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탈로 칼비노 / 이현경
원제 : Racconti fantastici dell'ottocento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0.05.20
플래시백이 심한 한 주였다. 기시감보다는 플래시백이 적절한 표현이다.
이 책은 이탈로 칼비노가 엄선해 엮은 19세기-20세기 초의 환상소설 선집이다.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 선집을 남겼던 것처럼 그도 전 세계의 환상소설들을 다루어보고 싶었던 듯한데, 칼비노가 처음에는 극사실적인 네오리얼리즘 작가였음을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흥미로운 선택이다. 아마도 이 즈음부터 오히려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즉 일종의 거리감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칼비노에 따르면 이러하다.
"환상이란 독자가 텍스트의 감동적 흐름 안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일정한 거리감, 무중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일상적인 경험, 지배적인 문학적 관습과는 상이한 대상들 및 상이한 관계들에게로 이끌어 주는 또 다른 논리의 수용을 의미한다."
"환상 소설은 19세기에 나온 가장 독특한 장르 중 하나이며, 개인의 내면과 총체적인 상징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는 면에서 아주 의미 있는 장르이다. 현재 우리의 감수성과 연관해서 보면 이 소설들의 중심에 있는 초자연적인 요소는 항상 의미로 가득 차 있어 무의식, 억압, 망각, 우리의 이성적인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모든 것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적인 환상, 우리 시대에 다시 등장한 환상이 성공을 거두는 이유를 본다."
개인적으로는 마블 세계관의 성공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사실적인 '환상적 이미지'에 익숙해진 현세대는 이제 '더 사실 같은' 이미지보다는 '세계관'을 원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영상 미디어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반지 전쟁>, <얼음과 불의 노래>, <듄> 등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다는 점 역시 그렇다. 찰나의 환상에 대한 욕구는 보다 정교한 환상적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짧고 예리한 단편들이 주는 매력은 여전하다. 21세기에서 바라보는 19세기-20세기의 환상소설들은 여전히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다. '선집'은 그것을 구성한 이의 취향과 가치관, 때로는 학식의 깊이까지 '타인을 통해' 평가 받는다. 저자들이 통례적으로 자신의 작품이나 발언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수상작들이 심사위원과 협회의 권위에 기대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선집은 '선택'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심미안 또는 방대한 정보력, 합리적인 기준 같은 구성자에게 속한 자질을 평가하게 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선택된' 작품들이다.
수상작들이 한정된 응모작 중에서 우열을 가린 작품이라는 점, 공통 주제는 존재하지만 수상작들 간에 어떠한 긴밀한 관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대부분의 경우 수상작이 그 수상의 이름에 힘입는 경우가 많다는 점들을 고려해볼 때 선집 수록작과는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선집 수록작 또한 그 선집에 선택되었다는 이유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그 저자나 작품이 해당 선집에 수록되기 위한 의도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잘 골라진 선집은 아주 잘 관리된 컬렉션을 훔쳐보는 느낌에 가깝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조금 두껍기는 하지만 단편들이 모인 책이라 호흡을 놓치는 것도 아니었고, 무척 재미있었는데도 묘하게 끊어지는 느낌에다 오랜만에 자꾸 딴짓에 열중하느라 책 자체를 읽기 힘들었다. 다른 책을 먼저 읽는 게 나았을까 싶기도 한데...
일단 그건 내 개인적인 상황이었고, 책은 매우 재미있다. 환상소설은 공포소설과는 궤를 조금 달리하지만 틀림없이 겹치는 부분이 존재하기에, 일종의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는 기분이다. 페어리 테일이나 동화 모음집을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신나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수록 순서에 관해서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칼비노에게는 이런 순서로 배치한 이유가 틀림없이 존재하겠지만 그와 관계 없이 마음 내키는 것들부터 골라 읽어도 충분히 즐거울 것 같다.
저자들의 이름을 훑어보다 보면 '이 작가가 환상 소설을 썼다고?' 싶은 이름도 보이고, 완전히 낯선 이름도 보인다. 좋아하던 작가가 있다면 그의 색다른(혹은 가장 매력적인) 면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시점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영생의 묘약>, <마법에 걸린 손>, <죽은 여자의 사랑>, <신호수>, <꿈>, <눈먼 자들의 나라>다. 시간이 더 지나고 언젠가 다시 읽는다면 와닿는 작품이 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어떨지 궁금하다.
