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24)

[이윤하] 나인폭스 갬빗 2

일루젼 2022. 2. 1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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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윤하 / 조호근

원제 : Raven Stratagem

출판 : 허블 
출간 : 2020.11.30 


       

아. 정말 재미있었다. 

정말 즐겁게 읽게 되는 책은 사실 읽는 도중보다는 읽기를 중단했을 때 알 수 있다. 금단현상처럼 그다음이 읽고 싶어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다른 증상으로는 책을 읽다가 뭔가를 잊어버리거나 실수하는 상황이 생기거나, 읽던 걸 멈추고 몇 장 앞을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현상이 있다. (후자의 경우 나의 우뇌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증거라고 상상해보곤 한다)  

 

1권이 "여우"의 이야기였다면, 2권은 "까마귀"의 이야기였다. 중반이 넘어설 때까지 대다수의 독자들은 1권의 내용을 떠올리며 의문을 품고, 그런데도 당장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 의문을 미뤄두고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복선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데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빠르고 시원스러운 전개가 인상적이다. 굉장히 일상적인 내용들에 집중하는 것 같으면서도, 거대한 사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 터트린다. 당연히 3권으로 이어져 결말까지 미뤄질 줄 알았던 부분들이 몇 페이지만에 결론이 나버리기도 하고, 의미심장해 보이는 떡밥이 앗차하는 사이 저 멀리로 흘러가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자는 세부적인 설정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기에 -이런 규모의 세계관을 구상하는 수학자가 대강 얼버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2권에서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들은 3권에서 나를 즐겁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이제 슬슬 적응이 되어서인지 2권부터는 1권보다 이미지 연상이 훨씬 쉬워졌다. 저자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인폭스 갬빗>을 읽고 있자면 저자는 스토리를 구상하면서 썼다기보다는 머릿속에 완성된 시뮬레이션 모델을 돌려가며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1권에서 내가 느꼈던 '보여주고 있다'는 감각이 강렬하다. 시각적 묘사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전혀 모르는 대상이 -그림이나 설명 주석 없이-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느낌은 굉장히 기묘하다. 지금 정도의 기술이라면 이 설정들과 세부 묘사들을 구현한 영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 애니메이션도 좋다- 저자가 보고 있는 영상을 함께 보고 싶어진다. 

 

2권은 쏘아진 살이 되돌아오는 과정이었다.

이제, 3권은 과녁의 변화가 될 것인가, 살을 쪼개는 살이 될 것인가?

흥미진진하다. 부디 이 속도감을 잃지 않아주었으면 싶다. 

 

 


   

 

- 제가 만든 SF세계에선 어떤 역법을 믿느냐에 따라 마법을 쓰는 것처럼 물리법칙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법 전쟁'에 대한 발상엔 제 어릴 적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는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엔 한국에서 9년 넘게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셨기 때문이었죠.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 외국인학교를 다니면서 보냈습니다. 

 

- 그렇게 한국에서 보낸 유년 시절 덕분에, 여러 문화권에서 날짜를 다른 방식으로 계산한다는 걸 일찍부터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참 시간이 흘러, 마샤 애셔의 <타민족의 수학>을 읽게 됐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비서구권 사회에서 사용하는 수학과 역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나중에 알고 보니 애셔는 제 대학교 시절 친구의 형제의 대모였더군요! 어쨌든, 유대인이었던 에셔는 서구의 그레고리력이 유대의 전통 역법과 어떻게 다른지 잘 알고 있었고, 그 부분이 특히 제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 "나 자신한테 아쉬운 점이 바로 그것일세. 지나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거든." 

 

- "저처럼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건 켈다운 행동이 아닙니다." 브레잔이 말했다. 얼른 이 대화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빌면서. "질책받아 마땅합니다." 

"아, 우리 슈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훈련을 엉망으로 만드는 생도가 나오면, 감독을 붙여서 다음 훈련을 설계하도록 지시하지. 그런 다음에는 그 훈련을 수업 시간에 써먹으면서, 모든 생도에게 그 시나리오의 설계자가 누군지를 똑똑히 일러준다."

 

- "기본 규칙대로 합니까, 각하?" 키루에브가 말했다. 왜 카드 게임에 시간을 낭비하는지 묻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제다오는 분명 슈오스만의 뒤틀린 방식으로 가르침을 전수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키루에브는 슈오스를 붙들어 앉혀서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읽기 쉬운 자막을 첨부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면 켈과 슈오스의 관계에도 상당한 진전을 보일 텐데.  

