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파멜라 크리베] 예수아 채널링 - 빛의 일꾼들에게 전하는 새 시대의 메시지

일루젼 2023. 3. 17.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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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파멜라 크리베 / 이균형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16.07.29 


       

새로운 시험의 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떻게 펼쳐져나갈지 설레는 마음이 더 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현 상태를 거울로써 관찰하고 고요함 속에서 인도를 요청해 볼 계획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건 선물로써 받아들인다는 믿음은 걱정보다는 강건하고, 생각보다는 쉽게 흔들린다.

 

이 책은 일주일 정도 전에 읽었었는데, 개인 일정으로 인해 지금 리뷰를 쓰게 되었다. 당시에는 모호하게 느껴지던 부분들이 새롭게 다가와 '지금'에서만 쓸 수 있는 단상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안배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파장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떨어트려 '고체화'해 구현하는 현상을 얼음에 비유해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의 수증기가 체감할 수 있는 크기의 물방울을 거쳐 가시적이고 형태가 고정되는 얼음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물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얼리는' 과정에서 섞인 불순물 -산소, 이산화탄소, 녹아든 미량원소들, 냉장고 내에 있던 음식 분자들- 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얼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형태를 유지하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해진다. 

 

심상화를 통한 구현은 -그리고 모든 구현은- 이런 형태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실제로 형태를 갖추기까지 얼음틀을 변경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 채 얼지 않은 얼음을 계속해서 다른 틀로 옮겨 부어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음을 얼리기까지 필요한 시간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얼음이므로, 확고한 틀 -특정 감정과 고요함-을 유지하되 형태는 냉장고 -더 큰 나- 에게 맡기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또 스스로가 그런 얼음이라고 상상해보자. 보통의 얼음은 녹으면서 그 안에 갇혀있던 것들을 다시 뱉어내지만, 자신은 그것들을 녹여내어 새로운 하나가 될 수 있는 특수한 얼음이라고. 그렇게 녹이고 정화하는 힘은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진정한 내면아이 치유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을 넘어서서, 현재의 아이가 미래의 이상적인 자신이 되는 것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예수아의 메시지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이며, 그/그녀는 미래의 자신이기도 하다는 설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와는 다른 신을 그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은 수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오래도록 꺼져있던 휴대폰을 켰을 때, 한참 전의 문자나 알림이 수신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을까? 그것들은 진동의 형태로 공기 중 -특정 주파수는 우주 공간으로도- 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수신할 수신기가 켜졌을 때 가시화된 것뿐이다. 바로 지금, 당신이 숨 쉬고 있는 텅 빈 공간은 그런 수많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것들을 수신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것과 같은 주파수가 될 것인가 아닌가의 선택에 달려있다. 원하는 것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그것이 되라는 의미는,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하라는 의미도 될 수 있지만 말 그대로 같은 상태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꿔말하면, 지금 뭔가 원하지 않는 상태라면 빠르게 그 감정과 생각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의미도 된다.

 

두려움과 갈망은 구현의 관점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은데, 두 가지 모두 그리 이롭지 않은 것들을 끌어오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두려워하는 내용 그 자체를 구현한다면, 갈망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상황을 구현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원하지 않는 것을 열심히 만드는 셈이다. 많은 이들이 현재에 감사하고 이미 원하는 것을 얻은 상황을 선명하게 체감하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부연설명을 하지만, 감각의 영역이다 보니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려운 점이 많다. 당장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것처럼 감각하라는 것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을 당장 행하라는 것도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연습하는 것이 일차적인 삶의 목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서 익숙한 것들을 다시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현 상태의 자각과 정화다. 변화의 감각을 체험하는 것으로 물길이 흐르기 시작한다. 정말 필요하다면 꿈에서라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주변의 수많은 것들이 그것을 향해 당신을 인도해 줄 것이다. 집중해야 할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다. 만약 현실이 당신의 기대와는 다른 것을 주고 있다면, 무엇이 그것을 이끌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개인의 의식이 인지하지 못할 뿐, 감정의 기도는 정확하게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되면 삶이 훨씬 편안해진다. 내가 놓친 그것이 사실은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경험이 나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되, 가능하다면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려 노력해보라고 예수아는 말한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라는 이원성을 자신 안에서 통합시켜 '매 순간을 천진하게 즐기고 사랑하라'고. 

 

외부의 인정과 사랑을 원하는 이는 스스로가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주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구현해낼 수 있다면,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다. 방법은 내면에서 떠오른다. 혼란스럽고 모르겠다면, 진실로 모르는 것인지 알지만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인지를 살펴라. 아무래도 따르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그런 상태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어느 한쪽이 더 괴로워지는 때가 오면 스스로를 덜 괴롭게 하는 쪽으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모든 순간 '자신에게 최고의 선택'을 내리면 된다. 그것에 대한 타인의 평가나 시선을 고려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 외부에 자신의 힘을 넘겨주는 일이 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것을 '원해서' 선택하는 내어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아 채널링>을 통해 고민하고 있던 부분들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고, 스스로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것들을 삶 속에서 익숙하고 편안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연습과 실수가 필요하겠지만 이전의 나와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이라면 두려움이나 집착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될 일은 되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모든 것이 자신이 행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매순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인지하고, 원하는 것에 집중하며 매 순간 감사를 잊지 않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자신의 원과 일치하건 아니건 감사하며. 

 

많은 변화들이 예정된 봄이다. 

하드 모드가 예상되지만, 조금은 레벨 업을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해낼 수 없다면 또다른 변화가 오겠지.  

 


   

- 메시지를 보내는 주인공이 가령 '예수'라고 주장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무턱대고 믿기보다는 참고정보로 받아들인다. 믿든지 안 믿든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거니와 그 자체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령 그게 예수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경우에도 그것이 곧 예수의 메시지를 실제로 채널링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채널링이라는 현상의 존재는 조건만 만족한다면 나 같은 보통사람도 예수와 같은 높은 존재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서 '저 높은 곳'이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마지막으로 메시지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그 메시지가 내가 몰랐던 것을 깨우쳐주어서 그 결과로 내가 더 성숙해지고 내 삶에 자유로움과 조화가 더해졌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 내게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설사 책 속에는 그보다 더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존재, 내 삶으로 체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공격적인 에너지를 자신의 에너지장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아무도 거기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세요.
 

거기에 분노와 증오로 반응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그것을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 내가 여러분께 드리고자 지니고 온 그리스도 에너지는 이원성의 세계를 넘어간 집단의 에너지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은, 이 에너지가 선과 악, 빛과 어둠, 주기와 받기 등의 양극을 동일한 하나의 에너지의 양면으로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의 실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갈등이 없다는 뜻입니다. 현실에 대한 온전한 받아들임만이 있습니다. 갈등이나 저항이 없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에너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스도(혹은 그리스도 에너지)는 모든 생각과 느낌과 행동의 양극단을 '하나의 신성한 에너지의 현현'으로 인식하므로 '그'(그리스도화 된 christed 에너지)가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에는 이원성이나 심판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여러분 내면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면 그녀의 가슴은 피해자의 운명에 눈물을 흘리지만,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공격이 한 차례씩 가해질 때마다 그녀는 고통과 굴욕을 느끼고 연민으로 가슴이 가득 차지만,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총으로 권력으로 고통을 가하는 공격자를 지켜보면서 그들 내면의 증오심과 고뇌를 느끼고 애통해하지만,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은 깊은 연민으로써 이 모든 광경을 감싸 안지만 그 누구도 심판함이 없이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모든 측면들을 자신이 몸소 겪었던 경험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녀 자신이 이 모든 배역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의 역할로 살았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그들 중 누구도 아니라 양쪽 모두의 배후에 있는 그것임을 아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 그리스도 에너지는 이원성의 모든 에너지를 거쳐 지나왔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한 때는 어둠과, 또 어느 때는 빛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어떤 것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이 '동일함'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의식은 새로운 종류의 일체성을 획득했습니다. 그녀의 의식이 '그리스도화 된'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화 된 에너지가 바로 내가 여러분께 드리고자 가져왔던 에너지입니다.

 

- 빛의 세계로부터 온 미래의 나 자신인 예수는 그리스도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곧 이곳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 에너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에너지는 예수보다 더 큰 에너지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에너지의 한 부분, 한 세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 에너지 -이것은 한 인격체라기보다는 에너지장과 더 비슷합니다- 는 완벽하게 협동하여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기능하는 무수한 측면들 혹은 세포들을 지닌 하나의 집단 에너지입니다. 모든 세포는 전체를 위해 저마다 고유한 역할을 하면서,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자신을 한 개체로서 경험합니다. 그리스도 에너지의 이런 몇몇 측면들을 천사나 대천사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개체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높은 수준의 이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 천사들의 특징입니다. 이 이타심이 그들로 하여금 집단에너지와 하나인 느낌을 갖게 하여 기꺼이 봉사하게 만들지요. 

 

- 예수/예수라는 인격이 지상에 온 이유는 새로운 의식상태로 연결된 통로, 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한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 모든 인간은 자기 현실의 주인입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비참하거나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놓아 보내고 빛은 들어오도록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창조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진리를 안다고, 여러분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하리라고 호언하는 외부의 권위에 자신의 권능을 넘겨줘버리곤 합니다. 정치, 의학, 교육 등의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것입니다.  

 

-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 빛의 집단적 에너지란, 인간과 지구의 창조를 도움으로써 인류와 지구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하나의 천사계입니다. 사실 여러분도 그들의 일부여서 그들과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다차원적으로, 곧 당신네의 단선적 시간 틀 밖에 있는 의식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차원, 혹은 다른 시간 틀에서 보면 바로 여러분이 예수가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에 거했던 빛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 천사들입니다. 

 

- 나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에너지가 모든 인간의 내면에 하나의 씨앗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모종의 권위로서 우러러보고 있다면 나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믿기를, 자신의 가슴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기를, 그리고 자기 밖의 그 어떤 권위도 믿지 말기를 바랐고, 지금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 영혼들은 흔히 이 모든 생애들을 통해서 뭔가 전문성을 띠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특정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확연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거기에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능력은 적당한 시기에 일깨워지기만 하면 쉽게 발달합니다. 빛의 일꾼 영혼들은 종종 종교적 삶에 이끌려서 무수한 생을 수도사, 수녀, 사제, 주술사, 마녀, 영능력자 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물질적, 육체적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중개자가 되는 쪽으로 이끌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분야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계발했습니다. 당신이 이 부름, 영적인 일에 관여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면, 그것이 현재의 일상생활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라도 당신은 이빛의 일꾼들 가족의 일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 지상의 삶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온전히 경험해 볼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묻겠지요. -인간이 된다는 게 뭐가 그렇게 특별한 일일까? 나는 왜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할까? 

- 인간의 경험은 다양하고도 강렬합니다. 인간의 삶을 살면 육체적감각과 생각과 느낌이 압도하는 장 속에 잠시 젖어들어 있게 됩니다. 이 장 속에 내재된 이원성으로 인해 여러분의 경험은 소위 아스트랄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아스트랄계는 사후에 들어가서 다음 생애 전까지 머무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상상하기가 힘들겠지만, 우리 쪽의 많은 존재들은 여러분의 입장이 되어보기를 갈망할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되어보고 인간의 경험을 얻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아할 겁니다. 인간의 경험은 그들에게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모종의 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상상력만으로 무수한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지만 그것은 지상에다 '진짜' 현실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만큼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 지상에서는 창조의 과정이 흔히 지난한 몸부림이 됩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대개 많은 저항에 부딪혀야 합니다. 하지만 아스트랄계에서 정신적인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무엇에 대한 생각과 그것의 실질적인 창조 사이에 시간차가 없습니다. 게다가 원하거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어떤 현실도 다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한계가 존재하지 않지요. 아름다운 정원을 그리는 순간 그것은 거기 있고,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어떤 생각에 생명을 주는 것은 생각이 물질계의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것은 강한 의도와 끈기와 명료한 마음과 신뢰 깊은 가슴을 요구합니다. 지상에서는 물질계의 느린 속도와 완강한 견고성을 다뤄내야만 합니다. 자기 내면의 모순적인 충동들 -의심, 좌절, 지식 부족, 신뢰감 결핍 등- 도 다뤄야만 합니다. 창조의 과정은 이런 요소들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가로막힐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 그럼에도 이런 문제의 -심지어 실패의- 가능성이야말로 지상의 삶의 경험을 그토록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필수요소입니다. 이 과정, 여러분이 마주치는 도전거리들은 여러분의 큰 스승입니다. 바로 그것이 애쓰지 않고 쉽게 해내는 아스트랄계의 창조과정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심원성을 지상의 경험에 부여해 줍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용이성은 허무한 느낌을 낳습니다. 지상의 삶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아스트랄계의 존재들은 이것을 알고, 이해합니다. 

 

- 우리가 어둠을 빛으로, 혹은 악을 선으로 변성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어둠과 빛, 악과 선은 자연의 양극입니다. 이 양극들은 서로 상대극의 은혜를 입어 존재합니다. 영적 연금술은 사랑과 이해의 에너지를 통해 양극을 모두 포용하는 그런 종류의 의식인 '제3의 에너지'를 만나게 해 줍니다. 여러분의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빛이 어둠을 정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양극을 넘어서 새로운 종류의 의식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빛과 어둠이 양쪽 다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일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바닷속을 다이빙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너무 깊이 들어가서 숨 돌릴 시간을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끈질기게 바닷속으로 다이빙합니다. 당신은 영감에 차 있고 믿음이 확고합니다. 당신은 정신이 나간 걸까요? 아닙니다. 당신은 새로운 것을 탐사하는 자입니다. 

- 비밀은, 당신은 진주를 발견해내려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창조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진주는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영적 황금입니다. 진주는 이원성의 경험에 의해 변성된 당신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역설이 있습니다. - 새로운 것을 탐사하는 와중에, 당신은 그것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신이 창조해낸 진주가 되었습니다. 

 

- 3)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단호한 소견을 지닌다. 심판적인 태도가 안전한 느낌을 제공해 줍니다. 행동이나 생각, 혹은 사람들을 옳은 편과 그른 편으로 구분해 놓으면 삶이 조직적으로 잘 굴러갑니다. 이 모든 특징들에 공통되는 점은, 여러분이 행하고 느끼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이 '정말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두려움에 쫓기는 생각과 행동 습관에 지배받는, 존재의 바깥층에 머물러 있습니다.

 

- 여러분의 의식이 중심을 잡고 온전히 제자리에 머무는 가운데 모든 이원성의 경험을 그 손바닥에 다 담을 수 있게 되면, 지상의 삶의 윤회는 이제 마무리가 되어갑니다. 이원성 중의 어느 한쪽에만(예컨대 어둠에 반해서 빛에만, 궁핍에 반해서 부에만) 붙어 있는 한 여러분의 의식은 시소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카르마란 단지 여러분의 의식이 타고 있는 시소가 흔들릴 수 있도록 밀어주는 자연의 조화로운 힘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시소의 움직임 없는 중심에 닻을 내릴 때, 여러분은 카르마에 연결된 매듭을 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이 바로 카르마의 쳇바퀴를 벗어나는 탈출구입니다. 이 중심점을 감돌고 있는 느낌은 정적과 자비와 고요한 희열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런 상태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것을 '아타락시아 ataraxia', 곧 평정 상태라고 불렀지요.

 

- 여러분을 그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에너지들 중의 주범은 심판과 두려움입니다. 이 에너지를 풀어놓을수록 당신은 더욱 고요해지고 내면이 열립니다. 여러분은 실로 다른 세계, 의식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 이 내면의 변화는 외부의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흔히, 여러분의 '참모습'을 반영하지 못하는 삶의 측면들과 작별을 고하는 변신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와 일의 영역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드물지 않게, 생활방식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면의 변화가 외부세계의 변화를 언제나 앞서가니까요.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물질적 현실을 창조해 냅니다. 이것이 불변의 법칙입니다. 

 

- '빛의 일꾼'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 그룹의 영혼들을 나머지 영혼들로부터 따로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특정한 그룹이 어떻게든 다른 이들, 즉 빛을 위해 일하지 않는 이들보다 우월함을 암시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빛의 일꾼의 본성과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납니다. 그게 어떻게 틀리는지를 간단히 말해보겠습니다.  

 

- 첫째,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대개 깨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자유와 사랑에 찬 의식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둘째, 빛의 일꾼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도 '낫거나' '높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이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과거의 내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래에서 이야기할 이 특별한 과거 때문에 그들은 한 그룹으로 구분되는 특별한 심리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 어떤 단계에 가서는 모든 영혼이 빛의 일꾼이 되므로 '빛의 일꾼'이라는 이름은 한정된 수의 영혼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의 일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기억을 휘저어서 떠오르게 할 수 있는 단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현재 이런저런 영적 문헌들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으므로 사용하기에 편한 이점도 있습니다. 