추천.
1부 시각적 환상
악령에 씐 파체코 이야기 - 얀 포토츠키
가을의 마법 -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모래 남자 - E. T. A. 호프만
떠돌이 윌리 이야기 - 월터 스콧
영생의 묘약 - 오노레 드 발자크
눈꺼풀 없는 눈 - 필라레트 샬
마법에 걸린 손 - 제라르 드 네르발
젊은 브라운 씨 - 너새니얼 호손
코 -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죽은 여자의 사랑 - 피에르 쥘 테오필 고티에
일의 베누스 - 프로스페르 메리메
유령과 접골사 - 조지프 토머스 셰리든 레 퍼뉴
2부 - 일상적 환상
일러바치는 심장 - 에드거 앨런 포
그림자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신호수 - 찰스 디킨스
꿈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악마 쫓기 -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레스코프
진실보다 더 진실한 - 오귀스트 드 비예르 드 릴라당
밤 - 기 드 모파상
끝없는 사랑 - 버넌 리
치카모가 - 앰브로즈 비어스
가면의 구멍 - 장 로랭
악마의 호리병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친구의 친구 - 헨리 제임스
다리 건설자 -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눈먼 자들의 나라 - 허버트 조지 웰스
- 다양한 유럽 문학에 호프만이 뚜렷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19세기 초반에 '환상 소설'이 '호프만식 소설'과 동의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호프만의 영향은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처럼 놀라운 결실을 맺는다. 그렇지만 고골은 유럽의 영향을 받기 전에 이미 우크라이나 농촌의 놀라운 마법 이야기들을 두 권에 수록한 작가였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비평은 처음부터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고찰했지만, 푸슈킨에서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기까지 환상적인 경향 역시 동일하게 발전한 게 분명하다. 레스코프 같은 초기의 위대한 작가가 제 위치를 차지한 것은 바로 이런 흐름 안에서였다.
- 프랑스에서 호프만은 샤를 노디에와 발자크(스스로 공언했듯 환상적인 발자크와 기괴하고 밤의 암시를 담은 사실주의자 발자크가 있다), 테오필 고티에에게 영향을 끼쳤다. 고티에에게서 우리는 낭만주의의 가지 하나를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환상 소설의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바로 유미주의라는 가지이다. 철학적 배경을 보면 프랑스에서 환상은 노디에에서 네르발에 이르는 비교주의나 발자크나 고티에의 스베덴보리 적인 신지학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제라르 드 네르발은 새로운 환상 문학 장르를 창조했다. 바로 소설의 플롯보다는 강렬한 서정성으로 지탱되는 꿈 이야기 (<실비>, <오렐리아>)이다. 메리메는 환상적인 것에 새로운 차원, 즉 이국풍의 길을 열었는데, 지중해 이야기(또한 북유럽과, <로키스>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리투아니아까지)와, 상징적인 것으로 변하는 이미지 속에 빛과 한 지역의 혼을 담는 기법을 통해서였다.
- <영생의 묘약 L'élixir de longue vie> (1830), 오노레 드 발자크
발자크의 영광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위대한 프레스코화인 <인간 희극> 덕분이다. 하지만 환상성을 지닌 작품들, 특히 그가 스베덴보리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던 초기에 쓴 환상 소설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환상 소설 <마법의 가죽>(1831)은 발자크의 걸작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로 유명한 그의 작품들에도 그의 작품의 기본 요소인 환상적 변형이 뚜렷하게 보인다.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계획하기 시작했을 때 젊은 시절에 쓴 환상 소설은 그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그래서 1830년에 이미 잡지에 발표했던 단편 소설 <영생의 묘약>은 부모의 죽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자식에 대한 도덕적 연구라는 소개와 함께 <철학 연구>에 다시 실렸다. 여기에서는 별도로 덧붙인 부분을 포함하지 않은 초판본을 소개한다.
