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우만] 새를 만나는 시간

일루젼 2022. 8. 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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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우만
출판 : 웃는돌고래 
출간 : 2021.09.30 


색연필화를 연습하고 싶어 탐조 기록에 관한 책을 찾아보다 이 책을 만났다. 탐조는 새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딱히 새를 잡거나 연구한다기보다 정말 '보는' 자체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미처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인지, 혹은 새와 미술이 영감을 주고받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탐조인들은 새 그림을 무척 잘 그리는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이우만 씨는 화가가 본업이시지만, 새덕후 김어진 씨나 이치니치 잇슈 같은 다른 탐조인들도 새 그림을 썩 잘 그린다. 아무래도 미세한 차이로 나뉘는 암수와 종을 분별하기 위해 꼼꼼하게 관찰하다보니 특징을 보는 눈이 좋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화가이자 탐조를 즐기는 저자가 자신이 관찰해온 새들의 그림과 그와 관련한 단상을 엮어낸 책이다. 무엇보다 새의 특징을 잘 살려낸 구도와 자세, 여릿하면서도 선명한 색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감을 베이스로 하지 않으면 완전히 비슷한 느낌을 낼 수는 없겠지만, 꼭 따라 그려보고 싶은 작품들이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해당 새를 마주쳐보고 싶다는 게 속마음이지만, 나는 동네에서 슬몃거리며 새소리를 따라 고개만 휘휘 저어보는 정도라서 실제로 만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느끼는 것이 사람인데, 그 순간 그 장면을 마주하지 못한 내가 작가의 감흥과 생각에 대해 덧붙일 사족이 있을 리 없다. 그저 그랬구나 정도로, 나도 언젠가 이 새를 만나보고 싶다 정도로 시선을 그림으로 돌릴 뿐이다.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관찰하고 싶다면
 5분만 가만히 멈춰 보라고 권해 주고 싶다.

 

 

노랑턱멧새
울새
노랑할미새
흰눈썹황금새
동고비
쇠박새
노랑배진박새

 

 

- "선생님은 왜 하필 새를 관찰하고 그리시나요?"

이 질문은 강연 때 여러 번 받기도 했고 나 역시 가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난 왜 하필 새를 관찰하고 그리는가...' 처음 일로 접한 분야는 식물이었고 본격적인 세밀화로 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제안받은 분야는 민물고기였다. 그리고 처음 새에 관한 책 <창릉천에서 물총새를 만났어요>를 내기 전까지는 주로 포유동물을 세밀화로 그렸다. 새는 나 스스로 원해서 관찰하고 결과를 만들어 낸 대상이다. 그럼 나는 왜 새를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가. 우선 새를 관찰 대상으로 삼은 가장 큰 이유는 새들이 야생에서 실제로 관찰하기 쉽기 때문이다. 

 

- 새들을 관찰하는 일은 그 자체로 많은 즐거움을 준다. 그들은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종에 따른 독특한 모습과 행동은 끊임없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해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새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얻은 까닭일 것이다. 내가 새를 관찰하고 그들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이유도 그런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 11월 말, 쌀쌀한 날씨에 먹이를 찾던 박새가 아까시나무 가지에서 벌레집을 발견했나 보다. 한 입 먹고 부리 한 번 닦고 만찬을 즐기고 있는데 지나던 쇠박새가 그걸 봤다. 박새가 뭘 그리 맛있게 먹나 주위를 얼쩡거려 보지만, 박새는 쇠박새에게 나눠 줄 생각이 없다. 몇 번 부리를 들이밀다가 박새에게 쫓겨난 쇠박새가 꾀를 냈다. 조금 떨어진 다른 나뭇가지로 날아간 쇠박새는 뭔가 맛있는 걸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호기심 많은 박새는 쉽게 걸려들었다. 박새가 쇠박새 쪽으로 날아오자, 그 틈에 쇠박새는 얼른 박새가 있던 나뭇가지로 날아가 붙어 있는 벌레 알집을 한 입 맛봤다. 속은 걸 알아채고 다시 돌아온 박새에게 금세 쫓겨나기는 했지만, 맛이라도 봤으니 그게 어딘가. 

