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민희식
출판 : 큰글
출간 : 2012.09.01
가장 기쁜 점. 5월이 목월이 된 까닭을 알았다. Prairial을 초월, 목월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은 친절한 책은 아니다.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책보다는 수업 자료를 잘 정리한 책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폰트나 편집의 구성, 문장 등이 가독성이 좋지 않은 편이다. 휴머니즘이 유마니슴으로 표기되는 등 프랑스어식 발음으로 표기된 단어들도 많다. 소개된 작가의 시나 저작물 발췌를 원문으로 수록한 페이지들도 있는데, 따로 번역이나 주석이 달린 것은 말라르메의 <반수신의 오후(목신의 오후)>가 유일하다.
전반적인 문학 사조의 흐름과 그에 영향을 미친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을 인물 순, 시대 순으로 굵직하게 정리해주었고 국내에 잘 소개 되어 있지 않은 중요 작가들과 대표작에 관해서도 설명되어 있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 프랑스혁명 Revolution française (1789~1799). 대혁명은 살롱을 해체하고 그 대신 저널리즘을 등장시켰다. 구제도 시대의 독서 계급이란 것은 궁정 또는 사교계의 교양 있는 인사가 중심이 되어 그 수는 대개 3,000~4,000 정도였다. 그들의 교양 있는 인사의 대부분은 예수회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되어 문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형식주의적인 수사학이 몸에 배어 있었다. 혁명에 의해서 살롱은 흩어졌다. 통령 시대부터 약간 살롱이 부활하기 시작했으나 살롱은 이미 문학에 대해서 이전과 같은 발언권을 갖지 못하였다. 신문, 잡지가 이것을 대신한다. 혁명시대의 중요한 정치가는 신문을 발행해서 세론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만 집정관 시대에는 혁명의 퇴조와 더불어 이러한 신문만으로는 독자를 잃게 되기 때문에 새로이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 계급의 교양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예란을 설치해서 문학 작품의 해설이나 해외문학의 소개를 시작하였다. 신문, 잡지는 이리하여 문학의 독자를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프랑스에서 의무교육제가 시행된 것은 1833년부터이므로 농민이나 직공의 대부분은 역시 문맹으로 문학의 독자가 늘어나는 그 수는 4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행본도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서 출판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는 간접적으로 되었다. 구제도 시대에는 작자는 살롱을 통해서 독자와 직접 접촉했고 그 의견에 귀를 기울여 그 사상, 감정을 대변하였다. 인쇄에 앞서서 살롱에서 낭독되어 그 비평을 듣고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는 특정되지 않은 대중이 되고 더구나 그 대중은 살롱의 인사와 같은 교양과 취미 있는 신사는 아니었다. 독자의 반응이라 해도 성의 있는 독자가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서 어느 곳에 저작에 대한 독자의 참다운 평가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구제도 시대에는 펜만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작가는 거의 없고, 작가는 국왕이나 살롱의 유력자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학은 제약되어 있었다. 그러한 취미의 제약은 사라졌다. 고전주의적인 문학상의 여러 규칙의 붕괴는 정치상의 자유의 여파이며 그것은 살롱의 지배권의 상실이 가져온 결과가 된다. 독자가 많아졌으므로 작가는 펜으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쓴 것이 팔려야만 한다. 살롱의 주인을 대신해서 상업적 고려를 하는 편집자, 출판사의 출자자가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작가는 보호자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독립성을 얻었지만 반면 눈에 보이지 않은 쇠사슬로 출판 자본에 종속된다. 살롱의 주권의 상실은 동시에 문학 취미에 대해서 부인이 가지고 있던 지배권의 상실을 의미한다. 구제도하에서는 문학은 우아한 것이라야만 했다. 이제는 그 필요성이 없어졌다. 문학은 야성적인 것이 되었다. 낭만주의는 또 여성들의 편이 아니고 그 후의 플로베르이나 졸라의 경우도 여성 편의 작가는 아니다.