- 박학한 인간의 악마적 면모는 고대,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하는 오래된 주제(파우스트, 연금술사의 전설들)로, 19세기 초기에는 낭만주의 작가들이, 후에는 상징주의 작가들이 이용했다.(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너무 길기 때문에 우리 선집에 포함하지 못했다.) 그 뒤를 공상 과학 소설이 잇는다. 여기서 우리는 16세기 페라라에 있다. 죽은 자들을 살려 낼 수 있다는 동방의 약을 대부호인 노인이 손에 넣었다. 발자크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어쩌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교황과 이교도가 공존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종교적이고 늘 참회하는 에스파냐, 자연의 법칙에 도전하는 연금술사, 돈 후안의 파열(기묘하게 변형된 이야기에서 돈 후안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돌이 된 손님으로 등장한다), 화려한 교회 의식과 불경한 풍자가 넘치는 마지막 장면, 하지만 혼사 살아 있는 신체의 각 부분이 내는 무시무시한 효과 덕분에 소설은 성공적이다. 즉 죽은 몸에서 떨어져 나온 눈, 팔, 머리가 마치 지옥의 '우골리노 백작'처럼 살아 있는 사람의 두개골을 물어뜯는다.
- <유령과 접골사 The Ghost and the Bonesetter> (1838), 조지프 토머스 셰리든 레 퍼뉴
영국 빅토리아 시대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환상 소설 작가 조지프 셰리든 레 퍼뉴(아일랜드 신교도로 프랑스 위그노 교도의 후손이다)가 젊은 시절에 쓴 소설을 소개한다. 아마 그가 발표한 첫 소설일 것이다. <유령과 접골사>는 고딕파의 환상 소설과,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옮겨 적은 것의 중간쯤 되는 작품이다. 유령들로 들끓는 성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겁 없는' 남자는 오랫동안 다뤄진 주제로, 각 지역에서 민간전승하는 이야기에 등장한다. 레 퍼뉴의 소설에서 이 주제는 아일랜드의 전통과 접목된다. 묘지에 가장 늦게 묻힌 사람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 물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들은 연옥의 불길 때문에 갈증에 시달린다. 이런 믿음 때문에, 두 사람의 장례식이 동시에 거행될 경우에는 더 늦게 묻힐 사람에게 어려운 임무를 떠넘기기 위해 두 장례 행렬이 경주를 벌이기까지 한다.(구이도 알만시는 이 우화를 암시하면서 르네 클레의 영화 <막간>에서 벌인 장례식 경주를 상기한다) 독창적인 면은 아일랜드 영어의 발음에 따라 글을 썼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정신이 구어 서술체 속에 모두 담겨 있다. 풍자가 두드러진, 레 퍼뉴의 몇 안 되는 소설 중 하나이다.
-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를 사로잡아서 위험하고 치명적인 길로 끌고 가는 어둡고 적대적인 힘이 있다면, 그런 힘이 존재한다면 그건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취할 거예요, 아니 우리 자신임이 분명해요. 사실 그럴 때에만 우리가 그 존재를 믿을 수 있고, 그 비밀스러운 작업이 이루어지게 우리가 굴복해요. 평온한 삶에서 활력을 얻는 건강한 정신을 갖추었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적대적인 힘의 영향을 인지하고 우리의 성질과 소명이 가리키는 길로 평화롭게 걸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 무시무시한 힘은 우리를 반영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그 형태를 유지하려고 헛되이 애쓰다가 사라져 버리고 말 거예요. 로타르 오빠도 덧붙여 말했어요.
"물론 그렇지. 물리적인 어두운 힘에 우리가 자신을 맡기면, 외부 세계가 우리 발치에 던져 놓은 이상한 형태들을 그 어두운 힘이 우리 정신 속에서 재생산해. 우리 자신이 그 망령을 만들어 내고서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 망령이 그 외형을 입고 말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와 깊이 관련 있고 우리 정신에 깊은 영향을 끼쳐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뜨리거나 천국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의 환영이지."
사랑하는 나타나엘, 보다시피 로타르 오빠와 나는 어두운 힘에 대해 깊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렵지만 그 대화의 중요한 내용을 적고 나니 그 내용이 아주 지혜롭고 깊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로타르 오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요. 오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추측하기는 하지만 말이죠. 어쨌든 정말 진실해 보여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 흉측한 코펠리우스 변호사와 기압계 장사 주세페 코폴라를 머리에서 지워 버려요. 이 이상한 인물들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둬요. 그자들에게 적대적인 힘이 있다는 믿음만이 당신에게 실제로 해를 끼칠 수 있어요.
- <모래 남자>, E. T. A. 호프만
- 동방과 교역을 하던 노인이 모아 놓은 어마어마한 재산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돈 후안은 탐욕스러워졌다. 두 번째 삶을 위해 재산을 준비해 놓아야 하지 않는가? 삶에 대한 인식이 더 깊고 날카로워졌다. 무덤을 통해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세상을 더 잘 이해했다. 그는 인간과 세상일을 분석했고 기록으로 나타나는 과거, 법으로 이루어진 현재, 종교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을 집어 도가니에 던져 뒤섞었고 거기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는 돈 후안이 되었다!
