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조너선 D. 스펜스 /주원준
원제 :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출판 : 이산
출간 : 1999.08.03
다른 책에 참고 문헌으로 인용된 것을 보고 구해 읽어보았는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책이었다. 기억술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마테오 리치'라는 한 인물이 중국으로 전도를 가서 보고 겪은 일들을 4개의 문자와 연결되는 4개의 성화를 중심으로 풀어낸 일종의 전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회는 곧 제수이스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향으로 낸 문을 들어서면 동남 귀퉁이에 싸우고 있는 두 전사(武), 동북 귀퉁이에 서쪽에서 온 여인(要), 북서 귀퉁이에 추수하는 농부(利), 서남 귀퉁이에 아이를 안은 하녀(好)의 네 이미지가 서 있다. 이 네 글자는 각각 리치가 중국에서 펴낸 <복음서>의 네 성화와 대응된다.
예수회는 전도를 중요하게 여기며, 현지에 녹아들어 접근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치 또한 중국에서 수염을 밀고 승복을 입었다가, 승려가 낮은 사회적 지위를 지님을 깨닫고 다시 유학자의 모습을 취한다. 당대의 승려 및 학자들과 교류하며 전도를 위해 고군분투한 한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니 처음 알게되는 지식들도 많아 흥미로웠고, 또 낯익은 인물들의 등장이 반갑기도 했다.
다만 애초에 기대했던 기억술 자체에 대한 내용은 깊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었다.
- 1596년,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에게 기억의 궁전 짓는 법을 가르쳤다. 궁전의 규모는 기억해 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상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싶다면 크고 작은 다양한 건물이 수백 개나 달린 대궁전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리치는 비록 단번에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지을 수는 없다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건물의 수는 많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담한 궁전을 지을 수도 있고, 사원이나 관청, 공공 숙소나 상인 회의소 같은 조금 수수한 건물을 지을 수도 있다. 좀 더 작은 규모에서 시작하고 싶다면 연회실이나 별채, 작업실 따위를 세울 수도 있다. 만약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원한다면 별채의 한쪽 구석이나 사원의 제단을 이용해도 좋고, 옷장이나 소파 같은 흔한 가구라도 무방하다.
- 리치는 이 기억술의 요점을 설명할 때 이런 궁전이나 별채나 소파는 머릿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상상의 산물이지, 말 그대로 실제 물질로 지은 견고한 물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리치는 주로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이런 기억을 설치할 장소로 삼으라고 제안한다. 첫째, 현실에서 끌어낸 장소. 곧 한 번이라도 가 본 적이 있는 건물이나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어서 자신의 기억 속에서 되살려 낼 수 있는 물체 등에서 취한 장소이다. 둘째, 완전한 가공의 장소. 이것은 적당한 형태와 크기로 떠올린 상상력의 산물이다. 셋째, 현실과 가공이 반반씩 섞인 장소. 간략히 말해서 평소 잘 아는 건물의 뒷벽에 상상의 뒷문을 달아서 새 공간으로 가는 지름길을 낼 수도 있고, 건물 중앙에 상상의 계단을 내서 새로 만든 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 왜 머릿속에 이런 건축물을 세우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 지식의 총체를 형성하고 있는 무수한 관념 하나하나에 보관할 장소를 설정하기 위해서이다. 리치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상 각각에 대해 이미지(image)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하나하나에 공간을 할당해야 한다.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기억력에 의해 이미지를 의식으로 불러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술은 이미지가 정해진 위치에 남아 있어야 하고, 이미지를 저장한 장소를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잘 알고 있는 실제 장소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리치는 그것이 잘못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실의 장소에만 국한하면 장소의 수에서도, 그것에 대응해서 저장해 가는 이미지의 수에서도 한계가 생기게 마련이고, 따라서 기억을 일정량 이상으로 증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가공의 장소를 창조한다든가,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혼합시킨다든가 하는 난제와 씨름해야 한다. 끊임없이 훈련을 반복하고 머릿속에 기억의 보관장소를 영원히 새겨 넣으려고 노력하면, 결국에는 가공의 장소도 마치 현실세계가 되어 결코 지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기억술은 리치가 예수회 설립 로마 대학에서 배운 수사학과 윤리학 수업의 기초과정에 들어 있었다. 아마 리치는 수사학자 치프리아노 소아레스의 거작을 읽고 기억의 궁전이라는 사고방식을 알았을 것이다. 소아레스가 지은 수사학과 문법학의 기초 교재인 <수사학>은 1570년대 예수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소아레스는 고전적 어법과 문장 구조의 기초를 설명하고, 비유·은유·환유·의성·대체용법·우의(寓意)·역설·과장 등의 예를 들고 나서 기억 배치법을 소개하고 있다. 소아레스에 따르면, 이 기억 배치법은 시모니데스에게서 비롯된 기억술로서 모든 웅변의 뿌리, 곧 '웅변의 보고(thesáurus eloquéntie)'라고 한다. 그는 이 기억술에 의해서 사물뿐 아니라 말을 어떻게 정리하고 또 이 기술을 어떻게 말의 '무한한 진보'에 이용할 수 있는지를 기록했다. 학생들은 극적인 다양한 이미지들을 창출하고, 그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배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는 궁전 같은 건물이나 웅장한 성당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설명으로는 기억술의 전모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배후에 있는 원칙조차 확실히 할 수 없다. 리치는 기억 배치법을 다른 책에서 배웠다. 그중 하나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였다. 리치는 학생 때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리치는 1596년에 쓴 <기법>에서 플리니우스가 과거의 위대한 기억술의 대가에 대해 쓴 구절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 밖에도 B.C. 1세기와 A.D. 1세기에 쓰인 책이 여러 권 있었다. 예컨대 <헤레니우스에게>라는 수사학에 대한 라틴어 책과 퀸틸리아누스의 저작이다. 퀸틸리아누스는 웅변술에 대한 입문서에서 기억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런 책들에는 기억용 건축물을 어떻게 짓고 거기에 배치할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실려 있다.