- 살롱의 교양 있는 인사는 예수회의 교육으로 고대, 특히 라틴문학의 지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전문적, 기술적, 과학적 지식에는 빈약했다. 그러한 지식은 교양의 테두리를 벗어난 현학 주의로서 오히려 배척당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교양은 그것과는 질이 다른 것으로 사람은 무엇인가 전문적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한 각 방면의 전문 지식을 가진 독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독자 계급을 상대하는 문학은, 모든 방면에서의 지식의 검토에 견딜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과학적, 개별적 정확성이 문학에 요구된다. 끊임없이 눈앞에 변하는 것을 구하게 되어 진실보다도 신선한 것이 중요하다. 시간을 거쳐 쌓인 확실한 지식, 미묘, 섬세한 표현이나, 중후한 사상은 과거의 것이 되고 사상이건 표현이건 변한 것이 존중받게 되었다. 저널리즘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세부에 걸쳐서 추구하는 성질을 지닌다. 거기에 물든 독자들은 문학에서 사건의 서술에서도 같은 것을 구하게 되었다. 고전주의에 있어서는 예를 들면 주르당 씨는 부르주아라고 하는 규정만으로 족했으나, 이제는 그러한 막연한 성격만으로 불충분하게 되어 작자는 그가 어떠한 장사를 하고 있고, 어떻게 해서 재산을 모았는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문학은 전체적으로 레알리슴으로 기울어진다.
- 공화력 Calendrier républicain. 프랑스혁명의 절정기에 공화국의 탄생을 기념하고 인심을 쇄신하는 목적으로 종래의 기독교의 그레고리우스력을 대신해서 재정되었다. 1793년 국민공회가 공공교육위원회(위원장 롬므 Romme)에게 그 제정을 위임하여 롬므의 책임 하에 수학자인 라그랑즈 Lagrange, 극작가인 파블 데구랑징 등이 제작에 임했다. 체용의 결정은 1793년 10월 15일로 이 달력을 1792년 9월 22일(공화국 성립의 날) 추분을 제1일로서 시작했다. 1년은 12개월로 나누어서 매달의 명칭은 파블 데구랑징이 정했다. 즉 가을 ① 방데미엘 Vendémiaire(포도 수확의 달), ② 부류멜 Brumaire(안개의 달), ③ 프리멜 Frimaire(서리의 달), 겨울 ④ 니보즈 Nivôse(설월雪月) ⑤ 풀류비오즈 Pluvise(우월雨月), ⑥ 방도즈 Ventôse(풍월風月), 봄 - ① 제르미날 Germinal(아월月), ⑧ 플로레알 Floréal(화월花月), ⑨ 프레리알 Prairial(초월草月), 여름 - ⑩ 메시돌 Messidor(수획월), ① 테르미돌 Thermidor(열월熱月), ② 프르크티돌 Fructidor(실월實月) 등이 그 분류이다. 따라서 혁명력 첫 해는 1792년 9월 22일부터 1793년 9월 21일까지이다(예를 들면 혁명력 제2년을 l'an II이라 쓴다), 테르미돌 10일씩은 3순 decades으로 나누어져 각 순은 제1일, 제2일... 제10일 Pridi, duodi... decadi라고 불렀다. 제10일의 데카디는 종래의 일요일에 대신하는 휴일이다. 그러나 이 순일제는 엄밀히 실시되지 않았다. 또 위와 같이 각 월을 3순으로 하면 1년에 5일이 남는데 이것을 상 큐로티드 Sans-Culottide라는 혁명제일로 해서 년두에 두고 윤년의 1, 일도 여기에 가했다. 혁명제일로서는 '미덕 Vertu’, ‘천재天才 Genie', '세론 Opinion' 등의 재가 있었다. 이 역법은 1805년 9월에 폐지된 후 다음 1806년 1월 1일부터 종래의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복귀하였다.
(리뷰자 주 : 한 주를 10일로 바꾸어 생산성을 극대화하려고 했다고 한다. <역사는 식탁에서 이루어진다>에서 5월을 목월로 칭하는 것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걸 알았다. Prairial이 목(木)월로 번역이 된 것이다.)
