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윤하 / 조호근
원제 : Ninefox Gambit
출판 : 허블
출간 : 2019.07.31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3부작이라는 분량에 미뤄두다 이번에 시작했다.
아. 정말 재미있다.
이 소설은 '그저 보여준다.' 자신의 세계관과 설정들을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는 낯선 세계에 내동댕이 쳐진 기분을 느끼며 허덕허덕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아주 짧은 적응 시기만 잘 넘긴다면, 그 이후는 광속으로 흘러가는 여행이다. 아주- 놀랍고 흥미롭다.
<엔더의 게임>이나 <은하영웅전설>, <다이버전트> 등도 생각이 나지만 우선 1권만 읽은 입장에서는 '번제의 여우'와 사건에 집중하고 있어 조금 결이 다르다는 인상이다. 2권 이하에서 체제와 신념에 대한 내용을 더 다루기 시작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전개는 선형으로 배치된 사건이나 복선보다는, 입체적으로 뻗어나가는 파형을 본 느낌이다. 여러 인물들이 단순하게 선악을 확고하게 재단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그들을 관찰하는 시점의 변경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듯 하면서도 일관적인 이미지가 아주 매력적이다. 특히 '번제의 여우'가 놓은 수들은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어서 -적어도 내게는- 하나의 수에 여러 가지의 의도를 복합적으로 담는다.
소설 속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역법'이다. 역법은 시간과 공간을 감각하는 기준이 되며 동시에 세계관이자 신앙과 교리관이 되며, 한 사람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내재 시스템이 된다. 그리고 그 '표준 역법'을 구성하고 수호하는 6개의 육두체제는 각 분파마다 각자의 특징을 가진다.
하위 분파로는 절대 복종의 군인 계급 '켈', 논리와 숫자광들인 '니라이', 역법에 대한 믿음과 교리를 주입하고 이단을 고문해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비도나'의 셋. 상위 분파로는 켈에 상응하며 모든 상황을 읽고 분석하고 주무르는 정치와 암살과 권모술수와 게임에 능한 여우들 '슈오스', 매혹과 호감을 통해 상대를 조종하는 '안단', 그리고 엄격한 교리와 법칙을 세우고 판단하고 처형하는 '라할'의 셋이다. 그리고 이 육두체제 이전에는 철학과 이상을 수호하던 '거미줄' 문장의 '리오즈'를 포함한 칠두체제가 존재했다.
역법을 이용한 계산과 진형은 이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주로 니라이들의 계산능력을 통한 진형효과는 해당 역법의 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인 곳 -즉 그 체계가 믿음을 유지하는 시공간- 에서 발휘된다. 이단이라고 말하는 표준 체제를 벗어난 역법이 표준 역법의 농도를 떨어트리는 것을 '역법 부식'이라고 하는데, 물리적인 느낌의 '부식'을 사용한 것에는 역법을 내면화했을 때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역법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체제의 안정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각 분파의 최고위 수장 6명을 육두관으로 지정하고, 각 분파의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계급에 따라 상위 계급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도록 만드는 진형본능을 주입한다. 그래도 상부의 지시에 불복하는 경우에는 강제로 기억과 정신을 초기화하고 새로 체제를 덧씌우기도 하는데, 이런 강압적인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 계기점에는 '번제의 여우'가 얽혀 있다.
우주선들은 '나방'이라 불리며, 기능에 따라 소멸나방, 바늘나방, 기치나방, 수납나방 등 다양한 명칭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함나방에는 보조, 수리 및 기타 업무의 수행을 위한 서비터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세모, 뱀, 새 등 기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인간은 거의 없다. 이들에게 자연물, 동식물, 또는 돌봄 노동자들이 겹쳐보이게 되는 건 작가의 의도인지 내 개인적인 가치관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작가는 이런 세부적인 설정들을 설명해주지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주지도 않는다. 그저 정신없이 전개되는 흥미로운 사건들을 펼쳐놓고 보여줄 뿐이다. 속도감에 휩쓸려 달려가다보면 어느새 낯선 용어들은 사라지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진 느낌이다. 재미있는 게임은 직접 그 게임을 실행해보면서 스스로 룰을 깨쳐나가는 것이 또 하나의 재미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독자들은 당황하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결국은 작가의 세계관 속으로 녹아든다. (특정 유머 코드는 한국적이라면 한국적이지만, 솔직히 조금 눈치채기 어렵다. 켈들이 채소 절임에 진심이라는 부분은 사실 한국인들의 김치 사랑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피클이나 락교를 떠올릴 것이다.)