 

- 어린 영혼이 성장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내가 중심인' 방식으로 바뀝니다. 권력이라는 환상은 영혼들 사이에 연결 대신 분리를 부추겨놓습니다. 이로 인해 영혼들 속에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자리를 잡습니다. 정말로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영혼은 권력을 추구하는 투사, 전사가 됩니다. 권력이야말로 마음을 놓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분간은요. 

 

- 앞글에서 지적했듯이, 영혼의 자유의지란 앗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상으로는 모든 면에서 외계인이 우월하기 때문에 토착영혼들은 자기 결정권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습니다. 빛의 일꾼들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사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그 단계에서 그들은 생명을 그 자체로서 귀히 여겨줄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타자'(그들의 적이나 노예) 안에서 자신들과 같은 살아 있는 영혼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 여기에 심판을 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또한 모두가 장대하고도 심오한 의식 발달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차원에는 그 어떤 죄도 책임도 없습니다. 오직 자유로운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피해자도 없고 가해자도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거기에는 오로지 경험만이 있을 뿐입니다. 한때 이런 어두운 박해수단을 동원했던 여러분, 빛의 일꾼들은 훗날 자신의 행위를 극심히 자책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여러분은 내면에 죄책감을 품고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자격이 모자란다는 느낌으로서 그것을 일부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 '빛의 일꾼'이란 여러분이 '그것'이거나', '아니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경험 -빛과 어둠의 경험- 의 여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여러분이 '되는' 무엇입니다. 이름을 꼭 붙여야만 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빛의 일꾼 대신 그리스도화 된 영혼(Chited sol)이라 부를 것입니다. 

 

- 아직 에고에 중심한 의식의 현실에 붙들려 있는 영혼들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빛의 일꾼인 당신이 나눠 쓰고 싶어 하는 가슴에 중심한 에너지의 모자를 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는 그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건 이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 하지만 인간의 가장 독특한 성질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에너지들을 융합시키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이 모든 다양한 에너지들을 그저 담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재자가 되게끔 설계되었습니다. 

 

- 이처럼 특정한 신체 속에서 한정된, 혹은 특화된 범위의 경험밖에하지 못한 결과 창조된 생물의 세계가 정체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자라고 확장해가지 못하고 일종의 안정 상태에 갇혀버렸습니다. 
  

-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힘은, 폭넓은 범위의 에너지들을 포용하여 정체되지 않은 창조적 균형상태로 가져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실 이 힘은 어둠을 빛으로 변성시키는 능력, 곧 영적 연금술의 힘과 맞먹습니다. 이전까지 대치하던 에너지들을 역동적 조화상태로 가져오는 것은 그리스도화 된 에너지(Christed energy), 곧 이원성 속에서 일원성을 유지하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은 어둠을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을 환희로 변성시키는 바로 그 에너지입니다. 그리스도 에너지는 받아들임으로써 합일시키는 '제3의 에너지'입니다. 그것의 연금술적인 힘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품성에 있습니다. 인간인 여러분은 이 같은 영적 연금술의 능력을 지닌 유일한 존재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천사도, '암흑의 신'들도 이런 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 모든 영혼이 가벼운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어두운 것은 어떤 느낌인지, 우주에 사는 모든 다양한 존재가 되어보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생명체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도 어둠을 빛으로 변성시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경험해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다양한 물리적, 영적 현실을 창조해 내며 살아가는 식으로, 내면의 차원에서 변화해 간다는 것이 대체 어떤 느낌인지를 그들은 상상하지 못합니다. 

 

- 인간과 다른 형태의 생명체로 태어난 영혼들도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자유의지를 행사하지만, 같은 몸속에 있으면서도 극도로 다른 상태나 심지어는 반대 상태인 의식까지 넓혀가지는 못합니다. 인간인 여러분은 가교의 건설자 혹은 영적 연금술사이고, 지구와 인간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 여러분이 지구로 온 가장 깊은 동기는 자기 안의 어둠과 작별하기 위해서였고, 이 어둠을 인간이 된 자신 속에서 대면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여러분은 흔히 자신이 다른 이들을, 어머니이신 땅을 돕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밑바탕의 이유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진정한 빛의 일입니다. 다른 모든 일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 가장 깊은 차원에서 여러분의 영혼들은 어둠을 퍼뜨렸던 자신의 책임을 떠맡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어두운 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란 원래가 고독한 모험입니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돕거나 치료해 줄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도 돕게 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여기서 일의 올바른 순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남을 돕는 일에 너무나 열성적이어서 남을 돕겠다는 그 열성이 종종 함정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의 에너지가 상대방과 엮여서 결국은 진만 빠진 채 좌절하게 만드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 명심하세요.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은 고상하거나 가슴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실수일 뿐입니다. 실수는 여러분이 다른 누군가의 상황이나 마음 상태에 대해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행불행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이에게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따라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나 어머니이신 땅을 '고쳐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기 존재 내부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이 일을 돌보세요.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은 여러분의 노력 없이도 제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 지구로 와서 인간의 몸속에 태어났을 때, 여러분은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에너지와 맞서 싸우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단계의 여러분은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었지요. 한편으로는 자신이 권력이 아닌 '다른 뭔가'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전에 잘못을 저지른 데 대해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에고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지구로 왔을 때 여러분은 어둠을 보면 흥분하여 화가 났고, 어둠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그것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모순은, 여러분은 에고의 에너지와 맞부딪혀 싸우려 들었는데,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니라 여러분이 놓아 보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에너지라는 사실입니다. 
 

- 여러분은 아직 가슴에 중심한 의식이란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슴으로부터 관찰할 때는 선과 악 사이의 다툼이 없습니다. 가슴의 진실은 양극을 초월합니다. 가슴은 어둠에 대항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중심한 의식은 모든 것 -있는 모든 것- 에 대한 수용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든 맞서 싸우면 해결되리라는 생각을 놓아 보내버리는 그런 종류의 의식입니다.

 

- 여러분은 현실을 싸우지 않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다룰 수 있기를갈망했지만 그 이상을 삶 속에서 실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야말로 '중간지대', 곧 의식의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기 전의 무인지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자신이 놓아 보내고자 했던 존재방식 속으로 도로 빠져드는 온갖 '실수'를 다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에고다운 행동을 보이거나 에고에 중심한 가치를 두둔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놓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격적인 반응만 보였습니다. 종종 여러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빛의 일꾼들은 수백 년 동안 마녀, 이교도, 아니면 정치선동가로 몰려서 박해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이상에 떠밀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별나고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유독 저항에 많이 부딪혔습니다. 
 

- 여기서 일어난 일의 실상은, 여러분이 은하세계에서 꽤 오랫동안 가해자의 역할을 한 후에 이제는 피해자로 역할을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분노'는 주변으로부터 역정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여러분은 모욕과 깊은 고통과 무력감에 빠진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여러 생 동안 되풀이해서 거부당하고 쫓겨난 경험의 트라우마가 여러분의 영혼에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무기력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 속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이 삶에서 지쳐서 사랑이 충만하고 살맛 나는 세상에 대한 향수에 빠져 있습니다.

 

- 피해자 역할이란 그저 그것 -여러분이 맡아 하고 있는 그 역할- 뿐임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피해자'란 어떤 사실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한 가지의 해석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편협하고 왜곡된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잠시 맡아할 역할을 창조해 낸 영혼의 의식입니다. 

 

- 정말이지, 여러분은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의 피해자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생에서 여러분이 마주친 공격적이고 비협조적인 에너지들은 여러분 자신의 에고에 중심한 의식과 거기에 매인 의존성이 거울에 비치듯이 되돌아온 것일 뿐입니다. 맞서 싸우는 것으로 해결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그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는 에너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에너지가 여러분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르마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 '악'에 맞서 싸우려는 성향은 악은 내 밖에 있고 현실로부터 몰아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어두운 측면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그것의 역할과 목적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당신네 빛의 일꾼들의 모든 생애를 통해 주어졌던 영적 권고요 숙제였습니다. 

 

- 가장 뜻깊은 권고는 자신을 용서하여 자신의 천진무구함을 다시찾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진무구하며,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것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세상을 변화시키려 들거나 불의에 맞서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재미있게 놀고 삶의 매 순간을 즐기며 그저 자신으로서 남아 있으면서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할 것입니다. 

 

- 무엇 또는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놓아 보낼 때, 당신네 빛의 일꾼들은 더 이상 '외부세계' -사회나 다른 사람들- 로부터 별나다고 배척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바꿔놓으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저항에 부딪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현실에 대한 여러분의 기여가 가치 있으며, 다른 이들도 여러분을 귀히 여기고 환영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은 새로운 의식을 태동시킬 문턱에 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통제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온전히 내려놓은 그런 종류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의식입니다. 

- 지상에서 살았을 때, 나 예수아는 영성이란 빛과 어둠 사이의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넘어선 차원의 자각의식,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야를 발견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내면에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육으로 화한 신성한 존재임을- 진실로 깨달으면 평화와 기쁨과 평온이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변성시키고 치유시키려 이곳에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일들이 정말 여러분에게 이롭게 변화해 가기 시작하고, 그 부수적인 결과로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롭게 바뀌어갑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고, 세상을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은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낱낱의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세요. 

 

-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나의 에너지, 예수아 혹은 예수의 에너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동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지 카르마의 짐이 없는 빛의 일꾼, 높은 수준의 자기 이해를 가진 빛의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향해 가고 있는 에너지가 바로 이것임을 알기 때문에 감동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에너지는 미래의 여러분 자신의 에너지입니다.

 

- 에고가 존재의 중심이 되어 있을 때, 여러분의 의식과 정서적 삶은 옥죄어 구속된 상태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으로 굽실거리고, 그런 마음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자신을 방어합니다. 에고의 단계에 있으면 여러분은 항상 결핍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느낌과 행위의 뿌리는 하나의 블랙홀, 결코 온전히 채워질 수 없는 허공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구멍, 그늘 속에 가려진 곳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으로부터 주의를 돌려버리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그늘 속에는 여러분이 희미하게 느끼지만 다가가고 싶어 하지 않는 허공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신, 혹은 있는 모든 것(All-That-Is)과 여러분의 관계는 분리감으로 특징 지워집니다. 깊은 내면에서 여러분은 버림받아 홀로 남은 느낌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쓸데없고 의미 없이 깨진 한 조각 파편이 된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면 여러분은 그것을 그림자로, 간접적으로만 경험하게 됩니다. 

 

- 사람들은 내면의 공허를 온전히 깨어서 직면하기를 무서워합니다.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여 들여다보기를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직면하지 않아도 그것은 그대로 거기에 있습니다.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여러분은 그것에 '대처할 전략'을 짜야만 할 것입니다. 에고의 전략은 언제나 문제의 핵심은 놔두고 변죽만 울리는 것입니다. 에고는 의식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문제를 무마하려 듭니다. 에고는 여러분에게 외부의 에너지를 먹임으로써 내면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합니다. 에고가 특히 좋아하는 에너지는 인정, 칭찬, 권력 ... 

 

- 균형잡힌 상황에서 기능할 때, 에고는 육신으로서 지상에 사는 영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가치중립적인 도구입니다. 그러나 에고가 영혼의 도구로서 기능하지 않고 영혼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영혼은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에고가 영혼을 부리게 되면 -이것이 에고에 중심한 의식의 성질인 바- 에고는 단순히 내부의 충동을 물질적 형태로 그대로 옮겨놓지 않고 그 충동을 선택적으로 억누르고 통제하려 듭니다. 그러면 에고는 여러분에게 현실의 왜곡된 상을 보여주게 되지요. 균형을 잃은 에고는 언제나 통제와 권력을 추구하고, 그에 준해서 모든 사실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 자신의 일상 속에서 권력과 통제에 바탕한 동기를 찾아내보는 것은 매우 많은 깨달음을 주는 공부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명분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자신이 일이나 사람들을 자신의 뜻에 맞도록 얼마나 몰아가고 싶어하는지를 알아차리도록 해보세요. 일이 나의 방식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통제욕의 이면에는 항상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통제를 내려놓으면, 예측 가능성을 포기하면 어떤 위험이 있는가? 가장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일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대가'로 여러분이 지금 지불하고 있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가 긴장되고, 거기에 구속되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내면의 영감을 따라 살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만 하고 살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자연스럽고 참된 질서를 창조해 낼 것입니다. 더 이상 흐르는 삶을 틀 속에 집어넣으려 들지 않고 평안과 행복을 느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사는 것 말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 어린 영혼에게는 에고에 중심한 의식의 함정을 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에고는 두려움과 버림받은 느낌을 벗어나는 한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주의를 내면에 있는 '그것'으로부터 외부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진정한 답이 아니라 숨 돌릴 틈만 잠깐 주는 것입니다. 주변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시적인 만족감이나 '짜릿함'을 선사합니다. 사랑받고 존경받고 흠모받는 기분이 잠시 듭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고통을 잠시 누그러뜨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 것이어서, 여러분은 더욱 눈에 띄도록, 더욱더 나아지도록, 멋져지도록, 도움 되도록 자신을 계속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 에고의 기치 아래서 여러분은 상냥할 수도 심술궂을 수도 있고, 줄 수도 받을 수도 있고, 지배할 수도 복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심 없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의 대부분은 그것을 받는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입니다. 항상 남을 돌보고 베푼다면 여러분은 단지 자신으로부터 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고의 지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굳이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 같은 잔인한 폭군을 떠올릴 필요까지도 없습니다. 에고의 지배가 있는지 없는지는 일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한 보기로서 여러분이 지금, 어떤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바란다고 해봅시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 자신이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보여야만 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은 상냥하고 고분고분합니다. 그리고 누구의 기분이든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이런 행동 뒤에는 통제욕이 있습니다. '너희가 날 사랑해 주길 바라니까 난 너희를 거스르지 않을게.' 이런 식의 생각 밑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홀로 서기에 대한 두려움, 거부당하거나 버림받는 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상냥하고 멋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자기부정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에고의 작용입니다. 

 

- 에고가 여러분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한,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에너지를 먹고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 외부의 어떤 권위자의 인정을 받을 자격을 갖춰야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둘러싼 세계는 고정되거나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배우자든 상관이든 부모든 간에, 여러분이 의존하는 것에 영원히 붙어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은 늘 일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한 조각의 인정을 줍기 위해 두리번거리면서요. 에고 단계에 갇힌 사람들이 하염없이 들어앉아 있는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 상태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에고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사랑과 긍지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버림받은 트라우마에 대해 에고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란 것은 사실 바닥 없는 구덩이입니다. 어린 영혼의 의식에게 주어진 진정한 임무는, 잃어버렸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데 에너지가 적게 빠져나가면 다른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에너지의 여유 공간이 열립니다. 이런 단계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그저 내면이 매우 공허하고 지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하거나 직접적인 이유가 없는 두려움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죽을 것 같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나 결혼관계에 대한 분노가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자명하게 느껴지던 모든 것이 이제는 의심스럽게 느껴집니다. 에고에 중심한 의식이 막아보려고 애쓰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항아리의 뚜껑이 서서히 열리고, 온갖 걷잡을 수 없는 감정과 두려움이 튀어나와 의식을 어지럽히며 삶 속에 의심과 혼란의 씨를 뿌립니다. 여태까지 여러분은 거의 자동기계처럼 기능해 왔습니다. 많은 생각과 기분의 패턴이 자동으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의심 없이 지나 보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의식에 통일성과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의식이 성장하고 확장되면 여러분의 인격은 둘로 나뉩니다. 여러분의 한쪽은 옛날 방식을 붙들고 있기를 바라고 다른 쪽은 그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노여움, 두려움, 의심과 같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에고 단계의 끝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확장은 종종 홍 깨는 일, 함부로 끼어들어서 게임을 망쳐놓는 일로 경험됩니다.  

 

- 이런 새로운 자각은 이전에는 너무나 명백해 보였던 모든 일을 흩트려 놓아서,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무력감에 빠지게 합니다. 에고에 중심한 사고와 행동 습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이 의식 속으로 들어섭니다. 그것은 권력 대신 진실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일부분입니다. 에고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은 매우 억압적인 삶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특히 여러분 자신에 대한 통제력과 권력을 쥐려고 하는 두려움 가득한 어린 독재자를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절로 일어나는 느낌과 직관의 흐름은 이 독재자에 의해 억압됩니다. 에고는 자발적인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고는 여러분이 자신의 느낌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느낌과 감정은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해서 에고에게는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에고는 가면을 쓴 채 작용합니다. 
 