- <영생의 묘약>, 오노레 드 발자크
- 친구들, 이제 여러분이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게 있는데, 전 세계 모든 나라 가운데서 하층 계급 사람들이 교양이 매우 뛰어나면서 동시에 수많은 미신을 믿는 나라가 바로 스코틀랜드라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민족적 성격과 해학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에게서 받아 위대해진 스코틀랜드 최고의 작가 월터 스콧에게 물어보라.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들이 온갖 정령을 믿었으면서도 철학적인 토론을 벌이곤 한다.
핼러윈 밤은 특히 미신을 위한 날이다. 사람들은 미래의 신비를 알아내기 위해 모인다. 이런 목적으로 치르는 의식은 잘 알려져 있고,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준수할 때 숭배의 방법은 더할 나위 없이 엄격했다. 특히 모든 이가 사제이며 동시에 마법사인 이러한 의식은 카실리스 주민 여러 명이 밤에 모여서 야외로 나가 벌이는 잔치였다. 이 소박한 마법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매혹적이었다. 말하자면 시와 현실의 경계에 있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은 채 지옥의 힘과 소통했다. 가장 일상적인 물건이 성스럽고 마법적인 물건으로 변했다. 밀 이삭이나 버드나무 잎에서 희망과 공포가 나온다.
핼러윈 전통에 따라 의식은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시작한다.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대기에 가득 차고 스펑키들만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마법의 모든 주역이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러 나오는 시간이다.
9시에 모인 우리의 농부들은 술을 마시고 오래된 감미로운 민요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우울하면서도 꾸밈없는 민요의 가사는, 균형 잡힌 박자와 이상하게 간격을 두며 반음계를 독특하게 사용하는 방식과 가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다채로운 색깔의 격자무늬 천을 어깨에 걸치고 흠잡을 데 없는 울 드레스를 입은 젊은 아가씨들, 웃는 여자들, 양말대님과 장식으로 사용되는 예쁜 빨간색 끈을 무릎에 묶은 어린아이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신비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젊은 남자들, 노인 한두 명은 맛 좋은 맥주에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 즐거워했다.
- <눈꺼풀 없는 눈>, 필라레트 샬
- "좋아요. 당신의 허튼소리를 듣고 있다니, 내가 정말 바보요. 내가 교수대에서 생을 마칠 거라고 예언하지 않았나요?"
"틀림없소. 난 내 말을 취소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내가 이 결투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합니까?"
"찌르기 몇 번과 상처뿐이오. 그런 게 당신 영혼에 큰 문을 열게 될 테니까... 그 뒤 살았든 죽었든 체포돼 판결에 따라 교수대에 오를 거요. 내 말 알겠소?"
직물 상인은 너무나 잘 알아들었기 때문에 마술사에게 자기 손을 담보로 맡기며 필요한 액수를 구해 올 수 있도록 열흘만 시간을 달라고 청했다. 마술사는 돈을 갚을 날을 벽에 표시해 둔 뒤 승낙했다. 그런 다음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와 수도원장 트리테미우스의 주석이 달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을 집었다. 그리고 <결투> 장을 펼쳤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절대 악마적인 게 아니라는 확신을 외스타슈에게 심어 주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동안 기도문을 암송해도 된다고 말했다. 마술사가 금고 뚜껑을 열고 거기서 유약을 입히지 않은 점토 항아리를 꺼냈다. 책에서 지시한 여러 가지 재료를 그 안에서 섞으면서 나지막하게 주문 같은 것을 외웠다. 그 일이 끝나자 외스타슈의 오른손을 잡았다. 외스타슈는 다른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마술사는 항아리에 준비한 혼합물을 외스타슈의 손목까지 발랐다.
그러고 나서 금고에서 몹시 낡고 기름기에 쩐 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외스타슈의 손등에 병에 든 액체 몇 방울을 뿌리면서, 사제들이 세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사용하는 것과 흡사한 라틴어를 중얼거렸다.
