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승민
출판 : 웨일북(whalebooks)
출간 : 2023.03.20
음. 나는 잘 모르겠다.
<감정 문해력 수업>이라는 제목과 본문 사이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방송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듯한 저자는 때로는 눈치를 보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한다.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아 조금 답답했다. 차라리 제목을 조금 더 편안하게 뽑아서 에세이 느낌을 살렸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눈치' 자체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저자의 설명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보아야 하고 누군가는 보아주기를 바라는 역학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모호하게 다루지 않았나 싶다. 결국 현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눈치'가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무엇이' 눈치를 보게 만들며 나는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서 이 책은 핵심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본문 중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나는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편이며, 그쪽에 훨씬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저자가 드는 예시들은 내게 약한 피로감을 주는 것들이 많았는데- 어쩌면 저자의 세계에서 나 같은 존재는 눈칫밥 꽤나 먹는 폐급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래서 눈치를 보는 사람은 다 잘 살고 있느냐 하면 그건 또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것만 눈치챌 수 있는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눈치채지 못하면 또 어떤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것에 맞춰주느라 나 자신을 괴롭게 할 바에는, 해맑게 살아서 남들이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라고 사고의 전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편이 낫다고 본다. 눈치를 잘 봐서 삶이 편하다면 모르겠지만, 눈치가 빨라서 괴롭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꼴이다.
각자는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부디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지옥에서 벗어나세요.
이런 기조가 MZ 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서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지속적인 접촉이 많지 않은 직업이라 크게 체감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절취'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보일 때는 과감하게 그 스위치를 끄는 것도 한 방법이다. 처음에는 손끝이 차갑게 굳어서 벌벌 떨리겠지만 몇 번 해보다 보면 이 편이 속 편하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감정 문해력 수업>이라는 제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결론 같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본문도 딱히 그렇지는 않았으므로 말해보자면.
"눈치가 없으면 남이 괴롭지만, 눈치가 빠르면 나만 괴롭다. "
본인이 편안한 선을 지키면서 적절히 끄고 살자.
그래도 되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끝.
- 이 책은 눈치, 침묵, 암묵지 등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대화의 맥락, 상황, 뉘앙스를 해석하는 쓸모 있는 도구라고 말한다. 진짜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화법 때문에 대화할 때 어려움을 겪어 본 적 있다면, 이 책이 남에게 상처받지 않고 나를 보호하는 단단하고 다정한 힘을 기르게 해 줄 것이다.
- 어쩌면 내게 눈치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길 바라는 마음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뒤섞였던 치기 어린 본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라온 여정 곳곳에 사랑도 애정도 듬뿍 스며들어 있었다는 걸 나는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눈치 보는 원인을 기어이 뿌리에서 찾고자 했던 건 그저 탓으로 돌릴 누군가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까닭이었다. 내 안에서 나오는 감정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걸 절감하는 오늘날, 오랜 시간 버겁기만 하던 눈치의 무게는 어느새 깃털처럼 가볍다.
-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는 행위. 그 행위의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 편안한 소통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하기 위해 나오는 행동이었다. 남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눈치를 보는 사람은 없다. 이 모든 건 선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밝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논문의 주제를 '눈치'로 정했다. 인간이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가지는 마음(심리학), 자라나며 타인과 주고받는 문화와 관계(사회학), 그 과정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우리의 언어(인지언어학)까지 다양한 분야가 뒤섞인 종이 뭉치가 말해 주는 건 단 하나. '눈치는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을 타고난 우리의 본능'이라는 사실이었다.
- 제목이 <감정 문해력 수업>인 것과 달리 이 책의 본문엔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이슈에 기시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문해력이란 누군가에게 반감을 사는 단어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그러는 당신은 문해력이 얼마나 뛰어나길래?"라고 묻는다 한들 나 역시 대답할 말이 없다. 스스로 문해력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문해. 언어로 사고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상대방을 알아 가는 일련의 과정. 그 여정에서 느끼고 이해하고 창작하는 모든 행동을 아우르는 단어다. 이런 고급스러운 키워드를 가져도 될지 부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문해력'이란 실로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채워 가는 힘을 의미하고 있었다.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애초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덧댈 필요는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 그러한 이유로 '눈치를 보는 건 좋은 거야, 눈치를 안 보는 건 나쁜 거야, 문해력을 키워야 해'라는 목소리를 이 책엔 담지 않았다. 잘잘못과 호불호를 가리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도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갈 누군가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딱 그 마음 하나로 적은 글 서른네 편을 묶은 책이라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 마음은 컨디션이 좋을 때 여유를 지니다가도, 저조해지는 순간 일도 잘 안 풀리는 마법의 법칙이 공존하는 곳이다. 결국 자신과의 심리전이 시작되는 셈인데, 그때 눈치가 발동한다. '살면서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라는 화두를 한 번쯤 던져 보고 싶었다. 화두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틀림없이 값질 것이라 확신한다. 대학 신입생 때 제 발로 화장실에 들어가 혼밥을 해본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 경험을 붙들고 오랜 시간 싸워 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지금까지 눈치에 억눌려 살았을 터. 그 기억을 용기 내어 브런치에 적어 올렸던 그날의 후련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그때 깨달았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진다는 걸. 내가 이 일을 잘하고 싶구나,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구나. 한 걸음 살짝 물러나 상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가벼워진다. 보이지 않는 힘이란 이렇게도 강렬한 것이었다. 모든 언어는 결국 활자 그 자체보다 내포하고 있는 힘에 더 비중이 크다고 믿는다.
- 적절한 어휘를 고르기 위해 신중해지는 순간, 더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입술을 가만히 맞대는 순간. 두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한걸음 물러나 제삼자가 되어 보는 순간. 우린 지금보다 조금 더 그 순간을 애정해 볼 필요가 있다.