- 에고가 여러분에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상냥하게 배려하라"고 시키면 여러분은 마음속의 분노와 불쾌한 심기를 조직적으로 억누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지시가 쓸 만한 것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당장 이 억압된 감정들이 올라옵니다. 느낌은 억누른다고 제거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계속 버티고 살면서, 오래 억누를수록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에고 단계 말기의 뚜렷한 특징인 공허와 의심을 경험하고 나면 영혼은 이전까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모든 느낌과 감정을 만나 직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갇혀 있는 감정과 느낌이야말로 여러분의 더 큰 자아로 들어서는 문입니다. 느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느끼는' 그것을 탐사함으로써, 여러분은 자발성과 성실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면의 아이'로도 불리는 여러분의 일부입니다. 자신의 진실한 느낌과 감정을 만나면 여러분은 해방의 길로 인도됩니다. 그러면 가슴에 중심한 의식으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 에고를 중심 삼은 의식의 모든 표현들의 가장 깊은 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가슴에 중심한 의식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아무리 괘씸하더라도 그 밑에 숨겨져 있는 고통과 외로움과 자기 보호 본능을 알아차리면 여러분은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영혼과 살을 맞대고 만나게 됩니다. 두려움에 떠는 영혼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여러분은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에게 제일 먼저 적용되는 일입니다. 

 

-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정말로 혐오하는 것 -생각만 해도 정말 짜증이 나서 오래전에 없애 버렸어야 하는 건데, 하고 생각하는 것- 을 한 가지 떠올려보세요. 그것은 불안감, 게으름, 참을성 없음, 아니면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껴지는 어떤 것이든지 말입니다. 이제 이런 성질이나 경향성 배후의 진정한 동기를 이해하려고 애써보세요.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런 것을 다시금 다시금 느끼거나 하게끔 밀어붙이는가요? 여러분의 동기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요소를 찾아낼 수 있습니까? 거기에 두려움이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이렇게 느끼는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아이쿠, 네가 그렇게 겁을 먹은 줄은 몰랐어! 도와줄게." 이제 여러분의 태도에는 참을성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가 있습니다.  

 

- 여러분이 공격성이나 중독이나 비굴함이나 공허함 등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을 '나쁘거나' '죄 많거나' '멍청한' 것으로 판단하는 한 여러분은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무엇을 심판할 때 자신의 마음이 가혹해지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습니까? 입술이 단단히 닫히고 눈빛이 차가워지는 등, 뭔가가 팽팽하고 엄해집니다. 우리는 왜 무엇을 심판해야 합니까? 매사를 옳고 그른 것의 틀 속에 구겨 넣으려 드는 이 충동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심판하고 싶어하는 충동 뒤의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 에고에 중심한 의식을 놓아 보내기 위해서 여러분은 매사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키우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장 잘 묘사하자면 중립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것을 그저 알아차리되 그것이 '어때야 한다'는 생각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에고에서 비롯된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그저 지켜보고 그 속의 두려움의 알맹이를 인식하여 에고가 여러분의 눈앞에 실로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투명하게 보이는 것은 원하기만 하면 다 놓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 모든 인간은 두려움을 압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느끼는 어둠과 외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각 반응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폭력이나 무자비의 가면을 쓰고 간접적으로 드러나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행동이 파괴적이고 잔인할수록 그 뒤에 숨어 있는 두려움과 고립감은 ...  

 

- 진정한 창조성은 결단과 강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가슴에서 나옵니다. 미지의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진정한 창조자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성의 진정한 열쇠 중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엇이든 하려 들고, 붙들어 고정시켜두려고 하고, 집중해서 대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능력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수용적이되, 깨어 있는 상태로 가져다 놓는 능력입니다. 오로지 알려고 하지 않고 가능성이 열려 있게 둠으로써만 새로운 뭔가가 여러분의 현실로 들어올 여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 이것은 '현실 창조'를 논하는 많은 뉴에이지 서적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여러분이 매 순간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자각하고 있건 말건 간에 여러분의 의식은 창조자입니다. 그러나 많은 책과 요법들이 가르치고 있듯이 자신의 현실을 의식적으로 창조하고자 한다면, 가장 강력한 형태의 창조는 의지(적극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앎(수용적인 태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 물질세계의 모든 변화, 예컨대 일이나 인간관계나 물질적 환경의 변화는 내적 차원의 변화가 반영된 것입니다. 오직 내적 변성의 과정이 마무리되어야만 물질적 현실이 그것을 반영하여 여러분 삶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여러분에게 응답해 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목표에 집중하거나 그것을 늘 심상화하는 등, 의지로써만 무엇을 창조해 내려고 애쓴다면 여러분은 변화의 진정한 선행조건인 "내적 변성 과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창조하고 있고, 그러면 반드시 실망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창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영혼은 침묵의 순간에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를 때, 여러분은 그 목소리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영혼은 흔히 포기하고 수건을 던질 때에야 또렷하게 말해옵니다. 좌절하여 포기할 때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태도가 되지요. 

 

- '좌절'은 나의 삶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하는 여러분의 강한 믿음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 믿음에 현실이 응답해주지 못하면 여러분은 실망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포자기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강하게 기대하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과감히 마음을 열면 영혼과 다시 교감하기 전에 좌절에까지 이르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말해주는 것에 실망부터 하지 않고 고요히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안다'고 하는 한, 흔히 여러분은 에너지 차원에서 자신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을 한정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자리든, 인간관계든, 건강이든 간에 여러분이 찾고 있는 이 새로운 현실은 여러분이 모르는 많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종 자신이 원하는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좋은 일자리, 사랑스런 애인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때 여러분이 정말로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의 심리적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그 울타리 너머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 뭔가 아주 괜찮은 것이 있다는 것은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심상화하거나 거기에 집중하여 그것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좁혀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호기심과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기만 해도 됩니다.

 

- 실제로 자신에게 가장 바람직한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의지를 집중하는 것보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만트라를 수천 번 되뇌면서 마음속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예컨대 분노, 우울, 조바심 등)과 어긋나는 이미지로는 혼란과 의심밖에는 창조해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사랑은 여러분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오는 가장 강력한 자석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그 사랑을 반영해 주는 환경과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토록 단순한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에너지, 자신의 모든 기분을 느끼세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그 모든 고투와 슬픔 속에서도 얼마나 아름답고 진실한지를 느껴보세요. 여러분은 그 모든 '불완전성'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실속 있는 유일한 깨달음입니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세요. 자신에 대해 편안해지세요. 유머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온갖 흠'을 바라봐도 좋습니다. 완벽은 선택할 수 있는 사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영일 뿐입니다. 

 

- 가슴으로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빛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알아차림으로써 여러분은 물리적 차원에서 자라나 모습을 갖추게 될 하나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 그들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들 고유의 리듬과 흐름을 타고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있어줄 때, 거기에는 사뭇 중립적인 느낌의 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변화시키거나 치유해주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망을 내려놓은 초연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특정 단계에 이를 때 모든 빛의 일꾼들이 내비치곤 하는 이 같은 욕망은 자기만의 진실을 찾아서 가고자 하는 각자의 내면의 길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진정으로 내려놓을 태세가 되려면 문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 그들은 그 문제의 해답을 정말로 '가지게' 되고, 이것은 그들에게 깊은 만족감을 줍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자신의 삶과 자신이 씨름하는 문제들 속에서 이것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사람들이 '바닥을 치지 않도록' 막아주려고 애쓰지 마세요. 거기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들은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뭐라 말하든 거기까지 가고 말 것입니다.

 

- 여러분이 돕는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감정적으로 연루되면 그들을 치유하거나 변화시키고자 하는 여러분의 개인적 의지가 끼어들게 됩니다. 이런 개인적 욕망은 그들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치유과정을 훼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이미 여러분은 사랑과 허용의 공간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이것을 감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들을 관찰하고 읽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 또한 여러분을 예리하게 읽고 있습니다! 

 

- 에고로부터 가슴으로 옮아가는 4단계는 영혼의 수준을 초월하여 영의 수준으로 오르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어떤 식으로든 '영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보다 더 크고 더 넓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경험을 위한 도구입니다. 내면의 영, 여러분의 신성한 자아와 동화되면 여러분이 무수한 생에서 경험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자신을 그중 어느 것과도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여러분은 경험 너머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영혼에 치유의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 진짜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해방하고 변성시키는 그런 다차원적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다차원성을 부려서 차원계들을 마음대로 다니면서도 자신의 신성한 영과 교감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지혜와 자각의 자리로부터 다차원적 존재를 누리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영적 숙명입니다. 온전히 깨어 있는 다차원적 창조자가 되는 것은 여러분의 숙명입니다. 

- 다차원성 속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직선적 시간이라는 환영에서 깨어난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한 여러분이 육신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다차원 속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곧, 그 어떤 경험세계 -곧 차원계- 든 얼마든지 맘대로 골라서 드나들 수 있는 여러분 내면의 영(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다차원성 속에서 깨어 있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지구의 현실의 핵심입니다. 

- 여러분이 다차원성이라는 개념을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는 이유는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차원계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물질 덩어리'가 아닌 것입니다. 차원계란 특정한 에너지 법칙을 따르는 의식의 세계, 의식의 권역입니다.

 

- 여러분의 의식은 동시에 여러 다른 차원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일어납니다. 과거와 미래의 현실이 있고, 아스트랄계와 전생의 현실이 있고, 지금 여기서 여러분의 내면에서 스치고 만나고 있는 여러분 내면의 천사의 현실과 그 이상의 현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다차원적 존재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다차원적 존재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자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차원계들이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나갔다 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 차원계들이 가져다주는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여러분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 여러분은 자신이 늘 그 일부로 있는 다른 차원계들과 교감합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써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사실 그 차원계의 현실들을 변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차원계들로부터 온 가두어진 에너지를 안아 들여 여러분의 의식의 빛을 받게 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일부를 해방하여 통합함으로써 현재를 바꿔놓게 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서 의식의 여러 영역들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여러분이야말로 그중 어떤 경험을 할지를 선택하는 주인공입니다. 여러분은 그중 멀든 가깝든 어떤 세계든지, 천천히든 빠르게든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나 제약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이건 불가능해', '그건 금지야', '이건 잘못된 거야' 하는 식의 믿음을 품고 있으면 여러분은 ... 

 

- 모험의 세계에 몸을 담을 때입니다. 영과 영혼 사이의 균형 잡힌 상호작용은 가장 위대한 창조성과 사랑이 솟아나오는 원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여러분은 모두가 절대적 일체성과 개체 영혼이 되는 것 사이의 올바른 균형점을 찾는 길에 나서 있는 것입니다. 빛의 일꾼인 여러분들 중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과 영의 일체성을 더욱 깨어서 자각하기 위해 부단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원성 속으로 오랫동안 먼 길을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즉 사랑하는 독자인 여러분은 집에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순수한 일체성의 변함없는 집으로가 아니라 신성하고 다차원적인 인간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현실로 말입니다. 그러면 그의 경험은 환희와 빛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모두의 내면에는 집을 그리는 강렬한 열망이 있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굳은 결심이 있습니다. 자신의 그 열망과 결심을 계속 살려내고 그것을 신뢰하세요. 그것이 여러분을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까요. 

 

- 안전한 분위기를 다시금 느끼고는 자신의 진정한 보물을 보여줄 것입니다. 강렬히 느끼며 온전하고 충만하게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아이가 거기까지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이의 손을 잡고 귀여워하면서 신뢰로써 영감과 용기를 부추겨줄 어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내면의 아이의 수호자가 되는 것 말입니다. 이 아이가 여러분에게 고통을 가져다줬습니다. 이 아이야말로 여러분의 감정적 트라우마가 담겨 있는 단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아이는 크나큰 희망의 약속입니다. 사랑과 환희와 창조성이 솟아나오는 여러분의 가장 깊은 원천이 되는 것 말입니다. 

 

-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이 걸어온 역사의 이 시점에서, 여러분의 잃어버린 부분들을 끌어모아 통합시킬 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인 중심 태양이 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식의 권능을 되찾는 이 일은 단순히 '여행을 떠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현실, 혹은 의식의 경지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성을 깨닫는 것은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도 같은 느낌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서 한때 친숙했던 지극히 행복한 일체감과 조화의 오랜 기억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난생처음으로 물질적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순전히 여러분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일체성의 느낌을 탄생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온 신의 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체성과 물리적 형체를 포기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성한 본성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새로운 시대의 기적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 

 

- 한 방법은, 여러분 삶 속의 인간관계 영역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가장 깊은 외로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남녀관계 속에서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에너지로 내면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과 애정은 그들의 고통을 쓰다듬어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상처받은 아이를 동반자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게임입니다. 늦든 빠르든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에 느꼈던 사랑과 연결된 느낌은 미묘한 -아니면 아예 노골적인- 파워게임으로 변질됩니다. 안전하고 사랑받는 느낌을 다른 사람을 통해 얻고자 할 때마다 여러분은 상대방의 에너지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갈등과 씨름으로 결말이 납니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더 외로워지고 말지요. 

 

- 여러분은 흔히 외로움이 친구나 삶의 동반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해결책은 새로운 친구나 애정관계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방식은 고통의 원인과 그 해결책이 여러분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가정합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이유가 거기서 비롯된 것이라면 여러분은 결국 상대방이 여러분 내면의 상처에 책임이 있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여기게 됩니다. 자기 내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힘을 그 싹부터 잘라버리는 짓입니다. 

 

- 애정관계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내면에 움츠려 있는 우주적 탄생의 고통을 아주 잘 자각하게끔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삶 속에 다른 사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지를 살펴보세요. 이것은 사실 주의를 안으로 돌려 길 잃은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내면의 존재가 보내주는 신호입니다.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처럼 주의를 안으로 돌려서 여태까지 여러분을 대신하여 그 무거운 감정의 짐을 지고 온 내면의 귀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여 아이와 연결을 맺고 자애로운 부모가 되어서 이끌어줄 때, 여러분은 자신의 인간관계로부터 해방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른 인간 존재들과 자유롭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 의식의 빛으로 감싸는 자가치유야말로 스승과 치유가가 되는 열쇠입니다. 빛의 일꾼을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존재 속에 '해결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가치유 능력을 발견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 주변 사람들이나 의뢰자를 도와주려고 할 때, 여러분은 종종 그들의 에너지를 읽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을 하거나 에너지 치유법으로 치료할 때, 여러분은 그들과 직관적으로 동조하여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의뢰자나 여러분이 대하고 있는 사람은 또 그 사람대로 여러분만큼이나 바쁘게 여러분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에너지에 동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여러분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언행이 여러분의 모든 것과 부합하는지, 그것이 여러분이 방사하고 있는 에너지 진동수와 맞는지 어떤지를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 진정한 돌파는 상대방이 여러분을 읽는 데서부터 일어납니다. 상대방이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자유롭고 안전하다고 느낄 때, 자기내면의 앎을 신뢰하도록 부추겨주는 그런 의식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대방이 느낄 때, 비로소 여러분의 모든 언행이 치유적 성질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여러분의 언행을 뒷받침해 줄 때, 여러분의 언행은 빛과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 상대방을 그들 자신의 빛과 사랑 한가운데로 데려다줄 수 있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정직하게 도움을 요청할 때, 그는 여러분의 가장 맑고 순수한 부분이 자신을 건드릴 수 있게끔 여러분의 에너지에 마음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런 부분은 여러분이 읽은 책이나 배운 기술에서 생겨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 연금술, 곧 여러분만의 독특한 특징을 담고 있는 개인적 의식 변성의 산물입니다.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은데, 그것은 빛의 일꾼들(천성적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나은 스승, 더 나은 치유가가 되게 해 줄 새로운 책, 새로운 방법, 새로운 능력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성향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치유란 이토록 단순한 것입니다.

 

- 지상에 살았을 때, 나는 눈을 통해 특별한 에너지를 전했습니다.나의 눈에서는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는 즉석의 치유효과를 발휘하는 무엇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슨 마법 같은 것도 아니고 나만의 독특한 기술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 안의 진실의 근원과 맞닿아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여러분과 똑같이- 물려받은 신성한 빛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방사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다른 생명 있는 존재들을 건드렸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내가 지상에 살았을 때 걸은 길과 동일한 내면의 길을 걸으면서 동일한 시련과 슬픔을 겪고, 결국은 내가 도달했던 것과 같은 지점에 도달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식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화 된 존재(Christed being)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이름표 달아주기만을 좋아할 뿐, 뭇 현상 배후의 일체성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의식 말입니다. 그것은 일반적 원리를 파헤친 다음 각각의 경우에 그것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적용하길 좋아하는 그런 종류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다른 가능성 -직관적 앎 혹은 '감으로 알기'- 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려해보려 들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 에너지는 이원성 바깥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에너지는 모든 양극성의 배후에서 존재의 저류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일체성이라는 이 신비한 층의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마음은 이 존재의 대양을 정의할 수 있는 부분들로 잘라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분류해 놓기를 좋아합니다. 마음은 현실을 직접 경험을 대치할 수 있는 이론과 구조를 고안해 내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이것도 때로는 유용하고 이롭습니다. 특히 실질적인 문제에서는요. 그러나 진정한 치유와 가르침, 즉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치유와 가르침의 문제로 오면 그렇지 못합니다.

