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닐 도날드 월쉬 / 조경숙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출간 : 2019.05.17
3권 중 가장 두꺼웠지만, 가장 짧게 느껴졌다. 1권이 당장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책이었다면 3권은 더 높이, 어떤 지점을 향해야 할지에 관해 가리키는 것 같았다. 사실 3권이 가장 짧게 느껴진 이유는, 책이 가리켜보이는 지점들로부터 나를 분리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고 손쉬운 선택들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택하는 존재는 없다.'
얼마전 다른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개인을 특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각자의 '다른' 부분들이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도 '너'는 곧 '나'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가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 해로운 선택일 수는 없을 것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설명이 현실과 괴리가 있다면, 그것은 각자가 '선택을 하지 않고 있거나', '무슨 선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깊게 들어가면 다른 존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해'를 끼칠 수는 없다고도 설명하지만, 당장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당장 내가 숨쉴 곳에 유독 가스를 살포하는 일은 스스로를 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다음에야 이로울 것이 없다. 그걸 마시면 몸에 '좋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던지, 타고 있는 것이 '독'인 줄을 모르던지, 몽유 상태던지. 그러나 우리의 수많은 선택들을 조금만 더 넓은 시각으로 관찰한다면, 대부분이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쉽지도, 뚜렷한 답이 있지도 않은 이야기다.
나는 지향하는 방향성과 꽤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포기하기에는 '원하고', '되기에는' 멀다. 지금은 적어도 멈칫하는 순간마다 '이게 내가 되고 싶은, 되기로 정한 모습인가', '이 선택은 어떤 것으로 연결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스스로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상태를 객관적으로 살피고, 그것에 만족하는지를 살피는 정도로. 하나의 색이 드러날 때까지 그외의 다른 색들을 흘려보내는 것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그 색만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바라보는 것, 그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믿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 뿐이다'
본문 내에서 '지옥은 없지만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특정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들에게서 긴 시간동안 쌓여온 두려움을 벗겨낸다면 남는 것은 '하나'이거나 허상일 것이다.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정 형식들은 행위자가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그 믿음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그런 형식들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집단적 믿음을 통해 만들어 진 것들은 '체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체험하는 것은 진정한 나의 선택인가, 이미 예비된 결과인가? '모든 것은 이미 일어났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젤다의 전설>에 관해 끄적거렸던 글에서 이 내용과 가능태에 관한 생각을 써두었었다. 해당 게임 내에서 구현 가능한 모든 것들은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유저의 플레이 -선택- 에 반응해서 배경, 몹, 아이템이 등장하고 분기점들이 갈라질 뿐이다. 젤다처럼 자유도가 높은 게임에서는 거의 '모든' 선택이 가능하고 다양한 플레이들이 가능하지만, 각 장면들이 '이미' 프로그램된 것들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것을 언제, 어떤 순서로 불러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미래는 선택이 가능하지만 선택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표현, CD-Rom의 비유에서 당시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따라서 하나의 선택을 한 순간 그 선택의 결과는 이미 '일어난' 것이 된다. 매 선택마다 원과결은 하나의 원을 이루며 완결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체험하는' 미래가 바뀔 수 있는 것은, '다음 순간' 내가 '다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들이 특정 형태를 이룰 만큼 모였을 때 나는 '그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충분히 일관성 있게 구현해낸다면 나 자신이 '그것'이라고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라면 '다른 것'을 체험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도 그런 체험을 하도록 돕고 싶어 질 수도 있다. 혹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을 수도 있다.
나는 3권에서의 설명들이 람타의 설명들과 합치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원래 육체는 훨씬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며, 어느 계에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설명들은 공통적이다. 사후 세계에 관해서도 본문에서 설명하는 '원하는 것은 즉시 얻게 되는' 경험은 람타의 5차원과 유사하다. 그에 달하기까지는 조절되지 않는 자기 생각이나 집단 의식에 의한 창조를 경험해야 한다는 점도 그렇다.
결국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나만 특별한' 것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어떤 것도 잘못될 수 없으니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에 겨워 모든 것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무엇이 자신을 더 즐겁게 하는지, 어떤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인지, 추구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며 계속해서 창조하고 체험한다면 결국은 '그것' 자체가 될 것이라는 것. 이것들은 당연한 약속이므로,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진리에는 설득력이 있다.
진리에는 가슴이 놀라 깨어나게 만드는 유려함이 있다.
- 죄의식은 너희를 자기 아닌 것에 묶어두는 느낌이다.
하지만 죄의식은 적어도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걸 알아채게 해주는 느낌이잖습니까?
네가 이야기하는 건 죄의식이 아니라 자각 awareness이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죄의식은 땅을 자욱하게 뒤덮은 안개이고, 식물을 죽이는 독극물이다. 너희는, 죄의식으로는 시들고 죽어갈 뿐 자랄 수 없다. 너희가 구하는 것은 자각이다. 그러나 죄의식은 자각이 아니고, 두려움은 사랑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두려움과 죄의식이야말로 너희의 유일한 적이다. 너희의 참된 친구는 사랑과 자각이다. 전자를 후자와 혼동하지 않도록 하라. 전자는 너희를 죽이고 말겠지만, 후자는 너희에게 생명을 준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에도 '죄의식'을 느껴선 안 된다는 겁니까?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해서 뭐 좋은 게 있는가? 죄의식은 너희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기회를 빼앗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요?
두려움과 조심은 다르다. 조심하라, 다시 말해 의식하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마라. 의식은 움직이게 하지만, 두려움은 마비시킬 뿐이니. 마비되지 말고 움직여라.
저는 항상 신을 두려워하라고 배웠는데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너는 나와의 관계에서 줄곧 마비되어왔다. 네가 나를 두려워하길 그만뒀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는 나와 뭔가 의미 있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나를 찾아내게 해주는 어떤 선물, 어떤 특별한 은총을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다면, 겁 없음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겁 없는 자들에게 축복 있기를, 그들은 신을 알게 되리니. 이것은 자신이 신에 관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놓을 만큼 충분히 겁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너희는 남들이 신에 관해 너희에게 말해준 것에서 비켜설 만큼 충분히 겁이 없어야 한다. 충분히 겁이 없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는 감히 자기 나름의 신 체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너희는 그걸 놓고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자기 나름의 체험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긴 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말해준 신과 어긋나더라도, 너희는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다른 사람이 원하고 있고, 되고 있고, 하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에 마음 쓴다는 데 있다. 오직 자신에게만 마음 써라. 자신이 되거나 하거나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원하고 필요하고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가에 있다. 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은 남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 된다. 따라서 잘못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 모른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누가 되려고 하는지는 물론이고,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 만일 인디애나폴리스 500(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경주 - 옮긴이)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시속 240킬로미터의 속도로 차를 모는 것이 네게 가장 좋겠지만, 채소 가게까지 안전하게 가려고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게 완전히 맥락 관계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다. 삶 전체가 그러하다. 무엇이 '가장 좋은가'는 네가 누구고 누가 되려고 하는지에 달렸다. 너희는 자신이 누구고 어떤 존재인지 지혜롭게 판단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신인 나는 내가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 안다. 따라서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게 뭔지 안다.
그렇다면 그게 뭡니까? 말해주십시오. 신에게 '가장 좋은' 게 뭔지.
너는 대답을 원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너는 대답을 갖는 체험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대답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사실 너는 대답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줄곧 가지고 있었다. 단지 네가 대답을 선택하지 않을 뿐이다. 너는 자신이 그 대답을 모른다고 믿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너는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 하지만 내가 체험하고 있음을 체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내가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체험하지 않은 걸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모든 삶은 체험'이라고 말했던 유명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가 틀렸다. 앎은 체험을 뒤따르지 않는다. 앎이 체험을 앞선다. 세상의 반이 그것을 거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제 질문의 뒷부분에 대한 답을 제가 갖고 있으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란 건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더 많은 시간, 돈, 사랑 혹은 다른 뭔가)를 '가진다면', 비로소 자신들이 뭔가(책을 쓰고, 취미를 키우고, 휴가를 가고, 집을 사고, 관계를 감당하는 따위의)를 '할 수 있고', 그것은 자신을 뭔가가 '되게'(행복하게, 평온하게, 만족스럽게, 애정 깊게) 해 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사실상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고 있다. 본모습대로의 우주에서는 (너희 생각과는 반대로) '가짐'은 '됨'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먼저 소위 '행복한'(혹은 '알거나' '현명하거나' '자비로운' 따위의) 상태가 되고 나서, 이 '되어 있음'의 자리에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라. 그러면 얼마 안 가 너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너희가 항상 '갖고 싶어 하던 그것'을 가져다주면서 끝맺는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 이 창조하는 과정(바로 이런 게 창조 과정이란 것이다)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먼저 너희가 '갖고 싶은' 게 뭔지 살펴보고, 그것을 '가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자문해 본 다음, 곧바로 그런 되어 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너희는 지금껏 써오던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실제로는 그것을 바로 세워- 우주의 창조력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진술하는 지름길은 이렇다.
너희가 삶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있는지가 문제의 전부다.
우리 대화가 끝날 즈음에 가서 내가 다시 언급하려는 세 가지 메시지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가지고 이 책을 끝맺을 작정이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시간이나 돈이나 사랑을 조금만 더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이 진짜로 행복해질 걸로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과 그가 원하는 돈이나 시간이나 사랑을 '갖지 않았다는 것' 사이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맞는 말이다. 반면에 행복해하고 있는 사람은 진짜로 중요한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필요한 모든 돈과, 평생 지속되기에 충분할 만큼의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는 걸 발견하겠죠. '행복해져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걸로요!
맞았다. 너희가 미리 무엇이 되기로 정하는가가 그것을 너희의 체험으로 만들어낸다.
"될 것이냐 to be, 안 될 것이냐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바로 그거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니, 모든 마음 상태가 으레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을 물질 형상으로 재생산한다.