- 새 이름 앞에 '쇠'라는 단어가 붙으면 그 종류 중에서 크기가 작은 편이라는 뜻이다. 별로 크지 않은 박새도 쇠박새와 같이 있으면 덩치가 꽤 커 보인다. 뇌가 그렇듯 꾀도 꼭 덩치에 비례하는 건 아닌가 보다. 쇠박새는 그 작은 머릿속 어디에 그런 꾀를 내는 주머니가 있을까? 꾀 많은 쇠박새 덕에 한참 웃었다.

 

- 쇠딱다구리는 우리나라에서 관찰되는 딱다구리 중 가장 크기가 작다. 크기가 작을 뿐 아니라 어두운 갈색의 수수한 깃 색 때문에 딱다구리들 중 가장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다른 딱다구리들처럼 암수가 쉽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분주하게 오르며 나무 틈에서 먹이를 찾던 쇠딱다구리가 잠깐 멈춰서 주위를 살필 때가 있다. 그때 길게 드리운 빛이 쇠딱다구리의 얼굴에 닿으면 운 좋게 쇠딱다구리가 감추고 있던 두 가지가 드러나기도 한다. 바로 늦가을 잘 익은 대춧빛을 띈 홍채와 수컷임을 나타내는 빨간 깃이다. 

- 쇠딱다구리 수컷은 평소에 다른 딱다구리들처럼 빨간 깃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을 뿐 없는 건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 머리 옆쪽에 적은 양의 붉은 깃을 감추고 있다. 그러다 바람이 휙 불거나 해서 머리 깃이 헝클어질 때 비로소 보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다가 어떤 조건이 맞을 때 잠깐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자주 바라보지 않으면 좀처럼 알아채기 힘들다. 하지만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 '황금새'라는 거창한 이름의 새가 있다. 그 새의 영명은 나르키소스 플라이캐처 Narcissus Flycatcher다. 나르키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출중한 외모 때문에 그 누구의 사랑도 거부하다가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져 결국 죽음에 이른다. 자기애를 이르는 대표적인 단어인 나르시시즘 narcissism의 어원이기도 하다. 새 이름으로 너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황금새의 실제 모습을 보면 의외로 쉽게 납득하게 된다. 멱부터 배까지 이어지는 진한 노란색 깃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까만 몸 색은 그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황금새도 나르키소스처럼 물에 비친 아름다운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 황금새는 봄철 이동 시기에 섬에서 주로 관찰되는데 아쉽게도 아직 뒷산에서 만나지 못했다. 대신 뒷산에선 봄마다 이름도 외모도 비슷한 흰눈썹황금새를 만날 수 있다. 크기도 생김도 비슷한 둘의 차이는 눈썹이 노란색이냐 흰색이냐 멱의 노란색이 진하냐 옅으냐 정도다. 황금새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없는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다. 뒷산에서 번식할 때 좀처럼 보이지 않다가 늦여름 열매가 익은 층층나무 아래서 기다리면 모습을 볼 수 있다. 흰눈썹황금새의 영명은 옐로우 럼프드 플라이캐처 Yellow-rumped Flycatcher다. 

 