 

- 치유하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이론적 틀로 접근해갈 때, 여러분은 그들의 각 증상들을 전체 분류틀 속의 어떤 자리에다 집어넣고 그런 종류의 문제에 대한 이론과 해법을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이것이 심리학자나 사회사업가나 직업적 상담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할 때 여러분이 배우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직업상으로든 개인생활에서든- 누군가와 함께 일할 때는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합리적 사고방식, 상대방의 문제에 대한 모든 추측을 내려놓고 그저 가슴으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 보세요. 내면의 고요한 자리로부터 상대방의 에너지에 동조해 들어가 보세요. 그저 그들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상대방이 서 있는 곳을, 가슴으로 느끼고 직관하도록 노력해 보세요.  
  

- 여러분은 흔히,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에 대해 온갖 궁리를 다 해봅니다. 그들의 문제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대체로 옳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상대방의 지금 이 순간의 에너지에 동조되어 있지 않기 십상입니다. 그들이 내면에서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을 완전히 헛짚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은 여러분이 돕는 그 사람의 에너지 현실에 동조되어있을 때만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성적인 마음으로 지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 오로지 내면의 고요하고 직관적인 자리로부터 상대방을 보고 느끼기를 권합니다. 이원성을 초월하여 내면의 그리스도의 자애로 충만해지도록 자신을 허용하세요. 가르침과 치유를 베풀 때, 진정으로 상대방의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아보기를 권합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종종 아주 단순해집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입니다. 여러분은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얼굴이 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을 설명해줄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자녀가 부딪혀 있는 문제에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부모들은 대개 인생 경험을 통해, 특정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자녀보다 더 잘 내다볼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을 근거로 부모들은 종종 자녀들에게 경고를 주어 해로운 일을 당하지 않게끔 구해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충고하곤 하지요.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자녀를 도와주는 좋은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고요하고 직관적인 자리로부터 아이의 마음속으로 동조해 들어가 보면, 아이가 부모에게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무엇이라는 사실을 아주 자주 깨닫게 될 겁니다.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종종 부모의 안심과 신뢰입니다. "날 믿어주세요. 내가 나로 있도록 놔두세요. 실수를 하고 넘어지게 내버려 두세요. 그냥 날 계속 믿어주세요." 신뢰의 자리로부터 아이와 연결되어 있으면, 실제로 여러분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도록 부추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기에도 좋고, 부모의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하지만 '내가 더 잘 안다'는 생각에서 아이가 어떤 것을 하게 만들려고 애쓴다면 여러분의 아이는 여러분의 태도에서 불신을 감지하고 더욱 저항하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이 도움의 손을 내밀 때 아이는 여러분을 '읽습니다'. 여러분의 말 뒤에 숨어 있는 감정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아이들의 본성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깔고 앉아 있는 두려움이나 분별을 감지해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여러분의 '말'이 아니라 이 '감정'에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반감을 품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말이 완전히 말도 안 돼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너무나 말이 되게' 행동해서 자신이 깔고 앉아 있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진솔하고 열린 방식으로 아이와 연결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와 연결하려면 부모는 자신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아이의 감정적 현실을 향해 정말로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아이가 관심을 두고 염려하는 것에 정말로 귀를 기울이면 소통의 다리가 놓입니다. 

 

- 이 예를 든 것은 이것이 너무나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서 연관시키기가 쉬워서이고, 아이를 열린 가슴과 신뢰로써 지지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여러분의 소망과 욕망,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놓아 보내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가슴으로 느끼는 진정한 이해와 열린 공간으로 감싸주는 것은 곧 그에게 진정한 치유력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는 것은 종종 있는 그대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누군가와 진정으로 연결을 맺고 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마음의 수준에서 무엇을 바꿔놓으려 들지 않을 때입니다. 

 

- 이렇게 되면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너무 많이 퍼줍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에 휩쓸려서 그들을 도우려고 자신의 길을 벗어남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떠내려가 버립니다. 여러분이 '지나치게' 준 에너지는 여러분에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이 여분의 에너지는 상대방에게로 가지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은 이 에너지를 받아들이거나 소화하지 못하고 그것에 겁을 먹거나, 아니면 그저 에너지 자체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지치든가 짜증이 나든가 불만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너무 많이 퍼주고 있을 때는 몸이나 감정이 여러분에게 보내는 신호를 통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환자를 보거나 다른 보통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을 때 공허감이나 짜증이나 무거운 느낌이 든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지나치게 애를 썼다는 표시입니다. 

 

- 균형 잡힌 중심 자리로부터 가르침과 치유를 베풀면 여러분은 자유롭고 살아 있고 영감 넘치는 느낌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마치고 나면 여러분은 쉽게 자신의 에너지를 회수하여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상대방을 놓아 보냈기 때문에 둘의 에너지장 사이에 얽힌 끈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건강해지거나 행복해지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나머지 상대방과의 에너지 연결이 남아 있으면 그 연결이 여러분의 에너지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로 있으면 여러분은 그들의 감정적 에너지를 너무 강하게 흡수해 버리게 됩니다.

 

- 여러분의 감정체는 여러 생에 걸쳐 여러분의 영혼의 빛을 땅 위로 가져오고자 애쓰다가 저항과 배척에 맞닥뜨리면서 입었던 상처로 뒤덮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우 망설이다가 이곳에 왔지만, 내면의 오랜 열정의 꽃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내면에 품고 있는 고통으로 인해 섬세하고 예민한 꽃과 같아져서, 그것이 자라서 피어나려면 강력한 힘을 가진 땅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필요로 하는 그 토대는, 땅에 뿌리박아 자신의 중심을 찾은 존재의 확고한 느낌입니다. 지상의 현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육신 속에서 사는 동안 어떤 원소들을 다뤄야 하는지를 알려면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때로 영적인 것에 너무 매혹된 나머지 자신과 몸을 제대로 돌보기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멍 때리고 있거나, 아니면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종종 지상의 현실을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여러분 영혼의 에너지가 여기서 꽃을 피울 수 있으려면 땅의 원소와 그 느낌에 친숙해져서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져야만 합니다.

 

- 자신의 중심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느낌, 자신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느낌에 진실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여러분은 에고, 즉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개인적 인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에고는 가치 있는 기능을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특정한 영혼 에너지가 물질적 현실 속으로 투입될 수 있게 해 줍니다. 여러분은 그 어떤 '더 큰 선'을 위해서도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에고를 제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에고를 통해 영혼이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하기 위해서는 에고가 필요합니다. 

 

- 여러분의 영혼이 속에 품고 있는 고통, 낡은 것에 대한 싫증, 새로운 지구라는 약속된 땅에 이르고자 하는 소망으로 인하여 여러분은 땅에 뿌리박지 못하고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일을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고, 사람들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빨리 일깨우고 싶어서 애를 씁니다. 여러분은 주는 일에 지나치게 열성을 냅니다. 이 열성은 대의를 위한 일에 깊이 관여하거나 타인의 행복을 열심히 돌보는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는 참을성 없이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한때 영감에 차서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는 실망을 느끼고 기운이 빠져서 화만 냅니다. 여러분의 에너지원이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슴의 함정, 지나치게 퍼주는 함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 속의 참을성 없이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놓아 보내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것이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여러분이 헌신하는 대의로부터 적당한 감정적 거리를 두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 자신을 알려면 자신이 아닌 것을 놓아 보내야만 합니다. 분별력이 자신이 아닌 것을 놓아 보내도록 도와줍니다. 분별력은 '검(sword)의 에너지', 자신의 울타리를 쳐서 나만의 길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에너지입니다. 나는 그것을 남성 에너지라 부르는데, 그것은 이해와 용서의 여성적 품성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논의와 매우 관련 깊은 주제이므로 나는 이 채널링에서 '분별의 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죄나 죄책감의 개념을 떼놓는다면, 육신으로 탄생하는 것은 어둠속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겁니다. 탄생의 과정은 사실 영혼의 어떤 부분이 의식적으로 결정하여 일어나게 된, 깊은 나락 속으로의 추락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현생에 태어나기를 결정했고,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인내심과 믿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뛰어들던' 순간, 여러분은 무지의 상태, 일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지상의 물리적 현실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여러분의 의식은 지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된 습관에 지나지 않는 어떤 환영에 의해 눈이 가려지거나 최면에 빠져버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위에 던져진 그물입니다.

 

- 영혼의 차원에서 여러분은 이 길을 의식적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육신 속에 갇힌 아이로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은 깊은 상처를 주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내면의 이 고통을 느끼고 알아차리기를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그것과 연결됨으로써만 그것을 변성시키고 해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약한 어깨에 소외의 십자가를 진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를 알고 나면 여러분은 자신의 짐의 핵심에 가닿게 됩니다. 핵심에 가닿으면 해결책은 바로 그 부근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아이의 고통을 순수하고 깊은 자각의식으로써 포옹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 자각의식으로부터 자비의 에너지와 깊은 존중이 아이에게 가닿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자신과 함께하여 '별난' 자신의 부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낌으로써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릴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선발대인 여러분의 임무를 완수하는 방법입니다. 

 

- 친가족에 대한 빛의 일꾼의 숙제는 그저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됩니다. 가족을 바꾸는 것은 그들의 임무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 외부의 것을 바꾸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깨어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과연, 세상도 더 나은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빛이 그 위에 비치어 다른 이들에게도 기쁨과 깨달음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든 발을 들여놓게 된 다른 관계든 간에, 세상의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마세요.  

 

- 다른 누군가의 가슴에 촛불을 밝히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달린 일입니다. 여러분은 불씨를 제공할 수도 있고 본보기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도 다른 사람을 깨울 책임은 없습니다. 특히나 가족과 관련해서는 이것을 강조해 둬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종종 어릴 적에는 본능적으로, 어른이 되어서는 좀 더 의식적으로 부모님을 그들의 두려움과 망상에서 구해드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종종 자신이 이 숙제를 제대로 못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계획했던 방식으로 부모님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다고 느끼는 거지요.

 

- 이런 식의 생각은 누구를 돕는다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부모님과 관련된 여러분의 숙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황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난 이래로 부모님의 에너지를 마치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것인 양 매우 강력히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은 그들이 어디서 끝나고 여러분은 어디서 시작되는지조차 쉬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망상도 함께 흡수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들의 감정적 짐과도 밀접히 교감하고 있습니다. 이 짐은 친가와 외가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에게로 전해져 왔을 겁니다. 거기에는 카르마의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문'이 풀릴 때까지 동일한 문제가 거듭거듭 반복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을 가족 카르마라고 불러도 됩니다. 불균형한 남성 혹은 여성 에너지나 오랜 노예 전통에서 비롯된 에너지에 관련된 문제, 또는 특정한 질병과 관련된 문제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카르마의 짐은 그 안에 갇혀 있는 에너지가 풀려나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 해결됩니다. 가족 카르마는 가족 중에서 최소한 한 사람이 유아기에 흡수하여 어쩌면 유전자에까지 각인되어 있는 감정적 짐에서 자신을 해방함으로써 그 연결고리를 끊을 때 비로소 해소됩니다.  

 

- 가족 중에서 '주문을 깨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도움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적 성장과 확장에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이 성장과 확장은 '가족의 에너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그 가족의 구성원들 또한 거기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감정의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을 해방한 빛의 일꾼은 다른 가족을 위해 에너지의 발자국을 남겨놓습니다. 그는 이것을 다른 사람이 변화하여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주려고까지 애를 써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작업과, 그로 인해 자신이 방사하는 그것을 통해 해냅니다. 그가 가족에게 에너지 차원에서 제공하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그의 에너지는 그들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 가족 구성원들이 그 발자취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린 일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아무런 책임도 없고, 여러분의 영적 사명도 변화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다른 이들의 결정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가족이 지워준 카르마의 짐에서 자신을 해방한 여러분은 그로 인해 심지어는 가족으로부터 놀림감이 되거나 배척당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여러분의 사명은 전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계를 지배해 온 카르마 패턴의 주술적인 힘을 부순 것이고, 자녀가 있다면 그 감정적 짐은 더 이상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영혼의 사명의 전부입니다. 
 
- 이번엔 좀더 세속적인 개인적 차원, 여러분이 자기 안에 있는 남성과 여성 에너지를 대하는 차원으로 주의를 돌려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남성과 여성 에너지 사이의 씨름은 늘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차원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반영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 중추, 차크라라고도 불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알려져 있는 일곱 개의 중추는 꼬리뼈로부터 정수리에 이르는 척추를 따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남성적 에너지나 여성적 에너지 중 유력한 것에 의해 성질이 정해짐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차크라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 세 번째 차크라인 태양신경총은 같은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해줍니다. 이 차크라는 앞서 말했듯이 에고의 에너지 중추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이 에고라는 개념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특히나 빛의 일꾼 영혼들은 인간에 있어서 자아를 초월하여 주는' 에너지를 높은'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두 에너지가 어울려 놀면서 창조계의 벽돌을 찍어내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연결하여 하나가 되기를 추구하고, 다른 하나는 분리하여 개체를 만들어냅니다. 후자도 전자만큼이나 쓸모 있고 귀한 것입니다.  

 

- 남성 에너지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여러분의 개체성, 여러분의 독특함, 여러분의 '나'라는 느낌과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 이 중요합니다. '독자성(홀로서기)'은 삶에 필수적인 요소인데, 그것은 외로움과는 전혀 상관없고 '나', 곧 하나의 독특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이 독자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타인과의 깊은 연결감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개체성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누구와도, 다른 어떤 사물과도 깊이 나눌 수 있는 독립적이고 창조적이고 힘 있는 개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와중에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개체적 존재를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 태양신경총의 남성 에너지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창조적이고 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도와줍니다. 여러분 내면의 여성 에너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슴으로 느끼고 있는 영감은 자신이 물질 차원에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세속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지상에 사랑과 조화의 소식을 전하고 싶어 합니다. 여성 에너지는 새 시대를 불러오는 에너지이지만, 물질 현실 속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남성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차크라의 에너지를 치유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 건강한 에고의 에너지, 곧 치유된 태양신경총은 자기 확신입니다. 첫 번째 차크라에서는 그것이 자아의식이고, 세 번째 차크라에서 그것은 자기 확신인 것입니다. 이것은 부풀어 오른 에고가 보여주는 오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 '할 수 있겠는걸!' 그것은 자신의 가장 깊은 영감,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에너지가 여러분에게서 흘러나가게 하세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뢰하고 세상에 내보이세요! 특히나 내면에 너무나 많은 지식과 지혜를 담고 있는 빛의 일꾼인 여러분에게는 이제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자신을 내보일 때가 왔습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운명이고, 여기서 여러분은 가장 큰 성취를 발견할 것입니다.

 

- 내면의 남성 에너지와 화약을 맺으세요. 자신을 위해 일어서서 풍요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잘 돌보기를 주저하지 마세요. 순수하고 중립적인 의미로, 이기적인 존재가 되세요. 여러분은 에고이고 한 개인입니다. 여러분이라고 해서 언제나 용서해 주고 이해해주기만 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나 무엇이나 감내하고 관용하는 것이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양보하여 물러나지 않고 "아니오"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죄책감이나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남성 에너지의 자아의식과 자기 확신이 여러분에게 힘을 불어넣어 여러분의 여성 에너지로 하여금 그 섬세한 꽃을 눈부시게 피워내게 하는 것을 느껴보세요.  

 

- 내적 성장의 길을 가는 이라면 모두 감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억눌러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그것과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며, 결국은 놓아 보내야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늘 분명하지만은 않습니다. 감정과 느낌의 다른 점부터 구별해봅시다. 내가 여기서 무슨 특별한 용어나 호칭 같은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됩니다. 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오해를 표현하는 에너지인 '감정'과 높은 이해를 표현하는 에너지인 '느낌'을 구별하고 싶습니다. 
 

- 느낌은 스승인 반면 감정은 여러분의 아이입니다. 감정은 육신 속에서 선명히 표현되어 드러나는 에너지입니다. 감정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러분이 분노에 휩싸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봅시다. 예컨대 누가 갑자기 여러분의 심기를 건드려서,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몸에서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몸의 어떤 곳에서 에너지가 긴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에너지 충격에 잇따르는 이 육체적 긴장이나 경직은 여러분이 뭔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마땅찮게 느끼는 어떤 에너지가 여러분을 향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당한 대접을 받는 느낌, 간단히 말해서 불이해가 감정을 통해 배출됩니다. 감정은 불이해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에너지의 폭발과 해방입니다. 

