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서홍주
출판 : 프랙티컬프레스
출간 : 2021.12.31
출판 예고에서 제목을 본 순간 출간만을 기다렸다. 상황이 상황이라 느긋하게 술을 즐기는 바 방문은 몇 년째 미뤄오고 있었는데, 이런 에세이로라도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간판이 없는 바'라니 기대감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막상 책이 도착하고서는 이런저런 사유로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리다가 오늘 겨우 집어 들었다. 한 번씩 찾았던 바의 분위기, 조곤조곤한 대화 소리, 부드러운 추천과 내 고정 첫 잔과 막 잔 글렌드로낙이 떠올랐다. 집에서 편안하게 읽고 있지만, 어쩐지 스탠드 바 의자에 걸터앉아 한 잔씩 비우고 있는 느낌.
마침 여유가 되는 날이라, 더는 참지 못하고 한 잔을 따랐다. 보통은 니트로 마시지만 책을 읽으면서 마실 거라 온더락을 홀짝이면서 읽으니 나른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책에서 소개된 위스키와 칵테일들은 마셔본 것도, 마셔보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반적으로 유명하다 할 법한 것들이었다. 아마 에세이로 쓰면서 접근성과 대중성도 어느 정도는 고려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런 안에서도 CS나 변주한 제조법 등 충분히 눈에 튀는 부분들을 넣어주어 흥미로웠다.
핫 토디와 부쉬밀 16에는 꼭 도전해봐야지.
(위스키봉봉도 너무 궁금한데 가게를 찾지 못하겠다. '비터 스윗 나인'이었던 듯한데, 지금은 가게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추가 : 감사한 제보에 의하면 "쇼콜라디제이"라고 한다...!!)
편안하면서도 향기가 느껴지는 에세이였다.
다만 책을 덮으면서도 가시지 않는 의문. 저자는 서홍주 씨인데, 왜 본문은 석주 씨일까?
이곳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저자의 새로운 간판이 없는 바
'포어포어포어'를 한 번 방문해 볼 계획이 있다.
- '바'라는 공간에 혼자 다가가고 싶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어느 곳이든 향하길 바란다. 이름조차 읽기 어려운 위스키와 칵테일들은 바에서 즐기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주류를 가이드해 줄 바텐더는 많다. 그중 본인의 어느 한구석이 편안한 바와 사람, 그리고 그들과 함께할 새벽을 찾길 바란다.
- 손님 중 대부분은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추천받길 바랐다. 몇몇 단골이나 위스키 애호가들은 백 바를 지긋이 훑고 본인의 취향에 맞는 것들을 잘 골라냈다. 새로운 술을 새로운 손님에게 권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추천 다음의 각각의 만족감은 보통 첫 모금을 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 술에 관련된 이야기들의 한참을 오갔다. 나는 아직 무슨 술이 어떻고, 칵테일이 어떻고에 대해 자세한 것들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좋았다. 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어렵지 않은 것이었고 이곳에 있다면 언제든 경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떠있었다.
- "음, 오큰토션 12년이 섬세하고 가벼운 측면이 있어서 추천해 주신 것 같아요. 스코틀랜드 남부 쪽인 로우랜드에 증류소가 있구요. 특이점은 뭐 다른 증류소와 달리 세 번 증류한 정도?"
"아하, 어때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위스키?"
"한 잔만 마셔야 한다면 선택하진 않겠지만 나름의 우아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섬세하고 달콤한 뉘앙스들이 있어서 아침 식사 위스키라는 별명도 있거든요. 오히려 더 개성이 강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요."
- "나도 나이 들었나 봐. 이제 자극적 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들의 말에 순간, 자극적인 것들이 경험과 세월에 의해 사라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스키를 처음 접했을 때 강한 에탄올 때문에 눈과 코가 맵던 게 이제 사라졌기 때문이다. 잔이 중첩될 때마다 에탄올들이 나의 기관들에 서려 신경이 무뎌지는 것인지, 뇌에서 이제 이건 알콜 향이 무척 세다는 걸 인지했으니 덜 반응하라고 보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순간이 잦아지면 무척 쓸쓸할 듯하다는 생각이, 편수를 삼키고 난 후 공허함과 함께 부풀어 올랐다.