- 당시의 신학자들은 이전에도 그랬듯이 기억술은 단순한 수사학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윤리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신념을 불어넣은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에서 '붙잡기 힘든 영적인 것'이 영혼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유형의 상(像)', 곧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기억용 이미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 아이러니컬한 것은 아퀴나스가 기억의 장소 배치법을 이용하는 것이 옳은지를 논의하면서, 키케로도 <헤레니우스에게>에서 "우리에게는 기억용 이미지에 대한 염려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지적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아퀴나스는 이 구절을 우리는 기억용 이미지에 "애착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 결과 기억용 이미지를 기도나 성서에 응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헤레니우스에게>는 기억용 이미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염려'(sollicitudo)가 아니라 '고독'(solitudo)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수세기 동안 주의를 끌지 못했다. 어쨌든 아퀴나스가 범한 오류 -아마도 아퀴나스는 기억에 의지하여 이 구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기억술 전통은 한층 강화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기억술은 영적 개념을 정리하는 수단으로써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이런 해석 방법은 널리 퍼져 있었다.
- 르네상스 음악에서는 음악을 이용한 기억술의 전통이 전승되었다. 우선 기억할 내용을 압운 시로 만든 다음 그 시를 선율에 맞추어서 기억으로 고정시키는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진지한 이론가들은 음악의 두 가지 특질, 요컨대 음률의 비법으로서의 신비한 성질과 과학으로서의 보편적인 성질을 성(性)적인 힘이나 재생의 관념, 또는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정한 언어 표현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에 대한 놀라운 발견을 하고, 루돌프(Rudolph) 황제의 궁전에서 연금술에 열중하는 한편 어떤 음악의 장 3도 음정은 남성의 성적 만족을 표현하고 단 3도 음정은 여성의 수용성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피력하고 있다. 한편 비첸티노는 새로 고안한 6 단식 건반으로 된 쳄발로, 곧 아르키쳄발로(archicembalo)에 대한 1555년의 논문에서 이 새로운 악기는 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헝가리어·튀르크어의 발음을 재생할 수 있다고 썼다. "세계 모든 민족들의 언어에서 사용하는 억양과 음정은 전음(全音)이나 반음(半)뿐 아니라 사분음(四分音)이나 더 좁은 음정도 발성된다. 따라서 건반을 늘려서 쳄발로의 음정을 세분하면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편리한 악기가 될 것이다." 그 후 1582년에 리치는 한자를 처음 보고, 한자가 지닌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잠재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자는 언어에 붙은 발음의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인 문자로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만약 이런 종류의 이미지가 인간의 기억에 진정한 도움을 주려면 어떻게 이미지를 만들고 위치를 잡고 빛을 비추어야 할까? 리치는 <기법>에서 그 방법을 중국인에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리치는 이미지를 만드는 규칙에 대해서 말한다. 이 이미지들은 반드시 생동감 있어야 하고 정적이어서는 안 되며 풍부한 느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또한 그 인물들은 사회적 지위나 그들이 하는 일이나 직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옷이나 제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맞서고 있는 두 인물의 차이점은 과장되는 것이 좋고, 표정은 기쁨이나 고통을 드러내야 하며, 기억에 도움이 된다면 익살맞거나 우스꽝스러워도 괜찮다. 그리고 인물을 서로 떼어 놓아 뚜렷이 구별되도록 해야 한다.
- 이어서 리치는 이미지를 배치할 장소에 대한 규칙을 훨씬 많이 세웠다. 이미지를 고정시킬 장소는 넓어야 하지만, 너무 많은 이미지를 집어넣어서 단 하나라도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행정관이 있는 관청이나 붐비는 시장 또는 학생들로 북적대는 학교는 모두 적합하지 않다. 또 눈부실 정도로 환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골고루 빛이 들어와서 적당히 밝아야 한다. 비나 습기로 얼룩지면 안 되므로 깨끗하고 건조한 장소를 골라야 한다. 이미지는 잘 보이도록 바닥이나 눈이 쉽게 닿는 높이에 놓아야지 기둥이나 지붕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된다. 마음의 눈이 한 이미지에서 그다음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옮겨 갈 수 있도록 이미지들은 서로 1m 이하로 가까이 있어서도 안되고 2m 이상으로 떨어져 있어서도 안된다. 이미지는 단단하게 고정시켜서 갑작스런 움직임에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지 불안정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이미지를 도르래에 매달거나 수레 위에 놓아서는 안된다.
- 가톨릭 교회가 생각하는 수학의 주된 역할은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미 잘 설명해 놓았다. 그는 수학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젊은이들이 조기에 배워야 할 과목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의 우수성은 하나의 공리에서 출발하여 각종 정리(定理)를 논리 정연하게 만들어 내는 방법론에 있다. 이 방법론 때문에 수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학문 가운데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것"이다. 또한 수학적 지식은 기억술의 전제와 공통되는 성질이 있다. 기억술은 사물의 정리를 전제로 하는데, 수학도 질서가 정연한 사항만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적인 질서가 있는 체계 안에서는 특히 기억하기 쉬운 지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기하학은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이 결합해서 생겨난 분야였다. 하지만 기하학이 인간의 정신적인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연계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를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만약 수학 지식으로 자연계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인간으로서는 하나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나약하다는 증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했듯이, 하느님이나 천사에게는 도표나 그래프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물을 하나의 통합된 시각 속에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퀴나스에게 수학은 어떤 특정한 정확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수학은 자연과학과 신성한 과학을 중재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하다."