- 그것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너희가 뭔가를 원한다면 그걸 줘버려라. 그러면 너희는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순식간에 그것을 '갖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는 오직 정도의 문제만 남는다. 심리적으로 보더라도 너희는 옅은 공기에서 창조해내기보다는 '덧붙이는' 게 훨씬 쉽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 너희는 자신을 '위태롭게' 할 수 없다. 너희는 위태로워질 수 없다. '위험'이란 객관 현상이 아니라 주체의 반응이다. 너희가 어떤 만남이나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 자신에게 '위험한' 체험을 택할 순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의 결정이다. 이런 진리를 전제로 했을 때,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너희가 자신을 '위태롭게' 한 건 너희가 그렇게 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한 건 아주 높은 비전(秘傳)의 차원에서지, 사실 네 질문이 나오는 차원에서는 아니다. 네가 뜻하는 의미에서는, 말하자면 의식적인 선택의 차원에서라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너희가 자신을 위태롭게 할 때마다, 항상 너희가 '그러길 원해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차도에서 돌아다니다 차에 치이는 아이가, 차에 치이길 '원해서'(바라서, 구해서, 의식하면서 선택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포장은 달라도 계속해서 같은 유형, 전혀 그에게 맞지 않는 유형의 여자들과 결혼하는 남자가,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되풀이하길 '원해서'(바라서, 구해서, 의식하면서 선택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망치로 자기 엄지를 때린 사람이 그런 체험을 '원해서'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구하지 않았으며, 의식하면서 선택하지도 않았다.
- 그럼에도 너희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온갖 객관 현상들을 끌어오고, 온갖 사건들을 창조한다. 너희는 진화 업무를 추진해가면서 다음번에 체험하고 싶은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완벽하게 정확한 조건, 완벽한 기회를 자신에게 제공하기 위해, 삶의 온갖 사건과 장소와 물건들을 자신에게 끌어온다. 원한다면 그것들을 너희 스스로가 창조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참된 자신'이기 위해서 너희가 치유하거나 창조하거나 체험하고 싶어 하는 뭔가를 치유하거나 창조하거나 체험할 완벽하게 정확한 기회가 아닌 어떤 일도 너희 삶에서 우연히 일어날 수 없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런 일은 생길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네가 되고자 선택하는 모든 존재가 다 '너'고, 네가 되고 싶어 하는 신성의 모든 측면이 다 '너'다. 그게 바로 너희다. 그것은 어느 때라도 바뀔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시시때때로 자주 바뀐다. 하지만 너희 삶이 자리 잡길 원한다면, 그런 광범한 변수의 체험을 그만두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그냥 '자신'과 '되고자 원하는 자신'을 놓고 그렇게 자주 마음을 바꾸는 걸 그만두면 된다.
그것도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나는 너희가 여러 다양한 차원에서 이런 결정들을 내리고 있음을 본다. 차도에 나가 놀겠다고 작정하는 아이는 죽겠다고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 애가 다른 여러 가지 선택을 하고 있을 순 있지만, 죽는 건 그중 하나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안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가 죽기로 선택한 데 있지 않고, 죽는 것을 포함해서 하나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택들을 내렸다는 데 있다. 아이에게는 이 점이 명확하지 않다. 그 애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빠뜨린 자료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이는 명확한 선택, 더 나은 선택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시피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신인 나는 너희의 선택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지만, 그 선택들이 어떤 것일지는 항상 알 것이다. 따라서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너는 그 일이 그런 식으로 일어난 건 완벽하다고 보아도 좋다.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완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 삶의 설계, 그 속의 사람과 장소와 사건들 모두가 완벽 자체의 완벽한 창조자인 너희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되었다. 너희에 의해서, 그리고 나에 의해서... 너희에게서, 너희로서, 너희를 통해. 그런데 우리는 이 공동 창조 과정을 의식하면서 함께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한 채 함께할 수도 있다. 너희는 자각하면서 삶을 거쳐갈 수도 있고, 자각하지 못한 채 거쳐갈 수도 있다. 너희는 너희 길을 자면서 걸어갈 수도 있고, 깨어서 걸어갈 수도 있다. 너희가 선택하라.
- 너희 종의 의식 깊숙이 새겨진 거짓. 너희는 내적 권능이 개별성과 분리됨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실 신에게서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분리된 것이야말로 너희가 겪는 모든 기능장애와 고난의 원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분리는 스스로 권능인 체 해왔고, 너희 정치와 경제, 나아가 너희 종교까지도 그 거짓을 지속해왔다. 이 거짓이 온갖 전쟁과 전쟁을 불러오는 온갖 계급투쟁의 발단이고, 인종간, 성(性) 간의 온갖 증오와 증오를 불러오는 온갖 권력투쟁의 발단이며, 사사로운 온갖 분쟁과 분란들, 그리고 분란을 불러오는 온갖 내부 투쟁의 발단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 거짓에 악착같이 매달린다. 그것이 아무리 너희를 익히 보던 곳으로 다시 데려간다 해도, 아니 때로는 그것이 너희를 몰락으로 데려갈 때조차도.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진리를 알라,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어떤 분리도 없다. 서로에게서도, 신에게서도 존재하는 어떤 것에게서도.
나는 이 책에서 이 진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할 것이다. 이 말을 몇 번이고 거듭할 것이다. 무엇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보라, 내일이면 세상이 치유되리니.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대의 비책(策)이다. 인간이 몇천 년 동안 찾아왔던 대답이 이것이고, 인간이 이루려고 애써왔던 해결책이 이것이며, 인간이 갈구해왔던 계시가 이것이다. 어떤 것과도 분리되지 않은 듯이 행동해보라, 그러면 너희는 세상을 치유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함께하는 권력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하라.
- 너희 자신이 그 모든 걸 만들어냈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힘이 정의"라거나 "권력이 곧 권능"이라는 발상이 생겨난 건 너희 남자들이 창조해낸 신학상의 신화들 속에서다. 분노하고 질투하고 화내는 신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희가 뭔가를 충분히 오랫동안 상상하면 그것은 실재가 된다. 너희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실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의 실체, 혹은 실제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 영혼은 곤란이나 혼란을 겪는 일 없이, 이런 여러 장소들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관찰하며 행동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그것은 그냥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 한 곳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재결합'할 수 있다. 그 영혼은 이승에서 기억해냈더라면 좋았을 사실, 즉 온갖 결과를 창조하는 건 결국 자신의 생각이고, 드러남을 가져오는 건 자신의 의지 intent라는 사실을 저승에서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초점을 맞추면, 그게 내 현실이 된다는 거군요.
맞았다. 유일한 차이는 너희가 그 결과를 체험하는 속도다. 물질 삶에서는 생각과 체험 간에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어떤 지연(延)도 없다. 결과는 즉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새롭게 몸에서 벗어난 영혼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조심스럽게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을 그대로 체험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배운다'는 말을 아주 느슨하게 사실 묘사라기보다는 구어(口語) 투로 쓰고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기억해낸다'는 용어가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만일 물질화된 영혼이 영성화된 영혼만큼 빠르고 효율적으로 자기 생각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의 삶 전체가 바뀔 것이다.
- 바위의 우화를 생각해보라. 옛날에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는 무수한 원자와 양자와 중성자와 아(亞)분자 물질 미립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미립자들은 어떤 패턴을 이루면서 쉬지 않고 빙빙 돌고 있었다. 각각의 미립자들은 '여기'서 '저기'까지 가고 있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빨리 움직여서 바위 자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그냥 있었다. 그 자리에 드러누운 채 햇빛에 취하고 비에 젖으면서 꿈쩍도 하지 않고.
"이게 뭐지?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게?"
바위가 묻자 아득히 멀리서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건 너다."
"나라고? 맙소사,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잖아."
바위의 대꾸에 목소리는 동의했다.
"그래, 떨어져서 보면. 이 위에서 보면 너는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듯이 보이지.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이야, 내 눈에는 너란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게 보여. 그것들은 너를 '바위'라는 물체로 만들어주는 특정한 패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속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 너는 마치 요술 같아! 너는 움직이면서 또한 움직이지 않아."
"그렇다면 환상은 어느 쪽이지? 바위의 일체성, 부동성인가? 아니면 부분들의 분리와 운동인가?"
바위의 물음에 목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환상은 어느 쪽이지? 신의 일체성, 부동성인가? 아니면 ... (중략)"
-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이 집단의식보다 강한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반면에 너희가 집단의식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내면화하는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지금 삶에서 소위 현실이란 걸 창조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는 삶에서 언제나 자기 앞에 다음 세 가지 선택을 마주한다.
1. 너희는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들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고,
2. 창조력을 지닌 자기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으며,
3. 집단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지금 삶에서 너희는 개인의 자각을 의식하면서 창조하는 쪽이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그 모든 걸 전제로 하면, 너희는 자주 자신의 이해를 틀린 걸로 치곤 한다. 이 때문에 집단의식에 내맡기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렇게 한다. 반면에 처음으로 소위 사후(死後)라는 순간으로 들어갔을 때,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모든 걸 (아마 너희로서는 믿지 못할) 전제로 한다면, 너희는 아마도 집단의식에 굴복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해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것들에 매달리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낮은 의식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자기 개인의 이해에 머무는 편이 너희에게 이롭고, 높은 의식에 휩싸여 있을 때는 집단의식에 내맡기는 편이 너희에게 더 이롭다. 그러니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을 찾는 게 현명하리니, 너희가 교제하는 동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소위 사후에는 너희가 이런 등급표를 놓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순식간에, 그야말로 자동으로,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높은 의식 자체에 둘러싸일 것이기에.
- 그럼에도 자신이 그토록 크나큰 사랑에 둘러싸인 걸 너희가 모를 수는 있다. 당장에는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너희에게는 그런 상황을 자신이 '벌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이 그 순간에 아무 운이나 작용하게 하는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너희가 체험하는 건 죽는 상태에서 너희가 지녔던 의식이다. 너희 중 일부는 죽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하면서도 기대를 갖는다. 너희는 평생 동안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왔다. 너희가 '죽으면' 그런 생각들이 뚜렷이 드러나리니, 너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갑자기 깨닫는다 realize(현실로 만든다 make real). 그것은 너희의 가장 강력한 생각들, 너희가 가장 열렬하게 지녀왔던 생각들, 즉 삶에서 항상 그러했듯이 우세해질 생각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 수도 있겠군요. 그 사람이 평생 동안 지옥을 가장 확실하게 존재하는 장소로 여겼고, 신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며, '겨에서 밀을', '양에서 염소'를 가려낼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온갖 일들이 다 신을 화나게 했으니, 자신은 당연히 '지옥으로 가리라' 믿었다면, 그는 지옥으로 가겠군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천벌의 불길 속에 던져질 테고요. 무슨 수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 대화를 진행하면서 몇 번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우리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현실이라도 창조할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니 지옥불과 천벌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게 되는 거죠.
