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도학] 백제 계산 공주 이야기 - 의자왕의 딸, 여전사, 비운의 미녀 공주

일루젼 2022. 10. 14.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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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도학
출판 : 서경문화사 
출간 : 2020.12.25 


       

<온달 장군 살인사건>에 관련 키워드로 <백제 계산 공주 이야기>가 자꾸 보여서,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았다.  

 


백제 의자왕의 딸, 제왕녀라고 칭해지는 계산이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혀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남해의 여도사 밑에서 신선술을 수련해 까치로 둔갑하여 천리를 볼 수 있었다 한다. 또한 신기(神器)이자 신병(神兵)인 자용병기(自勇兵器)가 있어 그녀가 허공에 주문을 노래하면 하늘을 까맣게 메울 정도로 '절로 강해지는' 병사들이 내려왔다고도 전한다. 미모 또한 수려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랬던 그녀가 김유신에 패한 뒤 사라지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이 책으로 읽어보자.

 


 

계산 공주라는 이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서동요의 신라 선화공주나 고구려의 평강 공주, 낙랑의 낙랑 공주는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해왔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계산 공주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실존 인물에게 덧씌워진 이야기들은 당대 위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법한 내용들로, 공주의 삶에 특별한 계기가 있어 덧붙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특히 까치로 변신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당시 까치가 길조였는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삼국시대는 고구려가 삼족오를 상징으로 삼았던 만큼 까마귀가 길조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고구려와 적대국이라면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럭저럭 우호 관계였던 백제에서 까마귀가 아닌 까치와 공주를 연결 지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차마 까마귀를 선택할 수는 없었고, 공주였던 만큼 맹금류나 참새 같은 극단적인 새는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정방이 솟대 위에서 우는 새를 보고 '흉한 징조'라고 판단하는 모습에서도 까치의 길조로서의 역할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공주가 무예를 익히고 전장에 설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는 의자왕 자신의 오랜 태자 기간과 자제들 간의 알력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남녀 모두 전장에 서고 무예를 익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편이던 시대였다. 자칫 자신을 건너뛰고 손자 대에게 왕좌가 넘어갈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해서, 아들보다는 딸에게 명성을 쌓도록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결국 정변으로 태자위에서 축출되었던 오빠 융이다. 이전부터 기회를 노려 가망 없는 전장으로 보내지지 않도록, 그가 사지에서 객사하지 않도록 매번 계산이 대신 출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전쟁에서 이기고서야 투구를 벗고 소리 내어 웃었음은, 몰래 남장을 하고 나섰던 그녀의 안도의 한숨은 아니었을까. 혹은 승전보가 태자의 이름을 빛나게 할까 두려웠던 이들의 윤색이 남긴 기록은 아닐까. 

 

역사에는 언제나 상상력이 덧붙여진다. 사실을 기록한 문장에도 그 순간을 만들어낸 이들의 생각과 감정, 상황은 모두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그렇게 명쾌하지만은 않다.  

         


   

 

 

 

 

- 한국 고대의 여인상을 떠올려 본다. 세칭 평강공주, 낙랑공주, 선화공주 모두 지존한 지위를 지닌 공주님들이다. 온달의 품에 안겨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입버릇처럼 내뱉던 부왕의 말이 식언이 되지 않도록 했다. 아버지와 그 남자, 내 나라와 내 나라를 먹으려는 그 남자의 나라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눈 딱 감고 자명고를 부욱 찢었다. 마지막은 부왕에게 쫓겨나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그 남자에게 인생을 맡긴 공주였다. 한결같이 부왕과의 갈등, 그리고 남정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이야기로 짜여졌다. 이 중 고구려 사내와 연계된 두 공주 이야기는 사뭇 비극적이다. 전자의 남편은 전장에서 유시에 맞아 순국하였고, 후자는 검劍에 엎어져 자진했다. 백제로 시집간 공주는 자신이 발원한 미륵사가 준공될 무렵에는 보이지 않았다. 적국으로 시집간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되어진다.  

 

- 물론 백제 공주 이야기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연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부여 능산리 목탑터에서 나온 사리감에 이체자로 적힌 '형兄 공주'가 있지 않은가? 그녀는 위덕왕의 딸인 공주들보다 항렬이 위였다. 국왕의 여동생이었기에 '형 공주'로 적혀 있었다. 고모도 왕고모(고모)와 그냥 고모의 두 종류가 아니던가? 물론 아쉽게도 공주의 이름은 알 길이 없지만, 전후 정황을 헤아려서 얼마든지 스토리텔링화할 수는 있었다. 

- 많지 않은 전승이나 기록 속에서 백제에도 공주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전하여왔다. 역시 비극성을 내재한 공주였다. 의자왕의 딸이었고, 미녀였지만 무예를 익혀 출중한 기량을 자랑하였고, 남해의 여자 도사에게 신술神術을 배워 천하무적의 자용병기를 개발했고, 스스로 까치로 변하여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부왕인 의자왕에게 신라와 화평하라고 애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제 운명의 날에 그녀는 까치가 되어 총사령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요란하게 지져대었다. 이때 그녀는 김유신과의 대결에서 김유신의 신검劍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였다. 그 길로 궁중으로 날아가 부왕에게 다시금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이 만든 자용병기를 부숴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까치로 변신한 백제 공주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동경잡기>에 편린이 전한다. 전자에서는 까치가 시끄럽게 지저귀자 소정방이 겁을 먹고 군대를 돌리려 했다고 적혀 있다. 내키지 않은 전쟁의 지휘관이 된 소정방의 무능과 이로 인해 전쟁의 주도권을 김유신이 거머쥐게 된 일화로 적혀 있었다. 후자의 기록은 경주 외곽 작원이라는 역원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 적어놓은 것이다. 기존 문헌에서의 기록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일제 때 무라야마 지준 山智順(1891~1968)이 채록한 설화에서 계산이라는 공주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보였다. 

