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은희경] 중국식 룰렛

일루젼 2022. 9. 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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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은희경
출판 : 창비 
출간 : 2016.06.30 


       

<새의 선물> 이후 10여 년 만에 만난 은희경이다. 그리고 긴 시간을 잊고 지냈던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한 문장마다 눈을 뗄 수 없게 끌어당기고 후려쳐댔다. 

 

개인사를 많이 겹쳐 읽게 되었다. 40여 년이 가까워오는 시간 동안 나는 대체 뭘 하며 보내왔나 싶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겪고 느껴왔었다. '그녀는 자신이 서울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까페가 안국역 쪽에 있다면서 장소까지 스스로 정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를 검색해보니 까페가 아니라 독일 생맥주를 파는 술집이었고, 레지던스 호텔 1층에 있었다.'라는 두 문장을 읽자마자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 붉은빛의 간판. 이름은 조금 시간을 들여 다시 확인해야 했지만, 나는 확실히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본문 중에 단 한 번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고 가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14년이었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가능하면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쪽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굳이 기억에 남는다면 좋은 기억이었으면 한다. 그러나 불현듯 떠오르는 부끄러운 기억들 앞에 나는 무너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을까 저어되어서.

 

어린 시절 만났던 누군가들에게 배운 것들이 이제는 누가 봐도 나의 것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착각할 일과 후회할 일은 생기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배워둬야 같은 일을 겪지 않으리라 다독이며 흘려보낸다. 좀 더 제대로 쏴 붙이지 못한 순간들에,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언성을 높이기가 귀찮아 오해를 바로 잡지 않고 내버려 둔 일들에 뒤늦은 화가 치밀 때가 있다. 내가 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억울할 때. 그럴 때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떠올려 보면, 내가 그 반대 입장이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뒤늦게 찾아오는 부끄러움도 있다.

 

미리 짚어두자면, 이번 리뷰는 언제나보다도 더 개인적일 것 같다.

읽히려고 공개한 글들이지만, 제멋대로 읽히길 바라고 쓰는 글은 아님이 전해지길. 

 

 


<중국식 룰렛>

 

위스키 사랑을 외쳐온 것도 꽤 오래되었지만, 최근 유행이라고 하니 또 마음이 시들해진다. 남들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싶으면 나 하나쯤은 빠져도 될 것 같아진다. 이대로 그만 두기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조금은 피하고 싶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반복되는 '년산'. 위스키는 숙성 햇수를 표기하는 것이므로 '년'이 맞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 

 

네 명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성별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은 인물은 K다. 그리고 그와 화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화려하게 휘몰아치는 위스키의 향기 속에서 팽팽한 음을 연주한다. 그 역시 '차이니스 룰렛'에서 활동했으니만큼 남성일 확률이 높겠지만, 두 개의 아이디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든다. 어딘가 창백한 안색과 미소년 같은 얼굴, 금욕적인 로만 카라를 연상시키는 검은 니트는 묘하게 중성적이다. 

 

K의 발병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화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들이 플라토닉함을 암시하는 것일까, 전해지지는 않을 병임을 암시하는 것일까. 모호하게 남겨진 부분들이 더 흥미로운 단편이다.  

 

 

<장미의 왕자>

 

이 소설의 화자는 모두 몇 명일까. 두 명이라기엔 어긋나는 부분이 많고, 세 명이라기엔 겹치는 부분이 많다. 셋 또는 넷의 제각기 다른 시점들은 '검은 몽블랑 수첩'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이어지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그'는 개인적인 이상형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깔끔하고 단정한 수트에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장미로부터 일정 거리 안에 존재할 때만 세상의 모든 축복을 받은 것 같은 미모를 유지할 수 있는 왕자란,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거리감을 통해 완성되는 이상형과도 같다. 수트가 주는 '비일상적인' 느낌 또한 그렇다. 

 

 

<대용품>

 

나는 살면서 몇 명의 '진짜'를 만났다. 그 반짝임과 꼬인 곳 없는 순수함은 그 앞에 선 나를 비참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참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된다. 때때로 당황스러운 순간들에 나는 '미워하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웠던' 그들을 떠올린다. 그들 앞에서 움츠러들던 나를. 

 

은희경의 매력은 모두 드러내지 않는 폭로에 있다. 

'그중에 소년이 진정으로 원한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날 밤 자신이 소원했던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소년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날 소년이 소원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불연속선>

 

삶의 순간들은 '기억되는' 특정 순간들로 이어져있다. 시간은 선형으로 흐른다고들 생각하지만, 3초 전, 30초 전, 3시간 전을 정확하게 구분해가며 이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만 기억하는 편이 행복하지 않을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불쑥 찾아와 낯을 붉히게 만든다. 남들에게 말했을 때 잠시 침묵이 흐를 만한 일들은 의외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포크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는 얼어붙은 순간'은 오히려 쉽게 잊혀진다.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은 충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했던 순간들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면 안 되는 표본'이었던 때가 있었다.

'취향이랄 게 없는 좁은 경험의 세계' 뿐이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닥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때보다는 편안하다. 어떤 상태에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이제는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가장 아프게 남는 기억들은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해서 생긴다. 거짓으로 포장한 자신만큼 슬픈 상태는 없다. 가장 서글픈 것은,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상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 보일 때, 그 앞의 상대는 말을 잃는다. 

 

 

<별의 동굴>

 

책을 가까이하는 이들 특유의 단어 선택이나 문법이 있다. 나는 정확한 문장을 쓰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나 자신이 문장이 난삽하고 장황한 편이라, 은희경 작가처럼 유려하면서도 담백한 문장을 보면 강한 탐이 나는데, 반대로 볼 때마다 살짝 미간에 힘이 들어가게 되는 문장들도 존재한다. 선입견이라면 선입견인데 왜 이런 것들은 한 번 눈에 걸리면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은 그가 보여주지 않은 모든 것에서 드러난다. 착각은 그가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덧씌운 것이다. 각자는 상대에게서 자신을 보게 마련이므로. 인간은 모두가 어느 정도 나르시즘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이유로 상대에게서 발견한 단점 또한 자신임을 인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감싸는 포장은 달콤하다. 신포도란 내 손이 닿지 않기에 신 것이다. 

어느 정도의 관대함은 삶의 유지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그것이 눈치 채이는 순간의 부끄러움은 과연 누구의 몫으로 남을지.

 

 

 

<정화된 밤>

 

'잰 체'하는, '허영으로 가득 찬'. 

한국에서는 특히 상류층에 대한 시각이 이런 방향성을 띠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혁명을 통해 체제를 바꾼 나라들에서도 명문가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근근이 나마 명맥이 남아있는데, 유독 졸부 근성만이 강하게 묘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롤모델의 부재를 이유로 꼽기에는 최부자 댁도 있고, 최근 기부와 선행을 베푸는 영앤리치들도 꽤 등장했는데. 

 

긴 강점기로 인한 상류층 자체의 몰살이 한 이유가 아닐까. 대의 앞에 몰락해간 이들을 너무 가까이에서, 많이 보아온 세대들만이 남았기 때문에. 이상적인 것을 보았을 때 자신 역시 그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사실은 저건 다 그런 척일 것이라고 끌어내리는 것이 손쉽기 때문에. 

 

이 단편에서 강조되는 젬마의 어리숙함은 그 자신에게는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 안에는 그것을 조롱할 만한 가식이 없기 때문이다. 행위와 결과에 대한 평가는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할 때 유의미하다. 타인의 평가란 그가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점수표일 뿐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한가.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다.  

 

 


   

 

 

 

 

- K의 술집에서는 세 종류의 위스키만을 팔았다. 씽글몰트로만. 다른 술은 없었다. 주문하는 방식도 여느 술집처럼 메뉴를 보고 고르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K는 황금색 액체가 반쯤 들어 있는 작은 유리잔 세 개를 날라왔다. 세 가지 술을 직접 한 모금씩 마셔본 뒤 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잔에 든 술이 12년 산 스탠더드급이고 어떤 잔의 것이 21년 산 스페셜 에디션인지 상표와 숙성연도는 말해주지 않았다. 주문을 받으면 K는 쎌러가 있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병의 라벨을 볼 수 없도록 잔술로 따라 써빙했다. 술의 정체는 끝까지 불문에 부쳐졌다. 눈가리개를 벗은 뒤에 상표를 확인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상표가 무엇이 됐든 제 입맛대로 즐기면 그만이라는 게 그 집의 술 해석법이었다. 

