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하시즈메 다이사부로] 죽기 전에 봐야 할 사후 세계 설명서 - 세계 5대 종교가 말하는 죽음 이후의 삶

일루젼 2023. 3. 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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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시즈메 다이사부로/ 주성

원제 : 死の講義 死んだらどうなるか、自分で決めなさい

출판 : 불광출판사
출간 : 2022.06.25


       

가볍게 읽어보기 좋다. 거대 종교들의 죽음과 사후 세계에 관한 설명들을 비종교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해 준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종교를 권하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바로 마주하고 일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확고한 듯하다. 그리고 당장 자신만의 것을 찾기가 어려울 때에는 기성 종교에 기대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일종의 가이드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죽음과 그 이후에 관한 각 종교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을 골라, 그 관점에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라는 것. 막연한 두려움으로 남겨놓거나 외면하기만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더 건설적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유교를 종교적 관점으로 접근해서 도교와 묶어 설명한다는 점과, 고타마 싯다르타는 윤회를 부정했다고 단언한다는 점이다. 불교에서 설파하는 윤회설은 이후 덧붙여진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좀더 추가적인 근거자료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고타마가 '더 이상은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발언과 일곱 걸음을 떼었다는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으므로 가볍게 읽어보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편하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압축 - 간략화해두었기에 비약이나 오해의 소지가 존재하며, 기본적으로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설명하는 논조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읽는 것을 권한다. 국사순난자를 국사순자로 표기한 것은 원문 표기를 옮긴 것인지, 번역가의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부분도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원제는 <死の講義 死んだらどうなるか、自分で決めなさい>, 번역하자면 <죽음에 관한 강의 -  죽으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 결정하세요> 정도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본문과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건 취향의 영역이니까. 

 

끝.        

 


   

 

- 이 책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대체로 죽음은 별안간 닥치는 일이라서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부디 안심하기 바랍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에 관한 이야기가 곧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아직 살아있고 이 책을 손에 든 여러분도 살아 있다는 다소 느긋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죽을 만큼 힘든 사람도 있을 테지만요. 

 

- 그러면 왜 이런 느긋한 것을 생각해야 할까요? 끝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기력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확실히 해두지 않은 채 그냥 죽어버린다면 너무나 아쉽지 않을까요? 모처럼 죽는데 말이죠.

 

- 살아 있는 존재는 결국 모두 죽기 마련입니다. 잡아먹히거나 병에 걸리거나 어느새 나이를 먹고 순식간에 죽어버립니다. 

 

- 이 책에서는 거대 종교가 말하는 사후 세계를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각각의 종교를 비교 연구해서 박식한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사후 세계를 고르고 선택하는 것이 목적이죠. 어쩌면 어느 것에도 수긍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그런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거대 종교의 관점 외에 사후 세계에 관한 사고방식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는 한도 내에서 소개하겠습니다.

 

-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렵고 걱정되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서 이 책을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고히 살아가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갑니다. 어차피 죽을걸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다움이자 사람의 자부심입니다. 

 

- 죽으면 어떻게 될지는 죽기 전까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나름대로 궁리하고 또 수긍하며 살아왔습니다. 말하자면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은 사람의 삶, 인생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어떻게 될지 죽기 전까지 알 수 없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죽고 나서 어떻게 될지를 각자 자유롭게 정해도 좋지 않을까요? 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의 수와 사람의 생각만큼 많습니다. 그 모든 답에는 저마다 귀중한 삶의 여정과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긴 선물입니다. 

 

-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요?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만큼 정말로 가지각색의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모두 체계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골라잡기만 하면 됩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접해보는 건 정말이지 좋은 일입니다. 나아가 그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관점으로 삼으면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힘도 커집니다. 

 


 

- 대부분은 '나는 아직 살아 있어. 앞으로 한동안은 죽지 않겠지' 하고 넘겨버린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도 죽는 건 무섭다. 왜 무서울까?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무섭다. 무서운 일 역시 생각하기 꺼려진다. 또한 죽음을 생각할 때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실마리가 없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생각한다고 해서 특별히 좋을 게 없는 것 같다. 그저 우울해질 뿐이지 않은가! 보통 이렇게 여기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기 어렵다. 

 

-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기 어려운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내가 보기에 죽음을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죽는다는 건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경험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 즉 '나'의 죽음만은 경험할 수 없다. 여기에 커다란 뒤틀림이 있다. 이것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첫걸음이다. 

 

-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건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경험적 사실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경험할 수 없으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 

 

- 구약성서는 원래 유대교의 성전(聖典)이다. 구약성서의 가장 앞에 나오는 다섯 권의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모세오경(Moses 五經, 토라)이라고 부르는데, 예언자 모세가 전한 율법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모세 역시 알라의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창세기도 알라가 인류에게 보낸 메시지 중 하나다.

 

- 무리로 존재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아담과 이브가 그랬다. 카인과 아벨,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이 있으며 개성이 있다.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 이때 일신교라면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다.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80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존은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신에게 존을 180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게 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존, 존재하거라!" 이것은 신의 명령이다. 신은 존을 존재하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존은 다른 누구와 바꿀 수 없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다. 신은 그런 존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의 계획이다. 그것이 어떤 계획인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존의 인생이다. 

 

- 신의 명령으로 태어난 존은 신의 임무를 받았다. 존의 몸과 생명은 신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존은 신의 것이다. 존이 사는 곳과 그가 먹는 음식도 다 신의 배려이며 은혜다. 따라서 존은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자신이 여기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감사는 그다음이다. 참고로 유교라면 먼저 부모에게 감사하고 조상에게 감사한다. 

 

- 종말과 사람의 생사는 어떤 관계일까? 일신교에서는 신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거두어지고 사람이 죽는 건 신이 내린 벌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본래 죽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신과 사람은 원래 올바른 관계였다. 그런데 사람이 저지른 죄로 인해 관계가 어긋나 버렸다. 신은 종말을 기회로 삼아 이를 바르게 되돌린다. 그리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종말은 사람이 기뻐해야 할 일이다. 새로운 거주지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왕국', 이슬람교에서는 '낙원' 등이라 부른다. 여기서 사람은 용서받고 영원히 살게 된다. 

 

- 그런데 누가 용서받고 신과 함께 살게 될까? 그걸 결정하는 게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은 재판을 말한다. 재판관은 당연히 신이다. 신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심판한다. 이때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된다. 타인의 책임까지 질 필요는 없다. 사람은 제각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신을 배신한 죄를 묻는다. 그 죄를 용서할지 말지는 어디까지나 신의 재량이다. 유죄로 판결 나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화염 속에서 고통받을 것이고, 무죄라면 영생을 얻어 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 재판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신교에서 생각하는 재판은 좋은 것이다. 재판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교리에는 약자를 보호하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그들은 법률과 재판을 신뢰한다. 잘 생각해 보면 최후의 심판은 사람을 보호하는 구조다. 주권을 가진 신은 사람을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사람을 없애버리지는 않는다. 반드시 재판을 열게 되어 있다.

 

- 기독교 전통에 매우 비판적인 교회도 있다. 신조는 예수가 죽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 교회(사람들의 모임)가 적당히 결정한 것인데, 그런 것에 속박당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은 성서학과 신학의 발전과 함께 대두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진행 중이다. '역사적 예수' 말이다. 

- 퀘이커(Quaker)라는 기독교 종파가 있다. 이들은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며 순수한 신앙을 강조한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달리 세례나 빵과 포도주 예식 등을 거부하며, 목사도 설교도 십자가도 없다. 예배의 순서도 없다. 오로지 내면의 빛(신이 현현하는 체험)을 중시한다. 이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퀘이커 신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기독교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 심지어 유니테리언(Unitarian)이라는 종파는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가 신이라거나 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위대한 목사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물론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경의를 표할 만큼 관용적인 종파다. 이 밖에 유니버셜리스트(Universalist) 등 엄격하지 않은 기독교 종파가 몇몇 더 있다.  