 

- 의자왕 당대의 국제질서는 여제의 시기였다. 당에서는 고종의 아내인 무측천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내리 통치하는 여왕의 시대였다. 왜에서는 사이메이齊明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본서의 주인공이 활약하는 백제에서는 의자왕의 왕후인 은고恩라는 여인이 호령하였다. 이렇듯 7세기 중반의 동아시아 세계는 '여인천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정변과 동란의 시기였다. 연개소문의 정변뿐 아니라 각 나라에서는 정변을 통해 강력한 권력이 태동했다. 역학관계상 마찰과 충돌이 불가피한 강대강 强對强 구도였다.  

 

- 실제 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이 전쟁에 나간 사례는 적지 않았다. 런던의 템즈강변에 동상이 세워진, 로마군과 맞서 싸웠던 켈트족 여왕 부디카 Boudica를 비롯하여 숱하게 확인된다. 

 

- 백제라는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지위는 왕이 아니었다. 물론 엄연히 왕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 위에 여인이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왕의 어머니였다. <일본서기>에서 국주모 國主母로 기록된 여인이다. 왕의 어머니이기는 하지만 법적인 관계일 뿐이었다. 그녀는 백제 최고 귀족 가문인 사탁씨였다. 흔히 대성팔족 大姓八族으로 운위되는 사택 씨였다. 교과서에 실린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로 유명한 사택지적의 사택 씨와 사탁씨는 동일한 가문이었다. 국주모는 좌평 사적의 딸이었다. 그녀는 가문의 힘으로 백제 왕의 왕후가 되었다.  

 

- 655년에는 당 고종(재위 649-683)의 황후가 된 여걸이 등장했다. 유명한 무측천 武則天이었다. 측천은 본시 당 태종의 후궁이었지만, 태종 사후 절간에 비구니로 있다가 고종의 눈에 들어 궁에 다시 들어왔다. 입궁 후 측천은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빈들을 제거하고 나아가 황후마저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무후인 측천은 나약하고 무능한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했다. 급기야 무후는 65세인 690년에 황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 신라에서는 632년에 진평왕의 맏딸 덕만 공주가 즉위했다. 그녀가 재위한 15 년간은 신라의 최대 위기였다.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동진을 막아내느라 끊임없이 부대꼈다. 신라는 자력으로 막기 어려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 태종은 신라의 위기를 이용해 가볍게 병탄할 궁리를 하였다. 급기야 여왕 통치력의 한계가 임계점에 이르자 신라 지배층의 분열과 더불어 여왕 축출이 논의되었다. 통일 이전 신라 최대의 내전인 상대등 비담의 난은 그 연장선이자 절정이었다. 선덕여왕 사후 여왕에서 여왕으로, 다시금 여왕인 진덕왕이 즉위했다. 

 

- 642년에 왜에서도 여왕이 등장했다. 죠메이 舒明 천황의 왕비가 즉위하였다. 죠메이와 왕비 사이에는 자녀가 있었다. 그럼에도 배우자가 즉위하니 고교쿠 천황인 것이다. 고교쿠는 자신의 안전에서 아들인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가 실권자인 소카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참살하는 참혹한 장면을 목도하고는 충격을 받아 하야했다. 3년 6개월 만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은 655년에 고쿄쿠는 친아들이자 황태자인 나카노오에의 옹립으로 다시 즉위했다. 이후 그녀는 사이메이 齊明 천황으로 불린다. 한 명의 왕이 즉위와 퇴위 후 다시 복위한 것이다. 이를 일러 복벽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27대 충숙왕(1314~1330, 1332~1339)과 28대 충혜왕(1331, 1340~1344)의 사례가 있다. 

 

- 공주의 증조부인 법왕은 상기할 만한 국왕이었다. 법왕은 태자 시절에 고구려와의 전쟁을 주도해 승리하였다. 그러나 효순 孝順 태자는 적군이라도 전몰한 영혼을 가엽게 여겼다. 이들도 하늘에 오를 수 있도록 원을 세워 절을 지었으니 보령의 오합사 烏合寺였다. 법왕은 즉위와 동시에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신라와의 전쟁도 중단했다. 화해의 표지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이러한 법왕의 평화와 화해 무드로 인해 불편한 이들이 나왔다. 전쟁을 출세의 사닥다리로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살생 금지로 인해 육식을 포기해야 하는 귀족들의 불만이 상당했다. 법왕 자신은 화식 火食 자체를 금지하였다. 법왕을 따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괴로워했다.

 

-  다음의 기사에서 김유신의 경우처럼 공주도 보검에 신령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건복 29년에 이웃 나라 적병이 점점 닥쳐오자, 공은 장한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켜 혼자서 보검을 가지고 열박산 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앙에서 맹서한 것처럼 하고, 이어서 "천관 天官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에 신령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과 각성 두 별의 빛 끝이 빛나게 내려오더니 칼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 

 

(리뷰자 주 : 어째서 허성과 각성인가? 당시 중국에서 비롯된 28수 체계의 천체에서 허성의 신수는 현무, 각성은 청룡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과 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계절이라면 초봄부터 여름까지 꽤 길게 이어지기에 굳이 두 별을 집어 기록한 이유는 모르겠다.) 
 

 

      

 

 

 
백제 계산 공주 이야기(양장본 HardCover)
『백제 계산 공주 이야기』는 〈전쟁을 막고자 했던 평화의 화신 백제 공주〉, 〈원천 콘텐츠로서 백제 계산 공주 설화〉 를 수록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
이도학
출판
서경문화사
출판일
20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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