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해연] 홍학의 자리

일루젼 2022. 1. 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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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해연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21.07.26 


 

와. 정말 신선했다. 그리고 된통 당했다. 

마지막에 당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하나씩 앞에서 쌓였던 것들이 모두 짜 맞춰지며 소름이 돋았다.

 

속도감도 좋았고, 긴장감이 엄청났다. 읽는 동안 긴장감을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몇 페이지씩 슬쩍 앞을 커닝하고 돌아와서야 읽기도 했다. 심리적인 것이든 환경적인 것이든 세부적인 묘사가 많은 편이었는데. 틀림없이 화자의 가치판단이 들어간 묘사인데도 화자의 심리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가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각 장면들이 꽤 섬세하게 떠올라 소설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 그렇게 실컷 읽었는데... 마지막 몇 장이 남았을 때 이제껏 그려온 그림들이 송두리채 부서지고 새롭게 그려지는 기분이란. 엄청난 쿠키 영상을 보고 본편이 완전히 재해석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근래 추리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반전이었다.   

 

또 한 가지 꼽자면 표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이건 실물을 직접 보고 만져보셔야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다. 겉표지 안쪽에 붉게 드러난 부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가장 큰 힌트이기도 하다.

 

<홍학의 자리>.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다. 추천.   

 


   

- 그동안은 어떻게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니 끝을 모르고 일이 넘어온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한계다. 문제가 생기면 교감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준후는 인간의 방심을 믿었다. 익숙해진 상황에서 인간은 방심한다. 매일매일 같은 일상은 확인하지 않아도 계속 이어질 거라고 믿기 마련이다.

 

- "술 마셨어? 선생님들이랑 회식 있었나 보네?"
영주의 목소리는 평소에 듣던 것보다 한 톤이 높았다. 그는 영주를 응시했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학교에 다녀온 차림새도 아니다. 관심 없었던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려니 제대로 된 말이 나올 리가 없다. 별로 상관은 없었다.

 

- 교감의 말과 동시에 조미란의 딱딱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준후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준후가 이 학교에 출근한 이후로 조미란은 단 한 번도 지각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프거나, 집안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등의 개인적인 일로 일상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조미란은 그런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늦는다고 하니 순수하게 궁금증이 들었다.

 

- 그런 아이라면 대부분의 선생들은 금세 눈치챈다. 모르는 것 같지만 모르는 척할 뿐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스릴러는 경고입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했던 대답이다. 스릴러가 나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진심이었다. 스릴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경고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겪은 어린 시절의 행복이 그 사람을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지보다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 어떻게 이 사회를 파괴하는 끔찍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고 경고하는 것이 스릴러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이번의 경고는 인정 욕구였다. 

-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변질되었을 때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많은 일을 통해 배웠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던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고, 자신을 무시한다며 이웃 주민에게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가.
그 인정에 중독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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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을 들어 액정 화면을 확인하는 준후의 입가에 생기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나쁜 짓 하자.]
다현이다. 글자 속에서 다현의 통통 튀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무는 준후의 입안에서 침이 고였다.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까. 준후는 다현만큼이나 위트 있는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 벽에는 나무로 짠 침상이 있었다. 당직 전담원은 취침 시간이 따로 없지만 밤의 학교에서 할 일은 많지 않다. 경비를 서다 피곤하면 한 번씩 허리를 펼 만한 공간도 있어야 했다. 공식적으로 침대를 사줄 수는 없지만 알아서 자리를 마련해놓는 것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학교 측에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부분이다. 준후는 나무 침상에 걸터앉았다. 

 

- "웬일로 청소를 열심히 했나 봐? 화장실에 물때도 없고, 은근히 성실한데? 내가 가르쳐준 대로 했어? 배수구 뚜껑 열고 안까지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고 했잖아. 당신 천식기에 비염까지 있으니까 청소를 잘해야 한다구." 
 

- "말씀 좀 물을게요."
경비원이 허리를 들고 그를 보았다. 무뚝뚝한 표정 속에 불편함이 드러났다. 아무리 봐도 외부인이니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전혀 모르는 타인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생각해보면 기이한 형태다. 그러므로 거기서 일하고 있는 경비원은 항상 입조심을 해야 한다고 관리 사무소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괜한 말을 전하다가 입주민 간에 싸움이 생기거나, 입주민을 곤란하게 해서 항의를 받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사를 할 때도 익히 봐왔던 경계심이다. 

 

-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것은 강치수였다. 김준후의 눈에 띄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경비원 역시 아파트 한복판에서 형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곧장 자신의 휴게 공간으로 가자며 안내했다. 휴게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휴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시멘트 벽과 천장에 그대로 노출된 배관들은 흉물스러웠다. 바로 위에 안락한 가정들이 있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이거야말로 호수 아래 백조의 발이 아닌가. 백조의 우아한 모습을 받치고 있는 것은 물아래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발이다.

 

- "그거 아십니까? 홍학은 동성애가 굉장히 많이 발견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수컷과 암컷이 새끼를 낳으면 다른 수컷이 암컷을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수컷과 수컷 사이에서 큰 새끼는 더욱 강하게 크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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