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마이클 D. 거숀 / 김홍표
출판 : 지식을만드는지식
출간 : 2013.12.01
원제 : The second brain : the scientific basis of gut instinct and a groundbreaking new understanding of nervous Disorders of the Stomach and Intestines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저자는 서사의 흥미로움을 위한 빌드업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제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그렇게 서술하곤 한다는 점이다. 논문은 결론을 초록에 표기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별 문제가 없지만, 저서에서 그런 서술법을 쓰면 어쩔 수 없이 저자가 겪었던 혼란이나 실수를 모두 이해해가며 짚어나가야 한다. 거기에 함께 연구했던 대학원생이나 포닥들에 대한 미사여구, 동료 연구자의 연구에 대한 논평등이 더해지면 상당히 지엽적인 설명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지만, 처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저자가 자신의 연구 과정들을 꽤 세련되게 자랑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확실치 않은 내용을 대중서의 형태로 발표하는 일은 꺼리는 편인데, 저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논란을 딛고' 성공해낸 연구와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들, 그리고 앞으로 추가적으로 연구할 영역과 가설에 대한 내용을 매우 길고 상세하게 풀어나간다. 음- 어쩌면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연구에서 어떤 힌트를 얻어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소 자화자찬이 섞여있긴 했지만)
저자에 따르면, 소화기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교감/부교감 신경계라는 자율신경계와는 다른 별도의 신경계가 존재한다. 이는 뇌에 의한 신경 전달과도 분리되고, 척수 반사도 아닌 완전히 독자적인 하나의 신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핵심적인 전달물질은 세로토닌이다. 세로토닌은 SSRI 등의 연구에서 주로 주목받는 물질이었는데, 저자는 소화신경계 내에서의 세로토닌은 완전히 다른 작용을 하며 이쪽이 진정한 세로토닌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연구는 크게 분류해서 첫째, 소화기계에는 독자적인 신경계가 존재하며 세로토닌이 신경전달물질이라는 연구에서 시작한다. 둘째로는 췌장과 소화기관 사이에 신경이 존재하며, 그것은 주 소화작용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면서도 독립적이라는 발견이다. 저자는 이를 소화기관-췌장 신경계라고 부르는데, 책 전반에서 '제2의 뇌'란 개념을 명확히 지칭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장 가까운 예시를 들라면 이 신경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셋째로는 배아 상태에서부터 미주신경이나 천골신경과는 별도의- 즉 신경 능선 세포 유래가 아닌- 대장 자체의 신경이 분화해나간다는 가설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대장 말단에 신경절이 제대로 분포하지 못하는 질환에 주목하고, 배아의 분화 초기부터 세로토닌의 작용과 엔도텔린3/ETB 리셉터에 주목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저자는 뇌라고 부를 만한 핵심적인 중심체를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식도 이후부터 항문 외부 조임근까지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독립적인 신경계라고 주장한다. 점막에서 감각된 감각을 뇌로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 뇌로부터 명령을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자적으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미주신경을 절단해도 생존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내과 의사들이 심인성이라고 진단하곤 하는 소화기계 증상들은, 사실 정말로 신경계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뇌가 아닌, 제2의 뇌의 문제.
대장과 소장의 구불구불한 형태를 생각하다 보면 -그것들을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더해서- 상승하는 뱀의 이미지와 겹쳐지곤 한다. 점막을 통해 감각한 정보의 전달이라는 점과 내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외부라는 점 등을 더해보면 때로 어떤 것들은 아주 다른 영역 같지만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진다.
일독은- 비추.
곁가지들을 좀 더 쳐내고 핵심만 남기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이거나 약간의 자랑을 위해서였겠지만, 너무 부연 설명이 길고 맥락이 널뛴다.