얽히고설키면서 드러나는 복선과 계략과 음모, 거대한 규모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설계된 게임, 그리고 우연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가지 각색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개성을 뽐내는 캐릭터들은 그들이 속한 분파의 공통된 특성을 확연하게 보여주면서도 충분히 개별적이다.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후반부의 시점 변화에서 지칭어 변경이다. 나는 이 지칭어가 모든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서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경험하고 있는 주체와 기억하고 있는 주체, 그리고 그것이 일어났던 상황에서의 주체. 아. 좋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다가 주말을 전부 <나인폭스 갬빗>에 쏟아붓게 생겼다. <덕질에 진심인 편집자가 풀어쓴 나인폭스 갬빗 시리즈 안내서>를 어느 타이밍에 읽어야 할지 고민 중인데, 현재로서는 3권까지 모두 읽은 다음 마지막에 읽을 생각이다. 경우에 따라 1권 초반에 너무 몰입이 되지 않으시는 분들은 이 책이 무료 이북으로 제공되고 있으니 이것부터 읽어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만약 스포라면 경고가 되어 있을테니 먼저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수고까지 거치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싶으시다면, 나는 마지막 디저트로 <안내서>를 아껴놓고 있을 만큼 행복하게 읽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지금 읽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어쩌다보니 최근 한국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위주로 읽어오고 있었는데, <나인폭스 갬빗>은 작가가 한국계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미국적인 색채가 더 강렬하다. 뭐라고 꼬집긴 어렵지만, <기억전달자>나 <엔더의 게임> 같은 느낌이랄까.
아주 즐겁게 읽고 있다. 주말 일정을 모두 반납해도 행복하다.
2권 시작.
(덧)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책이다. 같거나 비슷한 이름의 영화들도 있지만, 가능하면 책으로 읽고 비교해보시면 더 즐거우실 것이다.
<엔더의 게임 - 엔더스 게임> / <기억전달자 - 더 기버> / <은하영웅전설 - 은하영웅전설> / <다이버전트 - 다이버전트>
- 두 사람이 역법 실험을 강행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모든 육두관이 익히 알고 있고, 직접 듣지 못한 쿠제조차 짐작할 수 있는 그것. 그들은 보다 온전한 불멸성을 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쌓여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존하는 역법 체계에서 쿠젠보다 온전한 불멸성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그게 정말 사실인지 미코데즈라면 거리낌 없이 쿠젠에게 물어볼 수 있겠지만, 그는 다른 육두관들을 대신해 쿠젠을 감시하는 입장이었다. 쿠제도 뻔히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가 직접 암시를 흘렸다면 이루자는 언짢아했을 것이다.
- 이처럼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다른 육두관들을 쿠젠이 용인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멸성이 육두정부의 표준 역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 역법 체계는 단순히 시간을 계측하고 표기하는 것을 넘어, 모든 역학과 사회구조까지 포괄하는 시스템이다. 육두정부의 경우 여섯 개의 분파가 그 구조적 근간이 되는데, 만약 쿠젠이 경쟁 분파가 없더라도 자신의 불멸성을 유지할 방법을 고안해낸다면, 쿠젠은 육두정부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 '수레바퀴'가 새겨져 있었다. 각각의 바큇살 끝에는 각 분파의 문장이 그려져 있고, 고위 분파의 맞은편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위 분파가 배치되어 있었다. 흔드는 꼬리마다 눈꺼풀 없는 눈이 달린 슈오스의 '구미호' 맞은편에는 켈의 타오르는 '잿불매'가 있었다. 안단의 '칼날장미’ 맞은편에는 비도나의 '독가오리'가, 라할의 '예지늑대' 맞은편에는 날개에 별이 반짝이는 니라이의 '공허나방'이 있었다.