그제야 외스타슈는 자기 팔 전체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고 이 때문에 그는 몹시 놀랐다. 손에 감각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 <마법에 걸린 손>, 제라르 드 네르발
- 말들은 서풍에 의해 수태한 암말에게서 태어난 에스파냐 말들이 틀림없었어. 바람만큼 빠르게 달렸으니까. 우리가 출발할 때 하늘에 떠서 우리의 길 위를 비춰 주던 달은 마차에서 떨어져 나온 바퀴처럼 굴러갔다네. 우리는 우리 오른쪽에서 우리와 속도를 맞추느라 정신없이 휙휙 지나가는 나무들 사이로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네. 우리는 곧 평야에 도착했는데 작은 숲 근처에서 활기찬 말 네 필이 끄는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 가마 차에 오르자 마부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어. 나는 한 팔을 클라리몽드의 허리에 둘렀다네. 클라리몽드의 한 손이 내 손안에 있었어.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지. 그래서 나는 곧 그녀의 가슴이 내 팔을 스치는 것을 느꼈어. 난 그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어.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듯이 내가 성직자라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어. 사악한 영혼이 내게 보여 준 매력이 그렇게 컸어. 그 밤 이후 나는 본성이 다소 나뉘었다네. 내 안에 두 남자가 있었어. 그들은 서로 상대를 알지 못했다네. 어떤 때 나는 내가 매일 밤 귀족이 되는 꿈을 꾸는 사제라고 생각했고, 또 어떤 때는 성직자가 되는 꿈을 꾸는 귀족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이제 현실과 꿈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어디서 현실이 시작하고 어디서 환상이 끝나는지 알 수가 없었어. 허영심 강하고 방탕한 젊은 귀족이 사제를 비웃었고 사제는 젊은 귀족의 방탕을 경멸했다네. 그러나 사실 서로 닿지 않은 채 복잡하게 뒤얽힌 두 나선은 머리가 둘인 내 존재를 표현하는 이미지였다네. 이렇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기이한 상황인데도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항상 이런 두 존재를 분명하게 지각했어.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모순된 사실은 딱 한 가지뿐이었네. 그것은 그렇게 다른 두 남자로 존재하면서도 나는 나 자신이라고 느낀다는 거야.
- <죽은 여자의 사랑>, 피에르 쥘 테오필 고티에
- "이런, 세상에! 여기 또 누가 동상을 훼손한 흔적이 있어요! 누가 내 동상에 돌을 던졌습니다!"
그는 베누스의 가슴 약간 위쪽에 난 하얀 자국을 알아보았다. 나는 그와 비슷한 자국을 오른손 손가락에서 보았다. 그것을 보자마자 곧 그 부분이 날아가는 돌에 스쳤거나 갑작스러운 충돌 때문에, 그러니까 동상의 손에 맞아 돌이 튀면서 돌조각이 떨어져 나갔을 거라고 추측했다. 나는 페르오라드 씨에게 내가 어제 목격한 장면과 그 뒤 그자들이 벌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더니 그 견습공을 디오메데스와 비교하면서, 이 그리스 영웅처럼 그 견습공도 자기 동료들이 모두 하얀 새로 변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기를 빌었다.
- <일의 베누스>, 프로스페르 메리메
- 그림자가 공주의 방에 들어갔을 때 공주가 놀라서 말했다.
"당신 떨고 있군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밤에는 아프면 안 돼요. 결혼식이 있잖아요."
그림자가 말했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각해 봐요, 그림자의 불쌍한 뇌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어요, 생각해 봐요! 내 그림자가 미쳤습니다. 자기가 인간이고 내가 자기 그림자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도 안 되지요!"
"끔찍해요! 그렇지만 그림자를 감옥에 가두지 않았나요?"
"너무 슬픈 일입니다! 그림자는 제 충직한 하인이었어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림자가 다시 제정신을 찾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불쌍한 그림자. 정말 불행한 일이에요! 제 생각에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그림자에게서 빼앗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잘 생각해 보면 큰 소란 없이 당신이 그림자에게서 자유로워지려면 꼭 그렇게 해야 해요."
그림자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당신은 고결한 사람이에요."
공주가 말했다.
그날 저녁 모든 도시는 불야성을 이루었고 대포들이 쿵, 쿵! 발사되었다. 그리고 군인들은 총을 높이 들었다. 굉장한 결혼식이었다! 공주와 그림자가 발코니로 나와 군중들 앞에 모습을 보였고 군중들은 환호했다. "만세!"