-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신학자들처럼, 신경과학자들도 그들이 바라보는 우주의 너머를 보지 못했다. 아무리 괴상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올바른 한, 과학의 발견은 언젠가는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 이제 우리는, 소화기관에 제2의 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간혹 부적절해 보인다. 소화 기관은 못생겼지만, 심장보다 현명하고 감정이 풍부하다. 중추 신경계인 뇌 혹은 척수의 지시 없이도 외부의 자극에 대해 조건 반사(reflexes)를 할 수 있는 신경계를 가진 인체의 유일한 기관이 소화 기관이다. 진화가 장난을 친 것 같다. 우리의 선조가 원시 시대의 진흙 밭을 벗어나 척추를 갖게 되면서, 동시에 두뇌 속의 신경계와, 자신의 의지를 가진 소화 기관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유기체는 먹이를 구하고, 자신의 자손을 낳고, 종족의 절멸을 피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뇌의 심약한 인식 체계를 넘어서서 음식물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기관인 신경계 덕분이다. 대뇌 피질의 에너지는 내장 기관에 도달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골격근과 자율 신경계 세포에 연결되는 신경 세포는 해부학적으로 엄청나게 다르다. 골격근에 이르는 신경 세포는 중추 신경계에서 직접 나온다. 반대로 자율 신경계에 도달하는 신경은 결코 목적 기관(근육, 혈관, 혹은 내분비선)에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자율 신경계는 언제나 최소한 한 가지의 접합부에 의해 연결된다. 이들은 신경 접합부(synapse)라고 부른다. 뇌에서 전달되는 신호는 최소한 둘 이상의 신경 세포에 의해 매개된다. 반면, 골격근에는 뇌의 신호가 단번에 도달한다.
- 편집자로서 랭글리의 칭찬할 수 없는 행위와 그를 둘러싼 소문들은 그가 발견한 '트로이카 신경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내가 의과 대학 학생 시절이었을 때, 나는 자율 신경계는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 두 가지가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랭글리의 책 <자율신경계>가 거론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두 가지 자율 신경계가 있다고 배울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실제로 랭글리의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거기에는 두 종류가 아니라 세 종류의 자율 신경계가 있었다. 불쌍한 랭글리. 그는 죽어서 아이러니의 희생양이 되었다. 살아서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편집자였으나, 나중에 늙어서는 그 자신이 편집되었다. 그의 가설에 그가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변화가 찾아왔다.
- 소화기 신경계는 부교감 신경계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그 이름도 쓰이지 않게 되었다. 소화기 신경계를 구성하는 신경 세포는 부교감 신경계의 신경절 이후 섬유이며, 소화기 평활근이나 내분비선에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잘못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생각에도 그 근거가 있었다. 식도에서 대장에 이르는 소화 기관에 뻗친 미주 신경은 결국 두개골 안에 있는 신경이다. 미주 신경 영역의 다음은 천수(sacral) 신경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화 기관에 그 뿌리를 내린 신경계는 미주와 천수 신경이다. 그리고 이들 신경 섬유는 부교감 신경계의 정의에 부합된다. 또 부교감 신경계와 마찬가지로 소화기관 신경절은 소화기관의 안에 박혀 있다. 그러니까 소화기 신경계가 중추 신경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로 한다면, 이상의 결과는 소화기 신경계가 부교감 신경계라는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셈이 된다. 소화기 평활근과 내분비선은 교감 신경계 혹은 부교감 신경계 어느 것 하고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소화 기관 자신의 신경 섬유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중추 신경계와 연결된 고리를 끊어 버려도 소화 기관의 반사 행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독성 물질들은 아세틸콜린의 효과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감 신경계 신경절의 위치와 역할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니코틴을 제외하면, 부교감 신경계에서 아세틸콜린의 위치를 확립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것과 같은 독소가 교감 신경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애를 썼지만 그들을 구해 줄 버섯이 하늘에서 떨어진 적은 없다. 어떤 종류의 길항제도 없고 검색법도 없는 상태에서 연구를 계속했던 오일러에게 노르에피네프린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고 탓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린 결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과학은 자기 정화 기능(self-correcting)이 있다. 대다수의 집단이 뭐라고 하는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다. 이런 일이 노르에피네프린에서도 일어났고 나중에는 내게도 일어났다.
(리뷰자 주 : 그때까지의 혼란을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언제나 그래 왔다.)
- 소화계를 거시적으로 보면 특정한 기관의 구조와 기능이 연접하는 다른 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쉽게 이해하도록 해 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화 기관은 특정 기관이 그에 걸맞은 일을 하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구조와 기능을 한데 묶어서 생각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단순하지만 진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 분야의 과학자들이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생물학적 구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언어나 이미지 속에 잡아 두려고 한다. 이들은 '단순한 효용성'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결과가 매도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드러운 과학자'로 자처하고 수학적인 데이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활성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물리 화학적 현상은 간혹 그래프나 혹은 수식으로 표현된다. 또 다른 부류의 과학자들은 스스로 '진짜'라고 칭하며, 해부학을 논리적으로 잘 직조된 구조로 파악하려는 감정을 어쩌지 못한다. 살아 있는 생물의 구조는 수학식으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미지로 파악할 때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형태와 구조를 분리하려는 생각은 언제나 위험하고 과학의 진보를 저해한다.
