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왕웨이롄] 책물고기 書漁

일루젼 2022. 8. 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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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왕웨이롄 / 김택규
출판 : 글항아리 
출간 : 2018.10.12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중국은 80년대 생 세대들을 '바링허우' 세대라고 칭하는 모양인데, 1자녀 정책을 시행한 이후 태어난 세대를 의미한다고 하니 대략적인 뉘앙스는 알 것 같다. 왕웨이롄은 82년 생으로 이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 

 

중국 작가라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읽어보면, 문장이나 느낌이 감각적이고 신선하다. 일본이나 한국과는 다른 정서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호였다. 

(사실 중국어의 특성을 고려할 때 맛깔나는 문장으로 번역해주신 출판사와 번역가 님의 공이 8할은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수록된 5편의 중단편들은 역자후기에서 언급된 바처럼 제각각의 스타일이지만, 모두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가치'를 다루고 있다. 그 표적점은 미(美), 지(知), 원(源), 사(史), 문(文) 등 다양하지만 '누구나 무언가를 품어야 살아간다'는 전제만은 흔들림없이 확고하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더듬어가는 것만이 삶의 이유라는 듯이.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말을 통해 표현되는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면 왕웨이롄은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로 보인다. 자신 안에 고인 것들을 비워내듯이 글을 쓰는 이들이 있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력조차 없이, 숨을 쉬기 위해 토해내는 이들이. 그리고 그에 이끌리는 이들도 있다. 그 이끌림은 작가가 흘려낸 것에 대한 감응일까, 자신 또한 무언가가 내면에 고여있음을 드러내는 반증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을 읽는 동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하고도 여전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그럼에도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던.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크리스마스 즈음에 각자의 연인과 우연히 한국에서 마주쳤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도.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의 '내'가 말하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떤 순간에도 되돌아가고 싶은 지점은 없다. 나는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내고, 살아가고 있고, 무언가를 잊어가는 만큼 새로운 것을 배워가고 있다고 믿는다. 과거와 미래의 총합체로서 '지금'. 

 

즐겁게 읽었다. 

        

 


   

 

- 오후 네 시, 나는 공장을 나와 은빛의 소금밭이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는 광경을 보다가 문득 울고 싶었다. 그 충동은 요즘 갈수록 빈번하게 나를 찾아온다. 방금 샤오딩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티베트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지금껏 오로지 나를 만날 목적으로 온 사람은 없었다. 전부 지나가는 길에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이미 익숙해졌다. 이 지역은 그저 스쳐 지나가면 족한 곳이다. 나는 화학실험실 입구의 계단 앞에 가서 앉았다. 건물 지붕의 대형 스피커에서 안전생산 수칙을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샤링의 그 목소리는 더는 우리가 처음 사귀던 그때처럼 듣기 좋지 않았다. 우리가 부엌에서 다툴 때와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메마르게 들렸다.

 

- "탄광에서 일할 때는 어둠 때문에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지. 대낮에도 깜깜한 지하에 있어야 했고 밤에 땅 위로 올라오면 또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웠으니까. 때로는 내가 곧 장님이 되지 않을까 의심이 들더라고.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알록달록한 색깔을 보니까 꼭 목말라 죽을 것 같던 사람이 물을 사발로 들이켜는 것 같더라! 나는 제일 선명한 색깔로 제일 선명한 그림을 그리려 했어. 수백 미터 지하에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지. 내가 그린 그림은 엄청나게 화려해서 동료들은 보기만 하면 흥분을 하더군. 평상시 여자 이야기를 할 때보다 훨씬 더."

 

- 이쯤에서 잠깐 말이 끊어졌다. 샤오딩은 옛날 생각에 젖었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 더 깊은 절망을 느꼈다. 샤링이 볶음 요리를 한 접시 가져와 우리에게 먼저 먹으라고 했다. 진징이 일어나서 "나도 도울게요"라고 말했다. 샤링은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진징을 말리지 못해 함께 부엌에 들어갔다.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문득 샤링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샤링이 촌스러워지고 뒷모습도 퉁퉁해져서 마치 도시로 일하러 온 시골 보모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괴롭고 난처했다. 감히 샤오딩을 보지 못하고 곧장 거실 캐비닛 앞에 가서 술 한 병을 꺼냈다.

