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엘리자베스 문 / 정소연
원제 : Speed Of Dark
출판 : 푸른숲
출간 : 2021.10.27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과 내일의 '나'일까?
자아의 연속성과 정상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하는 루는 낯설고 친숙하다. 자폐인이지만 자신만의 직업과 공간을 가지고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나가는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가르는 경계와 차이에 관해 항상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작업을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지 못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한 사람의 성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처음 독자로서 마주하는 루는 독특한 사고방식과 언어형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세계는 익숙지 않은, 지나치게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곳이었다. 원하지 않는 자극, 기대되는 반응, 알 수 없는 정답.
하지만 글을 읽어나갈수록 서서히 그의 주변 인물들보다 루에게 이입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생각, 판단, 결정은 충분히 '정상적'이었고, 주변인들이 그에게 날 세워 들이대는 '다름'이란 오히려 그 주변인들 간의 간극을 지칭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사회는 훨씬 명확하고, 바르고, 때로 그렇지 못하기에 부조리한- 때로 우리가 순수한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았다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성인다운 날카로운 분석이 포함된- 것이었다.
보통, 보편, 평범, 정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역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모든 것은 연속된 스펙트럼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선을 긋는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관찰해보면 어둠과 빛 사이 어디쯤엔가 존재한 각자의 위치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둠의 속도'. 어둠이 빛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것은 빛/어둠의 스펙트럼 안에 존재할 뿐이다.
루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의미로 변화해가는 '어둠'. 그리고 '어둠의 속도'.
<잔류 인구>를 읽고 마음에 들어 찾아 읽게 된 <어둠의 속도>는 복간되어 감사한 작품이었다. 저자의 다른 작품들이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덧) 국내에 소개된 시기는 훨씬 뒤지만, 이 책이 처음 발표된 시기가 2002년임을 떠올려보면 더욱 놀라운 점들이 많다. (<잔류 인구>는 96년 작품이다!) 소설 내의 배경은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근미래적인데,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복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 등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여내다니. 그에 불만을 품고 폭발하는 돈이나 크렌쇼 같은 캐릭터가 무엇을 대표하는지를 조금 더 깊게 관찰했더라면 트럼프의 당선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루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는 매우 복잡한 마음인데, 에필로그에서 베일리의 예 역시 언급은 되지만 불과 몇 줄일 뿐이다. 자신의 사례를 들어 다른 이들도 치료를 받기를 바라는 듯한 루의 생각이 조금 불편했다. 결국 그것이 맞는 방향성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은 더 다양한 선택을 존중한다는 표현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저자가 최선을 다해 양면적 시각으로 다루고자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치료를 더 희망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교회 목회자의 입을 빌어 요한복음의 실로암 연못을 들며 '지금 이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과 '보다 나은 내가 되고자 하는 것' 사이의 딜레마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결국 그 에피소드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주인공의 선택과 결과라는 점에서 '치료'에 더 큰 무게가 실리게 된다.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이전에 출간되었던 북스피어 출간작과 비교해보지는 못했으나 동일한 역자임을 감안할 때 오타가 꽤 많은 편이다. 루의 어휘를 그대로 옮기기 위해서는 아닌 것이, 그의 시각이 아닌 다른 인물의 대사나 상황 묘사에서도 나오기 때문이다. 몰입이 자주 깨져 꽤 아쉬웠다.
- 전문가답고 똑똑한 포넘 박사가 눈썹을 치켜들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흔든다. 자폐인들은 이런 신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안다. 내가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물의 범위이다. 정상인들, 진짜 사람들, 학위를 따고 책상 뒤 편안한 의자에 앉는 사람들. 박사가 무엇을 모르는지 몇 가지는 안다. 박사는 내가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 말이 무의미하고 기계적이라고, 내가 뜻도 모른 채 입내 내기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하는 입내 내기와, 그녀가 글을 읽을 때 하는 행동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포넘 박사는 내가 많은 어휘를 안다는 것도 모른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만큼이나 흥미롭고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누군가 알아낼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력에 대한 것이다. 만약 중력이 두 배 강한 세상이 있다면, 공기가 빽빽할 테니 그 세상의 선풍기 바람은 더 세서 냅킨만이 아니라 컵까지 탁자에서 떨어뜨리지 않을까? 아니면 중력이 강할수록, 센 바람에 움직이지 않을 만큼 컵을 탁자에 더 단단히 붙잡아둘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은 넓고 무섭고 시끄럽고 미쳤지만 폭풍의 중심은 여전히 아름답고 고요하다는 것이다.
