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람타] 평행 현실 : 양자 장의 요동

일루젼 2022. 5. 26. 16:16
728x90
반응형

저자 : 람타 / 제이지 나이트 / 손민서

원제 : PARALLEL LIFETIMES: FLUCTUATIONS IN THE QUANTUM FIELD 
출판 : 아이커넥 
출간 : 2014.04.11 


       

꿈.  입자의 변위. 하나의 완결성. 

최근의 며칠은 약간 무서울 정도로 특정 지점으로 이끌리는 기분이다.

 

사실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젤다에 관해 남겼던 잡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전자구름과 같은 상태 속에서 정해진 궤도일 뿐이며, 한 지점이 정해지는 순간 고정된다. 움직이는 것은 하나의 입자일 뿐이지만, 그것이 그려내는 궤도가 구름이 되고 형상이 된다. 춤을 추는 것이 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래를 변화시켜나가는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라기보다, 다른 그림이 그려진 궤도 -그러나 지금 이 지점에서는 겹쳐져 있는- 로 옮겨 타는 것에 가깝다. 그러므로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보다는 '나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확장하고 다룰 수 있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무엇도 이동하지 않는다. 고정된 점들 -입자- 의 매트릭스 뿐. 반짝이며 점멸하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입자 그 자체가 생명이고 호흡이며 리듬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이동은 실제적 이동이 아니라 내 의식이 해당 현실을 구성하는 입자의 위치 -상태- 로 변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된다.  

 

깔끔하게 손에 닿을 듯 하다가 멀어진다. 현재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대략 이런 정도이다. 이는 <여사제 타프티>에서 리뷰했던 탄소 순환과도 이어지는데, 조금 러프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게임 안에서 실현 가능한 모든 가능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을 어떤 순서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시킬지는 유저마다의 고유성이 있겠지만, 어떤 창의력을 발휘하더라도 이미 구성된 설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글리치조차도 도달하는 루트의 문제일 뿐, '설정된' 결과값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것이 일종의 고정된 과거-현재-미래의 무시간성이다. 내가 접속하는 순간 정해지는 변수 값은 그 안에서의 어떤 행동에도 적용되므로, 나는 '자유'라는 환상 속에 내게 특정된 클라이맥스(혹은 발작 버튼)에 탐닉하며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프트는 다르다. 시프트는 말 그대로 그 순간 겹쳐졌던 혼선을 통해 플레이하고 있던 게임을 바꾸는 것에 가깝다. 트랜서핑은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반드시 해결한 다음 이동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만-, 보다 보편적으로는 그 양극단을 이해하고 통합하게 되면 그에 해당되는 스펙트럼 전체를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즉 이원성의 끝을 이해하고 나면 그 라인에서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 필요에 따라 선택해서 위치할 수 있어지는 느낌이다. 

 

스스로 생각 정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상 명료하게 정리해서 글을 남기기가 어렵다. 다만 마블에서 보여주는 평행세계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는 것만 전달하고 싶다. 모든 세계는 '내가 그것에 속하게 되는 순간' 점화되어 펼쳐진다. 그리고 게임 체인저는 그 룰 안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지점의 극'을 넘어설 때 태어난다. 다시 말해, 진동하고 있는 입자는 그 진동수를 벗어날 때 진정으로 변화한다. 그 외에는 그 어떤 순간에도 모든 위치는 해당 진동수 안에 존재할 뿐이다. (자신이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부유해지는 것도, 궁핌해지는 것도 해당 가능태 안에서의 극점일 뿐이다. 그런 변화는 변위가 아닌 정해진 진동수 안에서의 이동이다. 그런 변화는 그가 창조력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끝.

 


   

 

- 그것은, 그 몸에 거하는 신이, 신의 위대한 미개척 영역을 그의 순수한 근원으로부터 가져와 그 정수인 몸에 펼치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두뇌, 그 두뇌를 가진 무한한 합일의 창조자로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똑같은 속도로 진동한다. 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꿈을 만지고, 꿈을 향기 맡고, 꿈을 듣고, 꿈을 맛보는 -그는 꿈을 창조한 적이 있다- 지금의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도구를, 당신이 가진 메커니즘을, 그리고 당신이 창조적인 풍요의 한 차원 level을 책임지는 핵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별들의 변화로 인해, 지구와 다른 행성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우주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일으키는 대이변에 쉽게 영향을 받았다. 지구에 있었던 최초의 위대한 신들은 그러한 일들을 예의 주시했고, 또한 그러한 일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모든 세대가 그것에 관한 지식을 잃어버렸고, 대이변은 그들을, 그들의 두뇌를, 그들의 육체를, 그들의 혈육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 그런 뒤 나타난 새로운 자손들은 더욱더 궁지에 빠졌고, 더욱더 길을 잃고 퇴보하였다. 

 

- 당신은 한 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당신은 한 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신은 한 때 자신이 창조한 꽃과 벌레조차도 신에게 축복의 본질을 알게 해 줄 정도로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신의 관리자였다. 스스로를 사랑한 신은 그러한 위대한 업적으로 사랑스러운 것들을 창조했으며, 그중의 하나인 육체로 그 사랑스러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지질학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당신은 극적인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싶으면 당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그런 능력을 모른다는 것은,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며 결국에는 시궁창에 빠질 것이다. 

- 아름다운 신의 본질이 사라졌다. 인간의 경험이 자신의 감정적 표현에 깊숙이 빠져버림에 따라, 자신의 창조성을 잃어버린 채 중력과 자기력만 가지고 자신의 감정과 정서에 보충되는 것들만 자신의 소용돌이로,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인다. 당신 존재의 위대한 신은 마비된 신이 아니다. 마비된 것은 당신이다. 세대에 세대를 거쳐 당신은 이 정신없는 소용돌이를 영속시켜왔다. 당신은 물질 덩어리 속에서 아주 무거워지고 물질의 완숙기로 도약해, 경험하기에 좋은 육체를 보존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창조할 필요 없이, 다 자란 인간들의 감정적 흐름에 동참할 수 있었다.