 

- 술을 안 마시고 싶은 게 분명한 두 사람이 억지로 술을 마시는 것은 희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어떤 목소리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집요하게 소리쳤다. 샤링과 진징이 거의 동시에 우리 쪽으로 걱정의 눈빛을 보냈지만 나와 샤오딩은 뻔뻔하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첫 잔을 배 속에 털어 넣었다. 두 여자는 눈빛을 거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사람이 너무 진지하게 그림을 그려서 그랬어요. 누가 그렇게 집중해서 나를 보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 초 정도 마주 보았다. 나는 고기를 먹는 척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름다움을 피했다. 아마도 화가만이 예술이라는 핑계로 그런 아름다움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샤오딩이 진징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가 잘 그렸어?"
"잘 그렸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어."
샤오딩은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당신이 아니면 누구였다는 거야?"
진징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꿈이었어."
나와 샤링은 깔깔 웃었다. 나는 진징을 보며 말했다.
"예술가의 창조물이 다 자기 마음속의 꿈이라고는 해도 그 꿈은 당신이 샤오딩한테 준 거예요."
"바로 그거야 그거!"
샤오딩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 나는 진징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바로 그때 석양이 저물었다. 광야여서 더 급작스러웠다. 지평선의 창백한 빛이 순식간에 컴컴한 어둠이 되었다. 그 어둠은 하늘 깊은 곳의 희미한 빛과 대조되어 더 촘촘해 보였다. 마치 어떤 무거운 금속 같았다. 잠깐 진징의 얼굴이 안 보였다. 그러니까 이유 없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술김에 말 못 할 욕정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순한 동경일 뿐이었다. 그것은 내 삶에서 보기 힘든 어떤 희망 같았다. 아니, 희망보다 더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 나는 절망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사방에서 미세한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마치 어떤 것이 자라나고 있는 소리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다. 아침에 깨고 나서 그것이 소금이 자라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는 소금이 자랐다. 아름다운 소금꽃이 끊임없이 피어나곤 했다. 그러고 보면 그곳에는 우리 말고 다른 생명도 있었다. 소금이 바로 생명 없는 일종의 생명이었다. 조물주 앞에서 우리와 소금이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와 소금은 다 자라나고 쇠락하는 일종의 변화일 따름이다. 

 

- 겨울이 되자 희한하게 북풍이 불었다. 나는 소금호수의 표면에 얇은 얼음이 덮여 투명한 소금층과 한데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광경은 매우 보기 드물었다. 소금호수는 거의 어는 일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공장에 가서 온도계를 확인했다. 최저 기온이 영하 25도였다. 더 골치 아팠던 일은 그렇게 혹독한 추위에도 눈이 계속 안 내려서 견딜 수 없이 건조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목구멍이 아리고 따끔거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국제우편이어서 변변찮은 영어 실력으로 한참을 씨름한 끝에 그것이 네팔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십중팔구 진징의 편지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혹시 꿈속에서 온 편지인가? 나는 잠깐 내가 아직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 보통 우리는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카프카의 이야기가 현대문학의 시초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카프카가 <변신>에서 사람이 벌레가 아니라 다른 생물로 변하는 이야기를 썼어도 그 작품이 그토록 대단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을지, 혹은 그렇게 심원한 창조적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소설가의 문제의식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속 감정을 어떻게 외적인 이미지로 바꿀 것이며 벌레의 이미지는 과연 적절한 것이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매혹되어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만약 카프카가 사람을 개, 돼지, 소, 양 따위로 변하게 했다면 그것은 확실히 적절치 못했을 것이다. 너무 익살맞거나 아니면 너무 온순했을 것이다. 혹시 고양이로 변하게 했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이야기처럼 색다른 재미가 있기는 했겠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힘은 덜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고양이가 보통 고양이가 아니고 문인 기질이 있는 죽을 때까지 쥐 한 마리도 잡지 않는 '우아한 고양이'였다면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 이렇게 하나하나 배제해가면서 나는 점점 더 현대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혹은 다른 선택은 현대인과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현대인은 벌레로 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답을 얻었을 때 이 문제의 의미는 이미 한 소설가의 곤혹감을 한참 넘어섰다. 나아가 "현대인은 벌레다"라는 이 이미지는 단지 하나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어떤 진실하고 필연적인 관계가 돼버렸다.