- 이는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건네 오는 침묵의 지혜이기도 하다. 니체와 헤겔이 격찬했던 철학자인 동시에 사람들의 모욕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상가.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굳이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다. "본래 세 사람만 모여도 그 의견은 모두 다르고, 대개 사람들은 설득당하기를 싫어한다"라는 그의 신념을 지켜 나갔다. 비난을 들어도 맞불을 놓는 대신 일절 대꾸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의견이란 못질과도 같아서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앞부분만 자꾸 들어갈 뿐"이라던 그의 말은 기어이 설득해야 직성이 풀리는, 틀린 건 틀리다고 말해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에게 잔잔한 화두를 던져 준다.
- 여기에 고맥락이란 키워드를 가져와 본다. 진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에둘러 표현하는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건 대화하면서도 서로의 눈치가 수차례 발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일본에는 다테마에와 혼네가 있다. 다테마에는 앞에 세우는 것. 원칙으로 앞세울 수 있는 방침이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생각을 의미한다. 혼네는 본래의 소리, 속마음을 뜻한다. 한국이 눈치에 따라 수만 가지 선택지 가운데 적절한 답을 고르는 문화라면, 일본은 알맞은 범주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종종 지인들이 묻는 "일본인들은 진짜 겉과 속이 달라?"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이다.
- 방송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다. 김재원 아나운서는 한 인터뷰에서 "의자가 내려가는 사고 이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해 주위를 폭소케 했다. 생방송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뜻밖의 해프닝. 의자가 내려갔던 김재원 아나운서 못지않게 당황했을 김솔희 아나운서다. 놀라운 건이 장면엔 단 한순간도 억지스러움이 없다는 점, 상황을 눈치챈 순간부터 담백하게 방송을 끝맺은 김솔희 아나운서의 위트가 빛을 발했다. 웃긴 상황은 옷감으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당당함, 상대방이 민망하지 않도록 문장 곳곳에 건네는 배려, 혹여나 불쾌했을 시청자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달래 주는 솜씨. 우아함과 교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 오래 봐야 알 수 있는 것,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은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 사람에게 오롯이 주어지는 몫이다. 활자로 학습할 수 없다는 건 직접 몸으로 체감해야 습득할 수 있다는 뜻. 동시에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암묵지가 각기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치 잘 보는 방법'이라는 백과사전이 존재한다면 '말없이 국수를 먹을 경우 말을 아껴야 한다'든가, '내 이름만 먼저 부르는 건 안부 인사가 아닌 급한 용건'이라든가, 지구인이 80억이라면 80억 가지 방법이 나와야 할 텐데, 백과사전이 그 모든 데이터를 담아낼지는 미지수다. 암묵지는 그저 끊임없이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되는 확률 높은 선택지일 뿐이다.
- 인간이 지닌 홍채의 색깔은 저마다 다를지언정 공막의 색은 오로지 흰색이다. 흔히 흰자위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공막이 하야면 눈동자가 조금만 돌아가도 무엇을 바라보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침팬지나 보노보는 다르다. 그들의 눈에는 흰자, 즉 공막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색소가 공막을 짙게 만들어 홍채와 뒤섞여 보인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다면 침팬지의 눈동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길이 없다.
- 신기한 건 본래 인간의 눈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다. 동물의 행동을 연구한 일본의 고바야시 히로미 小林洋美와 코시마 시로는 우리의 눈은 수평 방향으로 시야를 확장하기 위해 적응한 결과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수평 방향으로 시야를 확장한다는 것.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양옆 좌우를 살펴볼 수 있는 동작. 곁눈질이 그 예다. 우리가 눈치 볼 때 표정이기도 하다.
- 침팬지와 보노보처럼 공막 색이 어두운 눈을 두고 '위장형 '이라 부른다. 포식자에게 시선의 방향을 들키지 않게 설계된 구조다. 반면 우리의 흰색 공막은 시선이라는 신호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목적은 의사소통이다.
- '무해하다'라는 표현은 보통 어린아이의 어리숙함, 순수함,천진난만함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해가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 숨겨진 정의가 더 있다. 상대방을 상처 줄 의도가 없다는 것과 속내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솔직함이다. 똑같은 질문이지만 질문을 던진 이가 스무 살을 넘긴 성인이라면 불쾌해지는 이유란 뭘까. 그가 눈치를 못 챙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파고들면 그 눈치란 그저 사회가 만들어 낸 체면, 배려, 예의가 겹겹이 쌓인 편견의 산물일 뿐이다.
- "나이가 몇 살이냐"라는 질문이 불쾌하다면 나이에 따른 편견이 사회 곳곳을 장악해 버렸다는 방증이다. "외동이에요?"라는 말이 기분 나쁘다면 외동에 대한 세간의 편견이 부정적이란 뜻이다. 나의 경우엔 그랬다. 늘 혼자였으니 양보를 모를 것, 본인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라 왔으니 독단적일 것, 원하는 모든 걸 누렸을 것이란 생각.
- 그러한 시선들에 맞섰던 때가 있다. '혼자 자랐으니 사랑 듬뿍 받고 살아온 온실 속 화초'라는 시선과 마주할 때마다 어릴 적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호되게 맞았던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부모님은 원하는 걸 뭐든 사주는 분들이 아니었다며 구구절절 가족의 소비 습관까지 들먹거린다든가. 혹여나 나의 행동에서 '독단적' '이기주의'가 내비친 건 아니었는지 끝없이 돌이켜 봤다.
- 끝없는 자기 방어에서 벗어나려면 결국은 인정하는 것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의 옳고 그름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양보할 줄 모르는 환경에서 자란 건 팩트 fact이며 다른 형제, 남매와 사랑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었던 것 역시 팩트. 그러니 내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걸 알려 달라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나를 괴롭혀 온 외동딸 콤플렉스는 사라졌다.