 

-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방향을 틀었을 때를, 그리고 위대한 창조의 힘이 당신의 마음으로, 당신의 영감으로, 당신이 소용돌이 뒤에 남겨둔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를 기억하라는 강한 재촉을 받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을 사는 이유는 감정에 매이거나 아이디어를 영구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잊혀졌던 위대한 건축가인 당신이 은둔하고 비밀리에 칩거해 살고 있는, 우리 두뇌 속의 특출한 왕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위대한 건축가, 위대한 신은 당신 생에서 뭔가 해달라는 요청을 조금밖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신은 당신 두뇌 속에, 세포 속에, 의식과 에너지라 부르는 강의 제방에서 떼어낸 진흙인 DNA, 당신의 그 DNA 속에 생명을 부여하였다.

 

- 총체적인 물체는 원자구조와 원자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원자는 반드시 같은 원자는 아니다. 즉 나무 한 조각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그 속에 화학적으로 다양한 단계의 원자들의 종합 자료실이다. 예를 들면, 나무 한 조각을 보고는 "어, 이건 섬유질 한 조각이군"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우리가 분자 단위의 성분까지 섬유질을 분석해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서 원자 크기의 나무 비슷한 뭔가는 없고, 원자 크기의 나무는 우리에게 나무라는 환영을 주는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나무를 구성하는 화학적 성분 -수액, 응고물, 탄소의 농도, H2O의 농도- 을 그 나무 조각에서 하나라도 제거해 버리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나무 조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무는 하나의 원자가 아니며, 나무를 통해 흐르는 수액 역시 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화학 물질이다. 

 

- 양자물리학 연구에서 모든 입자들의 기원이 되는 입자가 있을까? 아니면 그 입자들 모두가 각기 고유하며 서로 다 다른가? 그 입자들 -중성미자부터 전자, 양전자, 쿼크, 중력 양자까지- 은 살아 있는가? 왜 당신은 그것들에 대한 것을 읽으면서 마치 살아 있지 않는 것처럼 대하는가? 양성자는 살아 있는가? 알파 입자는? 물론, 그것들은 살아 있다. 바늘 머리에 천사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에 대한 교회 내부의 주된 논점이 무엇인가? 천사들이 다른 영역에서 왔다면 그 천사들은 여기 이 영역에서는 공간을 차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공간을 차지한다면 어떨까? 바늘 머리에 천사가 얼마나 있고, 또 무엇을 그들은 천사라고 단정지은 것일까? 바늘 머리에 얼마나 많은 원자가 존재하는지 당신은 아는가? 그럼 천사와 원자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다른 건 없다. 

 

- 당신들 중 많은 이가 입자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어디에 이끌렸는지 말해주겠다. 당신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믿지 못하고, 또 자신이 기대하는 즉각적인 기쁨이 아니기 때문에, 그 능력을 쓰지 않으려 한다. 그렇긴 해도, 당신들 중 많은 이는 그 능력에 계속 주의를 집중할 것이고, 또 양자 물리학에 관해 읽으며 양자 환경에서 입자들에게 괴상하고 역동적이고 개별적인 속성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마 이해할 것이다. 입자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에 있을 수 있으므로, 수학적 접근으로 그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측정하는 것은 고려해 볼 가치가 없는 문제이다. 누가 이 입자들에게 접어라 펼쳐라라고 하는가? 접어라 펼쳐라라고 하는 이는 입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적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 하나의 중력 양자는 아원자 입자로만 존재하는가, 아니면 실제로 1차원 the first plane의 기원까지 죽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가? 중력 양자가 뭔가? 뉴턴의 중력? 중력 양자의 속성은 의도와 중력 양자에게 생명을 준 신의 합일된 경험에 의해 붕괴되는, 하나의 에너지이므로 중력 양자는 다차원적인 multiplane 입자이다. 신의 마음에 있는 의도는, 거칠고 어떤 다른 입자들을 가지고 규명하기 힘든 하나의 입자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것들이 중력 양자이고, 그것들은 다차원화 dimensionalize 그리고 에너지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중력 양자가 이러한 모든 장과 7가지 차원 plane의 의식 안에서 정확한 속성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말은, 중력 양자는 신의 의도와 신의 생명을 그 안에 함께 간직하는 끈끈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존속시켜야 하는 신의 의도이며, 또한 우리는 신을 이러한 한정된 입자들로 쪼개어 그것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큰 구체, 중력장에서 회전하고 있는 지구의 중력은 무엇인가? 우리는 중력이 유지되어야 하는 생명의 의도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중력을 단순히 회전하고 있는 전자기장으로 보는가? 아니면 그것은 의도를 가진 생명체인가? 당신이 진정으로 깨달은 학생이라면, 지금 이 순간 어떤 거대한 인식 realizations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 "아, 우리는 꿈의 재료들이니."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나는 우리가 궁극의 드리머가 꾸는 꿈속에서 꿈을 꾸는 존재라고 말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것을 언급하나? 진정 왜 이러한 지식을, 꿈을 이루는 재료로 언급하는가? 당신들은 왜 위대한 드리머와 함께 꿈을 꾸는 생명의 존재들로 표현되는가? 의식과 에너지 -신과 2차 의식- 에서 2차 의식과 2차 의식이 깃든 모든 곳이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꿈꾸는 존재는 꿈으로 만들어진 다음, 꿈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다. 꿈꾸는 존재가 꿈을 창조하는 내내, 위대한 드리머인 신은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를 꿈꾸고, 스스로를 장악한다. 이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놀라운 과학의 입자들을 이런 측면에서 연구하면, 우리는 이동하지 않지만 요동 fluctuation 치는, 변화하는 입자 세계의 특성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 장에는 이동이 없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 우리가 있다. 이것은 장 field이다. 그 작은 장에 있는 것이 바로 이 더 큰 그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장에서 관찰자는 오다가다 하건, 늘 하건, 확실히 하건, 아무튼 포커스를 하고, 생각을 하고, 고찰을 하고, 반응을 하고 있다. 관찰자는 바로 당신인 그 꿈꾸는 마음의 총체적인 지원 하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이 장을 만들어낸다.  