 

- 물론 사람이 벌레가 되는 이야기가 <변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중학교 때 배운 포송령의 단편소설 <촉직 促織>에서는 한 아이가 용감한 귀뚜라미로 변해 다른 귀뚜라미들과 싸워 이겨 황제의 마음을 얻음으로써 자기 가족에게 부귀영화를 선사한다. 이것도 당연히 일종의 '변신' 이야기다. 물론 전형적인 중국식 '변신'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변신과 대단히 유사한 모티프를 갖고 있으나 그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변신>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촉직>의 '변신'은 가족을 구하지만 카프카의 '변신'은 가족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설과 현실의 다른 점이다. 전설은 모두 삼인칭으로 쓰이지만 진정한 현실은 단지 일인칭에만 속한다. '나'는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닫는다. 이 '나'는 사실 우리이고 우리 중 누구도 요행히 이를 면하지는 못한다. 

 

- 계속 추론하자면 우리는 모두 그런 위험에 처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갑자기 자기가 벌레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 위험에 말이다. 단지 대다수 사람이 그 기미를 외면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부터 나는 내가 최근에 겪은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역시 벌레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다. 

- 나는 많은 독자처럼 스스로를 '책벌레'에 비유하곤 한다. 책장 사이에서 빠르게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에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 많은 독자처럼 그 '책벌레'라는 것이 대체 무슨 생물인지 연구해본 적은 없다. 그것은 너무나 작고 보통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겉보기에는 이와 닮았다. 바로 그런 연상을 하면서 우리는 손가락을 뻗어 책장 위에서 그것을 단번에 눌러 죽이곤 한다. 그것의 체액은 딱 침 끝 정도의 면적을 적실 뿐이고 책장은 금세 말라버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더 많은 경우, 그 벌레들은 손가락의 습격에서 도망쳐 책장 틈으로 파고든 뒤, 다시는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 "이게 대체 무슨 병이죠?" 
"응성충이라고 들어봤나?"
노인이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약간 누레진치아가 보였다.
"응성충이요?"
나는 그가 농담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남의 의견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사람을 흔히 응성충이라고 경멸해 부른다. 후리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설마 세상에 그런 벌레가 진짜 있다고요?"
"당연히 있지! 이 벌레는 책 속에 서식하는데 지금은 보통 책벌레라고 부르고 옛날 사람들은 응성충 아니면 서어, 즉 물고기라고 불렀지. 사람 몸속에서도 기생한다고 하더군."
노인은 성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놈이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고 많은 전적에 나와 있지. 뭐라고 말해도 다 따라 한다더군. 이른바 '응성충'이라는 게 바로 그런 뜻일세."
"맙소사. 무슨 괴물이 그렇죠? <요재지이 聊齋志異>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 같네요."

 

- "보아하니 자네는 책깨나 읽는 사람 같군." 
노인이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 벌레를 본 적이 있나?"

 

- 나는 휴대전화의 검색 화면에서 책물고기에 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 조그만 벌레는 어쨌든 기생충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책물고기가 '신선'이라는 두 글자를 세 번 먹기만 하면 '맥망'이라는 것으로 변하며, 별이 뜬 밤에 그 맥망으로 별의 사신을 불러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맥망'에서 '응성충'에 이르는 책물고기의 지난 변화에 대해 나는 그것이 확실히 문화적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일찍이 문자가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매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지나치게 긴 역사가 문자의 신비성을 크게 저하시키고 너무 많은 문자의 의미가 우리 삶의 의미를 은폐했다. 우리 개개인이 다 역사의 기생충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 은유는 당연히 성립 가능하지만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뭔가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열정이 사라졌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다. 나는 책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키운 뒤, 그것들을 맥망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위해 책물고기처럼 기생적인 존재로 변하는 것을 무릅쓰고 매일 책 속을 마음껏 누비고 다녀야겠다.

- 미래의 어느 날, 내가 신선이 되더라도 여러분은 놀랄 필요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설은 삼인칭으로 쓰이지만 진정한 현실은 단지 일인칭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은, 모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현실이다.

