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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윤하 / 조호근
원제 : Revenent Gun
출판 : 허블
출간 : 2020.11.30
다소 아쉬움이 있다.
3권은 그동안 가리워졌던 이들의 과거를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재조명했다.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더라면, 혹은 몇 가지 치명적인 실수들만 없었더라면 가능했을 미래에 대해서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한 권 안에 녹여내기에는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도 부족했다. 때로 나는 작가들이 자신이 가장 쓰고 싶은 몇 장면을 다 쓴 뒤에는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해지는 상상을 하곤 한다. 더 이상 쓸 에너지나 열정이 남지 않은 것이다. <나인폭스 갬빗 3>이 흐물거린다는 말은 아니지만, 저자가 가장 그리고 싶었던 부분들은 2권으로 대부분 마무리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그 이후는 '어째서 전함을 '나방'이라고 표기하는가?'에 대한 대답 몇 장면과 러프하게 구상해두었던 결말을 향한 질주만이 남아있었던 게 아닐까.
1권의 '바헨즈 아프리르 다이 노움' 같은 캐릭터를 다시 살리지는 않을까, 기억과 육체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인가 하는 논제를 다루지는 않을까 등등 기대가 컸었는데 대부분은 소모품이었다. 쿠젠의 과거도, 제다오의 과거도 다 빛바랜 조각으로만 스쳐갔다. 쿠젠에게 적용시킨 진형에 대해서는, 몇 백년 만에 겨우 찾아낸 답인데 너무 가볍게 흘러간 느낌이다.
서비터들이 유의미해지면서 불합리에 대한 시각은 나방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악역'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의 시발점, 혹은 악의의 분기점을 더듬어 올라가면 결국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존재의 이유와 동기를 가진다는 다소 허무한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실 결론 자체가 허무하다기 보다는, 그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독자를 이끌었느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허무했다. 절제를 통해 외면하고 잘라내 버렸다는 설정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데, 또 3명의 인공 신체를 배양하고 있었던 점과는 모순된다고 보인다. 그런 다정한 천성이 있었다고 말하기에는 다네스가 걸리는데, 차라리 미코데즈와 중복되더라도 영겁의 세월이 만들어낸 괴물로 이끄는 것이 더 납득이 갈 수 있는 설명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는, 작가가 브레잔에게 들려주려던 희망의 빛에 너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 같았을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다양한 각도로 인물을 살펴보는 그림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 전 권이 무척 재미있고 흡입력이 강했으며,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신선하고 방대한 세계관이 돋보였다. 분량을 조금 더 늘려서 (이미 1500여 페이지이지만) 3권을 쿠젠에 집중하고, 4권을 그 이후 세계와 제다오의 성장에 할애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철학과 윤리의 '리오즈'의 부활을 암시하며. 혹은 그를 기념하며.
도중에 페이스를 잃고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지만, 결과적으론 만족한다.
끝.
-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려면 밤에는 충분히 자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진심으로 말하는 겁니다." 미코데즈가 말을 일었다. "잔혹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서 개인의 삶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행복을 주는 단순하고 사소한 일에 몰두할 시간이 확보된다면, 목격했거나 혹은 직접 저질렀던 온갖 끔찍한 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어요. 그럼 좀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방법 대신 말이죠."
"심장 대신 단단한 얼음 껍질만 남으면 그게 먹힐지도 모르겠군요." 브레잔이 되쏘았다.
브레잔의 예상처럼, 미코데즈는 조금도 기분이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이 자리에서 이런 일을 수십 년째 하는 사람 아닙니까. 불가능한 책무에 짓눌린 채 절망하며 머리를 쏴버리지도 않은 채로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지금 포기할 생각입니까, 아니면 어떻게든 인내할 방법을 찾을 겁니까?"
"계속할 겁니다." 브레잔은 대꾸했다.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갈수록 당신처럼 변해간다 해도 알 게 뭡니까. 그렇게 돼버리라죠."
- "진형도, 진형 본능도, 나방 추진체 구속구도." 쿠젠은 말을 이었다. "그 모든 것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지금의 체제를 지켜줘야 해. 육두정의 안정도, 시민들을 먹여 살릴 능력도, 전부 체제를 고수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단 말이야."
- "나를 증오하는 일이야 내일 해도 되잖아. 모레도 좋고, 글피도 괜찮고. 어차피 우리한테는 영원한 세월이 있으니까."
- 트세야는 묘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미코데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네세르는 그 의미를 아주 잘 알았다. 진심으로 분노하면서도, 자신의 교양 때문에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 "사람들이 우리말을 믿어준다고 해도, 단순히 '괴상하게 행동한다'라는 이유만으로 이웃을 불태우지 않게 만들기는 상당히 힘들겠죠." 브레잔이 말했다.
"방향은 거의 옳게 잡은 듯하군요." 미코데즈가 끼어들었다. "읽기 전부터 지루한 공공 선전물을 만들어선 곤란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비도나 흉내를 내면서 돌아다닐 테죠. 드라마 형태로 표현하세요. 피해망상으로 가득한 개자식인 이상, 쿠젠은 분명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겁니다. 나머지 사람들이야 재기 넘치는 대사와 예쁘장한 의상을 즐길 뿐이겠고요."
- 육두관은 이렇게 썼다.