 

- "...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저런 짓을 하게 된다면, 바로 날 쏴주게. 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지껄이더라도 망설이지 말게나. 나는 어떤 헛소리든 아주 이성적으로 들리도록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 정신 복합체로 작업할 때의 물 흐르는 듯한 감각도 그리웠다. 장군은 정신 복합체를 이끌어야 하기에 온전히 편안하게 흐름에 몸을 맡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단결된 의지에 복종한다는 환상은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정도만으로도 하나되는 감각에 빠져들기에는 충분했다. 제다오는 그런 환상에 빠져 있는 것조차도 위협으로 여겼을 것이다. 어차피 역법 농도가 갑자기 하픈 쪽에 유리하게 기울기라도 하면 복합체는 즉시 작동을 멈출 테니까. 게다가 두뇌가 절반이라도 남은 켈이라면 누구든 아는 사실이지만, 복합 기술의 주된 용도는 이단과 싸우면서 작전을 조율하는 것이 아니다. 작전 사이에 내부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 "이네세르는 지난 200년 동안 등장한 최고의 전술가고, 전략가로서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또 다른 제다오가 되는 사태는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굳이 자신의 평가를 자세히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사실 이미 과거에 머뭇거리며 미코데즈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는 문제기도 했다. 제다오에 대한 일반적인 켈의 의견은 이러했다. 그는 계속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다 보니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없게 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싸울 필요가 있느냐를 따지기 전에, 일단 싸움을 통한 해결책부터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미코데즈는 그것보다는 어떤 켈 교관이 비공식적으로 남긴 간결한 표현을 선호했다. "훌륭한 전술가, 형편없는 전략가." 아마 켈 사령부에서 대신 생각해주는 큰 그림에 따라 행동하는 부류였을 것이다. 

 

- 제다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젠장. 제다오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실 제다오 생전에는 그렇게까지 심한 금기는 아니었다. 

 

- "제 어머니 중 한 명이 비도나였습니다. 비도나가 어떤 식으로 숙청을 처리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전 압니다. 숙청은 그분에게 단지 일이었을 뿐이었죠. 어머니는 종종 집으로 돌아와 제게 말해주곤 했죠. 일단 모든 작업을 최대한 세세하게 나눕니다. 지그소 퍼즐처럼요. 표적의 일자리를 제거하고, 특수 신분증을 발부하고, 처리 시설을 재기동하고, 그달의 유행에 따라 총탄이나 단검 또는 독가스 용기를 충분히 확보했는지 확인하고, 순찰을 늘려서 테러를 벌이거나 집단의 다른 사람들을 동요하게 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작은 퍼즐 조각에 집중하면 사람들이 학살당한다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 딸에게 해주지 못한 옛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다. 언어와 기도문과 시문은 어떻게든 전해주려고 온갖 애를 쓰기는 했다. 자물쇠 없는 상자를 가지고 있던 애꾸눈 성인과, 그 물건을 열 방법을 알아냈을 때 그녀의 연인들이 맞이한 운명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에 살던, 꼬리가 반 토막 난 고양이 이야기. 천상을 공격하려고 휘하의 수백만 마리 새들을 희생해서 하늘에 이르는 다리를 만들려고 했던 까마귀 장군의 이야기. 

(리뷰자 주 : 여러모로 아름다운 복선.)

 

- 두 번째 영상은 전통적인 검은색 바탕에 은빛으로 빛나는 톱니바퀴의 2번 카드였다. 톱니바퀴의 다른 카드들과 마찬가지로, 이 카드는 제다오의 상징이 되기 전에는 니라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스피렐의 설명에 의하면, 대부분의 젱자이 삽화가들은 제다오가 이 카드에 붙인 고정관념을 넘어서려고 온갖 창의력을 쥐어짜낸다고 한다. 

 

- 살아생전 쿠젠은 망령의 삶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해보곤 했다. 겪어보니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목소리만 남은 존재가 되고 대화 상대가 단 한 명의 결박 대상자밖에 없는 상황이, 인내심을 기르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 불멸성이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저 원래부터 사람이 지니고 있던 괴물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뿐이다. 동료 육두관들에게 몸소 알려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들이 직접 깨닫는 모습을 지켜보는 쪽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 저런 모호한 질문으로는 온전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하급 장교의 기초 교육 과정에서는, 반항적인 일반병도 동기만 충분하면 명령의 구멍을 파고들어 장교의 발을 묶을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 

 

- "그런 질문을 받다니 당황스럽군요. 당연히 내렸습니다. 게다가 아침 식사로는 뭔든 원하는 메뉴를 제공하라고 주선하기도 했고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는 불만 가득한 수학자들에게 의존하면 안 되는 법이니까요."

"당신 덕분에 내가 굳이 상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니까요."

 

- 여기서 미코데즈는 또 하나의 도박수를 던졌다. 체리스의 정보원이 켈 함대의 이동 역시 보고하여, 그녀 쪽의 시간표를 재고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는 체리스가 맹금의 둥지와 복수의 방위 함대를 정면으로 상대해서 자신의 함대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기다리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난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생도 두 명을 죽인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라 판단한단 말이지. 미코데즈는 이렇게 생각하며 냉소했다. 하지만 그게 목적이었다. 그는 특정한 방식에 집착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애써왔다. 더 나은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그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편을 택했다. 

 

- 키루에브는 서비터들과 카드게임을 시작했다. 이제 그녀가 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보통 이기는 쪽은 서비터들이었다. 키루에브는 서비터들이 자신의 기분을 염려해 일부러 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 슈오스 미코데즈는 스카프 뜨개질을 끝마쳤다. 스카프를 처음 받은 두 사람은 그게 당장에라도 살아나 자기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현대의 섬유 기술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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