 

- 당신은 사물 -사람, 장소, 사물, 시간, 사건- 의 개념 안에서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사용할 수 있었던 사물 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를 독특하고 개별적인 사물이 되도록 그룹화하여 생명을 부여하는 그 원자들, 바로 그 원자들로 구성된 바로 그 물질을 당신은 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들이 그저 압축과 압력, 기압 같은 걸 가지고 어떤 식으로든 함께 존속되는 먼지 같은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사물이 본질적으로 생명이 없다고, 정녕코 살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 생각의 맥을 계속 이어간다면, 양자 장이라는 역동적인 장과 의식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당신이 그것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장에서 사물과 그 모든 것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물들은 우리가 공부했던 그 합일된 의식과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입자들은 그렇게 입자 그룹을 형성한다. 결코 무작위가 아닌 당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양자장은 정말 마음과 밀착하여 떼어내려야 뗄 수없이 결합되어 있고, 마음의 작동은 관찰자가 한다. 양자장이 마음과 그렇게 철저히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차원의 마음이 당신 특유의 양자 상태 quantum state와 정렬하는가?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양자들을 한 데 모으는 일을 하는 것이 신 -당신- 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봐라. 당신이 무엇을 하건 어쨌거나 그것은 생각을 끌어오고 반응을 일으킨다. 당신의 양자 상태는 즉각적으로 당신에게 맞춰 정합하고 조정한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당신 현실 reality의 사물들이다. 모든 것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의 양자 설계에 맞춰져 있다. 이 양자 상태는 당신에게 속해 있다. 

 

- 양자 세계에서는 이동하는 것이 없다. 만약 사물이 움직여 이동했다면 양자 세계에 시간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시간이 없고, 움직여 이동하는 것도 없다. 거기서 이 그룹의 양자 입자들이 하는 것은 요동치는 것이고, 장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 입자들은 사라진다. 그것들은 펼쳐지고 접히지만, 움직여 이동하지는 않는다. 양자 상태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상태라 불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고, 양자 장에서 이 상태는 지속적이다. 당신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데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은 당신의 상태 안에 이미 다 가지고 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 당신의 출생은 이미 다 알려져 있는 것이고 당신의 죽음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를 하나의 상태라고 말한다. 하나의 양자 상태에서는 우리가 지금 Now이라고 부르는 곳에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영속하는 지금에 있고, 그곳은 유일하며, 또한 그곳은 신의 마음속에 있다. 게다가 신의 마음이라는 것은 소위 당신의 개별적인 상태, 즉 양자 상태를 구성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상태가 2차 의식이다. 

 

-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면 당신은 "아니,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상태가 항상 그럴 거면, 성가시게 내가 뭐하러 굳이 배우는 거죠?"라고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입자가 모든 차원 level, 모든 잠재력, 모든 가능성 속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 말은 내 상태를 양자 구성하는 입자와 똑같은 입자가 똑같은 상태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이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들 속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러니 우리가 오로지 해야 할 일은 아마 이 그림 3에서 A보다 더 좋아 보이는 뭔가로, 그림과 같이, 그림에서 B로 상태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목하라. 내가 이전의 상태 위에 또 다른 상태의 그림을 그렸다. 보다시피 이전의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나? 

 

- 당신의 상태와 그것이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 -모든 지적 입자들의 모든 위치, 모든 그룹화의 모든 경험적 지성, 그리고 그룹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의식- 은 언제나 당신 정원의 먼지에까지 침투해 들어간다. 이걸 단순히 "내 상태는 변했어. 이런 거야"라고 할 수는 없다. 변화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사람과 장소, 사물, 시간, 사건의 형태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한 양자 상태가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신 삶을 부여한 당신 양자장의 고정된 상태가 -당신 삶 속에 구현될 수도 있고 구현될 수 없기도 하는 모든 것들의 패턴 - 만약 바뀔 수 있다면, 이것이 정말로 하나의 상태 변경일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한 상태일까? 

 

- 그리고 나는, 이 상태가 이 상태 속에서 모든 사람, 장소, 사물, 시간, 사건들을 조정하고 다스린다고 당신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와 똑같은 상태를 공유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당신 삶에 구현될 수 없다. 이 지식을 통해, 당신 현실 때문에 자신이 희생자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이제는 분리되어 떨어져 나올 수 있겠나? 당신 삶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는 자가 당신이라는 그 생각에서도 이제는 좀 벗어나지 않을 텐가? 당신은 당신이고, 신은 신이라는 그 생각에서 이제 좀 떨어져 나올 준비가 되지 않나? 만약 당신이 이를 따르고, 이를 말하고, 이를 안다면, 그러면 당신은 양자 물리학으로 잠재적 가능성의 가장 깊은 비밀들을 파고드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석한 마음들과 함께 최고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 분리 작업을 할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왜 당신이 살아온 세월 내내 당신 삶을 둘러싼 환경의 희생자였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 당신이 어떤 특별한 유형이라 양자물리학과는 별개로 논다고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당신이 너무나 개인주의적이어서 그래서 왠지 당신이, 당신 양자 상태와 그것의 결과물인 당신 삶이, 마치 신이 꾸민 거대하고 보수적인 음모 같다고 여겨지나? 그런 생각이 드나? 당신은, 혹독한 삶으로 인해 당신이 남들과 너무 다르고, 너무 괴롭고,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너무 음울해서, 어느 정도는 속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리고 왜 그러는지 당신도 모르는 이유로, 양자장이 당신에게 개인적인 벌을 주고 있다는 그 생각에서 이제 벗어나려고 하는가? 결핍을 애지중지 끼고 있는 짓은 이제 좀 그만할 생각이 드나? 또, 그 왜 있잖은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더럽게 기분이 나쁜 것 말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가져서 더럽게 행복한 것, 그것에서 이제 좀 발을 빼 볼 텐가? 불쌍한 당신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그 뭔가를 통제하려는 그 생각에서 이제 벗어나려고 하는가? 내가 당신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친 후에도 당신들이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당신들은 그러한 고통을 당해 마땅하다. 이는, "마음이 양자장과 불가분 하게 결합되어 있다면, 그 거대한 의식의 흐름에서 몸이라는 것을 가려내어 지정할 수 있는 힘, 그 통제하는 힘은 무엇인가?"라고 내가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끄집어내도록 한다. 몸이 만들어지는 방법과 몸이 태어난 환경은 공히 이 법칙에 따른 것이다. 마음, 즉 2차 의식이 경험할 모든 것은, 이러한 기틀에 근거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기틀로부터 꽃필 것이다. 