 

- <책물고기>

 

-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는 또 말했다. 
"네 이름은 저분의 이름을 따서 지었어. 노력해서 네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올리고서야 아버지가 그런 사소한 것들을 통해 그 자신을 위해, 또 나를 위해 뭔가 믿을 만한 것들을 찾았고, 또 보이지 않는 생명의 깊은 곳에서 그것들을 겹치고, 섞고, 쌓았음을 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스스로 만든 은밀한 닻이었으며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작은 배를 광저우의 거대한 항만에 더 단단히 고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의 닻은 갈수록 깊이 가라앉았고 거의 꼼짝할 수 없게 되어 끝내 스스로를 옭아매는 슬픔을 낳고 말았다. 

 

- 택시를 몬 뒤로 아버지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갈수록 광둥어가 유창해진 것이었다. 그의 말로는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눠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 이상했다. 세일즈맨 생활을 할 때 그는 무척이나 광둥어가 필요했는데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런데 택시를 몰 때는 광둥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데도 그것을 익힌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나이가 들어 그런 것일까? 한 번은 그가 어느 승객과 광둥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서 그 승객이 내린 뒤, 못 참고 그 문제에 관해 그에게 물었다. 그는 껄껄 웃고는 말했다. 
"이 바보야, 세일즈맨은 자기 말만 하잖아!"
이 말이 나를 환히 깨닫게 했다. 나는 그제야 진정한 말은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해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주고받는 마치 규칙이 느슨한 보드게임 같은 상호 호응임을 인식했다. 

 

- 어머니는 현지에서 나고 자란 진짜배기 광저우 사람인데도 아버지처럼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내 길을 걷기를 바랐고 내가 광저우를 떠나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 같은데도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져서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먼 곳에 보낼 수가 있느냐고, 가족이 어떻게 헤어질 수가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심지어 그녀가 너무 잔인하다고까지 말해서 어머니는 몇 번이나 화가 나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계속 내 편을 들어주었다.  
"네 아빠는 신경 쓰지 마라.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었나 보다. 나는 네가 더 높이,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이 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머니의 이 말에 감동해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의연히 채용 제의를 받아들여 베이징에 남아 일하게 됐다. 

 

- 트렁크를 끌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타지를 떠돈 지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우리 집을 똑바로 살펴보았는데 노인의 얼굴과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본 적도 없는 친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줄곧 나를 너그러이 받아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구쟁이였던 내 소년 시절을 고삐 풀린 망아지였던 내 청년 시절을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모든 결함까지 다 너그러이 받아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 줄 것 같았다. 나는 불현듯 이곳이 나의 뿌리임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말이 정말로 맞았다. 여기가 나의 뿌리였다. 원래 그것이 아버지의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바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비로소 그런 느낌이 이렇게 실재한다는 것을. 지금 밟고 있는 보도블록처럼 실재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나는 하마터면 슬픔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 "글씨를 써서 붙여야겠다!"
나는 그가 "강제 철거에 반대한다" 같은 문구를 쓰려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플래카드는 전에도 이웃이 내건 적이 있었고 나중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런 일을 다시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다른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택한 마지막 발버둥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미간에는 환한 기쁨이 온통 어려 있었고 나도 그것에 전염되었다. 애초에 약자가 추구하는 것은 정신적인 차원의 상징적 승리인 것일까? 
 

 

- <아버지의 복수>

 

 

 

- "하지만 무척 외로운 분들 같아서 안됐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조금 혐오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그들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그리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벌써 머리가 다 세고 등이 굽어 일찌감치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 세상에 대해 아무 희망도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무슨 과분한 욕심 따위는 더더욱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이 점이 나는 가장 마음이 아팠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무감각하게 의무만 다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홍콩으로 숨어버린 그들에게 큰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허망한 도시의 꿈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왠지 모르게 나는 할머니에게 이 말들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말들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힌 채 벌써 거의 썩어 문드러져서 이미 다시는 햇빛을 못 보게 되었다. 

 

- "이미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이 세상에 약간의 흔적을 남기셨죠. 전해지지 않는 민요 같은 흔적을요. 하지만 저는 그런 흔적이 없었으면 해요. 그 얼마 안 되는 흔적만으로 수많은 삶의 이야기를 복원하기에 충분하거든요. 할머니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말이에요."  
말을 하고 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마치 마음속 깊이 파묻힌 가시덤불에서 다시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듯했다. 
"불쌍한 것 같으니. 네게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구나. 이야기는 남들한테 들려줄 땐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막상 그 이야기가 자기한테 일어나면 그리 재미있지만은 않지." 