- 우리 신체의 디자인은 T. S. 엘리엇(T. S. Eliot)의 시를 빌어 표현할 수 있다. 엘리엇은 그런 의미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우리는 '텅 빈 존재'들이다. 소화계 내부의 공간, 즉 내강(lumen)은 우리 몸의 바깥쪽이다. 이 열린 관은 입에서 시작해서 항문에서 끝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소화기는 외부의 것이 우리 몸을 관통해 나가는 터널이다. 그 터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그것은 외부의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 고유의 몸은 소화 기관 벽에서 끝난다. 소화기 내벽을 통과해 흡수되기 전까지 우리 몸의 진정한 내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와 반대 방향으로 몸에서 소화기 내강으로 나온 것들은 곧 사라진다. 만약 우리가 소화기 내강으로 피를 흘린다면, 우리가 마룻바닥에 피를 떨구는 것처럼, 그것은 곧 사라지고 우리 몸속의 피는 소실된다. 알코올 중독자의 정맥류(varicose) 출혈은 식도의 내강에서 일어나고 상당히 치명적이다. 따라서 내부 출혈은 우리가 외부에서 관찰할 수 없더라도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 위는 단순한 소화 기관에 멈추지 않는다. 위는 엄청난 신축성을 지닌 음식물의 저장소다. 우리는 음식물을 끊임없이 먹지도 않지만, 합리적인 양만을 적절히 소비하지도 않는다. 위는 우리가 먹는 세 끼의 식사 분을 저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엄청난 폭식을 하는 사람들의 음식물을 저장하는 데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위의 내벽은 유순하다. 이 말은 위가 내강의 압력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폭넓은 확장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위는 신축성이 있지만 공기를 불어넣으면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기가) 되돌아 나오려고 하는 풍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위가 팽창하더라도 내부의 압력이 높아지지 않기 때문에 위의 내용물은 위(식도)로도, 아래(십이지장)로도 힘을 가하지 않는다. 절제 수술을 받아서, 위가 이런 저장소의 기능을 잃게 된다면 사는 것이 매우 팍팍해진다.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여섯 끼 혹은 그 이상으로 조금씩 자주 나누어 먹어야 살 수 있다. 소화 기관에서 이러한 저장소는 위 말고는 없다.
- 가스트린 다음으로, 위벽 세포에 전해지는 두 번째 신호는 비만 세포(mast cells)에서 온다. 이때 비만 세포가 사용하는 신호전달물질은 히스타민이라는 물질이며, 콧물, 코 막힘, 재채기 등을 유도한다. 그래서 악명이 높다. 위벽 세포의 히스타민 수용체는 알레르기나 감기가 걸렸을 때 재채기나 콧물이 나오도록 하는 히스타민 수용체와는 다르다. 히스타민은 하나이지만, 그 수용체는 세 종류나 된다. 감기가 걸렸을 때 활성화하는 히스타민 수용체는 H1이다. 위벽 세포는 H1 수용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기와는 관련이 없다. 위벽 세포가 가진 히스타민 수용체는 H2이고, 이것은 재채기가 나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감기 혹은 알레르기가 심할 때 사용하는 항히스타민제는 H1에 작동하며, 이것 때문에 위산의 생성이 차질을 빚지는 않는다. H2 저해제는 건초열(hay fever)에는 소용이 없지만, 위산의 산도를 낮추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다. 세 번째 히스타민 H3 수용체는 신경 세포에서 발견되며 이들은 소화 기관에서 신경 세포와 면역 세포 간의 의사소통을 매개한다. 따라서 알레르기나 위산과는 무관하다.
(리뷰자 주 : 이 비만 세포는 체형적인 비만과는 관계가 없다.)