'궁극의 현실'에서는 '존재' 자체를 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하는 식의 지옥 체험을 포함해서, 너희가 원하는 모든 하위 현실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네 지적은 정확하다. 나는 이 대화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너희가 지옥을 체험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희가 체험하는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희는 그것들을 체험한다.
- 저, 이 책은요? 이 책은 당연히 글자 그대로 사실이겠죠!
아니다.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싫지만, 너는 이 책을 너 개인이라는 체 filter로 걸러서 가져오고 있다. 네 체의 그물눈이 이제 갈수록 더 엷어지고 더 가늘어진다는 건 인정 하마. 너는 아주 좋은 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체다.
저도 압니다. 다만 그걸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책과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영화를 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말리고 싶고요.
그 영화의 작가와 제작자들은 불완전한 체로 거르긴 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굉장한 진리들을 제시했다. 그들이 그려내려던 핵심은, 너희는 체험하고 싶어 하는 꼭 그대로를 죽고 나서 체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 지옥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지옥을 체험한다면, 이 지옥은 뭐가 다른 겁니까?
너희 스스로 창조한 현실에 남아 있는 한,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런 현실을 영원히 창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소위 '나노세컨드'(10억 분의 1초-옮긴이)라 부르는 극히 짧은 순간밖에는 그것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의 상상이라는 은밀한 영역에서조차 슬픔이나 고통의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 너는 가장 최근의 육신으로 돌아가길 원하느냐?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인간 형상으로 삶을 다시 체험하길 원하느냐? 혹은 그 당시 체험 수준에서 네가 있는 '영계의 그 위치'에 그대로 머물길 원하느냐? 너는 자신의 삶과 체험이 계속해서 더 나아가길 원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이제 '하나임'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나는 언제나 너희에게 이것을 물을 것이다. 너희가 가장 아끼는 소망, 너희의 가장 큰 바람을 주는 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주가 알고자 하는 것 역시 언제나 이것이다. 사실 우주는 날마다, 순간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너희와 나의 차이는, 너희는 이것을 의식으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나는 자각한다는 것이다.
-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저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 애도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겠군요.
그들은 네가 자신들을 위해 애도해주길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안다면, 그들이 자기 나름의 고귀한 선택으로 거기에 있다는 걸 네가 안다면, 너는 그들의 출발을 축하했을 것이다. 네가 한순간이라도 소위 사후세계란 걸 체험했다면, 너 자신과 신에 관한 가장 근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와봤더라면, 너는 그들의 장례식에서 가장 유쾌한 웃음을 웃었을 것이고 네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우리가 장례식에서 우는 건 우리의 상실감 때문입니다. 그들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란 걸 알기에, 사랑하던 이를 두 번 다시 붙들거나 껴안거나 만질 수 없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없으리란 걸 알기에, 우리는 슬퍼하는 겁니다.
실컷 운다는 게 그런 것이다. 그런 울음은 너희의 사랑과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광스럽게 한다. 하지만 기쁨에 차서 몸을 떠나는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과 체험이 얼마나 근사하고 경이로운지 안다면 이런 애도조차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 너는 그것을 말할 수 있는데, 그는 그것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너희가 이른바 '저승'에 있는 존재와 관련된 어떤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존재의 의식은 네게로 날아온다. 너희가 그 사람에 관한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품었는데, 소위 '고인(故人)'의 본체가 그것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따라서 그런 교류를 하려고 영매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교류의 가장 좋은 '영매'는 사랑이다.
아 예, 하지만 쌍방 교류라면요? 그럴 때는 영매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류가 가능하기는 한 겁니까? 아니면 그건 완전히 엉터리입니까? 그건 위험합니까?
너는 지금 영과의 교류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런 교류는 가능하다. 위험하냐고? 사실 너희가 겁낸다면 모든 게 '위험하다'. 너희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창조한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너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생각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너희에게 그들이 필요할 때, 그들은 언제라도 권유하고 위로하고 충고할 수 있는 상태로,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만일 너희 쪽에서 사랑하던 사람이 '괜찮은지' 심히 불안해하면, 그들은 만사가 잘 되고 있다는 걸 알려줄 표지나 신호, 가벼운 '메시지'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 너희 삶의 본질과 목적은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결정하고, 그것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날마다 이렇게 하고 있다. 온갖 행동과 온갖 생각과 온갖 말을 가지고 바로 이것이 너희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것에 기뻐하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에게 기뻐하는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다소간 그 창조물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점점 더 완벽으로 이끌기 위해 여기저기에 오직 사소한 수정만을 가하면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자신에 관해 생각했던 것을 '완벽'에 가깝게 그려낸 사람의 본보기다. 그는 자신에 관해, 그리고 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주 명확한 관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그려내는 데' 자기 인생을 바쳤다. 그는 자신에 관한 관념을 자기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싶어 했다. 체험을 통해 자신을 바로 그것으로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 이제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히 해두자. 모든 성적 표현을 닫아버리고 모든 성 에너지를 승격시키는 것이 '고도로 진화된 존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진화가 멈출 것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시군요.
그렇다. 그러니 진짜 거룩한 이들은 섹스를 하지 않으며 그것이 그들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삶이란 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기로 되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선명한 조건 속에 담아보자. 만일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 종족에게 좋은지 아닌지 판단할 잣대를 원한다면, 아래의 간단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봐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지?" 이것은 대단히 손쉬우면서 대단히 정확한 기준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했는데,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이로운 결과가 나왔다면, 그 일은 '진화'된 것이다. 만일 모두가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추천하기에 그리 승격된 일이 아니다. 동의하느냐?
- 너희의 생명력인 에너지를 매 순간마다 가능한 한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희는 승격될 것이니. 이것은 섹스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너희가 뭘 하든 의식을 끌어올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아하! 이해가 갑니다. 의식을 어떻게 끌어올리는지는 모르지만요. 사실 저로서는 어떻게 해야 차크라 중심들을 거치면서 생명 에너지를 끌어올리게 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이 중심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마 태반일 겁니다.
'영성의 생리학'에 대해 진심으로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아주 명확한 용어들로 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다른 저자들을 통해 다른 책들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디팩 초프라의 저서들을 읽어봐라. 그는 지금 이 순간 너희 행성에서 가장 명석한 해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영성의 신비와 그것의 과학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멋진 전달자들이 있다. 그들의 책은 몸을 거쳐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법만이 아니라, 육신을 떠나는 법까지도 설명해준다. 이런 책들을 추가로 읽고 나면 너희는 몸을 놓아버리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기억해낼 수 있고, 그러고 나면 어째서 두 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너희는 어째서 몸과 함께 있는 것도 기쁨이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기쁨인가라는 이분법을 이해할 것이다.
- 이제 영혼의 바람은 그 목적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 자신이 지닌 몸을 가지고 그 모든 시간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다.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잠을 잘 필요가 거의 없다.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잠이 필요한가로 그 사람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거의 그렇다. 거의 그렇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영혼은 이따금 순전히 몸에서 벗어나는 기쁨만을 위해 몸을 떠나기도 한다. 마음을 위해 다시 깨어나고, 몸을 위해 기운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임'을 아는 황홀경을 다시 창조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일수록 덜 진화되었다고 말하는 게 항상 타당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자신이 몸을 가지고 뭘 하는지와 자신은 몸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임을 더 많이 자각하게 될 때, 그들은 몸과 더불어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하고 보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그만큼 '잠이 덜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나아가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망각과 영혼의 '하나 됨' 둘 다를 한꺼번에 체험하려는 존재들도 있다. 이런 존재들은 여전히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부를 몸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훈련시킴으로써, '참된 자신'을 아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굳이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잃거나 하는 일 없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죠? 어떻게 해야 이렇게 할 do 수 있나요?
그것은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자각의 문제, 전면 자각 상태에 도달하는 문제다. 너희가 전면 자각을 할 do 수는 없다. 너희는 오직 전면 자각일 be 수만 있다.
어떻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이 제게 줄 수 있는 도구들이 있을 텐데요.
이런 체험을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들 중 하나가 날마다의 명상이다. 이 도구를 써서 너희는 생명 에너지를 정수리 차크라로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깨어 있는' 동안에 몸에서 떠날 수도 있다. 명상을 하면, 몸이 깨어 있는 동안에 자신을 전면 자각을 체험하기 위한 준비 상태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준비된 상태를 '참된 각성 true wakefulness'이라 부른다. 이것을 체험하자고 굳이 명상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명상은 그냥 장치, 네가 말했듯이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체험하자고 반드시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너희는 앉아서 하는 명상만이 유일한 명상이 아니란 사실도 알아둬야 한다.
- 영혼들 사이에 사실상의 분리는 없지만, '한 영혼'을 이루는 소재는 물질 현실 속에서 다양한 밀도를 낳으면서 다양한 속도로 자신을 드러낸다.
다양한 속도요? 언제 속도가 들어왔습니까?
삶의 모든 것이 진동이다. 너희가 삶이라 부르는 것(너희는 그것을 그냥 손쉽게 신이라 부를 수도 있다)은 순수 에너지다. 이 에너지는 쉼 없이 항상 진동한다. 그것은 파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파동은 다양한 속도로 진동하여 다양한 밀도, 즉 다양한 빛을 낳고, 이것은 다시 너희라면 물질계의 다양한 '결과들'이라고 불렀을, 다양한 물체들을 낳는다. 그 물체들은 서로 다르고 구별된다. 하지만 그것들을 낳는 에너지는 어느 것이나 똑같다.
- 두려움은요?
두려움은 너희 아닌 것이다. 두려움 Fear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 False Evidence Appearing Real다. 두려움은 사랑의 대립물이다. 너희는 체험으로 '자신인 것'을 알기 위해서 너희 현실 속에 두려움을 창조했다. 너희가 존재하는 상대계에서는 너희 아닌 것이 없다면 너희인 것도... 없다는 게 진리다.