- 세 종류의 술값이 모두 같다는 것 또한 짓궂은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술맛에 대해 안다면 좋은 술을 싼값에 즐길 수 있지만 아니라면 자신의 행운을 시험하는 비용을 술값에 포함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 선택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K의 술집 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몰트 위스키만 해도 60종이나 되었고 쎌러에는 더 많은 술병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세 종류를 골라 매일 다른 조합으로 내놓기 때문에 단골손님이라 해도 술의 정체를 알아내기란 녹록지 않았다. 결국에는 같은 돈을 내고 누군가는 싸게, 누군가는 비싸게 마시도록 돼 있었다. 사소한 수준이긴 하지만 K의 술집에서는 매일 밤 행운과 불행이 발생하는 셈이었다. 무슨 속셈인지 이따금 K는 값비싼 30년 산이나 수집품 수준의 빈티지 위스키를 섞어 내놓음으로써 그날 밤 행운과 불행의 격차를 크게 벌려놓기도 했다. 나는 그처럼 일방적인 데다 가격에서 결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술집이 문을 닫지 않는다는 게 정말로 이상했다. 

 

- 이 정도로 운 나쁜 상황이라면 K가 내놓은 세 개의 술잔 중에서 보나 마나 가장 싸구려 술이 든 잔을 선택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보며 K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랜만에 K를 만날 일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K와 나에게는 불편한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집착의 다음 순서가 복수가 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그리고 말 그대로 위스키가 '영혼'(spirit)이라고 불린다면 씽글몰트야말로 그중에서도 가장 정제된 형태이며, 순수한 영혼은 천사뿐 아니라 악마의 것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나와 K는 첫눈에 같은 편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 K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갈색 머리와 오른쪽 귓불의 작은 귀고리, 호리호리한 몸매. 검은 스웨터 속에 받쳐 입은 차이나 셔츠의 하얀 깃이 가톨릭 사제의 로만 칼라처럼 보였다. 그것은 미소년 같은 그의 얼굴과 대비되어 어쩐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 비해 안색은 훨씬 나빴다. 

 

-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청년은, 근데 아버지도 마셔봐서 아는 거지 안 마셔본 술을 무슨 수로 맞혀,라고 중얼거린 뒤 갑자기 낄낄 웃었다. K가 말없이 술병을 들어 아르마니 청년의 잔을 채웠다. 병의 라벨을 본 청년은 지그시 눈을 감고 향을 맡은 뒤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또 논평을 늘어놓았다. 
"이 맥캘란은 부드럽긴 한데 파워가 약해요. 장미와 시나몬 향도 좀 식상하고, 셰리 오크통만 고집해서 그런 걸까요? 저 같으면 맥캘란보다 차라리 발베니를 택하겠어요. 그건 '더블우드'라고 버번과 셰리 오크통에서 번갈아가며 숙성시키거든요. 앗, 잠깐만요!" 
아르마니 청년이 급히 한 손으로 검은 테 중년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술이라도 쏟은 줄 알았지만 다음 순간 아르마니 청년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친절하게 술잔 쥐는 손 모양을 교정해주었다. 
"브랜디라면 잔을 손으로 감싸 쥐어야겠지만 위스키니까 이렇게 스니프터의 굽을 잡으셔야죠. 그리고 주둥이에 입을 댔을 때 아랫입술이 유리에 착 밀착돼야 해요. 향기를 입안에 가두는 느낌으로요. 그런 다음 술이 식도를 따라 내려갈 때 숨을 자연스럽게 뱉어보세요. 그때가 하이라이트인데, 향이 코끝까지 올라오는 기분을 느껴봐야죠. 삼키고 나서 위장 속으로 떨어지는 뒷맛, 그것도 빼놓으면 서운하고요. 이런 위스키를 스니프터에 마시지 않고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서 단숨에 마셔버리는 건 한마디로 씽글몰트에 대한 결례예요."

(리뷰자 주 : 여기서 말하는 스트레이트는 주문할 때 말하는 스트레이트와는 조금 의미가 달라진다. 후자가 '물을 타지 않고 원액 그대로'의 의미라면, 전자는 잔의 형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니트로 주문했다고 샷 잔에 내어주는 바가 존재할까?)

 

-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처음에는 와인 소비가 늘지만 그다음 단계는 씽글몰트 위스키죠. 위스키는 이렇게 물과 함께 마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물이 섞이면 위스키가 숨을 쉬기 시작해서 향이 더욱 살아나거든요. 온더록스로 마시면 처음에는 시원할지 몰라도 얼음이 녹은 다음에는 향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요."

(리뷰자 주 : '미즈와리'라고도 하는데, 대부분의 바에서는 물을 한 두 방울 떨어트려 향을 더 강하게 느끼는 정도로만 권하기 때문에 일본식 소주를 마실 때처럼 희석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럴 거라면 온더락으로 마시는 게... 나는 실온 원액이 가장 좋다.)

 

-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야누스'와 자신의 좋은 점만 보여주고 나쁜 점은 숨기려는 태도를 뜻하는 '융의 가면' 모두 그 동호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동호회 '차이니스 룰렛'은 명함을 교환하고 고향과 출신 학교와 사는 동네를 물으면서 인사를 시작하는 여느 동호회와는 분명 달랐다. 신원을 확실히 밝힐 필요도 없었고, 기존 회원 세명의 추천으로만 신입을 받을 만큼 배타적이었다. 회원은 모두 남자였다. 위스키와 룰렛 게임과 차이니스 룰렛을 즐기는 단순한 친목모임이지만 이너서클과 비슷한 비밀스러운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손에 든 술병을 돌려 라벨을 힐끗 본 뒤 K가 아르마니 청년에게 말했다.
"발베니 병에 들었지만 이 술은 발베니가 아녜요. 손님은 위스키를 별로 마셔보지 않은 분이네요." 

웬일인지 K의 말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건 누구보다 손님 자신이 잘 알겠죠. 말씀하신 대로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 여기 있는 분들이 손님보다는 전문가라는 것도요. 그걸 알면서도 왜 자꾸 위스키 이야기를 꺼내는 거죠?"
"그야 술맛에 대한 호기심이죠. 그것 말고 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데요?"
"술맛을 알려면 많이 마시는 방법밖에 없어요. 정보 수집이 아니구요. 손님은 오늘 밤 세 시간 동안 딱 두 잔을 주문했어요. 술에는 관심이 없고, 쉴 새 없이 벽에 진열된 술병의 라벨을 읽고 손님들을 살피고 주방 쪽을 훔쳐보더군요." 
"취해버리면 술맛을 음미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리고 제가 운이 별로 없는 놈이라고 말 안 했던가요? 저는 값비싼 씽글몰트를 마음껏 시킬 만큼 부자가 아녜요.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회사원이라고요. 블로그에서 이런 특이한 술집이 있다는 글을 보고 구경 온 것뿐이에요." 
두 손가락을 마주 비비는 것으로 모자라 아르마니 청년은 아예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풀었다 반복했다. 말까지 약간 더듬었다.
"거짓말 같은데요."

 

- "위스키는 숙성시키는 동안 매년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정도가 증발하죠.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불러요. 숙성창고에 들어가면 술향기가 코를 찌르는데, 그걸 들이마시면 어떤 사람은 취할 정도래요." 
"숙성기간이 길어질수록 천사들이 위스키를 많이 마시는 거죠. 결국 오크통에 들어 있는 동안은 위스키의 주인이 바로 그 천사들인 셈이니까요."
K의 차고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리뷰자 주 : 엔젤스 쉐어.)

 

- 창백한 낯빛 때문인지 K의 검은 스웨터를 받치고 있는 차이나 셔츠의 깃이 유난히 희고 단정해 보였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한쪽 눈을 가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야누스'와 '융의 가면'은 둘 다 K의 아이디였다. K는 아버지의 막강한 재력 덕분에 풍요로운 청춘을 보냈다. 거기까지라면 아르마니 청년이 맞게 본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가족은 깨어져버렸고 남은 건 빚뿐이었다. 그 재앙의 도미노에서 마지막 패가 K의 발병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유산이라고는 K의 몸에 밴 고급 취향뿐이었다. 더 있다면 아버지가 수집하던 씽글몰트 위스키 정도라고 할까. 아르마니 청년이 안다면 분노할지 안도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수집품 중에 청년이 오늘 밤 내내 행방만이라도 알아내려고 애를 태웠던 맥캘란 55년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 "새 술을 마시면서는 게임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일종의 진실게임인데, 룰은 간단해요. 한 사람이 질문을 던지면 지적받은 사람이 거기에 대답을 하면 됩니다. 대답하고 나서 술을 한 잔 마시는 거죠. 단,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들통나면 곧바로 게임에서 빠져야 합니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하죠?" 
게임을 좋아하는지 아르마니 청년이 흥미를 보였다.
"대답을 못하면 술을 못 마셔요. 원래는 벌칙으로 술을 마시는 거지만 이 자리에는 술 마시는 걸 벌로 생각할 사람이 없을 테니 반대로 하는 겁니다. 일단 새 술을 가져온 뒤에, 경험 있는 사람끼리 먼저 시작해보겠습니다.