- 내가 다루는 기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고 혼란스럽다. 내 일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회사가 내게 차와 아파트를 유지할 만큼 월급을 주고, 체육관과 포넘 박사와의 상담을 마련해 주는 것을 보면, 중요한 일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패턴을 찾는다. 어떤 패턴들은 특이한 명칭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눈에는 늘 쉽게 보였다.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묘사하는 방법만 배우면 되었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고른다. 슈베르트는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는 너무 풍성하다. 찾고 있는 패턴을 그대로 반영하는 복잡한 패턴을 가진 바흐가 딱 맞다.
- "어둠의 속도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어." 내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한다. 말을 하면, 잠깐이라도 다들 나를 바라볼 것이다. 모두의 시선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어둠에는 속도가 없어. 어둠이란 빛이 없는 공간일 뿐이야." 에릭이 말한다.
"만약 누가 중력이 1 이상인 세상에서 피자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린다가 묻는다.
"몰라." 데일이 걱정스런 말투로 대답한다.
"무지無知의 속도야." 린다가 말한다.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이해한다. "무지는 지知보다 빨리 확산하지." 린다가 씩 웃고 고개를 꾸벅인다.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 "그렇다면 저 덩어리들은 뭐지?" 그가 묻는다.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선생님들이 학생이 알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자신이 답을 아는 질문을 하는 경우처럼, 책에서 교육적인 담화라고 부르는 종류의 물음일까? 만약 그가 정말 모른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뜻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정말 안다면, 내가 그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화를 낼 것이다. 사람들이 뜻하는 대로 말한다면 훨씬 간단해질 텐데.
- 마침내 나는 아파트로 들어가 내 집으로 올라간다. 조용한 음악, 쇼팽의 <전주곡>을 튼다. 작은 소스 냄비에 물을 두 컵 붓고, 국수와 채소 한 묶음을 꺼낸다. 물이 끓는 동안, 올라오는 물거품을 쳐다본다. 처음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는 거품을 보고 아래에 있는 점화구의 패턴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물이 정말로 끓기 시작하면 빠른 거품이 여러 개씩 생겨난다. 여기에 뭔가 중요한 점이, 그저 끓는 물의 순환 이상의 뭔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계속 들지만, 아직 패턴 전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국수와 채소를 넣고 설명에 쓰인 방향대로 젓는다. 나는 채소가 끓는 물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바보처럼 춤춰대는 채소들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 나는 타일들 사이의 선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을 지나 끊어지지 않고 돌아 내려오는 자리를 찾는다. 이 복도에는 선이 꼭 맞지는 않아도 거의 만나는 자리가 한 군데 있다. 예전에는 복도가 두 배로 길어지면 선이 만나는 자리가 두 군데 생기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패턴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모든 선이 정확히 두 번 만나기 위해서는 복도가 지금의 5와 3분의 1배 길이여야 한다.
- 다른 역할을 맡은 나를 상상했었다. 내가 정상이 되고,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며, 환상은 희미해졌다. 나의 한계는 현실이었고, 내 삶의 테두리에 그어진 변하지 않는 굵고 검은 선이었다. 내가 연기하는 역할은 정상인뿐이다.
- 모든 책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장애의 영구성이었다. 초기 개입은 증상을 개선시킬 수 있지만, 핵심 문제는 그대로 남았다. 나는 날마다, 마치 몸 한가운데에 커다랗고 둥그런 돌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내가 하거나 하려고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묵직하고 불편한 존재처럼 그 핵심 문제를 느꼈다.
만약에 그 문제가 없다면?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나의 장애에 대해 읽기를 포기했다. 나는 화학자나 생화학자나 유전학자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제약 회사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약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내 컴퓨터를 흘러 지나가는 패턴들, 내가 찾아내어 분석하는 패턴들과 회사가 내게 만들어 내기를 바라는 패턴들밖에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것을 배우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 방식이 통했다.