- "이 병의 뒤쪽을 보면 간단한 향과 맛이 적혀 있어요. 뭐 피트하고, 바닐라, 살짝 구운 견과류 향 등등. 이런 정보들은 이 보모어 증류소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다 나와요. 그런데 손님들에게 이런 세세한 향의 정보를 다 알려줄 필요는 없어요. 사람은 감사해서 이런 정보를 알고 마시면 정말 그런 향이 나는구나, 하고 생각하거든. 대신 나는 이 보모어 12년이란 병을 설명할 때 오래되고 늙어버린 나무 같다고 얘기해요. 손님들은 그런 향은 뭘까 하고 상상해요. 상상과 동시에 본인이 여태 경험했던 향, 맛을 유추하며 본인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죠. 손님들에게 이렇게 응대를 하고 판매를 하지만 석주 씨는 테이스팅 노트에 쓸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해요. 어렵죠?"
- 나는 사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여태 나는 위스키를 추천할 때 기본적인 아로마, 팔레트, 피니시에 의존했다. 그러나 향과 맛에 대한 획일화된 정보는 그들의 상상력을 방해할 수 있고, 내가 할 일은 단지 그들이 그 위스키 한 잔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것이었다.
- 글렌드로낙 21년. 내가 '간판이 없는 바'에서 처음에서 테이스팅 한 싱글 몰트 위스키였다. 잔을 몇 번 휘휘 굴리고 코를 가까이 댔다. 부드러운 바닐라 향과 나무 향이 가득했다. 입에 머금자 입과 코에서 셰리 향이 뿜어져 나왔고 천이 혀를 휘감는 느낌이 들었다. 여렸다가 이내 강렬해졌고 48도의 도수보다는 더 무게감이 있게 느껴졌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그 자체로 훌륭한 느낌이었다. 내가 글렌드로낙 21년을 마시고 처음 쓴 테이스팅 노트의 8번은 '반신욕을 하며 부드러운 레드와인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 "정말? 손님이었다가 이렇게 되다니, 술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지금은 좀 좋아하는 편이에요. 사실 술보다는 이 공간에 더 이끌렸던 것 같아요."
- "오늘은 어떤 술이 들어간 초콜릿인가요?"
"음, 하나는 오늘 첫 잔으로 드신 아드벡이 들어간 위스키 봉봉이구요. 다른 하나는 샤르트뢰즈 그린이라는 리큐르가 들어간 파베입니다."
나는 샤르트뢰즈 그린 병을 짚고 슬며시 라벨을 보여주었다.
"샤르트뢰즈라는 수도원에서 처음 만들어진 허브 리큐르에요. 허브가 무려 백 몇 가지 정도 들어가는데, 구체적인 재료나 배합 비율은 아직도 비밀이죠. 그중 그린이라는 이 리큐르는 옐로우에 비해 좀 더 녹두색에 가까운데요. 특유의 비터함과 스파이시함이 매력이에요. 쇼콜라티에 분도 너무 개성이 강한 리큐르여서 망설였다고 하시더군요."
"샤르트뢰즈는 접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드벡 봉봉은 너무 궁금하네요. 초콜릿 플레이트로 할게요." ...
"저도 엄청난 팬인걸요. 면세점에서 사 먹던 술 들어간 초콜릿이랑은 차원이 다르니까요."
(리뷰자 주 : 서촌에 있는 쇼콜라띠에에서 공수했다라... 어딘지를 알려주세요..!)
- "건포도 10ea, 로즈메리 줄기 2ea, 진 40mL, 시럽 살짝, 아로마 비터 1dash..."
"석주 씨, 뭐해요? 레시피 외우나?"