 

-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일 중 가장 힘든 건 무엇이었습니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예상한 대답이었다. K 역시 눈을 감고 술을 오랫동안 음미하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당신이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당신을 알게 된 것."
나는 되도록 단호하게 대꾸했고, 술을 마시고 나서 질문을 이어갔다.
"당신이 지금까지 해야 했던 일 중에 가장 힘든 게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내가 기대한 것은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일'이었지만 역시 K는 그렇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 K가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사람 모두 그날 밤의 파티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 취한 네 사람은 분명 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지 조금 운이 없을 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지 조금 불행한 것처럼, 그래서 단지 약간의 행운이 더 필요할 뿐인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불운의 총량은 어차피 수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K에게로 그늘을 드리우며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손님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천사의 몫도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 영혼이 씽글몰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중국식 룰렛>

 

 

- 내가 일하는 찻집에서는 손님들이 놓고 간 물건을 카운터 서랍에 보관해둔다. 그 여자 손님의 수첩도 거기 들어 있었다. 강추위가 닥쳐와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던 날, 주인아저씨도 일찍 들어가고 가게에는 나 혼자였다. 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서랍을 열었고 눈에 들어온 수첩을 별생각 없이 펼쳐 들었다. 작은 수첩이라 메모된 내용은 많지 않았다. 몇 장 넘겨보던 나의 시선은 한 문장에서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그것은 드물게도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귀였다. 
[알고 있는지. 나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진실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 불현듯 그렇게 오랫동안 분실물을 보관해둔 것은 예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가게를 지키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었고 또 남의 수첩을 들춰볼 만큼 내가 호기심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 수첩을 읽게 된 게 단순한 우연일까. 나에게 보내는 인생의 암시 같은 건 아닐까. 운명이란 비정하고 무자비하지만 늘 전령을 먼저 보내 경고를 할 만큼은 용의주도하다고 어릴 때부터 나는 종종 생각해왔다. 그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방심하는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집행해버린다. 

 

- 이제는 그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웃음소리만은 이따금 떠오른다. 그녀는 늘 여름 아침의 새처럼 명랑하고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깊고 뜨겁게 안고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그것은 뭔지 모르게 나에게 삶의 공허와 권태와 열락에 대한 찰나적 완성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텅 빈 완성, 삶으로부터 방출되는 버려진 자식의 쾌감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나의 내부에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허무를 향해 한없이 수렴해가는 단순함의 군무 같은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 번도 그녀에게 뭘 사주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뭔가 필요할 거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여자였다. 많은 걸 갖추고 있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가난했고 얼굴이 뛰어나게 예쁜 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자기를 돋보이게 해 줄 신념이나 꿈같은 게 없었다. 결핍에 대한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에게 완결의 특권을 부여했던 것일까. 나의 갈망이 그녀를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녀를 만나는 동안 나는 경제적 문제를 포함해서 그녀에게 어떤 도움도 충고도 주지 않았다. 미묘한 권력관계나 거기에서 파생되는 의존은 서로의 감정에 불필요한 자의식을 개입시킬 수 있다. 진위를 따지는 순간부터 나와 상대 모두를 지나친 의미 부여로 속박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진심은 대개 이유가 없고 단순한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기 한 표씩을 갖고 공정하게 서로에게 투표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오래 울었는지 그리고 왜 떠났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쁘다거나 부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생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강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이 운명에 의해 원격 조종되는 일종의 기계장치처럼 여겨졌는데 그녀가 떠난 이후 그 느낌이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 그 기억 때문일까. 수트를 입을 때에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 모든 게 제자리를 잡으면서 동시에 정해진 궤도 안에서 끊임없이 공전하는 느낌이다. 회사에서 나는 그다지 독창적이라거나 의욕적이지 않지만 그런대로 내 할 일을 해내는 편이다. 대체로 매뉴얼대로, 일반론에 따르기 때문에 큰 실수는 하지 않는다. 매뉴얼이란 복잡한 세부까지 익히고 나면 단순 적용만으로 제법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수트가 디테일을 갖추는 게 까다로울 뿐 그다음부터는 격식에 따르기만 하면 눈 밖에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커다란 조직의 부품 같은 건조한 업무방식은 내 성격에도 맞았다. 동료들은 나에게 '에프엠 김'이나 '루틴 김' 같은 별명을 붙였다. 퇴근 후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 걸 못마땅해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거기에 대해 별 불만은 없다. 남과 맞추는 일이 서툴기 때문에 개인적 성향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할 만큼 친절한 성격도 못되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내 삶의 동선을 만들고 그 안에서 내가 아는 방식대로 스스로 정한 만큼만 즐겼다. 

 

- 밤에 혼자 마시는 술이 점점 늘어간다. 하지만 아직 주방의 유리장 안에는 글렌리벳과 라프로익이 있다. 발베니 병에도 술이 좀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저 밤의 창에 조영된 대로 술잔을 든 채 슈트 차림으로 돌아와 있다. 그녀가 갑자기 떠나버렸다는 사실은 읽어버린 편지처럼 서랍 깊숙이에 넣고 닫았다. 부모가 내게 준 세계가 그랬듯 상실이란 더할 수 없는 단순함과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허무의 스케일을 갖고 있다. 그 안에 머무는 한 그 이상으로 안전한 삶은 없다. 

[왜 내게 향기를 맡게 했을까, 장미의 왕자. 내가 건네준 적 없는 나의 장미까지 가져가 버렸다.]

 

- 필요한 것은 많지만 원한다는 건 그것과는 다른 뜻이다. 그것은 욕망과도 다른 뜻일 것 같다. 내가 깨닫는 모든 것이 그렇듯 당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신을 원한 것도 욕망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발광 액체가 되어서 당신에게로 흘러가 스며들어 당신이 되는 느낌이었다. 

(리뷰자 주 : 스쳐간 이들에게서 배워 내 것이 된 취향들. 그것들의 집합체로서의 나.)  


- 당신은 언제나 수트를 입는다. 당신이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언제나 바람의 가벼운 기척과 희미한 향기가 함께 들어온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재킷 속의 공간에서 당신의 체온이 아주 조금 새어 나와 내가 있는 실내 공기에 섞이는 것이다. 나는 창가 자리로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본다. 알맞은 보폭에 맞춰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바지 주름의 조용한 물결, 걸음을 옮길 때 살짝 드러나는 구두 굽의 클래식한 안정감.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곤 한다. 옥스퍼드 구두와 날렵한 바짓단 사이로 당신의 발목이 살짝 드러날 때 나는 그것을 붙잡고 있는 양말 목의 촘촘한 고무 뜨기와 부드러운 탄력을 상상할 수 있다. 두 손을 깍지 끼듯 당신의 발등을 감싸고 있는 구두끈의 적당한 장력과 함께 말이다.

(리뷰자 주 : 기왕이면 윙팁이면 좋겠는데.)

- 내가 자리로 다가가면 당신은 나와 잠깐 눈을 맞춘다.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짧은 순간이 지나고,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리깐 내 눈길은 당신의 손을 보고 있다. 수트의 소매로부터 이어지는 당신의 손등과 손가락 관절과 손톱 반달의 섬세한 움직임. 그리고 당신이 잔을 들 때 근육을 따라 팽팽하게 당겨지는 팔꿈치의 긴장감. 그 모든 것에서 장미의 향기가 난다. 당신이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재킷의 단추는 가볍게 탁자 표면에 부딪히며 희미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찻잔이 탁자 위에 안전하게 놓였다기보다 당신이 나를 수트 어딘가에 있는 비밀 공간에 들여놓고 똑딱이 단추를 탁 하고 잠그는 신호처럼 들린다. 나는 잠시 쟁반을 들고 선 채로 당신의 목과 그것을 감싼 셔츠의 빳빳한 깃과 물방울 보석 같은 넥타이의 딤플에 눈길을 준다. 당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받침접시에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버릇이 있다. 그런 다음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눈썹을 문지르며 향을 음미하는 것이다. 카운터로 돌아온 뒤 나는 당신의 실루엣을 본다. 잡지를 뒤적이거나 전화 통화를 하거나 태블릿 PC로 간단한 작업을 하거나, 나는 그 시간이 길어지기만을 바랐다. 당신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넥타이는 벨트 근처에서 기분 좋게 흔들리고, 패딩으로 세워진 두 어깨는 당신의 주변을 균형 잡힌 공간으로 연출해내고, 그리고 당신의 등을 보면... 

(리뷰자 주 : 잘 다려진 셔츠가 주는 섹시함이 있다. 그걸 다리는 게 내가 아니라면야. 오르세와 배재란은 충분히 좋은 다른 원두를 마실 때도 가끔 생각나곤 한다. 나는 가늘고 긴 손가락, 전체적으로 얇은 우아한 손을 좋아한다.) 