철학자는 이미 처형되었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
- <그림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계속 기다리거나 잠이 들어 버렸다... 만일 내가 시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면 아마 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종교적 성향이 있었다면 수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꿈을 꾸며 기다렸다.
방금 전 나는 내가 때때로 환상과 막연한 생각에 짓눌려 잠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개 나는 잠을 많이 잤다. 그래서 꿈은 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꿈을 꿨다. 이런 꿈들을 잊지 못했고 그 꿈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들을 예언이라고 생각해서 그 신비한 의미를 알아맞혀 보려 애썼다. 그 꿈들 중 어떤 것들은 가끔씩 반복적으로 나타났는데, 이게 항상 이상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떤 꿈 하나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어떤 오래된 도시에서 지붕이 뾰쪽하고 층이 여럿인 석조 건물들 사이로 난 좁고 포장이 제대로 안 된 길을 따라 걷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죽은 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에게서 몸을 숨겨 이 집들 어디에서 살았다. 나는 낮고 어두운 입구로 들어서서 통나무와 판자들이 수북하게 쌓인 긴 안뜰을 가로질러 둥근 창이 두 개 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복을 입은 아버지가 방 한가운데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았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검은 머리칼에 매부리코였고 두 눈은 어둡고 예리했다. 아버지는 40대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찾아온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 역시 우리의 만남이 기쁘지 않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아버지는 한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더니 무엇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며 작은 걸음으로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러더니 여전히 중얼거리면서 계속 자기 등 뒤를 돌아보며 서서히 멀어졌다. 방이 넓어지고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 마치 우리는 이 무섭고 이상한 일들을 건드리지 않기로 은밀히 동의를 한 것 같았다... 어머니는 본의 아니게 다 이야기해 버린 자신에게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면 어머니는 반쯤 열에 들떠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를 용서해 주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어머니를 용서했고 어머니는 이걸 느꼈다. 어머니는 어젯밤처럼 내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나는 그날 밤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밖에서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다. 바람이 울부짖으며 사납게 불어와서 유리창이 흔들렸다. 공중에서 날카롭고 절망적인 신음이 들려왔다. 마치 높이 있는 어떤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격렬한 통곡 소리가 흔들리는 집들 위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동이 트기 바로 전에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곧 내 방에 누가 들어와 내 이름을 낮지만 단호하게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머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놀라기도 했지만 기쁨 같은 것이 내게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속에 실패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확고한 신념이 생겨났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 <꿈>,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누가 조국이나 애인을 사랑하듯 나는 밤을 사랑하는데, 본능적이고 깊은 무적(無敵)의 사랑이다. 나는 내 모든 감각으로 밤을 사랑한다. 밤을 볼 수 있는 내 눈으로, 밤을 호흡할 수 있는 내 후각으로, 고요한 밤의 소리를 듣는 청각으로, 어둠이 어루만져 주는 내 몸 전체로, 종달새들은 햇빛 속에서, 푸른 하늘 속에서, 따뜻한 공기 속에서, 깨끗한 아침의 가벼운 공기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올빼미는 검은 공간으로 지나가는 검은 흔적인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 거대한 검은 공간에 취해 즐거워하며 음산하게 떨리는 울음을 울어 댄다. 낮에 나는 피곤하고 지루하다. 낮은 잔인하고 시끄럽다. 나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못해 옷을 입고 불쾌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말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힘이 든다. 그러나 해가 지면 막연한 기쁨이 내게 밀려들어 온몸에 기쁨이 넘친다. 나는 깨어나고 활기를 되찾는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나는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더 젊고 더 강하고 더 생기에 넘치고 더 행복한 사람이. 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크고 부드러운 어둠이 점점 더 거무스름해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뚫을 수도 없는 파도처럼 도시를 뒤덮어 버린다. 색깔과 형태를 숨기고 지우고 파괴한다. 집과 사람들과 건물들을 보이지 않는 손길로 감싸 안는다.
그러면 나는 올빼미처럼 좋아서 소리 지르고 고양이처럼 지붕 위로 달려가고 싶다. 사랑하고 싶은 격렬하고도 제어할 길 없는 욕망이 내 혈관 속에서 불타오른다. 나는 때로는 어두운 교외로, 때로는 파리 근교 숲으로 가서 걷는다.