- 그러나 요즘은 그 말이 더 이상 내 마음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에게 그런 질문은 살이 쪄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겐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다는 걸 인지시킨다.
- 세상이 나에게 건네는 모든 말에 날을 세우고 살다 보면 칭찬도 욕으로 들릴 때가 있다.
- 이처럼 고맥락 말 문화에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무해한 척 무례한 질문을 던져 오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런 말엔 사실 마음으로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물론 상처가 될 순 있다. 그럴 땐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한다. 방금 그 말이 내겐 무례하게 들렸다고 말이다. 용기가 없어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할 자신이 없을 땐 침묵을 유지한다. 무례함에 할 말을 잃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쓰는 일은 거기서 그렇게 끝낸다. 집으로, 침대 안으로, 반신욕 하는 욕조 안까지 그 마음을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눈치를 타고났지만 그렇기에 눈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천부권 역시 타고나지 않았는가.
- "할머니는 왜 손이 없어요?"
아이의 말에 당황해서 할 말을 잃은 사이 아이의 엄마가 재빨리 대답했다.
"할머니는 음식을 너무 맛있게 잘 만들어서 천사님이 손을 빌려 간 거야. 네 외할아버지처럼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시면 빌려줬던 손도 돌려받고, 상도 받고, 선물도 많이 받으실 거야. 그러니까 할머니께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하자."
글쓴이는 글의 말미에 '사소할 수 있지만 저희 엄마는 그 일로 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하셨다'라고 적었다. 더불어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며 아이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했다. 이렇게 햇살 같은 말 한마디에 피곤한 맥락과 어려운 분위기 속 고단한 눈치여정도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
- 섬세한 언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는 걸 머리론 안다. 입에 잘 붙지 않을 뿐이다. 제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기가 태어난다 한들 나의 언어가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건넬 수 없음은 당연하다. 내가 뱉어 본 적 없는 말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 대화를 나누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비결이 뭘까 관찰해 보니 자기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졌을지 살펴보니 답은 하나. '친절함'이었다. 친절함이란 구체적인 언어이자 섬세함을 의미한다. 뭉뚱그려 말하는 데 익숙해진 요즘의 언어에서 한 발자국 더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 그렇게 좀 더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쁘다"라는 말 대신 "오늘 입은 옷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잘 어울린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우리가 어제 같이 보낸 하루가 재밌었다면 그들은 "즐거웠다"라는 말 대신 "문득 든 생각인데, 역시 삼겹살은 너랑 먹을 때 맛있는 것 같다"라며 구체적인 순간을 꼽아 낸다.
- 한 번은 엄마가 마늘을 자른 칼로 파프리카를 썰었다. 그 파프리카가 들어간 샐러드를 한 입 맛본 아버지가 파프리카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 역시 아버지의 의중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엄마는 욱해서 "그럼 당신이 샐러드 만들든가" 할 수 있다. 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 쏘리" 할 수도 있다. 아침 밥상에 마늘 냄새나는 파프리카는 그리 큰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잠깐 정적이 흐르고 엄마가 내놓은 대답이 내겐 다소 인상적이었다. "맞네, 도마를 안 씻고 파프리카를 썰어 버렸다. 냄새가 좀 심한가? 와 근데 당신은 후각도 미각도 뛰어나네요. 나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아." 자칫 불쾌할 수 있는 언어를 칭찬의 언어로 바꾸는 힘은 그런 친절함에 있었다.
-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꿔 버릴 수 있는 힘은 생각보다 작고 소소한 것들이 품고 있다. 같은 말도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상황이나 상대방을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는 <풀꽃>이라는 시의 시구처럼 섬세한 말 한마디란 어쩌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인 걸지도 모르겠다.
- 언어의 부재가 주는 편리함이란 어쩌면 인간이 갈망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기술은 인간이 좇는 그 편리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 나날로 발전해 가고 있다.
- 지금은 어떤가. 한때 획기적이었던 시선 추적 기능은 웬만한 앱의 기본 값이 되었다.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만 해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 책 한 권을 읽어 낼 수 있다. 넘김 버튼만 응시하면 자동으로 페이지가 넘어가기 때문이다. 기계가 충돌을 감지하면 위험으로 인식해 긴급 통화로 자동 연결되고 해외 식당에 들어가 휴대폰으로 메뉴판 사진을 찍으면 깔끔한 번역본이 등장한다. 손목을 감싼 기계에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하면 내장된 앱이 "오늘은 수면이 부족한 날이에요"라고 말해 준다. 나도 모르는 생리 주기를 파악해 "곧 그날이 다가와요"라며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수준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에 끊임없이 열광해 온 결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챙김'을 받고 사는 세상이다.
- 우린 콩을 심어도 세 알을 심는 사람들이었다.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벌레가 먹고, 한 알은 사람이 먹어야 한다며. 감나무에 감을 따도 소지밥, 서리밥, 까치밥은 남겨 뒀다. 담너머 뻗어 나간 가지에 달린 것은 이웃에게 주는 소지밥, 동네꼬마들이 몰래 따먹으라며 서리밥, 한겨울 굶주릴 날짐승의 일용할 양식으로 까치밥. 나눠 주고 내어 주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 소지 掃地란 땅을 쓰는 행위를 뜻한다. 불교에선 '마당 쓰는 일을 맡은 사람'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일본어로 청소를 의미하는 소지 掃除와 발음은 같지만 다른 단어다. 찾아보던 중 예쁜 풀이를 발견해서 이곳에도 옮겨 본다. "장광에 골 붉은 감잎은 우리 집에만 떨어질 것인가. 담장 곁에 심은 감나무, 울 너머 이웃집에도 낙엽 떨구기 마련이다. 그래서 감을 따면 한 바구니 가득 갖다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떨어진 잎을 소지 掃地해 준 보답이라며 '소지밥'이라는 이름으로 이웃과 나누는 정이었다."