 

- <장미의 왕자>

 

 

- 한동안 소년은 팔에 깁스를 하고 학교에 다녔다. 복사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깁스를 풀어 팔이 자유로워진 뒤에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죽은 친구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정밀 지능검사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테스트는 일 년에 한 번 실시되었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신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의 오랜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다. 머리 좋은 소년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말에는 꿈쩍 않던 큰아버지도 죽음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자 아버지에게 장사 밑천을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 밤이 떠올랐다. 친구의 그림자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 소년은 혼자 담장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별이 유난히 많았고 마치 물줄기를 이루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소년이 기도를 했던가. 그 밤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그중에 소년이 진정으로 원한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날 밤 자신이 소원했던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소년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 혼란은 슬픔보다는 고독의 얼굴로 다가왔다. 

 

-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자마자 그는 월세 오피스텔을 구해 집에서 독립했다. 자동이체로 매달 부모에게 용돈을 보내는 것은 거르지 않았지만 집에는 한두 달에 한번 들르는 정도로 발길이 뜸했다. 주말이면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장을 봐서 조촐하나마 손수 요리를 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거나 샤워를 마친 뒤 다림질한 셔츠를 입고 심야영화를 보러 나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야구 중계를 보고 헤비메탈 음악을 들었으며 차가운 맥주를 마시다가 벌떡 일어나 혼자 춤을 추는 일도 있었다. 늦은 밤 차를 몰아 강바람을 쐬러 가는 것과 포장마차 구석 자리에 앉아 국수를 먹는 것도 하나의 취미였다. 

- 물건만은 자주 바꾸는 편이었다. 쉽게 버리고 금방 다른 걸 새로 샀다. 새것을 좋아한다기보다 오래 곁에 두고 아끼는 물건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했다. 조직에 잘 적응하고 동료들과도 사이가 좋았지만 특별히 친하거나 오래 만나는 사람은 없었다. 매뉴얼대로 사는 사람이 갖기 마련인 정돈됨 때문에 어딘가 규격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규칙성과 건조함에 싱거운 유머감각이 보태지면 유능하고 담백한 성격으로 비쳤고 그 결과 곧잘 여자들의 호감을 사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자 친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 기둥 뒤에서 나온 그녀는 복도 끝의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J 역시 그녀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J가 자신을 바로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다가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머니가 잘 차려입고 나오라고 당부를 했지만 옷이 마땅찮아 그냥 청바지에 코트를 걸치고 나온 참이었다. 봄에 입기에는 두꺼운 모직 코트에 미용실에 다녀온 지 오래되어 부스스한 머리를 고무밴드로 묶고 모서리의 가죽이 닳은 숄더백을 멘 모습이었다. J도 결혼식 하객의 차림새는 아니었다. 밝은 색 진 바지 위에 면 재킷을 받쳐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는 세련된 취향과 여유가 풍겨났고 무채색의 정장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오히려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리뷰자 주 : 이런 스타일이 제대로 살려면 기성품보다는 사실 맞춤으로 입는 게 좋다. 테일러브로 같은 곳에서 약간 캐주얼하게 맞춰 오래 입는 게...)
 

- 나는 자신의 말투가 뜻밖에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넌? 나도 엄마 만나러 그녀는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실은 김치 받으러 왔어. 김치를 못 담가서 엄마한테 얻어먹어. ]의 눈길이 한쪽 뺨에만 팬 그녀의 볼우물에 가닿았다. 어색한 동작으로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참, 나 결혼했어. 그래? 응, 넌 안 했지? 그래 보이는데. 응, 안 했어. 근데 너, 이따 나 태워줄 수 있어?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J는 잠시 멍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집에. 김치 냄새 때문에 버스 타기 좀 그랬는데, 네가 차 있다니까. 그래, 타. 좀 먼데 괜찮아? 괜찮아. 너 운전 잘해? 잘해. 그럼 김치 갖고 올게 기다려.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고 J는 반사적으로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던 J는 그녀가 무리에 섞여버린 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어머니에게 급한 일이 생겨 기다리지 못하고 간다는 문자를 보낸 다음 전원을 껐다.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는 J를 굳이 식장까지 데려다 달라며 끌고 올라왔던 어머니는 실망과 더불어 아들의 냉정함에 비난을 퍼붓겠지만 상관없었다. 어머니를 집으로 데려갈 택시는 얼마든지 있었다. 

 

- J가 이름을 부르면 골목으로 난 창문을 열고 기다려라고 말하던 그때도 그녀의 억양은 야무지고 다정했다. 그때는 그들이 서로 먼 훗날 우연히 마주치는 사이가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일까. 그때의 소년과 소녀가 상상했던 미래에서 얼마나 벗어나 멀어져 버린 것일까.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대로 J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둣빛 새잎이 돋아난 가로수 가지가 흔들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기다란 띠 어딘가의 매듭 부분에서 한 소년의 그림자가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리뷰자 주 : 잊지 못할 기억들은 대개 여름과 가을에 몰려있는 것 같다.)

 
- 보자기에 싸인 플라스틱 통을 들고 다시 나타난 그녀를 옆자리에 태우고 J가 주차장을 나왔을 때는 짧은 봄날 해가 얼추 기운 시각이었다. 그녀가 사는 서울 외곽의 아파트 단지까지는 평일 낮에도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토요일이라서 정체가 심했다. 웨딩홀이 밀집한 강남을 빠져나오는 데에만도 꽤 시간이 걸렸고 강변북로에 진입한 뒤에도 체증이 풀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기, 한강 쪽으로 빠질 순 없어? J는 내비게이션에 눈길을 던지며 천천히 대답했다. 있어, 빠져? 응, 답답해서. J가 싸이드 미러를 확인하며 차선을 바꾸는 동안 그녀는 그의 옆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맥주 한 캔만 마시자. 꺾었던 운전대를 똑바로 되돌린 뒤 J가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너 술 잘 마셔? 잘 마셔. 넌? 별로. 그럴 줄 알았어. 왜? 원래 좀 착하잖아. 성당 복사로도 뽑히고, 그녀의 말에 J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강공원 진입로를 알리는 팻말이 나타나자 그녀는 어딘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J는 큰어머니가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목욕탕의 뿌연 간유리 출입문을 떠올렸다. 그 문을 밀고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도로 보내질 게 뻔했다. 목욕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돈 받을 준비를 했다가 공짜 손님인 걸 알고 실망하는 큰어머니 보기가 민망해서였다. 물론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은 읍내 부자였고 동생들과 우애도 좋았다. 큰어머니가 소년을 달가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수건을 건네주는 큰어머니의 표정이 명절이나 제삿날 만났을 때와 달리 쌀쌀맞게 느껴졌으므로 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탈의실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순진했다기보다 소심했고 또 고지식했다. 세상의 선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던 건지도 몰랐다. 어린 J의 생각에 어른이 되는 것은 욕망과 거짓을 잘 다루게 되는 일이었다. 자신으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 그녀는 캔맥주를 금방 비웠다. 새 캔을 따서 건네준 뒤 빈 깡통을 발아래 내려놓던 J의 시선이 무심히 그녀의 낡은 구두를 스쳤다. 그녀는 무릎을 오므려 두 발을 벤치 안으로 밀어 넣으며 멋쩍은 듯 말했다. 난 신발을 잘 못 버려. 옷은 안 그런데 신발은 쉽게 못 버리겠어. 왜? 몰라. 나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어서? 내 발 모양이 새겨져 있잖아. 웃지 마. 진짜야. 그녀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연기를 한 모금 내뱉었다. 여행 갈 때도 낡은 신발을 신어야 안심이 돼. 신발은 발하고 바닥이 닿는 접점이잖아. 난 그게 익숙해야만 낯선 곳을 밟을 수 있는 것 같아. 실내 슬리퍼도 꼭 챙겨 가. 숙소 도착하면 맨 먼저 슬리퍼부터 꺼내 신고 안으로 들어가거든. 낯선 바닥에 발이 직접 닿는 게 싫어서. J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그녀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충격 완충장치 같은 거지. 우린 안전하게 사는 법만 배웠잖아. 벗어나면 겁먹게 돼 있어. 넌 안 그래? 그녀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 그녀의 시선은 다시 강 쪽을 향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넌 어때? 뭐가? 삼십 대, 그녀는 J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릴 때는 삼십대면 굉장히 늙은 줄 알았어. 이렇게 모르는 게 많고 가진 게 없을 줄은 몰랐지. 내 인생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J는 허리를 곧게 펴고 먼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냥, 사람마다 다 정해진 자리가 있겠지. 우린 그 자리에 있는 거고. 누가 정했을까? 모르지. 그녀가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J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있잖아, 엄마가 아이큐를 안 속였다면 나도 그 버스에 탔을까? 그 버스? 응, 사고 난 버스. J는 캔맥주를 더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빈 캔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신경 쓰였다. 벤치에서 일어나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J의 옷깃 속으로 스미는 봄바람이 제법 싸늘했다. 