- 도박에서 돈을 따내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나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확률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다. 체리스는 상황 파악과 확률 계산을 전부 끝마쳤다. 물론 이번 도박판에 걸린 건 돈이 아닌 목숨이며, 패배할 경우 어떤 참혹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도박은 시작됐고, 이제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하지만 온갖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생동하는 문화들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잡음 앞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나열된 기록들이 얼마나 부질없어지는지 체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켈 사령부에서 정리한 까마귀 향연의 도시 기록 정보를 열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로 기록된 모습을 목격했다. 각각의 정보는 물론 전부 사실이었지만, 그 기록 목록은 까마귀 떼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날아오를 때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피어오른 흙먼지가 그려내는 신비로운 궤적이 어떤 인상을 주는지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 "저들이 포술 담당을 어디서 협박해 끌고 왔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갈망하는 반딧불의 도시’ 산 최고급 포도주 몇 상자를 내놓을 수도 있겠어요. 아마 제다오가 만화경 함대를 처리할 때 임무를 맡겼던 사람과 동일인이겠지요. 수학 쪽으로 비범한 직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분명해요. 그리드에 숫자를 입력하는 것 정도야 바보라도 할 수 있지만, 어느 숫자가 어째서 중요한지를 알려면 근간이 되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법이거든요."
- 세상의 모든 전투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북소리의 물결이 되어, 전사의 머릿속 한구석에서 영원히 울려 퍼진다. 그리고 전사는 전투를 겪은 횟수만큼, 북소리의 물결이 거대해지는 만큼, 나이를 먹게 된다. 문득 눈을 깜빡이니, 그녀는 소멸나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나이를 먹어버린 채로.
- '깃을 품은 잿불매'는 체리스가 신중한 성격이라는 걸 나타냈지만, 정작 본인은 문장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개인 문장이 완전히 엇나간 예는 금방 찾을 수 있다. 지표는 어디까지나 추정된 결과물일 뿐이지, 이미 정해진 미래의 모습까진 아닌 것이다. 대반역자이자 미치광이였던 슈오스 제다오의 경우, 선견지명을 갖춘 전략가란 뜻을 가진 '사방에 눈이 달린 구미호'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번제(祭)의 여우’ 임이 드러났다. 최후의 리오즈 칠두관은 온 세상을 서로 연결하는 '거울거미줄'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슈오스와 켈과 라할의 병력 앞에서 산산조각 난 채 죽음을 맞이했다.
- 면담이 끝난 뒤에도, 체리스는 단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깃을 품은 잿불매의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어릴 적엔 개인 문장이 바뀌어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길 기대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도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 참새형 11번은 참새형 2번이 너무 어리고 미숙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에 서툰 체리스도 너무 무르다고 지적했다. 그녀가 검은 요람 안에서 무사히 돌아오려면, 차라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예 모르는 편이 나았다. 만약 그녀가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낸다면, 낌새를 맡은 니라이 육두관이 즉각 그녀를 제거할 것이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결국 참새형 2번은 참새형 11번의 생각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어차피 체리스가 쿠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면, 서비터 통신망을 따라 소문이 퍼질 테니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체리스가 어느 전함나방에 탑승하든 간에 서비터는 있을 테니까. 물론 그녀가 서비터를 단순한 대화 상대가 아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의지할 만한 상대로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비터들은 먼저 도움의 손길을 건네진 않더라도,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동료를 뿌리치진 않는다. 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이라도, 동료가 정중히 부탁한다면.
- "명령은 아닌 거지요."