-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 Pearl Buck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초가집 마당의 감나무 꼭대기에 달려 있는 홍시가 겨울 새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라는 설명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유적지나 왕릉보다 더 감동적인 이 현장을 목격한 것만으로 나는 한국에 오기를 잘했습니다." <전라도 닷컴>, 2022년 12월호(통권 248호)
-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숫자로 계산해 낼 수 없는 것. 온전히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 추상적이라 치부되어 온 정의 개념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가 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 소개된 귀여운 보노보 실험이다. 보노보는 '가장 인간적인' 유인원으로 규정되는 포유류, 침팬지랑 비슷한 생김새에 인간과 98.7퍼센트에 가까운 DNA를 공유하는 동물이다.
- 그러나 예상을 깬 결과가 나왔다. 과일을 독식할 줄 알았던 보노보는 직접 철창을 열어 다른 보노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기가 먹을 음식이 줄어든다 해도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눠먹는 걸 선호한다는 의미였다. 추가 테스트에서 보노보는 아무 대가가 없는 상황일지라도 처음 보는 보노보를 기꺼이 도우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 반면 정반대 성격인 침팬지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화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개체로 규정됐다. 이처럼 침팬지보다 훨씬 큰 포용력을 보인 보노보들은 침팬지보다 훨씬 많은 새끼를 낳으며 자연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폭력성을 대변하는 적자생존보다 다정함이 훨씬 강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거대한 번식의 역사다. 이처럼 다정함이 자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건 그 속성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 유약하게 태어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현생 인간의 시원이라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 외에도 인간 종은 최소 네 종이 존재했다. 180만여 년 전 지구상 가장 너른 영토에 분포했던 탐험가, 호모 에렉투스처럼 말이다. 질긴 생존력으로 지구 전역을 개척한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고 자기 방어와 요리에 능했다. 하지만 호모 에렉투스는 살아남지 못했다. 여타 종이 멸종해 가는 와중에도 꾸준히 번성한 건 호모 사피엔스뿐이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건 초강력 인지능력,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하게 협력적 의사소통인 '친화력'으로 생각을 주고받고 기술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 처음 만나 한 가지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종, 지금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다.
(리뷰자 주 : 이 예시는 조금 부적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종 및 동종 간 포식 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의 멸종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 조직과 선임 모두의 눈치를 각기 다르게 봐야 하는 셈이다. 그게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물을 수 있지만, 앞선 장면은 군대라는 광범위한 공간보다 눈앞의 선임에게 이등병의 눈치의 초점이 향해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 이 상황에서 이등병 안준호에게 눈치란 '그때그때 선임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된다.
- 나이, 연차, 경력 등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이 대화의 대상인 상황이라면 충분히 존재할 법한 장면이다. 상급자가 터무니없는 일을 시켜도 하급자 입장에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경우가 있다. 수직 관계가 명확한 직장이나 위계상 어쩔 수 없이 '을'의 관계에 놓여 있다면 말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도의적으로 어긋난 일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주관이 철저하게 배제된다.
- "까라면 까야지."
누가 까라고 하는 것인지, 주어는 생략됐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그 주어는 99.9퍼센트의 확률로 나보다 상급자일 가능성이 크다.
- 요즘 대기업에선 '요요요' 주의보가 떨어졌다고 한다. 일명 '3요'란 상사가 업무를 지시했을 때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고 되묻는 요즘 직원들의 반응을 3종 세트로 묶은 신조어다. 이에 따라 일부 기업들은 임원들을 대상으로 '3요'에 대한 모범 답안을 자료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풍문도 있다. 3요에 대한 대답으로는 왜 이 업무를 지시했는지 정확한 내용과 목적에 대한 설명(이걸요?), 수많은 직원 가운데 왜 그가 선택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제가요?), 해당 업무를 해야 하는 이유나 기대 효과에 대한 설명(왜요?)이 있다.
- 혹자는 '군소리 없이 지시를 따르던 기성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MZ세대의 반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3요는 반발이라기엔 지시에 대한 좀 더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위한 그들의 의사 표현이다. 3요는 언뜻 고맥락과도 연관이 있다.
- 까라면 까는 것이 당연하고, 모든 지시는 직장인의 숙명이라 받아들이던 기성세대에겐 크나큰 충격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상사인데, 이걸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 이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한 조언인가. 매번 그가 후배들에게 건네는 말들에 감탄이 덧대어졌고, 어느새 후배들은 그의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팀원들의 실력도 늘고 팀원들끼리의 심리적 거리감도 좁혀진다. "까라면 까" 대신 건넬 수 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과적으론 상대방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말들 말이다.
- 그렇다. 우리의 눈치란 '빠름'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조금만 빠르게 움직이면 출퇴근길이 편하고, 조금만 빨리 외치면 술에 취하지 않고 귀가할 수 있다. 조금만 돈을 빨리 빼면 주식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조금만 일찍 도착하면 식당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지독하게도 빠름을 외치는 우리네 삶이 가끔은 안쓰러운 이유다.
- 어쩌면 눈치가 우리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건, 그러한 빠름이 주는 억압을 의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선점하는데 급급했던 문화에서 조금 벗어나 이제는 그냥 문가에 가 서서 있어도 본다. 운 좋게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자리가 나기도 한다. 뛰어 가느라 이리저리 부딪혀 눈치 보는 대신 천천히 걸어가 다음 열차를 타는 쪽을 선택한다. 눈치 게임에서 지면 벌주를 마셔 버린다. 그러다 취하면? 취했으니까 집에 간다. 과한 벌주를 받게 된다면 못 마신다고 말해 버린다. '빠름'이 주는 눈치에 호응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괜찮다.