 

- 이슬람교는 코란과 이슬람 율법으로 행동 패턴이 정해져 있다. 마치 꼭 맞게 짜인 틀과 같아서 마음대로 느슨하게 할 수 없다. 다만 행동 방식은 정해져 있어도 사고방식은 자유롭다. 기독교 신조처럼 사람을 옥죄지 않는다. 어쩌면 이슬람교는 처음부터 느슨한 종교였는지도 모른다. 

- 일신교를 느슨하게 살펴봄으로써 부차적인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특정 교회나 종파에 연연하지 않고 일신교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본질의 실마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필연)이다. 또 어떤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우연)이다. 우연을 두드러지게 하는 도구로 주사위나 룰렛이 있다. 보고 있으면 우연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반면 일식 현상이 예정대로 일어난다면 세상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 나라는 존재를 우연의 결과로 생각하는 건 하나의 길이다. 이와 반대로 그것을 어떤 '의지의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길일 뿐이다. 일신교는 이 의지의 작용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런 길을 가는 종교다. 내가 존재하는 건 우연이라고, 혹은 신의 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세상을 관찰하든지 간에 어느 한쪽이 절대적이라는 결론은 내릴 수 없다. 그 두 가지는 세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는 각각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 사건의 인과 연쇄는 그물코처럼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모든 사건이 인과 연쇄의 네트워크 안에서 일어난다. '나'라는 존재도 이러한 인과의 연쇄 작용에 연결된 사건 중 하나다. 

 

- 인도 문명은 ‘진리를 깨닫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브라만교도 힌두교도 불교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인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인과관계의 연쇄 네트워크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한 인식,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은 가능하며 거기에 최고의 가치가 있다.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확신한다. 이는 자연과학과 비슷하다. 자연과학 역시 세상의 인과관계를 인식하고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말로 인도의 종교와 자연과학은 같은 것을 추구할까? 둘의 목표는 같을지 모르지만 방법은 다르다. 

 

- 자연과학과 달리 인도의 종교는 '명상'으로 진리에 도달하려 한다. 명상은 실험도 관찰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단박에 진리 전체를 파악하려 한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 당장 진리를 움켜쥐려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인과관계의 범위가 자연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한 행동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생각처럼 인간사회의 선악과 도덕의 문제까지 인과의 일부로 여긴다. 인과가 윤리 문제까지 관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를 말한다. 영어로는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앉아서 자신의 정신에 주의를 집중한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는 행위가 어째서 진리를 인식하는 일일 수 있을까? 

 

- 인도 사람들이 명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주 방정식(이 말은 내가 임의로 지은 것이다)'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방정식인가? 이 세상(우주=매크로코스모스)과 '나'라는 존재(마이크로코스모스)가 대응한다는 공식이다. 수학에 동형사상(同型寫像)이라는 분야가 있다. 두 집합이 일대일 대응 관계를 이룰 때 연산 등의 수학적 구조가 보존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가위바위보라는 집합과 묵찌빠라는 집합의 대응 구조와 비슷하다. 집합으로서는 다르지만 알맹이는 똑같다는 얘기다. 세상과 나도 집합으로서는 다르지만 속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저기에 산이 있고 나의 내면에도 산이 있다. 눈앞에 친구가 있고 나의 내면에도 친구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면 굳이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게 된다. 

 

- 언어는 정신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 바깥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 진리의 깨달음이 이와 같은 내용이라면 성자는 생사를 초월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원래 사람(생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은 생물이 아니라서 죽을 일이 없다. 태어난 적도 없다. 사람의 생사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그 법칙을 체현하면 생사를 초월한다. 하지만 진짜 생물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은 분명히 살아 있고 스스로 생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매 순간 살기 위해 바둥거리고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를 불교에서는 번뇌(煩惱)라고 한다. 생물이 아닌데도 생물이라 믿으며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불교에서는 이렇게 번뇌에 빠진 사람을 자비(慈悲)로써 대하라고 가르친다. 자비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다. 

 

- 진리는 존재한다. 진리에 접근하는 일은 가능하다. 진리를 깨닫는 건 가치가 있다. 다만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수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수행에 힘써 진리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다. 각자 명상을 통해 진리에 접근해야 한다. 브라만교, 힌두교, 불교 모두 그렇다. 진리를 깨닫는 일이 가치 있다면 깨달음을 목표로 삼아 수행하는 일도 가치가 있다. 수행은 훈련이다. 명상법에 숙달해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 비록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지만 진리에 가치를 두고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가 많다. 인도 사회는 진리와 수행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이들을 뒷받침한다. 

 

- 수행은 풀타임 활동이다. 명상은 틈틈이 하는 게 아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 즉 노동과 병행할 수 없다. 그래서 인도 사회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뉜다. 수행에 전념하는 소수의 사람과 생계 활동을 위해 노동하는 다수의 사람이다. 인도사회는 이 수행자 그룹을 세습 신분으로 만들어 고착화했다. 

- 하지만 대승불교는 여러 붓다를 인정한다. 현재의 붓다는 석가모니 한 명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다른 붓다도 인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개의 세상이 병행해서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그 병행세계 중 하나가 서방정토(西方淨土)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라고 부르는 세상이다. 거기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머물고 있다. 동방에는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라고 불리는 세상이 있으며, 그곳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있다. 이런 식으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에 수많은 붓다가 존재한다. 이를 시방세계일불다불론(十方世界一佛多佛論)이라고 한다. 대승불교는 이렇게 생각한다. 

 

- 또 다른 대승불교 경전 <화엄경(華嚴經)>은 여러 붓다를 종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우주 크기의 신체를 지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등장한다. 진리를 깨달은 붓다는 마이크로코스모스(소우주)와 매크로코스모스(대우주)가 일치한다는 우주 방정식을 충족시킨다. 우주는 인과 연쇄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법(法), 다른 말로 다르마(Dharma)다. 붓다는 법과 일치한다. 이러한 몸과 법의 일치를 법신(法身)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비로자나불은 우주 그 자체가 몸인 법신이다. 그래서 거대하다. 

- <화엄경>에 따르면 다양한 붓다는 모두 법신이 각각의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그렇다면 정토교를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한다. 왕생의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목적지는 하나다. 이 세상에 윤회하는 경우에는 다시 태어나는 카스트와 직업이 제각각이어서 수평적인 연대감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극락왕생을 바라는 사람들끼리는 계급과 상관없이 연대감을 만들 수 있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싶다면 줄을 서시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모이기 쉽게 하는 불교 종파가 정토교다. 극락정토는 일신교 같은 효과를 지닌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명쾌하다. 아주 독특한 성격을 가진 보기 드문 불교 종파라고 할 수 있다. 

 

- 밀교는 대승불교 후기에 형성된 종파다. 인도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밀교의 기본 경전은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이취경(理趣經)> 등이다. 밀교는 불교에 속하지만 불교를 뛰어넘어 거의 힌두교에 가깝다.  

- 밀교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역겁성불 수행의 오랜 시간을 피해 가려한다. 대승불교의 수행법은 깨달을 때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이 걸린다. 일례로 석가모니 붓다 다음에 깨달을 존재로 예언된 미륵보살(彌勒菩薩)은 56억 7천만 년 후에 등장한다고 한다. 평범한 수행자가 깨닫는 건 무리라는 소리 같다. 밀교는 만다라를 응시하며 명상하거나 공물(供物)을 태워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한계에 이를 때까지 수행한다. 그러다 일순간 깨달음의 파편을 체험한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을 본 것과 같다. 그러면 용기가 생겨서 더욱 수행에 몰두하게 된다. 말하자면 체험을 통해 수행과 깨달음의 관계가 반전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수행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수행이 원인이고 깨달음은 결과다. 