- 일곱 살 때, 부모님이 자전거를 사 주셨고, 어떻게 타는지 가르쳐 주려고 하셨다. 부모님은 내가 일단 앉아서 부모님이 자전거를 잡고 있는 사이에 페달을 밟고, 그런 다음에 직접 핸들을 움직이기를 바랐다.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핸들을 잡고 조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그것부터 배우려고 했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마당을 돌며, 핸들이 어떻게 흔들리고, 움직이고, 앞바퀴가 잔디나 돌 위로 오를 때면 어떻게 젖혀지는지를 느꼈다. 그런 다음에 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아 그런 식으로 또 돌면서 핸들을 움직이고, 자전거를 넘어지게 하고, 도로 세웠다. 마지막으로 도로와 집 현관 사이의 경사로를 따라 두 발은 땅에서 띄웠지만 언제든지 멈춰 설 수 있게 페달을 밟지 않은 채 자전거를 미끄러뜨렸다. 그런 다음에는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다시는 넘어지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하느냐를 아는 것이 전부이다. 올바른 자리에서 시작해서 모든 단계를 따라가면, 올바른 끝에 도달한다.
- "몸은 움직이지만, 패턴은 움직이지 않아요. 패턴은- 제 눈에 보이면 가만히 있어요.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기가 쉽죠."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그렇다면- 네 공격 계획은 어떻게 세워? 네 공격에는 패턴이 없나?"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 옮겨갈 수 있어요..." 톰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나는 다른 설명 방법을 찾아 고심한다. "목적지로 운전해 갈 때, 가능한 경로가 여러 가지 있겠죠. 선택할 수 있는 많은 패턴들이요. 한 가지 길에서 출발했으나 그 패턴을 사용하는 길이 막혀 있다면, 다른 길로 가서 다른 패턴을 이용하겠지요?"
"너는 길을 패턴으로 보니?" 루시아가 말한다. "나는 길을 선으로 봐- 한쪽 길에서 다른 쪽 길로 가려는데 교차로가 같은 구획 내에 있지 않으면 굉장히 고생을 하지."
- 머릿속을 울리는 음악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다. 집에 이 곡 음반이 네 장 있다. 펄먼이라는 20세기 연주자의 아주 오래된 음반이 내가 좋아하는 연주이다. 세 장은 더 최근 것으로, 두 장은 연주가 상당히 훌륭하지만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고, 한 장은 작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드리스 바이-카사델리코스라는 아직 아주 어린 연주자의 녹음이다. 바이-카사델리코스는 나이가 들면 펄먼만큼 좋은 연주자가 될지도 모른다. 펄먼이 그녀 나이였을 때의 실력을 나는 모르지만, 그녀는 열정을 갖고, 긴 음을 부드럽고 가슴 저미게 뽑아낸다. 이 음악은 어떤 종류의 패턴을 다른 패턴들보다 더 쉽게 보이게 한다. 바흐는 대부분의 패턴들을 드러나게 하지만, 어떤 패턴들은 드러내지 못한다... 타원형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다. 이 음악의 긴 움직임은 바흐가 드러내는 원형 패턴들을 흐릿하게 하여, 유동성에서 안식을 찾는 긴 비대칭 구성요소들을 찾아내고 형성하는 작업을 돕는다.
- 어두운 곡이다. 나는 이 곡을 밤에 바람을 받아 날리며 별들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군청색 리본들처럼 길게 굽이치는 어둠의 선들로 듣는다. 이제 조용히, 이제 크게, 이제 바이올린 독주, 그 뒤에서 그저 숨 쉬고 있는 교향악단, 그리고 이제 크게, 기류를 탄 리본들처럼 교향악단을 넘어 위로 날아가는 바이올린. 나는 이 곡이 세고와 클린턴을 읽는 동안 떠올리기에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점심을 먹고 송풍기의 타이머를 맞춘다. 이렇게 하면 움직이는 빛의 반짝임이 작업으로 돌아갈 시간을 알려줄 것이다.
- 레고와 클린턴은 뇌가 가장자리, 각, 감촉, 색깔을 처리하는 과정과 그 정보가 시각 처리 단계들 앞뒤를 오가며 흘러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들이 언급하는 참고 도서가 이십 세기 것인데도, 나는 얼굴 인식을 맡는 별도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가 나중에 시력을 찾은 사람들은 다양한 방향으로 놓인 물체를 인식하는 기능이 손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자들은 반복해서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두부 손상, 뇌졸중, 동맥류로 뇌에 외상을 입은 사람들의 맥락에서 내가 경험한 문제들을 설명한다. 내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 격한 감정을 느낄 때 변형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일그러지지 않는 것은, 그저 나의 뇌가 형태의 변화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 전화가 울린다. 나는 전화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던 일에서 튕겨 나오게 되고, 상대편은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말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쉰다. 나는 "루 애런데일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처음에는 잡음만 들린다.
