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다른몸들] 돌봄이 돌보는 세계

일루젼 2022. 9. 10.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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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한진희 / 다른몸들

(김창엽 / 김현미 / 박목우 / 백영경 / 안숙영 / 염윤선 / 오승은 / 전근배 / 정희진 / 채효정)
출판 : 동아시아 
출간 : 2022.08.05

이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돌봄은 특정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특수 관계가 아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돌봄'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모든 활동들이 '돌봄'이다. 그것을 스스로는 행할 수 없는, 혹은 행하기 힘든 상황 속에 놓인 이들에게 그것을 제공할 때 우리는 모두 돌봄 노동자가 된다.        

 

근 일주일을 잡고 있었는데도 도저히 마음에 드는 리뷰가 나오지 않아 무척 괴로웠다. 이 책을 읽는 것과 기록하는 것, 양쪽 모두에서 내가 괴로움을 겪는 이유는 단순하다. 충분한 거리감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그룹인 '다른몸들'은 신체장애, 정서장애, 돌봄 노동, 교육, 보건의료, 인구와 출산, 국제적 이동과 경제, 기후와 탈성장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돌봄"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개개인인 저자들은 모두 각자의 입장과 경험에 기반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나가고 있으므로, 이 한 권의 책 안에서도 목소리들은 합쳐지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독신, 여성, 보건의료 종사자, 돌봄 노동의 수요자이자 제공자.

여러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그리고 취지에는 십분 공감하지만 'HOW TO'를 말하고자 하면 당장 내가 포기하고 지불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한 개인으로서, 이 책에 대해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본문 중 한 저자의 표현이 그야말로 아프게 내리 꽂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논의하기 시작하면 공기가 좀 달라진다"

        

또 다른 주저함은 표현 방식에 관한 고민이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가 자신의 불편을 호소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이 요구가 형평성과 상황의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지지 못하면, 전체적인 상황은 자칫 비극으로 치닫기 쉽다. 그 상황에서 혜택을 받고 있던 이들이 이것을 자신에게 '손해'를 요구한다고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각자의 입장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위해서는 깊은 관찰과 대화가 필요한데, 이미 사회 곳곳에서 문제로 불거져 나온 이슈들은 특정 단어의 사용으로 인해 채 그 속 깊은 이야기를 저하기도 전에 스팸되어 버린다. 

 

테이블에 마주 앉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비난도, 힘든 현실에 대한 불만도 아닌 '고통의 실존'을 양자가 함께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나갈 것인가에 관한 것은 그다음 단계의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내가 읽기 괴롭고 껄끄러웠던 만큼, 슬쩍 못 본 채 외면하고 싶었던 만큼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이들의 현실이 무겁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하나의 시선으로써 바라보고 관심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 책이 함께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사회를 향한 비난이나 공격이 되는 것 또한 원치 않는다. 

 

나는, '고통과 문제'는 한 사회가 성장해나가는 지점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혹은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고통이 되는 지점', 그것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이 그 사회가 새롭게 내디딘 발전의 한 걸음이라고 믿는다. 식당에서,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상처들을 희화화해 웃을 수 있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삶. 그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닌 자신과 주변의 일임을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도저히 웃을 수 없는 감수성이 생기는 시점. 그때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더 넓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사회는 '나' 자신에게도 더 나은 선택지들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나' 역시 그런 대우를 받을 것이므로. 

 


   

"재난은 일상적으로 존재하던 문제를 확장 혹은 가시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그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현실이 아쉽고 답답했다. 물론 제기된 주제들은 모두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돌봄에 대해 좀 더 입체적 논의를 하지 않고는, 우리가 직면한 돌봄 문제를 제대로 풀기 어렵다. 돌봄의 다층적 현실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한국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돌봄 위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어렵다."

 

- '다른몸들'에서는 질병권(잘 아플 권리)을 말한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독립이 허구이듯, 건강하고 장애가 없는 몸을 시민으로 전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 사회 표준의 몸, 기본의 몸을 '아픈 몸'으로 설정하여 질병, 장애, 노년 등의 조건을 특수화하고 취약 계층화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고, 아픈 몸과 안 아픈 몸을 분절적으로 나누지 않음으로써 돌봄과 의존의 이분법적 주체로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강좌와 이 책도 질병권 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 가령 세계 인구의 절반이 대체출산율(현재 인구가 유지되는 출산율) 이하의 국가에 살고 있다. 아시아 여성이 남성보다 적어도 2배 이상의 무급노동을 하는 '현실'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출생률이 급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저출생은 신자유주의가 내재한 재생산 위기 현실에 적응한 결과일 수 있고, 기대수명은 증가하고 출생률은 낮아지면서 인구 구성 자체가 매우 달라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돌봄 수요가 가파르게 증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돌봄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국제 이주를 통해 돌봄 노동자를 더 많이 확보하는 게 돌봄 문제의 대안인양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점점 더 가능하지도 않다는 의미이다.

 

- 현재 인류는 돌봄 균형이 깨진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은 햇살, 공기, 물 그리고 다양한 식물과 동물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자연은 인간을 돌보고 있었건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상호 돌봄을 하지 못하고 자연 위에 군림하며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구의 재앙은 가속화되었고, 인수공통 감염병의 증가 및 짧아지는 주기의 팬데믹을 경험하고 있다. 재난대응에 돌봄은 필수이지만, 돌봄 자체가 재난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는 오래된 지적은 코로나19 이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조한진희, <돌봄은 진실을 묻는다>

 

 


 

- 이 글을 통해 제도적 돌봄의 부실함과 그에 따라 환자와 환자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987년생인 나는 한국에서 폰탄 1.5세대에 속한다. 나의 탄생은 집안에 큰 재앙을 가져다주었고, 오로지 가족만이 그 재앙을 짊어져야 했다. 병원에서는 내가 한 달 내에 죽을 확률이 높다고 했고, 집안에서는 나를 절 앞에 놔두고 오자는 말이 오갔다. 결국 부모님은 물어물어 아이를 조용히 처리해 준다는 곳에 갓난아기인 나를 데려갔지만, 친할아버지가 이미 출생신고를 한 덕분에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나를 키울 형편이 안 되었던 부모님은 친권을 포기하고 미국에 입양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돌아온 대답은 "이곳에 와도 살릴 수 없으니 입양이 불가하다"라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한국에서 수술을 받았고, 낮은 확률에도 살아남았으며,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나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적’은 일회성 이벤트이다. 나에게 기적이라고 말해주었던 사람들 중 과연 얼마나 많은 수가 내가 생을 '지속'하며 살아가야 할, 같은 인간임을 고려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 사회는 내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질환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낯선 느낌을 받는다. 몸이 예기치 못하게 아프다, 안 아프다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해주는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 답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썼던 글에서 내 몸을 "시간이 드나드는 몸"이라고 정의했다. 우리 사회의 의료 현장에서 가장 지배적인 담론인 '치료' 서사에 나를 맡기면, 내 몸은 그에 맞춰 분절되고 파편화된다.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아픈 몸을 넘어서 나의 실존을 불안하게 만든다. 

- 많은 환자가 아픈 몸만큼이나 분절된 시간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실존에 혼란스러워하고 힘들어한다. "큰 병이 찾아오면 생활을 잃는다"라는 말도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나는 기록하기 시작했다. 의료 행위를 받는 객체로서의 몸이 아닌, 나 자신의 생에 벌어지는 일들을 주체로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내가 나의 질병 서사를 쓸 때 그것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나 자신만의 시간의 흐름을 작동시킨다. 

 

- 엄윤선, <나의 장애는 몇 점인가요?>  

 

 


 


-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웠지만 감금되어 갇힌 공간에서는 누구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디에 왔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고,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었다. 약을 먹으면 정신이 몽롱하여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고, 약 부작용으로 한시도 같은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안절부절증과 '정신병원에 왔다'는 낙인까지 겪으며 죽음과 같은 비참함을 견뎌야 했다. 아마도 많은 당사자에게 강제 입원의 경험이 극심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의료 시스템의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다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겪은 폭력성은 너무도 미미한 수준이다. 

- 주디 챔벌린 Judi Chamberlin은 그의 책 <우리 스스로 On Our Own>에서 자신의 입원 경험을 자세히 묘사한다. 치료를 통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따듯한 돌봄을 받으리라 기대하며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그는 끔찍한 의료 권력과 마주한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했을 뿐인데도 CR실에 갇혀 약물을 투여받고 의사들의 진단에 따라 점점 더 통제가 심한 병원으로 옮겨 간다. 그러면서 본능적으로 그는 의사들이 원하는 착한 환자 역할을 하는 것만이 의료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깨닫는다. 퇴원 이후 여러 사회운동과 만나고 '밴쿠버 정서 응급센터'에서 대안적인 돌봄을 받으면서, 그는 몇 년에 걸쳐 경험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디 챔벌린은 말한다. '문제'를 전문가들에게 떠넘기지 말고, 사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자신을 위해 근심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공간에서 돌봄 받아야 한다고. 존속 가능한 대안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을 해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평범한 시민인 우리 모두가 같이 달성해야 할 임무라고 말이다. 

 

- 제도로서의 정신의학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한다. 정신의학적 "현실"은 가장 관습적인 조건에서 정의된다. 관습을 좇지 않는 극적인 삶의 선택은 빈번하게 정신병/질환의 증거로 인용된다.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는 아내, "커밍아웃" 하기 등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위기이지만, 그것은 과연 의료적인 문제인가? 이러한 상황에 정신의학이 연루되면, 이는 의학보다는 명백하게 도덕을 다루는 것에 훨씬 더 가깝다.  