- 18세기부터 프랑스 내부에서는 전통적인 프랑스 문학 이외의 다른 문학의 흐름과 사상이 싹트려는 기운이 일어났다. 전통적인 프랑스 문학이 너무나 지나치게 인간의 심리 분석과 내부의 갈등 묘사에만 치우쳤기 때문에 종래의 문학 형식에 실증을 느꼈던 프랑스인들은 차차로 외국의 다른 문학에 눈을 돌렸다. 느끼고 생각하고 즐기기보다는 분석에만 급급했던 그들은 19세기라는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더욱더 자극을 받아 다른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시는 프랑스혁명 등으로 극히 혼란되고 불안한 사회가 계속되었던 시대였기에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19세기에서만 볼 수 있었던 세기말 병이 유행되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때의 사회가 얼마나 불안했었나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문학도 안정된 전통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불안한 사회 환경으로 인하여 그 사회, 그 세기를 도피하려는 경향이 보이게 됨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문학에까지도 이런 도피 사상과 외국에 대한 동경이 스며들게 되어 외국문학의 자연스러운 도입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외국문학이 들어오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는 그때까지 프랑스 문학을 숭배해 오던 영국이나 독일에서 그들대로의 민족적인 자각으로 새로운 문학운동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배척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프랑스의 학자들도 반성과 새로운 문학사조에 눈을 떠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 우선 낭만주의가 무엇인가를 보기로 한다. 반고전주의를 목적으로 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규범이나 제약에 의해서 억제된 인간의 자아나 감정, 또는 관능을 해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세기의 초기에는 서정시와 극작품이 성했는데 그것은 자아의 해방, 억제된 감정, 관능의 해방에 있어 당연한 일이다. 단 연극은 인간과 인간의 대립, 비교를 뚜렷하게 보여주는데 알맞은 형식이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에서 본 인간의 모습을 연극이란 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초에 나타났으나 중엽에 이르자 이 낭만주의에 여러 가지 특징, 즉 지방색, 자연 묘사의 발견, 지나친 내심 토로에 대한 반발로서 인간 묘사의 방법이 사회 안에 있어서의 인간에 대한 현실적 관찰,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인간은 한정된 사회 내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을 그리려는 욕망을 가진다. 여기에서 사실주의가 시작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시의 유파를 고답파 사회문제가 시끄러운 시대와 병행해서 실증주의 사상이 활발해진다. 그 결과 사실주의 문학에 과학적인 근거를 주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이것이 자연주의 문학이다. 즉 개인 생활, 공적 생활에 있어서의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이나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나 생물로서의 인간의 존재 양식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 자연주의 문학이다. 그 때문에 그때까지 소홀히 여겼던 인간의 생태가 더 폭로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밖에 인상주의라는 유파가 있지만 이것은 자연주의, 사실주의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에 발생해서 현대까지 큰 영향을 준 사상으로 상징주의를 들 수 있다. 상징주의는 주로 사실주의 시대의 고답파의 흐름을 이은 시의 유파로 새로운 각도에서 인간 정신을 보고 그 때문에 표현 방법과 기술에 있어서 종래의 테두리를 크게 확대했다. 직접적인 묘사를 버리고 암시에 의해서 환기시키는 것을 주장한 유파이다.
- 일반적으로 19세기의 프랑스 소설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두 시기로 분류된다. 그러나 사실상 소설의 분야에 있어 이 시대는 18세기보다 훨씬 다채롭다. 프랑스혁명 후 나폴레옹 지배 하에서 종래의 철학적 문학은 낭만적 경향으로 옮아간다. 샤토브리앙, 스타에 부인, 뱅자맹 콩스탕 등 작가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대두한다. 1815년에 이루어진 왕정복고는 입헌제도를 개시했고, 1829년 샤를 10세 하에서 정체는 공화주의자와 오를레앙 당파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1830년의 혁명 후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오르고 중산계급이 권력을 갖게 된다. 1848년 2월 국민은 귀족에 대항해서 봉기하여 제2공화국이 공포되었다. 이때는 낭만주의 전성기로 18세기 후반기에 이미 표명된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빅토르 위고, 알프레드 비니, 뮈세는 그들의 고민을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내고, 오노레 드 발자크와 스탕달은 그 시대의 풍속에 열중하고, 조르주 상드는 대중 속에 스며들었다. 1848년 6월 정부가 폭동을 제압한 후 중산계급과 새로운 계급 사이에는 틈이 생기게 된다. 그동안 두 종류의 반대되는 경향이 발전한다. 즉 실증주의적 경향과 이상주의적 경향이다. 많은 작가들이 예술이나 객관적 학문이라는 미명으로 낭만적인 운동의 주관주의적 경향에 대항한다. 한편 발자크를 선두로 소설가들은 사실에 대한 세심한 관찰 묘사로 기울어진다.