"아, 네. 레시피도 이름이 독특하더라고요? 집시 마티니라는 칵테일인데,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어져서요."
- "아냐, 오늘은 칵테일 마실래요. 뜨거운 칵테일은 없나?"
"음... 약간 차 같은 칵테일도 있는데 괜찮으시려나?"
"오, 좋죠. 좋아. 칵테일 이름이 뭐예요?"
"핫 토디예요. 귀엽죠, 이름."
주문이 핫 토디로 당연하게 결정 난 듯 나는 이미 잔에 타라마 흑당을 넣으며 말하고 있었다. 전기 포트에 물을 가득 담고 파란 전구의 불빛이 꺼질 때쯤 뜨거운 물이 포트의 바닥을 긁는 소리가 바에 퍼졌다. 잔의 한가운데 놓인 흑당 위로 오렌지 비터를 조금 떨궜다. 우린 찻물을 잔에 붓고 흑당을 으깨면 입자들이 잘 섞이려 애를 썼고, 그렇게 서로 몸을 부비고 바르르 떨며 아스러졌다. 그 위로 탈리스커 10년 30mL를 부은 후 레몬 껍질에 정향을 세 개 박아 띄웠다. 갈색빛의 찻물에 노란 배가 둥둥 떠다니며 서로의 향을 뽐내고 있었다.
"자, 여기 핫 토디예요. 꿀과 계피를 많이 사용하는데요. 이 잔은 약간 다른 느낌의 핫 토디예요. 들어간 위스키는 탈리스커 10년."
"아, 너무 좋다. 홍차랑 스모키한 위스키도 너무 잘 어울리고. 정향이 정말 잘 어울리네."
- "핫 토디는 사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서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뜨거운 물에 위스키와 다양한 향신료, 꿀을 넣고 차처럼 마시는 데서 유래되었어요."
나는 찻물같이 옅은 나의 핫 토디가 좋았다. 찻물에 띄운 노란 배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면 지나간 그 흔적에 작은 기름이 뒤섞였다. 이곳이 처음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한데 섞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뜨거워졌다.
(리뷰자 주 : 뱅쇼는 좋아하는 편인데, '핫 토디'는 마셔보지 못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지만 나는 뜨죽아이니 괜찮다. 올해 안에 기회가 닿았으면 좋겠다.)
- 요이치는 닛카에서 생산하는 싱글 몰트 위스키였다. 그중 20년은 싱글 몰트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스카치 위스키를 누르고 1등을 차지한 적이 있었고, 덕분에 가격이 많이 상승한 상태였다.
"구하기도 힘든 것들이 가끔 이런 허름한 매장에 숨어있다니까?"
- 김렛은 몇 번 먹어보지 못했지만 나도 꽤 좋아하는 칵테일이었다. 허브 향이 감돈다고는 하나 에탄올 향이 더 지배적인 진에 라임즙과 시럽이 살짝 들어간 간단한 칵테일이었다. 들어간 양이나 비율보다는 셰이킹의 강도나 속도, 얼음이 깨지는 정도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인 재미있는 칵테일이기도 했다. 바텐더는 본인의 재량에 따라 이 김렛이라는 칵테일을 날카롭고 사워한 맛이 튀게 할 수도 있었고, 약간은 둥글고 목 넘김이 편한 뉘앙스로 표현할 수도 있었다. 물론 셰이킹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었다. 셰이킹을 할 때 깨진 얼음들을 플레이크라고 했는데, 칵테일 표면에 균등하게 떠 있는 플레이크는 첫 모금의 순간을 좀 더 황홀하게 만들어 줬다.
- "네, 오면 늘 첫 잔은 진피즈, 두 번째 잔은 사이드카! 다음은 김렛 아니면 마티니예요. 석주 씨도 잘 기억해 둬요. A 씨는 커피 하는 분이에요. 봐서 알겠지만, 언뜻 봐도 섬세해 보이죠? 딱히 별말씀 안 하시긴 하는데, 난 저런 분들이 더 까다롭더라."