그래요, 그래요. 우린 이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그게 당신이 제 불평을 회피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저는, 우리가 누구인가(사랑)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무 광범해서 대다수 다른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전혀 대답이 아니라고요. 당신은 그게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하시고, 저는 그게 어떤 물음에도 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결혼이 자유결혼이어야 하는가?"라는 특정한 물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게 너한테 그러하다면, 그건 네가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 내가 말하던 건... 너희는 한 종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체험하길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혼제도는 영원성을 일궈내려는 너희 나름의 시도였다. 결혼제도를 가지고 너희는 평생의 반려자가 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한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낳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 없었죠? 자유롭게 선택한 결혼이라면 그건 자유의 표현이잖습니까? 그리고 자기 배우자 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성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건 한계가 아닙니다. 그건 선택입니다. 선택은 자유의 행사지, 한계가 아닙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선택인 한에서는, 그렇다.
음, 그건 그래야죠. 약속이 그랬습니다.
그렇다. 그리고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도 여기다.
- 네 손의 손가락 하나하나는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 모두가 같은 손이다. 네 집안의 공기는 어디나 있는 공기지만, 방방마다의 공기는 뚜렷이 다르게 느껴질 만큼 같지 않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하나'지만, 어떤 두 사람도 똑같지 않다. 따라서 설사 너희가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두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릇 특별한 대상에 대한 특별한 반응이니, 너희로서도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낼 때, 너희는 다른 사람과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 반응들은 말 그대로 복제할 수 없다. 너희가 이런 감정들을 가지는 상대방 또한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한 사람과만 이런 특별한 표현을 바라는 때가 온다면, 네 표현대로 그것을 선택하라. 그것을 알리고 그것을 선언하라. 하지만 네 선언이 계속되는 네 의무가 아니라, 순간순간 네 자유의 공표가 되게 하라.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유롭고, 사랑이라는 공간 속에 의무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
- 하지만 너희가 오직 특별한 한 사람과만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어길 수 없는 성스러운 약속으로 여긴다면, 그 약속을 의무로 체험할 날이 올 것이고, 너희는 그 약속에 화를 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 결정을 딱 한 번만에 맺은 약속으로가 아니라 계속해서 내리는 자유로운 선택으로 여긴다면, 분노의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을 기억하라. 성스러운 약속은 오직 하나뿐이다. 네 진리를 말하고 네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다른 약속들은 자유의 몰수이니, 결코 성스러울 수 없다. 자유란 너희 자신이니, 너희가 자유를 몰수한다면 너희는 자신을 몰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사(聖事)가 아니다. 그것은 불경이다.
- 아주 강경하게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약속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한테 어떤 것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야긴가요?
너희들 대다수가 현재 사는 식대로의 삶이라면, 어떤 약속이든 그 약속 속에는 거짓말이 심어져 있기 마련이다. 어떤 특정한 내일에, 너희가 뭔가를 놓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할지를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다고 하는 거짓말이. 너희가 반응하는 존재로 사는 한 -너희 대다수가 그러하다- 너희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오직 창조하는 존재로서 살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 약속에는 거짓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창조하는 존재는 뭔가를 놓고 미래의 어떤 순간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알 수 있다. 창조하는 존재는 자신의 느낌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없고,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에 관해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고 예언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권한과 권리는 있다. 변화는 모든 피조물의 기본권이다. 사실 그것은 '권리' 이상이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지만 '변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에.
변화는 그냥 존재한다.
변화인 것, 이것이 너희다.
너희는 이것을 받을 수 없다. 너희 자체가 이것이다. 그런데 너희 자체가 '변화'이고, 너희에 관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변화이니, 너희는 언제나 똑같으리라고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우주에서 불변인 건 없다는 뜻인가요? 당신 말씀은, 그 모든 창조행위 속에서 불변인 채로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까?
너희가 삶이라 부르는 과정은 재창조의 과정이다. 삶의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각각의 순간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완전히 동일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일함은 불가능해도 유사함은 그렇지 않다.
- 비록 너희 대다수는 이렇게 하기가 대단히 힘들겠지만. 우리가 방금 배웠듯이, 참된 불변성(겉모습의 불변성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겉모습만의 동일성을 창조하려 해도 위대한 선각자가 있어야 한다. 선각자가 동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려면, 그는 모든 자연스러운 경향을 넘어서야 한다(변화하려는 경향이 자연스러운 쪽임을 잊지 마라). 사실 그라도 모든 순간에 똑같게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겉모습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할 만큼은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선각자가 아니라도 항상 똑같이"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그 사람의 행동과 외양이 워낙 예측 가능해서 목을 걸고 내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압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한다. 선각자는 높은 수준의 유사성(너희가 '일관성'이라 부르는 것)을 의도적으로 창조하는 사람이지만, 그 제자는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고서도 일관성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특정 환경에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예컨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라는 말 따위를 자주 하겠지만, 선각자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 사람의 반응이 그들이 칭찬받을 만한 탄복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는 아마 "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실 그건 저절로 된 거야.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대꾸하겠지만, 선각자라면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각자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완전히 말 그대로의 사람이다. 그녀는 왜 그렇게 하는지도 안다. 반면에 깨달음의 차원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흔히 양쪽 다 모른다.
이게 약속을 지키기가 그렇게 힘든 이유입니까?
이건 한 가지 이유다. 내가 말했듯이, 너희가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 삶의 특정 순간들마다에서 삶 자체를 창조하는 건 결국 삶의 순간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너희가 1권이라 부르게 된 성스러운 우리 대화의 초반부에 아주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 내가 여기서 그것을 되풀이하는 건 네게 그것을 상기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낙태 문제를 물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너희가 낙태를 시키려 하든, 담배를 피우려 하든, 고기를 구워 먹으려 하든, 아니면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죽이려 하든, 말하자면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중요한 선택이든 사소한 선택이든, 너희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딱 하나뿐이다. 즉 "이것이 '참된 나'인가? 이것이 내가 지금 되려고 선택하는 존재인가?"라는 물음. 그리고 어떤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건 없음을 이해하라. 모든 것에는 귀결이 있고, 그 귀결은 자신이 누구고 무엇인가다. 너희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낙태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고, 그것이 전쟁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며, 그것이 흡연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고, 그리고 그것이 고기 먹는 문제와 너희가 지금껏 저질렀던 행위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다. 모든 행동이 자기규정의 행동이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이게 나다"를 선언한다.
- 선각자는 그 순환의 자기 부분만이 완료되었음을 안다. 그녀는 자신의 환상 체험만이 끝났다는 것을 안다. 이제 선각자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녀는 마스터플랜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순환이 완결되어도 그 게임은 계속되리란 걸, 그 체험은 계속되리란 걸 안다. 그러고 나면 선각자는 이제 자신이 그 체험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까지 안다. 선각자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각자는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그는 환상임을 알기에 환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선각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과 즐거움에 들어맞을 때 이따금 이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자신의 깨달음을 선언하고 드러내니, 남들은 그를 신/여신이라 부르리라. 너희 종 전체가 깨달음으로 인도되어 그것을 이뤄낸다면, 전체로서 너희 종(너희 좋은 하나의 통일체이기에)은 시간과 공간 속을 마음대로 옮겨 다닐 것이고(너희는 물질 법칙들을 이해했듯이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될 것이다), 너희는 다른 종과 다른 문명들에 속한 이들 또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려 할 것이다.
-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행성의 문화와 사회들은 '자기 이익'을 너희 세상보다 훨씬 넓게 규정한다. 깨달은 존재들은 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다수를 다치게 하는 것이고, 소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다수를 이롭게 할 수밖에 없음을, 아니 결국에는 아무도 더 이롭게 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너희 행성에서는 그것이 정반대다. 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쯤이야 다수에 의해 무시되고, 소수를 이롭게 하는 것쯤이야 다수에 의해 부정된다. 이것은 자기 이익에 대한 너희의 규정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고작 자기 개인, 그리고 그걸 넘어서면 자기 가족, 그것도 자기 분부대로 따르는 가족들에게나 간신히 이를 정도로. 그렇다, 나는 1권에서, 어떤 관계에서나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일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 자신에게 최고로 이로운지 알 때, 자신과 남이 '하나'이니, 너희는 그것이 남들에게도 최고로 이로운 것임을 알게 되리라고도 말했다. 자신과 모든 남이 '하나'다. 이것은 아직 너희가 이르지 못한 앎의 수준이다. 네가 진보된 기술에 대해 물으니, 내가 말해주마. 너희는 진보된 사고방식 없이는 어떤 진보된 기술도 이로운 방식으로 가질 수 없다.
- 한 사회가 자기 기술의 산물이 될 때, 그 사회는 자멸한다.
- 그리고 역설은 일단 너희가 그 방식을 헤아리고 나면, 일단 너희가 우주의 작동 방식을 점점 더 많이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면, 너희는 파멸을 불러올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지가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가 기술이다. 그것은 최고의 기술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작동한다. 완전히 혼자 힘으로 하지만 너희가 거기에 끼어들어 우주 원칙들과 법칙들에 쓸데없이 간섭하기 시작하면, 너희는 그 법칙들을 어길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 너희는 거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오직 너희만이 너희 리그에서 퇴출될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다. 너희는 행동으로 그것을 결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너희는 이제 스스로를 완전히 궤멸시켜버릴 수도 있을 만큼 원자 에너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는 그보다는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제할 겁니다.
정말로? 너희는 대량 파괴 무기들을 양산하는 짓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것들은 세상을 그 무기들에 대한 담보로 잡거나, 시험 삼아 세상을 파괴하려는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 애들에게 성냥을 주고 있으면서도 애들이 그곳을 몽땅 다 태우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너희 자신들조차 그 성냥을 사용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 오직 동기 motive 만이 전부고, 목표가 결과를 결정한다. 삶은 너희의 의도에서 비롯되고, 너희의 참된 의도는 행동으로 드러나며, 너희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너희의 참된 의도다. 삶의 모든 것이 (그리고 삶 자체가 그러하듯, 이것도) 순환이다. 고진재들은 그 순환을 보지만, 인간들은 보지 못한다. 고진재들은 있는 그대로에 대처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무시한다. 고진재들은 항상 진실을 말하지만, 인간들은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너무 자주 거짓을 말한다. 고진재들은 하나를 말하면 말한 대로 행하지만, 인간들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 너희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안다. '시애틀'로 가려고 했는데, '샌어제'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너희는 자기 행동의 모순을 보면서 그걸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너희는 있는 그대로와 도움 되는 것, 양쪽 다를 분명하게 보면서 둘 사이의 괴리를 더 이상 부추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 너희는 실현의 시간을 눈앞에 둔, 깨어나는 종이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들 때문에 너희가 낙담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체험, 더 큰 현실을 위한 토대는 이미 놓여졌고, 이 모든 것이 그냥 그것을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제 문을 지나 걸어갈 준비가 되었다.