- 리치가 수학과 천문학을 습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괴이한 힘이 자신에게 흘러 들어온 것을 리치가 얼마나 자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유클리드의 책은 오늘날 말하는 '과학'으로 활용되는 한편, 마술에서도 응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유클리드의 저작은 클라비우스의 빼어난 번역과 주석을 통해서 청년층도 수월하게 이용하게 되었다. 1570년, 클라비우스가 역주를 단 클리드 기하학의 영어판이 런던에서 출판되었을 때 마술사 존 디는 "미친, 경솔한, 악의적인, 오만한 영국 동포들에게 거리낌 없이 도전장을 던져, 새롭게 증명된 수학적 법칙이 어떻게 점성술을 지지하는지"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이 수학은 자연광선과 빛이 초래하는 작용과 효과, 그리고 항성이나 행성이 인간에게 미치는 비밀스런 영향력을 합리적으로 논증해 주는 학문이다"라고. 디는 나아가 유클리드의 정확성이 디 자신의 귀중한 과학인 '인류지'(Anthropographie)를 보강하고, '최상의 학문(Archemastrie)'이라고 해야 할 위대한 최후의 과학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인류지'에서는 인간이 만물의 신성한 척도로서 이용되며, 최상의 학문이란 "완벽한 경험을 성취하는 것"이며, "수학의 성질을 띤 학문을 활용해서 얻게 된 가치 있는 결론 모두를 지각할 수 있는 실제 경험에 응용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다. 리치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디가 말하려는 본질과 내용이 리치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성유물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어떤 성지(聖地)를 성지답게 해주는 특별한 전설이었다. 이를테면 복되신 동정녀의 교회인 성모 대성당은 리베리오 교황 재위 때, 8월에 눈이 내린 지점에 세워졌다. 로마인들은 지금도 그곳을 눈의 성모님 성당(Santa Maria della Neve)이라고 부른다. 그곳에는 먼 옛날 한 미사에서 천사가 성 그레고리오에게 응답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리치의 시대에도 미사 때 "주님의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라는 사제의 축복에 성가대는 응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천사가 "또한 너희 영혼과 함께"라고 말하며 한번 더 나타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베들레헴에서 마리아가 처음 그리스도를 뉘었던 구유의 일부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 성 히에로니무스는 "어린아이가 울음소리를 냈던 구유는 침묵 속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말을 입에 올려 존경하는 것은 너무나 품위 없는 행동이다"라고 썼다.
(리뷰자 주 : "또한 사제와 함께.")
- 루돌푸스나 이냐시오가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실제로 체험하지 않은 '과거의 이런 기억'을 현재의 정신에 집어넣으라고 강력히 요구했던 배경에는 토마스 아퀴나스뿐만 아니라 리치가 태어나기 1,100년 전에 쓰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서 받은 영향도 깔려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적절히 말한다면 세 가지 때가 있다. 곧 과거의 일에 대한 현재, 현재의 일에 대한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에 대한 현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냐시오의 동료 가톨릭인들은 이냐시오와 그의 추종자들이 신의 나라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호소하는 그들의 기도가 극단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발렌시아(Valencia)의 주교는 <영신수련>이 신비한 장사술에 지나지 않으며, 당시에 횡행하던 광명파(Illuminist, 자연신을 받드는 공화주의의 비밀결사 - 옮긴이)의 영향 아래 쓰인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영신수련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직접 교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던 6명의 사제가 1548년에 종교재판소에 소환되었다. 재판관들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한번 내렸듯이 영신수련을 한 사람에게도 임할지 모른다"는 사제들의 말에 불안해했다. 몇몇 도미니코 회원들은 1553년에 이냐시오가 의심할 여지없는 이단자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은 이냐시오의 사상이 어디까지나 신과의 직접 대화에서가 아니라 성서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이냐시오의 친구인 나달(리치가 중국에 소개한 <복음서의 주해와 명상>의 저자)을 부추겼다. 뒷날 리치가 중국에서 전교 활동을 하는 동안 예수회의 총장이었던 클라우디오 아콰비바는 이런 논쟁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냐시오의 '오감의 응용'에 대한 견해를 가능한 한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그것은 더 복잡한 형식을 가진 성찰이나 기도와 비교도 되지 않는 매우 '안이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 천체 관측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사람들은 행성의 운동, 달의 차고 기움, 별의 출현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추적 조사하고, 아울러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에 관계되는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다. 교육받은 사람은 경건한 가톨릭 교회의 신도들이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미지의 초자연적인 영향이라는 대안적 체계를 수용할 여지가 남아 있었고, 그것은 신(新) 플라톤주의적인 우주론 속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이러한 신비를 용인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두뇌의 기억술과 우주의 힘을 융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별난 힘이 있다 하더라도 대수롭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또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역시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의 문화는 변함없이 구두 전승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581년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몽테뉴는 피렌체 근처의 들판에서 여자 친구를 옆에 두고 류트를 연주하며 아리오스토(1474-1533, 르네상스 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시인. 대표작은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o furioso> -옮긴이)의 긴 시구를 암송하던 한 무리의 농부들을 묘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력이 너무 강하면, 마치 16세기 중반 프랑스 남부의 아르노 뒤틸처럼 즉시 이웃들로부터 마술사로 의심받을 위험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극의 관객들에게는 기억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강화하는가 하는 논의가 진부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필리아가 햄릿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고 난 후 오빠 레이어티스 앞을 걸으면서 "이게 로즈마리, 기억의 꽃이에요. 부탁이에요. 잊지 마세요."라고 울부짖었을 때 그녀는 그저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이어티스에게 그 당시 많은 기억술론의 지지를 받으며 널리 퍼져 있던 신앙에 호소해서 복수의 결심을 굳히도록 했던 것이다. 그것은 로즈마리가 기억력을 높이는 약초라는 믿음이었다.