 

- 박목우,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 노인, 정신질환자,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추진되고 있는 커뮤니티 케어 community care는 앞으로 상당 기간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커뮤니티 케어 역시 보건복지부가 "케어가 필요한 주민(노인, 장애인 등)이 살던 곳(자기 집, 그룹홈 등)"에서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누리고 지역사회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 보건의료, 요양, 돌봄, 독립생활 지원이 통합적으로 확보되는 지역주도형 사회서비스 정책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주로 영국의 역사 안에서 정립되어 온 이 정책 방향이 한국에서 어떤 형태로 자리 잡을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이런 가운데 2021년 8월 발표된 정부의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은 지역사회 지원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시설들을 양산하여 장애인을 재배치하는 '장애인 재시설화 로드맵'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 장애인 돌봄의 기울어진 양상은 모든 돌봄이 그 자체로 선하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질문한다. 우리 사회의 돌봄은 장애에 대한 오랜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손상된 혹은 손상되었다고 여겨지는 육체와 정신은 오랫동안 개인이 지닌 결함으로 간주되어 왔다. 손상을 보편적 인간상에서 벗어난 일탈의 상태이자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해 온 전통 아래에서, 전 사회의 관심사는 처벌이나 보호, 통제나 교정, 때로는 격리나 절멸을 통하여 이 '다른 존재들'을 분리시켜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려 두고 해당 신체를 기술적으로 관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코로나19는 이런 전통적인 돌봄 체계가 지닌 한계를 병원과 시설 등을 통해 드러냈을 따름이다.  

 

- 무엇보다 예외적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전체에 속할 수 없고, 과거 농노가 토지에 묶여 있었듯 특정 시설에 예속되지 않고서는 최소한의 생명 보존을 이루기 어렵게끔 설계된 우리 사회의 '돌봄 윤리'는 위기의 순간에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재난 속 장애인이 겪는 권리의 박탈 또는 차별 문제는 한 시민이 지닌 권리의 차원이 아닌, 좁게는 국가나 기관 시설, 넓게는 시민이자 부양자의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의 ‘배려’가 사라져 발생하는 것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별도 취급하는 것이 바탕이 된 돌봄 윤리는 결국 모든 시민이 아닌 '그래도 되는 존재들'에 대한 문제로 축소되었다. 가령, 장애인이 보건소나 선별 진료소에 접근하지 못하여 겪는 문제는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여 생기는 공백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기 어려워하는 발달장애인의 사례 역시 주변 시민의 인식 개선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정도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재현은 비단 언론만이 한 일은 아니다. 나 역시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는 문제를 공론화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 불쌍한 장애인, 그래서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커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조차 '활용'하며 당장의 공백을 메우는 것에 몰두하기만도 벅찼고, 그럴 때마다 가슴에는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계속 남았다. 

 

- 그렇다면 새로운 돌봄은 어떻게 구상되어야 할까? 나는 '돌봄 대상자'를 별도로 규정하여 취급하지 않으며 (또는 가능한 한 보편화하며), 돌봄을 구현하는 가장 정의로운 방식을 찾고, 돌봄에 내재해 있는 지금의 권력관계를 인정하여 오히려 평등하게 갈등할 수 있는 관계를 재구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애인’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애'는 기존의 등록 장애의 기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생의 조건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몸의 현실을 말한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 될 수 있다"라는 가정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며, 반드시 장애인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 인간은 사고와 같은 우연적인 요소가 아니더라도 나이듦이나 병듦과 같은 필연적인 이유로 결국 장애와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하여 하나의 전제처럼 여겨지는 비장애 중심주의와 능력주의는 특정인의 몸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한편, 누군가의 몸은 병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우리는 숨 쉬고 있는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에도, 그러한 몸이 살아가야 할 사회의 문제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왔다. 

 

- 일부러 '유리한 생존'이라는 표현을 쓴다. 돌봄은 도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명의 조건에 유리한 원리여야 한다. 가령, 장애인을 고려하는 방역체계는 도덕적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추가적인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몸들을 고려해 나가는 방역의 설계가 애당초 사회 전체의 유지와 인간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안전'과 '정의'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워야 더 안전하다. 나는 '돌봄 사회'에 관한 논의가 고고해서는 안 되며, 돌봄 윤리 혹은 돌봄 정의 역시 매우 세속적이어야만 사회를 바꾸는 힘이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전근배, <장애를 중심에 둔 돌봄 사회>

 

 


 

- "내 손으로 밥숟가락 뜰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겠어!" 
자기 손으로 밥조차 떠먹을 수 없는 상태는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는 말들도 거침없이 이어진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올린다. 요양원에 누워 계신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의 다정한 친척 할머니, 애초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어본 적 없는 중증장애가 있는 동료들, 그리고 질병으로 몸의 기능이 급격히 변화(상실) 중인 젊고 아픈 몸들. 

- 물론 저 말은 '그런 몸'들을 혐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라" 같은 말이 욕으로 쓰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적극적으로 의존하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몸을 무능력과 수치로만 여기는 사회에서, 그런 '수치스러운 몸’이 된다는 공포는 죽음보다 삶을 두렵게 만들고 있다.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서, 어떻게 돌봄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돌봄 중심사회로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생명체로서 신체 기능이 약화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죽고 싶을 만큼의 두려움을 갖는 게 필연은 아니다. 키테이 Eva F. Kittay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영유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생애 주기에 따라 의존의 정도가 다를 뿐, 절대적인 의존 상태를 겪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인간에게 의존은 보편이자 '정상'임을 강조한 것이다. 

 

- 그러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조차, 취약성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몸(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몸)에 대해 수치와 혐오를 뱉는다. 그리고 '의존이 필요한 상태'는 '독립적인 완전한 인격체'에 부합하지 않는 문제적 상태로 인식한다. 의존은 독립의 결여이며, 적게 의존할수록 독립적이라고 여긴다. 무엇보다 무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취약성'을 개인의 상태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며, 취약한 사람을 상냥하게 돌보는 착한 사회를 만들자고 말한다.

 

- 하지만 돌봄의 특성상 모든 것을 사회화하기 어렵고, 가족 혹은 생활 공동체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돌봄은 여전히 일정 정도 남는다. 무엇보다 돌봄의 사회화 이상의 좀 더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 기존의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임금노동은 하지만 가사노동은 하지 않는 남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면, 보편적 돌봄 제공자 모델은 임금노동도 하고 가사노동도 하는 여성을 표준 시민으로 설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집 밖에서는 임금노동을, 집 안에서는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시민을 보편으로 설정해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로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며, 시민의 핵심 자격요건에 돌봄 수행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성의 일로 간주되었던 돌봄 노동이,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의 기본적인 역할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모델은 모든 시민을 돌봄의 주체로 상정하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일자리는 돌봄 제공자이자 생계 부양자인 이들을 전제로 고안될 것이다. 

 

- 가족이나 이웃을 돌보는 사람뿐 아니라, 만성적으로 아픈 몸을 갖고 임금노동을 하는 이들에게도 유용하다.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아픈 몸들이 자신의 몸에 맞는 수준에서 임금노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의료비를 비롯한 생계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성적으로 아픈 이들은 건강한 이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의료적 처치와 약물 복용 이외에도 일상적으로 건강을 위해 운동이나 보조요법을 진행하기도 하고, 음식이나 주거 환경 등 생활관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돌보는 몸을 표준으로 설정하면, 임금노동시간도 줄어들고 돌보는 시간도 확보되어서 만성적으로 아픈 몸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결국 돌보는 몸을 표준으로 한 사회는 인간은 모두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구조적으로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돌봄을 기본적인 시민적 역할로 자리 잡게 하는 과정이다. 

- 사회변혁은 당위의 강조나 진보적 이론과 데이터의 나열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거대한 구조부터 사소한 일상까지 대안적 사회를 함께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의 치열한 토론과 투쟁이 필요하다. 구조의 변화는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멀어 보이고, 자연과 여성을 수탈하며 지탱해 온 자본주의를 당장 다 바꾸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구조를 받치고 있는 것은 시민 개인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돌봄 불안에 떨게 하는지, 누가 어떤 식으로 돌봄 불평등에 놓여 있는지, 어떤 조건과 문화가 특정 존재를 약자화하고 있는지 무심히 흘러가는 듯한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보자. 그런 장면과 문제를 포착하는 것 자체가 변화를 만드는 시작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수하다. 
 

- 조한진희, <의존과 질병의 '정상성'>

 

 


 


- 준비를 홀로 어떻게든 해내야 하고 마음 놓고 쉬지 못하며, 그러고도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눈치껏 알아내 충족시키라는 압박을 받는다. 가족의 폭력이나 무시까지도 사랑으로 감내하라는 요구는 덤이다. 가족 돌봄 제공자의 이러한 고충이 제대로 된 인정과 보상이 없다는 말로 다 표현될 수 없고 적절한 금전 보상을 한다고 해서 모두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사회적 돌봄 노동의 현실 역시 임금이 낮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임금인상을 통해 근본적으로 나아질 수도 없다. 보육교사나 요양보호사의 처우 문제를 저임금으로 일축하는 것은 돌봄 활동에 내재한 다양한 위기와 과제를 감추고 단순화한다는 점에서 가족 돌봄이 받아온 부당한 대우를 은연중 반복한다. 사회적 돌봄은 국가 재정과 입법, 행정 사무같이 구체적인 제도들과 직결되므로, 사회적 돌봄 노동자의 처우를 공론하는 것은 오랫동안 사적 영역이자 비공식 노동에 머물던 가족 돌봄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공식화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가족 돌봄의 압력이 이용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돌봄 노동자의 권리침해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식으로 사회적 돌봄에 드리워진 가족 돌봄의 그림자를 포착하고 공론하는 일은 우리 사회가 가족 안팎에서 돌봄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성찰이다. 