- "하지만 뭘로? 이토록 완벽한 빛의 존재인 네가 어떻게 내가 용서해줄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
"아, 우린 틀림없이 뭔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야." 그 상냥한 영혼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는 왜 그렇게 하려는 거니?" 작은 영혼으로서는 그토록 완벽한 존재가 사실상 '나쁜 일'을 저지를 정도로 자신의 진동을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간단해. 난 널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거야. 너는 자신을 용서로 체험하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너도 날 위해 같은 일을 했으니까."
상냥한 영혼의 설명에 작은 영혼은 놀랐다.
"내가 그랬다고?"
"물론이지. 기억 안 나니? 우리는, 너와 나는, 그 모두였어. 우리는 그것의 위와 아래였고, 오른편과 왼편이었어. 우리는 그것의 여기와 저기였고, 지금과 그때였어. 우리는 그것의 크고 작음이었고, 남자 여자였으며, 좋고 나쁨이었어. 우리 모두는 그 모두였어. 게다가 우리는 서로 간의 합의로 그렇게 한 거야. 서로가 자신을 신의 가장 장대한 부분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말이야.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아닌 것이 없다면, 자기인 것도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거든. '차가움' 없이 너는 '따뜻함'일 수 없어. '슬픔' 없이 너는 '행복'일 수 없고, 이른바 '악' 없이는 소위 '선'이란 체험도 존재할 수 없지. 만일 네가 뭔가가 되기를 선택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립하는 뭔가나 누군가가 네 우주 어딘가에 나타나야 해."
그런 다음 상냥한 영혼은 그런 사람들은 신의 특별한 천사들이고, 그런 상황들은 신의 선물임을 설명했다.
"이번엔 내가 너한테 딱 한 가지만 부탁할게."
"뭐든지! 뭐든지 말해봐." 자신이 신의 모든 신성한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걸 안 작은 영혼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는 이제 계획을 이해했던 것이다.
"내가 너를 때리고 괴롭히는 그 순간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을 네게 저지르는 그 순간에, 그런 순간에... '내'가 진짜로 누군지 기억해줘."
"그럼, 절대 잊지 않아! 나는 지금 네게서 보는 완벽 그대로 너를 볼 거야. 그리고 '네'가 누군지 기억하겠어. 언제나."
- 그건, 모든 존재가 비교되는 체험을 이미 모두 겪었다 해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잊어버렸고, 아직 완전한 기억 속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얼마나 '긍정적'인지 알자고, 굳이 자신들의 바로 코앞에, 그들 세상에 '부정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군지' '긍정적'으로 자각하자고, 굳이 부정성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고진재들은 그냥 다른 곳에 있는 자기 아닌 것을 그 맥락 영역 안에서 관찰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한다. 사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이 비교 영역을 찾으려 할 때, 쳐다보는 것 중의 하나가 너희 행성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지금 너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을 자신들이 체험했을 때 어떠했는지 기억해낸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체험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탄탄한 준거틀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제 왜 고진재들이 그들 사회에 '악'이나 '부정성'이 필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겠느냐?
예. 하지만,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는 그런 게 필요합니까?
너희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이 대화 전체를 통해서 줄곧 말해왔던 게 이것이다. 너희 역시 자신인 것을 체험하려면, '자신 아닌 것'이 존재하는 맥락 영역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우주 법칙이니, 너희 역시 이걸 피할 순 없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이 순간 그런 영역 안에서 살고 있다. 너희가 따로 하나를 창조할 필요는 없다.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그 맥락 영역은 우주라 불리는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배경 속에 더 작은 맥락 영역을 따로 창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너희가 너희 행성에서의 삶을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다는 뜻이고, 너희 아닌 모든 걸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을 알고 체험하는 너희 능력을 조금도 위태롭게 하지 않고.
-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체험하자고, 굳이 너희가 대립물을 창조할 필요는 없다. 너희는 그냥 다른 곳에서 이미 창조된 것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그냥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해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앞에서 너희에게 저주나 원죄가 아니라, 매튜 폭스의 표현대로 원축복이었노라고 설명했던, "선악과(惡果)의 지식"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함을 기억하기 위해서, 너희가 예전에 그 모든 걸, 존재하는 전부를, 물질 형상으로 체험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위를 쳐다보는 것뿐이다.
"내면을 보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니다, 말 그대로 위를 쳐다보란 것이다. 별을 쳐다보고, 하늘을 쳐다봐라. 맥락 영역을 관찰하라. 나는 앞에서 고도로 진화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너희가 할 일은 관찰 기술을 키우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그런 다음 '도움 되는 것'을 하라.
그러니까, 우주의 다른 곳을 쳐다보면, 다른 곳들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거란 말씀이군요. 그리고 그런 비교 요소들을 사용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요.
만일 너희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마음먹는다면, 너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함'을 사용하길 그만두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너희 체험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런 상황들 자체가 증발해버리는 존재 상태로 옮겨갈 것이고, 또 그런 존재 상태에서 나올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너희가 지금의 진화 단계에서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대화를 끝내기에 좋은 지점이다. 다음의 것을 항상 기억하면서 그것을 너희의 만트라(眞言)로 만들어라.
나는 아무것도 가질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며,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되고 있는 것을 빼고는.
이것은 '가짐'과 '행함'이 너희 삶에서 배제되리란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가짐과 행함으로 체험하는 것이 너희의 되어 있음에서 나오리란 뜻이다. 그 되어 있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행복'에서 나올 때, 너희는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리라 여기면서 그렇게 하던 구식 패러다임과는 반대로. 너희가 '지혜'에서 나올 때, 너희는 지혜롭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지혜에 이르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사랑'에서 나올 때, 너희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랑을 갖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되기'를 추구하지 않고, '되어 있음'에서 나올 때 모든 게 변하고, 모든 게 뒤집힌다. 너희는 '되어 있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너희가 행복해지려고 애쓰든, 현명해지려고 애쓰든, 사랑이 되려고 애쓰든, 혹은 신이 되려고 애쓰든, 행함으로는 '거기'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일단 '거기'에 이르고 나면, 너희가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으리란 건 사실이다. 여기에 '신성한 이분법'이 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에 있어라! 그건 이토록 간단하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해지길 바라느냐? 행복하라. 현명해지길 바라느냐? 현명하라. 사랑이길 바라느냐? 사랑이어라.
어쨌든 바로 이런 게 '너희'다.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다.
- 사후세계의 모습은 어떤 겁니까? 실제로요. 제발 저한테 몽땅 다 이야기해주십시오.
내가 밝히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말해준다 해도 너희의 지금 조건, 지금 이해 수준으로는 너희가 그것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탓에 일부 밝혀질 수 없는 것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야기될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위 사후세계에서 너희는 지금 체험하는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중 하나를 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조절되지 않은 생각들을 창조하는 데 굴복할 수도 있고, 자신의 체험을 선택에 따라 의식하면서 창조할 수도 있으며, 존재 전체의 집단의식을 체험할 수도 있다. 이 마지막 체험을 재합일, 혹은 '하나'와의 재결합이라 부른다. 하지만 너희가 첫 번째 길을 택한다 해도, 너희 대다수는 그다지 오래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지상에서 너희가 처신하는 방식과 달리). 이것은, 자신이 체험하는 것을 싫어하자마자, 너희는 새롭고 좀 더 즐거운 현실을 창조하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냥 멈추는 것으로 이렇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너희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그토록 겁내는 '지옥'을 체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설사 그런 경우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점에서 너희는 "행복할 것이다.(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것에 '행복해한다.')
- 그것이 소위 유체이탈 체험이든, 꿈이든, 아니면 수정 같은 명료함이 너희를 찾아오는 신비스러운 각성의 순간이든 간에, 너희가 자신에게 '밝혀지는 체험'을 하는 그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너희 자신이 그냥 '기억해냄'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뿐이다. 너희는 자신이 이미 창조한 것을 기억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해냄은 대단히 강력할 수 있어서, 개인 차원에서의 현현(顯現)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 장대한 체험을 한번 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현실'이라 부르는 것과 잘 융화하는 방식으로 '현실 생활'로 되돌아가기가 대단히 힘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너희 현실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뭔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늘어났고 자랐으며, 두 번 다시 오그라들 수 없다. 그것은 요정 지니를 병 속에 도로 집어넣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다.
유체이탈 체험이나 소위 '임사(臨死)'체험에서 돌아온 많은 사람들이 이따금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게 이 때문입니까?
바로 맞혔다. 그리고 그들은 달라졌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그만큼 훨씬 많이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체험들에서 멀어질수록, 시간이 더 많이 지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옛 태도로 더 많이 돌아간다. 자신들이 아는 것을 또다시 잊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유지할"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있다. 순간마다 너희의 삶을 행동으로 표현하라. 환상의 세계가 너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하라. 겉모습이 아무리 너희를 미혹하더라도 너희가 아는 것에 머물러라. 모든 선각자가 해왔고, 하고 있는 일이 이것이다. 그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들이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기억해내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남이 기억하게 만들어라. 너희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남에게 주어라.
- 하지만 그런 이야기까지도 절 맥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전혀 휴식을 갖지 않는 겁니까? 우리가 열반에 머물면서 그곳에 남아 있는 경우는 절대 없는 겁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영원히 '왔다 갔다' 해야 할 운명입니까?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이 쳇바퀴를 돌리면서요. 우리는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겁니까?
그렇다. 바로 그것이 최대의 진리다. 가야 할 곳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으며, 지금 이 순간 너희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을 빼고는 누구도 '될' 필요가 없다. 진실은, 여행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것이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곳에 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선각자다. 그래서 그는 그 투쟁을 끝낸다. 그러고 나면 선각자는 너희가 투쟁을 끝내도록 도와주려 한다. 너희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남들의 투쟁을 끝내길 추구하게 되듯이. 하지만 이 과정, 이 우주 수레바퀴는 맥 빠지는 쳇바퀴가 아니다. 그것은 신과 삶 전체의 완벽한 장대함에 대한 영광스러운 재확인이고 끊임없는 재확인이다. 거기에 맥 빠짐 따위는 없다.