그녀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렇다. 그대들은 켈의 일원이지만, 전통적으로 특정 영역에서만 임무를 수행해왔다. 그대들이 인간이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데, 인간이 감당하는 임무를 감당하라고 말하는 건 부당하다. 내가 그대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부탁뿐이다."
- "우리는 켈입니다. 따라서 켈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비록 전투에 적합하게 제작되진 않았지만, 켈이 우리가 싸우길 바란다면 우리는 켈답게 싸우겠습니다. 켈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 "이렇게 우릴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장군님도 그러셨으니까. 너희들이라면 진형 능력을 어렵지 않게 깨우칠 수 있을 거야."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켈이 예절을 학습하다니. 켈의 예절 학습 가능 여부는 꽤나 옛날부터 켈 서비터들이 자못 애정을 담아 토론해온 주제였다.
- "켈의 충성심이란 늘 하늘을 찌르니까 말일세. 그렇다고 자네를 사령관으로 인정해준다는 얘기는 아니야. 오히려 특진으로 계급을 앞지른 자네에게 노골적으로 혐오를 내비칠 가능성이 커.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혐오가 동정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일세. 자네가 나한테 조종당한다고 여기는 순간 전부 끝장이야. 결코 자네를 동정하도록 놔두지 말게. 동정심만큼 존경심을 빨리 앗아가는 것도 없다네." 제다오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게다가 육두관들이 예상보다 빨리 나를 끌어내릴 수도 있어. 그땐 오롯이 자네 혼자서 헤쳐나가야만 할 거야. 그런 긴급 상황에도 대비를 해두는 게 좋지."
- 뚱한 얼굴의 다른 소멸나방 함장인 켈 파이잔이 고개를 저었다. "함장, 장군 앞에 예의를 갖추게."
"자네가 직접 다물게 했어야지." 제다오가 중얼거렸다.
체리스는 제다오가 하는 말에 동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옳으며 자기 자신도 동의하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 네레보르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끼어들었다. "장군, 어느 전함나방를 기함으로 삼으실 겁니까?"
애초 계획으로는 상급자인 파이잔 함장의 <따뜻한 환대>호를 기함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관습을 깨야 할지라도 네레보르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될 것 같았다. 나아가 그녀가 방금 던진 질문도 함정이라는 걸 체리스는 눈치챘다.
"잘 생각했네. 하지만 표정은 좀 더 신경 쓰게. 누누이 말하지만, 자네 얼굴에 전부 드러나고 있어, 자네 감정이 말일세." 체리스가 입을 여는 순간, 제다오가 끼어들었다.
"<무언의 법령>호에서 지휘하겠다." 체리스의 방금 결정은 파이잔으로선 충분히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한 명령이었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뿐이었다. 체리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을뿐더러, 거기에 동의한 것이 분명했다. 네레보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체리스는 덧붙였다. "우리 함대의 문장은 비워둘 것이다." 체리스는 말을 내뱉자마자 네레보르의 표정을 살폈고, 그녀의 얼굴에 잠시 혐오감이 내비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네." 제다오가 말했다.
- "그래도 저는..."
제다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단자들은 지금 동요하고 있네. 방어막이 뚫리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당연하겠지. 그렇다 해도 망령에 불과한 내가 육두정부에서 탈주하고, 심지어 매혹이나 협박만으로 켈 함대를 통째로 수중에 넣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것도 소멸나방이 두 척이나 포함된 함대를 말이야.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야만 하네. 적당히 바람을 집어넣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저들이 알아서 이야기를 꾸며내 빈틈을 메울 걸세. 현 상황에서 상상력을 부추기는 데엔 함장 인질이 제격이지. 켈이라면 절대 하지 않겠지만, 나라면 꽤나 할 법한 일이지 않은가. 켈은 결코 그런 식으로 싸우진 않지."
"젠장, 맞아요. 아주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체리스가 내뱉었다. "우린 절대로 그렇게 싸우지는 않을 겁니다."