 

- 양자 상태에서 시프트는 평행 현실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제 그 평행 현실 안의 모든 것이 다르다. 이전에 당신을 강제했던 것이 새로운 시프트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당신과 당신 환경을 둘러싼 관계가 해제된다. 당신은 이제 평행 존재 속에 있다. 평행 존재 안의 우리 마음은, 이전의 상태에 있던 우리 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양자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평행 존재 안에서도 역시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마음은 새로운 통로인 새로운 삶으로 시프트 했고, 모든 것이 다르다. 분명해지는 것은 이전에 한 때 당신 삶을 지배했던 클라이맥스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클라이맥스는 새로운 삶에서는 또렷하지 않다. 그리고 그 영향력 역시 사람, 장소, 사물, 시간,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 그 말은 우리에게 삶이 주어졌다면 우리가 죽을 거라는 것이고, 우리는 곧 사라질 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라질 꿈이 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세상이 분리 가능하다는 것과 감정체 안의 당신은 난공불락이라는 것 정도의 현실 공식 메커니즘을 아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가장 위대한 클라이맥스는, 우리가 왜 여기 있고, 여기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와 관련하여, 당신이 글로벌하고 인도주의적이고 늘 유념하는 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 우리가 그것을 알면, 그때 우리가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 보는 관점에서의 세계는 우리의 도덕성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시험대에 앉지 않아도 될 것이고, 우리 마음에서 유혹을 차단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팔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그들이 우리를 설득하는 것을 우리가 허용하는 입장에 우리 자신을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유용한 상품으로 그 입장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비슷한 어떤 처지나 입장에 처하는 일이 우리에게 이제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사물, 장소, 시간, 사건들로 이루어진 -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 아름다운 여자들, 못생긴 여자들, 못생긴 남자들, 색깔, 형태, 문화, 활동성 - 그 어떤 것도 이제 더 이상 클라이맥스를 얻기에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위대한 앞으로 용인되고, 그 삶은 우리로 하여금 신에게 다가가도록 해준다. 

 

-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하는 우리의 무력함은 우리가 이것을 물질에서 물질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허나 현실에서 그것은 마음에서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시프트를 경험한다. 우리는 위대한 전사戰士가 되어 우리의 중독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중독을 희망적인 어떤 입장에서가 아니라, 창조 자체가 존재가 되는 방식 -신, 이미지의 명확한 표현, 태도, 그런 다음 이미지 되기, 떼어 놓기,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정말 그것- 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하나 그것 -중독- 을 찾아내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자유다.  

 

    

 

더보기

 

- 우리는 영적이기를 원하는 때면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다. 우리가 그 신경망 neuronet 버튼을 누르면 그 보잘것없는 문장들이 떠오른다.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당신은 그것들을 믿고 지지하고 그 생각들을 말로 한다. 그러나 그 생각들이 희미하게 사라지고 나면, 당신은 다시 감정의 폭풍 속으로 돌아간다. 당신은 당신 마음을 노출시키는 임무를 이행한 것이다. 

 

- 신은 인간을 열렬히 사랑한다. 인간 개개인이 신의 거울이자 신의 가장 위대한 잠재력이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를 경험하고자 하는 그 위대한 열정으로 자신을 저 멀리 내던져 종국에 공간/우주 -이하 space는 공간으로 번역함- 그 자체가 되기까지는 영원의 무한함 속에서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고 또 알고 있는 '공간'이 그저 하나의 잠재된 가능성 a potential으로 존재했을 때, 신이 자신의 창조물 밖으로 나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드높은 개념들 concepts을 개발시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영원의 무한함 속에서 이루어낸 놀랄 만한 여정이었다. 현실이라는 플랫폼 platform of reality 그리고 그 광경에 있는 것은, 의식과 에너지, 그것이 지닌 아이디어를 가진 창조주와, 의식과 에너지가 형태를 갖췄던 곳을 펼침 the unfolding, 이 두 가지 개입만이 유일했다. 그런 아이디어가 형태를 얻고 경험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 무로 향한 광활하고 척박한 풍경은 하나의 생생한 차원 dimension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 위대하고 위대한 건축가는 무엇보다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경이로운 차원들 plane을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건설했다. 무엇을 위해 서둘러야 한단 말인가? 최고의 의식이자 비할 데 없이 강력한 창조의 주체인 이 위대한 존재는 척박한 마음-척박한 의식을 차원화한 dimensionalized 마음으로, 또한 척박한 광활함을 출중한 아름다움으로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 일은 계속 계속 계속되었다. 각 차원 level은 오직 이 존재가 축적해온 자기실현된 생각들이 한계에 다다라, 기존의 차원 level에서는 유지될 수 없었던 한 개념과 충돌하였기 때문에 창조되었다. 그 개념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는 양자 도약 quantum leap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그러한 차원들 dimensions 속에서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놀랄만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신의 마음으로 도약하였는데, 그곳은 의식과 에너지의 강, 그 흐름 속에서 또 다른 척박함, 여전히 황량한 차원 plane으로 창조되었다. 고귀한 인식 realization을 가지고 이 장엄한 존재는 마음이라 불리는 자기 자신 속에서, 너무나 다른 모습, 다른 시간, 다른 구조로 세웠던 위대한 지혜와 심원한 개념을 형상으로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이러한 구조들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광활해져 갔다. 그리하여 시간 그 자체가 확장할 수 있었다. 신의 마음의 최종적인 경험을 향한 꿈의 고속도로는 더 길어지고 더욱 아름다워져 갔다.   

