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조지프 콘래드 / 오경희
출판 : 새로운제안
출간 : 2017.06.10
저자명에 눈이 가서 읽어보았는데, 평역인 줄 알았다면 아마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조를 위한 문단의 중복 배치와 여유가 많은 편집은 내 경우에 한해서는 상당히 가독성을 떨어트렸다. 삽입된 그림들과의 연계성도 다소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문장들이 많았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귀화한 조지프 콘래드는 정체성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폴란드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는 우리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 겪어온 유사점들이 있다보니 자주 비교되는 편이다. 지리적 이점으로 인한 잦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 강대국간의 조약으로 인한 국토의 변경 등이다.
침략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는 점은, 한국의 뿌리를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조금 의견이 갈릴 것 같다. 고구려나 조선을 포함시키고 싶다면 (조선은 국토 확장과 정벌전에 관심이 많았던 나라다. 당황스럽다면 '북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라) 이 주장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들을 제대로 접해보지는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작품 세계보다는 항해 시절 이야기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 직접 20여년을 배를 탔던 뱃사람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관련된 도서가 있는지 찾아볼 생각인데, 국내에 번역까지 된 저서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음.
끝으로, 역자의 의견에는 크게 공감한다.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미묘한 관계성은 해당 국가들의 이전 역사들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듯이, 유럽 또한 현재의 알력과 미묘한 관계 뒤에는 그들이 쌓아온 역사들이 있을 것이다. 세계사를 굉장히 싫어했던 나로서는 역사서들을 그럭저럭 읽고 있는 지금의 스스로가 굉장히 낯선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 책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아주 오래된 말이 있다. 책의 운명은 사람의 운명과 아주 많이 닮아있다. 대단히 불확실한 영광 혹은 수치, 엄격한 정의와 무자비한 박해, 비방과 오해, 부당한 성공에 대한 수치심 등 책은 사람과 많은 점을 공유한다. 모든 무생물 가운데, 인간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책이야말로 인간과 가장 가깝다.
- 책이 인간과 가장 닮은 점은 생에 대한 위태로운 집착이다. 건축술에 따라 충실히 건설된 다리는 오래도록 훌륭하고 쓸모 있는 생을 보낸다. 그러나 책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해도 책은 탄생과 함께 이름도 없이 소멸할 수 있다. 책의 창조자가 겨우 한순간의 수명밖에 주지 못한 때문이다. 책은 인간의 초조함과 영감, 혹은 허영심에 의해서 탄생한 피조물이다. 그런 책 가운데 뮤즈들이 가장 사랑할 법한 책은 특히나 요절할 운명에 놓여있다. 때로는 책의 결함이 책 자신을 구원할 수도 있다. 책 박람회에서 이따금 영혼 없는 책을 발견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영혼 없는 책은 죽을 수 없으며, 다만 바스러져서 먼지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연민과 기억에 기대어 목숨을 이어가는 최고의 책들은 파멸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은 짧고 인간의 연민이란 너무나 변덕스럽고 지조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책들이 영생하는 비밀은 예술의 공식에서 발견할 수 없다.
- 소설은 인간의 역사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의 의미는 없다. 소설은 현실과 사회적 현상이라는 견고한 토양 위에 서있다. 반면 역사는 인쇄물과 필사 같은 기록에 바탕을 둔다. 역사는 중개자와 같지만 소설은 진실에 가깝다. 따라서 역사학자도 예술가일 수 있고, 소설가는 인간의 경험을 보존하고 기록하고 해설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자일 수 있다. 제임스는 역사학자의 혈통과 전통에 부합하는 사람으로서 훌륭한 양심을 지닌 역사가다.
- 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예술적 관점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관점들을 조사해보면, 대체로 평범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예술적 관점은 원래부터 내면의 취향에 따라 확고히 선택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설득에 의해 혹은 약간의 소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채택된 관점이기 때문이다."
- 시니컬하다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그것은 한쪽 눈이 멀었다는 말이고 도덕적으로 장애가 있다는 비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당당한 장애인으로 살아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결국에는 누가 보아도 명명백백한 사실에 몰두하는 길을 선택했다.
- 감정은 유사성에 뿌리를 두는 한 정치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별것 아닌 일을 마치 중요한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감정을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다.