 

-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 이 감정을 어떻게 할까? 이걸 근거로 실제 행동을 취할까? 이걸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반응의 연료로 쓸까, 아니면 이 감정을 다른 일에 대한 내 행동의 바탕이 되게 할까? 

 

-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느낌의 본질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몸에서 선명히 지각되는, 오해의 폭발입니다. 반면에 느낌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또한 다른 방식으로 지각됩니다. 느낌은 감정보다 더 차분합니다. 그것은 부드럽게 옆구리를 찔러 여러분에게 와닿는 영혼의 속삭임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매우 현명했음이 드러나는 내적 앎, 혹은 갑작스런 직관적 행동입니다. 감정은 언제나 매우 강렬하고 극적인 뭔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안증, 두려움, 분노나 깊은 슬픔 등을 생각해 보세요. 감정은 여러분을 완전히 지배하여 여러분을 영적 중심으로부터 당기고 끌어냅니다. 감정이 치솟는 순간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 내면의 명료한 상태로부터 끌어내는 일종의 에너지로 꽉 차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감정은 해를 가리고 떠 있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 감정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억압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더 속속들이 알아가는 수단으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적 에너지의 본질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해의 폭발입니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여러분을 중심으로부터 끌어냅니다. 반대로 느낌은 여러분을 자신 속으로 더 깊이, 여러분의 중심으로 데려다줍니다. 느낌은 직관이라 불리는 것과 밀접히 관련됩니다. 느낌은 높은 이해, 감정과 마음을 모두 초월하는 모종의 이해를 표현해 줍니다.

 

- 느낌은 비물리적인 영역, 몸 밖의 영역에서 나옵니다. 느낌이 몸의 어떤 한 곳에서 분명히 감지되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뭔가를, 어떤 기분이나 분위기,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한 예감을 느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봅시다. 그럴 때 속에서 모종의 앎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난데없이' 옵니다. 그런 순간에는 가슴 차크라에서 뭔가가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 이런 내적 앎이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별말을 나누지도 않고 그에 대한 뭔가를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훗날 둘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두 사람에 관한 뭔가를 감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말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고 -'그저 어떤 느낌'이기에-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마음은 회의적으로 변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지어내고 있거나 미쳐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 감정적이라기보다는 '느낌'의 성격이 강한 또 다른 에너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감정을 초월하는 어떤 현상일 수 있습니다. 때로 여러분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여러분을 고양시켜 주는 모종의 희열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면의 신성을, 존재하는 모든 것과 친밀하게 연결된 느낌을 느낍니다. 그런 느낌은 전혀 기대하지 않던 순간에 올 수도 있습니다. 뭔가 큰 무엇이 여러분을 건드렸거나, 여러분이 뭔가 더 큰 현실을 건드린 것만 같습니다. 느낌은 쉽사리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감정은 거의 언제나 직접적이고 분명한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단추를 눌러주는' 외부세계의 방아쇠 말입니다. 
 

- 느낌은 여러분의 더 높은, 혹은 더 큰 자아의 차원계로부터 나옵니다. 가슴속의 그 속삭임을 들으려면 내면이 고요해져야만 합니다. 감정은 이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흔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평온해지고, 억눌린 감정을 치유하고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균형 잡힌 결정은 오직 여러분을 영혼과 연결해 주는 느낌으로부터만 내릴 수 있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해지면 여러분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자신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온 존재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먼저 감정을 풀어내고 명료함이 있는 내면의 중심에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 이제 어떻게 하면 감정을 가장 잘 다뤄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느낌은 여러분의 '스승'이고 감정은 여러분의 '아이'라고 했습니다. '감정적으로 구는 것'과 '아이처럼 구는 것'은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과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 사이에도 실제로 놀라운 유사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이 솔직하고 자발적이어서 어른이 종용하기 전에는 그것을 억누르거나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감정을 자발적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균형 잡힌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 (분노, 두려움, 슬픔 등)에 휩쓸려서 그것을 멈추지 못하게 되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거의 감정의 물속에 빠져버리고, 그러면 그들은 균형, 곧 중심을 벗어나게 됩니다. 

 

- 이처럼 감정이 억제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이들은 경계가 거의 없는 세계를 떠난 지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테르나 아스트랄 차원의 세계에는 물질계의 육신 속에서 겪는 것과 같은 한계나 제약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감정은 대개 이 물질현실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의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자라갈 때는 자신의 감정을 다룰 수 있게 해 줄 도움이나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균형 있게 지상에 화현하는'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 여러분은 자기 안의, 혹은 내면의 아이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감정은 심판하거나 억누르면 안 됩니다. 감정은 인간인 여러분의 지극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그에 합당한 존중과 수용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주의와 존중과 인도가 필요한 여러분의 아이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하나의 에너지로서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 머물면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어 있는 채로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감정을 억눌러서는 안 되지만 거기에 완전히 빠져들어도 안 된다.' 그 속에 빠져들면 -그것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리면- 내면의 아이는 여러분을 타락의 길로 끌고 가는 폭군이 되어버립니다. 

 

- 어떤 감정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측면들을 느끼되 깨어 있는 의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분노를 예로 들어봅시다. 분노가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맞아들여서 몸속의 몇 군데서 경험하는 한편 동시에 그것을 중립적으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의식은 치유를 가져옵니다. 이런 경우 실제로 여러분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오해인 감정을 이해로써 따뜻이 안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연금술입니다. 

- 본보기를 들어서 설명해 봅시다. 당신의 아이가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혀서 매우 아픕니다. 아이는 고통에 흥분하여 비명을 지르고 화를 내며 테이블을 발로 걷어찹니다. 아이는 테이블이 그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순간에 감정을 인도하는 방법은 먼저 부모가 아이를 도와 그 경험에 이름을 붙이게 하는 것입니다. "너 화났구나, 그렇지? 아프지, 그렇지?"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문제의 뿌리를 테이블로부터 아이 자신에게로 옮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테이블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야. 아픈 건 너잖아. 화난 것도 너고. 그래, 너의 기분을 이해해."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이해로써, 사랑으로써 감싸 안습니다. 자신의 아픔이 인정받고 이해받았다고 느끼면 아이의 분노는 차차 사라져 갑니다. 몸의 고통은 아직도 있을 수 있지만 고통이나 그를 둘러싼 분노에 대한 아이의 저항은 해소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여러분의 눈빛에서 동정과 이해를 읽고, 그것은 아이의 감정을 쓰다듬고 풀어줍니다. 그 감정의 원흉이었던 테이블은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동정과 이해로써 감정을 감싸 안을 때, 여러분은 아이의 주의를 외부로부터 내부로 전환시키고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주게 됩니다. 여러분은 외부의 방아쇠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해하든지 이해하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맞서 싸우든지 받아들이든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감정, 여러분 내면의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안으로 맞아들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여러분이 내면의 아이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아낀다는 뜻입니다. 감정에 대해 책임을 지고 주의를 '외부'에서 '내면'으로 돌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기를 원치 않는, 자신을 피해자로 느끼지 않는 내면의 아이를 만들어내도록 도와줍니다. 분노든 슬픔이든 두려움이든 간에 강렬한 감정은 언제나 무력감, 곧 여러분이 외부의 어떤 것의 피해자라는 느낌을 하나의 요소로서 동반합니다. 주의의 초점을 외부의 상황에 두지 않고 자신의 반응과 고통으로 돌릴 때 여러분이 실제로 하는 일은, 외부세계를 여러분의 감정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혐의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무엇이 그 감정이 일어나게 했는지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주의를 완전히 안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 이건 나의 반응이었고 왜 그랬는지를 이해해.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이해하고, 그런 나 자신을 지지해 줄 거야'.

 

- 이처럼 사랑의 태도로 주의를 돌려 자신의 감정을 대하면 여러분은 해방됩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단련을 요구합니다. 외부세계를 '악의 원흉'의 혐의에서 풀어주고 스스로 책임을 온전히 떠맡는다는 것은 '반응의 방식은 내가 결정하는 것'임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가 무엇에 대한 비난을 받아야 할지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를 그치고 그저 여러분의 손아귀 밖에서 벌어진 일련의 모든 사건들의 범죄혐의를 풀어줍니다. - '이제 나는 그것이 내가 선택하는 것임을 완전히 자각하는 가운데 이 감정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책임을 떠맡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 여기서 자기 단련이란, 시시비비 따지기와 무력한 희생양이 된 느낌에 빠져들기를 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분노와 이해받지 못한 느낌과, 때로는 상당히 근사한 느낌이 될 수 있는 피해의식의 온갖 표현들을 느끼고 있기를 그만둡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은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감정을 애지중지합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가장 취약해진 순간에도 자신에 대해 정직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 이것이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자기 단련입니다. 동시에, 이처럼 주의를 안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공감과 연민을 요구합니다. 감정을 자신의 창조로서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하면 여러분은 그것을 부드러운 이해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엔 분노를 택했군, 그렇지?' 공감과 연민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왜 그랬는지 알겠어. 용서해 줄게. 나의 사랑과 지지를 좀 더 확실하게 느끼면 아마도 다음번엔 그런 반응을 택하고 싶은 느낌이 들지 않게 될 거야.' 

 

- 이것이 자가치유에서 의식이 맡아야 하는 진정한 역할입니다. 이것이 영적 연금술의 의미입니다. 의식은 그 무엇도 맞서 싸우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을 자각의식으로써 감쌉니다. 그것은 오해의 에너지를 이해로써 감싸서 평범한 쇠붙이를 황금으로 변성시킵니다. 의식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무엇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고 그것을 여러분의 사랑과 자비로써 감싸는 것을 뜻합니다. 

- 여러분은 흔히 감정적 문제를 극복하기에는 '의식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지요. - '내가 감정을 억눌렀다는 걸 알아. 그 원인도 알아. 그걸 인식하지만 감정이 사라지질 않아.' 이럴 때 여러분 안에는 그 감정에 대한 미묘한 저항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압도될까 봐 두려워서지요.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것을 허용하기로 마음먹으면 여러분은 결코 그것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감정과 거리를 두고 있는 한 여러분은 그것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감정과 싸우고 있고, 감정은 몇 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대항할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감정을 밖으로 온전히 몰아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몸속에서 통증이나 긴장이나 우울한 느낌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입니다. 축 처지거나 지친 느낌은 종종 여러분이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입니다.  
 

- 요점은, 감정이 여러분의 의식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어떤 감정이 있는지를 모르겠다면 두말할 것 없이 몸속의 긴장을 느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이 감정을 만나는 문입니다. 감정은 고스란히 여러분의 몸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복부에 통증이나 긴장을 느낀다면 주의를 거기에 기울이고 무엇인 문제인지를 물어보세요. 몸의 세포들이 말하게 하세요. 아니면 바로 거기에 아이가 있다고 상상하세요. 그의 내면에 어떤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 자신의 감정과 연결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감정 속에 갇혀 있는 에너지는 움직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에너지는 풀려나고 싶어서 육체적 불편이나 스트레스나 우울의 느낌으로서 여러분의 문을 두드립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정말로 문을 열어젖히고 그 감정을 느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 감정은 여러분의 지상의 현실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맑고 균형 잡힌 감정체를 지니면 직관을 통해 여러분의 영혼, 혹은 내면의 속알맹이를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 여러분의 사회에는 감정에 대한 이해에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 중에서도 특히 자녀를 기르는 방식에 대한 혼란과 논쟁이 얼마나 많은지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확실히 당신네 어른들보다 훨씬 더 감정 표현이 자발적입니다. 이것이 문제를 일으키지요. -도덕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어쩌지? 상황이 걷잡을 수없게 되어 혼돈에 빠지면 어쩌지? 아이들에게 규율을 가르쳐야 하나, 아니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놔둬야 하나? 아이들의 감정을 통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자녀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와주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오해의 폭발'로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이해가 아이로 하여금 자기 감정의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게 해 줍니다. 이해는 여러분을 해방하여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서 여러분의 중심으로 데려다줍니다. 부모는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됨으로써 자녀가 감정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쳐줍니다.  

 

- 자녀를 대하는 문제에 관한 모든 의문은 여러분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룹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 엄격합니까? 한동안 화가 나거나 슬플 때면 여러분은 자신을 이렇게 길들입니까? - '그러고 있지 말고 그만 일어나.' 여러분은 감정을 억누릅니까? 자신을 이렇게 길들이는 것이 좋고 필요하다고 느끼나요? 누가 그렇게 가르쳤나요? 부모님입니까? 아니면 반대로 하나요? 자신의 감정을 놓아 보내고 싶어 하지 않고 그 속에서 뒹굴고 있나요? 그런 일도 많지요. 여러분은 오랫동안 자신이 외부의 어떤 상황, 예컨대 성장 과정, 동반자, 혹은 직장 분위기의 피해자인 것처럼 느껴왔을 수도 있습니다. 

 

- 초월에 대한 열망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지상의 현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은 자신의 에너지장의 상부와 하부 사이에 인위적인 분리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의식으로써 오라의 상부에 머무는 것을 선호하게 되고 육체적, 감정적, 성적 현실에는 미묘하거나 아니면 공공연한 저항을 쌓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에너지장에 불균형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본원(집)이 그리워질 때, 여러분이 바로 지금 지상에 있게 된 이유와 목적을 느끼려고 애써보세요. 여러분이 여기 있는 이유는 지상을 초월하려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지상으로 가지고 내려오려는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하나의 신성한 여행입니다. 

 

- 가슴이 성을 기피하는 두 번째 이유는 종종 전생으로부터 지니고 온 종교적 도그마입니다. 여러분은 순결의 서약을 하거나 육체적 쾌락과 성에 대한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주입받은 생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에너지가 아직도 가슴속에 머물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은 육체적인 관계에 대해 부정적인 심판이나 미묘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판단과 정서는 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육체 자체는 순진무구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적 합일을 갈망하게 하는 정욕과 욕망과 모든 육체적 작용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작용입니다. 성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불균형은 거의 언제나 비물리적 차원에 원인이 있는데, 그중 두 가지를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 이 역사는 오래된 것이어서 사실 외계 은하제국이 지상의 생명에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지구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만이 넘치는 일종의 낙원,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이 시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5천 년의 역사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된 어떤 권력싸움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만을 주지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남자는 분명히 가해자와 억압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여자가 사적인 생활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훨씬 더 힘이 셌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사디스트처럼 잔인하게 남성 에너지를 억압했습니다. 여성은 본래적으로 억압받는 복종적인 성이 아닙니다. 또한 사랑이 많은 성으로 정의되지도 않습니다. 여성은 사랑스럽지만 약하다거나 남성은 강하지만 둔감하다는 식의 여러분의 고정관념은 남녀의 본연의 성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언급한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관한 것입니다. 여가장제 사회가 표준으로 여겨지던 역사 이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성도 각자의 생명력과 인간에 내재된 창조성을 경시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파괴적으로 휘둘렀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큰 힘을 가졌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들이 천성적으로 친숙한 감정과 직관의 힘을 사용하여 남자들을 통제하고 조종했습니다.

 

-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종종 자기가 아닌 사람도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 가슴이 열망하는 것과는 상반됩니다. 가슴은 그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존재를 열망합니다. 가슴의 에너지는 압박을 가하지 않으며, 천성이 매우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가슴 에너지는 직관을 통해 말합니다. 가슴은 부드럽게 제안하고 밀어주지, 결코 두려움이나 압박의 감정이 밴 말을 하지 않습니다. 

-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분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자연스럽게 제길을 찾아가는지, 아니면 이루려고 애쓰는 일이 번번이 저항에 부딪히는지를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만약에 후자라면 그것은 여러분이 가슴의 에너지에 조율되지 -혹은 제대로 조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가슴 에너지의 비밀은, 힘으로가 아니라 편안함과 부드러움으로써 기적을 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 자신의 직관을 과감히 신뢰하는 것이 내가 '편안한 흐름’이라 부르는 가슴의 에너지 흐름에 동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창조적인 일을 할 때 직관에 따라 행동하면 설사 자신의 일터 문화에 역행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뜻밖의 가능성과 기회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직관을 따르는 행동은 여러분을 여러분의 신성한 자아에게로 데려가서 가슴 차원의 힘을 부여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여러분 가슴의 소망을 이루어줄 장소와 사람들을 여러분에게로 끌어올 것입니다.