 

- 내가 말하는 이 신은 당신의 신이다. 신의 생각을 차원화 dimensionalizing 하는 데에는 상상을 불허하는 많은 시간 -시간은 법칙이 아니었지만 법칙 안에서 사용되었다- 이 걸렸다. 이 신은 그러한 모든 차원들 levels을 개발한데 이어, 완벽한 탈 것 -인간의 육체- 을 개발하기 위해 역시 영겁의 시간을 들였다.  

 

- 내가 방금 말한 것들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정원에서 마침내 꽃을 만지고 심지어 그 꽃을 따기까지 하는 신에게 우리를 다시 데려다 놓는 것이다. 정말 특별한 감동이지 않은가! 그 꽃은 신이 심은 유일한 꽃일까? 그 꽃이 고원을 지배하던 유일한 꽃일까? 당신은 당신이 아주 중요한 시기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박스에 갇혀 영적인 반박이나 철학적 변명을 늘어놓으며 계속 그 소용돌이 속에 있을 수도 있고, 또한 다시 돌아와 고대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당신 능력 밖이라며 내치지 않고, 당신 능력의 범위로 받아들여 배울 수도 있다. 학교가 지나온 모든 시간들은 놀랍고도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이 여정은 강력한 끌림의 여정이었고, 열정의 무게가 실린 여정이었고, 쓰디쓴 증오의 여정이었다. 학교는 사람들이 그들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지옥과, 감정의 포로가 되어 갇혀 지낸 그들의 감옥을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가장 광범위하게 표현을 하자면, 이 학교는 당신이 자기실현된 사랑의 활동을 하는 위대한 신, 미지의 것을 깨달으려는 창조적인 추진을 하는 신, 스스로를 알기 위해 열정적으로 공격을 계속하는 신, 황량한 불모지에 마음의 위대한 개념을 세우려는 신이었으나, 이후 줄곧 영원 속에서 작디작은 존재로 있는 당신을 탐구하고자 노력해왔다. 

 

- 생명과 생명의 자각 안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부활의 씨앗들이든 아니든 간에, 창조된 생명의 행위는 창조자에게 위대한 선물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위대한 선물이란 극단적으로 단순히 표현한 것으로, 이러한 생물체 전부와 신의 마음에서 나온 이러한 아이디어들 전부가 실제로 신의 마음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선물이다. 그것들은 의식과 에너지로서의 신으로부터 생긴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이었다. 그들 생명의 지속 개념을 이상화하는 그들 능력의 확대 -덩어리 짓고 창조하고 경험하기 위한 물질이라도- 가 생각의 형태를 빚어냈다. 그것이 비록 마음이 나타내려 했던 실재성이기는 하나, 우리는 그것이 마음을 창조한 두뇌도 아니고 의식과 에너지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마음은, 두뇌에 있는 의식과 에너지의 결과를 보여주는 현상이고, 마음의 수용 능력 안에서 영속시키고 창조한다는 전망을 가지고 그 의식의 흐름 속에서 작동하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그 생명체의 마음은 계곡에서 새로운 생명을 채굴하는 신에게로 다시 흘러갈 것이다. 그것을 신에게 되돌려주는 선물이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의 마음이라 불리는 것이다. 신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음은 생의 모험에 대한 성적표이며, 신의 마음은 창조된 것과 창조된 그것이 살려고 하는 자유의지, 그것에 의해 확정된다. 

 

- 데이비드 봄 David Joseph Bohm, 20세기 물리학자다. 그는 안정된 원자에 반응하지 않는 입자가 있다는 것, 아울러 그 원자는 하나의 안정된 힘이며 하나의 입자 또는 빛을 만드는 원자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빛 다발이 폭발을 창조한 전자와 양전자의 충돌각 충돌은 광양자를 만들어내었다- 이라는 것과 몇몇 원소에서 특정 원자 붕괴가 일어난다는, 이 영역에서 실제로 수용 가능했던 유일한 작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봄은 이 영역, 이 의식 차원에서 계속 머물지 않는 입자가 있는 것을 보았고 알아차렸다. 이런 입자들이 반짝거리다 꺼지고, 하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리고 또 어딘가 다른 곳에 나타난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영역을 감춰진 질서 implicate order라고 불렀다. 데이비드 봄은 의식과 에너지의 7가지 차원 level에 대해 알지 못했다. 또한 모두가 과학적으로 제로 지점 zero place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들은 제로 공간 zerospace의 본질이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공간과 입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데이비드 봄이 연구했던 유일한 차원 level이 빛의 영역인 3번째 차원 the third plane이라고 잠시 상상해봐라. 입자들은 불현듯 나타났다 불현듯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입자들이 감춰진 질서로부터 나와 드러난 질서 explicate order로 펼쳐진다고 표현했다.

- 선형 물리학자들은 시간, 거리, 공간의 개념으로 원자 구조 붕괴의 속성을 연구하고, 핵 물리학자들은 원자구조의 핵 활동을 연구한다. 그리고 아원자 물리학자, 양자물리학자들은 원자구조 밖의 입자들을 연구하고 있다. 천체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큰 몸통과 그 잠재적 움직임에 대해 연구하고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천제 물리학자들은 은하수와 은하수 내의 성군星群, 그리고 그 운동과 중력장, 또한 그것이 주변의 다른 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천체 물리학자와 양자물리학자 사이에는 둘 다 입자를 연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어쩌다 좀 많이 크기는 하지만. 