 

- 어떻게 해야 사회적 돌봄이 사회적 돌봄답게 작동할 수 있을까? 돌봄 노동자를 곧 비용으로 여기는 지금의 제도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돌봄 노동자의 처우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돌봄 노동자가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가 건강을 지키고 돌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적절한 쉼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데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현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논의하기 시작하면 공기가 좀 달라진다. 머뭇거림 속에 불쑥불쑥 나오는 반응은 친밀감 형성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지금처럼 1명만 고정적으로 방문하는 게 좋겠다거나, 돌보는 사람이 교대나 휴가로 자주 바뀌면 어르신이 불안감에 식사를 잘하지 못한다거나, 아이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등의 우려 섞인 '반대' 입장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까지 보육교사와 요양보호사는 적절한 교대나 대체 근무가 불가능하고 휴게시간과 휴가도 없는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 돌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는데 왜 돌봄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에는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을까? 첫 단추부터 돌아봐야 한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가속되자 급한 대로 "여성의 돌봄 걱정을 덜어주자"라며 급격히 시행한 것이 지금의 사회적 돌봄 제도이다. 더 좋은 돌봄을 위해 가족, 직장, 지역 등 사회 전반의 정책을 함께 바꿔나가려는 고민과 시도는 없이 그저 여성이 떠맡던 돌봄의 일부를 다른 여성에게 외주화하고 국가가 그 비용을 충당하는 가장 손쉬운 카드를 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서비스 제공과 고용의 책임을 민간에 떠넘김으로써 사회적 돌봄을 시장화하기도 했다. 이때, 민간사업자들은 인건비와 급식비를 아껴 수익을 남긴다. 부족한 지원과 부당한 대우로 요약되는 가족 돌봄의 문제와 소규모 사업장에 흔히 나타나는 나쁜 노동조건이 사회적 돌봄 일자리로 고스란히 전이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오랫동안 집 안에 갇혀 여성에게 짊어지워졌던 돌봄이 갑자기 임금노동이 되면서 그 노동자는 엄마, 아내, 딸의 역할을 일정 시간 대행하는 사람, 그래서 '가족처럼' 일하도록 얼마든지 요구받고 감시당하고 통제될 수 있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가족 내 여성 구성원이 아니고는 누구와도 분담하지 못했던 돌봄을 갑자기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에게 맡기게 되면서 발생하는 긴장과 불안, 기대, 그리고 억압은 돌봄 위기의 새로운 증상이 된 것이다.   

 

- 오승은, <돌봄이 노동이 될 때>

 

 


 

- 사회구조가 행위 주체에 미치는 영향도 중요하다. 새로운 제도나 제도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에 개입해 의료와 돌봄에 관한 지식과 개념을 새로 만들고 또 바꾸며, 이에 따라 규범과 문화도 다시 구성된다. 이제 돌봄은 장기요양에서만 다루는 일이 되었고, 치료와 의료는 돌봄이나 요양과 달리 전문지식과 기술, 시설, 장비를 활용해 전문가가 하는 행위로 굳어져 있다. 한편으로는 의료와 돌봄의 생산 주체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용 주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료와 돌봄 과정에는 이중, 삼중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데, 상호작용의 결과로는 '영향'이라는 평면적인 표현보다 '규율', '침투', '변형'따위의 말이 더 정확하다. 

 

- 의료는 돌봄과는 다른 것으로 분리되었으며, 돌봄은 사소하고 의미 없는 일, 무가치한 일 혹은 아예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구체적으로 의료에서 돌봄은 기껏해야 비전문가가 담당하는 간병 정도로 좁아졌고, 의료의 본령은 전문가가 담당하는 전문적 지식, 기술, 시술, 검사 등으로 규정되었다. 문제는 병원과 의사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그의 가족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도의 힘이자 의료와 돌봄의 이분법적 분리가 미친 영향이다. 의료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하고 주변화된 돌봄의 요소는 점차 의료화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상담은 '상담 치료'로, 감정과 정서는 '지지요법'으로 바뀌고, 담배를 끊거나 운동을 더하기 위해서는 '행동요법'의 힘을 빌려야 한다. 2020년에는 약을 먹거나 피하주사를 맞지 않고도 질병 관리가 가능해 제3세대 치료제라고도 불리는 '디지털 치료제'까지 등장했다. 의료와 돌봄의 관계는 이미 전면적인 의료화 단계에 들어섰을 수도 있다. 

 

- 나는 고령화로 인해 의료가 변화할 수 있다는 점, 인구 감소 지역에서 '의료시장'이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회로 본다. 새로운 돌봄 체제를 향한 동력은 더 이상 의미, 가치, 윤리 또는 복지와 권리 등에 머물지 않는다. 의료가 돌봄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은 그 자체로 완전히 다른 사회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돌봄은 새로운 사회의 물적 토대가 될 것이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 건강과 질병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며 자연스레 의료의 특성도 크게 바뀐다. 노인이 늘고 급성 질환이 증가함에 따라 만성질환의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병원과 의료 모델도 이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요양병원을 떠올리면 이러한 미래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의료와 돌봄은 연속선상에 있을 뿐 아니라, 이제 돌봄과 자기 돌봄의 중요성이 기술 중심의 의료를 압도할 것이다. 돌봄 그 자체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의료 또한 '돌봄의 의료'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새로운 통치이자 대안은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지역의 건강, 의료, 돌봄, 복지체계를 근본적이고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방법이 유일하다. 그중에서도 돌봄을 중심에 둔 체제 변화가 핵심이다. 정치경제적 관점에서는 어떤 주체의 정치적 동기가 강한지, 어떤 동력이 작동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지금 상황에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세력은 기초자치단체(시군구)와 같은 정치·경제·사회 권력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지금처럼 지역과 주민의 정치적 압력이 국가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권력의 불균형' 상황에서는 지역이 스스로 권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답이 될 수 있다. 권력을 강화하는 '물적' 토대가, 바로 돌봄 중심의 체제를 요구하는 지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이다. 공공보건의료에 한정해도 이들에게는 지역의 의료와 돌봄 인프라를 확충하고 재정을 확보하며 서비스를 바꿀 구조 개혁의 동기가 충분하다. 이러한 토대 위에 정치적 기획과, '운동'이라는 실천이 보태질 때, 비로소 가능성이 현실로 바뀔 것이다. 

 

- 김창엽, <의료에는 돌봄이 없다>

 

 


 

- 팬데믹이 시작되고 1년쯤 지났을 때이다. 나는 돌봄과 교육을 주제로 한 초청 강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 교육 단체에서 주최한 행사였는데, 당시 국회에서 발의된 <온종일 돌봄 특별법>을 둘러싸고 운영 주체를 교육청에서 지자체로 이관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던 때였다. 시작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교사, 돌봄 전담사, 학부모 등 돌봄 교실 이전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던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발표를 마친 후에는 지정토론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자리가 돌봄 교실 이전을 두고 찬반 형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으면 했다. 돌봄 노동자와 교육 노동자 간의 갈등과 대립구도로 전개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교육에서 돌봄이 차지하는 의미와 지금까지 교육에서 돌봄을 어떻게 해결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짚어보고 싶었다. 대안을 찾으려면 우리 모두를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몰아간 구조적 원인을 이해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 당시 학부모 단체를 포함해서 돌봄 교실 지자체 이관을 반대하는 사회적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애물단지' 같은 돌봄 교실을 이참에 지자체로 넘겨버리려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 있었는데, 토론에 참여한 교사들은 이 사실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표했다. 토론회를 마치고 나니 이 판에서 누가 갑이고 을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교사가 갑이면 돌봄 전담사가 을, 학부모가 갑이면 학교는 을이었다. 그날의 장면은, 교육이 서비스산업이 되면서 공교육 안에서도 교육 주체들의 관계가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로 변형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신분처럼 나눠진 '노동 신분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토론의 대립 구도는 아이를 둘러싼 교사와 학부모의 대결처럼 되어갔다. 각자 일터와 가정에서의 업무 과중과 돌봄 부담을 피력하는 가운데, 이 삼자 구도 안에서 을 중의 을인 돌봄 전담사들이 그들을 중재하며 '돌봄의 공공성'을 의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서글프고 난감한 심정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돌봄 노동자'였다. 각자 자신에게 떠밀려 온 돌봄에 허덕거리며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 지금 지고 있는 짐에 먼지 한 톨이라도 더 얹힌다면, 더는 못 버티고 고꾸라질 것만 같은 사람들이 서로 내 짐이 얼마나 더 무거운지를 증명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갑과 을이 되어 돌봄을 놓고 싸우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돌봄을 둘러싼 갈등이 '여성들의 싸움'처럼 되어버린 모습을 보며 더욱 분하고 속상했다. '교육과 돌봄에 대한 성찰과 관계 정립'이라는 강연 목표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고, 돌봄의 탈환과 연대의 주체가 되어야 할 우리들이 ‘을들의 싸움'에 휘말리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으로 토론을 마쳐야 했다. 

