날락하는 우리를 기미는 석조 등롱에 몸을 기댄 채 바라봤다. "기미도 같이 하자."
내가 권하자 기미는 팔짱을 끼고 "난 괜찮아"라고 했다. "별로 오래 살고 싶지 않거든." 

(리뷰자 주 : 문득 윤심덕이 떠올랐다.)

- 깜짝 놀라 돌아봤다. 기미의 눈동자가 검은 그림자에 잠식된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 기미는 이런 눈빛을 보일 때가 있었다. 슬픔과 분노, 또는 아픔으로도 읽히는 우울감을 담은 눈빛인데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메었다. 기미가 일종의 각오 같은 걸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가늠되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죽음을 앞둔 동물이 운명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결연한 듯하면서도 처절한 감정 같았다. 어느 누구도 그 각오에 침범하지 못하게 선을 확실히 긋는 느낌이었다.  

-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무엇이 초래했을까. 어쩌면 사진을 찍은 이 순간에 이미 모든 것이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우리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저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질서를 따라 움직였을 뿐일까.  

 

- "많은 것을 직접 보고 들어야 합니다. 다쓰야 씨. 이 세상은 아주 넓으니까요." 선생은 이야기를 대략 마치고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핵심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확고한 의지와 그것을 떠받치는 지식을 통해 진리를 꿰뚫어 보는 시각을 지니십시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좌우돼서는 안 됩니다." 

 

- "알겠죠? 이런 말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것을 어중간하게 아는 것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다. 다른 사람의 견해에 편승해 현자가 될 바에는 오직 나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어리석은 자로 있는 것이 낫다.
니체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이런 어려운 말을 이해할 것 같지 않았지만 다쓰야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선생이 자상하게 뿌려 주는 지식의 빗방울을 말없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 아이는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걸 몹시 좋아했다. 

- 조금 더 공부해서 똑똑해지고 싶었다. 적어도 나 자신을 지킬 정도로는. 대학에 입학한 내 모습을 꿈꿨다. 캠핑카 부대 여대생과 운명이 뒤바뀌는 꿈, 제대로 된 가정에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며 노력만 하면 그에 걸맞은 미래가 보장되는 꿈, 피와 오물로 뒤 범벅된 무거운 고무 앞치마를 입은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꿈이었다.  

 

- "논짱은 대단하네. 집안일도 잘하고, 힘들지 않아?"
나는 교코 씨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와 나이 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을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 캠핑카 부대에 참가하고 가난한 지쿠호 지방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학습 지도와 생활 개선을 돕는 그녀가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느꼈다. 또 하나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이 '집안일' 정도로 보이는 사람,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절대 가지 못할 세상에 사는 사람, 자신이 사는 세상과 이곳이 서로 연결돼 있고 이런 어중간한 활동으로도 어떻게든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순수하게 믿는, 상냥하고 귀여우면서도 잔인한 사람.  

 

- 파도 소리가 들린다.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들리는 소리, 단조롭고 풍요로운 태고로부터의 반복.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쓰야가 내가 사준 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처럼. 

 

- 브로치에 새겨진 꽃 이름을 떠올렸다. 무사시노키스게. 예로부터 무사시노 일대에서 볼 수 있다는 황등색 꽃이다. 4월에서 5월 사이에 피는 이 꽃의 실물을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요코 부인이 어렸을 적에는 진다이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후추시 센겐야마 공원에서만 자생한다고 했다. 정중하게 새겨진 여섯 장의 꽃잎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쓸었다.   

 

- "까마귀는 인간보다 시각이 예민하죠. 적외선 영역까지 감지하는 시세포가 있어서요. 사람의 눈에는 일곱 가지 색으로 보이는 무지개가 까마귀에게는 열네 가지 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 "그건 까마귀가 노란색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적외선을 차단하는 특수한 안료를 넣기 쉬운 색이 노란색이라서입니다. 적외선을 차단하는 안료를 넣으면 까마귀는 쓰레기 봉지 안에 먹을 게 있는지 알아보지 못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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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다. 이즈반도 시모다에 위치한 초고급 유로 노인 요양원, 그 이름하여 '라이프리치 유즈키'. 작년에 원인 불명의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라는 병을 얻었다. 위쪽 대퇴골두 일부의 혈류 흐름이 원활치 않아서 괴사 중이라고 했다. 치료는 수술이 일반적이지만 아직 괴사가 그다지 진행되지 않았고 통증도 별로 없어서 보존 요법으로 상태를 지켜보고 있다. 다만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오래 걷는 것은 금물이고 몸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팡이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병의 진행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으니 나중에 수술은 해야 할 것이다. 이전처럼 도쿄에 있는 아파트에서 그대로 살아도 큰 지장은 없었다. 원래 나는 그리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병을 얻음으로써 노후를 걱정하게 됐고 결국 남편에게 부탁해 이곳에 입주하게 됐다. 자식이 없는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고 방 크기도 부부가 함께 살아도 될 만큼 넓다. 모든 방에 작은 부엌이 딸렸고 욕실에서는 온천물도 나온다. 인터폰을 들면 곧장 직원이 달려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가 생활을 즐길 수도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더없이 쾌적한 시설이다.   