- 네르발 J. de Nerval (본명 : Gérard Labrunie, 1808.5.22~1855.1.26). 원래 신비주의는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낀 북구의 문학에서 발달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경 속에서는 관찰력보다는 상상력이 더 발달하기 때문이다. 반면 날씨가 맑고 따뜻한 지중해적인 풍토에서는 관찰력이 발달한다. 따라서 신비주의 문학은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보다는 독일, 영국 그밖에 북구의 여러 나라에서 발달하여 온 것이다.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비주의의 작가로는 제랄드 네르발을 들 수가 있다. 오늘날 네르발은 프루스트적인 수법인 무의지적인 회상에 의한 내면적 시간을 외면적 논리적 질서가 아닌 방법으로 그려내는 것을 시도한 선구적 작가(<불의 딸>, <실비>, <오렐리아> 등에서)로 간주되며 말라르메적인 상징주의 시인의 선구자(<환상 시편>)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사실 프랑스에 있어서 문단이 형성되고 문필 생활을 하는 작가가 형성된 것은 1830년 낭만파 운동의 시기 때부터이다.
- 또한 괴테의 후기 작품 파우스트의 영향은 제라르 드 네르발(1805~1805)의 작품에 나타나 있다. 그는 1828년 <파우스트>를 번역했는데 이 번역물을 보고 괴테는 "독일어로는 이제 <파우스트>를 읽을 생각이 나지 않지만 프랑스 말로 번역된 <파우스트>에서는 모든 것이 청신하고 활기 있는 인상을 다시 자아내고 있다"고 칭찬했다. <파우스트>의 영향은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구노의 경우)에도 미쳤으며, 또한 파우스트는 중세기로 돌아가려는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발자크나 플로베르는 그러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처럼 괴테가 프랑스 문학에 준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프랑스 문학은 그 바탕이 인간 연구지만 괴테는 인간뿐 아니라 우주까지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인간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 연구와 동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낭만주의는 인간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우주의 움직임과 인간의 내부 세계가 일치되는 것이다"라고 참된 낭만주의를 정의 내렸다. 괴테와 동시대의 실러(1759~1805)는 괴테가 전기에는 낭만주의자였다가 후기에 고전주의자가 된 데 반하여 낭만주의로 일관하였다. 그의 작품 <군도 群盜>를 읽고 빅토르 위고는 감동하여 "이것이 정말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위고의 작품 <에르나니>는 이 <군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외에 실러의 대표작으로는 <바랑스타인>과 <월리암 텔>이 있다. 독일 문학이 프랑스 문학에 준 영향은 한마디로 프랑스의 전통적인 모랄리스트 사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고민 때문에 절대를 추구하는 독일의 낭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란 이 속세에는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정열, 희망 등 모든 것이 충분치 않다. 이것이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천재의 고독이었다. 이성으로서만은 풀 수 없는 내면적 감정의 표현을 독일로부터 배워온 것이다. 프랑스적인 기질로는 완전히 낭만주의자가 될 수 없지만 고전에 있어서 의무의 문제, 조국에의 충성, 관대성 등의 모랄리스트들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18세기에는 그 고독과 마음의 갈등을 낭만주의를 통해서 나타내려 애썼던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초는 이제까지 외국문학을 지배해 오던 프랑스에 반대하는 외국의 문학이 프랑스를 휩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 빅토르 위고 Victor Hugo(1802~1885). 그는 19세기 최대의 시인이며 낭만 파극을 창조하고 새로운 문학 이론을 세우고 <레미제라블>같은 방대한 소설을 쓰고, 생애의 전반은 낭만파 문학의 대장으로서 활약하고 후반은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나폴레옹 3세와 다툰 프랑스 최대의 문인인 것이다. 이미 17살 때에 <콩세르바트와르 리테레르>라는 문학잡지를 창간했고 20살 때에 아델 프셰와 결혼, <오드 Odes>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온갖 문학 작품에 정열을 바쳐 고전적인 <오드>를 발표하고 증세를 동경하는 낭만적 <발라드 Ballades>(1820)를 쓰고 또 그의 주위에는 새로운 문학에 뜻 둔 시인, 화가들이 모여 와서 위고를 중심으로 한 '세나클'이라는 집단이 생긴다. 이 세나클은 레샹 형제가 발간하는 <라 뮤즈 프랑세즈> (1823~1824)를 주간지로 삼았는데 이 잡지가 폐간되자 젊은 예술가들은 샤를 노디에 Charles Nodier(1780~1844)의 살롱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노디에는 그의 박식한 지식으로 젊은 사람을 끌었는데 자신도 호프만의 영향을 받아 신비롭고 환상적인 작품을 쓰고 있다. 이 세나클에는 위고, 뒤마, 뮈세가 나타났지만 이중 특히 열렬한 동지들은 위고에게 모이게 된 것이다. 생트뵈브, 비니, 뒤마, 뮈세, 발자크, 화가 들라크루아가 모인 노트르담 듀샹 거리의 위고의 살롱은 낭만주의 문학의 발산지였다.