 

- 근대 산업체제를 뒷받침하는 근대 교육은 산업 인력과 국가 인재로서 각각 '노동자'와 '엘리트'를 육성하는 이중과제를 설정하고, 이에 필요한 돌봄 비용은 가정과 여성에게 전가하는 모델로 수립됐다. 돌봄이 상품이 아닌 형태로 공급되는 비시장적 공급재가 되면서, 그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저평가 또는 미평가된 돌봄 노동이 누군가의 그림자 노동으로 묵묵히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돌봄 노동의 무가치화가 필수적이다. '돌봄'을 하찮은 일로 폄하해 온 것은 여성을 비롯해 돌봄을 수행하는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오랜 역사 동안 지배계급이 사용해 온 방식이지만, 자본주의 이후 이러한 무가치화 전략'은 여성과 자연을 통제하고 그들의 노동을 무상으로 전유하기 위해 훨씬 더 정교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팬데믹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필수 노동'의 사회적 가치에서 알 수 있듯이, 돌봄 노동은 그 자체가 하찮고 중요하지 않아서 무가치해진 것이 아니다. 물건의 수명을 일부러 단축시키는 '계획적 진부화 planned obsolescence'처럼 의도적으로 무가치화되었을 뿐이다. 

 

- 환경 경제학에서 '외부화 externalization' 개념을 설명할 때, 흔히 '개수대의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개수대에서 물을 틀고 사용하면서도 쏟아지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다 쓴 물이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외부로 내보내면 어딘가에서 다시 정화되어 깨끗한 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이치'라고 생각한다. 생산 영역에서 자연을 외부화하고 자연의 무상 노동을 당연한 듯 공짜로 전유했듯이, 재생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공장으로 콸콸 쏟아져 오는 노동자들은 하루의 노동을 끝내면 다시 어디로 흘러들어 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씻고 쉬는 걸까?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침이면 말간 얼굴로 학교에 쏟아져 들어온 어린이들은 일과가 끝나면 지친 얼굴로 쏟아져 나갔다가 어딘가에서 먹고 자고 쉬고 난 후에 다음 날 아침 학교로 돌아온다. 노동자든 아이들이든 어딘가로 내보내기만 하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마법 같은 일은 누가 담당하고 있었을까? 기업과 사회가 무상으로 전유해 온 돌봄 노동이 없었다면, 고용도 교육도 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성장과 교육 모델은 전적으로 돌봄을 무상으로 착취하고 무가치화한 결과이다. 우리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가해자를 비난하고 강력한 처벌을 호소하면서도 그가 마주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돌봄 노동을 무가치화해 온 사회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다. 

 

- 가령, 공교육을 국가 교육 이상으로 상상하지 못할 때, 국가 교육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교육 자체를 해체하는 교육 시장화로 쉽게 넘어가는 것처럼, 시장주의적 돌봄과 교육에 대한 반작용 역시 권위주의적 돌봄과 국가 교육 시스템을 재강화하는 방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 시장적 돌봄도, 국가의 돌봄도 아닌, 사회적 돌봄의 길을 찾는 과정에는 이러한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민을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우리는 '돌보는 국가'를 선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유명한 <말괄량이 삐삐>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오베라는 남자> 같은 책들은 북유럽 식의 합리적 사회관계와 차가운 복지, 관료적 돌봄 체계를 대안으로 승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판한다. 그 모델 역시, 국가가 인민을 돌보는 방식이 아버지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인간이 가축을, 주인이 노예를 돌보는 것과 같은 가부장적 모델로 구축된 '보모 국가', '보육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돌봄의 사회화는 분명 필요한 일이었고 지금도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돌봄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화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어떤 돌봄 관계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의를 빠트려서는 안 된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돌봄의 가치가 조금씩 재조명되기 시작했지만, 돌봄이란 개념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채우지 않으면, 지금까지 다른 많은 '선한 가치 개념'들이 그랬듯이 시장에서 공허한 기표로 소비되는 데서 그치고 말 것이다. 

 

-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 일은 자연의 이치이기에,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동안 돌봄의 기술도 그런 것이라고 여겨왔다. "만물은 만물을 돌본다"라는 협동과 공생의 관계가 자연의 섭리라면, 굳이 돌봄을 교육적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로부터 공존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돌봄 관계가 해체되어 버린 지금, 돌봄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 자연의 공생적 돌봄 경제를 파괴해 버린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런 경제 모델을 따라 이기적 주체를 키워낸 각자도생의 경쟁주의 교육은 우리가 자연의 돌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일터와 삶터와 배움터의 분리는 삶과 노동을 통해 사회 속에서 익혀왔던 돌봄의 기술을 익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교육과정은 엄청난 자원과 노력을 투입해서 학교 교육을 마치고도 자기도, 타인도 돌보지 못하는 존재로 세상에 나와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장기 성장 지체 과정'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유년기는 1318을 거쳐 2030으로 점점 연장되고 있지만, 기나긴 교육과정을 거치고도 미성숙한 존재로 사회에 나와 자라지 못한 어른인 채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제 '학교 돌봄'은 이런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 예전에 "스스로 서서 서로를 돕는 교육"을 모토로 오랜 시간 대안 교육 운동을 해왔던 분으로부터 이제는 "서로를 도와서 스스로 서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육을 통해 자립적 주체가 되어야 자신과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믿음은, 근대적 독립 주체로서의 개인을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반면, '돌봄으로부터의 배움과 성장'으로 교육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속에는 참된 돌봄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교육과 인간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교육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물었던 것처럼, 참된 돌봄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 돌봄을 받기만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이로 자랄 수 있겠는가? 돌봄을 하찮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곳에서 교육을 받은 이가 어떻게 돌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참된 배움은 책에 적혀 있는 진리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의와 평등, 공존과 공생의 기술을 삶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이 돌봄인지도 모른다. 이제 교육과 돌봄을 분리하고 위계화했던 오랜 역사를 철폐하고, 교육과 돌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면서 새롭게 상상하고 재구성해보자. 그 길을 먼저 갔던 수많은 발자국들이 우리 앞에 있다. 

 

- 채효정,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다>

 



- 의존에 대한 오해가 더욱 심화되었다. '의존적'이라는 말에는 무능력과 비참함에서부터 상호 호혜적이라는 의미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는데, 이렇듯 연속적 개념이 고려되지 못했다(본래 자립, 자급자족의 반대 상황은 독점 monopoly이다). 

- 그렇다면 기존의 이론에서 자율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근대는 인간이 자연과 신이라는 대타자를 극복하고, 지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시기이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모든 조건은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인간은 이성을 갖춘 지구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이성, 도덕, 윤리는 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자유로운 인간만의 우월한 특성이 되었다. 알려졌다시피,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 Sophocles의 작품 <오이디푸스 왕>에서 영감을 받은 프로이트 Sigmund Freud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통해 인간 발달 과정의 중요한 개념을 제안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와의 친밀성, 연대, 유대, 연결감을 거부하고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 '콤플렉스'를 뜻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계급 세습의 도구로서 중산층 가족, 남성 연대 male bonding, 남성들만의 동성 사회성 honhomo social, 여성 혐오 등 (근대) 가부장제 사회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이론의 모델은 '남성 이성애자'이므로 프로이트 자신이 인정했듯이 여성의 상황은 설명할 수 없고, 아들이 동성애자인 경우에는 이론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오이디푸스 이론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초기 19세기 유럽 중산층 이성애자 가족에 한정된 분석이다. 이 논의를 통해 인간이 어머니(혹은 양육자)로부터 단절되며 획득하는 자율성 auto-normy과 독립 개념이 인간의 유일한 본성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독립국가, 주권, 개인성, 국제정치학에서부터 일상 문화, 시민권 개념까지 인간 생활 전반에 자율성 개념은 응용 및 확대되었고, 이후 남성 중심 사회의 정초가 되어 여성성 비하로 연결되었다. 
 
- 환경, 보살핌, 공존, 생태주의는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낯선' 이슈이다. 한국사회의 젠더는 서구처럼 국내 및 가정 domestic에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외세에 대한 공포·대항·억압·의존·우월 등 자기 타자화의 산물로서, 자신을 국가의 대표로 여기는 한국 남성의 보편적 자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의 비유인 강자와 약자의 젠더화를 적용하여, 강자인 외세는 '남성'이고 약자 혹은 피해자인 우리(남성)는 '여성'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영원한' 피해 의식의 근원이다. 이를 '식민지 남성성 colonial masculinity'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로컬에서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외부의 적을 누구로 상정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남성 문화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살핌의 가치를 주장하거나 보살핌은 성 역할이 아니라는 논리가 수용되기 어렵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초저출생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가족에 대한 생물학적·본질주의적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족 내 성 역할에 대한 규범에는 큰 변화가 없다.  
 
- 러딕의 <모성적 사유>의 핵심은 노동과 언어의 관계이다. 이 책은 인간의 노동 중 가장 일상적이고 중요하지만 그 중요성이 무시되어 온 보살핌 노동을 언어화하고 이를 평화와 연관 짓는 것을 주제로 한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제도화된 실천, 관행 practice이다. 성 역할로서의 모성 노동 mothering과 성별을 불문하여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모성적 사유 maternal thinking는 다르다. 러딕의 논의는 개념은 경험과 노동으로부터 형성된다는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언어 철학과 연동한다. 