그가 본인만의 술 취향이 뚜렷하다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바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는 그런 부류들이 많았다. 칵테일의 경우는 레시피의 변화, 바텐더의 컨디션, 재료의 신선도, 실내의 온도까지 까다로운 그들의 혀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나는 A 씨가 생각보다 까다로운 손님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술을 들이켜기 전 본인의 감정상태를 잘 알았고, 동행한 이와의 관계를 고려해 술을 주문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인 손님이 아닐 수없었다. 앞서 말한 모든 걸 고려해 한 잔을 내주고 가이드해야 하는 것이 바 앞에 선 사람의 책임이었지만 A 씨는 스스로 그런 고민을 마친 상태가 아니었을까 했다.
- "보통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새로 제작한 오크통이 아닌 셰리 와인이나 포트 와인, 버번 위스키 등을 숙성시켰던 오크를 재사용해서 숙성해요. 여기에 표기된 내용은, 어떤 캐스크에 숙성을 시킨 후 마지막 추가 숙성을 소테른이라는 와인을 담았던 캐스크에서 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소테른은 프랑스 보르도 근처의 소테른 지역에서 생산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트 화이트 와인입니다. 넥타라는 말은 게일어로 신들의 음료이구요. 도르는 황금을 의미해요. 즉 황금의 음료라는 뜻이죠. 개인적으로는 글렌모렌지 라인업 중에서 가장 술의 향과 뉘앙스를 잘 표현한 네이밍과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리뷰자 주 : 잔 수 제한이 있을 때는 포기하는 편이지만, 개인적으로도 넥타도르는 입문하기에도 상당히 좋은 위스키라고 생각한다. 다소 오일리한 넘김이 취향을 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아한다.)
- 가져온 원두로 사수가 커피를 내리자마자 빼어난 향이 손님을 이끌기라도 하듯 바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자리하시면 됩니다."
"네. 고마워요. 여기는 스카치 위스키가 대부분이네요?"
백 바를 유심히 보던 손님이 말했다.
"네. 대부분은 스카치 위스키에요. 일본이나 대만 위스키들도 몇 종 있구요."
"음. 저 저걸로 첫 잔 할게요. 부쉬밀 16년."
"아, 아이리쉬 위스키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좋아하죠. 목에서 넘어갈 때 특유의 부드러움이 좋아요. 사실 부쉬밀 10년은 마셔봤는데, 16년은 처음이에요."
"16년은 저도 좋아해요. 숙성은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와 버번 캐스크에서 진행되었고 마지막을 포트 와인 캐스크에서 추가 숙성했어요. 10년보다 훨씬 크리미함이 느껴지죠. 개인적으로 가장 커피 뉘앙스를 내뿜는 위스키라고 생각해요. 니트로 드릴까요?"
"네, 니트로."
부쉬밀을 살짝 들이킨 그는 큰 숨을 내뱉었다. 코앞에는 토피와 살짝 볶은 커피콩 향이 진동했다.
"아, 좋아요. 부드럽고, 살짝살짝 찌르는 느낌도 이렇게 좋은 아이리쉬 위스키들은 요새 왜 이리 보기가 어려운 걸까요?"
"아무래도 시장성이 떨어져서겠죠? 아이리쉬 위스키 증류소들은 높은 알코올 도수의 위스키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연속식 증류기가 아닌 단식 증류기를 고집해요. 또 3번씩 증류하는 이유로 노동력도 더 많이 필요하죠. 제임슨 같은 증류소가 아니면 찾기도 어려워요. 아쉽죠."
아이리쉬 위스키 자체를 찾는 손님은 드물었다. 개성이 강한 스카치 싱글 몰트, 그중에서도 피트한 캐릭터들이 인기여서 아이리쉬 위스키는 찬밥 신세였다.
(리뷰자 주 : 부쉬밀 16. 기억해둘 것. 꼭 마셔봐야지.)