 

- 또렷한 이목구비, 완벽한 달걀형 얼굴과 하얀 피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 자기 생각을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외모다. 복장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법 값나가는 것들을 걸쳤음을 알 수 있었다. 색 바랜 내 맨투맨 티셔츠 소매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이시카와 씨는 테이블 위에서 팔꿈치를 괴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야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억지로 웃음을 참는 표정이다. 나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 내가 이런 제안에 응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다. 이제는 넌더리가 난 것이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상황에. 의지할 가족과 친척이 없고 지인들과도 소원해진 채 매일매일 걱정만 하는 삶. 만약 일을 구해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다고 해도 나와 다쓰야의 삶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파탄 난 가정의 생존자다운 우울한 미래만이 보장됐다. 예쁘고 싹싹한 기미와의 만남은 기미처럼 삶을 즐겼던 예전의 나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그는 휴일에 집에 있으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오른쪽 눈 바로 옆에 오래돼 보이는 흉터가 있는데 고개를 숙이면 유독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듯한 험한 상처는 성품이 온화한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저택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평소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선생과 달리 과묵하고 왠지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이따금 거실에 있는데 알아채지 못해서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산속에서 파란 하늘을 비추며 조용히 드리워져 있는 호숫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어필할 만한 강렬한 개성은 없었다. 색과 향기가 없다고 해야 할까. 집에 있는 모습은 중견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사가 조심스럽고 소박했다.  

- 그래도 조금씩 함께하는 시간이 늘자 그런 면모가 좋아 보였다. 가장 큰 이유는 평소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고치 안에 틀어박힌 다쓰야가 유키오 씨 앞에서는 유독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키오 씨도 갑작스럽게 집에 나타난 어린아이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도 않고 그저 자연물로서 가만히 옆에 두는 느낌이었다.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데도 책을 읽는 유키오 씨의 다리 옆에서 다쓰야가 바닥에 앉아 정원에서 가져온 둥근 돌멩이를 나란히 늘어놓고 있을 때도 있었다.   

 

- 일대는 언덕과 벼랑이 있고 벼랑 아랫부분부터 급격히 저지대가 되는 지형이다. 그리고 벼랑 아래에는 계곡이 흐른다. 무사시노의 고지대에 스며든 물이 벼랑 아래에서 솟구쳐 흐름을 만드는데 그것이 모여 작은 계곡을 이뤄 다마 강으로 흘러간다. 벼랑 아래에 있는 주택가에는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드문드문하게 있다. 무사시노의 대명사인 잡목림이다. 이 일대에서 으뜸가는 성산은 진다이지 성터가 있는 언덕이지만 그쪽은 천태종인 진다이지 사찰과 진다이 식물 공원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고 북적거렸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 위 난바 저택은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였다.  

 

- 기미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했다. 고용주인 가토 변호사를 따라와서는 그를 내버려 두고 우리와 함께 산책을 즐겼다. 주 고객인 유키오 씨의 의뢰로 가토 변호사는 기미를 고용해야 했으니 따로 맡은 일 없이 그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미는 그런 삶에 만족하는 스스로에게 불만을 품고 이직을 생각한 걸까.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기미는 유키오 씨를 '유키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후지와라 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위세 있는 난바 집안의 정식 후계자를 스스럼없이 부르는 기미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미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유키오는 사람 대하는 게 서툴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다는 게 맞아" 라든지 "유키오는 무뚝뚝하지만 너희가 오고 나서 안심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태연하게 했다.  

- 후지와라 씨가 사라지자 이제는 거리낄 게 없는지 기미는 저택에 더 자주 찾아왔다. 부엌에 가서 직접 커피도 끓여 마셨다. 유키오 씨와 집 안에서 마주칠 기회도 많아졌지만 그때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소원해 보였다. 물론 기미가 유키오 씨를 '유키오'라고 부르는 건 아주 자연스러웠고 특별히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유키오 씨는 먼저 기미를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꼭 불러야 할 때는 '기미' 하고 이름으로 불렀다.  