-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다"고 하셨던 부분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모든 일'이란 게 뭡니까?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 일어났습니까? 그리고 뭐가 일어난 겁니까?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모든 가능성이 사실로 존재한다. 완료된 사건들로.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저는 아직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것을 너희가 더 잘 연상할 수 있는 상황으로 표현해주마. 이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되는지 보자. 너는 컴퓨터 비디오 게임을 하기 위해 CD-ROM을 쓰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느냐?
예.
그렇다면 너는 그 아이가 조이스틱으로 만들어내는 온갖 동작들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컴퓨터가 어떻게 아는지 자문해본 적이 있느냐?
그럼요, 사실 전 그게 궁금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디스크에 있다. 컴퓨터가 아이가 만들어내는 온갖 동작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아는 건 모든 가능한 동작이 그에 따른 적합한 반응과 더불어 디스크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하군요. 거의 초현실적인데요.
뭐가? 모든 끝남과 그 끝남을 불러오는 모든 전환과 변형이 디스크에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게? 거기에 '무시무시한' 건 전혀 없다. 그건 그냥 기술이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의 기술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건 우주의 기술을 볼 때까지 미뤄라! 우주 수레바퀴를 그런 CD-ROM으로 생각하라. 모든 끝남이 이미 존재한다. 우주는 그냥 이번에는 너희가 어느 쪽을 택할지만 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이기든 지든, 아니면 비기든 간에 게임이 끝나고 나면, 우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계속할까요?" 네 컴퓨터는 네가 이기든 지든 신경 쓰지 않기에, 네가 '그것의 감정'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네게 다시 게임할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모든 끝남이 이미 존재하니, 네가 어떤 끝남을 체험하는가는 네 선택에 달렸다.
그렇다면 신은 CD-ROM일 뿐이란 겁니까?
나는 너희 미래를 예언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할 수 있는 최대치다. 이것은 누구라도 너희에게 말할 수 있는 최대치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지금 가는 바로 그곳에 이를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가고 있는 그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방향을 바꿔라.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무슨 수로 제가 그런 엄청난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심령사들이나 영적 권위자들이 예언하는 이 모든 재난을 마주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내면으로 가라. 너희 내면에 있는 지혜의 자리를 찾아라. 이것이 너희에게 뭘 해달라고 부탁하는지 알아보고, 그런 다음 그것을 하라. 만일 그것이 지구 격변을 불러올 수 있는 환경 남용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하라고 너희 정치가와 산업가들에게 요구하는 걸 뜻한다면, 그렇게 하라. 만일 그것이 Y2K 문제를 함께 해결하도록 너희 공동체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는 걸 뜻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리고 만일 그것이 그냥 네 길을 걸으면서, 날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보내 문제를 일으킬 돌연한 공포 속에 네 주위 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걸 뜻한다면, 그렇게 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사건으로도 '죽을 수' 없으니, 아무것도 겁낼 필요가 없다. 펼쳐져가는 '과정'을 자각하면서 만사가 너희를 위해 괜찮아지리란 걸 차분히 알라.
- 이 능력을 발달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달'이 맞는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근육과 같은 것이어서, 너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너희 중 일부만이 그것을 발달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그것은 발달되지 않은 채, 훨씬 쓸모없이 방치된다. 심령 '근육'을 발달시키려면, 그것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것을 써라. 날마다, 끊임없이. 그 근육은 지금 거기에 있지만, 작고 약하다. 그것은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따금 직관이 너희를 때려도 너희는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뭔가에 대한 '예감'이 들어도 너희는 그것을 무시한다. 꿈을 꾸거나 '영감'을 느껴도 빈약한 주의만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그것을 그냥 흘려보낸다. 고맙게도 너는 이 책에 대해 가졌던 그 직관의 '때림'에는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 이 문장들을 읽고 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자신이 우연히 이 글들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어쩌다가?
- 그러니 '심령력'을 발달시키는 첫 번째 조치는 네가 그것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쓰는 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예감, 네가 느끼는 모든 느낌, 네가 경험하는 모든 직관의 '때림'에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를! 그런 다음에는 네가 '아는' 것에 따라 행동하라. 네 마음이 거기서 벗어나라고 속삭이지 못하게 하고, 네 두려움이 너를 거기서 끌어당기지 못하게 하라. 네가 두려워하지 않고 직관에 따라 더 많이 행동할수록, 네 직관은 너를 더 많이 도와주리니,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거늘, 너는 이제서야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구나.
하지만 저는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주차 공간 식의 심령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진짜 심령력을 말하는 겁니다. 미래를 내다보거나,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관해서 알려주는 그런 능력 말입니다.
내가 이야기했던 것도 바로 그거였다.
이 심령력은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그걸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합니까? 어떤 심령술사가 예언을 했을 때, 제가 그 예언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내 미래는 바위처럼 고정되어 있습니까? 생판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사람에 대해 아는 심령술사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겁니까? 만일...
잠깐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네 가지 질문이 있다. 좀 속도를 늦추어서 한 번에 하나씩 다루도록 하자.
좋습니다. 심령력은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심령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네게 이해시켜줄, 심령 현상의 법칙은 세 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복습해보자.
1. 모든 생각이 에너지다.
2.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
3. 모든 시간이 지금이다.
심령술사는 이런 현상들이 만들어내는 체험 -진동- 에 자신을 연 사람이다. 그것은 마음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때도 있고, 말의 형태로 생각을 이룰 때도 있다. 심령술사는 이런 에너지들을 느끼는 데 숙달되어간다. 이 에너지들은 워낙 가볍고, 워낙 순식간에 스쳐가고, 워낙 엷어서, 처음에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여름밤의 부는 듯 마는 듯한 산들바람이 네 머리카락을 건드렸는가 싶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듯이, 아득히 멀리에서 뭔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는가 싶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듯이, 눈가를 휙 하고 스쳐가는 흐릿한 영상이 거기 있었노라고 맹세라도 하고 싶지만 머리 들어 쳐다보면 이미 없어졌듯이, 사라졌다! 그게 과연 거기에 있기나 했던가? 초보 심령술사들이 항상 하는 질문이 이것이다. 하지만 숙달된 심령술사는 절대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대답을 내쫓는 것이고 정신 mind을 끌어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령술사들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이것이다. 직관은 정신 속에 살지 않는다. 심령술사가 되려면 너희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직관은 심령 psyche 속에, 영혼 속에 살기 때문이다. 직관은 영혼의 귀다.
- 영혼이야말로 유일하게 생명의 가장 희미한 진동들까지 '잡아내고', 이 에너지들을 '느끼며' 즉석에서 이 파장들을 감지하고, 그것들을 해석하기에 충분할 만큼 예민한 도구다. 너희는 오감이 아니라 육감을 가지고 있다. 육감이란 후각과 미각, 촉각, 시각, 청각, 그리고... 지각 sense of knowing이다. '심령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렇다. 네가 생각을 할 때마다 생각은 에너지를 내보낸다. 생각은 에너지다. 심령의 영혼이 잡아내는 것이 이 에너지다. 하지만 진짜 심령술사는 그 에너지를 해석하려고 멈춰 서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그 에너지가 뭣처럼 느껴지는지 그냥 불쑥불쑥 뱉어내기만 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심령술사는 너희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줄 수 있다. 너희가 지금껏 가졌던 모든 느낌이 너희 영혼 속에 들어 있다. 너희 영혼은 너희가 느낀 모든 느낌의 총합이다. 그것은 저장소다. 너희가 그 느낌들을 그곳에 저장하고 나서 몇 년의 세월이 지났더라도, 진짜로 열린 심령술사라면 이 '느낌들'을 지금이 자리에서 '느낄' 수 있다. 그건 모두가 지금이기 때문이고... 시간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심령술사는 너희 '과거'를 너희에게 말해줄 수 있다. '내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다. 일어난 모든 일이 에너지 파장을 내보내, 우주 감광판 위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을 남긴다. 심령술사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이건 사실이다- '내일'의 영상을 보거나 느낀다. 이것이 일부 심령술사가 '미래'를 말하는 방식이다.
- 생리학상으로 어떻게 이렇게 되느냐고? 아마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심령술사는 강렬한 집중을 통해 사실상 자신의 아(亞)분자 성분을 파견하고 있다. 그의 '생각' -네가 이 표현을 원한다면-은 몸을 떠나 공간 속으로 쌩- 하고 날아간다. 그것은 빙 돌아서, 네가 아직 체험하지 않은 그 '지금'을 멀리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충분히 빨리 날아간다. 심령술사의 그 아분자 부분이 집중으로 얻은 상(像)의 에너지를 흡수한 다음, 그 에너지를 가지고 다시 심령술사의 몸으로 쌩- 하고 돌아오면, 심령술사는 이따금 전율하면서 '영상을 얻거나' '느낌을 느낀다'. 그는 아무런 '자료처리'도 하지 않고, 단지 그리고 즉석에서 그것을 묘사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인다. 그 심령술사는 자신이 '생각하거나' 갑자기 '보거나' '느끼는' 것이 뭔지 묻지 않으면서, 그것이 가능한 한 건드려지지 않고 그냥 '빠져나가게' 놔두는 법을 배운 것이다. 몇 주가 지나 영상으로 '보였거나' '느껴진'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 사람들은 그 심령술사를 족집게라 부른다. 그리고 물론 그건 사실이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어째서 '틀린 예언'들이 나올 수 있는 겁니까? 다시 말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심령술사는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에 관찰된,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 중 하나를 흘끗 보고 내놓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읽는 것이야말로 심령술의 영원한 화두다. 그는 얼마든지 쉽사리 또 다른 선택, 예언과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순간은 모든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포함한다. 지금 와서는 이미 여러 번 설명한 셈이지만,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 백만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남은 건 오직 너희가 어떤 인식 perception을 선택하는가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식의 문제다.
- 그러기에 심령술사들은 네가 '내일'을 놓고 지금 어떤 선택을 내리고 있는지를 보고, 그 선택이 마지막까지 펼쳐졌는지를 본다. 하지만 참된 심령술사라면 그게 꼭 그런 식으로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 결말을 바꿀 수 있다.
사실 전 이미 가졌던 체험을 바꿀 작정입니다.