- 젊은 시절, 내게 항해는 영원을 향한 여행이었다. 우주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영원'이라고 한 것은 일단 바다에 나가면 80일, 100일,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런 침묵 자체가 영원이었다. 소리를 내는 영원은 생각할 수 없다. 그 장엄한 침묵 안에는 태양과 천체들의 끊임없는 윤회, 하늘 위에 교대로 나타나는 빛과 어두움뿐이었다. 그 외에 사람과 우주를 연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다의 삶은 특별했고, 뱃사람들은 특이했다. 뱃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복잡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뱃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단순하지도 않다. 뱃사람은 집단으로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한마디로 뱃사람은 잘하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삶인 사람이다.
- 얄팍한 이론가들은 폴란드 사람을 사회, 정신적으로 슬라브 민족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폴란드 사람은 절대 슬라브 민족에 속하지 않는다. 폴란드는 감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심지어 불합리한 면으로도 서유럽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서유럽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어도 폴란드 사람은 서유럽의 모든 사고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폴란드 사람은 완벽한 서유럽 사람이다. '폴로니즘(Polonism)'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의 민족성은 프로이센의 저머니즘(Germanism)과 러시아의 슬라보니즘(Slavonism)의 틈바구니에서 오래도록 억눌려 있었다. 저머니즘에 대한 폴란드의 감정은 단순한 증오심이 전부지만, 폴로니즘과 슬라보니즘은 완벽한 상극이다. 폴란드 재건을 위한 정치적 작업은 정의(justice)로 보나 방편으로 보나 온당하지 않다. 그 작업은 결국 저머니즘 혹은 슬라보니즘에 의존한 결과물로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폴란드 재건을 저머니즘에 의존한다는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만, 슬라보니즘에 의존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강대국들이 대놓고 폴란드 문제를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유럽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현재의 유럽을 이해하려면 최소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최근 프랑스에 39세 최연소 대통령이 당선되어 화제다. 왜 프랑스는 '강한 유럽연합'을 지지하는 마크롱에 손을 들어주었을까? 브렉시트를 선언한 영국과 프랑스는 앞으로 어떤 관계로 발전할까?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은 이런 프랑스에 어떤 입장일까? 메르켈 총리의 4연임 가능성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나? 현재 유럽의 판도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20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유럽의 근현대사를 이해해야 한다.
- 왜냐하면 지도자는 다른 누구보다 평균적인 지혜와 인격, 공동체 의식 및 도덕을 대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간지와 주간지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분노가 장황하게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지도자는 정말 참고 봐줄 수 없는 도둑놈일 것이다. 이는 어쨌거나 사실이다. 그러나 내 관심은 지도자의 비도덕이 아니라, 치안판사가 비난받을 우려 없이 거침없이 내뱉은 진술에 있다. 위대하고 부유한 공동체의 평균적인 인격과 지혜에서 나온 진술 말이다. 솔직히 나도 그런 식의 신중함을 좋아한다. "그런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말한 뒤 바로 "만일 읽었다면, 잊어버렸다"라고 말하는 신중함. 얼마나 훌륭한 처세인가! 인위적이지 않고 인간다운 진솔함이 배어 나오는 방식이 아닌가!!
-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보도했다면, 쉽게 믿음이 갈 것이다. 읽히지 않은 책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책이 기억에서 잊혀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부 연설문의 경우, 그런 식의 표현은 기가 막히게 효과적이다. 모든 형태의 건망증에 익숙해진 대중의 취향을 저격한 계산된 발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발언은 대중을 일종의 사색에 잠기게 해 미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래서 대중은 사람의 말에 무슨 대단한 힘이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아주 오래전에, 어쩌면 방황하던 청소년기에 한 번 읽은 책이기는 하지만, 내용은 잊어버렸다'는 근엄한 권력자의 이야기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지 않은가! 앞선 치안판사의 발언에서 문제 되는 책은 소설들이었다. 나 역시 그 사람처럼 신중하게 또 당당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그 소설들을 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책을 읽었다는 백만 명 넘는 사람 가운데 책 내용을 앞뒤가 맞게 명쾌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책들이 인본주의에 관한 것이며, 치열한 경쟁 도서 중 감탄하고 연민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책들임에는 분명하다.
- 제임스는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의 집요한 기질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은 없다. 소득 없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풀 죽은 모습에 어떻게 정신적 영광의 옷을 걸쳐주어야 하는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제임스가 영리한 통찰로 기록한 전투들을 보면, 비록 개인적인 경쟁에 불과하지만 외치는 구호도, 무력 충돌도, 나팔 소리도 없고, 오직 침묵 속의 절망뿐이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모습이다. 그의 전투에는 오직 선택된 영혼들만이 연루된다. 제임스는 그런 전투의 돌발적인 사건과 군인들의 감정을 당차고 집요하게 기록했다. 헨리 제임스는 소득 없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풀 죽은 모습에 어떻게 정신적 영광의 옷을 걸쳐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기록한 전투들을 보면 오직 침묵 속의 절망뿐이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모습이다.