'나방은 생명을 가진 존재다. 그들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도 존재한다. 계속 연구를 진행해나간다면, 결국 우리에게 무해한 외계인을 노예로 삼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칠두정은 벌이는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고 있다. 매일 뉴스를 볼 때마다 그 점을 재확인한다. 열심히 선전물을 뿌려대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침략자들이 우리의 국경선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다. 더 빠른 항성 간 추진체만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텐데.'
이틀 후.
'나방들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어가는 아이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제발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다음 날, 평소의 필체와는 전혀 다른 삐뚤삐뚤하고 떨리는 글자로, 기록의 여백에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방법은 이미 알고 있잖아.'
- 바로 그 순간, 미코데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과거의 제다오 대장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를 깨달았다.
- 어머니 민족의 언어를 배운다고 해서, 그녀가 죽음으로 몰아간 무수히 많은 므웬인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친다고 해서, 표준 역법 체계가 몇 세기 동안 공동체에 입힌 상처가 저절로 아물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녀가 가고자 하는 미래가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문명이 진보하기 위해선, 아주 사소한 일일지언정 이를 계속해나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니까.
- 제다오는 이렇게 말하며, 이 모든 문제를 비디오 게임이라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전쟁처럼 심각한 사안을 게임으로 간주하자니 영 거북하기는 했지만.
(리뷰자 주 : <엔더의 게임>.)
- "시공간을 왜곡하는 펄스파를 방출하거든." 쿠젠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펄스파의 생성 자체가 이능력 효과에 의한 거지만, 일단 생성되고 나면 소멸할 때까지 어떤 지형으로도 전파될 수 있어. 나방 추진체 원리가 시공간을 붙들고선 자신을 끌어당기는 거잖아. 거기서 영감을 얻었지. 이런 변형 요소를 나방 혈통에 끼워 넣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 지금껏 그는 옷차림으로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는지 사소한 암시를 던지곤 했다. 주로 머리 모양이나 장신구 따위였지만, 당연하게도 후자는 비번일 때만 가능했다. 이제 비번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만.
-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권총을 찾아 더듬거렸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평소 권총을 차고 잘 만큼 피해망상이 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자신의 태도가 후회됐다. 물론, 총이 있다고 해서 침입자를 제대로 맞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 내 발을 맞히거나, 우주의 의지가 특별히 부당하게 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발에 이어 손까지도 쏘게 되겠지.
- 그는 카운트다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조작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장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잿불매 벽감 앞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우리가 개입해야겠어." 헤미올라는 갑자기 다급해졌다. "역법 농도를 봐. 표준 역법의 정상치에서 멀어지고 있잖아. 게다가 저런 식으로는 잠금장치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칠 거야."
- 무슨 말을 해도 누나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누나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육두정 전역에는 누나와 같은 사람이 가득하다. 충성스러운 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들. 그중 상당수는 주기적인 고문 의식이 지탱하는 체제에서 이득을 취했을 것이다. 브레잔 또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브레잔의 책무였다. 어차피 해내야 할 일이라면, 가장 힘겨운 청중을 상대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 "이건 쿠젠의 필적이군. 지금처럼 우아한 투는 없지만 말이야. 무슨 짓을 버리던 건지 궁금한데."
"배고픈 소녀에게 빵을 줬잖아요?" 헤미올라는 이 문장의 어디가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하지만 무슨 이유로?"
질문의 의미조차 종잡기 힘들었다. "소녀는 배가 고팠고, 그에게는 빵이 있었으니까요?"
- "당신은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나요?" 헤미올라가 물었다.
"이런 텍스트는 분당 200 단어 정도. 물론 빵 굽는 법에 비밀 암호를 숨겨놓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뭐, 쿠젠 같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려나."
- 쿠젠이 낙서를 끄적인 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생도 시절이라고 해도, 미래의 육두관에게 이 정도의 수업이 힘겨웠을 리가 없으니까.
- "그런 질문은 앞으로도 많아질 겁니다." 1491625가 말했다.
"어쩌면 먼 옛날 사라진 세계에, 그분이 칠두관에 오르게 만든 동기가 존재했을지도 몰라요." 헤미올라가 말했다.
"그래." 제다오가 말했다. "지금껏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짐작조차 못 했어. 아예 이해한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래도 쿠젠이 내내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 칠두정을 어떤 곳으로 만들 계획이었는지를 알아내야만 해. 우리 모두가 너무 늦기 전에 말이야."
- "꽉 잡고 있어." 제다오의 목소리가 우주복과 공기통의 진동을 타고 헤미올라의 외피에 닿았다.
- 쿠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움직임이 그대로 제다오의 팔로 전해졌다. 몸을 밀착시키고 그린 듯이 우아한 완벽함을 뽐내며 사지를 놀리는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치밀하게 계산된 효과를 불러왔다.
- "새로운 체리스가 필요한 건 지금의 체리스가 실패한 다음 일이겠죠. 물론 살아남아서 우리에게 실패했단 사실을 알려줘야 하겠지만요."
- 라이카의 짧은 침묵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명령은 명령이죠." 켈이 흔히 '그냥 꺼지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이게 내 임무니까'라고 말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 다네스는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살아남으시길." 감정을 억누르느라 목소리가 거칠었다. "두 분 모두." 제다오는 그의 의도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 완벽히 켈다운 조치였다. 그리고 완벽히 켈다운 복수였다. 다네스는 지휘관을 구해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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