- 기미는 이곳 조후시에만 오면 뭔가 나른해진다면서도 여기 오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기미는 함부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 같지 않지만 배려심이 깊다. 또 무엇이든 미련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묘한 집착을 보일 때가 있었다. 직업소개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인상 그대로 종종 남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나와 다쓰야에게는 따뜻하게 대해 줬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는 않고 관심이 없는 상대에게는 냉정할 정도로 무심했다. 그렇게 기미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 기미 같은 사람은 수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미는 다른 사람과 어디를 가거나 뭘 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난바 저택에 온 이후부터는 이직 활동에 대한 언급도 끊겼다. 기미는 평소 유행하는 옷은 입지 않았다. 당시에는 각선미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가 많았고 또 모두가 레이어 커트 머리에 핀힐이 달린 펌프스를 신었다. 항상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하는 그들의 빈틈없는 패션은 보기에도 답답하고 획일적이고 개성 없어 보였다.  

 

- 반면 기미는 항상 자신만의 시크한 느낌의 값비싼 옷을 걸치고 다녔다. 유행에는 등을 돌린 채 늘 자기가 입고 싶은 옷만 입었다. 기미의 그런 대범한 모습이 부러웠다. 차분한 색조와 자연스러운 코디는 전부 계산된 것처럼 보였는데 그 모든 게 좋은 조화를 이뤄 기미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했다. 나는 기미를 만날 때마다 매번 놀라는 동시에 반했다. 비록 얼굴에는 손을 댔다고 해도. 그러고 보니 기미가 성형수술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제는 사이가 꽤 돈독해진 것 같지만 기미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타고난 얼굴을 바꾸는 건 중대한 일처럼 느껴지는데 기미에게는 꼭 그렇지도 않은 걸까. 그저 충동적인 선택이었을까. 이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가끔 보이는 기미의 변덕스러운 감정과 성격에 휘둘렸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서 골탕을 먹는, 그런 느낌이었다. 

- 기미가 태어난 곳은 군마현의 마에바시시라고 했다. '아사히 단골손님 중에서도 거기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개인 건축 사무소를 운영하는 남자의 부인이었는데 도쿄에 처음 시집왔을 때 말에 이상한 억양이 도드라지지는 않을까 신경 쓰여서 좀처럼 대화에 끼지 못했다'고 했다. 기미와 유키오 씨가 이따금 대화를 주고받을 때 사투리 억양이 조금이라도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했다. 마치 아나운서가 말하는 것 같았고 내가 아는 서민 동네 출신 사람들의 말투와도 달랐다. 기타간토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두 사람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가슴속에서 고개를 들기도 했다.  

- "네 말이 사실이었어. 그거, 한번 시작하니 멈출 수 없더라. 지금은 손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야." 기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기미와 이런 잡담을 나누는 상황이 즐거웠다. 이렇다 할 특징 없는 일상이 애달플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속을 터놓을 친구가 있는 것이 이토록 인간의 마음을 풍요롭고 따스하게 만드는 걸까. 유키오 씨를 향한 마음을 보상받지 못해도 나는 이미 충만했다.  

- 선생은 아마 16년이 지나도 주인은 바뀔지언정 성산 위 저택이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충격적인 사고 이후 남편은 도심지에 있는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했다. 우리가 결혼할 무렵에는 저택이 철거됐고 성산은 통째로 도에 기부됐다. 지금은 무사시노의 흔적만을 남긴 자연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날 이후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청명하게 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 작은 새들의 지저귐 소리, 아름다운 들꽃, 귀를 찌르는 매미 울음소리, 공터에서 장작을 태우는 연기, 붉게 물든 나무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낙엽, 눈 내리는 고요한 겨울 아침 , 토끼 발자국 등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맑게 흐르는 노가와 강. 그 물줄기를 따라 우리는 '하케의 길'을 얼마나 걸었던가.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던가. 비록 중요한 속내는 숨기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확실히 통했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 "그러나 저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다른 흥신소에 재조사를 의뢰했습니다."
나는 말없이 선생의 얼굴을 봤다. 의외로 신중하고 빈틈없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선생의 뜻밖의 일면을 본 느낌이었다. 
 

- "누구든 괜찮았던 건 아닙니다. 유키오 씨니까, 그 유키오 씨니까 그랬던 겁니다."
선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선생은 1년이 약간 안 되는 시간 동안 유키오 씨와 교류하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렸다. 허술한 조사 때문에 잘못 이곳에 오게 된 사람이 그 유키오 씨가 아니었다면 선생은 부인의 사후 그를 어떻게든 쫓아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죠. 부모 자식 사이는 꼭 하늘이 내려 준 것도 아니고 기성품 같은 관계로 괜찮다는 겁니다."

- "유키오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하코 씨도 이미 파악했겠죠. 그 사람은 말이죠, 뭐랄까..." 선생은 허공을 보며 신중히 말을 골랐다.