"좋아, 받아주지. 햇병아리." 제다오는 군대식으로 말했다. 체리스는 목덜미를 따라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대안책을 제시해보도록."
이 말에 체리스는 말문이 막혔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를 벌린 다음, 우리가 가진 모든 폭탄을 쏟아부어 방어시설을 날려버리는 겁니다."
"대안이 있다면야 기꺼이 훑어봐주겠지만," 제다오는 방금 그녀가 되는대로 내뱉은 말을 적절하게 무시했다. "아무래도 대안이 없나 보군."
- "나는 뭐든 미리 계획하는 편이 좋다고 믿는 편이라네. 내 악명을 이용했던 건 단순히 이단자들을 위협하려는 의도만은 아니었어. 육두정부 충성파를 자극해 정보를 풀게 만들고, 이를 이용해 이단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지. 충성파 쪽에서야 내가 켈 사령부 명령에 따라 여기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없고, 우리 쪽에서도 알릴 방도가 없으니까 말이야. 모두 연결된 것이라네. 이번 일을 계기로 자네를 비롯한 함대의 전 병력이 자신들을 이끌고 있는 게 누군지 확실히 깨닫게 된 것도 마찬가지지. 이 정도면 자신의 사령관이 광인이자 대반역자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꽤나 도움이 되지 않았겠나."
"목적이 꽤나 많았군요."
"세 개뿐인데 뭘. 마지막 목표는 덤일 뿐이고. 말을 움직일 땐 항상 여러 각도로 바라보면서, 여러 목표를 노려야 하는 걸세. 효율적인 행동의 효과는 순식간에 중첩되거든."
- 체리스는 선실 안을 걸어 다니며 지금 감각되는 방의 넓이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자신이 원래 누구인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문득 뭐라도 손에 들고 싶다는 생각에 슬레이트를 가져다 달라고 서비터들에게 주문했다. 세모형 서비터 한 대가 두께가 느껴질 정도로 얇으면서 금으로 두른 테두리 때문에 기울일 때마다 반짝이는 슬레이트를 가져다주었다. 서비터는 걱정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 그러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그리드 위에 떠다니는 반쯤 완성된 기호일 뿐인데도, 켈 함대에 자꾸 자신을 대입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요새 사령관 역할을 맡아보니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점이 명확해졌다. 이단 쪽의 승리 조건이 불명확한 데다, 가용 수단도 육두정 쪽으로 치우쳐진 경향이 있었다. 게임 자체가 전반적으로 모호했다. 이단 쪽도 분명 나름의 목표와 동기가 있을 것이고, 이를 이루기 위한 가용 자원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임엔 그런 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
- "아직 끝나지 않았네. 가르침은 두 가지가 더 있네. 하나는 게임의 가치가 개념 추출 수준에 달려 있다는 걸세. 니라이들은 종종 게임을 현실의 모의실험으로 여기는데, 자네도 비슷한 성향이 있어. 명심하게, 모든 변수를 입력하는 것보다, 필요 없는 변수를 배제해버리는 쪽이 본질에 접근하기 쉽다. 군더더기는 전부 쳐내고, 가장 단순한 형태가 될 때까지 졸이는 거지."
- "다른 하나는 이걸세. 자네는 게임이 뭐라고 생각하나? 게임을 하는 이유가 뭐지?"
경솔하게 대답해봤자 창피만 당하겠지만, 입을 다물고 있어선 질문의 의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승패를 가르는 걸까요? 아니면 모의실험 기능일까요?"
"흥미롭군, 전자는 켈이 할 법한 대답이고, 후자는 니라이가 할 법한 대답이야. 라할이라면 게임의 의미는 규칙에 있을 거라 말할 테고, 안단이라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의의가 있다고 답하겠지. 비도나야 상부에서 승인하는 답변을 그대로 반복할 테고."
"각하는 슈오스니, 슈오스가 할 법한 답을 알려주시겠지요."