- 1827년 위고는 3,000행에 이르는 희극 <크롬웰>을 쓰고 여기에 긴 서문을 붙였다. 이 서문은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을 열광시켰다. 위고는 그 속에서 문학의 역사를 세계의 시대로 구분한다. 즉 창세기의 서정시의 시대, 호머의 서사시의 시대, 기독교와 더불어 시작한 현대, 그리고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인간에게 계시한 기독교의 시대에 알맞는 시의 형식은 연극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그 원문의 골자를 발췌해보기로 한다. 인류는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삼기를 거쳐 왔다. 이러한 세 시기 각기 적합한 시의 형태가 있으니, 즉 소년기에서는 서정시가, 장년기는 서사시가, 노년기에서는 희곡이 어울리는 것이다. 인류는 끝없이 진화하며 문학만이 침체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므로 필연적으로 진화의 길을 밟아야 한다. 문학은 그러면 어떠한 진화의 길을 밟을 것이며 고전주의 문학과는 어떻게 다를 것인가. 이제껏 등한시해온 기괴한 요소를 숭고한 요소와 병용해야 한다. 오늘날은 희곡의 시대며, 희곡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극의 현실성은 숭고함과 지괴함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희곡을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삼단일 법칙은 폐지해야 되며 규범의 대상을 찾을 필요도 없다. 모방은 천재의 죽음이고 천재는 규범을 창조는 할지언정 모범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위고는 생시몽 주의나 교령설의 영향을 받아 인류뿐만 아니라 우주의 만물의 혼과 양심의 점차적인 각성에 의해서 신의 곁으로 상승해 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집은 1850년대에 쓰이고 유작으로서 출판된 두 가지의 서사시 <사탄의 종말 La fin de Satan>(1886), <신 Dieus> (1891)과 3부작으로 된 작품이다. 여러 세기의 전설은 사실의 정확성이나 각 시 편의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결여되지만 시인의 영감과 수법은 매우 뛰어나다. 이 시집은 위고의 시집의 걸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서사시에 부족을 느끼는 근대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네르발에 있어서 그녀와의 사랑이 영원의 여성의 관념을 갖게 하였으며 오렐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제니의 관념은 네르발의 생활과 동방 여행이나 이태리, 독일 여행을 통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바의 여왕 또는 고대 이집트의 이시스의 여신이나 중세의 성모 마리아처럼 수많은 여성이 하나의 영상 속에 융화되어 작품 속에 결정이 된다. 제니가 죽은 후 그는 또 하나의 내세를 기다리며 정신병의 발작을 일으킨다. 1855년 1월 26일 새벽에 영하 18도의 추위 속에서 그는 목매어 죽었다. 그의 시체의 호주머니 속에는 <오렐리아>의 마지막 원고와 동양의 여행을 위한 여권이 있었다. 그의 작품 <실비>는 네르발이 두 번째의 발작에 사로잡혔을 때에 쓴 몽환적인 작품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은 1853년 초에 쓰기 시작하여 1854년에 발간한 단편집 <불의 딸> 속에 수록되었다.