 

- 일에서 문제를 겪을 때, 자신의 일터에서 적합한 자리에 있지 않다고 느낄 때는 혼자서 고요한 시간을 가져보세요. 환경과 사회로부터 받아들인 모든 생각과 그에 수반하는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놓아 보낼 고요한 순간을 찾아보세요. 이 생각과 감정들을 가슴 한가운데의 고요하고 그윽한 자리로부터 바라보도록 해보세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세요. 그것은 태양을 가리고 떠 있는 구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가슴속 그 태양의 한가운데로 가서 여러분의 신성한 자아에게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를 물어보세요. 여러분의 오래고 지혜로운 가슴, 가장 높은 창조성의 근원에 접속하고 여러분의 직관에게 이 순간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말해달라고 하세요. 외부의 견해나, 특히 일터를 지배하는 사회적 행동규범을 따라 행동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직업세계의 사회적, 집단적 의식은 두려움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 일자리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실패에 대한 두려움, 궁핍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이 모든 두려움이 여러분의 직관에 그늘을 드리우더라도 내면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러분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열쇠는 용기를 내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이 떠올려주는 진정한 해결책을 발견할 것입니다.

 

- 내면의 한가운데로 다가가려고 하면 자기 의심이 여러분을 가로막아 가슴에 느껴지는 직관과 의향을 비현실적이고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멀리하게끔 만들 것입니다. 자기 의심은 여러분 앞에 펼쳐진 영적 행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영적 행로란 여러분의 가장 높은 창조성의 원천, 여러분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고 싶어 하는 창조적 에너지와 교감하게 해주는 경험의 경로를 뜻합니다. 이 에너지는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오직 자신의 느낌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신뢰함으로써만 그것을 인식하고 외부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느낌을 통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에는 안전의 보장이 없습니다.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자신의 느낌이 데려가고 있는 방향을 받아들여 직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곧 가슴의 인도에 자신을 열어 에고에 중심한 의식으로부터 가슴에 중심한 의식으로 진정으로 전환해 가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태양신경총이 지배하는 단계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그런 존재 방식을 놓아 보내려는 의도를 품고 이 생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모두 가슴으로부터 자신의 창조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단계에서 자신을 신뢰하고 이 길을 계속 나아가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세상에 아주 귀한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오고 있으니까요. 이 에너지는 종종 여러분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변화를 가져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깨닫는 것보다 더 많은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슴의 흐름을 신뢰하고 편안한 흐름을 과감히 따름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여러분의 길을 계속 가십시오.

 

- 가슴의 에너지는 직업세계를 지배하는 경쟁적이고 가혹한 에너지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부드럽습니다. 이 때문에 가슴에 중심을 둔 채 에고에 중심한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으려면 용기와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합니다. - 가슴의 흐름을 따르세요. 

 

- 또한 영성에 깊이 몰두한 빛의 일꾼 영혼들은 돈을 초월해야만 할 천박하고 사소한 삶의 소품에 결부시킵니다. 여기에는 물질세계를 떠나 내핍과 고행과 금욕수행을 했던 전생에서 비롯된 온갖 신념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생애들을 오로지 영적 해탈만을 목표로 삼고 홀로 살았습니다. 이런 생애들의 에너지가 아직도 여러분의 에너지장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자신을 좁아지게 만드는 일종의 '엄격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 그러나 돈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돈은 사실 순수한 잠재능력을 상징하는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돈은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돈은 잠재적 가능성이고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돈을 받는 것이 곧 다른 이의 출혈에 기대는 행위도 아닙니다. 돈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위해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기쁘게 돈을 받음으로써 여러분은 자신과 타인을 위해 풍요의 흐름을 확장시킵니다. 창조의 나선은 반드시 받아들이는 흐름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를 통해 받기와 주기의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가슴의 길입니다. 그러니 돈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자신의 가장 고귀한 재능과 선물을 세상과 나누면서도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세상에 요구하기는 주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구시대의 온갖 분별과 판단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신을 옹호하여 나서서 받아들이고 즐기지 못하게끔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의 비밀은 균형입니다. 우주는 여러분이 이생에서 가장 높은 잠재력을 표현하도록 모든 차원 ...  

 

- 가장 밀도 높은 차원계에서 실현할 기회를 제공해 주는지를 느껴보세요. 지금은 저잣거리를 떠나 산속에서 홀로 명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분의 에너지가 세상으로 흘러들게 하고, 그 답으로서 돌아오는 모든 것을 마음껏 받아들일 때입니다. 풍요를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신의 기여를 스스로 높이 사고, 그 노력의 대가를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도 균형 잡힌 영적 인간이 되는 일의 일부입니다. 

 

- '풍성하다'는 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가슴의 에너지는 먼저 편안한 흐름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이 쉽게 성사되어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여러분의 길에 절로 나타나면 그것은 여러분이 가슴의 흐름과 함께 잘 가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내가 구분 지은 두 번째 에너지 흐름은 풍성한 흐름입니다. '풍성하다'는 말은 온전한 인간 천사가 되기 위해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제공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풍성한 흐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과 감사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물질적, 감정적, 정신적, 영적 차원에서 여러분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부양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풍요입니다. 그것이 풍성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 풍성한 흐름을 경험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풍요를 경험하는 것이 일종의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임은 여러분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에 좌우됩니다. 소유한 물질이 양적으로 얼마나 많은가는 여러분이 경험하는 즐거움 ...   

 

- 여러분은 대개 미래에 대해 든든한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저 돈이 주는 안전감 때문에 돈을 가지고 있는 느낌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풍요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적 부의 한가운데서 결핍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정 풍성한 흐름 속에 있으려면 과감히 두려움을 놓아 보내고 지금 있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바로 이 즐기는 마음이 여러분의 삶 속에 더 많은 즐거움을 끌어올 것입니다. 그것이 풍성한 흐름을 계속 유지시켜 줄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적 안정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두려움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더 큰 신뢰와 더 적은 두려움인데 말입니다. 

- '풍성한 것보다 적은 것'에 만족해도 여러분은 역시 두려움에 갇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두려움이란, 세상을 향해 자신을 정말로 열어젖히는 것, 자신을 표현하고 또한 그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정말 충만하게 살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모두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온전한 인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본연의 아름다움과 순진무구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 사랑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재능을 세상에 나누면 세상은 더 아름답고 빛나는 곳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풍성한 대가로써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어 합니다.  

 

- 속에서 진정으로 열망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세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정말로 느껴보세요. 모호한 불만감이나 불안감 정도에서 만족하지 말고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정의하세요. 이로써 여러분은 없는 것에 대한 '결핍'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로 인한 내면의 고통을 알아차리되, 그 결핍감이나 불만감 속에 주저앉아 있지 마세요. 이것은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위한 훈련이 아닙니다. 대신 여러분이 품은 열망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고, 이것이 여러분의 영혼이 여러분을 위해 원하는 것임을 깊이 깨달으세요. 이 열망이 여러분의 영혼이 이 생애에 이루고자 계획했던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확신하세요. 그것이 실현되도록 우주가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 가슴 깊이 느껴지는 이 열망에 대한 여러분의 고요히 집중되고 열려 있는 자각만으로도 변화가 일어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자석입니다. 물질적 차원에서 변화를 일으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뿐더러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쇠는 자신이 열망하는 그것을 깊이 (감정적으로는 말고) 느끼고, 그런 후에는 그것을 여러분 가슴의 처분에 맡겨두는 것입니다. 그저 놓아버리고 믿으세요. 삶 속의 일들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어쩌면 여러분은 먼저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느낌이나 사람들에 대한 반응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자신의 습관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시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후에 여러분의 진정한 목표에 이바지하지 않는 인간관계나 일이 여러분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목표를 향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데려다 줄 흐름 속으로 자신이 들어서게 될 것임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의해서 살펴보세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종종 여러분의 목표와 관련해서 여러분이 서 있는 지점을 알려주는 배후의 메시지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 여러분의 가슴 깊은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물리적 차원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난데없이, 힘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삶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 속에 쉽고도 우아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그건 기적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마땅한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부여잡고 애쓰고 밀어붙이고 용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진실한 요구에 대한 고요한 자각, 그것을 직시하려는 여러분의 정직성, 그리고 믿고 놓아 보내는 여러분의 용기입니다. 그와 같은 집중과 내맡김으로써 가슴의 열망을 받드는 것이 풍성한 현실을 여러분 앞에 가져다줄 것입니다. 

 

- 순환적으로 상승하면서 성장해 가도록 돕습니다. 영적 차원에서는 여러분은 다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심지어 전생에는- 간과했을 수 있는 감정들에 더욱더 깊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전적이거나 선천적인 신체 장애의 경우에도 해당합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때로 카르마를 언급하는데, 나는 이 개념과 관련해서는 주의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카르마를 죄와 벌에 관련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영혼은 자신을 온전히 알고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진지한 열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가장 깊은 열망입니다. 이런 열렬한 소망 때문에 영혼은 때로 그 목표에 도달하게끔 도와줄만한 질병이나 만성병이나 신체장애를 택합니다. 이것은 업보를 갚는 식의 문제가 분명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깊은 뜻을 지닌 의도로서, 때로 거기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의 몸속에서 극도로 힘든 상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능력과 쓰임새와 아름다움과 성공에 관한 초인적인 이상적 이미지를 신봉하는 여러분의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의도를 최대한의 존중심으로써 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이상적 관념은 장애를 가지고 살면서도 그것을 기쁘고 의미 깊게 경험하는 것을 훨씬 더 힘들게 만듭니다. 

- 마지막으로 불치의 치명적인 병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병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몸이 서서히 병 앞에 굴복합니다. '지상의 형틀'이 더 이상 스스로를 부지하지 못합니다. 그런 순간에 그 몸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영혼은 무엇을 할까요? 병에 계속 저항하는 한 여러분은 이제 작별인사를 할 시간임을 말해주는 자신의 영혼이나 내면의 앎과 교감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미리 감지하지만 그 생각이 너무나 큰 공포와 슬픔으로 다가와서 여러분은 병과 계속 싸웁니다. 언제든지 또 다른 치료를 받아보고 싶어 하고, 새로 개발된 신약이 발표되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만한 일이어서, 그런 태도를 탓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죽음이 다가오도록 허용하면 여러분은 죽음이 적이 아니라 친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여러분을 몸부림에서 풀려나게 합니다.

 

- 죽음이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어 하는 말을 따르면 여러분은 실제 죽음의 과정이 일어나기 전에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속세의 모든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속세의 주변환경과, 그리고 주변의 그 모든 것을 관찰하는 데 쓰는 감각들을 서서히 놓아 보내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저 생명줄을 붙잡고 있으려고 기를 쓰는 전투적인 태도로써 이 과정 위에다 그늘을 드리우는 것은 딱한 일일 것입니다. 그때쯤 되면 흔히 육신은 이미 너무나 약해져서 삶이 더 이상 살 만한 가치가 없어집니다. 놓아 보내세요. 죽음은 여러분의 시중을 들러 온 해방자이지,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 이 새로운 시대가 내면에서는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외적인 징후보다는 내적인 징표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체에서는 큰 변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감정체는 두려움과 분노와 공격, 그리고 여러분을 쉽게 중심에서 끌어내는 모든 강한 정서에 매우 예민합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자신의 감정체를 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면화 과정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살펴 그 근원으로 따라가는 작업- 을 통해서 감정체를 정화합니다. 이 내면화 과정에서 여러분은 문제의 원인을 더 이상 외부세계에서 찾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찾아냅니다. 그로써 여러분은 자신의 에너지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데, 이것은 크나큰 전진의 발걸음입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순간, 여러분은 차단된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변성시킬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이것입니다.

 

- 새로운 시대에는 감정체가 안정되어 정착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익숙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주변환경도 이 직관적인 삶의 방식에 발을 맞춰줄 것입니다. 가슴에는 평화와 고요가 자리 잡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것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느껴지시나요? 여러분과 타인들 사이에 에너지가 거침없이 통하고, 여러분의 사랑을 공공연히 내보일 수 있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그런 깨어 있는 의식상태를 여러분이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를 나는 보고 느낍니다. 만사가 태평함을 알므로 여러분은 그저 여러분 자신으로 남아 있어도 되는 그런 깨어 있는 의식상태를 여러분은 열망합니다. 

 

- 여러분이 열망하는 것은 해방감과 안도감입니다. 그리고 내 다시 말하건대, 이런 에너지는 이미 온전히 제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성한 에너지를 자신의 영혼 속으로 맞아들일 문을 여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저 너머 세계의 다른 많은 존재들과 내가 여러분을 돕고 받쳐주기 위해 바로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서 나의 에너지를 느껴보시기를 부탁합니다. 나의 에너지가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져 있음을 느껴보세요. 여러분은 실로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슴 속의 고요를 느껴보세요. 오래된 에너지를 배출하고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올 길을 내주는 내면의 공간을 느껴보세요. 여러분 모두가 갈망하고 있는 해방과 자유는 지척에 있습니다. 

 

- 새로운 것이 도착하기 직전에는 언제나 힘든 단계가 있습니다. 옛것의 필사적인 몸부림 말입니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때지요. 해묵은 모든 두려움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암흑이 지상을 가리고 있던 시대의 과거생으로부터 현생까지 쌓아온 모든 슬픔과 분노가 떠오릅니다. 이 모든 것은 소화되고 통합되기 위해서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이 모든 부정적 에너지가 여러분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좋은 징조, 발전의 징조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는 뜻입니다. 

 

- 지구의 파괴에 의해, 동식물 세계의 파괴에 의해 여러분이 엄청난 영향을 입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 -정치/사회적 불평등, 분명히 피할 수 있는 무수한 아이들의 죽음, 전쟁과 폭력 등- 이 여러분을 분노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깊이 영향을 미쳐서 내부에서 분노를 휘저어 일으키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문제들입니다. 이런 분노에 스스로가 휩쓸리게 내버려 두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버리는 것이 빛의 일꾼들의 성향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욕망 속에 스스로 매몰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차원의 변화를 추구하는 열정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사생활이나 직업을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 누군가를 돕고 일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종종 일종의 영적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여러분은 단지 다른 누군가나 사회를 위해서 '최선을 원하는 것'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태도나 감정을 바꾸도록 강요 -아무리 미묘하게라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스스로 느낄 때, 거기 여러분의 내면에는 분명히 분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종, 아직은 때가 멀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엇을 바꿔놓고 싶은 강렬한 분개나 엄청난 열정을 느낄 때, 혹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대해 분노나 무력감을 느낄 때, 여러분은 영적 분노라는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이 치유적인 관계입니다. 여자는 전남편을 떠나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자신의 감정적 독립성을 다졌습니다. 이것이 마음 맞는 영혼과 균형이 잘 잡히고 애정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냈습니다.  

 

- 여기서 여러분도 모두 익히 듣고 있을 쌍둥이 영혼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쌍둥이 영혼은 여러분에게 아주 매력 있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성이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쌍방에게 탄생의 고통과 감정적 의존성에서 풀려나게 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쌍둥이 영혼의 개념을 자신에게 완벽하게 어울리고 자신을 온전해지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때 일어나는 위험입니다.

 

- 이것은 쌍둥이 영혼을 여러분의 다른 반쪽으로 여기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이 너무나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일체성과 평안의 상태가 자신과 완벽하게 맞는 누군가를 만나면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쌍둥이 영혼에 대한 이런 설익은 생각 때문에 영혼이란 서로 만나야 일체가 되는 두 개의 반쪽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대개 이 두 반쪽은 각각 남자와 여자이지요. 그래서 이 개념은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함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또 여러분이 본질적으로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쌍둥이 영혼 개념이 영적인 관점에서 건강하거나 치유적이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외부에 있는 것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온전하여 남성이자 여성이며 모든 것인 여러분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부정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집으로부터 멀리멀리 떼놓는 온갖 망상을 만들어냅니다. '집'이란 말로써 나는 여러분 자신의 자아, 여러분의 '나'의 신성을 뜻합니다. 그 어떤 영혼도 다른 누군가의 다른 반쪽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 쌍둥이 영혼은 실제로 존재하는데, 그들은 말뜻 그대로 쌍둥이입니다. 그들은 같은 '분위기' 혹은 진동을 지닌 영혼입니다. 혹은 생물학적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탄생 시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탄생 시간, 곧 시공간 속의 이 독특한 순간은 생명으로 태어나는 영혼들을 독특한 분위기로 충전시켜 줍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에게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비슷한 영으로서 서로에게 동조됩니다.  