- 빠름을 재촉하는 마음은 '내가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에서 나오는 것 같다. 동시에 바꿔 생각하면 예를 들어 누구에게나 돌아갈 수 있는 자리이므로 오늘은 내가 앉았지만, 내일은 다른 사람이 앉을 수도 있다는 지극한 순리에 조금은 마음을 내어 줄 필요가 있다.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 기어이 일어나 한 손에 카드를 쥔 채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서 있는 건, 환승 통로를 걸어가는 수많은 행인에게 '어깨빵'을 선물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어쩌면 그저 오랜 습관인 걸지도 모르겠다. 한 발자국 물러나 관망해 보니 그 한 끗 차이로 얻어지는 실상이 그리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니란 걸 절감하는 오늘이다.
-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살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포물선을 그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월급 통계치를 볼 때마다, 비정규직의 처우와 고충을 토로하는 취재원보다 그를 취재하는 나의 삶이 더 열악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마음엔 가시가 돋았다. 애초부터 이 길은 나의 선택이었기에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보다 높은 월급을 받고 워라밸이 좋은 이들이 업무 환경을 탓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속마음에선 이런 소리가 올라왔다. '스스로 선택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남 탓일까?' 내 마음에 박힌 가시가 남을 찌르기 시작한다는 건 그만큼 내 삶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사라진 마음,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가는 자를 향한 시기와 질투, 그 모든 걸 떠나 타인에게 시선을 나눠 주고 싶지 않은 마음, 일말의 공감도 건네고 싶지 않은 가련한 마음 말이다.
- 2022년 인상 깊었던 단어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이었다.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지 알 수 있었기에 더 아프게 들렸다. 뜻풀이만 보면 무시무시한 이 표현, 본래 게임 용어였다. 특정 문제로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들에게 "어차피 당신이 선택한 것이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불평이 많냐"라며 상대방을 타박하는 언어로 사용됐다.
- 그 후 차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퍼지기 시작해 사회문제를 대변하는 언어로 재생됐다. 계기는 2022년 겨울, 공무원들의 임금 인상 시위였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시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부조리한 업무 환경에 누군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와 나 사이에 날카롭게 선을 그어 버리려는 마음. 철벽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가장 빠르고 잔인한 방법으로 침묵시키는 수단이었다.
-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있던 상황, 포르투갈팀은 이기기에 장벽이 높은 상대였다. 경기를 며칠 앞두고 트위터의 한 유저가 "포르투갈 이기면 되는 거 아님?"이라는 글을 올리자 "우승 후보임"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포르투갈팀은 월드컵 우승 후보니까 이길 확률이 낮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원글 작성자가 이렇게 되받아쳤다. "알빠임?" 이 대범한 말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가 포르투갈을 2대 1로 꺾어 16강에 진출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 "당신이 누군지 내 알바 아니야"라는 말의 줄임말, 역경이 있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 주변 상황에 과하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당찬 각오다.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겨 온다. 월드컵 우승 후보인 포르투갈팀을 상대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맞붙은 끝에 극적으로 승리한 대한민국 팀의 태도와 이 트윗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2023년은 '알빠임' 마인드로 가겠다"라며 열렬히 호응하는 이들로 넘쳤다. 하지만 사실 "알빠임?”은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이 조금만 선을 넘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냉소적으로 변하는 태도 그 자체를 대변하는 언어다.
- 감정을 공유하는 수고가 사치인 시대가 온 걸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겠다는 적개심은 어디서 나온 걸까.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상황들에 철벽을 치고 싶어지는 두려움이 언제 이리도 만연해진 걸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과 같은 맥락이라 했던가. 냉소주의가 만연한 사회라지만 한쪽에선 꾸준히 언어 감수성을 기르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어쩌면 둘은 맞닿을 수밖에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건지도 모르겠다. 기어이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라며 "네 사정이 어떤지 내가 알바 아니라"며 다그치고 싶어질 만큼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지금의 우리에겐 좀 더 세심한 시선, 마음을 읽는 마음이 필요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 2023년 초 한 기사에 '디지털 토정비결'이라는 인터뷰가 실렸다. 데이터 과학자 송길영의 말을 빌려 우리가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화두를 던져 주는 대화였다. "선 善을 행하되, 선은 지켜야 하는 극한 배려 사회가 왔다. 우리는 갈등의 맥락을 재배치하는 더 나은 언어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송길영이 답했다.
"무례하면 세상이 좁아집니다. 섬세한 조직, 세심한 인간이 살아남습니다."
- 이어 그는 올해를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았다.
"첫째 유리한 다양성, 둘째 관계의 돌봄, 셋째 건강한 긴장입니다."
- 그의 말을 빌리면 "구성원이 다양한가" "소수자 배려 문화가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더 이상 사회적 책무의 차원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장애인이나 남녀 비율로 조직의 형질을 변화시키는 게 생존에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가령 '조직에 외국인 인사 룰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우린 외국인이 없어서 괜찮다'고 하면 심각한 상황입니다. 디폴트(기본설정 값)가 '균질'이니, 새로운 유입이 막힌 거죠."
- 우리는 이미 결손가족, 정상 가족이란 표현을 폭력으로 간주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려 깊은 시선, 세심한 언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세상이 되었다. 틀에 박힌 절차, 질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관계의 돌봄'을 재해석한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회사나 조직과 같은 사회 구성원이 모인 모든 곳은 그저 '잠시 같이 있는 환승장'이란 감각이 필요하다는 맥락이다.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들이 머물다 가는 중간 기착지처럼 서로가 소중한 손님이란 태도, 쿨한 안녕. 있을 땐 층차 없이, 떠날 땐 감정 소모 없이 회자정리, 거자필반에 기대어 서로에게 척을 지는 사이가 되지 말자는 이야기.