- 리치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그의 고향인 마체라타에서는 성직자가 흑마술을 했다는 이유로 고발된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행위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기억술을 남용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6세기 내내 베네치아와 나폴리 같은 도시에서 점성술을 주체로 한 기억술이 특별한 관심거리가 되었고, 그것을 만든 열성적인 창시자들은 기억술을 그 도시뿐 아니라 외국, 그중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에 수출했다. 이런 기억술은 우주의 다양한 힘을 체계화해서 '기억의 극장', 다시 말해서 동심원을 몇 겹으로 그린 도표나 상상의 도시들을 만들어, 그 힘을 직접 끌어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이런 기술을 실제로 구사하는 사람은 위대한 힘을 감추고 있는 태양의 마술사로 불렸다. 1540년대 뛰어난 이탈리아 학자였던 카밀로가 발명한 극장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전면에는 작은 상자 더미가 있고, 키케로의 모든 저작들이 어지럽게 여기저기 널려 있다. 저 멀리에는 제1원인에서 시작되어 창조의 단계를 통해서 확장되는 우주를 보여주기 위해 삼라만상의 이미지가 배열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 무대를 내려다보는 극장 주인인 카밀로에게는 우주의 세부도, 그 전체도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는 높은 언덕에서 숲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최소한 개별 나무의 모습과 숲 전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카밀로가 설명하는 것처럼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보관한 물건이나 말이나 행위를 필요할 때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된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지혜는 문학이나 무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이론에도 그 건축물에도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건축에서는 장중함이나 사랑 등의 관념을 표현하는 비밀의 선'으로 내부의 각 공간을 완전히 분할함으로써 건물 전체에 의미를 부여했고, 또한 인간의 신체가 지닌 다양한 비율 그대로 돌을 재단하여 질서 잡힌 우주의 힘을 표현하기도 했다.
-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예수회원들은 로마 시민을 비롯한 이탈리아인의 고해뿐 아니라 로마를 찾은 많은 순례자들의 고해도 들어야 했다. 예수회에서는 2개 국어를 말하는 고해 사제가 교대로 고해를 듣는 체제를 짰다. 여기에 포함된 예수회원은 누구나 이탈리아어뿐 아니라 영어·폴란드어·프랑스어·스페인어·플랑드르어 중 하나를 유창하게 말했다. 이런 제2외국어는 고해소 위에 게시해 두었고, 사제는 성무용 하얀 막대기를 들고 고해소에 앉아 있었다. 만일 순례자가 자신의 고백을 이해할 사제를 찾지 못하면, 교황청 부근의 고해소로 가서 요청하면 되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예수회 사제 12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스어·시리아어·아라비아어 전문가가 필요하면, 예수회원들은 밥티스타 로마노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로마노 신부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과 언어능력은 놀라웠다. 1590년대가 되면 예수회는 27개 언어에 각기 대응할 수 있는 사제들을 배출했다.
- 이런 다국어를 다루는 분위기는 외국어 서적들로 인해 더욱 고조되었다. 1570년대 후반 로마에 있던 모든 예수회 대학의 도서관은 충실한 장서를 자랑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망명한 가톨릭 신자 그레고리 마틴은 "모든 학부에는 최고의 서적들로 빼곡했다"고 기록하고, 예수회는 외국어용 활자까지 갖고 있다고 놀라움을 표했다. 이런 문화자산을 더욱 충실히 보완해 주었던 것이 유명한 바티칸 도서관이다. 바티칸 도서관은 일주일에 사흘(월요일·수요일·금요일) 동안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고, 겨울에는 불을 피워 실내를 따뜻하게 유지했다. 몽테뉴는 1581년 3월에 이곳을 방문했다가 도서 열람제도가 관용적인 데 대해 기뻐했고, ...
- 1560년 고아에 종교재판소가 공식적으로 설치되고 대(大) 종교 재판관이 부임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전(정확히 1543년)부터 고아의 종교재판소는 사형을 실시하고 있었다. 첫 희생자는 제로니모 디아스라는 개종 유대인 의사였는데, 그는 몰래 유대교 의식을 행했다는 죄로 화형을 당했다. 1560년대에는 고아 남부의 코친 왕국에 정착한 유대인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 가톨릭 성직자가 코친의 인도인 군주(개종 유대인을 측근으로 뽑는 일도 있었다)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꼴 정도다. 이 유대인 배교자(perfidia judaica)를 뿌리 뽑기 위해서 가톨릭 사제들이 남부로 파견되었다. 사제들은 일부 개종 유대인을 체포해서 고아의 종교재판소로 압송했다. 종교재판소의 염탐꾼은 특히 '흰 유대인'을 감시하고 있었다. '흰 유대인' 이란 코친이 유대인의 안식처라는 소문을 듣고 튀르크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고아에 도착한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들이다. '흰 유대인'은 '검은 유대인'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되는 원주민 이상으로 위험시되고 있었던 것 같다. '검은 유대인'은 인도 남부의 토착 인도계 주민과 결혼한 유대인을 말한다.