 

- 당신네는 둘 다 이원성의 극단을 경험하면서 차츰차츰 자신의 본성은 이원성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이원성의 배후를 이루는 무엇인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배후의 일체성을 깊이 자각하는 순간, 여러분의 돌아가는 여행이 개시됩니다. 여러분은 차츰차츰 권력, 명예, 돈, 특권 등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에 덜 집착하게 됩니다. 열쇠는 무엇을 경험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실히 깨달아갑니다. 깨어서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의식의 힘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이원성의 모든 산봉우리와 계곡을 다 거치고 나면 자신의 쌍둥이 영혼을 조우하는 순간이 옵니다. 쌍둥이 영혼의 에너지와 모습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매우 깊은 일부분, 이원성 너머 여러분의 본성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인식을 통해 여러분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쌍둥이는 여러분이 이번 생애와 전생을 통해 자신에 대해 온 한정된 믿음 너머로 여러분을 데려다주는 하나의 준거 틀입니다. 여러분은 쌍둥이 형제 속에 비친 자신의 이 모습을 봄으로써 자신을 해방합니다. 그것은 기억을 상기시켜 주는 힌트 같은 것으로, 감정적 의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서로의 만남은 서로가 더 강하고 자신을 더 잘 아는 개인이 되어서 지상에서 창조성과 사랑을 꽃피우도록 도와줍니다. 

 

- 고독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는, 여러분 내면의 아이를 무릎에 앉히세요. 이 아이의 상처를 느껴보세요. 그것은 아이가 태아였던 시절에 맛봤던 절대적인 평안에 대한 갈망입니다. 아이는 그 평안이 배우자의 얼굴에, 자녀의 얼굴에, 어머니나 아버지의 얼굴에, 치료사의 얼굴에 비쳐 보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여러분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여러분은 이 아이에게는 천사의 얼굴인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이를 여러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절대적인 방법으로 치유해 주게끔 되어 있습니다. 나나 그 어떤 '스승'도 여러분 대신에 그것을 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방향을 가르쳐줄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신의 구원자입니다. 

- 마지막으로 나는 여러분이 잠시 우리의 함께함을 느껴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읽고 있을 뿐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연결된 느낌을 느껴보세요. 지금은 '나'의 느낌에 주목하지 말고 아주 자유롭고 편안하게 우리의 함께함에 주의를 모아 보세요.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그것을 느껴보세요. 그것은 온전한 전체인 상태를 향한 갈망입니다. 이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 여러분의 깨어난 자아의 에너지, 여러분 내면의 천사의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상하세요. 이 에너지를 들이마시고, 잠시 동안 그 힘을 깊이 느껴보세요. 여러분의 존재에 감사드립니다.

 


- '채널링에 관한 채널링'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아래는 채널러인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해 예수아가 한 말이다. 

채널링은 다른 -비육체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아 여러분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 존재는 일시적으로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스승의 에너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더 깊은 차원에 다가가도록 도와줍니다. 스승의 에너지는 여러분 자신의 빛을 가리고 있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여러분을 들어 올려줍니다. 스승은 여러분 자신의 빛을 여러분에게 보여줍니다. 스승은 여러분의 빛에 대해 여러분보다 더 잘 압니다. 이 빛, 여러분 내면의 앞에 스스로 다가갈 수 있게 되는 순간 스승은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빛을 채널링 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은 더 이상 여러분과 여러분의 더 높은 자아 사이에서 다리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나는 잠시 동안 여러분 자신의 빛에 대해 여러분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아 벤 요셉의 모습으로서 여러분 자신의 위대한 참모습을 비춰 보여줍니다. 내 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여러분의 그리스도 자아를 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이것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준거 틀과도 같습니다. 나의 에너지는 하나의 횃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그리스도 자아와 더 깊이 친밀해지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이 서서히 전면으로 나서고, 나는 배경으로 물러날 것입니다. 이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원래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잊지 마세요.- 이 관계에서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의 거듭남은 여러분 그리스도 자아의 깨어남이지 나의 깨어남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의 큰 자아에 이롭도록 행동합니다. 나의 목표는 여러분이 나를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채널링 할 때 여러분 자신을 작은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려고 애쓰지 마세요. 나는 여러분이 자신을 더 크게 만들어 자신의 진정한 힘이 흘러나가는 것을, 그리하여 세상을 밝히는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스승은 길을 가리켜 주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좀 가다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혼자서 걷고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스승은 뒤에 남겨두고 왔으니까요. 이것이야말로 장엄하고 거룩한 순간입니다. 스승은 여러분 내면의 존재로서 가슴속에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리된 형상은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해갈수록 여러분은 나를 점점 덜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나를 분리된 존재로서 찾고자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서서히 여러분 자신의 에너지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여러분은 나를 더 이상 자신과 분리된 존재로 알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나를 진정으로 듣고 보았음을 입증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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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구였는지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만, 예수아와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으로 그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예수아입니다. 지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이 그리스도 에너지를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이 에너지를 그리스도라고 불러도 됩니다. 나의 사전에서 예수는 예수아의 육체적, 심리적 현실 속에 그리스도 에너지가 주입된 소산인, 그 신과 같은(Godlike) 인간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 이 그리스도 에너지는 여러분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에 놓여 있는 빛의 세계로부터 예수아의 내면으로 쏟아부어졌습니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는 내 안에 태어난, 빛의 세계로부터 온 사자였습니다. 사실, 그는 미래의 나 자신이었습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예수아라는 인간인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예수는 그리스도 에너지와 하나가 된 미래의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의 내면의 그리스도는 그 임재가 너무나 확연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는 거룩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 나 예수아는 피와 살을 가진 한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라는 모습의 독특하고도 좀 인위적인 측면은, 내가 미래로부터 그의/나의 그리스도화 된 자아를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나는 내 과거, 혹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개입에 의해서, 말하자면 미래로부터 그리스도 에너지가 주입됨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이 역할을 하기로 동의했었습니다. 나는 하나의 봉사행위로서, 그리고 나 자신의 가장 깊이 묻혀 있는 가능성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깊은 열망 때문에 예수라는 존재가 내 위에 드리우는 것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 예수는 인류에게 빛과 지혜를 전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온 하나의 에너지였습니다. 그는 다른 세계, 아니, 다른 차원으로부터 왔고, 그 현실 차원의 높은 에너지를 품고 왔습니다. 그가 지상에 태어나는 와중에도 자신의 더 큰 자아에 대한 자각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나 예수아 안에 자리 잡은 그의 존재로 인해 나는 물질세계의 법칙이란 것이 유연한 것임을 쉽게 깨닫고 '기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 예수가 온 곳인 빛의 세계는 지구가 결국은 '지구 실험'에 연루된 영혼들을 깊은 어둠과 자기 소외에 빠지게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연히 깨닫게 만들 변화의 강력한 동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에너지 인격을 보냄으로써 그것이 인류에게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여 자신들의 신성한 기원과 내면에 깃들어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들여다보고 상기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평화와 자유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될 가능성 말입니다. 

 

- 그는 좀 인위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미래로부터 존재하는 여기와 거기에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당시에 지구의 현실 속으로 예수의 에너지를 주입시키기로 함께 결정했던 빛의 존재들의 의식은 완벽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의식 있는 존재들은 늘 자신을 발전시키고 이해해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모든 일이 모종의 신성한 계획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끈질긴 신념이 있습니다. 이 신념의 배후에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개념은 그릇된 것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예정된 운명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음속에서 내리는 선택의 결과인 개연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예수도 그 일부였던 빛의 집단적 에너지가 내린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위험성과 예상 밖의 결과를 무릅쓴 선택이었습니다. 

 

- 여러분 -빛의 일꾼들- 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예수 사건', 곧 이 지상에 그리스도 에너지가 주입된 사건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여러분 모두가 함께 기여한 집단적 노력이었고, 거기서 나 예수아는 하나의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 얄궂게도 기독교 교회는 나를 숭배하고 복종해야 할 권위적인 존재로 만들어서 여러분의 현실 밖에다 모셔놓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나의 의도는 여러분 자신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께 내면의 그리스도를 자각하고, 나에게 인간성을 되돌려주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예수아, 피와 살을 가진 인간,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진정한 친구이자 형제입니다. 

 

- 오늘날, 이 시대의 지구에는 모종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의식이 출현하고 있어서 그것은 조만간에 물질적 형체를 띠게 될 것입니다. 이 전환이 어떤 식으로 찾아올 것인지,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정합니다. 진실로 주어진 것은 오직 이 순간 지금 뿐입니다. 지금이라는 원천으로부터 가능한 무수한 길, 가능한 미래의 무한한 가지가 샘솟듯이 뻗어 나오고 있습니다. 

- 과거를 바탕으로 우리는 하나의 특정한 미래가 실현될 가능성이 다른 미래보다는 더 크다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여러분의 것입니다. 과거가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놔둘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예측은 언제나 확률에 근거합니다. 확률은 과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과거와 결별하고 다른 코스를 가는 것은 인간인 여러분의 권능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변화의 힘, 자신을 재창조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권능 속에 여러분의 신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로부터 창조해 내는 권능입니다. 이 신성한 권능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본성에 속해 있습니다. 

- 오늘과 이 시대를 전환의 시대로 일컬을 때, 여러분은 자기 현실의 주인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정해진 계획이라든가, 각 영혼의 길이나 자기 현실을 창조하는 개인의 힘을 지배하는 우주적 권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은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모든 영혼들은 이 전환을 저마다 자신의 내면적 성향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현실은 무수히 많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하는 현실은 여러분 내면의 요구와 소망에 응답할 것입니다. 이 시기(대략 1950~2070년)를 특별한 시기로 만드는 것은, 의식의 두 가지 다른 주기가 끝을 맺게 된다는 점입니다. 개인적 주기(혹은 일련의 개인적 주기들)의 끝과 행성 주기의 끝 말입니다. 이 주기들의 완료시점이 일치함으로써 이 둘은 서로 힘을 강화시켜 줍니다.

- 인류의 일부에게는 지구생의 개인적 주기의 마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마무리에 관여된 대부분의 영혼들은 빛의 일꾼들(Light Workers)입니다. 이 그룹의 빛의 일꾼 영혼들에 대해서는 곧 훨씬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개인적 주기의 성질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개인적 주기를 지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지상의 그 모든 복잡다단한 생애들을 겪는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말입니다.

 

- 여러분이 경험하는 지상의 생애들은 여러분 영혼의 더 큰 순환주기의 한 부분입니다. 이 순환주기는 이원성을 온전히 경험해 볼 수 있게끔 설계되었습니다. 이 순환 속에서 여러분은 남자나 여자가 되는 것, 건강하거나 아픈 것, 부자이거나 가난한 것,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어떤 생애에서 여러분은 농부나 노동자나 장인이 되어서 물질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또 자신의 영적 뿌리에 대한 강한 자각을 지니고 있었던, 좀 더 영적인 생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생애들에서 여러분은 종교적인 부름에 잘 이끌렸습니다. 또 권력과 정치 등의 세속적인 세계를 탐사했던 생애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몰두했던 생애도 있었을 겁니다. 
 

- 여러분은 자신의 현실이 고분고분하고 말랑말랑하지 않은 것에 용기가 꺾여서 좌절해 버립니다. 너무나 흔히, 현실은 여러분의 소망과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창조적 의도는 너무나 자주 고통과 환멸에 의해 종지부가 찍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도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저 열쇠를 발견할 것입니다. 

 

- 이 의식은 그리스도가 지상을 걸었을 때 최초로 내보여졌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의식이라 부르는 이 의식은 영적 연금술로부터 나옵니다. 물질적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영적 연금술은 어둠의 에너지를 '제3의 에너지', 그리스도 에너지 속에 있는 영적 황금으로 변성시키는 기술입니다. 

 

- 무지는 선에 반하는 요소입니다. 그것은 선의 바깥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여러분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성장과 확장의 배후에 숨겨진 동인입니다. 무지는 두려움을 번식시킵니다. 두려움은 통제의 욕구를 번식시키고, 통제의 욕구는 권력투쟁을 번식시킵니다. 그리하여 여기 '악'이 번성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집니다. 선과 악이 싸움을 벌일 무대가 완성된 것입니다. 

 

- 신은 자신의 창조가 '막혀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두 반대극 사이의 역학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무지와 두려움에 의해 야기된 그 모든 고통을 눈앞에 두고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기란 무척 힘들 겁니다. 하지만 신은 이 에너지들에 큰 가치를 둡니다. 왜냐하면 이 에너지들이야말로 그/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넘어설 수 있도록 길을 제공해 줬기 때문입니다. 

- 신은 여러분, 곧 자신의 가장 창조적이고 앞서가는 용감한 부분에 속하는 이들에게 무지의 베일을 걸쳐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반대극 사이의 역학을 최대한 속속들이 경험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에 대한 망각 속으로 잠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지 속으로 뛰어드는 이 일에 여러분은 스스로 동의했었지만, 이 사실 또한 ... 

 

-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늘 고분고분하고 친절한 태도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내면의 존재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다른 행동 방식을 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실 내부의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덮어 누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기대에 따라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칭찬과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표현에 한계를 가하면서요. 하지만 표현되지 않은 여러분의 일부분은 여러분의 존재에 대해 불만과 염증을 일으키면서 자기만의 숨겨진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부에는 아무도, 심지어는 여러분 자신조차 모르는 분노와 짜증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이 같은 자기부정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내면의 감춰지고 억눌린 부분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 내면의 감춰지고 억눌린 부분과 만나는 것은, 그렇게 하려면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필요해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을 다른 사람한테서 배워야 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어려운 과정으로 만들지 마세요.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있고, 자기만의 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기술이나 방법보다 동기와 의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을 정말 알고자 하기만 하면,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볼 각오만 있으면, 그리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가로막고 있는 두려운 생각과 느낌을 바꿔놓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여러분은 인연이 닿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 말 나온 김에, 자기 안의 감정과 만나도록 도와줄 간단한 명상법 하나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어깨와 목의 근육을 이완하고 등을 펴고 발을 바닥에 대세요. 숨을 한 번 깊게 쉬세요. 

탁 트인 파란 하늘 아래서 시골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세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카락을 만지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보세요. 당신은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길을 가고 있는데 문득 아이들이 당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은 이 광경에 어떻게 반응하나요?

 

이제 아이들이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몇 명인가요? 어떤 모습인가요? 남자아이들인가요, 여자아이들인가요, 아니면 양쪽 다인가요?

당신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들을 만나서 기쁘다고 말해줍니다. 그중에서 당신의 눈을 쳐다보고 있는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칩니다. 그 아이는 당신에게 전해줄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의 눈 속에 그것이 쓰여 있네요. 당신도 그걸 읽을 수 있나요? 당신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어 하나요? 그것은 바로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이 내면의 아이가 당신에게 가져온 그 에너지에 이름을 붙이되 그것을 심판하지는 마세요. 그저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해주고 눈앞의 이미지들을 놓아 보내세요.

잠시 발밑의 땅을 단단히 딛고 있는 느낌을 느껴보고 숨을 깊이 쉬세요. 당신은 방금 자신의 감춰진 부분을 만났습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 장면 속으로 돌아가서 거기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감춰지고 억눌러진 부분을 만나면 '더욱'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그토록 오랜 세월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두려움에 쫓긴 생각과 행동의 습관 너머로 솟아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 이원성을 놓아 보낼 때 일어나는 일 


1) 느낌을 통해 말을 걸어오는 자신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2) 그 말에 부응하여 영혼이 바라는 당신의 변화를 일궈낸다. 

3)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을 좋아하게 된다. 영혼의 속삭임은 침묵 속에서만 들리기 때문이다.
4) 자신의 진정한 영감과 열망을 거침없이 표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행위규범과 사고습관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 이원성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어둠(무의식)의 모든 층을 파헤치는 것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내면의 참 자아를 향해 가는 이 길에 들어서고 나면 여러분은 점차 이원성의 게임에서 발을 빼내게 됩니다. 

 

- 영혼은 이 깨달음에 준하여 행동함으로써 그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의식에서 나온 어떤 것을 해본다는 생각 자체가 새로운 것입니다. 전에는 스쳐 지나가는 흐름을 다소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었지만, 이제는 영혼의 내면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것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에 대한 자각이 커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고 단계의 시작입니다.

 

- 에고란 원래 외부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에고 본연의 기능은 단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의 분리된 존재로서 자신을 온전히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세요. 이것은 영혼의 진화과정에서는 자연스럽고도 긍정적인 발달단계입니다. 에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에고는 자꾸 확장해가려고 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갓 태어난 영혼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은 에고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제 성숙해 가는 영혼의 저 깊은 밑바닥에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잃어버린 집,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기억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에고에게 이 고통, 이 향수병에 대한 답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고는 영혼으로 하여금 현실을 적극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고는 아직은 어린 영혼을 권력의 환상에 취하게 만듭니다.

 

-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곧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란 것이 있기나 했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린 영혼의 의식이 에고의 가능성, 권력의 약속에 취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의식이 개체 영혼으로 태어난 목적 자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낙원 뿐만 아니라 지옥도, 순진무구함뿐만 아니라 '죄'도- 탐사하고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잘못 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그렇다고 믿지 않는 한 거기에는 아무런 죄책감도 개입돼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빼고는 말입니다. 
 