- 보살핌 윤리는 일반의 오해처럼 모성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고 확장한다. "말하는 행위는 말하는 자를 변화시킨다"(92쪽), "모성성이 보살핌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104쪽), "모성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경험의 일반화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려는 것이다"(117쪽)와 같은 문장들은 보살핌 윤리와 여성의 노동, 어머니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보살핌 노동은 '여성적 가치'가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흑인적 가치', '장애인적 가치', '이주 노동자의 가치'와 같은 식으로 그가 하는 노동을 개인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폭력이다.

 

- 인류세, 팬데믹 시대에는 지구와 자본주의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다. 지금 보살핌 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추구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보살핌 노동만으로 지구를 구할 수는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들의 주장대로, 탈성장만이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러한 거대 담론은 인식 차원에서 유용할 뿐, 비현실적이다. 

- 남성 문화는 돌봄을 하찮게 여기거나 '모성'처럼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여성에게 돌봄은 노동시장 경력부터 자아 형성까지 전 생애에 걸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삶의 근본적인 고민이다. 이처럼 돌봄 노동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이것이 젠더 문제라는 인식에서 온다. 돌봄 노동을 가사노동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봄은 공기처럼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실천되고 있다. 돌봄의 영어 표현인 케어 care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 "I don't care(관심 없어, 신경 쓰기 싫어"의 사례가 가장 문맥에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케어는 '나'의 외부(자연, 타인 등) 세계에 관심을 갖고, 염려하고, 마음을 쓰는 일이다. 일상생활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인 어감이든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해?"라고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돌봄의 본질은 관계성과 연결이다. 연결되지 않고 생명체는 생존 불가능하다. 공사 영역할 것 없이 상호 존중과 협력이 없는 사회는 하루도 지속될 수 없다. 한국의 정당은 당파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입장이 다른 집단일수록 협력이 필수적이다. '약자'는 종전체의 필연적인 일부이지, 약육강식이나 승패의 결과가 아니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 공동체가 개인의 생로병사 전 과정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이다. 

 

- 보살핌 노동에서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상대의 필요와 요구에 집중하고, 그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인공지능과 무인운전도 이 점을 보완해야 상품화 및 상용화가 가능하다. 

 

- 보살핌은 막연한 선행이 아니다. 보살핌 노동이 구성원에게 강요되며 피해 의식과 분노, 가족 내 갈등으로 연결되는 사례를 많이 본다. 이는 보살핌이 가족 관계에서의 위계(시부모와 며느리)나 성 역할 등으로 배당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보살핌 노동이 제대로 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보살핌의 네 가지 요소들, 즉 주의력attentiveness, 책임 responsibility, 능력 competence, 응답 responsiveness을 고려해야 한다. 보살핌은 책임이나 의무감의 발로여서는 안 된다. 보살핌은 기꺼이 하려는 의지 willingness의 산물이다. 이제까지 보살핌노동이 낮은 지위에 머물러 온 것은 이를 사적인 영역에 제한하고, 여성의 역할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에 맡기고 방관해 온 결과이다. 돌봄의 가치는 남녀 중 누가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보살핌 윤리학은 경쟁, 계약, 합리성 등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기존의 사회규범에 돌봄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다른 목소리'이다. 경쟁 위주 사회를 당장 돌봄 사회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그러기 어렵다. 보살핌 윤리는 공적 영역에서 통용되는 가치 외에 규범의 다양화를 주장한다. 


- 정희진, <보살핌 윤리와 페미니즘 이론>

 

 


 

- 독일에서는 2010년대에 접어든 이래로 '돌봄'과 '혁명’의 연결을 기초로 경쟁사회를 연대 사회로 변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돌봄 혁명 Care-Revolution' 논의가 꾸준히 진행 중이다. 한 사회의 무게중심을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돌봄으로 옮기고자 하는 이 논의는 인간과 인간이 경쟁자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별적인 삶을 새로운 공동체로 연결하고 구축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돌봄 혁명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이러한 비판을 연대 사회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비전과 결합하고자 한다.

 

- 이 집단행동 회의는 사회적 재생산이 우리 모두와 관련된 문제, 즉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과 관련된 문제라는 인식을 같이하며, ‘필요 지향적인 돌봄 경제'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가?", "어떻게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돌볼 것인가?", "우리는 어떤 돌봄을 받기를 원하며 훌륭한 의료의 제공은 어떻게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집단행동 회의의 마지막 날에는 '돌봄 혁명 집단행동회의 결의문'이 채택되고 이를 바탕으로 '돌봄 혁명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 미즈의 빙산 모델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피라미드형'으로 이루어진 빙산의 은유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경제가 실제로는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의 10분의 9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비가시적 경제를 바탕으로만 그 유지와 성장이 가능한 '의존적 경제'라는 점을 명확히 나타낸다. 이뿐만 아니라 가시적 경제와 비가시적 경제가 서로 대등하게 협력하는 '공존의 관계'가 아니라, 가시적 경제가 비가시적 경제의 핵심을 이루는 '여성', '자연', '식민지'를 착취하는 '착취의 관계'로 바라보며, 가시적 경제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한 비가시적 경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 사회적 재생산 위기는 비단 독일만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경험하고 있는 전 세계적 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돌봄을 둘러싼 혁명적 변화 없이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독일 돌봄 혁명 논의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돌봄을 어떻게 하면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조직해 나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사회적 재생산 위기를 항시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현재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지 탐색하는 작업은 한국사회에서도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 안숙영, <돌봄은 혁명이 되어야 한다>

 


 

- 보건의료부터 가사노동에 이르는 돌봄 노동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돌봄의 '시장화'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단일 국가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의 상품화는 누가 돌봄 노동을 구매할 자격과 자원을 갖고 있는가에 따른 돌봄 분배와 수혜의 격차를 만들어 낸다. 지난 40년간 북반구의 경제선진국은 아이 양육, 환자 돌봄, 인구 고령화로 늘어난 노인 돌봄 문제를 '이주'를 통해 해결해 왔다. 이주자는 '우리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값싸게 고용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각국은 보건의료, 간병, 아이 돌봄과 양육, 노인 간호와 가사노동 분야의 '양질의 돌봄 노동자’를 데려오기 위해 앞다투어 이주 제도를 만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심화로 미국 등과 같은 경제부국은 기존의 공공복지를 축소하고, 복지 서비스를 시장화하면서 돌봄을 사적으로 해결할 일로 간주했다. 전통적인 유럽의 복지국가들도 보건의료와 돌봄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돌봄에 특화된 외국인을 대규모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 싱가포르, 대만, 한국 같은 아시아 경제선진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 전 지구적인 돌봄의 시장화는 인종·언어·생활양식·계급이 다른 사람들을 돌봄 제공자와 돌봄 수혜자로 분리하고 또 연결한다. 이성애 중심의 백인 중산층과 아시아 중산층 가족 구성원의 돌봄 요구는 삶의 질 향상, 복지 혜택, 돌봄의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승인된다. 이들은 '돌봄 받을 자격을 갖춘 존재'이다. 남반구의 수많은 여성과 보건의료 종사자는 "당신의 실업, 빈곤, 박탈감을 스스로 해결하라"며 이주를 권유하는 국가정책 때문에 집을 떠난다. 북반구 국가들은 잘 교육되고 훈련된 양질의 돌봄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돌봄 노동을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가부장적 각본은 새로운 형태의 돌봄 성차별주의-인종주의를 낳는다.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는 돌봄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노동 단가는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은 점차 인격권마저 상실한 '하인'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돌봄 노동의 전 지구적 재분배는 돌봄을 둘러싼 국가, 계급, 젠더, 인종 간의 불평등을 강화한다. 나는 이 글에서 돌봄의 이주가 구성해 가는 새로운 불평등 지도 그리기 mapping를 통해 '돌봄의 자격'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고자 한다. 

 

- 국가 간 의료 및 돌봄 격차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과거 유럽의 식민지배국가들은 기독교 선교를 통해 피식민 국가에서 간호사를 양성하여 자국으로 데려갔다. 197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경제 호황으로 공공의료체제가 확립되면서 생긴 노동자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의료 돌봄 이주의 규모가 확장된 것이다. 인프라와 일자리의 부족으로, 개도국이 배출한 보건의료 종사자 또한 자국에 남아 있기보다는 이주를 선호하게 된다. 경제선진국들은 돌봄 노동자의 교육과 훈련에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싼 비용으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외국인 전문인력을 선호한다. 빈곤국이나 개도국에서 교육받은 보건의료종사자들은 더 나은 일터 환경과 경제적 보상을 위해 선진국으로 이주한다. 두뇌 유출 brain drain이라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현재 보건의료와 돌봄 노동 분야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 그렇다고 해서 전문직 보건 인력이 자신의 전문성이나 학력에 걸맞은 위치로 이주하는 것도 아니다. 캐나다로 이주한 외국인 간호사를 연구한 부콜라 살라미 Bukola Salami와 시오반 넬슨 Sioban Nelson은 국제 간호사들이 취업 과정에서 보건의료체제의 가장 낮은 위치로 편입되어 '하향 이동'과 '탈숙련화'를 경험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국제간호사들은 내국 간호사에게는 금지된 초과노동을 요구받거나 최저임금 이하의 보상을 받고, 임금 체불에 시달린다. 하지만 고용주나 민간 브로커가 자신을 추방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조건들을 감내한다. 또한, 이들은 외국인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병원의 간호사가 아닌, 가정집의 상주 간병인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 최근 국외에서 대규모로 돌봄 이주자를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 또한 한국 고학력 여성들의 취업과 사회 진출을 위해 '저렴한' 외국인 가정부를 '수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노동시장의 성 불평등이나 장시간 노동 구조로 노동자의 시간과 열정을 빼앗는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회피하고, 가족 내 돌봄 노동의 공평한 분배를 문제 삼지 않은 채 돌봄 공동화를 다시 '여성'의 일로 환원하는 일이다. 한국사회가 현재의 돌봄 위기를 맞이한 근본 원인은 여성이나 이주자가 돌봄 노동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 내 민주화를 통한 남녀 간, 세대 간 돌봄 노동의 공유와 정의로운 분배를 학습하지 않은 채 성인이 된 한국인들은 모든 역량과 사회적 인정 욕구를 임금노동에서 찾았다. 현재의 돌봄 체계는 가정이나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무급노동, 여성 돌봄 노동자의 저임금 유급노동, 그리고 해외에서 유입된 돌봄 이주자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봄 공급망에는 남성이 없다. 