 

- "맞아요. 어려서부터 많은 일을 겪어서 저는 줄곧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왜냐하면 저는 제 자신의 이야기를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남의 이야기는 생각 못하고 늘 자신의 이야기에만 빠져 있었죠. 진실하면서도 잔혹한 이야기에 말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포기하고 편집자라는 작가에게 봉사하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말을 하고 나니 나는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것은 내가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 꿈, 이미 옛날에 좌절하여 누렇게 색이 바랜 꿈이었다. 
"우리는 정말 같은 운명이로구나! 나도 작가의 꿈을 꾼 적이 있단다. 내가 겪은 고난들을 글로 쓰고 싶었지. 하지만 그 고난들은 모서리가 날카로운 바위 같아서 나는 내내 마음에 상처를입고 아파했단다. 그것들을 글로 쓰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마음이 아팠지. 글쓰기는 뭐와 같은 줄 아니? 꼭 숫돌과도 같아서 그 바위의 모서리를 갈아 더 날카롭게 할수록 나는 피가 나고 정말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 나중에 나는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말했지. 생각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고 말이야. 하지만 너는 알아둬야 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코 망각이 아니란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저 박물관의 유물처럼 유리장 안에 두고 건드리지 않는 것일 뿐이야." 

 

- "너는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거야. 나는 처음에는 국어교사로 중학생들에게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가르쳤단다. 그러다가 유전 때문인지 내가 언어 학습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혼자 영어를 배워 영문학 대학원을 마치고 대학의 영어 교수가 되었지. 몇 년 뒤에는 같은 유럽어족인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완벽하게 익혔고, 아마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독일어를 구사했기 때문인지 독일어를 가장 빨리 배웠지. 겨우 석 달 남짓, 백일 만에 배웠으니 대단하지? 그다음에는 마침내 히브리어도 배웠단다. 우리 유대인의 언어를 말이야. 중국어와 히브리어는 가장 심오하고 오래된 언어라고들 하지. 그렇다면 분명 가장 많은 고난을 기록해온 언어일 거야." 

 

- "나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교사였어. 수업도 괜찮았지만 그 애들을 다그친 적이 없고 나처럼 연약한 인간으로 대했거든. 그래서 나와 그 애들은 거짓으로 꾸민 친구가 아니라 진정한 친구, 진실한 친구였지. 나는 수업 시간에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늘 어떤 충동을 느꼈단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그 애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지. 하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어. 그 애들이 뒤에서 '저 할머니는 정말 불쌍해!'라고 말할까 봐 두려웠거든. 나는 그런 동정은 필요 없었어. 정말로 필요 없었어. 그것은 내가 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번번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지. 그 침묵은 나를 뒤덮고 나를 가뒀어.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는데도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수십 년이 그렇게 흘러갔어. 정말 아주 오랜 세월이었지. 이제 나는 벌써 오래전에 이해를 바라지도, 이해를 바랄 것도 없게 됐단다. 아마 이것도 하느님의 뜻이겠지?" 
그녀의 반문은 너무 무거워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단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조금 피곤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쩌면 내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이야기에 필적할 만한 반응을 말이다. 나는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녀를 실망시킬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어를 많이 아시니 정말 언어학자라고 해도 되겠네요."
나는 그렇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다. 예의상 한 말이면서도 실제로는 호기심이 컸다. 왜 그녀가 그렇게 많은 언어를 배웠는지 궁금했다. 단지 재능이 있고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 리가 없었다. 

 

- "너는 내가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나도 가끔은 내가 그런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풍파를 직접 겪지는 않았단다. 그 풍파는 역사에, 기억에 속해 있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기억들을 물려받았을 뿐이야. 그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 그 기억들은 천천히 내 것으로 변하고 점점 슬퍼지곤 하지. 너는 내 느낌을 알 것 같니?