- <실비>의 주인공은 한 여배우에게 반해 극장에 드나들게 되는데 그는 그 극장의 열람실에서 우연히 신문을 읽게 된다. 그 때문에 그의 과거는 단숨에 재생된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었던 시골의 추억이 어린 시절의 소박한 축제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주인공이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의 몽환 속에서 여러 가지 환상이 생겨나고 마음의 고향의 그리운 정경이 하나하나 암흑 속에서 아름답게 전개된다. 마을의 아름다운 소녀 실비, 성안에 갇힌 처녀 아드리엔느, 활쏘기 대회, 달빛 아래 고성의 뜰에서의 윤무 그리고 민요가 떠오른다. 황홀경에서 보는 이 추억에 의해서 모든 것이 그에게는 명백해진다. 한 여배우에 대한 희망 없는 사랑, 그래도 그녀는 밤마다 연극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잠자리에서도 떠나지 않는 이 사랑은 창백한 달빛을 받고 활짝 핀 암흑 속의 흰 꽃 속에서 아드리엔느의 추억으로 변한다. 여기에 그가 발작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소생한 추억을 통해서 주인공은 현실 세계의 생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할 뿐 아니라 잃어버린 때를 구함으로써 사물의 내부에 감추어진 진실을 파악한다. 그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와지의 꽃 축제에 참가하고자 한다. 시간을 보려고 하지만 방안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계는 2세기 동안 멈추어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물리적 시간이 아니고 상상력의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적 시간인 절대적 시간인 것이다. 오전 1시에 눈뜬 주인공은 2시에 파리를 떠나 로와지를 향해 마차를 타고 달린다. 주인공의 환상 세계는 네르발 개인의 과거일 뿐 아니라 천여 년의 역사 속에 살아온 발루아 왕조의 과거의 전체가 떠오른다. 골루아, 로마시대, 메로빙가 왕조, 카페 왕조를 거쳐 신비주의가 검은 그림자를 던지는 안개 낀 숲 속을 그는 거닐게 된다.
(리뷰자 주 : 루이스 캐롤의 <실비와 브루노>의 실비는 여기서 따온 것인가?)
- 예술지상주의 art pour l'art. 예술을 위한 예술을 의미하며 후기 낭만파 및 사실주의 소설가 고답파 시인이 가진 문학적 신조이다. 콩스탕이 처음으로 이 표현을 쓰고 스타엘 부인, 크장도 프랑스 고전주의 예술 효용론에 대립하는 이 문학 이념을 독일에서 수입하여 소개한 예술에 대한 자유 La liberté dans l'art를 주장한 프랑스 낭만주의는 1830년 2월 에르나니의 승리와 그해 7월 혁명 후, 7월 왕정 하의 사회가 시민계급과 민중과의 두 개로 분열되고, 하층계급의 입을 대변하는 공화 사회주의자가 문학에 대해서 사회적 사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러 '예술인의 모든 효용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했다. 고티에는 1832년 시집 <알베르튜스 Albertus>의 서문에서 공리주의자, 공상 사회주의자, 경제학자, 생시몽 주의자가 그의 시의 사회적 무용성을 공격 타파하려는데 미리 대비하여 본래 예술은 사회주의적 호용론과 연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술이 쓸모가 있다고 한다면 다만 그것이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1834년의 소설 <모팽 양>의 서문에서는 이 주장을 밀고 나가 사회의 다른 방향 부르주아 예술에의 미덕화의 요구도 사회주의적 요구와 같이 격한 말로서 밀어내고 예술의 무용성을 확언하고 그 독립을 선언했다.
- 이 시기, 즉 1814년부터 이태리에서 추방당하기 전 해인 1821년까지가 스탕달의 생애에서는 가장 특기할만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국의 여러 잡지에 반정부적인 논문인 <프랑스 통신>을 쓰면서 <연애론>,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 등 거작을 발표한다. 7월 혁명 후 트리에스테 영사로 임명되나 메테르니히에게 거부당해 법왕령 치비타 베키아의 영사를 지낸다. 1835년 파리에 돌아온 후 1839년에 임지로 되돌아가 <라미엘 Lamiel>을 집필 중 신병으로 다시 파리에 돌아와 1842년 3월 22일 길가에서 졸도하여 의식을 잃은 채 그 이튿날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서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탐구했다. 친척인 나폴레옹 정부의 고관 피에르 다류의 권유로 입대한 용기병 장교의 직업을 버리고 스탕달은 문학가가 되려고 결심하고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몰리에르와 같은 희극을 쓰면서 파리에서 사는 것이 소년시대의 꿈이었던 그는 훌륭한 희극을 쓰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했다. 정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인간을 잘 모르고는 숭고한 경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는 프랑스의 감각론적 유물론자인 콩디야크와 엘베시우스, 카바니스 등 관념학과 (감각을 인식의 기초로 하는 학파)의 저서에 열중했다. 특히 엘베시우스의 명향은 결정적이었다. 이때에 스탕달의 기본적인 사상 형성이 거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희곡 작품을 쓰기 위해서 철학 연구나 연극의 이론도 공부하였는데 비록 이 방법은 실패하였지만 그러한 연구는 인생의 다른 면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왜냐하면 후에 나타난 스탕달의 모든 저서 속에는 더 완성된 형태로 더 멋지게 그 사상이 개화되었기 때문이다. 또 스탕달이 인생에 있어서 행복 추구의 기본 개념을 거의 완성시킨 것도 이 연구 덕분인 것이다.