 

- 이 관계를 반전시켜서 이렇게 생각한다.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서 수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수행자가 곧 '붓다'이기 때문이다. 붓다이므로 오랜 시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다. 단지 스스로 붓다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이 생각에 따르면 수행자는 이미 붓다다. 그래서 사실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왜 수행하는 걸까? 자신이 붓다임을 확신하기 위해서다. 밀교에서는 누군가가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그가 붓다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자신이 곧 붓다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밀교의 '비밀'이다. 밀교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수행자는 이미 붓다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일까? 붓다는 생사를 초월한 존재다. 붓다는 입멸(入滅 죽음)한 상태여도 괜찮고 원하는 만큼 살아도 괜찮다. 어느 쪽이든 똑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한다면 불국토를 세울 수도 있다. 한마디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밀교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붓다이기 때문이다. 윤회도 왕생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살면 된다. 

- 불교의 핵심은 진리를 깨닫는 데 있다. 고타마는 진리를 깨달았다. 고타마처럼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불교는 평등을 가르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진리란 대체 무엇일까? 세상 그대로가 진리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자신의 욕망과 주관, 불필요한 감정 없이 바라본다. 필요하면 명상을 통해서 뚜렷이 바라본다. 내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한다. 타인과 공존하는 사회, 세상을 이해한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 중국의 종교 하면 먼저 유교(儒敎)가 떠오른다. 그리고 도교(道敎)와 불교가 있다. 이 세 종교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유교·도교·불교는 죽음에 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르지만 서로 관련이 있는 부분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세 종교를 융합해서 죽음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왔다. 이미 불교는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주로 유교와 도교를 알아본다. 

 

-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유교를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다.  
 
- 사실 조상 숭배도 그렇다. 부모가 죽으면 위패에 이름을 적는다. 'OOO의 영위(位)'라고 쓴다. '영위'니까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다는 의미다. 다행히도 조상의 영혼은 점잖아서 제멋대로 날뛰거나 재앙을 초래하지 않는다. 다만 사당 안에서 자손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조상 덕분에 안심하는 태도는 후손의 관점에서 죽은 후의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내가 조상 덕분에 안심하고 사는 것처럼 나 역시 죽은 후 조상이 되면 후손들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산 자의 눈으로 보면 조상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조상 숭배는 나의 죽음으로부터 교묘하게 눈을 돌려 죽음을 외면하는 구조다. 

 

- 이런 태도는 임종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다. 유언장을 쓰고 장례 비용과 묘지를 마련한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에 관련된 잡다한 일을 처리한다. 그러면 죽을 준비를 마친 것 같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죽는다는 사실, 즉 나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묘하게 죽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을까?  

 

- 지옥이 지상과 똑같다면 귀신도 죽는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도교에서는 귀신도 죽는다고 말하는데, 다만 그 후에 뭐가 되는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처럼 도교는 지옥을 죽은 자의 세계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도교 전문가인 도사(道士)들은 주술, 요술 등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해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려 한다. 도교가 설정한 초자연적 힘은 유학이 행사하는 정치적인 힘(통치 권력)을 뒤집는 대안적인 힘이다.

 

-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토착 사상인 유학 및 도교와 마찰을 빚었다. 불교는 출가해서 수행하는 데 가치를 둔다.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수행자가 되어 집단생활을 한다. 효를 중시하는 유학에서 부모를 버리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유학의 관점으로 볼 때 불교는 터무니없는 종교였다. 그래서 불교는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 먼저 유학처럼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존재하지 않게 된다. 세상에서 사라진다. 다시 만날 수 없고 대화할 수 없다. 세금을 거둘 수도 없다. 더는 사회의 일원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은 당사자에게 어떤 체험일까? 안타깝게도 그건 죽은 당사자밖에 알지 못한다. 죽어보지 않으면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죽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해 봐도 소용없다. 시간과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 죽은 후에 영혼이 남을까? 어딘가로 가게 될까? 아니면 아예 사라져 버리는 걸까? 알 수 없다. 영혼이 남아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다면 그건 이 사회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것은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인격 함양에 힘쓰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생각을 하자. 이것이 유학을 배운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이다. 

 

- 이번에는 도교처럼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망자(亡者)가 되어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 다행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세상을 떠나기는 하지만 대신 저세상으로 간다.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연락은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일원은 아니지만 저세상의 일원이 된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다. 요컨대 죽음에 관한 도교의 생각은 '죽은 자의 나라가 있다'이다. 흔한 생각 같지만 일신교의 개념과는 다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죽은 자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훗날 부활할 때까지 무덤 안, 혹은 적당한 장소에서 대기한다. 여전히 신의 관리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나라에서 망자로 살지 않는다. 먼 옛날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사는 나라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대교는 이에 반발해 철저한 유물론 신봉자가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여기에 부활을 덧붙였다. 어쨌든 그들에게 '죽은 자의 나라'는 없다. 

 

- 도교의 사고방식은 인도 문명의 사고방식과도 다르다. '죽은 자의 나라'가 없기는 힌두교나 불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는 건 우주 법칙의 일부다. 인도 문명은 윤회 사상이 주류를 이루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우주 법칙에 따라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다만 기존에 살던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죽은 부모가 무엇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자식은 알 수 없다. 부모 자신도 모른다. 어쨌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죽은 사람이 계속 죽은 채로 살아 있는 '죽은 자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 벼농사 방법이 전해지기 전 일본 열도에는 조몬(繩文) 토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회가 있었다. 지금은 사회가 사라져 버렸고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도 알 수가 없어서 모든 게 명확하지 않다. 고고학자들이 유물과 패총(貝塚), 석기시대 움집터, 원시적인 농경 생활 증거 등을 찾아냈을 뿐이다. 더불어 매장 흔적도 발굴되었다. 굴장(屈葬)이라고 해서 무릎을 굽힌 채 유해를 접고 그 위에 돌을 얹기도 한다. 죽은 자의 위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묘지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리라 추측된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죽음을 가공할 만한 어떤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대륙에서 벼농사 문화가 전해졌다. 이 시기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수렵채집민이던 조몬인들에 비해 야요이(弥生)인들은 몸집이 작았다는 것과 더 높은 온도로 토기를 구울 수 있게 되어 토기의 두께가 얇아졌다는 정도다. 그 외에 야요이인들의 생사관이나 생활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농경은 삼림을 개척하기 때문에 삼림을 거점으로 하는 원주민과 다툼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조몬 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의 이행은 큰 충돌 없이 평화롭게 서서히 진행된 듯하다. 정복-피정복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교류와 문화의 상호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벼농사는 부의 축적과 사회 계층의 분화를 낳았고 군사력을 지닌 수장(首長)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장들은 무당처럼 주술 능력이 있는 여성을 맹주로 삼아 연합했다. 이때 여성은 종교인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 이 시대 사람들은 권력자가 죽으면 점토를 구워만든 옹관(甕棺)에 넣어 묻었다. 지금까지 여러 개의 관이 발굴되었다. 그에 반해 일반인은 그냥 매장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적이 어떤 생사관에 근거하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 수장은 갈수록 세력을 키워 지방정권이 되었다. 지방정권의 수장들은 커다란 분묘(墳墓)를 축조해 권력을 과시했다. 분묘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분묘 중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사상을 바탕으로 꾸며진 곳도 있다. 부장품도 매장되었다. 그중 하니와(埴輪)라는 토기 인형이 있는데, 순장의 악습을 끊고 사람 대신 토기 인형을 넣었다는 설이 있다. 고훈(古) 시대 역시 당시 사람들의 생사관에 관한 단서가 없어 ...  

 

- 처음 불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소가노우지(蘇我氏) 같은 국제적인 배경을 가진 그룹(씨족)이었다. 이들은 불교가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국가재정으로 비용을 대야 한다. 불교는 신을 물리치고 사회 중심에 앉았다. 일본은 율령제를 채택하면서 비로소 국가다운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곧 율령제의 원칙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국유지가 스리슬쩍 귀족들의 소유로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자 세금이 모자라 사찰 유지 비용을 대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사찰도 사유지를 구해 자활을 꾀했다. 불교는 국가가 아닌 귀족들에게 봉사하고 보수를 받았다. 이것이 불교 본연의 모습과 동떨어진 헤이안(平安) 시대 불교의 탄생 과정이다.  