- 제임스의 소설에서는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책에서 결말은 삶의 한 에피소드가 끝나는 것과 같다. 소설은 끝났지만,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단어를 읽었을 때 작품에 갑자기 침묵이 덮치며 미묘한 죽음이 느껴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결과일지언정, 결코 끝은 아니다. 헨리 제임스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충실한 역사가로서 불가능한 것을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
- 예술의 근원은 인간의 생체리듬이고, 예술이 영향력을 지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본은 이해한다. 예술은 비지성적 지혜를 지닌 체세포들의 움직임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러나 본과는 달리, 시는 과학과 사랑에 빠진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본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서둘러 시를 과학과 짝지어주려는 조급함을 보인다.
-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이야기를 믿은 한 남자가 있다. 흙으로 된 여러 덩어리 가운데 조그마한 흙덩이가 곧 넘어질 팽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지만, 남자는 학설의 이름도 내용도 모른다. 어느 날 남자는 지평선에서 태양이 지는 장면을 관찰하다가 그런 믿음을 버리게 된다. 자세히 보니 태양은 제법 쓸모 있는 조그마한 물건이었다. 산줄기 뒤로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을 보노라니 태양은 자기의 욕구를 해결해줄 신하이자, 높은 곳에 오르려는 노력을 증명해줄 증인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믿게 된다. 이 학설에 대한 지식 역시 없다. 시인도 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아직 자신의 혈관에 침투되지 않은 진리를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있다. 진리도 책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그런 시인이 많으면 인생도 예술도 캄캄한 암흑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 "에드워드, 당신이 세계 박람회에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어떤 신을 실제 발견했다고 칩시다. 당신은 그 신이 외모만 뛰어난 게 아니라 정신도 완벽한 것을 알고는 목이 터져라 죽도록 항의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요? 거기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아마 1퍼센트도 안 될 것입니다. 군중에게는 샴쌍둥이나 서커스의 공연이 더 흥미로운 구경거리일 테니까요."
- 평범한 출판사가 발행하고 평범한 인쇄소에서 찍어낸 책, 우리가 빌려 보는 책, 일반적인 이동도서관에서 검증을 마친 책(대개는 소설) 말이다. 영국에서는 이동도서관이 가정의 수호천사로 통한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동도서관의 검증을 맹신하는 용감한 사람이 있다니 신기한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겸손은 귀하고 훌륭한 미덕이니까! 자기의 도덕과 지성을 책 배달원의 판단에 굴복하는 것보다 더 겸손한 일이 있을까? "이동도서관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고민은 얕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은 끝이 있다.(Tout passe, tout casse, tout lasse)." 이동도서관이 모조리 사라진다 해도 그 정신은 남을 것이다. 나만의 주장이 아니라 최근의 학술 정보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이동도서관은 인간의 제도다. 동물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영혼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이동도서관을 차릴 사장님들은 자신이 상업성에 말려들 때마다, 영매를 통해 순수한 검열의 영혼을 소환해야 한다. 상업성이라는 귀신을 몰아낼 굿판을 벌이면 더 효과가 좋다.
- 이상은 과학이 하는 이야기다. 그동안 과학은 여러 수수께끼와 경이로운 현상들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무던히 싸웠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인간의 영적 능력을 인정하려는 것 같다. 정확히 어떤 과학 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발표될 내용과 관련이 있다. 지금 나는 재스퍼 헌트의 <과학이 암시한 죽음 이후의 존재 (1910)>에서 언급된 과학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이동도서관의 검증을 마친 책은 아니다. 소설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철학도, 형이상학도, 자연과학도 아니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규정하는 것은 제법 어려운 난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수긍할 것이다.