- <밤>, 기 드 모파상
- 그녀를 다시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거의 말을 걸 뻔했다. 그녀가 내게 사랑을 약속했다! 내가 지상에서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내 말이 맞았다. 나는 늘 가던 때에 산조반니데콜라토 근처로 갔다. 맑은 겨울밤이었다. 높은 저택들과 종탑들이 투명하고 짙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달은 아직 뜨지 않았다. 교회 창문에서는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교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대는 여느 때처럼 환했다.
- <끝없는 사랑>, 버넌 리
- "직접 보고 싶어 하는군. 그럼 좋아. 도미노 외투와 가면을 준비하게, 검은 새틴으로 만든 우아한 도미노 외투를 입고 무도화를 신도록 해. 이번에는 비단 양말을 신어야 해, 화요일 10시 30분경에 자네 집 앞에서 날 기다리게. 내가 자네를 데리러 오겠네."
다음 화요일, 겹친 부분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나는 긴 망토를 두르고 벨벳과 새틴으로 만든 가면의 끈을 귀 뒤로 넘겨 고정하고 나서 나는 테부가에 있는 내 독신자 아파트에서 드 자켈스를 기다렸다. 추워서 뻣뻣하고 익숙지 않은 비단 감촉 때문에 떠는 내 발을 난롯불에 녹이면서. 사육제 밤거리의 흥분한 고함과 나팔 소리가 혼란스레 뒤섞여 내게 들려왔다.
자질구레한 장식품들이 가득 있고 커튼이 숨 막히게 드리워졌으며 기름등의 긴 불꽃과 거의 장례식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희고 가느다란 초 두 개의 떨리는 불빛이 벽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는 어둑어둑한 아파트 1층에서 의자에 깊숙이 앉아 홀로 밤을 보내는 가면 쓴 남자의 모습은 잘 생각해 보면 불안할 정도로 이상했다. 그런데 드 자켈스는 오지 않았다! 침묵 속에 담긴 적의는 멀리서 들리는 가장무도회 참가자들의 날카로운 외침 때문에 더욱 무거워졌다. 똑바로 타는 두 초 때문에 나는 더 초조해졌다. 갑자기 불빛 세 개에 놀란 나는 촛불 하나를 끄기 위해 일어섰다.
바로 그 순간 커튼 하나가 열리더니 드 자켈스가 들어왔다.
- <가면의 구멍>, 장 로랭
- "그럼 그 땅이 이제 자네 것이 되지 않나?"
"그래, 그렇게 되겠지."
케아웨는 다시 삼촌과 사촌의 슬픔을 애통해하면서 대답했다.
로파카가 말했다. "아니야. 이제 울지 마. 이런 생각이 들어.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게 혹 시호리 병 때문이 아닐까?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마련해 주기 위해 호리병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한 게 아닐까?"
케아웨가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내 친척들을 죽이는 건 최악의 방법이야.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물론, 내가 내 집을 짓고 싶다고 상상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로파카가 말했다. "하지만 그 집은 아직 거기 없어."
케아웨가 말했다. "그래,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 삼촌은 커피와 아바, 바나나를 경작하는 땅이 조금 있었지만 겨우 먹고살 정도였어. 나머지 땅은 검은 화산암으로 덮여 있고."
로파카가 말했다. "변호사에게 가 보세. 난 계속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변호사를 찾아간 두 사람은 케아웨의 삼촌이 최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자가 돼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변호사가 말했다. "새 집을 지을 생각이시라면, 젊은 건축가의 주소를 드리겠습니다. 홀한 건물들을 지었다고 하더군요."
로파카가 외쳤다. "점점 더 좋아지는군! 모든 게 순조로워. 우린 그냥 순서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돼."
그래서 그들은 건축가에게 갔다. 건축가의 책상에는 여러 집의 설계도들이 빼곡했다.
건축가가 물었다. "색다른 걸 원하시나요? 이건 어떠신가요?"
이렇게 말하면서 케아웨에게 조감도를 하나 내밀었다.
케아웨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비명을 터뜨렸다. 그가 항상 꿈꾸던 집이 거기에 그려져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집이 나를 점점 더 끌어들이는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일이 저절로 진행 돼. 이미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면 계속하는 게 좋지.'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건축가에게 모두 말했다. 또 집을 어떻게 장식할지 어떤 그림을 걸지 가구 위에 어떤 장식품들을 놓을지 말했다. 그런 다음 건축가가 그렇게 해 주는 데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 물었다.