 

-  홑겹 봄 점퍼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싸늘했다. 밤하늘에 별이 유난히 많았다.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마치 강물처럼 별들이 줄기를 이루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흐름을 눈으로 따라가 보았다. 그렇게 어딘가로 떠나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내일 아침 서울 가는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있다면,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버릴 수 있다면. 물론 그런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내일이 그만큼 미뤄지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를 조금 오래 기다리게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 소년은 열세 살이 아니었다. 열네 살이었다. 어른들의 말대로 오뉴월 하룻볕에도 성장이 달라지는 시기였다. 열세 살용 문제지를 풀어서 받은 아이큐 146은 당연히 진실이 아닐 것이다. 병치레가 심해 곧 죽을지도 모른다며 소년의 출생신고를 일 년 늦게 한 장본인인 만큼 아버지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기는커녕 큰 이익이라도 봤다는 듯 만족하는 눈치였다. 걸핏하면 소년의 영특함을 자랑까지 하는 아버지가 비겁하고 뻔뻔스럽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아버지의 거짓과 부당한 욕망은 소년으로 하여금 과대평가된 그 누군가를 연기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원치 않는 비밀을 갖게 된 데 더해 그 비밀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소년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주변에서 칭찬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비밀의 벽이 한 겹씩 더 견고해지는 느낌이었다. 진실을 털어놓지 못한 채 그 벽 안쪽에 움츠려 있는 자신이 거짓과 공범이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복사 노릇을 하기 싫어진 데는 그 이유도 있었다. 머리 좋은 아이로 오해받는 걸 넘어서 착한 아이로까지 보이는 건 거짓의 동심원이 만들어낸 또 다른 거짓의 파문이었다. 

- 소년의 생각에 머리 좋고 착한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짝인 작은 소년이었다. 그는 진짜였다. 그는 한번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선생의 질문을 단번에 알아들었고 정답을 말한 뒤에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소년이 책을 읽어 알게 된 것을 그는 스스로 생각해서 유추해내곤 했다. 노력해서 10등 안에 드는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타고난 1등이었다. 유쾌하고 당당한 성품이었고 꺼림칙한 비밀 같은 것도 없었다. 소년은 그와 단짝이 됨으로써 자신이 쉽게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는 기만의 회로에 대해서도 깨치게 되었다. 자신은 밝은 조명 옆에 생겨나기 마련인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꼬마전구였다. 조명이 꺼졌을 때 대용품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밝히지는 못하는 존재였다.

 

- 어둠이 깔리면서 강 주변은 쌀쌀해졌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탓인지 분위기가 스산했다. 무릎 위에 벗어놓았던 코트를 걸치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몸이 약간 흔들렸었다. 난 말야, 어릴 때 나를 아는 사람은 만나기 싫어. 다들 어릴 때 모습하고 다르다고 하거든. 뭐가 될 줄 알았더니 겨우 이런 어른이 됐냐 그거지. 나도 알아. 그녀는 고개를 약간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난 어른도 못된 것 같아. 어른이라면 내 발자국이 찍힌 곳만 딛고 살 수 없다는 거 정도는 알아야지 안 그래? 넌 어른이 뭐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물음에 J는 대답 대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른이 되는 건 아버지처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거짓의 세계와 그 정도 거짓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어른의 세계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었다. 열네 살 소년이 당도한 곳은 더 이상 그때까지 학습해온 선명하고 체계적인 낮의 세계가 아니었다. 기도는 무력하거나 가식적이었고 진실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 <대용품>

 

 

- 그는 떠나기 전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계획적이고 단조롭게 시간을 보냈다. 원고와 사진을 정리해서 잡지사에 보냈고 일과 관련해서 가끔 전화통화를 하고 몇 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을지로에 있는 화공약품 가게에는 두 번이나 들렀지만 모두 다 허탕이었다.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에 구해주겠다던 시약은 일본이나 독일에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품목은 세관에 묶여있었다. KCN은 역시 못 구하나요? 그의 말에 가게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판매금지 품목이라니까요. 의사 면허 있어요?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KCN은 청산가리였다. 근데 사진 찍는다면서 청산가리가 왜 필요해요? 가게 주인의 물음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습식 촬영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휴대폰으로 찍어도 잘 나오는 사진을 왜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생돈을 들여가며 찍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다. 

 

- 같은 동네에 사는 대학 후배가 찾아와 저녁을 먹기도 했다. 후배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때려치우고 밥벌이에 나서겠다고 토로하며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친구들과 동업으로 치킨집을 열 생각인데 그에게도 투자를 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후배는 그가 단출한 삶을 그럭저럭 이어갈 만한 수입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절대로 돈이 되지 않는 습식 촬영에 거의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투자할 만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술값을 씌울 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런 날은 후배가 결혼식이나 돌잔치 출사를 다녀온 날이기 십상이었다.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과 달리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그만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술값 외에도 그를 만나러 오는 이유였다. 자신보다 더한 고집쟁이이자 멍청이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술을 잔뜩 얻어 마신 다음 한탄과 비판을 실컷 늘어놓고 나면 한동안은 다시 제 몫의 열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리뷰자 주 : 빈말. 그것은 그 안이 비어있음이 모두에게 읽히고 만다. 그 텅빔을 눈치채주었으면 하는 사람만 제외하고.) 

- 후배는 그가 하는 사진 작업의 모델을 시켜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피사체를 고정하고 필름 아닌 흑경 석판을 끼워 실물 크기로 찍는 그 작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진작가들이 종종 있었다. 석판은 즉석 현상되어 그 자체로 사진이 되며 결코 복제할 수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시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인물만 찍었다. 처음에는 의자에 앉힌 뒤 얼굴을 찍었지만 움직임 때문에 초점을 맞추기 어려워 눕혀놓고 찍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몇몇 가까운 사람들이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후배처럼 모델을 자청하는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그들이 그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얼굴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 그런 일 외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동네를 산책했고 식당에서 하루 한두 끼씩 혼자 밥을 먹었고 가끔은 싸구려 와인과 치즈로 저녁을 때우기도 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작업실 실내가 햇볕에 달궈질 대로 달궈지기 때문에 랩톱을 들고 까페에 나가곤 했다. 작은 가게가 많은 동네였지만 그는 굳이 큰 길가의 커피 체인점으로 갔다. 그곳 아르바이트 직원들은 매뉴얼대로만 행동했다. 자주 가는 곳이고 커피맛에 대한 기대 없이 늘 같은 것만 주문하는데도 그들은 매번 큰 소리로 싸이즈와 종류를 확인하고 일회용 컵인지 머그잔인지 묻고 설탕과 시럽과 냅킨은 싸이드 테이블에 마련돼 있다며 똑같은 문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곤 했다. 그는 익명의 존재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의 자유로움을 선호했다.  

 

- 모서리마다 긁힌 자국이 있고 고무바퀴도 심하게 닳아 있었다. 그 가방은 작년에 나온 신모델이었으므로 길게 잡아도 사용한 지 일 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보호비닐을 막 벗긴 것처럼 패브릭의 광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의 물건은 아니었다. 아마 물건을 험하게 쓰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거기 비하면 그의 가방은 훨씬 말끔하고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먼지를 떨고 가방을 열어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말렸으며 바퀴에는 기름을 칠해두곤 했다. 자신이라면 결코 두 개의 가방을 착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여자는 무질서하고 즉흥적이며 게으른 사람이 분명했다. 남의 가방을 가져가서 연락조차 없는 걸 보면 무책임하고 뻔뻔스럽고 무례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는 현관에 있던 가방을 들어서 작업실 안쪽으로 옮겨와 작업대 밑에 밀어 넣었다. 또다시 가방이 자전거에 부딪히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전거가 가방에 부딪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 그는 스스로를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서 작은 규모로 삶을 꾸려나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참을성과 조심성이 많고 자신이 속한 조건에 대체로 불만을 품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추고 또 인생의 나쁜 점을 피하는 법을 아는 온화한 성격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단지 겁이 많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만을 상대해왔으며 정체를 모르는 것을 집에 들여온 적이 없었다. 그가 발붙이고자 했던 세계의 외곽에서 쫓겨났을 때, 그리고 돌아갈 거처를 찾아야 했을 때도 그는 뭔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시간의 불연속선 위를 떠밀려왔는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 태그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휴대폰은 방전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통화를 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부산이라니 택배회사를 이용해서 가방을 교환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다소 명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녜요. 제가 갈게요. 다섯 시간쯤 걸리니까 아홉 시면 돼요. 그녀는 자신이 서울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까페가 안국역 쪽에 있다면서 장소까지 스스로 정했다. 전화가 끊어진 뒤 그는 무심코 손에 쥔 전화기의 액정을 보았다. 그가 여러 번 통화를 시도해서 외우게 된 그 번호가 아니었다. 어쩌면 네임태그에 적어놓은 이름도 그녀의 것이 아닐지 몰랐다. 만나기로 한 장소를 검색해보니 까페가 아니라 독일 생맥주를 파는 술집이었고, 레지던스 호텔 1층에 있었다. 그는 작업대 옆에 놓인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장소에서 여행자로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여행가방을 들고 낯선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닌 적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똑같은 가방을 끌고서 호텔 1층의 술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리뷰자 주 : 이 대목을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붉은 간판이 떠올랐다. 아, 여기는 베어린 Barlin이다. 그날의 하늘, 내가 마신 맥주, 그리고.)
  