정확하다! 이제 너는 그것을 이해해가고 있다. 이제 너는 역설 속에 사는 법을 이해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이미 일어났다면' 그건 누구에게 '일어난' 겁니까? 그리고 제가 그걸 바꾼다면, 그 바뀜을 체험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시간선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 이상의 '너'가 있으니, 이 모든 게 2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너더러 그것을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구나. 그러고 나서 거기에 있는 것을 여기에 있는 것과 결합시켜라.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
좋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하지만 저는 이 심령술을 소재로 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많은 사람들이 심령술사라고 자처합니다. 어떻게 해야 사이비와 진짜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누구나 '심령술사'다. 그러니 그들 모두가 '진짜'다. 네가 살펴보고 싶어 하는 건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이 너를 돕고자 하는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지.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심령술사들, 소위 '직업적 심령술사들'은 흔히 자신들의 심령력으로 어떤 일들을 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잃은 애인을 돌아오게 하고',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심지어는 '살을 빼도록 도와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복채를 낼 때만 그들은 네 상사든 네 애인이든 네 친구든 가릴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읽어서', 그들에 관한 온갖 이야길 다 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거나 가져오시오. 목도리든 사진이든 필체 견본이든 말이오." 누구나 흔적, 심령 지문, 에너지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고, 진짜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느낄 수 있기 마련이니, 사실 그들은 그 사람들에 관해 네게 말해줄 수 있다. 종종 꽤 많은 것을.
- 하지만 믿을 만한 직관자라면 절대 다른 사람을 네게 돌아오게 해 주거나, 어떤 사람의 마음을 바꿔주거나, 자신의 '심령'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겠노라고 제안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재능을 발달시키고 사용하는 데 자기 인생을 바친 참된 심령술사라면, 다른 사람의 자유의지는 절대 간섭받게 되어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절대 침해받게 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심령 공간은 절대 훼손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전 당신이 옳고 그른 건 없다고 말씀하신 걸로 생각했는데요. 갑자기 이 '절대'들은 다 뭡니까?
내가 '언제나'나 '절대'란 표현을 쓸 때는 언제나 내가 아는바, 너희가 이루고자 하는 것, 너희가 하려고 애쓰는 것이란 문맥 안에서다. 나는 너희 모두가 진화하려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려 하며, '하나 됨'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걸 안다. 너희는 지금껏 자신이 자신에 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으로 자신을 체험하고자 한다. 너희는 개개인으로서도, 한 종(種)으로서도, 이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내가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 세계에는 '옳고 그른' 것,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없다. 그리고 '나쁜' 것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으니, 너희가 '나쁜' 걸 선택하더라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에서 불타는 일도 없다. 물론 너희가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물질계 속에 설정된 자연법칙들은 있으니, 그중 하나가 인과 법칙이다. 인과 법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야기된 caused 모든 결과는 결국에 가서 자신이 체험한다는 것이다.
- 아니, 무척 많은 시간 동안 너는 행복해야 할 온갖 이유를 다 갖고 있을 때도 자신이 괴로워하게 내버려 두었다. 자신의 행복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그리고 네가 이런 염려까지 해야 했던 건, '자신의 행복을 붙잡고 있는 것'을 남들이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주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키길 기대할 권리, 적어도 희망할 권리조차 없단 말입니까?
왜 너는 그런 권리를 원하려는 거냐? 남이 네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는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혹은 같은 거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때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네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혹은 무슨 이유에선가 그냥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왜 너는 굳이 그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느냐? 너는 정말로 그녀가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 합의를 그녀가 지키길 바라느냐? 너는 정말로 그들이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일들을 하도록 사람들을 강제해야 한다고 느끼느냐? 왜 너는, 그게 무슨 일이든, 또 그게 누구든,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그 일을 하도록 강제하길 바라느냐?
글쎄요, 그들이 하겠노라고 말한 것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놔둔다면, 나나 내 가족이 다치게 되리란 게 그 한 이유겠죠.
그러니까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더러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게 어째서 그 사람을 상처 주는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상처받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진해서 약속을 지켰을 테니까.
그래서 약속을 한 사람에게 그냥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해서 '상처주지' 말고, 제 쪽에서 상처를 감수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내 아이들이나 가족이 상처 입는 걸 지켜봐야 한단 말입니까?
너는 정말로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면, 네가 상처 입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네게 말하노니, 남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힌 쪽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해왔던 사람들이 아니라, 말없이 집요한 삶을 살았던(즉 그들이 '해야 한다'고 느꼈던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유를 줄 때, 너희는 위험을 제거하지, 그것을 키우지 않는다.
- 그렇다. 누군가가 너희에게 한 약속이나 서약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놔두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너희를 다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코 너희를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남들에게 자유를 줄 때, 너희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너희는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 약속을 지키라고 남에게 강요할 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오는 번민과 비애, 그리고 자기 위엄과 자기 가치의 손상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그가 한 약속에 붙잡아두려 했던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발견하는 사실이지만, 해를 입히는 기간이 길수록 그 해악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견해가 사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야 세상이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업을 하는 유일하게 분별 있는 방식이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너희 사회 전체에서 사업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합법적인 힘(너희가 '법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나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물리적인 힘(너희가 '세상의 무력'이라 부르는 것)에. 너희는 아직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 가치 있는 뭔가를 너희에게 줘야지만, 비로소 자신이 가진, 가치 있는 뭔가를 그에게 주기로 합의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냥 소위 답례란 걸 받기 전까지는 너희가 뭔가를 주거나 나누는 걸 망설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동으로 주고 나누게 될 것이니, 따라서 깨뜨릴 계약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계약은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과 관련된 것인 반면, 너희 삶은 교환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주는 것과 관련될 것이기에. 그럼에도 너희의 구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이런 식의 일방적인 줌에서다. 왜냐하면 너희는 신이 체험했던 것, 즉 남에게 준 것이 자신에게 주는 것이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에 돌아가는 것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네게서 비롯된 모든 일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일곱 배로. 그러니 너희는 '되찾으려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너희는 오직 '내주는' 것만 염려하면 된다. 삶은 최상질의 가짐이 아니라 최상질의 줌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는 계속해서 잊고 있다 forgetting. 하지만 삶은 '갖기 위한 것 for getting'이 아니라 '주기 위한 것 for giving'이니, 그렇게 하려면 남들을 용서해야 forgiving 한다. 특히나 너희가 가지려 했던 것을 너희에게 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이런 방향 전환은 너희 문화의 내력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독재자들이 제멋대로 활개 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독재자임을 그만두게 하려면 거꾸로 그들에게 독재를 행사해야 한다." 또 그 책에서는 "신처럼 되는 것이 순교자가 되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희생자가 되는 걸 뜻하지 않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절대 다른 존재의 육신 삶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진술들이 어떻게 서로 병존할 수 있습니까?
1권의 그 부분을 다시 읽어라, 꼼꼼하게. 거기서의 내 대답들은 네가 설정한 문맥 안에서, 네 질문의 문맥 속에서 주어졌으니, 오로지 그 안에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1권 221쪽에서 네가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어봐라. 거기서 너는 깨달음의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지 않는 자신의 현 상태를 인정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는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해서 너는 상처받고 고통 주는 이런 체험들에 어떻게 대응하는 게 최선인지 물었다. 내 대답은 오직 이런 문맥 안에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네가 상처받지 않을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오비완 케노비처럼 너도 누가 널 '죽이려' 해도 아무 고통도 체험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내가 지금 서술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도달한 깨달음의 수준이 이런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는 존재들은 '자신들이 누구고 누구가 아닌지' 아주 잘 안다. 그들 중 한 명을 '고통받거나 상처받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적어도 그들의 육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으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너희가 그들의 육신을 굳이 해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들은 그냥 몸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너희가 갖도록 남겨놓을 것이다.
- 내가 1권에서 네 말에 대해 두 번째로 지적했던 점은, 네가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남들의 말과 행동에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런 게 성장 과정의 일부고 진화 과정의 일부라고.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전체 성장 과정 동안 "너희는 지금 수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이해 수준, 지금의 의지 수준, 지금의 기억 수준에서"라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거기서 이야기한 다른 모든 것도 이런 문맥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심지어 나는 223-4쪽에서, "이 논의의 목적에 맞추어 너희가 아직도 영혼의 일을 지향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너희는 아직도 '참된 자신'을 깨달으려("실현시키려 애쓰는 중이다")"고까지 말했다. 1권에서 내가 한 답변들은 '참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사회'라는 문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네가 그런 질문들을 한 게 아니다. 너는 여기서 내게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니 지금의 주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다루게 될 다른 모든 화제와 관련해서도, 다른 문화에 대한 이런 설명들을 너희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보지 않는 게 너희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판단도 없으며, 너희가 더 진화된 존재처럼 행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따라서 내가 여기서 이야기한 것은,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이 화가 나서 다른 지각 있는 존재를 죽이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분노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고, 둘째, 그들은 다른 존재의 허락 없이 그 존재의 육신 체험을 끝내지 않을 것이며, 셋째, 네 특별한 관심에 특별히 답해준다면, 그들은 자기 사회나 자기 종들 아닌 것들에게 '공격당한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공격당한다'고 느끼려면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뭔가를 생명이든, 가족이든, 자유든 재산이든, 아니면 소유물이든, 하여튼 자신의 뭔가를 빼앗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존재로서는 이런 체험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힘으로 빼앗을 태세가 되어 있을 만큼 너희에게 그토록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설령 그것이 그 진화된 존재의 육신 삶을 희생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그냥 너희에게 줄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된 존재는 자신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창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르는 덜 진화된 존재에게 그녀가 그 모든 걸 내어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따라서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순교자가 아니다. 어떤 "독재자의 희생자가 아닌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이런 상태를 넘어서 있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자신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창조할 수 있다는 걸 잘 알 뿐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는 행복해지거나 생존하는 데 그중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는 자기 외부의 어떤 것도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으며, 본래의 '자신'은 물질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덜 진화된 존재와 종들이 이 점을 언제나 잘 아는 건 아니다.
- 마지막으로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자신과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하나'임을 이해한다. 그녀는 그 공격자를 그녀 자신 중의 상처받은 부분으로 본다. 그 상황에서 그녀의 역할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하나' 속의 전체가 자신을 다시 참모습으로 알 수 있도록. 그녀에게는 자신이 지닌 전부를 내주는 것이 네게 아스피린을 주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글쎄요, 그런 피해는 몇 년이고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이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니까요. 그래서 그걸 단기 이윤/장기 손실이라고 하는 걸 겁니다. 하지만 장기 손실을 체험할 때쯤엔 자기가 그 자리에 없을 거라면, 누가 장기 손실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고도로 진화된 존재라면 신경을 쓴다. 게다가 그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
얼마나 오래요?