- 그 후에 스탕달의 사상은 평생토록 거의 변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나의 정신생활은 몇 개의 중요한 관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관념에 입각하여 진리를 보기 위해서 보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사상의 경력에 어떠한 위기나 비약적인 발전은 없지만, 그 대신 자기가 그려낸 사상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충실성이 깃들여 있다. "나는 어제 찬양한 것을 오늘도 찬양하고 싶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처럼 자기가 걷는 길은 절대로 바르다는 강렬한 자신이 스탕달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장이란 변화가 아니고 깊이 파고드는 일이었다. 그럼 스탕달이 깊이 파고들고 끝까지 추구했던 행복이란 무엇인가? "물체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한 것은 느껴지는 것뿐이다" 이 말이 증명해 주듯 스탕달에 있어서 행복이란 감각의 세계와는 유리된 형이상학이나 신비적인 추상 관념이 아니라 감각의 기쁨, 말하자면 쾌락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사실 쾌락은 여러 가지 사회적,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탕달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사회의 종속적 존재(아부하는 인간)가 되지 않고, 사회나 타인을 태연히 무시하고 자기의 내부 세계에서 이 감각의 기쁨을 찾아내려 하였다. 향락 주의자로서 그의 위대한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겠다. 감각의 기름을 자기의 내부에서 극도로 승화시켜 마침내는 영혼의 전율의 경지까지 자신을 높여 간 것이다. 그리고 사회나 타인의 구속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주체적인 행복을 그는 연애의 세계에서 발견했다.
- 소위 리얼리스트 내츄랄리스트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환상의 생성 원리를 탐구하고 환상을 그 환경에서 잡아서 환상을 지배하는 궁극의 원리를 파악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파우스트적 요구를 가진 작가로서, 고생물학에 있어서의 조지 퀴비에 Georges Cuvier, 생물학에서의 조프루아생 티레르 Geoffroy Saint-Hilaire에 열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물론에도 유심론에도 만족하지 않았던 발자크는 물질과 정신을 다 같이 에텔상의 실체로 환원해서 거기에서 독특한 의지론을 세웠다. 이와 같이 그는 과학과 초과학의 사이를 대담하게 왕래했지만 초과학적이란 것은 항상 그에게 대해서 과학이 될 만한 것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18세기의 정신을 백과전서파의 면과 신비주의의 면에 걸쳐서 받아온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사람으로서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동시대에 있어서는 오귀스트 콩트이다. 그의 문학이 사실주의라고 불린 것은 이와 같은 자질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때로는 백일몽에까지 이르는 환상력과 섬세한 진실의 통찰은 결코 두 가지뿌리에서 생겨난 이질의 능력은 아니다.
- 당시의 A. 프랑스는 감상집 <에피큘의 정원>(189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철저한 주관주의자, 회의주의자, 염세주의자였다. 인간은 결국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소설은 요컨대 자서전이고 비평도 작가와 작품을 구실로 자기를 말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고 역사도 과학적 역사는 있을 수 없고 소설로서의 역사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철학, 윤리, 미학은 말하자면 여성의 심심풀이로 카드놀이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의 확실한 존재는 고뇌이며 이것 없이는 즐거움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가 인생행로의 반려로 삼은 것은 야유와 연민으로 전자는 미소를 가지고 인생을 밝게 하고 후자는 논문을 가지고 인생을 신성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야유는 연민을 지니면서 자기도 포함한 인간 전체에 대한 경멸이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없고, 또 무엇이건 왜곡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음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위대한 것 중에서 풍자를 그리고 평범 무지한 것 중에서 순진한 것을 찾았다. 그는 몽테뉴식으로 인간의 무력을 믿고 그리스·로마적인 불가지론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사물의 상관성만은 인정하려고 했다. 그 후에 그는 <현대사>(1897~1901)라는 제목의 4부작을 착수하지만 때마침 1896년 유태계 포병 사관의 매국 혐의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서 그 후 그는 서재에 처박히게 되고 종래 반목했던 졸라와도 손을 잡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외치고 인도주의를 위해서 싸웠다. 본래 그는 인생의 관찰자는 아니고 방관자라고 자칭했으나 이때를 계기로 하여 그는 사회주의와 접근한다.