- '누칼협'과 '알빠임'이란 단어들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 언저리가 불편하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에서 그 어느 때보다 고단함과 애처로움이 전해지는 요즘이다. 그저 잘 살아보겠다고 뛰어든 세상은 왜 이렇게 우리 마음을 못 살게 볶아댈까. 어쩌다 이리도 비죽비죽 가시를 드러내게 되었을까. 기사에 익명으로 달린 악성 댓글들을 볼 때마다, 분노를 한 데 끌어모아 돌파해 버리겠다는 마음들이 느껴진다. '누칼협'과 '알빠임'은 우리에게 방어막일까, 그저 양날의 칼일까.
- 그 후로 과장의 헛기침은 인턴에게 하나의 신호로 작용하게 된다. 만약 훗날 또다시 볼펜 소리가 들리고 과장이 헛기침을 하는데, 인턴이 해맑은 얼굴로 "어머, 과장님 감기 걸리셨어요? 환절기니 조심하세요" 한다면? 우리는 매우 높은 확률로 그를 '눈치 없는' 친구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 이런 눈치 경험치가 없거나 직장의 수직적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과장의 헛기침처럼 상황 곳곳에 숨은 시그널을 알아차리기란 어렵다. 그런 이들에게 '보통은' '일반적으로' '평균은'이란 말들을 건네기 조심스러운 이유다. 눈치에 대해 쌓인 데이터가 없을 뿐 그들의 행동이 '보통' '일반' '평균'에서 어긋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은 사무실에서 볼펜을 딸깍거리지 않아요"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보통'이라는 게 누가 정한 기준인가요?"라고 되물었을 때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나에겐 소음인데, 누군가에겐 마음속 흥겨운 리듬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아예 들리지도 않는 파동일 수도 있다.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평균치란 어쩌면 상위 권력자에 기준이 맞춰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보통이란, 일반적이란, 평균이란 누가 정한 걸까. 그저 안정적인 범주를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낸 상위 권력자의 선 긋기가 아닐지. 위계가 존재하는 세상에선 헛기침 한 번조차도 위계가 낮은 사람들의 수많은 눈치를 발동시킨다. 직접적인 언어가 아닌 시그널로 의사 표현을 할 거라면 누군가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리뷰자 주 : 글쎄. 편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게 더 문제 아닐까.)
- 낯선 장소에서 나에게 아는 척해 주는 사람은 반갑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건네도 아는 척하는 사람은 달갑지 않다. 인사했는데 못 본 척 지나가는 사람은 괘씸하다. 반면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모르는 척해 주는 사람은 고맙다. 괜찮지 않으면서 애써 괜찮은 척하는 이들에게 우린 양가감정을 느낀다. 쟤 또 괜찮은 척하네, 모른 척해야 하나,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더 챙겨 주어야 하나.
- '척'이라는 행동은 쓰임새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사전적 의미는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이다. '거짓'이란 단어가 들어가다 보니 부정적인 뉘앙스가 좀 더 강한 느낌이다.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바쁜 척, 센 척․어디에 붙여 놔도 허세가 가득해 보이는 이 단어, 어딘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의존명사다. 앞서 적었듯 한국인은 무엇이든 솔직하게 부딪히는 화법을 즐겨 쓰지만은 않는다.
-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바쁜 척, 센 척도 마찬가지다. 내 민낯을 보여주기 싫은 상대방이라면 뭔가 있는 척 좀 해볼 수 있다. 듣기 거북한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상대방이라면 대충 아는 척해서 대화를 마무리 짓기도 한다. 상대방에게 매번 무시를 당해 왔는데, 모처럼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면 때론 잘난 척도 할 수 있다. 내가 거절했음에도 상대방이 계속 무리하게 부탁한다면 바쁜 척도 나쁘지 않다.
- ① 아까 영희 씨가 부탁했던 자료 여기 있습니다.
② 영희 씨, 와, 이거 정말 힘들게 받았어요. 제가 영희 씨 부탁이라 겨우 설득해서 얻어낸 거예요.
- 상대방에게 부탁받은 것을 힘들게 얻어 놓고 ①처럼 말하는 이가 있다. 반면 손쉽게 받아 놓고도 ②처럼 말하는 이도 있다. 궂은일을 굳이 내색하지 않으려는 심리도, 작은 노동이지만 그 노동의 가치를 표현하는 마음도, 어느 것 하나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호불호도, 진실과 거짓도, 정답도 없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선택도 자유다. 어느 말을 좋아하는지 듣는 사람의 선호 또한 천차만별이다. ①을 두고 그 사람 묵직하니 괜찮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②를 그만의 깜찍한 생색이라 여기거나 붙임성이 좋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니 '척'이란 그저 때와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이용만 한다면 꽤 괜찮은 쿠션 역할을 해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 앞서 소개한 쿠키요미의 또 다른 게임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이가 잘 준비를 하려는데 산타클로스가 방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퀴즈, 아이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아이의 선택지는 두 개다. 가만히 앉아서 멀뚱멀뚱 산타클로스를 쳐다보는 것과 바로 드러눕고 자는 척하는 것.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공기를 잘 읽는 행동은 후자다. 산타클로스가 아이를 놀라게 해 주려고 기어이 선물을 들고 와주었으니 아이는 자는 척해 주어야 이 서프라이즈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쿠키요미에 이런 장면이 등장했다는 건 실제로 게임하는 성인들이 산타클로스를 믿어서가 아니다. 본인이 전부 눈치를 챈 상황에서도 어디까지 '척'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퀴즈다.
- 직원은 무릎을 꿇고 오물을 뒤집어쓰며 바닥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주변 동료들이 그에게 '도와드릴까요?'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 직원은 한사코 거절하며 혼자 그 방대한 임무를 다 마쳤다. 그런 그가 이후 상사로부터 혼이 났던 이유는 동료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직원 역시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는 표정으로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 "OO 씨가 그렇게 오물을 다 뒤집어쓰고 괜찮다고 하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이 어떨까요? ○○ 씨는 배려한다고 보여준 행동이겠지만 진짜 배려는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거야.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서 애써 웃고 괜찮다고 거절하는 건 가짜 배려야.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게 더 큰 배려인 순간이 있어요."