 

- 불교는 지금까지 있었던 신들의 신앙에는 없던 생각을 초래했다. 첫 번째로 번뇌에 관한 사고방식이다. 예전에는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불교에 의하면 사람들은 깨달음에서 멀리 떨어진 어리석은 존재이며 윤회에 속박된 상태다. 이제까지 아무 문제없던 일상에 부정적 가치관이 붙어버린 것이다. 두 번째로 지옥에 관한 사고방식이다. 사람들은 악행의 결과로 지옥에 떨어진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를 통해 지옥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 전해진 지옥은 오히려 도교와 비슷해서 망자가 괴롭힘 당하는 장소였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윤회를 믿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가 되어 망자의 나라로 간다는 이해하기 쉬운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편 헤이안 시대에 부패한 귀족과 평민들 사이에 '원혼의 복수' 같은 미신에 대한 믿음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의 복수다. 당대 최고 권력가이자 학자였던 미치자네가 유배당해 죽은 뒤 잇달아 귀족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이를 미치자네 원혼의 복수라 여긴 귀족들이 그의 위패를 천만궁으로 옮겨 천신으로 받들었다.

- 합리적이고 자비심을 강조하는 불교는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 신도(神道)의 신은 재앙을 주기도 하고 재앙을 달랠 수도 있다. 불교는 빛의 마법, 신도는 어둠의 마법처럼 분업해서 헤이안 시대를 향유했다. 

 

- 신도에는 죽음을 불결하게 보는 관념이 있다. 숨기기 어려운 감정이다. 반면 불교는 인과론을 바탕으로 철저한 합리주의를 내세운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기에 원령도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례식을 맡기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귀족들 사이에 불교식 장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 원래 장례업은 세속의 직업으로 스님에게 금지된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선종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선종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해결하는 종파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장례식도 스님들이 치러야 했다. 이에 선종 스님들이 불교 장례 의식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식 장례가 서서히 서민들에게 보급되어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강제되기까지 했다. 지금도 일본 사람들이 장례식 하면 불교를 떠올리는 이유다. 하지만 원래 불교와 장례식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적절한 조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 신을 모시는 신도와 진리를 추구하는 불교는 애당초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오히려 응어리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헤이안 시대 후반에 이르러서 타협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이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다. 불교의 본지(本地)인 인도에서 붓다와 보살들이 일본으로 왔다(垂迹). 그들은 일본 땅에 강림해 신이 되었다. 그래서 신도와 불교의 실체는 같다. 이렇게 '붓다=신'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본지수적'은 대충 이런 의미다. 물론 불교 경전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아무런 증거도 없다. 말하자면 설(說)일 뿐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정착되었다. 

- 붓다와 신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 현상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붓다와 신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매우 다르다. 이를 동일시하면 불교가 변질된다. 통상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는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신 역시 변질된다. 통상적인 신도에서 성립되지 않는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 죽음에 관해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일본 사람 중에 '사람이 죽으면 붓다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인도나 중국에서 이런 말을 하면 비웃음만 당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절대로 이런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진리를 깨달아야 붓다가 되고 그 길밖에 방법이 없다. 사람의 생사와 깨달음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예로부터 일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붓다'라는 공식을 대입하면, 왜 일본 사람들이 죽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염불종(念佛宗)은 사후에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이런 염불종의 신앙은 사람이 죽으면 붓다가 된다는 명제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 불교가 일본에 전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불교 종파가 일본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를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대표적인 여섯 불교 종파다. 이들은 주로 나라(奈良)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중국 종파는 특정 불전을 연구하는 출가수행자 동아리 같은 것이다. 한 사찰에 여러 종파의 스님들이 모여 있기도 하고, 같은 종파의 스님들이 여러 사찰로 흩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 불교사에 큰 사건이 벌어진다. 헤이안시대에 사이쵸(最澄, 766-822)와 구카이(空海,774~835)라는 스님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훗날 두 스님이 일본으로 돌아와 사이쵸는 히에이산(比叡山)에 연력사(延曆寺)를, 구카이는 고야산(高野山)에 금강봉사(金剛峯寺)를 세웠다. 이를 기점으로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 일본 사람들은 사찰이라고 하면 종파의 뿌리인 본사(本寺)가 있고, 그에 속한 말사(末寺)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에도 시대에 형성된 상식이다. 그전까지 사찰에는 여러 종파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각각의 종파가 무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던 게 사이쵸와 구카이의 출현으로 거대한 종파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야산 금강봉사는 구카이를 조사(祖師)로 삼는 밀교 진언종의 중심지가 되었고, 히에이산 연력사는 사이쵸를 조사로 삼는 천태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불교 교리를 종합하고 다양한 수행법을 받아들인 천태종으로부터 산악수행(修行) 염불(念佛), 선(禪), 법화종(法華宗) 등이 파생되었다.  

- 이후 일본 불교는 종파로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한절에 다양한 종파의 스님들이 있던 시절은 사라졌다. 각 사찰은 특정 종파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종파마다 독자적인 경전해석과 생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절이 다르면 가르침의 내용도 달라졌다. "불교는 죽음을 이렇게 생각한다"고 정리된 답변을 줄 수 없게 되었다. 

 

- 기원후 8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일본 불교는 서서히 큰 변화의 흐름을 맞이한다. 그 시작은 염불종의 출현이다. 염불종은 훗날 정토종(淨土宗) 또는 정토진종(淨土眞宗) 등으로 불리게 된다. 염불종 계통의 종파들은 사고방식이 매우 흡사하다. 다만 일본 정토종의 시조(始祖) 호넨은 출가수행자로 생을 마친 데 반해 정토진종의 시조 신란(1173~1262)은 스님임에도 아내를 두었다. 이후 정토진종은 스님이 결혼해도 되는 불교 종파가 되었다. 불교에서 출가자가 아내를 두는 것을 대처(帶妻)라고 한다. 염불종은 이렇게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 살생을 금하는 불교 입장에서 당연히 무사는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사들은 자신이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을 다스리고, 주군을 모시고, 일족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실하게 의무를 다한다는 점에서 무사는 선승(禪僧)과 다를 바가 없다. 훈련과 집중력이 없으면 무예든 좌선이든 숙달하기 어렵다는 점도 비슷하다. 여러모로 무사와 선종 스님의 삶은 공통점이 많다. 

 

- 선은 '출가 전 → 출가 → 수행 → 깨달음→ 붓다'라는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수행과 깨달음은 순서대로 일어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다. 수행에서 깨달음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일순간에 이루어진다. 영원이 일순간과 같고, 출가하기 전이나 출가 후가 매한가지다. 그러니 무사는 무사인 채로 선의 정신을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선의 정신에 따라 행동하면 무사의 세계에도 깨달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무사는 무사의 의무를 다하면서 선을 실천하고, 농민은 농민의 의무를 다하면서 선을 실천하고, 상인은 상인의 의무를 다하면서 선을 실천할 수 있다. 선은 출가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 선종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까? 죽음은 삶의 끝이다. 죽고 나서 생을 영위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붓다는 생사를 초월했다. 붓다는 살고 싶은 만큼 살아도 좋고 언제 죽어도 좋다. 생명 있는 존재는 죽는다는 제약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선종에 따르면 선을 행하는 순간 그 사람은 붓다가 된다. 붓다가 되면 죽음의 제약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재가자가 선의 정신으로 세속의 직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는 붓다다. 그는 죽음을 넘어선다. 따라서 죽음의 제약을 넘어서려면 세속의 직업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무사는 무사의 의무에, 농민은 농민의 의무에, 상인은 상인의 의무에 집중하면 된다. 그러면 죽음의 제약을 넘어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게 된다. 