 

- 결국 사회를 운영하고 재생산하는 데 가장 필요한 돌봄은 다시 '여성'의 일로 본질화 되고, 돌봄 노동자의 노동권 부재는 여성 간 글로벌 계급 격차로 인한 차별과 갈등의 문제로 재현된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이전 세대 여성들처럼 돌봄 노동의 '여성화'라는 트랩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돌봄노동의 책무를 갖지 않는 남성 표준적인 임금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돌봄의 수행자가 주로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의 모성·사랑·헌신을 당연하게 전제하거나, 보살핌·양육·사랑이 생물학적으로 여성 신체에 묶여 있는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 또한, 돌봄은 사랑·배려·헌신의 가치를 지향하지만, '돌봄 노동'은 돌봄 제공자와 수혜자의 상호 협력만으로 원활하게 유지되기는 힘들고 혼자 오랜 시간 할 수 없는 노동이므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분배되어야 한다. 돌봄의 여성화에서 벗어나 돌봄을 어떤 인간이라도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윤리적 능력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돌봄 노동은 전 지구적 차원의 여성 이동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도 없고, 해결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현상은 기존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를 강화하는, 정의롭지 못한 해결책일 뿐이다. 한 국가의 사회적 돌봄 역량을 강화하는 일은 단순히 외국인 이주자를 싼값에 고용하여 해결할 수 없다.  


- 김현미, <국경을 넘는 여자들>

 

 


 

- 폭염으로 인한 피해나 잦은 전염병을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도 함께 경험한다는 것은 생태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장 해수면 상승으로 거주지가 물에 잠기거나 인간이 버티지 못할 정도의 고온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먹을 것이 부족해져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렇듯 곳곳에서 감지되는 기후위기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위기의 성격에 대한 진단, 개입의 방향에 관한 판단, 근본적인 변혁의 필요성과 체제 전환에 대한 요구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일 수 있지만, 이제 기후위기에 관한 논의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 갈 것인가를 둘러싼 경합이 펼쳐지는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불과 10여 년 만에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응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서, 과연 서로가 주장하는 기후위기 대응 방식이 적절하고 충분한지로 옮겨 온 셈이다.

탈성장, 해답이 될 수 있을까? 

 

- 탈성장론은 1970년대 형성된 이래로 성장지상주의에서 탈피해 에너지와 물질의 사용을 자발적으로 줄이고, 가치를 재조정하며, 제도를 바꾸어 인간과 생태계에 대한 해를 줄이는 것을 목표해 왔다. 따라서 처음부터 '돌봄'이라는 가치에 친화적이었다. 실제로 탈성장론과 에코 페미니즘은 비슷한 시기에 발전하기 시작해 유사한 가치를 목표로 삼았다. 앞서 이야기했듯 글로벌 북반구 중심의 담론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사실 탈성장론은 애초에 글로벌 북반구의 생활방식이 환경 및 노동 착취에 따른 비용을 다른 지역으로 전가하면서 '제국적 삶의 양식 Imperial mode of living'을 유지해 왔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제국적 삶의 양식은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여성이나 글로벌 남반구(혹은 남반구 출신 사람들)에 떠맡기고,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들의 자원을 약탈하며 유지되었다. 소위 '발전'을 이루었다는 나라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영위하는 삶은 글로벌 남반구 시민들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제국적 삶의 양식을 비판하는 탈성장론은 젠더 및 탈식민의 문제의식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었어야 한다. 

- 물론 탈성장론을 한 가지 경향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데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 환경 거버넌스와 지속 가능한 성장, 녹색 성장, 윤리적 소비 등 성장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흐름이 지배하면서 탈성장론 자체가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탈성장론으로는 성장의 폐해를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 그러나 탈성장론은 생태와 젠더 및 식민 문제 사이에서 늘 생태문제를 우선해 왔다. 이는 2016년 형성된 '페미니즘들과 탈성장 연대  Feminisms and Degrowth Allance, FaDA'가 주류 탈성장론에 던진 가장 큰 비판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이후 탈성장론이 돌봄을 중심으로 가치를 전환하고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면서 연대를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관계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인다. 돌봄의 가치에 대한 강조, 자연을 수탈의 대상으로 여겨온 근대 자본주의 및 여성의 몸과 노동력 지배에 대한 비판 등 원칙적인 차원에서는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지만, 생태문제의 긴박성 앞에서 젠더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비판은 계속되는 중이다. 

- 타인에게 전가하는 돌봄 노동의 총량을 줄일 수도 있다(변화시키기). 그러나 기본적인 돌봄의 필요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금보다 좋은 사회란 더 많은 돌봄이 이루어지는 사회이지 돌봄의 필요가 줄어드는 사회는 아니다. 따라서 여성에게, 아랫사람에게 맡겨지는 방식으로 자신만 돌봄을 회피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기술을 통해 돌봄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것(이전하기) 역시 근본적인 해결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떤 노동은 기계로 대체할 수 없기도 하고, 기계화가 노동의 결과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 장기적으로 더 많은 노동과 관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결정적으로 돌봄과 관련된 모든 노동을 기계화하면 막대한 생태 비용이 든다. 최근 들어 돌봄 노동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가전제품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이때 자원이 엄청나게 소비된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빠른 주기로 만들어지고 버려지면서 쓰레기 증가에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게다가 글로벌 북반구 소비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남반구의 저임금 노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무급으로 이루어지던 노동을 유급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 국가가 돌봄을 책임지는 복지국가의 모델 역시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볼 때, 서구 복지사회를 가능하게 한 대량생산 대량소비사회는 글로벌 남반구의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고 현재의 환경 재앙을 가져온 화석연료체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 돌봄을 사회의 중심 가치로 전환하려는 목적이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 데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돌봄의 문제를 단지 돌봄 부담을 경감하는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될 때, 그 해결책은 지구적인 불평등이나 환경 정의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겪고 있는 돌봄의 위기는 기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과 이를 통해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돌봄의 현장에서 나와 내가 속한 사회, 나아가 인간 너머의 세계를 돌보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최일선 공동체의 일원이며, 돌봄의 공백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투쟁의 최일선일 것이다. 

 

- 백영경, <지구의 성장이 멈추는 곳에서 돌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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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이나 산소처럼 돌봄 역시 인간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이토록 저평가된 배경에는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을 분리하고 재생산노동을 여성에게 떠넘겨 온 역사의 흐름이 있었다. 근대적 인간관과 독립성의 강조에서 인간의 의존은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할 숙제로 여겨졌다. 성장 및 개발 중심사회는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몸을 추앙하면서,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몸을 쓸모없는 몸으로 규정해 왔다. 돌봄 노동을 저임금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평가가 필수적이다.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돌봄 위기는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인류의 지속이 가능하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 간의 돌봄 부정의를 해소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 세계에 돌봄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 역사적으로 돌봄을 둘러싼 현실을 여러 맥락에서 진전시킨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힘이었다. 집 안에 갇혀 숨 막혀하는 돌봄을 사회화하는 것이 성 평등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돌봄을 '노동'으로 명명하고, 돌봄 노동을 개인 간의 사랑과 헌신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만들었다. 즉,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은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나 필연적 노동이 아님을 선언하며, 돌봄 노동을 자연화하고 탈가치화해 왔던 역사에 저항했다. 1972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을 펼친 페미니스트 학자 실비아 페데리치 Silvia Federici는 "그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부불 노동 unpaid work(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이라고 말한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도 공적 영역처럼 권력, 위계, 경제가 개입하는 공간임을 밝혀내며, 돌봄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냈다.  

 

- 조한진희, <돌봄은 진실을 묻는다>

 

- 핀란드의 '오픈 다이얼로그'를 소개한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대화를 통해 대안적인 치유 방식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가 오픈 다이얼로그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를 통한 치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초발 정신질환 회복률을 보이기 때문이다. 5년간의 오픈 다이얼로그 연구에 따르면, 참여자의 86%가 학업이나 정규직 일자리로 복귀했고, 18%가 정신장애 증상이 남아 있었으며, 14%가 장애 수당을 받았다. 참여자 중 29%만이 치료 중 신경이완 약물을 복용했다. 반면 전통적 프로그램을 통해 치료받은 사람들은 2년이 경과했을 때 기준으로 21%만이 학업이나 일자리로 복귀했고, 50%가 정신장애 증상이 남아 있었으며, 57%가 장애 수당을 받았다. 특히, 전통적 프로그램 참여자의 100%가 2년간 신경이완 약물을 처방받았다.