- 숙소의 연락처를 남겨놓고 돌아와 소식을 기다렸다. 그때부터는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종일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타들어가는 사막의 고립된 나무처럼, 검고 깊은 숲에 버려진 휴가철의 집짐승처럼 지쳐가면서도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끝내 울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세계가 닫혔다는 걸 알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조금 잘 수 있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그 문을 내 손으로 다시 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에도 변한 건 없었다. 해는 떠올랐고 새는 노래했고 바다는 해안을 향해 뛰어들었다. 오후가 되자 세상이 더욱 고요해 거의 평화롭게 느껴졌다. 

 

- 정신을 차린 나에게 젊은 남자 의사가 말했다. 한 번에 인대까지 잘 그으셨네. 근데 정말 죽으려면 요골동맥까지 찢어야 합니다. 손목을 그어서 요골동맥까지 건들기란 진짜 쉽지 않죠. 다음번엔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세요. 그의 말은 이상하게도 나를 자극했다. 유용한 정보지만 이제 써먹을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농담으로 대꾸했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는데, 뜻밖에도 나는 살아났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삶과 죽음 양쪽에서 모두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종류의 의지를 갖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 의지 탓에 나는 독설가인 그 의사와 즉시 사랑에 빠질 뻔했다. 퇴원한 뒤 집에 돌아와서 팽개쳐두었던 여행가방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달콤한 케이크 상자를 들고 한 번쯤 병원으로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미혹과 욕망이 수없이 나를 낭떠러지로 몰았지만 나는 한 번도 거짓에 휘둘린 적은 없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지난 일을 편집하고 방어장치를 만들 만큼 비겁하지는 않았다. 나는 단 하나의 선택을 했었다. 공항에서 가방이 바뀌지 않았다면 친구가 나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 없이 나는 홀로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생은 절취선처럼 불연속적으로 이어졌다가 약간 위태로운 절단면에 이르러 끊어져버리는 것이니까. 

 

- 1851년 프레더릭 스콧 아처는 <더 케미스트 The Chemist>에 습식 촬영술을 발표했다. 그는 유리판에 콜로디온 막을 입히고 옥화암모늄과 취소용액, 질산은에 담갔다. 그런 다음 유리판이 젖은 상태에서 밝은 빛 아래 순간적으로 상을 노출시켜 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은 건판 사진술이 소개되기까지 이십여 년 동안 널리 사용되었다. 즉석에서 현상해야 했으므로 야외 촬영 때마다 간이 암실을 갖고 다녀야 했다. 로키산맥을 찍는 사람들은 여러 개의 텐트를 지고 험준한 산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물론 암실 텐트도 있었다. 유리판에 담긴 상과 산맥을 동시에 내려다보며 그들은 사진에 포착된 시간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살아서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사람 역시 바로 그 느낌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홀로 작업을 했는데 주로 인물을 대상으로 했다. 나는 그의 모델이 된 적이 있다.  

 

- 내가 작업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는 촬영 준비를 하러 암실로 들어갔다. 나올 때는 가슴과 무릎을 덮는 긴 비닐 앞치마에 의료용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꺼내려는 듯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먼저 장기를 적출하나요? 나의 농담에 그는 맞아요 저기 누우셔야 해요,라고 대꾸하며 작업실 바닥 한가운데 놓인 기다란 조명 박스를 가리켰다. 천장에는 검은 천을 씌운 상자가 어설프게 매달려 있었는데 작은 구멍에 렌즈 뚜껑이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카메라인 모양이었다. 흑경이라고 들어봤어요? 이게 필름인 셈이에요. 그는 모세의 십계명이 적혀 있을 듯한 납작한 석판을 들어 보이더니 그 위에 몇 가지의 화학약품을 발랐다. 삼십 초 동안 움직이지 않을 수 있죠? 이제 누워보세요.   

 

- 나는 누운 채로 혼자 남겨졌다. 삼십 초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흘러갔다. 병원에서 깨어나던 순간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지금 누워 있는 조명 박스처럼 세계에 다시 불이 들어오면서 그곳의 침대 위에서 나는 깨어났다. 그 순간 내 얼굴 위에서 어떤 카메라가 나를 찍었을까. 나는 어떤 얼굴로 눈을 떴을까. 어떤 얼굴을 갖고 또 다른 생에 등장했을까. 무엇이 나를 되돌려 보냈을까. 이윽고 암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요. 이제 움직여도 돼요. 그는 카메라 렌즈의 뚜껑을 닫더니 석판을 꺼내 들고 암실 쪽으로 사라졌다. 

 

- 사람은 다 다른 것 같아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작업을 하는 거지만요. 센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고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짓는 회사원도 있었어요.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척하는 여학생도 있었고, 어떤 시인은 눈을 감고 있더라구요. 자신의 죽은 모습을 찍고 싶다면서. 그는 다 닦은 석판을 똑바로 놓고 한참을 바라본 뒤 나에게 건네주었다. 마음에 안 들지도 몰라요. 처음엔 다 그러니까. 그리고 덧붙였다. 자기 모습의 원형 같은 게 담기거든요. 대개는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한다는 거예요. 화학약품이랑 공기 때문이죠. 이 사진 속 모습도 변할 거예요. 

 

- 나는 석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검은 돌에 새겨진 나의 모습은 숯으로 그린 목탄화 같았다. 입은 다물어지고 눈빛은 멍했다. 군데군데 빛이 얼룩져 검은색의 흉터 같았고, 눈동자 속에는 여러 겹의 물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와 블라우스의 흰 깃 때문인지 지난 세기에 살았던 여자의 모습처럼도 보였다. 내 얼굴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분명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어느 꿈속에서인가 나는 그 얼굴이 아니었을까. 

 

- <불연속선>

 

 

- 그러나 미리부터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통장에 잔고도 얼마간 남았고 내년에 만기가 되는 적금도 있었다. 단출한 삶의 방식이 몸에 배었으며 돈이 들어갈 만한 특별한 취미도, 관계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일상이 무기력해지고 계획을 세워야 할 때에 위축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 때문일 것이다. 나이 탓도 있었다. 집중력과 끈기가 떨어져 책상 앞을 들락날락하는 주기가 짧아졌고, 문맥을 파악하는 데에도 예전보다 시간이 걸렸다. 성격이든 나이든 모두 고치거나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바에야 현실을 수긍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정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대체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사십 대 중반 남자들의 술자리 화제에는 패턴이 있었다. 사회생활의 고충을 내세운 비난과 험담으로 시작해서 늙어간다는 푸념을 거쳐 뱃살과 운동과 가족들 이야기로 이어지곤 했다.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친구는 대학생 딸이 있었고 누군가는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이혼을 하기도 했다. 직업을 바꾸거나 사업에 기복을 겪은 경우도 있었고 젊은 나이에 발병한 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친구도 있었다. 특별한 변화도 사연도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며 지겹도록 하나의 인생만을 사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다. 친구들은 출퇴근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티셔츠와 백팩으로 충분한 옷차림, 가족 없이 혼자 보낼 수 있는 휴일 따위를 들먹이며 그의 자유를 부러워했다. 술값 한번 시원스럽게 낼 주제도 못되고 작은 원룸에 혼자 살며 화제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에 대한 형식적인 배려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때로는 배려가 지나쳐 배제가 되고 은연중에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될 때도 없지 않았다. 