-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무사들은 선이야말로 무사로서의 삶에 확신을 주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무사가 아닌 사람도 기존 불교가 아닌 선이라면 자신이 살아갈 근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은 신과 미신, 주술과 분리된 합리주의다. 선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기에 일본의 신이나 공동체의 관행, 미신, 주술과 무관하다. 또한 선의 관점에서는 이 세상의 활동이 그대로 붓다의 형태가 되므로 극락왕생할 필요가 없다. 선과 염불은 둘 다 불교지만 이런 점에서 중복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 

 

- 붓다의 진정한 정체는 구원실성불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다. 구원실성불은 오직 <법화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원래 불교는 붓다의 죽음을 전제로 전개되었다. 말세라는 타락의 시기도, 붓다의 죽음을 기준으로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 가르침과 윤리가 쇠퇴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 붓다가 존재한다면 그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게 당연히 옳다. 그러면 말세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둘째는 보살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으로 다른 불교 경전에도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법화경>의 보살은 다른 경전 속 보살과는 색다른 점이 있다. <법화경> 내용 중에 땅 밑에서 무수한 보살들이 솟구쳐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붓다는 오래전부터 가르침을 설파해 왔으며, 땅속에서 이를 들으며 수행하는 많은 보살이 있다는 설정이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보살은 재가 수행자다. 출가자가 아니다. 즉 영원히 존재하는 붓다에게 인도되어 수행 정진하며 산다면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  

 

- 법화종은 <법화경>만이 진실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법화종을 세운 니치렌은 이 세상을 <법화경>에서 말하는 구원실성불을 따르는 보살들의 불국토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종파를 배제하고 하나로 통일시켜야 했다. 일종의 혁명인 셈이다. 

 

- 먼저 보살들의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보살은 자신이 보살임을 자각한 다음 보살행을 실천한다. 보살행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보살이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다. 이 보살은 누구를 만나도 "당신은 곧 깨닫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모진 박해를 당해도 상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상불경보살과 같은 삶의 방식이 보살행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은 보살행을 높이 평가한다. 보살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깨달은 붓다조차 보살행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보살행은 본래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붓다가 된 후에도 보살행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깨달음보다 보살행이 더 가치 있다는 얘기다. 

 

- 보살행이 삶의 목적이 되면 깨달음은 상대적인 것이 된다. 깨닫든 깨닫지 않든 지금 보살행을 지속하는 일 자체에 가치가 있다. 영원한 존재인 붓다가 보살행을 인도하며 지켜본다. 붓다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살과 함께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러한 보살행을 실천하면 이상적인 세상이 되지 않을까?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해 출가자가 될 필요는 없다. 상불경보살도 출가자가 아니었다.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해 이상세계를 만들어간다. <법화경>은 깨달음에 매달리지 않고 보살행에 힘쓰는 게 바로 깨닫는 길임을 알려준다. 이것이 <법화경> 사상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 <법화경>은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법화종 사람들은 보살행을 실천한다. 구원실성, 즉 영원한 존재인 붓다를 따르기 때문에 보살행은 항상 붓다와 함께한다. 붓다는 생사를 초월한 존재다. 그러므로 보살행 또한 생사를 초월해 있다. 그들은 보살행을 하다가 목숨을 잃더라도 그것이 붓다의 의지라면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 니치렌은 다른 종파를 비판했기 때문에 염불종 등 여러 종파의 원한을 샀다. 결국 유배 판결을 받았는데, 유배지로 호송되던 중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니치렌의 태연한 모습에 거꾸로 자객들이 동요되고 말았다. 괴이한 현상을 접한 자객들이 칼을 떨어뜨렸다. 이는 니치렌이 자신의 신앙과 보살행을 목숨 걸고라도 관철하려는 각오로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법화경>은 윤회를 반복하는 역겁성불을 전제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보살행은 깨우침을 위한 수행이다. 보살행이 죽음을 피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행의 격을 높여 깨달음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이 점은 여느 대승불교와 같다. 그러나 니치렌은 <법화경>을 다른 경전보다 위에 두었다. <법화경>을 다른 대승경전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기록된 특별한 경전으로 받들었다. 그 특별함이란 보살행이 삶의 목적이며 깨달음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니치렌은 <법화경>의 실천자일 뿐 진리를 깨달은 붓다가 아니다. 그런 니치렌은 법화종신자의 롤모델이다. 죽은 후에 윤회를 반복하며 붓다를 목표로 계속 수행하겠지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보살행에 힘쓴다. 그것이 붓다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살행의 무대는 현실이다. 보살사상은 열렬한 현세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죽음과 내세의 일은 뒷전으로 밀린다. 

- 법화종신자는 죽음과 내세의 문제를 뒤로하고 현실 속 보살행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죽음을 망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음은 삶의 마침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보살로 사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

 

- 죽고 나서의 일은 붓다에게 맡기면 된다. 이 세상에서의 보살행은 지금밖에 할 수 없다. 이는 붓다의 뜻에 부합하는 길이기도 하다. 붓다의 가르침대로 매 순간 살아가는 게 올바른 죽음과 내세를 맞이하는 일이고 훗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처럼 용기 있게 현실과 마주하고 같은 자세로 죽음도 마주한다. 법화종은 이렇게 생각한다. 
  

- 호주제와 사청제도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사청제도는 불교 원리주의 종파에게 호되게 당했던 무사 정권이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채택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어느 종파에 속해 있는지 사찰에 등록해야만 했다. 자녀가 태어나면 선택의 여지없이 자동으로 종파가 정해졌다. 종파를 지탱하는 '믿음'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자 어느 종파나 다 비슷해졌다. 

 

- 어느 사찰도 법회나 장례식 이외의 일로 많은 사람이 모여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속한 종파를 바꾸어서도 안 된다. 한마디로 포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대신 장례식을 통한 수입이 보장되었다. 그런데 집집마다 종파가 달라서 친척이나 지인의 장례식에 참가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종파의 사찰을 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종파마다 경전을 읊거나 계명(戒名) 짓는 방법 등에 차이점이 있음에도 전체 참석자들을 위해 비슷한 의식을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종파의 개성이 사라져 갔다. 매년 거행되는 불교 행사도 비슷한 형식으로 치러졌다. 그 결과 현재 일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통의 불교상식이 만들어졌다.  

 

- 일본 사람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으면 대체로 이렇게 답한다. 사실 이 내용은 불교와 무관하다. 

 

-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3년째, 7년째... 등 일정 기간에 따라 고인을 추모하는 법회를 연다. 그러다 고인을 기억하는 관계자가 사망하거나 고령이 되면 법회를 열지 않는다. 이 무렵까지 죽은 사람은 서서히 조상과 융합해 간다. 죽으면 극락정토에 왕생한다고 믿는 염불종의 경우에 장례식을 치르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이제 와 굳이 그런 원칙론은 말하지 않는다. 모난 돌은 이미 둥글어졌기 때문이다. 불교는 어느 종파나 대체로 이렇다. 간혹 불교 외에 신도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도 있는데, 신도 역시 5년제(年祭) 10년제 등 불교와 시간은 다르지만 비슷한 형식의 조상제사를 지낸다. 

 

- 정리하면, 일본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 가장 흔히 생각하는 유형은 52번 명제다. 아무리 봐도 불교가 아니지만 불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일본의 오래된 관습이 호주제와 사청제도 속으로 들어와 에도시대에 정착한 현상이다. 알맹이는 불교와 거의 관계가 없다.

 

- 국학의 표준 해석을 기준으로 삼은 신도를 복고신도(復古神道)라고 부르는데, 이와 비교해 히라타의 해석에 따른 신도를 히라타 신도(平田神道)라고 부른다. 