- 우리 몸에서 뇌는 왕이다. 뇌가 곧 법이다. 소화기 윗부분에서는 왕의 입김이 강하다. 그러나 아래로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왕은 통제력을 잃는다.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이제 제2의 뇌가 슬슬 나설 차례다. 입에서 식도 중간까지는 뇌가 주관한다. 식도 아래쪽에서 비로소 연동 운동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제2의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식도의 끝인 식도 아래 조임근에 이르면 중추 신경계가 일시적으로 다시 작동한다. 위에서도 중추 신경계가 중요하다. 그 신호는 미주 신경으로부터 오며 강하지 않다. 반면 제2의 뇌에서 오는 신호가 강해진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위의 날문 조임근(pyloric sphincter)은 미주 신경에서 오는 신호에 의해 조절된다. 위 날문 조임근 아래로는 중추 신경계의 힘이 거의 닿지 않는다. 여기는 모두 소화기 신경계가 지배를 하는 땅이다. 기본적인 결정은 모두 제2의 뇌에 의존한다. 중추 신경은 다만 양적인 정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부위는 자율 신경계 영역이며 나중에 항문과 직장이 등장하기 전까지 뇌가 하는 일은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실질적으로 없다.
- 아네트는 신경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기니피그의 췌장과 십이지장을 산뜻하게 적출해 냈다. 이들은 적절한 용기에 넣고, 거기에 이들이 살아 있도록 영양 배지를 첨가해 주었다. 산소를 공급해 주면서 용기의 온도를 체온과 같은 섭씨 37도로 유지했다. 이 조건에서 기관이 안정되자, 그녀는 십이지장의 신경에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췌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폈다. 기쁘게도 십이지장의 신경이 자극을 받자 뒤따라 췌장의 신경절이 흥분되었다.
- 아네트는 소화기관 췌장 신경을 잘라 버리거나, 신경 독소를 이용하여 그들을 마비시키거나 접합부 신경전달을 막은 다음에 십이지장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이때는 정말 췌장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췌장의 신경 세포에서 c-fos 유전자가 발현되지도 않았고 Fos 단백질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실험계에는 뇌도, 척수도, 다른 장기도 없기 때문에, 십이지장에서 온 신호가 췌장으로 전달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십이지장과 췌장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경 독성이나 접합부 신경 전달 저해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이 신호전달이 신경 세포를 매개로 일어나고 있으며, 호르몬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도 드러내고 있다. 자극을 받은 십이지장은 호르몬을 분비할 수 있지만, 아네트의 실험에서는 췌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 결과는 호르몬이 혈관을 따라 흐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아네트의 실험계에는 심장도 없고 어떤 펌프도 없으므로 혈액 순환은 없다.
(리뷰자 주 : 영양 배지에서 배양 중이라면 호르몬은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뒤에 후술 한 배양 욕조 속 조직에 처리한 세로토닌을 두고 욕조 속에 담그는 것과 유사한 작용을 일으킨다고 표현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저자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 배양 욕조에 세로토닌을 집어넣어 주는 것은 마치 신경전달물질이 호르몬이라도 되는 것인 양 작동하는 인위적인 방식이다. 세로토닌은 어디라도 가서, 수용체가 있는 곳이면 바로 결합할 수 있다. 세로토닌은 어디라도 가서, 수용체가 있는 곳이면 바로 결합할 수 있다.
(리뷰자 주 : 같은 원리로 배지 속 십이지장이 호르몬을 분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용할 수 있다. 호르몬의 구조 변화나 환경적인 문제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혈관이 없다는 것은 배양 상태에서는 문제가 아니다.)
- 파킨슨씨병이 뇌 혹은 소화기 신경계에 동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늘 과거의 놀라움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결국 소화기 신경계는 뇌의 신경계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신시내티의 신경과학자 모임에서 내가 말했듯이, 뇌와 소화기 신경계는 화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말초 신경계보다는 훨씬 닮아 있다.