"슈오스라면 아마도 이렇게 답할 걸세. 게임의 진정한 의미는 행동교정에 있다고 말이야. 게임은 규칙을 통해 어떤 행동에 제약을, 반대로 어떤 행동에 이점을 제공하지. 물론 속임수를 써서 규칙을 흩트려 놓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도 대가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이 또한 중요한 행동 교정의 요소라 할 수 있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실 세계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 카드, 토큰, 기호가 게임 세계에선 엄청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게 되지 않나? 이 또한 게임 규칙 때문이지. 이에 비추어봤을 때, 모든 역법 전쟁은 서로 다른 규칙들이 경쟁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그런 역법들의 원동력은 사람들의 신념 체계인 것이고, 역법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런 식으로 게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네."
뼛골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포위전은 위장일 뿐이군요. 당신은 이단자들을 게임판으로 끌어들인 다음, 죽음으로 몰아붙이려는 거지요."
"역법 전쟁은 마음으로 겨루는 전쟁이라네, 체리스. 결코 총포로 싸우는 게 아니야. 얼마 전에 자네가 몸소 겪었던 것처럼 말일세."
"그래서 프로파간다 얘기를 하신 거고요."
"리오즈가 처음 전쟁을 치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이단자들이 떠올려줬으면 하니까. 물론 리오즈와 완전히 다른 부류일 수도 있겠지만, 방어막 조종자가 세계의 거미줄에 대해 보인 반응을 미루어봤을 때, 아무래도 그건 아니겠지. 아마 저쪽 지도자는 요새 시민들이 리오즈가 맞이했던 운명을 상기하지 않도록 노력 중일 걸세. 제아무리 숨긴다 한들 모두의 마음속 한구석에 걸림돌처럼 남아 있겠지. 때때로 뻔히 보이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네. 적어도 저들이 반응하는 걸 보고 뭔가 얻어낼 수 있지 않겠나."
- 그녀는 슈오스이며 따라서 칠두관의 사유물일 뿐이다. 저항의 여지조차 그녀에겐 없다.
키아즈의 손이 아래로 향한다. 시야가 검붉게 물들어가는 순간, 체리스는 오로지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키아즈의 손놀림은 매우 훌륭하다.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써 참아보지만 심장 박동이 상승한다. 슈오스는 게임이나 의무를 배제한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키아즈의 경우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져 자신의 애무에 방점을 찍는 일을 즐겼다.
문득 키아즈가 제복을 벗기 위해 단추 쪽으로 손을 올리는 순간, 체리스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녀의 손목을 붙든다. 벗지 말라고. 애원해버리고 만다.
이러면서 전략가랍시고 돌아다닌단 말이지. 체리스는 자신을 책망하며 격정에 사로잡힌다. 가슴 깊이 묻어둔 수많은 욕망 중에서도 하필이면 그걸 들키다니. 숨결이 거칠어진다. 욕망을 억누를 수만 있다면 이 상황에서도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키아즈의 질문에 대답하며, 대화를 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칠두정에 대한 반역 계획을 마음속 깊이 숨기기 위해선 갈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야 한다.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가고 싶으면.
- "대령, 칠두관을 모독하는 언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네." 체리스는 차갑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기제드는 지금 한 말만으로도 반역죄로 고발될 수 있다. 물론 대부분 그런 사소한 일까지 고발하며 시간을 낭비하진 않지만, 키아즈는 순전히 변덕만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과거 경험에 따르면. "내가 거부할 수도 있었다."
"무슨 헛소리를." 기제드가 말한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는다.
"나는 슈오스야. 그녀는 내 칠두관이고, 나는 그녀에게 속해 있네. 그런 식으로 나를 사용하고 싶다면, 나는 그대로 사용될 뿐이야." 자기 말이 얼마나 켈스럽게 들리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조금 전까지 키아즈가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행사한 것만 보더라도.
오래전 켈에 전출돼 군 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체리스는 멍청하게도 칠두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같은 슈오스이면서, 그녀가 뒤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란 걸 미처 생각지 못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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