몇 배나 오래. 몇몇 고진재 사회의 존재들은 영원히, 다시 말해 그들이 육신 형상으로 남아 있기를 택하는 한 계속 산다. 따라서 고진재 사회에서는 개별 존재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가져온 장기적인 결과들을 체험할 때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물론 너희가 그러하듯이, 그들 역시 살아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 하지만 나는 네 말뜻을 안다. 너는 '몸을 가지고 살아 있느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몸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첫째로, 그들은 공기와 물과 땅을 오염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흙 속에다 화학물질들을 집어넣지 않는다. 그런 화학물질들은 식물과 동물들에게 흡수되고, 그다음엔 그 식물과 동물들을 섭취하는 너희 몸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사실 고진재라면 고기를 섭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더군다나 땅과 동물이 먹는 식물들을 화학물질로 채움으로써, 다시 그 동물 자체를 화학물질로 가득 채운 다음, 그것을 섭취하는 일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고진재는 정확하게 그런 행위를 자살행위로 평가한다. 따라서 고진재들은, 인간들이 하듯이 자신들의 환경과 대기와 자기 육신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너희 육신은 너희가 지금 허용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오래 버티게 되어 있는 장대한 창조물이다. 그리고 고진재들이 보여주는 심리 행동들도 삶을 연장해주는 데 기여한다.
예를 들면요?
고진재는 걱정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걱정'이나 '스트레스'같은 인간의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또 고진재라면 '미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질투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고진재들은 자기 몸을 갉아먹고 망치는 체내 생화학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고진재라면 이것을 '자기 갉아먹기'라고 불렀을 것이고, 고진재라면 자신을 소모하자마자 다른 육신 존재를 섭취했을 것이다.
고진재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죠? 인간들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고진재들은 만사가 완벽함을 이해한다. 우주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과정이 있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곤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 것뿐임을. 그 과정을 이해하는 고진재로서는 절대 걱정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한다면, 그렇다, 인간들도 이런 조절력을 가질 수 있다. 비록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걸 믿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 힘을 행사하지 않지만. 반면에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 화학물질들과 대기오염이 그들을 죽이지 않아 왔고, 여타 방식으로 그들이 자진해서 자신을 독살하지 않아 왔다고 가정하면...
잠시만요. 우리가 '자진해서 자신을 독살한다'고요?
너희 중 일부는 그렇다.
어떻게요?
앞에서 말했듯이 너희는 독을 먹는다. 또 너희 중 일부는 독을 마시고, 너희 중 일부는 독을 피우기까지 한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에게는 그런 행동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친다. 그들로서는 왜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너희 스스로도 아는 물질들을 일부러 자기 몸속에 집어넣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음, 우리는 어떤 걸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면 즐겁다는 걸 알거든요.
몸속의 삶이 즐겁다는 걸 아는 고진재로서는, 그런 삶을 한정 짓거나 끝내거나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음을 미리 알면서 그렇게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 중에는 시뻘건 고기를 양껏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엽초를 피우는 게 우리 삶을 한정 짓거나 끝내거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그렇다면 그들의 관찰 기술이 무척 무딘 것이다. 그들은 예리해질 필요가 있다. 고진재라면 너희더러 그냥 주위를 둘러보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그래요, 그랬겠죠...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말씀해주실 또 다른 게 있습니까?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고요?
죄의식 같은 것도 없다.
땅의 서투른 '관리인'임이 밝혀진 존재라면 어떻습니까? 당신은 좀 전에 그들은 그 땅을 그에게서 빼앗는다고 말했어요! 이건 그를 심판해서 죄를 찾아냈다는 뜻 아닙니까?
아니다. 그건 그를 관찰하여 할 수 없다는 걸 찾아냈다는 뜻이다.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할 수 없다고 밝혀진 일을 하라고 요구받는 일이 없다.
그래도 그들이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면요?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왜요?
이미 드러난 자신의 무능력이 그들이 그런 것을 바라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그들의 이해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들은 결코 이렇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또 그들은 이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여전히 체험을 끌어가는 '자기 지속성 self preservation'이 있다는 얘기군요. 지구에서처럼요!
당연히! 단 하나 다른 것은 '자기'에 대한 그들의 규정이다. 인간은 자기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한다. 너희는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내 공동체라고 말한다. 고진재는 자기를 전혀 다르게 규정한다. 그녀는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뿐인 것처럼.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그게 핵심이다.
이해가 갑니다.
따라서 고도로 진화된 문화에서는 예를 들면, 육아에서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자기 눈으로도 몇 번이나 직접 확인한 존재가 자식 기르기를 고집하는 일이 절대 없다. 이 때문에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아이가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들은 노인들에게 자식을 길러달라고 맡긴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아이를 생명 준 사람들에게서 떼어내고, 그들의 품 안에서 빼앗아서, 생판 낯선 사람에게 길러달라고 넘겨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화들에서는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간다. 노인들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도록 버려지거나, 무시되거나, 마지막 운명을 다하게끔 방치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과 보살핌과 활기로 가득한 공동체의 일부로서 존경받고, 존중되고, 가까이 모셔진다. 갓난아이가 세상에 도착할 때, 노인들은 바로 그 자리에, 그 공동체와 그 가족의 심장부 깊은 곳에 함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를 기르는 건, 너희 사회가 이런 일은 부모더러 하게 하는 게 합당하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유기체로서 타당한 일이다. 차이는, 그들 역시 자기 '부모들' -그들의 언어에서 가장 가까운 용어는 '생명 주는 이'일 것이다- 이 누군지는 언제나 알고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그 자신도 아직 삶의 근본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존재들에게서 삶의 근본에 대해 배우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고진재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주생활과 식생활, 아이들 보살피기만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도 조직하고 감독한다. 아이들은 지혜와 사랑, 크나큰 인내와 깊은 이해가 충만한 환경 속에서 길러진다. 그들에게 생명을 준 젊은 사람들은 대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도전 과제들을 만나고, 젊은 삶이 주는 그들 나름의 기쁨들을 체험한다. 혹은 그들이 선택하는 만큼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식들과 함께 보내거나, 때로는 연장자 거주지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 수도 있다. '가정환경' 속에서 아이들 바로 옆에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자신들을 그 환경의 일부로 '체험시키는' 식으로 그 모두가 대단히 통일되고 일관된 체험이다. 하지만 양육을 하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노인들이다. 그리고 종 전체의 미래에 대한 책임이 노인들에게 지워지는 만큼, 그것은 일종의 명예다. 고진재 사회들은 이 일이 젊은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수준 이상임을 인정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다. 너희 행성에서 자식들을 기르는 방법과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맞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되돌아가서요, 고진재는 무슨 짓을 해도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 죄의식이나 수치심 따위는 본래 자기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내면화될 수 있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처음에는 외부에서 온다. 예외 없이 항상 어떤 신성한 존재도(그리고 모든 존재가 신성하다), 자기 외부의 누군가가 자기나 자기가 하는 어떤 일을 '수치스럽거나' '죄 많은' 것으로 낙인찍기 전까지는 절대 그걸 그런 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what's so"를 보고, "도움이 되는 것 what works"을 한다. 인간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대단히 많다. 고진재들은 교사나 성직자들이 '도덕적으로 옳아서'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사회가 가기로 선택한 곳을 전제할 때, 그것이 '도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하지만 가치관이 있다면, 거기도 틀림없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고진재 사회에서 부유하고 유명한 쪽은 교사들이고, 가난한 쪽은 야구선수들이겠군요.
고진재 사회에는 '못 가진 자'가 없다. 너희가 다수의 사람들더러 빠지게 만든 식의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무도 굶주려 죽지 않는다. 시간당 400명의 어린이들과 날마다 30,000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너희 행성과 달리, 인간의 노동 문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절망'으로 얼룩진 삶 같은 것도 없다.
- 아니다. 고진재 사회에는 '빈민'이나 '영세민' 따위는 없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요?
두 가지 기본 원리를 적용하는 것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다.
충분히 있다.
고진재들은 넉넉함을 깨닫고 있으며, 넉넉함을 창조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만물의 상호 연관성을 의식하는 고진재들은 자기 행성의 천연자원을 낭비하거나 부수지 않는다. 이것은 만인을 넉넉한 상태가 되게 하니, 따라서 '충분히 있는' 것이다. 불충분함, '넉넉지 못함'에 대한 인간 의식은 모든 불안과 모든 긴장, 모든 경쟁, 모든 질투, 모든 분노, 모든 갈등, 그리고 궁극에는 너희 행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의 뿌리 원인이다. 여기에다 만물의 통일성보다는 분리성을 믿으려는 아집을 보탠 것, 이것이 너희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너희 역사를 비극으로 만든 원인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만인에게 더 나은 상황을 가져다주려 했던 너희 노력들이 무위(無爲)로 끝나고 만 원인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너희가 의식의 이 두 요소를 바꾼다면, 만사가 변할 것이다.
어떻게요? 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릅니다. 제게 도구를 주십시오. 그냥 진부한 의견이 아니라요.
좋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 여기 도구가 있다.
"인 듯이 행동하라."
너희가 모두 하나인 듯이 행동하라. 내일부터 그냥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라. 그냥 모두를 힘들어하는 '자신'으로 보고, 공정한 기회를 원하는 '자신'으로 봐라. 그냥 모두를 다른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으로 봐라. 그렇게 해봐라. 그냥 내일부터 주위를 둘러보고 그렇게 해봐라 모두를 새로운 눈으로 봐라.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터 마운트 샤스타] 나의 스승 레이디 마스터 펄 (0) | 2022.07.12 |
---|---|
[줄리아 캐머런] 아티스트 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 -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여 나를 바꾸는 법 (0) | 2022.07.08 |
[바딤 젤란드] 타프티가 말해주지 않은 것 - 세상에서 가장 괴이하고 매혹적인 자기계발 픽션 (0) | 2022.07.04 |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 2 (0) | 2022.06.27 |
[브루스 D. 페리, 오프라 윈프리]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 내면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열 번의 대화 (0) | 2022.06.22 |
[정명호] 욕망을 이롭게 쓰는 법 -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십시오 (0) | 2022.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