- 보통 새가 내는 소리를 새 울음소리라고 표현한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새들에게 주는 피해가 많은데 소리까지 '운다'고 하니 왠지 내가 울린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그래서 난 주로 그냥 새소리라고 표현한다. 학술적으로는 새들이 내는 소리 중 봄에 주로 부르는 가락이 있는 노래 같은 소리를 송 song, 그 밖에 다른 소리를 콜 call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천적이 나타난 것을 알리는 경계음을 알람 콜 alarm call,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어미를 부르는 소리를 베깅 콜 begging Call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노랑턱멧새의 콜 call은 매우 단순하다. 못마땅한 듯 "쯧 쯧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면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겨울 숲에서 뜬금없이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바로 봄을 위해 연습하는 노랑턱멧새의 노랫소리다. 봄이 되면 수컷들은 암컷들에게 구애하기 위해 아름다운 가락이 있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크고 레퍼토리가 다양할수록 암컷에게 선택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 어떤 날은 이 산에 이렇게 새가 없었나 싶게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모습도 보여 주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애써 뭔가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가만히 멈추는 것이다. 소리도 내지 않고 행동은 물론 생각까지 다 멈추고 가만히 있다 보면 자연은 곧 무언가 실마리를 내게 건네준다. 그것은 작은 소리일 수도, 미세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 그 실마리를 잡고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하면 또 다른 생명들이 소리나 모습을 보여 주며 나를 숲 여기저기로 이끈다. 그렇게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숲이 들려준 재미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 새들의 상태나 감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오랜 경험이 아니라 그저 약간의 조심성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면 가능하다. 새들은 대부분 생물학적으로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시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새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먼저 발견한다. 

- 그러면 왜 새들은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가지 않을까?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건 효율성의 문제다. 새들이 날기 위해선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멀리서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날아오른다면 소모되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탈진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저만치 나타난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판단하는 건 새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여차하면 날아갈 준비를 하지만 굳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그냥 먹이 활동을 하는 것이 훨씬 이익인 것이다.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어부나 무논에서 일하는 농부 옆에서 태연하게 먹이를 찾는 새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새들이 위협을 느낄 때 달아날 수 있도록 확보한 거리를 '임계 거리'라고 한다. 

- 임계 거리는 새들마다 다른데, 보통은 크기가 클수록 임계 거리가 멀다. 먹이를 먹거나 쉬던 새들이 고개를 바짝 들고 경계한다면 그게 바로 임계 거리를 알리는 경고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더 다가가면 새들은 거의 대부분 달아난다. 사람들 사이에도 임계 거리가 있다. 새들에게나 사람들에게나 임계 거리는 지키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다.

 

-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맛있는 한 종류의 나무로 모든 새들이 다 몰려드는 게 아니라 각자 주로 먹는 열매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매에 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자리공 열매는 멧비둘기들이 가장 좋아해 '피전 베리 pigeon berry'라고 불리기도 한다. 딱새나 물까치나 직박구리들도 먹긴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멧비둘기다. 곤줄박이는 때죽나무 열매를 좋아하는데 단단한 껍질에 독성이 있어서인지 다른 새들이 먹는 장면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집과 가까운 산에는 쪽동백 군락지가 있는데 때죽나무 열매와 비슷하게 생긴 쪽동백 열매도 주로 곤줄박이 차지다. 그렇게 다른 새들이 잘 먹지 않는 열매들을 먹으면 그만큼 경쟁을 피할 수 있으니 생존에 유리할 것이다. 
 
- 새를 자주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작업실을 얻었다. 봄이면 먼 섬까지 가서 새들을 만난다. 새를 그리고 새에 관한 책까지 만든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내게 "새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뭔가 오해받을 행동을 한 사람처럼 살짝 움츠러든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의식적으로 '새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적어도 내 기억으론 일부러 그런 표현을 한 적은 없다. 다만 '사랑스럽다'는 표현은 자주 한다. 그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그 대상을 위해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새들을 만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잠을 조금 줄인다거나 먼 거리로 이동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정도다. 또 감수해야 하는 불편이란 여름 숲 속에서 모기에 시달리거나 추운 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을 견디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새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일이다. 오히려 나는 새를 관찰하며 재미를 느끼고 많은 것을 배우고 그들을 소재로 책을 만들고 강연을 해서 돈까지 벌고 있다. 

- '꽤 좋아한다.'
새에 대한 내 감정은 그 정도가 딱 적당한 표현이다. 함부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새를 만나기 위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다 새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기도 힘들 것 같다. 새들을 존중해야 할 생명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잇감이나 자신을 돋보이게 해 주는 피사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트로피 헌터가 유사한 경우다. 그들은 희귀한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만 동물들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 동물을 사냥하고 그 곁에서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일이다.

 

- 난 언제쯤 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 의미를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난 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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