 

- 치료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픈 다이얼로그 클리닉은 첫 연락을 받고 24시간 이내에 미팅을 주선한다. 연락은 '초점 당사자'(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을 그들 식으로 표현한 것), 친인척 또는 전원 기관 등을 통해 받는다.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사회적 관계망에 있는 주요 구성원을 초기 미팅에 초대한다. 직업 재활을 지원하는 지역 직장, 의료보험회사와 같은 공식 기관 종사자, 직장 동료, 이웃, 친구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여러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며 당사자와 그의 가족을 지원한다. 처음에 팀이 만들어지면, 외래와 입원 환경에서 환자가 원활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당사자와 그의 가족은 참여자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토론을 진행한다. 제대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며 의사소통 역량을 강화한다. 오픈 다이얼로그에서는 의료진이 '초점 당사자' 및 참여자들과 최대한 평등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의료진은 스스로를 '무지'의 위치에 두고 치료에 참여한다. 의료진은 관계망 속에 있는 각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실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전문가이기보다는 협력자로서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기존 정신의학 패러다임 안에서 의사들은 당사자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진단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하지만 그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아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당사자이다. 오픈 다이얼로그에서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되레 '연민'을 가지고 환자와 관계 맺는다. 여기서 연민은 동정과 시혜의 감정이 아니다. 페마 초드론 Pema Chodron의 말처럼 "연민은 치유자와 상처받은 자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평등한 사람들 간의 관계이다.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잘 알고 있을 때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두움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공유된 인간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연민은 현실이 된다." 

 

- 정신장애에 대한 의학적인 담론은 넘쳐나지만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담론과 지식, 통계, 정보의 양은 너무도 부족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정말 돌보고 싶음에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해 잘못된 돌봄의 제스처를 행하기도 한다. 의료 협동조합 살림의원의 장창현 원장이 번역한 <비판정신의학> 말미에는 보통 '광기'로 불리는 상태를 '신경 다양성'으로 다시 고쳐 쓰자고 주장한 활동가 다리엔 레이철 웰치 Darien Rachel Welch의 말이 등장한다. "저는 받아들여짐의 반대편에 있는 삶을 경험할 기회가 있다는 데에 신경 다양성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경 다양성은 당신이 고장 났고, 손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계속해서 강요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갖고 노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박목우,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 이후 무대책 상황에서 홀로 자가격리에 들어갔던 장애 운동 활동가 김시형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가격리가 되고 내가 할 수 없는, 내가 못 하는, 나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것들과 만났을 때 이 장애가 드러나는 거지. 자가격리는 나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정체성을 상실시켜. 내가 남성이든 팀장이든 뭐든 나머지 정체성은 다 상쇄가 돼. 오로지 장애라는 정체성만 남을 때의 무기력함... 나는 그런 걸 느껴. 그랬을 때 사회성이 없어지지. 사회적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 ○○○이 되는 것 같아." 

 

- 이런 '배려'의 본모습은 곧 드러났다. 서울시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강화하며 건물 외벽에 내걸었던 "어느 마스크를 쓰시겠습니까?" 포스터는 소위 대박이 났다. 직관적인 전달력과 표현 때문이었다. 왼편에는 집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이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산소마스크를 쓴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다. 이는 공익이라는 감투를 쓰고 감염병의 문제를 개인화하고, 장애인(특히 호흡기를 착용하는 장애인)의 삶을 비참하면서도 공동체에 부담이 되는 것으로 혐오 발화하는 캠페인의 전형이었다. 오른편에 누워 있는 이가 청도 대남병원 폐쇄 병동에 갇혀 있던 정신장애인인지, 콜센터의 노동자인지, 학교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못한 발달장애인인지 포스터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방역에 도움이 되는 몸과 방역을 위협하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몸을 나누고, 왼편의 사람은 오른편의 사람의 비용을 같이 부담하고 있다는 논리만 보여줄 뿐이다.  

- 이런 인식과 재현은 돌봄에 관한 문화를 보여준다. ‘부양하는 자'가 있어야 '부양받는 자'도 존재한다.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제공받는 자'가 구분된다. 이 구분 안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 '돌봐주는 것'과 같은 행위가 가장 중요한 윤리가 되고, 그 행위 이외의 것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하고 일정 정도 '그래도 되는 것'이 된다. 그 순간 우리 사회는 질문을 멈추고, '돌봄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돌봄은 기계적인 노동이 된다. 돌봄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우리 사회의 돌봄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돌봄에 합당한 과정과 자세, 태도는 또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갈등이 발생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와 같은 모든 사회적 논의는 단순한 돌봄의 행위나 기술에 압도되어 부차적인 것이 된다. 

 

- 앞에서 지적한 '장애인' 모순, 시설화 돌봄, 돌봄의 권력화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서 마치 그것이 장애인에게 내재하는 '특성'이자 장애인을 대하는 돌봄의 '전문성'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장애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 것처럼 장애인의 돌봄 역시 모든 인간 돌봄의 미래이다. 장애인의 돌봄 현실이 결국 우리 사회의 돌봄 현실이자, '비장애인' 다수가 겪을 돌봄의 미래를 예고한다(이것은 장애등록 여부와는 관계없다). 

 

시버스는 '건강함' 혹은 '비장애 상태'는 기껏해야 인간의 임시적인 정체성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장애'를 인종, 젠더와 마찬가지로 사회 분석을 위한 하나의 틀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손상과 장애를 서로 교통 가능한 범주로 바라보며, 인간 모두에 속한 보편적 문제로서 장애를 바라보는 접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흩트리는 것이며, 이러한 접근은 특정한 몸만을 선별하고 때로는 배제하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함으로써 '사회적 몸'을 확장한다. 

 

- 장애를 지닌 몸은 발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손과 귀로 책을 읽으며, 소리를 지르면서 안정감을 찾는다. 바닥을 기고, 입으로 서명하며, 때로는 경직된 팔과 발로 행인을 걷어차기도 한다. 이 노골적이며 거친 현실, 몸의 일상, '건강한 사람'이 거의 상상하지도 못할 물질성을 경험하는 신체가 '예외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설계하는 데 중심으로 설정될 때, 그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장애화 요인을 제거해 나가며 인간 모두가 보다 유리한 생존을 담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애'를 중심으로 돌봄 사회를 구상하는 일은 결국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의 문제를 인간 보편의 필연적인 문제로 직시하는 일이며, 자연의 필연이자 인간 세계의 수많은 우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야 스스로의 자기 보존과 더 큰 완전성에 유리해질 수 있는 것인가를 탐구하는 일이다. 

 

- 전근배, <장애를 중심에 둔 돌봄 사회>

 

 

- 앞서 말했듯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과 제도는 아직도 강고해서 여전히 여성들이 더 많이 돌본다. 가정관리 및 가족 보살피기를 포함한 가사노동시간을 살펴보면 맞벌이 부부와 외벌이 부부간 남편의 가사노동시간에는 차이가 없었고, 한국 남성의 가사노동시간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이렇듯 여성들은 돌봄 노동의 주체로 호명되는 반면, 정작 적극적 돌봄이 필요할 때는 소외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특히 아픈 여성들을 인터뷰해 보면, 돌봄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삼성서울병원·국립암센터 등의 2019년 공동연구에 따르면, 암 환자가 기혼 남성일 때 아내가 신체적인 도움을 주는 비율은 86.1%였으나, 암 환자가 기혼 여성일 때, 남편이 신체적인 도움을 주는 비율은 36.1%에 불과했다. 여성은 딸(19.6%), 아들(15.8%), 며느리 (12.7%)에게 부탁하거나,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12%)도 상당했다. 정서적 지원의 경우 남성 환자의 84%가 아내에게 의지했지만, 여성은 32.9%만이 남편에게 의지 했고, 딸(28.5%)과 아들(17.7%)을 통해 그 간극을 메웠다. 
 

- 돌봄 두레는 돌봄이 필요한 순간 돌봄이 가능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돌보며 나, 타인, 우리라는 경계를 질문할 수 있고 돌봄의 기본단위가 되고 있는 혈연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물을 수 있는,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제도와 문화를 바꾸면 특정 존재가 약자화 되는 현실이 변화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윤리이자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로 좀 더 빠르게 이행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혈연관계가 아닌 이웃 노인이나 어린이, 아픈 이를 품앗이하듯 돌보는 게 당연한 사회적 정서. 돌봄이 불가능할 정도의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게 아닌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을 보면 어색해하는 분위기. 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적절히 보살필 줄 아는 것을 인간의 중요한 역량을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눈길을 보내는 시선. 요즘 '꼰대'라는 말이 모두에게 기피 대상이 되는 것처럼, 돌못자(돌봄 못하는 자) 혹은 돌무자(돌봄 무능력자) 같은 신조어가 생길지도 모른다. 

- 조한진희, <의존과 질병의 '정상성'>

 

 

- '자기 돌봄'의 개념이 급속도로 자기 개발 담론의 아류로 변형된 것은 단적인 사례이다. 자기 돌봄이든 세계 돌봄이든, 미니멀리즘이든 웰빙이든, '가치'를 소비로 획득하려는 순간 우리의 신념과 선의는 시장으로 재빠르게 포획된다. 시장화된 돌봄은 더욱 극심한 성별, 계급, 지역 간 돌봄 불평등과 양극화를 초래했다. 부유층의 럭셔리한 돌봄이 특권이자 과시적 사치 소비로 자리매김하며 상징 자본이 될 때, 다른 계급에게는 '없음의 상징'이 된다. "피트니스는 부르주아의 신앙"이라는 말은 "돌봄은 부르주아의 신앙"으로 고쳐 써도 무방할 정도이다. 건강, 몸매, 피부, 치아, 헤어, 요리, 인테리어, 식물 가꾸기, 아이와 가족 돌보기 등 오늘날 셀럽들의 라이브 쇼에 오르는 단골 소재들은 모두 중산층의 과도한 '케어 신드롬'을 반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안전과 건강에 대한 욕망은 생명을 도덕화한다. 잘 가꿔진 몸, 표정, 품행이 곧 자신을 잘 돌보며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도덕적 삶의 징표가 되면, 돌봄은 그런 생명 도덕을 수행하는 교리이자 규칙이 된다. 