- 봄은 그 무언가를 이해했다, 그의 구루와 함께. 그의 구루는 이것이 아카식 레코드라고 말했다. 당신들 모두 어느 정도는 무지한 구루와 무지한 이해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는데, 그 무지한 이해가 아카식 레코드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표현에서 온 고대 힌디어인 아카식은 공간을 뜻한다. 데이비드 봄이 감춰진/드러난 질서를 보았을 때, 그는 공간을 보았다. 구루는 "맞네. 하지만 자네가 보는 것은 우리가 아카식이라고 부르는 에테르일세"라고 말했다. 데이비드는 이 점에서 그의 구루와 의견이 달랐다. 데이비드 봄은 말했다. "이것이 아카식 레코드라면 저는 거리, 질량은 물론 성분도 속도도 측정 불가능한,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가상의 입자들의 카르마를 설명하는 데 내 남은 평생을 바쳐야 할 겁니다." 구루가 이 말에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가? 구루의 대답은, "나를 믿어라"였다. 데이비드 봄은 그런 구루에도 불구하고 잘해나갔지만, 그의 명성은 손상을 입었다. 봄의 진정으로 훌륭한 마음과 편향된 미신으로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것은, 자신의 이론적이고 수학적인 마인드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영역을, 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여기에 있던 입자들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카르마와 아카식 레코드의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는 사실뿐이었다. 결국 그는 이런 형태로 나타난 적이 없는 입자들이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져 버려 봄이 나중에 가상의 입자라고 명명한 그 입자들은 결코 일정하고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 봄은 포착하기 어려운 가상의 입자를 빛과 물질의 틀 안에서 하나의 지속적인 입자 상태로 만들기 위해, 관찰자가 포커스 할 때 입자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이 지속적인 입자 상태가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을 때 관찰자가 어디에 있었는지 이해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데이비드 봄은 말년에 그의 구루와 헤어졌다. 구루의 지식수준으로는 그 미세한 것들의 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루는 그것을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좋아. 그게 진실일지도 모르지. 그러면 펼쳐진 장을 구성하는 입자의 속성은 뭔가? 내게 말해 주게. 내가 그것들이 모든 생명의 아카식 레코드라고 결론짓는다면, 그때 자네가 모스 부호처럼 이 입자들의 점과 선으로 나를 읽어 보게." 결국 데이비드 봄은 무한한 생명으로서의 입자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뻔뻔스러우리만치 무지한 구루의 통제에 의해 오도된 탓에, 물리학자로서 쌓은 명성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봄은 입자들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늘날 우리가 가진 아주 크고 육중한 육체를 그런 측면에서 구성할, 우리가 '빛'이라 부르는 다리 위의 감춰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를 우리에게 남겼다. 

- 사실, 당신이 이 역동적인 장을 볼 수 있고, 이러한 차원들 levels 전부를 꼼꼼히 살펴볼 수도 있고, 또 이 장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진정 당신이 볼 수 있다면, 당신은 모든 입자들이 의식이고, 그것들이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모든 입자들은 경험되어 왔다. 그러므로, 모든 입자들은 경험이다. 당신이 페르미온이나 보손의 속성을 공부하다 보면, 그 이름이 그것들을 처음 발견한 과학자와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페르미온이나 보손은 그것들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름은 그렇게 불리지만 실상 그 입자들은 살아 있다. 그 입자들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의 마음에 필적하는 어떤 상태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마음이 얼마나 광대한가를 이제 안다. 심지어 당신이 그 입자들을 공부하는 동안, 당신은 그 입자들과 상호작용까지 하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그 입자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했을 때, 그 입자들이 그것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나? 
 

- 당신이 여기 이 차원 level에서 배우고 있는 것은 당신의 몸이 아니다. 당신의 감정이 아니다. 당신 생에 아직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 당신이 입고 있는 것도, 당신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가도 아니다. 바로 당신 마음의 본질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 마음과 그 본질을 충족시키고, 그것에 포커스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따로 떼어놓았다. 우리는 이제 두뇌가 어떻게 우리 삶으로 양자 장을 처리하는지, 당신 마음이 어떻게 물질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여 이 가르침은 신의 영광에 대한 가르침이고, 관찰자에 대한 가르침이며, 또한 신의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당신은 스스로 하강을 행하였고 이곳에 펼쳐졌다. 당신 마음은 이러한 기가지 차원 level과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의 새로운 몸, 다른 마음의 진행, 다른 양자 상태들, 다른 의식과 독특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다음 차원 level은 새로운 몸, 새로운 마음, 새로운 입자들, 새로운 양자장을 갖게 되며, 그것은 다른 차원 level의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 지금 당신은 물질적 차원 plane인 이곳에 내려와 있다. 그렇다면 여기 이 너무나도 느리고 커다란 현실로 하강했던 혹은 펼쳐질 수 있었던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의 몸이었나? 감정이었나? 아니면 당신 머리카락 색깔이었나? 모든 영역, 모든 몸들, 그리고 모든 다른 의식 차원 level을 통과하며 떠돌이처럼 살아남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마음이다. 

 

- 그리고 도안에서 핵심이 되는 것들을 전부 이어 보면, 당신은 기이한 형상과 같은 하나의 형판 template을 내놓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도안 양자장에서 입자들의 반응에 대한 도안 혹은 페르미온과 보손 입자들이 무언가를 끌어당겼거나 다른 입자들에 의해 거부당한 것에 관한 도안에 형판을 덧씌워 바라보고, 그것이 무엇에 대한 묘사인지 해석해 보아라. 아마 그것은 인간은 읽을 수 없는, 오직 성령만이 읽을 수 있는 생명의 서에 있는 것이리라. 이는 심원하고도 신비스러운 지식이다. 착오가 없도록 하라. 책은 존재한다. 허나 살과 피를 가진 자는 책이 담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없다. 오로지 신성한 성령만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라 불리는 양자 모나드 monad -무엇으로도 쪼갤 수 없는 궁극적 실체, 라이프니츠- 철학 용어이다. 한편 혼은 회선回旋과 배열을 수반하는 하나의 상태인 이러한 구조물을 짜임새 있게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생명의 서는 경험으로 이 모든 상태들을 설정하고, 그러한 상태들은 경험 속에서 생명을 부여받는다. 이것들은 창조의 위대한 동력 장치이다. 