- 상사의 말을 듣는 순간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인 '일보일경'이 떠올랐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는 뜻인데, 엄마는 유독 내가 패딩도, 안에 입은 재킷도, 그 안의 블라우스도 다 풀어헤친 날 저 말을 건네곤 했다. "이왕 예쁜 옷을 입었으니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지 그래?"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실은 "너무 추우니 제대로 잠그고 다녀"라는 주문이었다. 추운 날은 따뜻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지낼 때 품격이 있다는 의미였다. "춥게 입었으니 추운 건 내 몫이야. 내가 안 추우면 그만이야" 할 수 있지만 남 보기에 추워 보이는 모습이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길 때 비로소 진짜 상대방을 위한 배려도 할 수 있다는 걸 절감한다.
(리뷰자 주 : 스스로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예시도, 설명도 와닿지는 않는다. 내가 선택한 일에 어떻게 남이 진짜 배려와 가짜 배려를 구분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남이 보기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헤아린 끝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내용에 반대되는 예시가 아닌가?)
- 상대방을 배려한답시고 못 먹는 요리를 꾸역꾸역 먹는 것도, 사정이 있는데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워 굳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야기. 내 마음이 편했을 때 상대방을 위할 수 있는 여유로움은 배가 되어 돌아온다.
-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우리가 쓰는 언어보다 행동에 의사소통의 의미가 크게 부여된다. 프로이트는 말하는 언어 the spoken word를 불신했다. 말은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훨씬 많다는 이유였다. 전달되는 느낌과 분위기, 표정과 상황, 목소리 톤까지 우리가 대화하면서 살피는 건 비단 언어뿐만이 아닌 까닭이다. 언어와 비언어가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그러니 하나도 안 덥다면서 꾸역꾸역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면 되레 '나 더운 것 좀 알아 달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솔직하지 못한 비언어는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눈치를 보게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 "아무거나 다 괜찮다"라는 말 대신 그날 정말 먹고 싶은 메뉴를 한두 가지 정도는 골라 보자. 상대방이 멀리 와 주는 수고를 자처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이고 두 팔 벌려 환대해 보자. 자신이 먼저 만나자고 했다는 명분을 대며 먹고 싶은 메뉴를 제안하는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귀여운가. 우린 마법사들이 아니기에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고, 주어진 상황에 성의를 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 홉스테드는 설문 조사를 토대로 나라별 문화를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한다. 한국과 미국, 일본만 골라 비교해 보니 유독 극단적인 숫자를 보이는 대목은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가 집단주의 collectivism와 개인주의 indivisualism 카테고리다. 개인주의가 강한 문화는 개인의 자유, 독립성, 정체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반면 집단주의가 강한 문화에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집단주의는 자신을 우리 we라는 집단의 일부로 보고, 집단의 목표가 곧 나의 목표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카테고리에서 미국은 91 일본은 46, 한국은 18이란 숫자를 기록했다. 숫자가 낮을수록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 "아이 참, 코치님도 칼같이 딱 10분만 해 주시네."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말고 가끔 서비스로 추가 레슨을 해 주세요)
"아니, 코치님은 뭐 그렇게 바쁘시다고 끝나면 바로 집에 가셔요. 바쁘셔?" (가끔은 술 한잔하고 그럽시다)
회원들은 대부분 말끝을 흐린다. 코치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다. 추가 레슨이나 회식 참석이 코치의 의무는 아니기에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코치는 정해진 시간에 체육관에 도착해서 레슨만 잘하면 된다. 코치의 자질과 역량은 레슨자들을 얼마나 잘 가르치냐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회원들은 그건 기본이고, 그 이상을 원한다. 그 이상이란 클럽마다 천차만별이다.
- 그럼에도 우리는 이 맥락을 이해한다. 사장은 왜 심기가 불편한 것이며 황장수가 왜 저런 행동을 하였는지 알고 있다. 황장수는 만기 제대한 병장이다. 군 생활로 소위 말하는 '짬밥'을 먹으며 눈치코치 산전수전 다 겪어 온 경우다. 황장수가 눈치 있는 캐릭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편의점에서 계속 일할 의지가 있다면 (혹은 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사장 눈 밖에 나는 건 원치 않을 거라는 걸 우린 안다. 황장수는 앞으로 같은 행동은 반복하지 않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황장수는 깨달을 것이다. 군대에서나 맞선임 눈치를 봐야 하는 줄 알았는데, 사회 나와도 상급자 눈치 봐야 하는구나. 편의점 세상에선 사장이 맞선임인 셈이구나, 황장수는 까라면 까는 문화에 그렇게 적응한다.
-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궁금해하고, 어떤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인지 과정인 이 능력을 요즘은 자발적으로 차단하거나 방치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 출근하는 지하철 안,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고성이 오간다. 눈앞에 누군가 엎드려 있다. 엎드린 이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무어라 적힌 피켓을 치켜든다. 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힘없이 쓰러진 그에게 승객들의 시선이 몰린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일어난다. "장애인들이 시위하는 거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포털 사이트에서 간단한 검색을 마치고, 이내 상황을 파악한다. 지연되는 지하철을 기다려도 보고 시위하는 그들을 이해해 보려 시도도 해 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출근 시간의 촌각을 다투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된다. 당장 내가 급한데, 거래처랑 미팅이 있는데, 아이가 혼자 기다리고 있는데, 어긋날 시나리오를 떠올릴수록 눈앞 상황은 그저 야속할 뿐이다.