 

- 히라타 신도에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영령(英靈)'이다. 히라타는 당시 금서(禁書)였던 <성경>을 몰래 읽었다. 한문 <성경>이었다. <성경>에 영(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약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육신의 죄를 털고 구제받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히라타는 큰 힌트를 얻었다. 히라타는 사람이 죽으면 황천에 가지 않으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이 된다고 말했다. 특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은 영령이 되어이 세상에 계속 머물며 나라의 장래를 지켜보고 보호해 준다. 이것이 변함없는 일본의 도(道)라고 말했다. 이는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설명한 바를 분명히 고쳐 쓴 것이다. 더구나 근거가 분명치 않다. 히라타의 창작이라고 봐도 좋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을 국사순자(國事殉者)라 한다. 국사순자는 죽어서 영령이 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부정함에 오염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당하게 영령으로 모시고 예를 표할 수 있다.  

 

- 죽음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다.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니 책임을 추궁할 방법도 없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죽음은 자기 몫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죽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자신의 행위에 들어가지 않는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은 잔물결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삶에 영향을 준다. 그 영향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도 있다. 이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수 있다. 

   

- 죽음이라는 사건은 죽음이 일어나는 와중이라도 간파할 수없다. 죽음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깊이 생각하고 통찰할 때 그 파급력을 파악할 수 있다. 그때가 언제일까? 당분간 죽을 예정이 없어 팔팔할 때, 즉 지금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일신교와 인도의 종교, 중국의 종교, 일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소개하면서 이를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재료로 삼았다. 이제 재료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 재료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할지 알아보자.

 

- 유니테리언은 합리적인 만큼 자연과학을 인정했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교도 200년쯤 전에 유니테리언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미국에는 다양한 기독교가 있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유니테리언은 기독교에서 반쯤은 벗어나 있다. 랠프 에머슨(Ralph W. Emerson, 1803~1882)은 유니테리언과 인연이 깊다. 그는 목사를 그만두고 시인이 되었는데 자연 곳곳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범신론에 가깝다. 얼마 전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나의 묘지 앞에서 울지 말아 주오.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저 드넓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자연을 누빈다는 가사가 에머슨의 시와 통한다. 

 

- 범신론은 자연 어느 곳이든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일신교와 비슷하다. 일신교 역시 자연도 신이 만들었으므로 자연 곳곳에 신의 뜻이 깃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범신론은 중요한 점에서 일신교와 다르다. 범신론에서는 자연 이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없다. 자연 그 자체가 모두 신이다. 합리주의가 아니라 신비주의다. 

 

- 윤회를 거듭하며 보살행을 계속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민족, 역사, 문화, 직업의 틀로 구분되어 세상 속에 나뉘어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실감하기 어려울 만큼 이질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원한 붓다는 인류 모두를 이끌고 있다. 백인이 흑인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인도 사람이 중국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 윤회다. 그렇게 보면 보살행은 '어떤 인종과 문화에 속한 사람이든 그들의 고민, 괴로움, 기쁨이 곧 나의 고민, 괴로움, 기쁨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방식과 조금 유사하다. 

 

- 일본에서 성행하는 불교는 염불종(정토종과 정토진종), 선종, 법화종(일연종) 세 가지다. 이 외에도 밀교(진언종), 천태종, 화엄종, 법상종 등이 있다. 이러한 종파의 사고방식을 접하면 어떻게 될지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고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 지금까지 죽음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살펴보았다. 이 중에서 하나를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삼아 실천하면 생각이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발견하면 좋을까? 

-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학을 믿고 사회 규칙을 지킨다. 합리적으로 살아간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언제가 죽음을 생각할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그전까지 종교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더라도 어떤 종교든 하나를 접하기 마련이다.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순간 처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 어떤 종교를 가질지는 선택이다. 이슬람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선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 신도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 다른 종교를 선택하고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아래서는 어떤 종교든 각자 자유롭게 선택해도 좋다. 누구라도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점을 먼저 마음에 새기자.

 

- 이 책에서는 다양한 종교를 다뤘다. 일신교, 인도 종교, 불교, 유교 등 한데 모이기 어려운 여러 종교가 옆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이렇듯 어떤 대상을 옆으로 나란히 세우는 것이 상대주의다. 상대주의는 서로를 잘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문제는 '나의 죽음'이다. 나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바로 그 '나라는 존재'가 죽는다. 어떻게 죽을까? 이 문제에 관해 종교끼리 이러쿵저러쿵해 봐야 대화도 안 통하고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 규범을 지키고 과학을 믿으면서 산다. 상식이 있는 합리주의자의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왜일까? 합리주의만으로는 충분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가치 있는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행위다. 그리고 언어로써 생각하고 이해하는 건 의미를 배우는 행위다. 가치와 의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방식이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고 이성으로도 알 수 없다. 사람들에게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이다. 그리고 종교의 역할이다. 

 

- 현대에 이르러 가족이 고립되고 공동체가 흩어졌다. 그리고 여러 종교가 난무하는 상대주의 세상이 되었다. 개인이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자기 나름의 가치와 의미로 삶의 토대를 세우는 일은 상대주의로 불가능하다. 상대주의는 지식이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지식을 초월한 문제다. 이 지점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종교가 도움이 된다. 종교는 문제가 선택임을 알기 때문이다. 

 

- 이상은 좁히고 좁힌 각 종교의 골격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도 되냐고 물을 수 있다. 괜찮다. 사람들에게 도움만 된다면! 앞서 정리해 둔 내용을 꼭 한번 비교해서 살펴보기 바란다. 종교의 정수를 두 줄로 정리한 내용을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의 단서로 삼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대충 훑어보고 덮어서는 안 된다. 확실하게 읽고, 외우고, 메모해 두었다가 출근길이나 쇼핑하러 가는 길에 머릿속으로 반복해야 한다. 두 줄이라 비교하기 쉽고 선택하기 쉽다. 머지않아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 손에 움켜쥘지 모른다. 그러면 상대주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알게 될 것이다. 

 

-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죽으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 결정하라'가 주제였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럴 각오로 살면 '원하는 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 된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면 스스로 결정한 대로 죽는다.

 

- 내가 마음먹은 대로 결정하고 그대로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스스로 결정한다는 게 정말로 내 선택일까? 선택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선택하기 전에는 어느 쪽이어도 좋다. 그러나 선택한 후에는 하나로 결정된다. 그것이 선택이다. 누구나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선택했다면 그건 진정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선택지 속에서 망설이는 가운데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유가 있어 결정하지만 실은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결정을 내리면 현실이 열린다. 길모퉁이를 도는 것과 같다. 선택이 새로운 나를 만든다. 

 

- 다른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선택을 거듭하면서 나는 계속 나 자신이 되어간다. 진학도 취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내가 나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나라는 존재는 실은 애매한 선택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애매한 선택의 축적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마음먹은 대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정하고 있는데 결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간혹 이런 일이 있다. 

 

- 당신은 이 책에 손을 뻗쳤다. 그때 벌써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각각의 종교를 두 줄로 정리한 내용을 읽었다. 어느 것이든 하나를 선택하는 구조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가 결정된다. 그 선택에 이유가 있는가? 아마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운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어서 이 종교를 선택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운명을 이겨내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 사람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운명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선택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정할 수 없다. 오히려 상대가 다가오기도 한다. 

- 조금만 어긋났어도 친한 친구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런 게 운명이다. 종교도 간혹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떤 종교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도 운명적인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의 만남일지 모른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꼈던 결핍의 실체를 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입구까지만 안내한다. 그다음은 각자의 자유다. '행운이 함께하기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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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까요? 고대 사람들은 마을에서 무리 지어 살거나 작은 집단에 속해 살았습니다. 이런 작은 공동체에서 살던 옛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정해진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죽으면 새가 된다거나,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거나,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즐겁게 산다는 식이죠. 이는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모아 집단의 생각으로 바꾼 것입니다. 모두 똑같이 죽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같은 마을의 동료들이니까요. 이렇듯 작은 집단에서는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이 대개 하나로 통일됩니다. 이는 삶의 방식도 대체로 한 가지뿐임을 나타냅니다.