 

- "이렇게 큰 금괴가 있었으면 나는 벼락부자가 됐겠네." 
할머니는 농담을 건넸다. 나도 크게 웃고 나서 두 손으로 그 황동판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 위에는 몇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 부족한 외국어 실력으로 추측건대 그것은 독일어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1938'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흠칫 놀랐다. 혹시 묘지명 같은 부장품인가? 
"이게 뭐죠?" 
나는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걸림돌'이란다."

(역자 주 : 독일의 예술가 귄터 뎀니히가 기획하여 1992년부터 20년간 유럽 각국에서 진행된 '걸림돌 Stolpersteine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 동성애자, 저항했던 시민들을 기리는 황동판 5만 3000여 개를 그들이 생전에 살았던 집 주변에 보도블록과 함께 박아 넣었다.) 

 

- "여기에는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이름과 생전의 기록이 새겨져 있단다. 나는 이걸 우리 집이 있던 곳에 가져다 놓으려고 해. 혹시 그곳이 지금은 길이 됐더라도 그 길 위에 박아 넣을 거야. 사실 이건 지면에서 일이 밀리미터밖에 튀어나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보통 사람들한테는 걸림돌이 되지 않겠지. 이것이 걸림돌이 될 사람은 인류에게 죄를 지은 자들, 그 죄에 무지한 자들 그리고 여전히 죄를 지으려는 자들이야!" 

 

- "고마워요, 쑤 할머니. 저도 '걸림돌'이 생겼어요. 그걸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놓을 거예요." 
"걸림돌은 마음속에 놓으면 안 돼. 거기에 자꾸 발이 걸려 넘어질 테니까." 
할머니가 말했다.
"놓으려면 이 세상에 놓으렴." 
"그럴게요. 꼭 그럴게요. 하지만 이 세상에 놓기 전에 정말 저부터 걸려 넘어지고 싶어요. 이 세상은 조금이라도 매끄럽지 못한 것을 못 참아서 너무 평평해져 버렸어요. 저도 너무 평평해져 버렸죠. 너무 많은 것에 의해 쉽게 매끄러워지고 말았어요."

 

- <걸림돌>


- 그 어루만진 느낌이 그에게 언젠가 루제의 수첩을 어루만지던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그 두 느낌은 모두 삶에 대한 애착과도 같았다.

 

- 루제에게서 수첩을 받고 서둘러 읽지 않았다. 마음속의 묵직한 감정을 쉽사리 풀어내고 싶지 않았다. 같은 방 친구들이 다 잠들고 나서야 그는 자기 침대로 올라가 스탠드를 켜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소녀의 그윽한 향기가 페이지 깊은 곳에서 풍겨 나왔다. 그는 살며시 수첩으로 얼굴을 덮고 그 향기를 마음껏 탐닉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진지하게 그녀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씨는 반듯반듯해서 전혀 빈틈이 없었고 작은 실수도 다 수정액을 칠해놓았다. 그는 그녀가 처음 그 글들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마음속으로 제삼자의 눈빛을 의식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대체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썼지, 자신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상상 속의 독자에게 속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글들의 독자가 결국 그 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다. 그는 그녀의 시구 몇 행과 수필의 일부가 꽤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심 작가의 꿈은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훌륭한 작가는 무엇보다 자신의 말하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키려 할 뿐, 독자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하물며 상상 속의 존재하지도 않는 독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 절망, 미움, 무기력함 그리고 부끄러움과 욕망까지 전부 합법적으로 은닉할 수 있는 의식이었다. 동시에 기묘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절절히 표현했다. 인생에서 이런 순간은 극히 드물다. 이런 순간은 시간과 운명의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는 그녀의 어깨를 안고서 나란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원래 그는 자신들이 벌써 침대 위를 뒹굴고 있을 줄 알았다. 많은 예술영화에서처럼 침대로 오면서 여기저기에 옷을 벗어던진 뒤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자 그는 속으로 우습기만 했다. 지난 세월의 농도로 인해 그와 루제의 감정은 일찌감치 발효되어 독하고 향기 짙은 술이 돼버렸다. 그렇다. 그는 줄곧 사람의 감정이 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감정은 짙은 향기로 유혹해오며 강하게 위를 자극하는 독한 기운이 가장 매혹적인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춘추시대 협객의 이야기였다. 다른 하나는 할아버지가 직접 겪으신 이야기였는데 아직까지 잊기 힘든 것들이 많다. 항일전쟁 이야기, 칭하이 성에서 적을 토벌하던 이야기, 우파 이야기 등이었는데 지금도 가끔씩 떠오르고 마치 내가 그 이야기들 속에 있는 듯하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과 관계가 깊다. 그때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이미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끝없이 풍부하며 언어로 보존해 다른 사람도 체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내게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내 삶의 경험에서 얻은 최초의 깨달음이었다. 
 