- 시위를 시작한 지 수개월이 흐르고 지하철 지연이 거듭되면서 거침없이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기사에 가냘픈 혐오가 덧대진다. 나도 피해를 봤고, 너도 피해를 봤으니, '우리'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은 적이 되어도 마땅해지는 순간. 더 이상 그들이 왜 그런 시위를 벌이는지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지쳐가기 시작한다. 장애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그들은 그저 내 출퇴근의 루틴, 중요한 약속을 망쳐 버리는 대상으로 밀려나 버린다.
- 어느 날엔가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ㅇㅇㅇ 역은 무정차로통과한다는 내용의 속보였다. 시위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 지하철 바닥에 엎드린 이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선, '차단'과 '방치'를 대변하는 마음은 '무정차'라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의 대응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마음 읽기라는 인간의 본능과 역행 중인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힌트를 찾아보려 한다. 장애인 정책 선진국이라 불리는 일본, 휠체어를 탄 사람이 역사를 찾으면 직원이 와서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에 발판을 깔아준다. 일본의 저상버스 운행률은 서울과 비슷할지언정 휠체어 탄 모습들은 서울과 달리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접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 걸음이 느린 사람, 발목에 깁스를 한 사람, 보폭이 짧아 조금씩만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속도일 수 없는 세상이지만, 누군가의 기다림과 수고스러움, 번거로움이 존재해 준다면 결국엔 모두가 같은 길을 다닐 수 있다는 걸 그들은 보여 준다.
- 약 45년 전 일본 도심 한복판에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몸싸움을 벌였다. 1977년의 일본은 휠체어를 타면 버스 탑승을 거부하는 사회였다. 이에 항의하고자 장애인 단체 푸른잔디회와 지지자들이 버스터미널에 모여 장시간 버스를 점거했다. 대중교통을 타면 고요함과 친절함만이 가득한 지금 일본의 모습에선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일본에도 유리창이 깨지고 핸들이 부서지고 시민들은 시위대를 향해 욕하며 몸싸움을 벌이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 우리 또한 그 여정을 겪어 내는 중인 것일까. 서로의 방법이 옳고 그름을 고민하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돌려 버리는 이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는 방증, 마음이 불편하다는 건 인간의 본능인 마음 읽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길고 지난할 그 여정에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할까.
- 나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사람들. 혹시 나는 그 무리 안에 있다는 이유로 안심했던 걸까.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건네는 그의 눈길을 피해 말없이 시계만 쳐다보고 있던 나의 눈은 어디를 향해 있던 걸까.
- 2022년 말, JTBC <상암동 클라스>에 '인간관계 연말정산'이란 주제로 심리학자 김경일이 출연했다. 1년 동안 벌어들인 수익을 연말에 정산하듯 인간관계에도 연말정산이 있다면 어떤 접근을 해야 할지 말하는 자리였다. 그가 언급했던 내용 가운데 우리의 이런 고맥락 문화에 대한 피로감을 말끔하게 청산해 주는 현답이 있었다.
- 인간관계 연말정산 첫 번째 방법, 오로지 '나'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본다. 내가 남의 말을 안 듣는 성격이라면 '직언해 주는 사람'을 곁에 두되 '아첨하는 사람'을 끊어내야 한다. 반면 내가 남의 말에 휘둘리는 성격이라면 '강압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식이다.
- 두 번째 방법, '거짓말하는 사람'을 가려낸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이란 진실을 거짓되게 말하는 게 아닌 맥락을 없애고 필요한 말만 툭 던지는 경우나 자신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화법을 의미한다. 가령 축구나 농구 게임에서 공격수보다 수비수가 훨씬 지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격수는 수비수를 속여 가며 플레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의도를 보여 주지 않는 게 공격수의 역할인 셈인데,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야 하니 수비수는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뜻이었다. 즉 상대방의 의도를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다닐 경우 내가 훨씬 더 지친다는 것이다.
- 상대방의 "바빠?"라는 한마디에 듣는 사람은 '지금 보자는 건가' '내가 혹시 이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못 읽었나' '내가 너무 분주해서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나' '정신없이 허둥지둥 지나가느라 인사를 못했나' '부탁할 게 있나' 끝없는 경우의 수를 상상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빠?"라는 두 글자는 죄가 없다. 하지만 그가 질문의 의도를 한 줄 더 추가해 준다면 상대방은 훨씬 마음 편하게 대응할 수 있다. "바빠? 과제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괜찮으면 통화할까?" "바빠? 아까 사무실에 만나러 갔는데 바빠 보여서 그냥 돌아왔어." "바빠? 시간 되면 차 한잔 하자. 얼굴 본 지 오래됐네." 그저 한두 문장 더 적는 것으로도 상대방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 언어에 포함되지 않은 숨겨진 의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되기 마련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유추해 줄 때까지 기나긴 침묵을 유지한다거나 그간의 상황으로 파악해 주길 바라며 주어도 없이 동사만 툭 던지는 습관은 상대방의 에너지를 빼앗는 화법이다.
- 고맥락 문화가 일장일단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는 구석도 존재한다. 제아무리 좋은 번역기를 사용해도 전달될 수 없는 특유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한다. 때론 말의 부재가 훨씬 큰 위로로 다가오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니까.
- 이 모든 순간을 공감하고 있다면 그만큼 눈치를 볼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자잘한 장면들을 곧잘 파악해 낼만큼 섬세한 시선을 가졌다는 의미다. 눈빛, 목소리 억양, 실룩거리는 입가의 근육, 희미하게 변화하는 표정의 순간순간을 읽어 낼 만큼 인지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능력을 지닌 이상 위축될 필요도, 주눅 들 필요도 없다. 이미 능력자라는 방증이니까.
- 기실 눈치란 가치중립적인 단어다. 그러니 눈치란 타인을 위해서, 분위기를 위해서,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서 가장 쓸모 있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본능이자 감각이라는 걸 받아들여 본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해 본다. 나 눈치 좀 보는 사람이라고. 가끔 많이 볼 때도 있지만, 그만큼 감각이 좋은 것이니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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