- 1571년 세바스티앙 왕의 총애를 받던 바르톨로메오 데 폰세카가 고아의 종교재판관으로 임명되자 유대인은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폰세카는 서른이 채 안된 젊은 나이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광신적으로 이단자를 색출했다. 폰세카는 개종 유대인에 의해 인도가 "은밀히 파괴되고 있다"고 했고, 개종 유대인을 "하느님을 죽인 자들"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또한 자기가 행한 심문의 횟수나 자기가 가득 채운 감옥의 수, 그리고 직접 화형에 처한 자들의 자식이나 손자의 수와 "자신의 손으로 묘를 파헤쳐서 유골을 끄집어낸 자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하는 일도 적잖았다. 1578년 9월 리치가 고아에 도착하고 두 달이 지난 뒤, 폰세카는 자랑스럽게 "나는 이 고아를 불길로 뒤덮고 이교도와 배교자의 시체에서 나온 재로 가득 채웠다"고 적고 있다. 리치의 초기 편지를 보면, 인도에서 잔혹한 화형이 널리 행해지는 것에 대해 리치가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통상로가 서쪽으로 뻗어 있으므로, 중국에 사는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는 서북부의 산시(山西) 성과 간쑤(甘肅) 성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과거 서하 왕국의 영역이다. 서하는 몽골인에게 1227년에 멸망당했다. 그런데 리치는 1500년 티무르 제국의 붕괴와 뒤이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주 열풍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또 1502년에 건국된 이란인 국가 사파비 조(朝)가 시아파의 가르침을 신봉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온 이슬람교도의 태반이 수니파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리치는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수니파 교도는 중국으로 이주함으로써 서방의 이슬람 국가들과의 낡은 정치적·경제적 유대를 상당 부분 끊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살다 보니 리치는 중국에서 이슬람교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치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1599년 리치가 난징에 머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학자이자 관리였던 주스루(亂世祿, 리치에게 지필묵 제작자요 출판업자였던 청다웨를 소개해 준 사람)의 권유 때문이었다. 리치는 주스루에게서 난징은 외국인에게 관대한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난징에는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라센인이 대단히 많이 살고 있었다." 또한 리치는 항구도시인 광저우에도 많은 이슬람교도가 있다고 기록했다. 리치에 따르면 광저우의 이슬람교도는 고의로 포르투갈인들의 악행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려서 광저우에서 증대하고 있던 서양인의 무역을 방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리치는 중국의 이슬람교도는 숫자는 많지만 상대적으로 신앙심은 약하다고 적고 있다.
- 시아(Shia) 파는 마호메트가 죽고 나서 그의 딸과 사위 알리(Ali)의 자손만을 이슬람의 정통으로 인정하여 칼리프(Calif)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파이다. 수니(Sunni) 파는 이슬람의 정통 교파로서 전체 이슬람교도의 90% 이상이 여기에 속하며 4대 칼리프까지를 마호메트의 정통 후계자로 간주한다. -옮긴이
- 마체라타의 예수회 학교에서 받은 교육 덕분에 리치는 곧바로 법률 공부를 계속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실제로 그가 가장 먼저 염두에 두었던 진로도 법률 공부였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버리고 예수회에 입회한 리치는 로마 대학에서 더욱 철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예수회의 교육과정은 그때까지 10년 동안 크게 발전하여, 1566년에 정해진 지침에 따라 세부에 이르기까지 체계화되어 있었다. 예수회 대학의 초급과정인 인문 부문의 정식 교육은 언어학부에서 이루어졌다. 입학 당시 리치는 21세였지만, 학생 가운데는 10세 정도의 어린이들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 말하기 시작한 라틴어의 문법을 자세히 배운다. 모든 강의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하고, 학생들도 학교에 있는 동안은 라틴어로 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어를 비롯하여, 수사학·시학·역사학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는다. 이 과정을 수료하는 데는 2~4년이 걸린다. 기간의 길고 짧음은 각 학교의 실정이나 학생 개인의 자질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다음에는 중급인 '학문(art)' 학부이다. 학문이란 이성으로 배울 수 있는 자연과학을 가리킨다. 곧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도덕철학, 수학 등이다. 이 과정이 끝나면 상급인 법학, 의학, 신학교육이 있었다. 신학을 선택한 사람은 세 가지 과정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 첫째는 스콜라 신학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계시를 기록한 자료를 이성적으로 연구한다. 두 번째는 역사 신학으로 교회의 교의와 교회법을 면밀히 연구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성서 그 자체에 대한 세밀한 연구이다.
-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리치는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에는 리치의 타고난 놀라운 기억력을 더욱 강화시켜 준 책도 있었을 것이다.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리치의 기억력은 <헤레니우스에게>나 퀸틸리아누스와 소아레스의 저서에서 말하는 한계조차 넘어섰는지 모른다. 훗날 중국에서 400~500개의 한자(漢字)를 순식간에 암기한 그의 기억력은 부분적으로는 호스트 폰 롬베르히 같은 이론가가 개발한 기술에 힘입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롬베르히의 저서는 1533년에 베네치아에서 간행되었다. 롬베르히는 기억용 도시 속에 상점, 도서관, 도살장, 학교 등 기능별로 건물을 배치하고, 각각의 장소에 기억을 분류해서 보존하는 기억 배치법을 고안해낸 다음, 인간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모습 또는 서로 논리관계를 가진 일련의 물체를 소재로 한 시각적인 기억용 알파벳을 개발했다. 바로 이 무렵 어떤 이미지를 선택해서 기억용 장소에 설치하느냐에 대해서도 훨씬 미묘하고 세련된 방법이 나타났다. 구리엘모 그라타롤리의 저작을 보면 당시 기억술의 전문가가 누구라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선명한 기억 이미지를 공부해서 어떤 수준에까지 이르려고 했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연금술사이자 의사였던 그는 인간의 기억력을 강화시켜 주는 식이요법의 개발에도 관심이 있었다. 1553년에 취리히에서 처음 출판된 기억 배치법에 대한 그라타롤리의 책은 1555년에는 로마판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라타롤리는 기억용 이미지로는 "사람을 웃기고 동정심을 자아내고 감탄하게 만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통설을 인정하면서 장소·물체·인물 세 요소로 이루어진 기억법을 개발했다. 우선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기억용 장소를 설치한 다음 각각의 위치에 물체를 배치한다. 그라타롤리가 첫 번째 예로서 배치한 것은 침실용 변기, 연고 한 상자, 회반죽 한 사발이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신중히 이름을 붙인 다음 각각의 물체에 각기 다른 인물을 할당해서 각 인물에 따라서 장면이 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이렇게 그라타롤리는 재빠른 연속동작을 만들어내 기억용 이미지로 삼았다. 이를테면 그의 친구 피에트로가 오줌이 가득한 침실용 변기를 집어 들어 자코모에게 쏟아붓고, 마르티노는 연고 상자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연고를 엔리코의 항문에 바르고, 안드레아는 사발에서 회반죽을 한 줌 떠서 프란체스코의 얼굴에 처바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삽화를 말장난(pun, 음이 같고 뜻이 다른 말을 써서 말재주를 부리는 일)이나 유추나 연상을 통해 일련의 동작 하나하나를 기억해야 할 관념에 결부시킬 수 있으면, 그는 기억 내용을 결코 잊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 이 두 분야 모두 1570년대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이때의 방대한 자료들은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도덕철학의 세계를 보자. 이냐시오를 비롯한 그의 계승자들은 젊은 예수회원들을 교육시켜, 당시의 지적인 문화생활의 최첨단을 걷는 인물로 육성하고자 결심했다. 그에 따라 모든 학생들은 엄청난 양의 학습과제를 해결하고 수많은 문학작품을 읽고 흡수해야 했다. 고전 라틴어 문체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결과, 학생들은 그 시기의 대표적인 고전들을 암기해야 했다. 이를테면 키케로의 연설, 퀸틸리아누스의 수사(修辭), 마르티알리스의 풍자, 그리고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장편시 등이다. 게다가 리비우스가 지은 병사에 대한 한니발의 연설 같은 유명한 기성 작품도 암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한편 그리스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학생들은 이솝에서 핀다로스에 이르는 송시(頌詩), 헤시오도스나 크세노폰에서 플라톤에 이르기까지의 대화편,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와 호메로스의 장편 시도 읽어야 했다. 학생들은 이 모든 작품들을 읽으면서 문체와 내용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방식 안에서 자기의 변론술을 개발하기 위해 화술 방식과 논쟁 유형까지 익혀야 했다.