- 만일 불멸이 심령과학을 지지하는 스테드 씨나 크룩스 박사에 의해 어느 때고 강제 소환되는 자가당착적인 존재라면, 그런 불멸은 무가치하다. 심지어 팔라디노라는 영매의 호출에 쪼르르 달려가는 불멸이라니, 상상조차 하기 싫다. 물론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하고 싶다면 책을 읽어라. 다만 내가 관찰한 것을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만일 불멸이 심령과학을 지지하는 스테드 씨나 크룩스 박사에 의해 어느 때고 강제 소환되는 자가당착적인 존재라면, 그런 불멸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 스테드(William Thomas Stead, 1849~1912)는 영국의 신문기자이자 작가로, 19세기 후반 심령론에 빠져들어 <중간 영역Borderland>이라는 계간지를 창간하고 영매들을 취재했다. 크룩스 박사(William Crookes, 1832~1919)는 크룩스관, 크룩스 방사계를 발명한 물리학자로,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했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선언문에는 아무런 약속이 없고, 지난 45년간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양국의 관계를 떠올리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폴란드는 오스트리아 선언문만 침묵 속에 받아들였다. 폴란드가 한 나라로 인정받은 것도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을 때뿐이었다.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을 때 폴란드는 정치적 독립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자유와 시민의 생활은 보장되었다. 폴란드 사람들에게 독일과 친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 친해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열강들끼리 뭉치면 백 년 넘게 고통과 압제에서 살아남은 폴란드의 모든 희망이 끊길 수도 있으므로, 그런 경우 폴란드는 불가피하게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 화해를 선택할 수도 있다.
- 근대에 이르러, 특히 1830년 이후 폴란드는 서유럽 강국들을 신뢰했다. (그동안 폴란드는 몰락해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정신적 실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폴란드라고 말한 것이다.) 서유럽에 대한 폴란드의 신뢰란 그저 위안만 가져다주는 환상에 불과할 수 있지만, 폴란드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폴란드가 서유럽에 기대한 것은 무엇보다 정신적인 지지였다. 서유럽에 대한 폴란드의 기대는 감정적인 것이었다. 감정의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이상이 깔려있고, 이상은 가장 현실적인 것에서 나올 수 있으므로, 감정적인 기대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가치가 없지 않다. 폴란드에서 서유럽 열강들을 향한 감정적인 태도는 보편적인 것이다. 사고 능력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지닌다.
- 폴란드의 붕괴 덕분에 프랑스혁명(1789~1794)이 무사히 안착했다는 말은 사실일 수 있다. 실제로 1795년 폴란드 3차 분할이 완료되었을 때 프랑스 혁명은 고비를 넘겼고 반동 세력의 저항을 자력으로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는 자유사상의 진원지로 두 군데가 있었는데, 바로 프랑스와 폴란드였다. 당시 프랑스는 어느 모로 보나 폴란드만큼 약했다. 어쩌면 폴란드보다 좀 더 약했을지 모른다. 다만 지리적으로 프랑스가 외부 공격에 덜 취약했을 뿐이다. 프랑스에는 힘 있는 이웃이 없었다. 남쪽에는 부패한 스페인, 동쪽에는 작은 게르만 공국들뿐이었다. 프랑스의 자유사상에 재를 뿌리고 프랑스를 제압할 힘이 있었던 나라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뿐이었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3국은 자신의 탐욕을 채울 대상으로 무방비 상태의 폴란드를 낙점했다. 그 결과 한 나라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어쩌면 폴란드의 몰락은 혁명 이념의 승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 나는 그렇다고 동의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 폴란드는 유사 이래 다른 나라를 공격한 적이 없어. 터키에 걸림돌이 된 적은 있지만 공격한 것은 아니지."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폴란드로서 공격성은 정말 이질적인 기질이다. 폴란드만큼 국가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신념이 다른 나라를 정복한다는 이념보다 몇 배 소중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폴란드가 싸웠던 전쟁들은 모두 방어전이었고, 대부분은 국경 내에서의 싸움이었다. 폴란드가 침략을 자주 당했던 이유는 불운하게도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폴란드 정치인에게 영토 확장이 중요한 관심사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폴란드 공화국이 주변 영토를 통합하면서 잠시나마 강국으로 올라선 때도 있었으나, 이 역시 무력으로 차지한 지위가 아니었다. 불시에 쳐들어온 동부의 이웃 나라들을 오래도록 잘 방어한 결과였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길옥] 6개월에 2천만 원씩 꼬박꼬박 쌓이는 월급 재테크 - 월급쟁이들의 빈부를 가르는 특별한 출발선 (0) | 2022.02.09 |
---|---|
[데즈카 오사무] 불새 VOL. 1 세트 (0) | 2022.02.08 |
[민희식] 프랑스 문학사 2 (0) | 2022.02.07 |
[조너선 D. 스펜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0) | 2022.02.06 |
[조선우] 패턴 인식 독서법 - 서양 철학사와 함께하는 (0) | 2022.02.04 |
[고마츠 야스시] 1일 1분 정리법 - 돈과 시간이 쌓이는 (0) | 2022.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