- 오늘날, 차이와 개성을 강조하고 다양성과 각자의 수월성을 내세우며 '개인 맞춤형'이라는 새로운 교육 사조를 이끌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발과 혁신 담론은, 이런 종류의 자기 돌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행평가나 진로 교육, 최근에는 고교학점제로 대표되는 개인 맞춤형 교육은 개인에게 품행과 습관으로 부착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돌봄’을 은밀하게 교육적 성취와 결합시킨다. 지금 유행하는 자기 돌봄은 자기 자본화의 논리로서 자기 개발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 문제는 이런 자기 개발형 각자 돌봄 교육이 학교로 물밀듯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공교육 시스템은 글로벌 자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대표적인 공공인프라 시장이다. 신자유주의 초기의 교육 민영화 모델이 사교육 시장으로 대표되는 교육의 외부화였다면, 포스트 신자유주의 모델은 외부화에서 내부화로 선회한다. 

 

- 대안 교육 운동 초기, 많은 대안 학교는 제도 교육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의 대안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학교 밖에서 모색한 배움의 공간과 방식,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다양한 상상력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 교사들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면서 학교 운동으로 흘러들어 가기를 바랐다. 그 시간 속에 축적된 교육, 노동, 돌봄을 통합한 교육 사례들은 소중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빈민 운동, 노동야학, 지역 공부방 운동으로 이어지는 지역공동체 교육 속에도 돌봄과 교육이 결합된 수많은 경험적 사례들이 남아 있다. 흑인의 인권과 존엄을 증진시키기 위한 교육권 투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어린이들의 등하교를 보호하고 아침 급식을 제공했던 블랙 펜더당 black pander party도 눈여겨볼 사례이다. "돌봄이 없이는 교육도 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돌봄 자체가 제도권 교육에 맞서는 자치와 평등 교육의 일환임을 보여주었다. 게토의 어린이들이 돌봄 없는 사회에서 패배하지 않도록 지켜내면서, 훗날 스스로 존엄한 존재로서 공동체를 돌보는 이로 키워내는 참교육의 과정이기도 했다. 

 

- 채효정,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다>

 


 - 197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여성주의 제2물결 the second wave feminism은 여성이 남성의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차별·억압·전쟁 등의 문제를 분석하며 그 안에 근대적 남성성이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현재와 같은 남성성 개념을 형성한 과정과 기제를 밝혀내려는 노력이 이른바 정신분석 페미니즘 Psychoanalytic Feminismosm이다. 낸시 초더로 Nancy Julia Chodorow의 논의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초더로는 성별 차이가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성별 분업의 결과, 여성이 어머니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남아와 여아는 성별화 된 개인화 과정을 겪는다. 남성에게 정신적 개체화와 독립의 과제를 최초로 요구하는 타자는 어머니이다. 남성 자아는 '어머니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나', 즉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보살핌을 극복해야 한다는 방어적 자율성이 성별화 된 양육 과정을 통해 남성성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자율성이라는 전통적 이상은 여성성, 의존, 연결의 상대어로서 혹은 이러한 가치들을 극복함으로써 완성된다. 

- 초더로의 논의는 젠더화 된 자율성을 개념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이후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아이리스 영 Iris Marion Young은 여성주의 정신분석, 대상-관계 이론 object relations theory(대시 표현은 필자)에 근거해 남성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어떻게 남성 지배를 구조적으로 살피지 못하고 과도하게 심리화하는지, 결국 구체적 권력관계를 간과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비판했다. 아이리스 영은 남성 지배의 원인을 성별화 된 인성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남성에게 권력을 분배하는 사회제도의 조직과 운영 방식, 자원 분배 방식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했다. 또한, 그 구조가 재생산되는 체제를 연구할 필요성 역시 강조했다. 그럼에도 타인과의 분리에 의해서만 자율성이 형성된다고 여긴 남성 중심적 인간의 조건에 대한 초더로의 지적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임에 틀림없다.

- 보살핌 윤리를 국가안보와 전쟁 비판으로 연결시킨 사라 러딕 Sara Ruddick은 그의 책 <모성적 사유>에서 군대와 전쟁 제도 안에 전제된 성별성을 가시화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근대민의 보호자로 만들어 '보살핌' 역할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공공 영역에서 보살핌 윤리를 제거해 버린 현실을 꼬집었다. 이는 서구 근대체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이다. 이렇듯 보살핌 이론은 '독립 대 의존'이라는 뿌리 깊은 이분법을 해체함과 동시에 두 개념을 재개념화 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이지도 완전히 의존적이지도 않다. 이 둘은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많은 사람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이사'는 사원들과 비서, 운전기사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공동체는 여성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개체로서 자율적 인간은 본질적으로 소외와 고립에 시달리고, 더 나아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개별 남성은 친밀성과 상호 돌봄 능력을 부정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그들의 사회성은 남성 연대이지, 진정한 의미의 관계 맺기 능력이 아니다. 이들의 결핍을 해소하는 가장 규범적인 형식이 성 산업이며, 대개는 타인(여성)에 대한 폭력과 음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 지금 한국사회에서 '보살핌'하면 연상되는 치매 부모 간병인들이나 요양보호사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돌봄의 외주화(시장화)나 돌봄 노동자의 노동조건, 임금 문제 등은 경쟁과 성과 위주의 사회에서 보살핌이 저평가되는 현실과 연관되어 있다. 보살핌에 대한 인식이 노동자의 지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보살핌의 가치에는 인간 상호 간에 그 필요를 인정하고 염려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 caring about, 돌보는 책임 자체 taking care of, 충족시켜야 할 보살핌의 실제 노동, 즉 실행하는 것 care-giving,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 보살핌에 응답하는 행위 care-receiving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 정희진, <보살핌 윤리와 페미니즘 이론>

 
 

 

 

 

 
돌봄이 돌보는 세계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인류의 문명화 또는 시민됨(civilization)의 첫 번째 증거로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를 꼽았다고 한다. 그 시기 부러진 대퇴골이 다시 붙었다는 사실은 뼈가 부러진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돌봐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흔히 이를 근거로,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버드대학교 성인발달 연구팀이 75년간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을 정말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요인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공동체와의 ‘연결’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돌봄과 상호의존이 부와 명성보다도 삶을 지속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돌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성장 및 개발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은 일찍이 생산성이 없고 가치 없는 행위로 저평가되었고, 특히 ‘여성성’과 결부되어 집 안에서 여자들이 도맡아야 할 성역할로 축소되었다. 이후 국가가 돌봄을 일정 정도 책임지는 돌봄의 사회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마저도 저임금 노동이 되어 시장에 내맡겨져 왔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에는 “청소 유니폼의 비밀이 뭔지 알아? 우리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는 거야”라는 대사와 함께 샐러리맨들이 청소 노동자들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존중받지 못하고 투명하게 지워지는 다양한 돌봄 노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 이후, 한국에서도 돌봄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코호트격리 중심의 방역대책으로 인해 돌봄이 필요한 중증 장애인과 환자들은 시설에 격리된 채 감염을 넘어 생존권을 위협받았고, 어린이집과 노인주간보호소가 연달아 폐쇄되며 수많은 시민이 일상의 재난을 경험했다. 의료진을 비롯한 돌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또한 조명되며,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여성민우회의 조사(2020년 2월부터 8월까지 16개 주요 언론사의 기사에 코로나 단일 단어 언급 기사는 7만 8,667건이었으나, 그중 돌봄 위기를 심층 분석 대상으로 삼은 기사는 1.05%에 불과했다)가 말해주듯, 이러한 문제들은 간헐적으로 기사화됐을 뿐, 돌봄의 가치를 성찰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는 지금까지 분절적으로 등장했던 돌봄을 둘러싼 문제들을 연결하여 돌봄에 얽힌 다층적인 현실을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다. 사회학자, 보건학자, 여성학자, 문화인류학자, 노동 운동 활동가, 장애인 운동 활동가, 질병권 운동 활동가, 동료상담가, 질병 당사자가 모여 각자의 주제에서 돌봄이 취급되어 온 방식과 경로를 검토하고, 돌봄에 새겨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조명한다. 자본·성장·경쟁 중심 사회가 초래한 팬데믹과 기후 위기의 시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패러다임으로서 ‘돌봄’의 가능성과 가치를 선명하게 그려나간다.
저자
다른몸들 (기획)
출판
동아시아
출판일
2022.08.05

 

 

- 강좌가 끝난 뒤 <한겨레21>에 <돌봄을 돌보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진행했다. 해당 연재를 기획하고 진행해 준 박다해 기자님에게 감사를 전한다. 또한 이 책의 토대가 된 강좌는 '아름다운재단' 지원 사업 덕분에 무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송혜진 간사님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강좌의 수강생이었던 동아시아 출판사 조연주 편집자님이 적극적으로 출간 제안을 하고, 여러 필자의 원고를 애정을 넘치게 살펴준 덕분에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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