- 보들레르는 언제나 사회와 대결코자 했다. 그의 근본문제는 자기의 주체를 어떻게 살리느냐 하는 것이다. 그 주체는 그를 버린 부르주아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기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자기 속에서의 대상(사회의 모든 부패 현상)과 인연을 끊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예술론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근대적 개념에 의한 순수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동시에 "주관과 객관, 예술가에 있어서의 외적 세계와 예술가 자신을 포함한 암시적 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낭만파 예술>) <교감>에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그의 태도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즉 대립물을 자기 내부에 통일로서 잡음으로써 대상은 주체 속에 포옹된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부패한 부르주아 옹호 정책 하에서 가장 철저한 반역의 에너지를 발산한 시인은 로트레아몽 Comte de Lautréamont(1846~1870)이다. 그는 23세에 <말도로르의 노래> 한 권을 발표한 후, 그 이듬해에 죽었다. 그는 부패한 인간들을 저주하였으나 보들레르처럼 신에게 인간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가련한 인간들을 만들어낸 신까지 저주한다.
- "나는 인생을 하나의 상처로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자살로써 이 상처의 치료를 금했다. 나는 창조주가 그의 영원의 한 순간마다 이 상처가 크게 갈라지는 것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에게 주는 벌이다" 그는 이처럼 악의 근원(神)을 벌주려고 한다. 그가 사용한 영상은 비장하다. 방탕 꾼의 주인에게서 빠진 하나의 머리털은 방에 가득히 부풀어 더러운 방안을 벗어나려고 한다. 방문은 닫혀 있다. 머리털은 절망 속에 흐느끼며 말한다(<붉은 램프의 장>).
- 그것은 마틸드와의 약혼의 시기가 그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결혼(1870)에 의해 처음으로 사랑을 깨달았다. 음주벽이나 파리 코뮌보다도 랭보의 출현(1871)은 결혼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신혼부부의 불화의 모든 원인이 된다. 토성의 사람에게 보낸 열렬한 편지와 <추정의 배>를 읽고 베를렌은 곧 회답했다. "오너라 위대한 혼이여." 이렇게 해서 19세기의 빛나는 별은 빛나는 빛을 발견한 것이다. 무의식의 생활자는 방랑의 천사에 매혹되었다. 랭보는 그를 태양의 아들의 원시적 모습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랑의 길을 열어주었다(1892). 동성애 관계를 지닌 두 시인은 영국 벨기에를 돌아다니다가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함으로써 정처 없는 여행은 끝난다(1873년 7월). 랭보는 멀고도 새로운 우주여행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베를렌은 투옥과 마틸드와의 이혼이라는 사태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방랑은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의 생활은 파괴되었지만 그의 시혼이 눈뜨게 되고 그 결정적인 영향 아래 그의 시법은 확립되었다. 그 시혼이란 음악성의 우위를 인정하고 막막한 분위기를 율동과 조화된 리듬으로 표현하며 색채를 피하고 그림자를 구하는 것이다. 사실을 버리고 암시를 환기해야만 한다. 공허한 각운에 의뢰하지 않고 화음을 중요시하고 우수각을 배제하고 기수각奇數脚에서 새로운 음률을 구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징파의 시가 되어 프랑스 시에 자유의 창문을 열고 자유시로 향하게 되었다. 이 시법을 기법으로 쓴 것이 그의 걸작인 <말없는 연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예지 Sagesse>(1881)이다. <연가>는 랭보와의 방황 때에 그 영향 아래 지은 작품으로 제명이 보여주듯 음악을 중요시했다. 불안한 감정의 미묘한 움직임이 여러 가지 변화에 넘치고 재래의 시에서 볼 수 없는 운율에 의해서 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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