- 환자가 복부의 불편함이나 통증을 호소했다면,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로 소화 기관이 물리적 혹은 화학적으로 비정상이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내게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급진적인 견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휴가차 여행을 갔다가 만난 의사와 제2의 뇌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감염성 질병을 주로 치료하는 캐나다 의사였으며, 왜 자신이 소화기 내과 의사가 되기를 포기했는지 얘기해 주었다. 그가 의과대학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만났던, 수많은 소화 기관 이상 환자들에게 넌더리가 났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환자들이 너무 위장관에 집착해 있어서였다. 보기에 멀쩡한 환자들이 배가 아프다고 끊임없이 투덜댔다고 그는 회상했다. 따라서 그는 소화기 내과 의사들이란 신경질적인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내가 그 환자들이 전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판단했느냐고 묻자 그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잠시 스쳤다. 아무 증거도 없이 환자의 통증이 꾀병이라든가 신경성이라는 식의 판단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지 못하고 치료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 나는 인달핀의 복용과 관련해서 소화 기관의 악성 암세포가 세로토닌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들 암세포는 소화 기관 내벽의 장크롬친화세포에서 유래한다. 이 세포는 콜레라 독소가 침범했을 때 혹은 이들 세포의 감각 수용체가 압력이나 점막의 뒤틀림을 감지했을 때 세로토닌을 분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크롬친화세포는 위, 소장 그리고 대장에서 발견되고 엄청난 양의 세로토닌을 지니고 있다. 장크롬친화세포에서 만드는 세로토닌이 우리 몸이 가진 거의 전체 세로토닌 함량과 맞먹는다. 이 세포는 인체 내부 세로토닌의 약 95%를 만들어 낸다.
- 장크롬친화세포가 암세포로 변환되면, 이들 세포는 이제 아무런 이유나 제재도 없이 세로토닌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세로토닌의 분비가 소화 기관 내부로 국한된다면 두려워할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세로토닌은 혈액을 타고 소화기에서 간으로 직접 가서 몸 밖으로 배설된다. 소화 기관의 내벽은 점막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이 근육층 신경얼기 신경 세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반면 이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고 여기서 세로토닌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온몸으로 세로토닌이 퍼지고 이들은 모든 경우에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기능을 수행한다. 원인은 잘 모르지만 우심방이 손상되고 환자는 숨을 헐떡거린다. 더 나쁜 것은 장이 미친 듯이 움직여서 환자의 배 위로 이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일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영양소의 흡수는 거의 차단된다. 단순히, 환자가 먹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흡수할 시간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다. 암세포가 계속 만들어 내는 세로토닌의 기능을 멈추지 못하면, 문자 그대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 분명한 것은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한 초기에는 세로토닌에 대한 반응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프로작의 농도가 올라감에 따라 재흡수되지 않은 세로토닌의 농도가 점차 증가한다. 과량의 세로토닌은 그 수용체를 둔감하게 하고 나중에는 마비시킨다. 따라서 프로작은 세로토닌 수용체를 마비시켜, 마치 이들 수용체의 길항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동일한 유전자 세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세포가 하나의 청사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세포에서 발견되는 유전적 명령은 다른 세포에서도 여전히 발견된다. 그러나 한 세트의 종합 설계도가 수많은 다른 종류의 세포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 말은 개개의 세포가 핵에서 내려오는 유전자의 명령을 통째로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유전자는 켜져서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다른 유전자는 스위치가 꺼진 채로 침묵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관찰 결과들은 신경 능선의 세포가 소화 기관의 특정 부위로 향하도록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반대로 이들은 배아가 지시하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신경 능선에서 유래하는 어떤 세포를 이 특정 경로에 가져다 놓으면 이들은 그 경로가 끝나는 소화기 특정 부위에 다다른다. 또한 신경 능선의 세포들이 발생학적으로 매우 탄력적으로 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신경 능선을 떠나기 전에 그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 없지만, 그들이 이동하면서 주위 환경 혹은 목적 기관에서 도달하는 신호에 따라 매우 가변적으로 움직이고 그에 따라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결정된다.
- 니콜의 선도적인 연구와 여러 방향의 공동 연구를 통해, 신경 능선의 세포들이 다능성(multipotent)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신경 능선이 다능적이라는 말은 거기에 존재하는 개개의 세포가 다능적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또는 신경 능선이 다양한 운명이 예정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가 특정한 세포가 선택되어 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도 다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개별적인 신경 능선 세포가 다능성이 있다면, 소화 기관의 미세 환경에서 오는 신호가 중요할 것 또한 사실이다. 소화 기관에서 지시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말이다. 반면 매우 다양한 세포가 각기 자신의 운명을 타고났다면, 소화기의 미세 환경이 스스로 자신에 걸맞은 세포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때 소화기의 역할은 선택이지 명령은 아니다. 어떤 경우라 해도 소화 기관의 미세 환경 혹은 신경 능선의 세포들이 소화기 신경계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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