 

- 이들은 10억 명에서 20억 명의 인구를 지닌 거대 문명으로 모두 거대 종교를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이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불교도 거대 종교로 꼽을 수 있습니다. 불교 역시 인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리하면 지금까지 인류에게 큰 영향을 준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불교,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 이 종교들은 죽음에 관해 확고한 사유 체계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죽으면 어떻게 될지 혼자 골똘히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이 종교들을 참고하는 편이 낫습니다.  

 

- 이 설명에 수긍이 가는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어떤 대상을 생각하고 느끼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정말이지 큰 사건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게 어렵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깊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그 사람이 죽기 전과 죽은 후에도 경험하는 주체인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내가 없다면 경험이라는 행위도 성립할 수 없다. 이것과 비교해서 '나'라는 존재가 죽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경험을 성립시키는 토대 자체가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사물을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내가 죽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죽음뿐이겠는가. 일체의 경험이 성립되지 않는다. 사물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 압도적인 사건이 '나'라는 존재의 죽음이다. 어쩐지 점점 무서운 이야기가 되어가는 듯하지만 여기까지는 잘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 정리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고 말해도 다른 누군가가 죽는 것과 내가 죽는 것은 아예 상황이 다르다. 타인의 죽음은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이 나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반면 나의 죽음의 경우, '나'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곧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죽음은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나'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언제가 반드시 일어날 사건임을 '나'는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나'라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나'의 죽음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일은 일어난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경험할 수 없지만 반드시 일어나는 일, 그것이 '초(超)'경험적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험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분명히 일어나게 될 사건. 그 일은 정말로 일어나는 걸까? 

 

- 죽음과 반대되는 태어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태어남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시작을 찾아보아도 어렴풋하다. 너무도 중요하고 인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어남의 순간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 이사시키 다카히로(伊佐敷隆弘)의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사관을 둘러싼 여섯 가지 철학(死んだらどうなるのか? - 死生観をめぐる6つの哲学)>이었다. 죽음에 관해 잘 정리한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사시키에 따르면, 죽음에 관한 사고방식에는 크게 여섯 가지 패턴이 있다. 그것이 사람들 안에 저마다 다른 비율로 뒤섞여 있다.  

1. 다른 사람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
2.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며 살게 된다.
3. 곁에서 후손들을 지켜준다.

4. 살아있는 후손의 몸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5.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6. 완전히 소멸한다.

-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만큼 간단하고 알기 쉬운 정리다. 읽고 나면 어떤 것이든 "그렇군!" 하고 동의하게 된다. 이 여섯 가지 패턴을 찬찬히 살펴보자. 일단 어느 것도 삶에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증거가 없다. 그런데도 왜 다들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관해 다들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증거가 없어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 다들 그렇게 믿게 된다. 이는 경험적인 세계로부터 얻어진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험적인 세계와 완전히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경험적인 세계와 병행하는 사고방식을 이사시키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가 말한 여섯 가지 패턴은 소박한 사고방식이다. 관습과 문화, 민간신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분명히 죽음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결론이 이 여섯 가지 중 하나로 도달할 것 같다. 

 

- 이 책은 철학이 아닌 종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교는 죽음에 대해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해 왔고 사람들을 그 틀에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력 종교는 특정 시대, 특정 지역 사람들을 모조리 옭아매어 다른 사고방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화된 지금, 종교의 틀이 느슨해지고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 고유한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어느 것이든 골라잡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 지금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의미로는 우연일 뿐이다. A학교를 졸업하고, B회사에서 근무하고, C와 결혼했다. 아이도 두 명 태어났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방향이긴 하지만 모든 게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입시에 실패하고, 원하지 않던 일이 직업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A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B회사에서 근무하지 못하고, C와 결혼하지 못했다고 한들 나라는 존재가 바뀌었을까? 그 역시 내가 아니었을까? 

-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와 별개로 또 다른 내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철학에서는 가능세계 의미론(世界意味論)이라고 한다. 나는 어떤 기능세계에서도 나다. 가능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관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생각을 더 깊게 파고들어 가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 모른다. A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나, 두 살이 될 때까지 걸음마를 떼지 못한 나, 현재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나. 개로 태어난 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세상에는 분명 많은 우연이 섞여 있다. 하지만 많은 필연도 있다. 우연과 필연이 직물처럼 엮인 상태가 이 세상이다. 거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

 

- 먼저 세상의 필연적 구조를 이해해 보자. 과학에서 말하는 자연법칙이 도움이 된다. 과학에 만족해서 세상의 우연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처럼 '나머지는 우연'이라는 말은 무시해도 좋다. 그러면 세상에는 필연만이 남게 되고 합리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는 내가 '나'임을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나'라는 핵심에는 우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을 향해 끝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결과도 마찬가지다. 결과의 결과의 결과를 쫓아가면 이 또한 원인처럼 끝이 없다. 결과는 세상의 끝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그게 다가 아니다. 하나의 사건이 오직 하나의 결과만 낳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 동시에 몇 개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또한 하나의 사건이 오직 하나의 원인으로만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 자연과학은 관찰과 실험에 기반을 둔다. 연구 대상을 한꺼번에 인식하려고 하는 대신 대상을 잘게 분해한다. 이를테면 물리·화학·생물·지리·천문학 등으로 분야를 나누고, 물리는 다시 응집물질물리학·전자물리학 등으로 더욱 세밀하게 나뉜다. 관심의 범위를 최대한 좁혀서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실험한다. 실험이란 조건을 통제하는 행위다. 요인(변수) 사이의 관계를 예측대로 끄집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요인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처럼 자연과학은 조건을 통제해 자연법칙의 일부를 알아내고 그것들을 종합함으로써 세상 전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는 한 번에 전체를 인식하려 들지 않는다. 일단 꾹 참고 일부의 결과만으로 만족한다. 미래에 과학이 더 진보하면 마침내 자연 전체를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뿐이다. 

 

- 브라만사제들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성전을 해석하고 신을 모시는 제사를 주재하며 수행에 전념한다. 이를 통해 사회의 존경을 받는다. 그 아래에 보통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 사회는 이들을 몇 가지 계급으로 분류해서 서열을 정했다. 크샤트리아(정치·군사 담당), 바이샤(비즈니스 담당), 수드라(서비스 담당)다. 이 네 가지 계급체계를 바르나(varna, 種姓)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바르나에도 속하지 못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불가촉천민 또는 아웃 카스트라고 한다. 바르나는 다시 더 작은 직업 집단인 자띠(jati)로 분류된다. 불가촉천민도 여러 직업 집단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 인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서열 전체가 카스트 제도다. 

 

- 왜 이런 식으로 서열이 정해진 걸까? 그 배경에는 서열이 높을수록 깨끗하고 낮을수록 더럽고 부정하다는 억지 논리가 깔려 있다. 아마도 이 논리는 나중에 만들어진 듯하다. 세상에는 세속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브라만보다 훨씬 더 많은데, 그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브라만 계급이 카스트 제도를 확립해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자신들을 서열의 정점에 올려놓았다. 

 

- 석가모니는 샤키야족의 성자라는 뜻이고, 세존은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을 말한다. 불교가 막 탄생한 초기에는 누구라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큰 흐름을 이루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석가모니 붓다만이 깨달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나중에 석가모니 붓다 외에 깨달음을 얻은 다양한 붓다가 등장했다. 

 

- 다양한 붓다가 등장하면서 최초로 고안된 내용이 과거불(過去佛)이다. 아주 먼 옛날에 이 세상에 나타난 붓다가 있었다.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해서 일곱 명의 붓다를 말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붓다가 연등불(燃燈佛)이다. 고타마는 먼 과거 세상에서 연등불과 만났다.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이었던 그는 연등불로부터 훗날 붓다가 되리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처럼 붓다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 것을 수기(授記)라고 한다. 붓다는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一切知)이며, 미래를 볼 수 있어서 예언도 가능하다. 연등불이라는 말에는 고타마가 수행의 길을 잘 나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빛을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과거불은 모두 과거에 있던 붓다다. 현시점에서 붓다는 석가모니뿐이다. 불교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다.  