-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세계에서 살아가야 했다. 남들처럼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교육의 규칙에 적응하며 이 세상에 발붙일 곳을 마련하려 애썼다. 그 기나긴 세월 글쓰기는 내 꿈이 아니었다. 감히 그런 사치스러운 꿈을 갖기 어려웠다. 내 꿈은 그저 독서에 그쳤다. 현실밖에 머무른 채 아무것도 묻거나 관여할 필요 없는 그런 독서면 족했다. 그런데 그런 꿈도 마찬가지로 사치스러운 축에 속했다.  


-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 중산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인류학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석사 때 또 중문과로 방향을 전환해 박사를 마쳤다. 자신의 이런 독특한 학력에 대해 그는 2016년 잡지 10월과의 인터뷰에서 "물리학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과학이고 인류학은 인류문화의 모델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그것들을 통해 저는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썼으며, 또 겉만 화려한 표면을 꿰뚫고서 정신의 내핵이 존재하는 더 심오한 곳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 발언을 통해 우리는 그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사뭇 형이상학적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지금 저는 단순한 수사의 쾌락에서 일찌감치 멀어져 언어의 가능성과 사상의 가능성을 더 중시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눈부셔도 저는 여전히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언어의 힘과 기호의 힘은 인류의 어떤 심층적인 본질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글쓰기가 언어와 사상의 힘을 통해 '인류의 심층적인 본질'에 다다르려는 여정임을 분명히 했다. 

- 나는 일상의 지엽적인 사물과 얕은 감수성에 빠져 허덕이거나 상업주의 문학의 얄팍한 주문을 처리하느라 바쁜 오늘날의 젊은 중국 작가들 사이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야심을 가진 작가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그의 형이상학적 지향은 단지 사변적인 글쓰기로만 흐르지도 않았다.

 

-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 담긴 다섯 편의 중단편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이 동일한 스타일의 중복이나 교묘한 변주 없이 저마다 강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왕웨이롄은 "내 생각에 작가는 스타일을 창조하지 못한다. 정반대로 스타일이 작가를 창조하고 있다. 바꿔 말해 작가의 스타일은 그가 선택할 수 없는 예술적 운명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 스타일은 아마도 내가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피할수록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라고 답을 제공한다. 젊은 작가답게 그는 "스타일은 내가 표현하려는 내용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절대로 고정된 특정 스타일을 전유하며 그것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든 이 책을 읽고 나면 예외 없이 동감하게 될 것이다. 왕웨이렌의 작품세계는 현재도 끊임없이 증식 중이며 그 증식의 방향은 밖으로 무한히 열려 있다. 

- 이 책의 저자 후기에서 왕웨이렌은 "우리는 모두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고 말하면서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결코 이야기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높은 효율로 공장에서 찍어내듯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한다. 이 발언은 갖가지 서사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날의 문화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인터넷 뉴스의 저널리즘 서사, 웹툰과 웹소설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드라마 서사까지 우리는 그야말로 서사의 홍수에 휩쓸리며 살아가지만 그 서사들 대부분은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주문 생산되고 일회용으로 소비되어 사라져 버린다. 우리 삶 자체를 진실하게 이야기하여 마음과 영혼에 깊은 감동을 주는 '영원한 이야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희망과 불행을 전달하게 마련인데, 우리는 보통 그 희망과 불행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인 듯하다. 사실상 오늘날 서사의 공장에 대량 주문을 넣는 주체는 '빅 브라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이다. 

- 왕웨이롄은 '이야기 없는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그가 써내는 이야기는 정해진 일련 공정에 따라 찍혀 나오는 스낵형 이야기가 아니라 글쓰기 고유의 책무에 충실한 '영원한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우리의 많은 독자가, 나아가 언제나 글쓰기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는 우리 작가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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