 

- 책은 그 속에 이 모든 정보를 전부 가지고 있고, 신과 합일하여 생명을 부여한 입자들을 암호화한다. 그런 다음, 책은 고결한 등식을 성립시킨다. 빛으로 언급되는 그것, 감춰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 그 둘의 틈을 가질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은 부자냐, 가난하냐, 추하냐, 뚱뚱하냐, 말랐냐, 아름답나로 그것을 평가할 수 있다. 허나 다를 바 없다. 모두 같은 것이다. 당신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갈 수 있다. 당신은 그것과 다른 이것을 먹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렇게 하라고 강요당하기 때문에 당신이 가진 모든 결핍을 찾아낼 수도 있다. "나는 여기를 벗어났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았고, 그리고 나는 내 삶에 큰 변화를 이루어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당신 삶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양자장이라고 하는 그 얼어붙은 상태의 법칙 안에서 행동을 취했을 뿐이다. 당신은 그저 그 안에서 작동했던 것뿐이다. 새로운 얼굴은 아무 의미 없다. 왜냐하면 당신 삶에서 새로운 얼굴이라는 것은 클라이맥스가 된 결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나? 당신이 그 상태 속에서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은 엄청난 부자가 될 수도 지독한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요동이 아니다. 당신들이 양자 장내에서 어디를 가든 당신들은 하나의 끝나지 않은 창조의 상태이기 때문에, 당신은 반드시 그 양자장의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 그것이 당신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작디작은 하나의 상태가 당신이 존재함에 있어 하나의 추진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그 작고도 작은 상태는, 당신이 이곳으로 되돌아올 것이고, 어떠어떠한 환경에서 살과 피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해 주는 혼의 형판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양자 상태로부터 꽃을 피우고 있다. 그 양자상태 속으로 다른 뭔가는 들어오지 못할 뿐 아니라, 전부 그 법칙에 복종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상태 안에서는, 당신이 하고 있는 게 무엇이고, 그리고 이미 그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줄 수 있다. 당신이 마치 끈끈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당신을 사랑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루함이다. 당신은 해냈다.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당신에게 그저 해결책이 없는 또 하나의 클라이맥스일 뿐이다. 그러니 당신은 싫증 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그들한테서 트집을 잡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의 결점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결점을 지적하고, 당신이 그들에게 해준 모든 것들을 상기시키고, 그들에게 자신이 돈을 벌어다 주는 가장임을 상기시키고, 그리고 그들에게 "어느 누구도 내가 한 것처럼 너를 사랑하지 못할 거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 침울하고 무거운 기분이 당신을 덮쳐.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우울한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당신 주변의 모든 친구들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해주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당신은 마음에 드는 것도 좋은 것도 없다. 당신은 우울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클라이맥스에 맞게 계산된 형태로 사랑을 뒤엎어 망가뜨려버린다. 그들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 모두가 당신 양자 장에 있다. 그들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할까? 치킨 스프를 가져다줄까? 그 치킨 스프는 이제 당신 양자장에 있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할 때, 당신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디를 가건 클라이맥스가 일어날 기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할 텐가? 우울에 결부된 클라이맥스가 있다. 슬픔에 결부된 클라이맥스도 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결부된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클라이맥스들은 당신 삶에서 그저 옷만 바꿔 입고 등장하는 항상 똑같은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직 당신 것 owned -람타는 경험을 통해 얻은 감정을 지혜로 바꿀 때 그것을 우리가 소유한다고 말한다- 으로 만들지 않은 똑같은 감정이다. 
 
- 반전 상태, 일종의 반물질 적외선 차원에서는, 지상 상태인 헤르츠 차원에 묶여 자신의 적외선 몸에 매인 사람들이, 똑같은 상태에서 클라이맥스를 얻으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절대 클라이맥스를 얻지 못한다.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속지 않는다. 그들은 중독자로, 지상에 묶여버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물중독자다. 그들 눈에 자신들은 번민에 찬 고통받는 영혼들이고, 버젓이 적외선 차원에 있으면서, 그들은 여기 이 차원 헤르츠 차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 그것들로 인해 영원히 고통받고 있다. 이 차원 -적외선 차원- 에는 여기 헤르츠 차원에 있는 것처럼 고통을 주는 클라이맥스는 없다. 그렇다, 고통과 번민은 구원이라고 불리는 클라이맥스를 갖고 있다. 그것은 강렬하다. 그런데 적외선 차원에는 클라이맥스가 없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흥분한 채 뒤엉킨 땅굴의 뱀들처럼 모두 저질스러운 자세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섹스를 하며 흥청망청거리는, 그런 장소가 있다. 그들은 왜 거기 머물까? 새로 땅굴로 들어가는 모든 적외선 몸들은, 클라이맥스를 가져다줬던 결합 조건이 달리 없기 때문에 그곳에 계속 사로잡혀 있다. 그들을 고통에 찬 영혼이라 한다.   

 

- 삶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삶에는 경험이 주어졌다는 것과, 당신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이 그것을 따르고 자신의 것으로 용인하지 않은 것을 안고 살아가면 불가피하게 만나게 될 종말인 죽음,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근본적인 작은 물질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것은 당신의 상태이다. 그 상태 안에서의 변화는 양자 요동을 창조하지 않는다. 마음 변경 mind-altering을 수반한 변화가 양자 요동을 창조한다. 아마도 그때 우리는 왜 무한 잠재성을 지닌 평행 양자 상태들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그런 아주 작은 선언/표현이 평행 현실의 거대하고 글로벌한 전망을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행 현실들은 양자 장의 상태들, 즉 의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양자 시프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것이다. 일체 One는 큰 것을 지배하는 작은 것이다. 

- 당신은 평행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추상적인 어떤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에 관한 것인 평행 현실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추상적인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행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양자 상태에서 일어나는 양자 시프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하나의 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나이 들지 않고 당신이 갖고 있는 똑같은 몸으로, 양자 평행 현실이 현재의 삶으로 시프트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과학적 관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개연성 probability이다. 그렇다. 그래서 지금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공중에 떠다니는 고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 possibility이다. 당신들에게 한 가지 묻겠다. 당신의 평행 현실에서, 그리고 똑같은 당신, 당신이 갖고 있는 그 똑같은 몸 그대로인 채 당신이 모든 감정적 결핍이 충족되었다면, 당신 삶이 어떨 거라 생각하나? 그 몸은 죽지 않아도 되고, 어디로 가지 않아도 된다. 잠시 생각해봐라. 억울함과 분노 -이 둘은 불가분 하게 결합되어 있다- 라는 감정을 허용하고 내 것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될까? 