- 동시에 그리스도교와 고대 그리스·로마의 관계 및 양자의 전통에서 비롯된 작품에 나타난 관련성에도 깊이 정통해야 했다. 왜냐하면 반종교개혁기에는 신(新) 스토아 사상이라고 알려진 자극적인 교리가 부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스토아 사상이란 후기 그리스 문화와 초기 로마 문화의 요소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흐름과 융합하여 생겨난 그리스도교 인본주의의 한 변종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문장의 암기가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문체가 지닌 위력보다는 도덕적인 내용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음과 죽음에 대해 냉정하고 강력한 견해를 제시한 세네카나, 가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 개인의 인격을 보장하는 방법을 제시한 노예 출신의 에픽테토스도 리치의 정신세계에 깊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 이것은 마치 기억의 궁전을 세울 때 사용하는 말장난과 비슷한 것이다. 왜냐하면 클라비우스(Clavius)라는 이름은 '못'을 뜻하는 라틴어 클라부스(clavus)와 비슷하고, 그 못을 의미하는 중국어가 바로 '딩'(丁)이기 때문이다. '딩'(丁) 자는 중국 표의문자 가운데 가장 단순한 글자이고, 유럽 글자의 대문자 T와 흡사하다. 물론 중국인은 이 글자가 다른 한자에 비해서 얼마나 쓰기 쉬운 글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딩'(丁)자도 모른다"라고 놀릴 정도였다. 이 속담을 듣고 리치는 틀림없이 쓴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부터 중국의 지식인에게 서양 수학을 소개할 참이었기 때문이다.
- 기억법, 광학, 천문 관측술, 측랑술, 음악, 지리학, 기하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리치는 학생 시절 기억에 저장했던 지식을 갖고 있던 몇 권 안 되는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보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식과 월식의 계산, 위도의 대략적인 계산, 어느 장소에서나 정확히 시간을 잴 수 있는 완전히 조절 가능한 해시계의 조립, 나아가 중국에서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준 대축척의 세계지도 작성조차 그렇게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이미 리치의 수중에는 메르카토르가 1569년에 만든 세계지도, 오르텔리우스가 1570년에 출판한 세계지도, 그리고 아주 상세한 위도 계산용 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도 계산용 표가 실린 클라비우스의 <천구론>과 알레산드로 피콜로미니의 <지구론>을 리치는 여행할 때 언제나 지니고 다녔다. 특히 클라비우스의 책에는 이론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한 공작도(工作圖)와 주석이 달려 있어서 리치는 기구 사용법뿐 아니라 기구를 만드는 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얼마나 상세하냐 하면, 마지막에 나무를 어떻게 붙이고, 나무틀에 나사를 어떻게 조이는지까지 설명되어 있었다.
- 특히 1596년에 리치는 클라비우스의 천문 관측기에 대한 새 책을 선물 받았다. 그 책은 1593년에 로마에서 출판된 것으로 상세한 환산표와 도해가 많이 실려 있었다. 이로써 리치는 천문 관측 계산을 위한 새롭고도 아주 강력한 도구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다시 한번 클라비우스의 정확성과 완벽한 실용성이 결합되어 리치에게 하나의 계산 수단을 주었다. 유럽의 학자들은 이 천문 관측기를 '도구의 왕'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에 애착을 갖고 칭찬하는 대화를 기록할 정도였다.