- 바텐더의 셀링에 살아난 리미티드 본능이 꿈틀거렸다. 10년에 어울리지 않는 진한 향. 특유의 짭조름한 건어물 향과 옅은 피트가 코와 머리를 울렸다. 간신히 넣은 한 모금은 온몸을 쫙 펴지게 했다. 55도의 도수 치고는 부드러운 목 넘김. 하지만 여운은 상당히 길었다. 나에게 잘 맞는, 좋은 위스키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운이었다. 목에서 가슴까지 깊게 전해지는 여운을 즐기는 게 위스키를 마시는 이유 중 첫 번째였다.
- "처음이신가요?"
"네. 들어오는 데 좀 애를 먹었네요."
"처음에는 다들 그러세요. 암호가 없는 게 다행이죠."
"차라리 암호가 있는 게 편할 것 같아요. 바의 콘셉트인가요?"
"네. 스피크이지라는 바 형태를 차용했어요. 스피크이지는 '목소리를 낮춰라'라는 뜻이죠."
"들어는 봤는데, 실제로 이런 콘셉트의 바는 처음이에요."
"1920년 금주법 시대에 밀주를 판매하는 공간에서 차용된 형태의 바죠. 단속을 피하기 위해 실제로 암호가 있거나,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고요. 지금에 와서는 콘셉트처럼 되었지만요. 블라인드 피그라고도 불러요."
실제로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스피크이지 바가 성행했다. 핫도그 집 쪽문에 입구가 숨어있다던가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바 등, 본인만 알고 싶어 하는 비밀스러운 바라는 것은 확연히 위스키라는 농밀한 것과 어울렸다.
(리뷰자 주 : 미누바는 입구가 독특하긴 한데... 스피크이지인가? 디스틸은 확실히. 위스키를 주로 다루는 바들은 아무래도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재미를 주기 위해서도 이렇게 입구를 숨기거나 간판이 없는 형태가 많은 듯하다.)
- "다들 한 잔씩 하시려면 이게 낫겠어요. 카발란."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 대만의 이란 현에서 생산되는 위스키였다. 물을 희석하지 않은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로 도수는 59도 내외였다. 전형적인 녹진한 셰리 캐스크의 뉘앙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위스키.
"와! 카발란 오랜만이네요. 구하기 어렵더라. 비싸기도 하고."
옆에 앉아 눈을 초롱이며 다른 단골이 말했다.
"왜 이렇게 비싼 거예요, 근데?"
"음, '앤젤스 셰어'라는 단어 들어보셨죠? 위스키나 브랜디를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면 알코올은 조금씩 증발해요. 오크는 금속과는 달리 기체를 완벽하게 밀폐할 수가 없으니까요. 때문에 나무의 미세한 틈으로 물이나 알코올이 증발하죠. 대략 1년에 2%에서 3% 증발해요. 이걸 천사의 몫이라고 칭하잖아요. 대만 같은 경우 평균 기온이 높아요. 덕분에 엔젤스 셰어 양이 많아집니다. 그만큼 원액의 손실이 많으니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해요."
"천사들의 몫이 꽤 값어치를 하네."
"여담이지만 데블스 셰어라는 단어도 있어요. 위스키가 병입 된 후, 다루는 사람의 실수나 또 다른 여러 이유들로 얻는 위스키의 손실을 데블스 셰어라고 하죠."
"데블스 셰어 없이 한 잔씩 줘요, 석주 씨."
좋은 위스키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 위스키는 가장 빛이 났다. 녹진한 카발란은 순간의 응어리들을 풀어헤칠 만큼 강력했다. 땡볕에 말라 찐득한 과실들이 옆으로 새어 나온 자두처럼 공기에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리뷰자 주 : 이 숙성 연도에 이런 맛이 난다고? 싶었던 셰리 몬스터. 내 사랑 글렌드로낙이 귀해지며 카발란 솔리스트로 눈을 돌렸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매력적이지만 아직도 내 원픽은 글렌드로낙이다. 카발란이 좀 더 접근성이 좋았더라면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셰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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