- 우리는 위에서 영혼의 의식의 세 번째 발달단계를 깨달음의 단계, '제2의 순진무구', 곧 노년기로 구분했었습니다. 이 단계에 대해서는, 특히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의 뒷부분에서 할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토착영혼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고 단계의 깨어남이 지상에 인류가 출현한 것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 이 기존의 두려움을 토착영혼들의 마음과 감정 속에 들어 있는 두려움과 굴종적인 에너지를 크게 부풀려놓을 씨앗으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인류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은하계의 전사들은 이 인간을 통하여 이전의 은하계 적들과 다시 싸움을 벌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인류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벌인 투쟁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은하계의 해묵은 원수들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 지구 토착영혼들의 개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부드러운 촉은 그 한창때에 이르러서 폭력적인 개입, 곧 인류의 가슴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이 전쟁에 의해 잘려버렸습니다. 하지만 은하계의 침입자들도 그들의 자유를 정말로 앗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외계의 영향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각 개인의 영혼-의식의 신성한 본질은 불가침의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영혼의 자유롭고 신성한 본질은 오랫동안 장막에 가려 있을 수 있어도, 영혼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권력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연관됩니다. 권력은 언제나 두려움과 무지라는 환영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가려서 감추기밖에는 못합니다. 권력은 그 무엇도 진정으로 창조하거나 파괴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토착영혼들에 대한 이 공격이 지구에 어둠만을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뜻밖에도 은하계 전사들의 의식에 심오한 변화 -의식의 다음 발달단계인 깨달음, 곧 '제2의 순진무구' 상태를 향한 전환- 를 촉발했던 것입니다. 
 

- 크로마뇽인 시대에 와서 빛의 일꾼 영혼들은 유전자 차원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발달에 개입했습니다. 이 유전적 개입은 하향식 조종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두뇌/의식에다 신체의 세포층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사념체를 각인시켰습니다. 이 정신적 각인의 결과로 인간의 두뇌에는 로봇과 같은 기계적인 요소가 장착되어 인간 본연의 힘과 자신에 대한 자각력을 일부 앗아갔습니다. 인간을 외계인들의 전략적 목적에 더 적합한 도구로 만드는 인공물이 이식된 것이지요. 빛의 일꾼 영혼들은 지상의 생명 발달과정에 이렇게 개입함으로써 자연의 순리를 어겼습니다. 그들은 진화해 가는 인류로서 살고 있는 토착영혼들의 본성을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인류가 갓 얻은 자유의지를 강탈해 버린 것입니다. 
 

- 여러분이 저지른 끔찍한 실수가 결국은 뜻밖에도 일을 긍정적으로 풀려가게 했던 적이 혹시 없었습니까? 지구와 인류에 은하계가 개입한 결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토착영혼들에게 그들의 에너지를 각인시키는 과정에서 은하계의 힘들은 사실상 지상에다 영향력들이 뒤섞여서 들끓는 하나의 거대한 도가니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다양한 은하계 영혼들 내면의 전투적 요소들이 한 생물 종인 인류의 마음속에 이식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그것을 통합시키거나 평화롭게 공존하게 할 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토착영혼들의 여정을 심히 복잡하게 꼬이게끔 만들었지만, 그것은 결국 긍정적인 방식으로 돌파해 나갈 최적의 기회, 은하계의 분쟁이 맞고 있는 교착상태를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 명심하세요, 만사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착영혼들이나 은하계 영혼들이 동일한 의도에 의해 이끌려가는 어떤 차원이 있으니, 그것은 천사의 차원입니다. 가장 깊은 속에서 모든 영혼은 저마다 천사입니다. 천사계 차원에서는 은하게 전사들과 토착영혼들이 모두 위에 묘사된 우주적 드라마에 동참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은하계의 개입은 지구가 애초에 의도된 대로 도가니가 되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은하계 전사들의 내면에 새로운 형태의 의식이 싹트게 하는 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그것이 뜻밖의 방식으로 에고 단계를 종식하고 -그들의 성장이 끝나고-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게 한 것입니다. 

- 이 네 단계의 과정이 에고에 중심한 의식을 가슴에 중심한 의식으로 옮겨가게 하는 전환점입니다. 지구와 인류와 은하 세계 모두가 이 단계를 거쳐 간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단지 동시에 가지 않을 뿐입니다. '행성 지구'는 이제 3단계를 가고 있습니다. 빛의 일꾼들 중의 많은 이들도 지구의 내면적 과정과 공조하여 3단계를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2단계를 겪고 있고, 4단계에 다다라 가슴 벅찬 환희와 영감을 맛보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 하지만 인류의 대부분은 아직도 에고에 중심한 의식을 놓아 보내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아직 전환의 1단계에 진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심판하여 비난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식물이 자라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바라보도록 하세요. 우리는 꽃이 활짝 피지 않고 봉오리를 맺고 있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세요. 에고에 중심한 의식이 당신네 세계에 끼치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심판을 내리는 것은 영적 차원의 역학에 대한 통찰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당신 자신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신문이나 뉴스를 보다가 수시로 느끼는 분노와 불만은 건설적인 에너지로 전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을 한 걸음 물러나서 신뢰의 태도로 바라보도록 하세요. 대중매체를 통해서는 듣거나 읽어내기 힘든 집단의식 속의 저류를 직관적으로 감지해 내도록 해보세요. 

- 빛의 일꾼들은 베풀고 돕기를 매우 좋아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종종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에너지만 낭비되게 하여 빛의 일꾼이란 측면에 대한 자기 의심과 실망을 불러옵니다. 분별력을 발휘하세요. 돕고 싶어 하는 욕망은 빛의 일꾼들에게 변신의 3단계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함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 순수하고 지극히 행복한 합일 상태에 대한 몽롱한 기억이 의식 속에 다시 떠오르자, 여러분은 어쨌든 이것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대책 없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지를 알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가슴에 중심한 의식의 영역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자신이 지상의 인간들에게 행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일어나서 점점 커졌습니다. 

- 특히 지구상에는 의식이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널려 있었습니다. 지구는 온갖 다양한 에너지의 통합소 -다양한, 심지어는 서로 대치하는 에너지들까지도 조화롭게 공존할 길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도가니 같은 장소- 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지구의 에너지장은 매우 이질적인 에너지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지구에서 사는 것과, 물질 차원이든 아스트랄 차원이든 우주의 다른 장소들에서 사는 것의 차이점은, 지상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다양한 에너지들은 단지 광대한 스펙트럼의 생물 종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단일한 존재, 인간 속에도 존재합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존재가 담을 수 있는 것보다도 폭넓은 스펙트럼의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내부에 살인자와 성자의 에너지, 아이와 어른과 늙은이의 에너지, 남성과 여성의 에너지, 활동적이고 수동적인 에너지,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에너지, 물과 공기와 불과 흙의 에너지 등등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인 여러분에게는 이것이 사소하고 그저 당연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주의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은 대단한 묘기입니다. 무슨 특별한 짓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대단한 묘기인 것입니다. 
 
- 영, 혹은 신, 혹은 있는 모든 것(All-That-Is)이 인간이라는 개념을 떠올린 이유는, 우주가 일종의 정체상태에 다다랐었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일체성을 벗어나 생명을 탐사하는 동안 우주의 다양한 차원과 장소에서 다양한 생명 형태를 시험해 보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떤 생명체를 속속들이 경험해보고 나면 영혼은 그것을 떠나 -더 이상은 그것으로 화신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특정한 요구에 부응하는 다른 생명체로 넘어갔습니다. 특정한 생명체 속에서 사는 동안에 에너지를 변환시킬 필요는 없었습니다. 변화하고 싶을 때는 몸을 바꿨습니다. 영혼이 게으르거나 얄팍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밀도 면에서 육체로부터 아스트랄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신체는 한정된 범위의 경험만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체로 있는 동안에는 성장하거나 변성해갈 기회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신체는 그리 다양한 에너지를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물로 덮인 행성에서 수중의 존재로 태어나서 산다면 물의 속성을 온갖 방법으로 경험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액체가 되어 고정되지 않고 흐르면서 움직이는 '느낌'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그 신체를 떠나서 잠시 산의 내부에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권력을 추구하는 은하계의 존재로서 살았을 때는 그 몸 안에서 여러분의 의식을 제대로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 이제 인간에게 개입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빛의 일꾼 영혼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그들은 지구에는 완전히 다른, 희망으로 가득 찬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 희망을 온갖 노력으로 덮어 감춰버렸습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어떤 차원에서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행위로 인해 빛과 진정한 기쁨을 향해 가는 자기 자신의 영적 여정까지도 차단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에고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러분은 지구가 생명으로 가득 찬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 행성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 마침 지상의 삶이 여러분 내면에 남아 있던 에고에 중심한 에너지를 다룰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제 안에서 씻어내고자 했던 그 에너지들을 여러분은 여러분이 조종했던,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바로 그 존재 속에서 -인간 속, 곧 여러분 자신 속에서- 조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 에고에 중심한 의식을 온전히 놓아 보내고 나면 여러분은 자신이박해나 외부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졌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희생자와 박해자의 역할을 넘어서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여정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와 있을 것입니다. 카르마의 짐을 풀어내려 놓고,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전적으로 자유롭게 창조해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힘없는 아기로부터 출발하여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으로 짜여진 지상의 삶은 여러분이 바로 이 임무를 다할 수 있게끔 수시로 손짓해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세요. 여러분 삶의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서 타인에게서 갈구하던 사랑과 이해를 자신에게 주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이제껏 이야기해 온 좀 더 넓고 형이상학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길 잃은 어린양이 아니라 내가 바로 하나님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집으로 데려다줄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신성한 권능인 여러분의 본성 그 한가운데로 여러분을 데려다줄 깨달음입니다. 

- 자신이 똑같은 생각과 행위의 쳇바퀴를 돌고 또 돌고 있었음을 영혼이 깨달을 때, 에고 단계의 끝이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영혼이 손아귀를 빠져가고 있는 보물을 붙잡으려고 늘 발버둥 치기에 지쳐 싫증을 내면, 에고도 그 지배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혼은 자신이 벌이고 있는 게임의 약속이 거짓임을, 그리고 쟁취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정상을 지켜야 하는 일은 통제하던 손아귀를 조금씩 늦춥니다. 

- 신이 여러분을 하나의 개체 영혼으로 창조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자신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그녀는 '저 밖에 뭔가 탐사해 볼 만한 것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사랑에 빠진 것과도 약간 비슷한 기분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별 고민하지 않고,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이 새로운 현실을 경험해 볼 만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과 살짝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 사랑하는 친구들, 여러분과 다시 함께하는 것은 내게 크나큰 즐거움을 줍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용감한 전사들입니다. 오늘날 지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온 여러분의 존재는 그 자체가 안팎의 어둠을 직면하고 거기에 여러분의 빛, 여러분의 의식의 빛을 비추고자 하는 각오와 용기를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의미에서 전사이며, 여러분의 무기는 자비와 분별력입니다. 사랑과 자비심만으로는 여러분 현실의 환영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본질적이고 여성적인 품성은 남성적 품성인 명징한 분별력으로 보완되어야 합니다. 공감과 자비는 그 어떤 이원성의 표현물 속에서도 그 속알맹이의 빛을 알아볼 수 있게, 예컨대 부정성으로 꽉 찬 인격에서조차도 영혼의 빛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분별력은 그러한 모든 표현물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권력지향적 에너지를 알아차리게 하고, 그것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여러분의 에너지장으로부터 놓아 보낼 수 있게 해 줍니다. 
 

- 진짜 일은 아이 적에 깊숙이 받아들였던 에고에 중심한 두려움과 망상을 낱낱이 놓아 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의 일부를 형성한 이 각인된 에너지를 알고 여러분의 것이 아닌 그 부분들을 놓아 보내는 것은 강렬하고 힘든 과정입니다. 그것은 양파의 껍질을 모두 벗겨내는 것과 같은 일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내가 거듭남이라는 이 내면의 과정의 심오한 뜻을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의 용기를 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깊은 존중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내가 아는 중 가장 용감한 전사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둠과 적의로 찬 곳에서 자신의 촛불을 밝혀 지상에 새로운 의식이 내려올 길을 닦는 선구자들입니다. 

- 세상이 테러리스트의 힘에 정복되지는 않을 겁니다. 늙은 남성 에너지는 이제 수명을 다해서 죽음의 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테러리즘, 이 공격적인 늙은 남성 에너지의 분출에 대한 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무력감에 중심을 잃도록, 즉 피해자가 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지 마세요.

 

- 공격적인 에너지를 자신의 에너지장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아무도 거기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세요. 거기에 분노와 증오로 반응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그것을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빛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 두 번째 차크라는 집인 자기 자신에게로 귀향하는 지점, 연결돼 있던 다른 에너지들과의 매듭을 푸는 지점입니다.

 

- 이 모두가 두 에너지 사이의 공조 문제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에너지는 오래도록 함께 저 밑바닥에서 고통스러운 씨름의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함께 솟아오를 것입니다. 어느 쪽도 상대방 없이는 균형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성 에너지는 억압과 굴욕의 잿더미로부터 솟아오를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남성 에너지의 거듭남이 시급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이 남성의 거듭남은 결국 집단적 차원에서도 가시화될 것이지만 우선은 여러분 남녀 각자의 안에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이 오래된 에너지를 내면에 품고 있는 보유자이며, 그 두 에너지가 동등하고 환희롭게 만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타고난 권리입니다. 

 

- 감정의 영역은 여러분이 자유와 온전함을 향해 성장해 가는 과정에 매우 요긴한 영역입니다. 여러분은 영적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지상의 현실과 같은 조악함과 높은 밀도를 모르는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여기에 대처해 나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 여러분은 여러 생애에 걸쳐서 이 지상에서 여러분의 우주적 에너지를 표현해 보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지구로 채널링 하는 과정에서- 깊은 상처가 많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지니고 있는 감정체는 상처와 트라우마로 뒤덮여 있습니다. 나는 오늘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 여러분이 신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한, '신의 그 창조적인 부분(thatcreative part of God)'입니다. 여러분은 태초의 탄생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탐사하며 새로워지기를 열망하며 확장해 가는 에너지는 남성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로 결합하는 에너지, 본향의 에너지는 여성적 에너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에너지가 모두 여러분의 본성에 속합니다. 영혼으로서의 여러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여러분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속성을 모두 지닌 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두 에너지가 함께 조화롭게 작용하게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자신 속의 온전한 전체성을 제대로 경험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위대성을 부인해 온 끝에,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워해온 그 신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궁극의 돌파구입니다. 여러분 자신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워하고 있는 그 신임을 깨닫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권능의 심장부, 여러분 자신의 온전함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이고, 언제나 그였습니다! 오매불망 여러분을 기다려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 이 내적 자각의 불꽃이 밝혀지면 너무나 큰 환희가 일어나고 너무나 깊은 환향의 느낌에 젖어들어서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인간관계가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이게 만듭니다. 예컨대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들에 신경이 덜 쓰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비판하거나 불신하더라도 그것을 자동적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영향을 덜 받고 열띠게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더 쉽게 놓아 보내고, 자신으로부터나 상대방으로부터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욕구가 떨어져 나갑니다. 여러분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에 감정이 쉽게 흔들린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타인의 부정적인 견해에 동조하게 만드는 자기 경멸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리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자기 경멸을 상대방과 싸우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내면의 감정적 상처와 교감하고 돌봄으로써 해결합니다. 이 상처야말로 지금 이 순간의 상황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입니다.  

 

- 사실 모든 배척의 고통, 모든 인간관계의 고통의 기원은 치유되지 못한 탄생의 고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인은 가까운 곳에 있음을 말해주는 듯한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상황들이 있기 때문에 나의 이 말이 엄청난 비약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겪는 이 고통은 배우자가 저지른 혹은 하지 않은 어떤 일 때문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고통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문제의 해결책은 상대방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말하노니, 근본적으로 여러분은 자기 내면의 오래고 오랜 고통의 치유 문제 ... 

 

- 쌍둥이 영혼이 창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여러분은 종종 어떤 것의 존재 이유는 그것이 주는 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쌍둥이 영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쌍둥이 영혼이 존재하는 이유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목적은 단지 기쁨과 창조성입니다.  

  

 

 

 

 

 

 
예수아 채널링
[예수아 채널링]은 지성과 영성을 두루 갖춘 네덜란드의 한 여성이 내면에서 아주 특별한 (우리에겐 ‘예수’로 알려진) 에너지/의식과 접촉하고 받아적기 시작한 기록들이다. 이 채널링은 초반엔 개인적으로, 이후엔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아 현재는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저자
파멜라 크리베
출판
정신세계사
출판일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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