- 이렇게 리치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자금을 풍족하게 얻게 되었다. 하지만 파산 직전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많은 값비싼 물건이나 은괴를 가진 부자로 변신하게 되자, 리치가 연금술사 같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도 따라서 늘어났다. 물론 리치는 자신은 연금술사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런 소문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명 말기 중국에서는 연금술의 실험이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두 가지 모두 도교 신앙과 관계가 있었다. 하나는 불로장생의 영약(靈藥)을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금속(卑金屬)을 은으로 변환시키는 기술이다. 어느 경우에나 수은(水銀)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활성은(活性銀), 중국에서는 진사(辰砂)라고 불렀다- 이 주원료였다. 수은은 색깔이나 무게나 밀도가 은과 비슷한 데다가 다른 금속과 화합하기 쉽기 때문이다. 리치의 추측에 따르면, 자신이 중국인들에게 은을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포르투갈 상인이 광저우에서 대량의 수은을 사들여 배로 인도나 일본으로 수송하고, 은을 싣고 돌아온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한다. 예수회원이 외부에서 수입을 얻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중국인으로서는 예수회원이 스스로 은을 만들고 있든가 아니면 은을 만드는 포르투갈인 연금술사와 접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리치 자신의 언행이 중국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조장했을 가능성도 많다. 리치는 실험실에서 열심히 실험하고, 앞선 과학기구들을 만든 반면, 금전 사정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리치는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음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 환관, 후궁 말고는 궁정 안에 접근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던 관계로, 리치는 판토하의 반주에 맞추어 궁정 악사가 자신이 지은 시를 노래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사 안에 다양한 언어 장치를 준비해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치는 환관들이 혹시나 후궁들도 환관에게 배워서 자기가 만든 시를 자금성 안 깊숙한 곳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흡족해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위에서 인용한 <목동유산(牧童遊山)>의 맨 마지막 연에서 리치는 밖의 생활의 결점을 안의 세계와 대비하고 있다. 여기서 리치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 '內'와 '外'는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적·도덕적 사고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양극 개념 가운데 하나였다. 밖과 안의 대립은 정신적 상태나 장소의 차이를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야만적인 외국인과 중화(中華)의 백성의 차이, 그리고 궁전 바깥의 세계와 궁전 안쪽에 감춰진 세계의 대립도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시의 마지막 행에 나오는 利가 이익의 뜻인 동시에, 리치가 자신의 중국 이름 利瑪에 사용한 글자이기도 한 이상, "누군가가 궁정 안에서 마음을 안에 두면 이익이 있을진저 (居內有利矣)"라고 노래할 때 그 사람은 "궁정 안에 머무는 사람 중에 리치도 있다네 (居內有利矣)"라고 노래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궁정에 들어가는 것이 리치의 희망이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리치의 꿈은 들을 수 없는 노랫소리를 타고 조용한 저녁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 1559년 8월, 교황 바울로 4세가 83세로 세상을 떠나자 로마는 폭동과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군중들은 멋진 종교재판소 건물로 몰려들어 내부를 박살내고, 재판기록을 파괴하고,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주었으며, 마지막에는 건물에 불을 질렀다. 카피톨리움 언덕에 세운 지 얼마 안 된 당당한 바울로 4세의 동상도 땅바닥에 처박혔다. 길가에 널부러진 동상 머리에 누군가가 조롱의 의미로 노란 모자를 씌웠다. 이 모자는 바울로 4세가 로마 시내의 유대인에게 쓰고 다니라고 명령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또 누군가가 그 거대한 동상을 질질 끌고 가서 테베레 강에 처넣었다. 교황의 시신은 한밤중에 아주 은밀하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무덤에 되도록 깊이 묻혔으며,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켰다. 대성당 바깥에서는 수많은 행상이 거리에 나와서 죽은 교황과 악명 높은 그의 세 조카 카라파(Carafa) 형제들을 비난하는 풍자로 가득 찬 시문을 팔고 다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킨 바울로 4세는 교회 개혁에 정열을 쏟은 헌신적 인물로 경건하고 강직한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개혁정책을 수행하던 중에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울로 4세는 줄곧 스페인을 적대시했고, 펠리페 2세가 영유권을 주장하는데도 강제로 나폴리 왕국을 스페인의 손에서 탈환하려고 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 군이 로마의 성문으로 밀어닥치고, 한편으로는 프랑스가 스페인의 움직임에 반발해서 간섭을 결의했기 때문에 기즈 공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마체라타 거리를 활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울로 4세는 도덕이란 미명 아래 모든 공중의 오락을 억압하는 무자비한 정책을 실시했다. 바티칸 구내에서 정부(情婦)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는 체포해서 갤리선에 보내 노역을 시켰다. 또 사냥을 금지하고 춤추는 것조차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그래서 이런 정책이 시행되고 한 해가 지난 뒤, 당대의 어떤 사람은 로마가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 동안 금식하며 속죄하는 기간 -옮긴이)을 보내는 것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한편 바울로 4세는 로마와 안코나의 유대인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유대인 정부(情婦)를 둔 그리스도 교도를 체포하고, 유대인을 특정 거주지구로 강제 이주시켰다. 유대인이 그리스도 교도와 식량을 사고팔거나 유대인 의사가 그리스도교도의 병을 치료하는 행위도 금지했다. 아울러 유대인에게 교황령 내에 있는 소유 토지의 태반을 강제 매각하게 해서 약 50만 두카트에 달하는 교회용 토지를 염출 했다. 하지만 원래 이 금액은 실제 가격의 거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또한 바울로 4세는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종교재판소의 중요 회의에 꼭 참석하고,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권한을 재판관들에게 주었다. 이를테면 이단의 죄나 잘못된 교의를 신봉한 죄뿐 아니라 성적 방탕도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여성에게 매춘을 시킨 자나 주선한 자는 체포되었다. 비역질을 했다고 판결받은 자는 사형을 당하거나 공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성적 방탕과 관련해서 로마 시민들을 의아하게 했던 것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교황의 세 조카들 가운데 한 명인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이 악명 높은 엽색가였다는 사실이다. 카라파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사냥이나 도박에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양성애(兩性愛)를 하는 인물이었다.