(리뷰자 주 : 하늘을 나는 고래가 뉴에이지와 깊은 관련이 있나?)

-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이 양자 상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우리 삶에 무엇이 있는지 나타내고, 그리고 한 번도 상태에 요동을 일으키지 않은 단조로움의 무한한 특질들로 인해 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작동하는, 우리의 수용능력을 담고 있는 혼의 패턴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고 했을 때, 만약 자신들의 감정적인 것들에 휩싸여, 당신을 버린 부모에게 당신이 태어났다면, 당신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과 보살핌에 대한 당신의 탐색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줌으로써 그 사람들을 통제하여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 통제의 범위, 자신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정확히 그 통제력이기 때문에, 당신은 삶의 첫 시작부터 그 통제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궁극의 클라이맥스는 사랑을 통제하는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이를 안다면, 우리가 현재의 이 삶을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버림받는 걸로 시작된 생의 첫 단추부터 남은 생 내내 사랑을 통제하도록 세팅된 우리의 클라이맥스를, 우리가 알았더라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것을 해결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받아들였다면, 오늘 당신은 어떨까?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상태의 역학이 달라졌을까? 그렇다. 우리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상태에서 양자 요동을 일으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상태에서 양자 요동을 일으키면, 다음 순간 새로운 평행 현실이 나타난다. 그 평행 현실은 별 다를 거 없이 순조로워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랑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새로운 삶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신이 만약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면, 오늘 당신은 어떻게 다를까? 당신 삶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당신 삶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을까?

- 또 다른 예는 당신은 왜 불안한가에 대한 것이다. 왜 당신은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클라이맥스를 얻으려는 감정적 결핍을 창조했을까? 지식을 통해, 당신은 이제 대중들에게는 그토록 이해하기 어렵고 따분한 과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전 같으면 꿈에도 알지 못했을 양자 장에 대해 당신은 이제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은 당신을 기분 좋게 해 준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의 기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안의 클라이맥스에 대한 기회는 폐쇄시켰고, 그 기회는 지혜를 얻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불안을 종식시킨다.

- 당신이 이를 알게 된 지금 당신은 어떻게 다른가? 봐라, 우리는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은 당신이고, 당신 삶이다. 당신은 벌써 얼마나 현명해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파격적으로 자유로워졌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이 알게 됐는지 모른다. 당신이 신의 왕국으로 가는 길에는 이제 장애가 없을 것이다. 장담한다. 

 

-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생에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전 상태를 컨트롤하는 걸 포기할 수 있을까?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전 상태를 포기한다는 것은,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 감정을 보내 주는 것, 그 감정이 지닌 가치를 아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 감정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이미 구현된 운명의 재료로 쓰기 위해 그 신경망을 독자적으로 점화하는 것을 다시는 허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왕겨들 속에서 밀알을 분리해내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 그러한 과학 심원한 표현 안에서 이런 지식이 주어진 자들, 미지의 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자들은 사라지거나 증발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생각하는 행위가 '기계적인 반복’이 되도록 연습하는, 준비된 훈련에 그 지식을 활용하는 것뿐이다. 이때 기계적인 반복은 그 속에 현재 양자 요동을 품고 있는 새로운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제 새 삶을 가졌고, 결핍 없이, 정복 없이, 클라이맥스 없이 사람, 장소, 사물, 시간, 사건들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새롭게 배워야 할 다음 감정으로 넘어간다. 그곳에서 우리가 그 감정을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을 때, 그 감정은 새로운 평행 현실에서 우리가 처리해야 할 유일한 감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명백백하다. 계속 일관되게 누르는 버튼이 될 것이다. 이제 그곳에 살지 않는 오래된 법칙과 오래된 감정들 대신, 우리가 살아가면서 눌러야 할 버튼일 것이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상태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려는 우리의 열망은, 우리에게 새로운 평행 현실로 시프트 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 새로운 생각은 어디에서 생기나? 만약 우리가 혼의 양자 상태 패턴을 완성하고, 모든 반회전 half-spin 하는 입자들을 하나의 완전한 상태로 용인한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몇 년 전 차원적인 마음을 공부할 때, 두뇌의 뉴런이 양자 장에 실제로 펼쳐지도록 해주는 -당신이 먹을 수 있는 환각제가 아닌- 피노라인 pinoline의 영향 아래 있는 부위가 우리 두뇌 안에 있다고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는 작디작은 아주 조그맣고 물기 많은 뉴런들이 양자 장 속으로 펼쳐지는 때인, 깊은 수면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당신은 그것이 어떤 양자 장 속으로 펼쳐진다고 생각하는가? 해리의 양자장으로, 제인의 양자 장으로? 아니면 당신의 양자 장으로 수면을 통해 몸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두뇌에게 그것 -뉴런들이 양자 장에 펼쳐지는 것- 을 말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혼이다. 그런 뉴런들이 똑같은 역동적인 양자 장에 실제로 펼쳐진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상태 상의 그 역동적인 장의 패턴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원인을 나타내는 패턴이 된다. 이러한 뉴런들이 두뇌 전체와 사고 과정에 정합한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각을, 우리는 창조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왜 깨달은 스승이 필요합니까? "나를 따라 노래하라. 나는 별이 되는 길을 가고 있다."

 

- 두뇌가 몸을 회복시키는 밤마다, 두뇌의 이 부위는 그 양자 상태 속으로 곧장 용해되고, 양자 상태 안에서 이러한 뉴런들이 프로그래밍된다. 깨어있을 때, 당신은 당신 삶의 자극들에 생각하고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 신은 어떻게 무에서 유를 창조할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한 생에 이룰 수 있을까? 시프트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점점 더 젊어지거나 아예 노화가 멈추는, 이 시프트 하는 삶을 지속할 능력과 속성을 우리는 가지고 있을까? 이러한 시프트가 200년이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질 수 있을까? 당신이 이를 뉴욕의 셀러브리티들이 한 때 품기 쉬운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생각이 좀 다르다. 이는 모든 인간의 마음과 모든 인간의 생이 누릴 수 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험과 가능성들이 지닌 하나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장 무미건조하게 표현해서 '신의 왕국'이라 부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