- "아마 그래도 그 여자가 그를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차라리 당신 탓을 하죠. 제 말은, 만약 이 모든 일의 범인이 그라면 말입니다." 스테이시 씨가 단말기를 흘끔 내려다본다.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돈은 낮은 수준의 직업을 연달아 가졌습니다. 가끔은 스스로 그만두고, 가끔은 해고당하면서요... 신용 등급이 낮군요... 스스로 실패했다고 여기고, 만사의 책임을 미룰 누군가를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정상인들이 자신의 실패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리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정상인들이 실패하기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겁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 너무나 커서 나를 온통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한 어둡고 형체 없는 슬픔이다. 돈은 정상인이다. 그는 아주 많은 일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었다. 왜 그걸 포기하고 이런 식으로 살까?
- "온갖 사회지원이니 하는 헛소리들, 젠장, 만약 너나 너 같은 것들이 없었다면, 나머지 세상이 또 불경기로 빠져드는 일도 없었을 거야. 나도 이런 쓰레기 같은 밑바닥 일이나 떠맡는 대신 내게 걸맞은 직업을 가졌을 거라고."
나는 돈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알았어야 했다. 나는 돈에 관한 일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그가 바라는 직업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집 안을 훑어보고 나 자신의 반응, 내가 갖고 있는 규칙성에 대한 필요, 연속성이나 패턴을 갖고 되풀이되는 현상에 대한 나의 매혹을 생각한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연속성과 패턴을 어느 정도는 즐긴다. 예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나는 더 잘 이해한다. 우리 자폐인들은 인간 행동과 선호 지표의 한쪽 끝에 있지만,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마저리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정상적인 감정이지, 이상한 감정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눈의 다른 색들을 더 잘 알아볼지도 모르지만, 그녀 가까이에 있고 싶다는 갈망은 정상적인 갈망이다. 잠잘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나는 나의 완벽하게 정상적인 몸을 본다- 정상인 피부, 정상인 머리카락, 정상인 손톱과 발톱, 정상인 생식기, 무향 비누를 선호하는 사람. 늘 같은 물 온도, 같은 수건의 감촉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이를 닦은 후 세숫대야를 씻는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내 얼굴처럼 보인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얼굴이다. 빛이 나의 시야 범위 안에 있는 정보를 싣고, 세상을 싣고 눈의 동공으로 밀려 들어오지만, 내가 빛이 들어가는 곳을 응시하면 보이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어둠, 깊고 부드러운 어둠이다. 그 이미지는 거울뿐 아니라 내 눈과 뇌에도 담겨 있다.
- 빛의 잔상이 어둠 속에서 타오른다. 나는 눈을 감고, 서로의 맞은편을 떠다니며 우주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극점들을 본다. 처음에는 단어가, 이어서 단어를 대체하며 이미지가 나타난다.
빛 light은 어둠의 반대이다. 무거움은 가벼움 light의 반대이다. 기억은 망각의 반대이다. 존재는 부재의 반대이다. 이들은 꼭 같지 않다. 무거움의 반대인 가벼움을 뜻하는 light는 이미지로 다가오는 빛나는 풍선보다 더 가볍게 느껴진다. 빛나는 구가 떠오르고, 내려가고, 사라지자 빛이 번득인다...
- 한 번은 어머니에게 잘 때는 눈을 감고 있는데 꿈에서 어떻게 빛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왜 꿈은 모두 깜깜하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알지 못했다. 책은 내게 뇌 내 시각 처리 과정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이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이유가 궁금하다. 어째서 어둠 속에서도 꿈은 빛으로 가득할 수 있는지 틀림없이 다른 누군가도 물은 적이 있을 것이다. 뇌가 이미지를 생성한다지만, 대체 이미지 속의 빛은 어디에서 올까? 깊은 암흑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할까? 사람들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뇌 스캔 결과가 나타내는 패턴은 다르다. 그렇다면 꿈속의 빛은 빛의 기억일까, 혹은 다른 무엇일까?