- 가까이 푸른 녹음에 싸인 곳으로 안코나항에서 가까웠고, 과실수와 포도 덩굴숲 가운데 있었다. 이 성가는 길이 9.5m, 너비 4m, 높이 5m의 조촐하고 아담한 집으로 마리아가 성모영보(聖母領報,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계시한 일 -옮긴이)를 받고, 어린 예수를 키운 곳으로 믿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집은 천사들이 기적을 일으켜 거룩한 땅 이스라엘의 나자렛에서 먼저 피우메(Fiume, 지금의 크로아티아 서부에 있는 리예카(Rijeka) -옮긴이)로, 그다음은 레카나티(Recanati) 교외의 숲으로, 마지막으로 로레토로 옮겨 왔다고 한다. 처음에 그 집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집 안에 가장 귀한 유물, 곧 복음서의 저자인 성 루가가 묘사한 성모의 초상화가 잠자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 후 13세기 말에 레카나티 출신의 청년 16명이 각자 꿈속에서 환영을 보고 나자렛으로 가서 거기에 남아 있던 성모의 집터가 로레토에 있는 집의 면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 15세기 후반, 이 아름다운 전설은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로 번역되어 교회에 게시되었다. 그리고 역대 교황의 칙령들과 기적의 사례를 알리는 보고서가 나오면서 분명한 기적으로 인정되었다. 리치가 살던 시대에 이 소박한 집은 유명한 성지가 되었고, 교황 율리오 2세와 그를 계승한 네 명의 교황들이 비용을 대 이 집에 안드레아 산소비노가 설계한 빛나는 대리석 장식을 입혔다. 유명해졌기 때문에 모양이 바뀐 부분도 있다. 푸른빛 물감 바탕에 칠하고 반짝이는 별을 그려 넣은 목재 천장은 신자들이 가져온 촛불로 인해 화재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제거되었고, 성모자의 고대 목조상은 보존을 위해 값비싼 직물로 감쌌다. 한편 산소비노의 대리석판으로 장식한 장엄한 성당이 건설되어, 1571년에는 브라만테가 건물의 정면을 완성했다. 리치는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이 집을 떠올렸을 것이다. 특히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가르침은 리치로 하여금 이 성당에 다시금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둘째 주간 수련에서 성모님에 대한 일을 상상한 다음,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마을에 있는 성모님의 집과 방을 상상해 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 과거에는 조촐했던 이 성지는 16세기 들어 거창하게 변했다. 그러나 적어도 몽테뉴의 기록에 따르면 성지의 장엄한 분위기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고, 여전히 방문자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몽테뉴는 1581년 4월에 이곳을 방문하여 자신과 아내 그리고 딸이 차례로 성모 마리아를 경배하는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를 헌납했다. 이 초상화의 액자는 은으로 정교하게 제작한 것이었다. 성당은 "호화롭고 거대한 건축물"이며 브라만테가 지은 주위의 건물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솜씨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대리석 작품"이었다. 하지만 몽테뉴가 이보다 더 감탄했던 것은 소박한 작은 집이었다. 여기에는 장식품 하나 없고, 긴 의자나 방석도 없으며, 벽에는 그림이나 태피스트리도 없다. 왜냐하면 "이 집 자체가 성유물함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몽테뉴는 "이곳은 지금까지 내가 본 곳 가운데 다른 어떤 곳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분위기가 넘쳐 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몽테뉴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오랜 후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은 로레토의 성모 호칭 기도에 사용된 음악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편 1570년대에 마체라타는 로레토와 로레토의 동정녀 이름으로 행해진 병 치료법에 대한 책을 많이 간행하여 일찌감치 로레토 관련 출판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 마체라타는 로마에서 로레토로 가는 순례길의 중간지점이었다. 리치는 어려서부터 로레토의 성지를 알고 있었고, 성지 일대에 번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남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리치가 태어나기 불과 4년 전, 마체라타에서도 베르나디나 디 보니노라는 여인에게 성모가 발현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체라타 주민 중에 이 기적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창 시절 그러니까 리치가 열여섯의 나이로 마체라타에서 로마로 갔을 때, 리치는 문자 그대로 성유물로 가득 찬 로마라는 도시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도시에 있는 127개 성당 안의 무수한 성지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유해, 복음서 저자인 성루가나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의 두부(頭部), 아리마태아의 요셉의 팔, 한때 성녀 베로니카가 지녔던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힌 아마포 같은 성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밖에도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날, 그리스도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조각, 성 세바스티아노의 몸을 꿰뚫은 화살촉,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탁자,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신한 대가로 받은 30개의 은화 가운데 하나, 성 바울로를 묶었던 쇠사슬, 그리스도가 배고픈 군중들을 먹인 빵 덩어리 5개의 일부, 그리스도가 사도들의 발을 닦아 준 수건, 그리스도가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로 올라갔던 계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못 가운데 하나, 그리스도의 가시관에서 나온 가시 2개 등이 있었다.
- 리치가 마체라타의 성모회 회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성모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것은 확실하다. 로마의 성모회는 1563년 벨기에인이며 신학자이자 예수회원인 얀 레우니스가 로마대학에서 설립했다. 이후 이 조직은 급성장하여 리치가 입회하기 직전인 1569년 무렵에는 이미 두 분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12~17세의 소년·소녀로 이루어졌으며 회원수는 약 30명이고, 또 하나는 18세 이상의 회원들로 이루어졌으며 회원수는 약 70명이었다. 하지만 회원이 계속 증가하여 14세 미만, 14~21세, 21세 이상으로 구성된 세 분회로 다시 나뉘었다. 젊은 예수회원들로 구성된 이 세 집단은 평신도가 만든 많은 단체들과 보조를 함께하며 활동했을 것이다. 평신도들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리치가 로마에서 면학에 힘쓰고 있을 무렵에 활약한 평신도 단체 중에는 감옥을 찾아가 침구나 간이침대를 나누어 준다든가 재판 수속을 준비해 준다든가 의사를 구해 준다든가 빚을 대신 갚아 준다든가 사형수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난한 죄수가 죽었을 때도 '위령회 (慰靈會, Compania de Morte)'가 장례를 치러 주었다. 또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죄수가 처형될 경우에는 교수대에 방치되어 까마귀밥이 되지 않도록 '자비회 (慈悲會, Companiade la Misericordia)'가 시신을 거두어 전용묘지에 묻어 주었다. 이밖에도 '수치스러운 자들 (Vergognosi, 곧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몰락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구걸을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단체가 있었는가 하면, 시민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한다든가, 정신착란자나 주변에 해를 끼칠지 모를 광인을 돌보는 단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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