 

- 과거불은 이제 없어서 현재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거나 모실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현재 존재하는 붓다다. 그리고 붓다에게는 교화 범위가 있으며, 그 범위 안에는 다른 붓다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 원칙을 '하나의 세상 한 명의 붓다', 즉 일세계일불(一世界一佛)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한 소승불교가 이런 원칙을 세웠고 대승불교가 이를 계승했다.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교에는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고방식이 있다. "불교는 죽음을 이렇게 생각한다"고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할 수 없다. 불교의 사고방식이 다양한 이유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 제자들에 의해 다채롭게 해석되어 퍼졌기 때문이다. 불교의 본질은 고타마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윤회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윤회는 불교가 힌두교와 타협해 들여온 사상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가 말하는 죽음은 윤회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좋다. 

 

- 유교는 정치를 중시한다. 경제나 문화, 종교는 항상 정치보다 순위가 밀린다. 유교 고전은 어떻게 하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매뉴얼이다. 그럼에도 유교는 종교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황제가 하늘을 받들고 제사를 지낸다. 황제는 유교의 정통 통치자로서 하늘로부터 자리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천명(天命)에 보답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하늘을 모실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뿐이며, 이는 곧 황제가 정통 통치자임을 표명하는 과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라는 존재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건 종교 행위로 볼 수 있다. 둘째, 중국 사람들은 모두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손의 의무다. 부모(특히 아버지)를 존경하며,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까지 제사를 지낸다. 이렇게 부계 혈연집단이 만들어진다. 부와 권력에 의존할 수 없는 힘없는 일반인에게는 이 혈연 네트워크가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자리 잡는다. 

 

-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유교에는 종교다운 면이 없다. 유교는 종교에 관심이 없다. 공자(孔子)는 "괴이한 것, 초인적인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이상한 현상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 

 

- 인도는 불교의 출가수행자 집단에 관대했다. 정부에서 자치 활동을 보장해 주었고, 출가수행자는 형사 책임을 추궁받지 않았다. 반대로 출가 집단이 정치나 경제 등 세속 활동에 관여할 일도 없었다. 이런 불교가 확산되면 효를 존중하는 ... 

 

- 염불종의 세력을 크게 확장한 인물이 호넨이다. 호넨은 불교의 모든 교리를 '칭명염불'로 순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칭명염불이란 붓다의 명호(名號) '나무아미타불'을 읊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은 단순 명쾌해서 일반 민중들이 받아들이기 쉬웠고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 위세가 대단해서 당시 일본의 모든 불교 종파를 아울러 염불종으로 재편할 정도였다. 

 

- 염불종의 파괴력은 마르크스주의 같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를 비판한다. 염불종은 율령제와 귀족의 탐욕, 사찰의 세력화를 비판했다. 당시 사회체제를 맹렬히 비난한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백성을 짓밟고 부귀영화를 탐하는 귀족과 스님의 왜곡되고 잘못된 체제는 말세를 연상케 했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말세는 비상사태와 같아서 통상적인 수행이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그만큼 세상이 혼탁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세를 위한 가르침이 따로 없을까? 불전을 꼼꼼히 살펴본 호넨은 정토경전에서 답을 찾았다. 

 

- 기존 불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붓다와 그의 제자인 출가자들이었다. 재가자인 농민이나 상인들은 주변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법화경>은 주변인에 불과했던 신자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줄 수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닮은 점이 많다. 그렇다고 법화종이 <법화경> 원리주의 종파가 된 건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법화경> 읽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이름 외우기를 중시해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과 <법화경>의 명칭을 반복해서 외우게 했다. 여기서 나무(南無)는 '뜻에 따른다'는 뜻이고, 묘법연화경은 <법화경>의 원래 이름이다. 즉 '나무묘법연화경'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의미다. 이는 경쟁자인 염불종의 '나무아미타불'이 널리 퍼져 있었던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비록 문맹일지라도 법화종 신자가 될 수 있도록 고안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신자들이 경전 내용을 근거로 기성 불교를 비판하고 사회를 고찰하는 회로가 닫혀버렸다.  

 

- 막부 말기의 관군과 메이지(明治) 시대 육군이 히라타 신도의 영령 아이디어에 주목했다. 무진전쟁(戊辰戰爭, 1868년 유신정부군과 막부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당시 전투가 끝날 때마다 장례를 치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이 시신을 수습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계명을 쓴 위패를 불단에 안치했다.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일이었다. 그 일을 못 하도록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죽은 사람이 영령이 되면 군대나 국가가 전사자를 한데 모아 모실 수 있다. 가족이 장례를 치르든 계명을 붙이든 위패를 모시든 상관없다. 죽은 사람이 영령이 되는 건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군은 죽은 사람의 영령을 불러들이는 초혼제(招魂祭)를 지내 전사자의 넋을 달랬다. 육군은 초혼사(魂査)를 세우고 전사자의 영령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 도쿄에 있는 초혼사가 야스쿠니 신사(神社)가 된 건 1877년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육군, 해군, 내무성이 관리하는 국영 시설이 되었다.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다'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이었다. 종교가 아니니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가 있는 국민에게 야스쿠니 신사나 호국 신사의 참배를 강요할 수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요리시로(依代, 신이 깃드는 도구)가 될 거울이 있는데, 전사자의 영령이 그곳으로 초대되어 합사 된다. 합사란 같은 요리시로에 함께 머문다는 의미다. 함께라고 해서 합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 영은 개인 영이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영뿐이다.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망자들은 에도 시대 말기 이후의 사망자들이다. 최근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즘 사람(일반국민)이라도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신도에서 벗어난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수백만 명의 전사자가 나왔으며 야스쿠니의 영령은 대부분 이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의 신사라는 생각이 든다. 외신들은 '워 슈라인(War shrine)'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근원을 따지면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신사가 아니다. 에도시대 말기 전쟁으로 죽은 재야 인물들을 모시는 혁명 기념 신사다. 훗날 많은 전쟁으로 전사자가 늘어났지만 초기에 만들어진 의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방식대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한번 생각해 보라. 그 종교와의 만남은 운명적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어느 종교를 선택하든 결국은 똑같다"고 말해보라. 어째서 그럴까? 이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상대주의에 괴로워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든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통해 과학과 상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텅 빈 우연의 공백을 메우고, 자기 나름의 확신을 가진 채 다른 사람과 더불어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선택해보지 않으면 종교의 참뜻을 알 수 없다. 그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종교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결국은 마찬가지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사후 세계 설명서
“죽음을 망각한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은 완전히 다른 상태이다. 전자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신의 상태에 가깝다.” _ 레프 톨스토이 동물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도, 꼭 신에 가까워지고 싶어서가 아니라도, 사람은 살면서 한 번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왜일까? 바로 잘 살기 위해서다. 어떤 게 잘사는 삶인지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 전제는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부모도 친구도 전지전능한 신의 뜻도 아니다. 오직 내 뜻대로 살아갈 때 바라는 삶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확고한 사람은 죽음을 겁내거나 피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삶의 태도가 결정된다. 죽음은 삶을 소중하게 다뤄야 할 무언가로 만들거나 혹은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죽음이 삶을 이끄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죽을지를 결정하는 일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정하는 주체적인 행위이다. 죽음이 삶을 결정한다. 이 책은 인류 최대의 지적 재산인 세계 5대 종교와 그로부터 이룩된 거대 문명이 묘사하는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를 다채롭게 보여준다. 살아서는 접근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스케치를 그리며, 이를 토대로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이끈다. 정해진 답은 없다. 길이 있을 뿐이다. 원하는 대로 살다가 원하는 대로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후회 없이 죽고 사는 법’에 관한 안내서다.
저자
하시즈메 다이사부로
출판
불광출판사
출판일
202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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