 

- 하지만 그런 자리가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 역시 자기 방식대로 삶을 관리해왔고 거기에 대해 일정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폭음도 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았다. 청결과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며 스스로 정한 사소한 규칙들을 되도록 지키면서 살아왔다. 기준을 낮게 잡으면 낙천적이 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욕망을 조절하면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혼자 맥주캔을 딸 때가 더 좋긴 했지만 어떤 모임에서든 위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자기 비하로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고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도덕적 무기로 내세우는 옹졸함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남의 입장을 쉽게 이해하는 편이었다. 피해자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 간호사는 즉시 휠체어를 불러 그를 앉혔다. 병원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청년 하나가 바쁜 걸음으로 따라오며 보호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물었다. 그러나 두 손을 힘없이 가슴 위에 얹은 채 간신히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의 머릿속에 보호자는 물론이고 상황을 알릴 만한 사람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에 관여할 사람은 그 자신뿐이었으며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휠체어에 실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다음부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자신이 안간힘을 다해 통제해온 삶의 영역 밖에 있었다. 휠체어 미는 청년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그를 계속 안쪽으로 밀어갔다. 거기에는 고통과 비명과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탈진한 가운데에도, 남의 손에 완전히 내맡겨진 무력함이 뜻밖에 편안했다. 

 

- 저는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더 많아요. 그럼 여기 이 책을 다 읽으신 거 아녜요? 이걸 어떻게 다 읽어요. 그는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앞부분만 읽은 것도 있고 필요한 데만 골라서 읽기도 해요. 목차만 보고 덮어버린 책도 있고,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책 많은 집에 가면 그 집주인이 거기 있는 책을 전부 다 읽었다고 생각했어요. 똑똑한 사람 앞이니까 말도 교양 있게 해야 할 것 같고. 아니죠. 그가 대꾸했다. 똑똑한 사람이면 책 내용을 머릿속에 다 집어넣었을 거예요. 이렇게 책을 있는 대로 다 쌓아두지도 않겠죠. 술 없는 집하고 똑같아요. 있는 대로 먹어치우니까 술꾼 집에는 술이 없잖아요.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책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뭔가 든든하고 뿌듯할 것 같아요. 이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그게 문제예요. 그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세상을 우습게 보게 되죠. 그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거들먹거리는 농담으로 한번 더 웃음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뷰자 주 : !!!! 나는 술꾼이 아니다!!!!) 

 

- 수술이 결정된 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울타리를 좀 더 안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입이 거의 끊긴 데다가 뜻밖의 병원비가 생겨나 이제 적금을 깨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사만은 망설여졌다. 그 집은 그가 처음 마련한 책의 진지인 만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살아오는 동안 그는 모든 면에서 결핍되고 가난했다.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것이 많지 않았다. 견문을 넓힐 기회도 취향을 갖출 만한 여유로움도 갖지 못했다. 관계마저 최소화했다. 책들은 그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전문적이고 풍족한 세계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집을 줄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울타리의 말뚝을 뽑는 첫 단계로서 제일 먼저 책을 정리해야 할 것이었다. 

 

- 그는 먼저 오래된 책들부터 책장에서 빼내기 시작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글자가 너무 작고 행간도 좁아 읽기 힘든 책들이었다. 다음으로는 가벼운 산문집과 어쩌다 받아놓고 펼쳐보지 않은 증정본과 논문집을 골라냈다. 다시 들춰볼 것 같지 않은 이론서를 버렸고, 언젠가 필요할지도 몰라 자료로 갖고 있던 책들도 추려냈다. 한때 존경했으나 지금은 관심이 없는 저자들의 저서를 솎아낼 때는 얼마간의 회한이 따랐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기 저자들의 책을 고를 때에는 속도가 붙었다. 책장과 천장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던 전집은 추릴 것 없이 모두 버릴 생각이었다. 영인본 총서, 학술지와 문예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고 손과 발바닥은 책에서 나온 먼지로 새까매졌다.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묵은 냄새가 공기 속을 떠다녔다.  

 

- 여덟 개의 책장 중에서 겨우 두 개분의 책이 치워졌을 뿐인데도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방 안이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두배나 세배쯤 더 책을 버려야 했다. 책장 한 개를 비운 다음 좋아하는 책을 모아서 장르별로 다시 꽂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보다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빼놓았던 책더미를 추리다가 미련이 생겨서 도로 책장에 꽂아놓는 책들도 있었다. 어떤 책은 지나가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곁에 있었던 사람을 기억나게 하기도 했다. 그중 어떤 책들은 그와 함께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고시원 책상 밑의 좁은 공간에 쌓였다가 어엿한 책장으로 옮겨줄 때의 뿌듯함이 기억났다. 절판되어서 어렵게 구한 책도 눈에 띄었다. 술집에 놓고 오거나 빌려간 사람이 돌려주지 않아 다시 산 책도 있고 오래전 사귀던 여자에게서 선물로 받은 책들도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던 시절에 산 책들에는 간혹 흐릿해진 글씨로 구입한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기도 했다. 

 

-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반장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애의 책상은 그의 것보다 조금밖에 크지 않았다. 형의 것만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문기자 삼촌이 물려줬다는 백과사전이 줄을 맞춰 꽂혀있었다. 백과사전 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엄청나고 무한한 세계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인명사전을 꺼내 그가 아는 모든 유명한 사람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그 안에 들어 있음을 보았다. 과학사전과 역사사전과 지리사전 속에는 그가 궁금하게 생각했고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면박이나 받았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낱낱이 밝혀져 있었다. 그날 그는 저녁밥 먹을 시간이라고 반장이 떠밀 때까지 바닥에 주저앉아 사전을 훑어보았다. 이제는 아무도 책으로 된 백과사전을 읽지 않지만 오래전 한 시골 소년의 보잘것없는 미래는 어쩌면 그때 결정되었을지도 몰랐다. 

 

- 우리 집 거실에도 그런 백과사전이 있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친척한테 할부로 사서 장식장 위칸에 고이 모셔놓았죠. 그때 유행이었거든요. 그는 그녀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아마 그가 쓰고 있는 논문처럼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틀에 끼워 맞춰진 공허한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것은 소심한 사람의 위선과 자기 위안으로 적당히 가공된 이야기였다. 아마 그날 그가 새롭게 발견하고 환호한 것은 지식의 여정이 아니라 형과 약국 주인과 교사와 반장에 대한 보복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갈망했던 것은 지식이라기보다 지식을 통해 진입할 수 있는 시스템의 권위였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속하기를 원했다. 

 

-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책으로 분류해 던져버렸지만 그 책에는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눈을 찌르는 담배연기 때문에 이마를 찡그린 채로 그는 천천히 그 글귀를 읽었다.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재능과 행운과 친화력을 질투했고 그가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품었다. 중심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밖에 물러나 있기를 자청한 것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패배자가 되기 두려웠던 것이다. 전략적이지 못했을 뿐 타협도 했다. 힘 있는 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썼고 명백한 오류임을 알면서도 그들이 주도하는 방향에 따랐다. 싸움이 벌어질 때는 아무 입장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중간자의 이득을 취했다. 경쟁이 될만한 상대에게서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예민했고, 그에 대한 험담이 나오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침묵으로 그 오해를 부추겼다.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는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었다. 불안해서 비겁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거만하거나 초탈한 척했다. 수긍한 게 아니라 회피한 것이었다.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논리도 익혀 갔다. 그 논리란 권위를 추종하고 인기를 탐내면서 아닌 척 자신을 기만하는 기술이었다.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가 논문을 빨리 끝내지 못한 것 역시 완벽주의자여서라거나 학문 욕심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대 이하의 결과일까 봐 두려웠고, 모자란 실력이 탄로 나는 상상만으로도 악몽에 시달렸다. 의미 없이 책장을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이, 그 무너짐이, 그가 허세에 찬 그 인생을 얼마나 위태로운 마음으로 지키려 애써 왔는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 질투와 선망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경악이 컸던 만큼 해저지진의 거대한 폭발로 뒤집히고 깨져나가는 크루즈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빠른 물살에 휩쓸려 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욱 끔찍한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때 어린 그는 생각했다. 내가 저 화려한 배에 탈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저런 끔찍한 재난을 겪을 일도 없는 것이다. 나쁜 뉴스를 보고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의 행운 역시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지금 역시도 그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큰 행운이 없었으니 0.01퍼센트의 불행 또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대체 이처럼 비겁한 자기 위안의 논리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박탈감에 굴복해왔던 것일까. 식은 밥 같은 중간지대의 안전이 그에게 남긴 것은 고독뿐이었다. 