건축가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러더니 펜을 들고 계산했다. 마침내 케아웨가 상속한 액수와 딱 맞는 금액을 제시했다.
로파카와 케아웨가 서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악마의 호리병>,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넌 오래전부터 알았어. 정말 아주 오랫동안인 것 같아."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오랜 시간 걸어온 것을 알았고 이제 함께 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 일어난 일이 너무나 이상해서 나는 우리 관계가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거의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이성을 잃은 순간에 그 관계를 바꾸고 영원히 망가뜨린 것은 바로 나였다. 지금 나는 그녀가 내게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난로 위 액자 속의 잘생긴 얼굴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서 내가 핑계를 찾았다는 것도. 그럼 나는 그녀가 그를 어떻게 바라보길 원한 것일까? 처음부터 내가 원한 것은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리석은 마법을 이번에는 깰 수 있도록 그녀가 정말 나를 돕겠다고 약속할 때까지는 나는 여전히 그것을 바랐다.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한다면 그도 자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그와 나는 합의했다.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상황에 있었다.
- 그 후 나는 어떤 식으로든 훨씬 더 자신감을 느꼈다. 이제 한 달이면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사람들에게 그건 정말 별 게 아니었다. 그녀의 신경이 날카로운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날카롭던 그녀의 신경질도 많이 진정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신경질이 갑작스러운 예감이 아니라면 무엇이었겠나? 지금까지 그녀는 훼방하는 일의 피해자였지만 앞으로 그녀가 그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럴 경우 희생자는 내가 될 수도 있었다. 그 훼방이 위험을 알리는 신의 섭리의 표시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물론 그 위험의 표적은 나였다. 지금까지 전례 없이 빈번히 일어난 예기치 못한 일들 때문에 위험을 피했다. 그러나 우연의 지배는 이제 끝난 게 분명했다. 나는 두 사람이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것이라고 속으로 확신했다. 나는 점점 더 그 두 사람이 가까워지며 상대에게 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보물 찾기에 빠진 사람들 같았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불에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는 마법을 깨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마법이 깨질 것이다. 마법이 다른 형태를 취하여, 이전에 그들이 계속 만나지 못하게 했듯이 두 사람이 계속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와 같은 위험을 조용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정에도 불안감에 휩싸여 흥분해 있었다. 마침내 망령을 쫓아내는 데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느꼈다. 우연의 지배가 끝났다면 그 우연을 나 자신이 만들어야 했다. 나는 탁자에 앉아 서둘러 편지를 썼다. 그가 돌아와서 볼 편지였다. 하인들이 벌써 잠들었기 때문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한적한 거리로 나갔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가까운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러 갔다. 편지에는 그날 오후 내가 바란대로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저녁 식사 시간으로 방문을 늦춰야 한다고 썼다. 이것은 그가 나만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 <친구 중의 친구>, 헨리 제임스
- "이것이라네. 보고타의 경우, 얼굴에 살짝 들어간 부위가 생기게 하는 괴상한 눈이라는 병이 들어서 그의 뇌도 병든 거요. 눈 부위가 아주 넓게 확장했고 눈썹이 있으며 눈꺼풀이 움직인다네. 그 결과 뇌가 계속 과민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거네."
야콥 노인이 말했다.
"그래서? 그러면 어쩌지?"
"내가 합리적으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 간단하고 손쉬운 수술을 하면 된다는 거라네. 바로 이렇게 자극하는 부위를 제거하는 거지."
"그러고 나면 정신이 건강해질까?"
"완벽하게 건강해질 걸세. 그리고 모든 이가 감탄할 만한 시민이 될 거야."
- 그는 즉시 알아차렸다. 그는 사실 분노를 느꼈다. 어리석은 운명에 대한 분노였다. 그렇지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 대해 애정 어린 이해심을 느끼기도 했다. 연민에 아주 가까운 이해심이었다.
"메디나-사로테."
누네스가 말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보면, 그녀의 정신이 여자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얼마나 억눌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포옹하고 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승낙한다면?"
마침내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누네스의 목을 껴안았다. 그녀가 흐느껴 울었다.
"오, 당신이 승낙한다면! 당신이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 노에 상태에서 일반 눈먼 시민 계급으로 올라가게 해 줄 수술이 있기 일주일 전부터 누네스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햇빛이 환히 비치는 따뜻한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잠자는 동안 그는 앉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거나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을 머릿속으로 찾았다. 그는 대답했고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 <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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