- 내 머릿속에 든 것은 빛과 어둠과 중력과 우주와 칼과 식료품과 색깔과 숫자와 사람들과 온몸이 떨릴 만큼 아름다운 패턴들이다. 나는 아직도 왜 내가 다른 패턴이 아니라 이런 패턴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책은 사람들이 생각해 낸 질문에 답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답하지 않았던 질문을 생각했다. 나는 늘, 아무도 한 적이 없으니 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다른 누구도 생각해 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둠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무지의 심해에 처음으로 닿은 빛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질문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 한 작가는, 별빛은 온 우주에 퍼진다고 했다. 만물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 작가는 어둠은 환영幻影이라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루시아의 말대로 어둠에는 속도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경우인 단순한 무지도 있지만, 이해의 빛을 어두운 편견의 덮개로 가리는, 알기를 거부하는 고의적인 무지도 있다. 그러니 나는 긍정적인 어둠이란 것이 존재할지도 모르고, 어둠이 속도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어머니는 음악만 들으러 교회에 가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음악만을 들으러 교회에 가지 않는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에 간다. 하지만 음악은 내가 이 교회에 오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오늘은 다시 바흐이고 -우리 연주자는 바흐를 좋아한다- 내 마음은 패턴의 수많은 가닥들을 쉽게 짚어 내어 연주를 따라 가닥들을 따라간다. 음악을 이렇게, 진짜 삶 속에서 들으면 녹음을 들을 때와 다르다. 내가 들어가 있는 공간을 더 의식하게 된다. 음이 벽에 부딪히고, 이 공간만의 독특한 화음을 이루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다른 교회에서 바흐를 들어 보았는데, 어째서인지 바흐는 늘 불협화음이 아니라 화음을 이룬다. 대단한 수수께끼다.
- 나의 자의식이 제한적이고 역할 지시적이라면, 최소한 그것은 나의 자의식이지 다른 사람의 자의식이 아니다. 나는 후추가 든 피자를 좋아하고, 안초비를 넣은 피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를 바꿔도, 나는 피자에 안초비가 아니라 후추가 든 편을 좋아할까? 나를 바꾸는 사람이 나를 안초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면, 바꿀 수 있을까? 뇌의 기능에 대한 책에는 표현된 선호는 선천적인 감각 처리 과정과 사회적 적응의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안초비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사회적 적응 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 감각 처리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안초비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 안초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초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하기나 할까?
- 안초비를 좋아하지 않는 루는 사라지고, 안초비를 좋아하는 새로운 루가 과거 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지금 안초비를 좋아하느냐 아니냐뿐 아니라, 내 과거이기도 하다. 만약 내 욕구가 충족된다면, 욕구가 무엇인지가 유의미할까? 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과 안초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 예전의 루는 대체 왜 이런 일에 동의했지? 어떻게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있었을까? 그를 붙들어 흔들고 싶지만, 이제 그가 곧 나이다. 그가 나의 과거이듯이, 나는 그의 미래이다. 나는 우주로 날려 나온 빛이고, 그는 내가 유래한 폭발이다. 나는 무척 사무적인 상담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미친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 나는 충분히 루이다. 예전의 루는 평생의 경험들, 그가 다 이해하지는 못했던 경험들을 나에게 빌려주고, 지금의 루는 기억들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재평가하는, 예전의 루이자 지금의 루이다. 나는 둘 다 갖고 있다- 나는 둘 다이다.
- 미래를 상상하려고 하면 남은 오늘, 내일, 다음 주, 여생- 마치 내 눈의 동공을 들여다볼 때 같다. 오직 암흑만이 나를 마주 본다. 빛이 속도를 높일 때, 어둠은 이미 빛이 도착할 때까지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채로 그곳에 있다. 무지無知는 지知보다 먼저 도착한다. 미래는 현재보다 먼저 도착한다. 지금부터, 과거와 미래는 방향만 다를 뿐 같지만, 나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빛의 속도와 어둠의 속도가 같아지리라.
- 저 밖에는 어둠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앞선다. 예전의 루는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기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 루도 사랑을 하지만, 장애가 그의 전부가 아니듯이 사랑도 그의 전부가 아니다.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장애/비장애, 비정상/정상, 어둠/빛, 몰이해/이해와 같은 선명하고 극단적인 선으로 구획되어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변화의 경계를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스펙트럼상에서 살아가는 '진짜 인간'임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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