"무색무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상대에게 이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거나 하는 게 전혀 없지요."
6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선생은 정확하게 그의 윤곽을 포착했다. 

 

-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서. 그게,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어쩔 수 없이 숨길 수밖에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가토 변호사의 말이 맞았다. 이런 일은 우선 선생과 유키오 씨 앞에서 솔직히 털어놓고 사죄해야 한다. 가토 변호사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유키오 씨는 분명 실망할 것이다. 선생은 당황한 나머지 한숨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가토 변호사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포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늘게 뻗은 하얀 손가락, 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손이라고 어렴풋이 떠올렸다.  

 

- 저녁 식사 자리의 이야깃거리(라고 해도 선생이 일방적으로 다쓰야에게 말을 걸었지만)는 숲에서 발견한 까마귀 둥지 이야기부터 시작해 돌의 종류, 흙 속에 사는 미생물, 나무뿌리를 흐르는 수액, 별의 움직임, 산골짜기에서만 볼 수 있는 너구리와 흰코사향고양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다쓰야는 눈을 반짝이며 선생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유키오 씨는 요즘 바쁜지 저녁 식사자리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 "이런 말을 한 연구자가 있습니다. '생명을 빼앗는 독과 생명을 구하는 약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리뷰자 주 : "The dose makes the poison."

"All things are poison, and nothing is without poison; the dosage alone makes it so a thing is not a poison.")

 

- 시선을 붙박이 책장 쪽으로 돌렸다. 주변을 둘러본다. 한 번, 두 번, 그러고서 깨달았다. 선생이 세상을 떴을 때 이곳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책장 속 책이 꽂힌 순서가 달라져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청소하려고 이 방에 들어오는 나는 막연하지만 책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누가 책을 바꿔 꽂았을까. 물론 선생일 것이다. 아니, 선생밖에 없다. 하지만, 과자를 도감 사이에 넣으려고 책을 바꿔 꽂았다? 설마. 책을 소중히 다루던 선생이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은 평소에도 책이 꽂힌 위치를 늘 기억하며 신경을 기울였다. 내가 먼지떨이로 먼지를 털면서 나도 모르게 책을 다른 곳에 꽂았을 때는 곧 제자리에 다시 돌려 두었다. 자신만의 규칙 때문에 이렇게 꽂아 둔다고도 했다. 지금 다시 보니 책이 꽂힌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순서도 그렇지만 책등이 울퉁불퉁한 것을 보아 그야말로 거칠게 책을 마구 꽂은 듯했다.  

 

- 문이 꽉 닫힌 광산은 이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고 갱구 안에서 땅에 찰싹 달라붙어 일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가 굽고 눈이 침침해진 상태로 허물어져 가는 집 안에 드러누운 채 생활하고 있다. 아내와 자식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쥐꼬리만 한 생계 급여와 고리대금에 삶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버력산에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다. 갱구 옆에 지금도 있는 선탄기는 오래전에 고장 나 벌겋게 녹슬어 있다. 이 황량한 풍경을 다키모토 씨는 사진에 담아서 어디에 공개할 생각일까. <지쿠호의 비가>를 본 사람들은 "오,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군" 하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키모토 씨와 껍데기는 지금은 우리 안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런 것도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져 아무렇지도 않았다.  

 

- 여학생이 호감을 품은 껍데기는 이곳에 속하지 않은 껍데기다. 만약 두 사람이 맺어진다면 원래 자신들이 속해 있던 사회로 돌아갈 것이다.  

      

-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껍데기를 만나러 왔던 여대생이 떠올랐다. 나는 왜 그 사람과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운명 같은 단어로 매듭짓기에는 너무 큰 격차였다. 여기서 일하는 젊은 여자들마저 나와는 거리가 있었다. 공장 오후 휴식 시간에 그녀들은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고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것을 엿들었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니 함께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었다. 그녀들이 듣는 건 '그룹 사운즈'라는 남자 밴드의 음악이라고 했다. 유우를 만나면 늘 "오늘은 학교에서 뭐 배웠노?"라고 물었다. 나는 먹을 것보다 지식에 더 굶주려 있었다. 

 

-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 너머로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석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져서 밤의 장막이 내려올 때쯤에 나는 비로소 이 세상의 구조를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은 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경제 발전의 혜택을 받아 점점 좋아지는 세상. 올림픽이 열리고 고속도로가 건설되며 열심히 일할수록 돈을 벌어 작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 그러나 그 아래에는 매일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글자를 읽거나 쓰지도 못하는 세상의 주민들이 있다. 전체에서 보면 그런 세상의 최하층은 밑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존재를 알 기회가 있다고 해도 어차피 눈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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