 

- 9월 어느 날 뉴스를 검색하던 그는 '별의 동굴'이란 단어에 시선을 멈췄다. 아프리카의 한 동굴에서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몸이 작은 여성 과학자들이 25센티미터도 안 되는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천오백여 개의 유골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형태로 놓여 있었다. 과학자들은 장례의식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죽음 이후를 상상한 최초의 인류에게 '호모 날레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별의 인간 그들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처음 동굴 안으로 들어간 과학자들이 보았을 수없이 많은 화석의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바닥에 흩어진 것처럼 보였겠지만 누군가의 애도에 의해 그들이 살았던 생의 내용과 그 질서를 전해주었을 화석들. 불현듯 자신이 먼 훗날 그해 여름을 별의 동굴이란 말로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 <별의 동굴>

 

 

- 토니오 신부는 죄가 위중하다며 로사리오 기도 30번으로 보속 하라고 말했는데 그 기도를 다 바치고도 젬마는 불안에 떨었다. 혼인성사는 식을 올리기 4주 전부터 성당 게시판에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었다. 그 결혼에 이의가 있거나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부에게 알릴 의무가 있었다. 젬마는 누군가가 그들이 결혼 전 순결의 서약을 깼다고 일러바칠 것만 같아 불안해했다. 결혼식날 그녀의 눈물은 성가족 탄생의 서사가 무사히 완결되어 배를 띄우게 된 진수식의 축포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성가대 한쪽에서 누군가가 가브리엘이 수태고지 천사이며 요셉은 마리아와 아이를 지키는 성가족의 가장이라고 농담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던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 <정화된 밤>은 다섯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대씩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가 연주하는 6 중주곡이다.

제1장 매우 느리게 
차가운 달밤. 두 사람이 잎이 진 황량한 겨울 숲 속을 걷고 있다. 달빛은 두 사람을 비추며 따라오고, 하늘은 달빛을 가릴 구름 한 점 없이 유리처럼 얼어붙었다.

제2장 장황하게
여자가 말한다.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당신과 나 자신에게 죄를 지었지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몸을 맡겼고 그 낯선 이에게 안겨 환희를 맛보았어요. 하지만 이제 삶이 나에게 복수하기 시작했군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제3장 묵직하고 빠르게
숲은 차갑고 조용하다. 달빛은 여전히 두 사람을 따라오고 있다. 여자의 발소리는 침묵 속에 점점 더 무거워진다.

제4장 매우 웅장하며 느리게
남자가 말한다. 우리는 얼어붙은 호숫가를 걷고 있어요. 하지만 보세요, 세상은 달빛으로 가득 차 있죠. 그 온기는 당신이 품은 낯선 이의 아이를 정화시킵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 아이를 우리의 아이로 낳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내게 빛을 주었어요. 그 빛으로 나 자신을 정화된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제5장 아주 조용하게
둘은 걸음을 멈추고 입맞춤한다. 밤의 숲이 검게 흔들린다. 그들의 그림자는 깊고 어두운 숲 가운데를 향해 조용히 사라져 간다. 

 

- 다니엘은 요셉에게서 들은 말을 옮기며 알은척을 했다. 엄지에게 음악회에 가자고 전화를 했던 날 젬마는 거의 종일 침대에 누워 있더니 저녁나절 극장에 가겠다며 혼자 외출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요셉은 흔쾌한 표정으로 자기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주었다. 요셉과 다니엘은 모처럼 둘이서 저녁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요셉은 다니엘의 휴학과 아르바이트 등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물었고 엄지와 함께 음악회에 가게 됐다고 하자 자청해서 감상 포인트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 음악의 진정한 주제는 첼로 파트의 관대함이라는 게 요지였다. 

- 음악회 해설자도 그와 비슷한 설명을 했다. 엄지는 그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몇 번인가 잠들 뻔했는데 중간중간 해설자의 목소리에 확 깨더라는 거였다. 그 교수님 생긴 것도 그렇고 목소리도 너무 느끼했어. 계속 남자의 포용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이 탄생했다 그러는데, 완전 그 반대 아니야? 반대라고? 다니엘이 되묻자 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자가 당당하게 과거를 밝히고 남자에게 네 태도를 정해라, 그러는 내용이잖아. 결국 남자는 아이를 떠맡으면서 여자를 붙잡는 거고, 남자가 봐주는 게 아니라 여자가 끌고 가는 상황이라구. 엄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커진 것을 깨닫고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근데 난 그 여자와 남자가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잘은 모르지만 음악은 뭔지 좀 불길하게 끝나지 않았어? 

 

- 다니엘이 검색해본 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 시를 관대한 남자의 사랑 혹은 여자의 과거가 깨끗이 정화되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로 해석하는 건 너무 단순하다는 거였다. '임신한 여성과 겨울의 달이라는 조합은 분명히 광기로 흐를 위험성을 시사한다' '그 뒤 이 남자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광기의 세계로 휘말린다'는 문장도 기억이 났다. 그 문장을 들려주자 엄지의 눈이 커졌다. 뭐야 그럼, 이해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복수하는 거야? 뭐가 이렇게 온통 막장이냐. 너희 부모님은 이런 내용을 다 아시는 거니? 연애할 때 듣던 음악이라며. 다니엘이 대답하기도 전에 엄지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아, 알았다. 네가 그 정화된 아이구나, 그치? 다니엘은 술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부딪쳤다. 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어려 있었는데 그것은 요셉과 단둘이 있던 날 들었던 부모의 결혼 스토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엄지는 가방 속에서 팸플릿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생맥주 두 잔을 더 주문했다. 엄지가 손가락으로 줄을 그어가며 팸플릿 속의 문장을 또박또박 읽었다. '그 이후 작곡가는 낭만주의에서 무조음악으로 넘어갔다. 무조음악이란 하나의 지배음에 대한 다른 음의 종속관계, 즉 조성의 법칙을 부정하는 음악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조음악은 혁명이 아니라, 과거가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도착점이다.' 엄지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포크로 감자튀김을 찍으면서도 팸플릿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그것을 탁 덮더니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으쓱대듯 말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너무 가식적이야. 왜 정화해야 돼? 어차피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핑계 만드는 거잖아. 다니엘이 대꾸했다. 너는 핑계 필요 없냐? 남의 말에 신경 안 써? 응, 안 쓰는데. 너 왕따 안 당해봤구나. 그 말을 한 뒤 다니엘은 다시 또 피식 웃었다. 

 

- 그가 부모의 결혼 스토리에서 감정 이입한 역할은 요셉도 젬마도 아니었다. 그 스토리는 어쩌면 당시에 그들이 믿었던 신이 성가대의 두 왕따를 맺어주기까지의 고생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도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다른 내용의 기도를 할 때 신은 어쩔 수 없이 해피엔딩을 위한 상상력을 쥐어짜야 할 것이다. 그때는 몇 년 뒤에 그토록 머리를 짜내서 만들어 놓은 성가족의 서사에서 자신의 자리가 사라져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다니엘은 종업원이 새로 가져온 술잔 중 한 개를 엄지 앞에 놓아주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엄지는 허공을 향해 속삭이듯 가만히 중얼거렸다.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도착점, 그러고는 손을 뻗어 경쾌하게 맥주잔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더 좋아진다는 뜻이겠지? 

 

- <정화된 밤>

 


 

- 막막하고 슬퍼진다. 그래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막막하고 슬픈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소설집 원고를 정리하다가 내가 조금 변했다는 걸 느꼈다. 어둡고 답답한 실내의 구석에 희미하나마 작고 하얀 빛의 웅덩이를 만들어놓았다. 우리 모두 뒷걸음질 치다가 거기에 빠지기를 온몸을 감싸안는 다정한 부력이 기다리고 있기를. 어쨌거나,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더 좋아진다는 뜻이겠지?"이다. 

- 멀게는 8년 전부터 올봄에 쓴 소설까지 한 권으로 묶었다. 일종의 '표제 소설'이라고나 할까. 술, 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 음악. 늘 가까이하는 사물들에 관한 여섯 개의 이야기이다. 친근한 사물들이 어떤 낯선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상상해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중 <장미의 왕자>는 <GQ KOREA>의 별책부록으로 기획되었고 불연속선은 처음에 0914 갤러리의 <가방 탐독전>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콜라보 형식으로 전시되었다. 새로운 경험이었으므로, 좋아하는 걸 자유롭게 시도하고 멋도 부려보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말하나 마나 술. 그 반대편에는 어쩔 수 없이 책. 그 둘은 내 일상에 장착된 천칭의 두 접시이기도 하니까.  


 
 

 

 

 
중국식 룰렛
은희경 소설집『중국식 룰렛』.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은희경 작가의 여섯 번째 소설집이다. 술, 옷, 신발, 사진, 책, 음악 등 지금 우리의 삶에서 놓을 수 없는 모티프들을 여섯 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며 일상의 우연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날들이 얼마나 공교롭게 우리를 이끄는지를 은희경 특유의 섬세하고 정련된 필치로 펼쳐낸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표정을 감추고 ‘거짓된 진실게임’을 하면서 상대에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거나 ‘현실을 수긍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정하는’ 고립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간다. 저자는 이들 주변의 사물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한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낸다.
저자
은희경
출판
창비
출판일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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