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마키메 마나부]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일루젼 2024. 6. 2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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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키메 마나부 / 이규원

출판 : 노블마인

출간 : 2009.03.20


       

와. 표지만 보고 읽고 처분할지 그냥 처분할지 고민했었는데, 놓쳤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 -사실 놓쳤다면 어차피 계속 모른 채로 살았을 테니 이런 가정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지만-

 

'호루모'라는 단어가 낯설게 다가오지만, 사실 <로맨틱 교토 호루모>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호루모'가 아니라 '로맨틱'이다. 

프롤로그까지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단편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모든 단편에 공통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바로 '호루모', 교토를 중심으로 한 비밀스러운 '귀전(鬼戰)'이다.

 

유서 깊은 네 대학에는 각각 현무, 주작, 백호, 청룡의 상징을 가진 동아리가 존재한다. 이전까지 일반인(?)이었던 학생들이 어떻게 귀신을 보고 다루게 되는지는 이 작품 안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2, 3학년에 되어 다른 대학과의 전투에 참여하게 되면 귀어(鬼語)를 사용해 1인당 100마리의 귀신을 부리게 되는데, 수하 귀신들이 전멸하게 되면 반드시 '호루모!'라고 항복 선언을 외쳐야 한다는 설정이다. 

이후로 졸업을 하게 되면 더 이상 귀신을 부리지는 않는 것 같지만, 한 번 보게 된 귀신은 계속 볼 수 있는 모양이다.

 

각각의 단편은 공통된 시간선을 가지기도 하고, 한 편 안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은 건 <연애편지와 레몬>, <나무 궤 사랑>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노래 '레몬'이 요네즈 켄시의 곡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연결해 버리는 것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다. <나무 궤 사랑> 같은 경우는 <낙원>과도 유사한데, 당 시대에 대유행했던 '돌고 돌아 만나는 전세의 인연'을 다룬 단편이다. 

 

아직 본편에 해당하는 <가모가와 호루모>를 읽지 않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안에서의 호루모는 마치 '백귀야행을 P2P가 가능하게 게임화' 한 듯한 모양새다. 하지만 건포도를 먹으면 다시 '뿅!'하고 튀어나오는 주둥이라거나, '피용'하고 사라지는 손바닥만 한 검은 4등신 체형은 아무래도 공포스럽기보다는 귀여운 쪽에 가깝다.   

 

즐겁게 읽었고, 계획엔 없었지만 동 저자의 <사슴 남자>와 <가모가와 호루모>를 이어서 읽을 계획이다.

언제나와 같이, 또다시 증식하게 되었지만...

행복하니 됐다.      

   


   

 

프롤로그 : 아마도 가장 최근일 '500대 호루모'에서 청룡회로 활동 중인 다카무라와 '나'가 일반인들에게 '호루모'가 어떻게 보일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모가와 (소)호루모 : 현무파의 주축이었던 두 명의 여성, 양대 시즈카 간의 비공식 호루모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은 <도시샤대학 황룡전>과도 이어지니 눈여겨 볼 것. 


로마풍 휴일 : 수록작 중에서는 '호루모'가 가장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단편. 아무래도 구스노키는 <가모가와 호루모>에서 활약을 보여주는 인물일 것 같다.


연애편지와 레몬 : 과거 아베와 현재의 아베가 동시에 등장한다. <프롤로그>에서 등장했던 '나'가 아베로, 가지이 모토지로라는 실존 작가와 연결지은 것도 그렇지만 수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 부분과는 완전히 별개로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다는 점도, 묘하게 순문학 느낌이 나는 것도 호.


도시샤대학 황룡전 : 아시야 미쓰루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단편. 이전까지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전(四神戰)이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에 더해 다시 한 번 시즈카들의 '호루모오오오오오오-!'를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마루노우치 정상회담 : 한 번 회장은 영원히 회장일까? 황금연휴를 앞두고 급히 잡힌 미팅에서 조우하게 된 네 명. 용호상박이 더 익숙하지만, 현무와 주작 또한 유서 깊은 라이벌 관계다. 창이냐 방패냐로 팽팽하게 이어가던 긴장감은 느닷없이 전개된 사방진으로 끝을 맺는다. 피용. 피용.

 

나무 궤 사랑 : <도시샤대학 황룡전>의 아시야 미쓰루가 에이스로 언급되어 조금 당황스럽다는 점만 빼면, 아주 취향인 단편이었다. 정사(正史)의 길을 살짝만 벗어나도 무궁무진하게 흥미로운 야사(野史)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다 노부나가 같은 경우는 수많은 작품들에서 다루는 인물이다. 여기서는 그 수하 중 한 명인 가시와바라 오오나베라는 인물과 '나가모치'라는 나무 궤를 통해 시간을 뛰어넘어 필담을 나누는 다마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당신은 꿈 세상에 있는 것입니까?
꿈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언젠가는 당신 앞에 나타나겠습니다.
당신이 알아볼 수 있게 표식을 달고 나타나겠습니다.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부디 당신도 나를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호루모 horumo
일본 교토에 천 년에 걸쳐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경기. 교토대학, 리쓰메이칸대학, 교토산업대학, 류코쿠대학의 4개 호루모 동아리에서 각기 10명의 회원이 출전하여, 1인당 귀신 100마리를 부려 경기를 치른다. 귀신을 부릴 때는 귀어(鬼語)를 사용하며, 매 전투는 두 동아리가 맞붙는 형식으로 치른다. 승부는 주로 동아리 회장의 항복 선언으로 갈린다. 단, 전투에서 누구든 자신이 부리는 귀신 100마리가 전멸하면 '호루모오오오오오-!' 하고 고함을 내질러야 한다. 

- 호루모 귀신
몸길이 약 20센티, 얼굴과 몸뚱이의 비율은 대략 1대 3. 특별한 의식을 치른 호루모 동아리 회원들만 볼 수 있으며,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 한가운데 꼭 오므린 채 튀어나온 '주둥이'가 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넝마를 걸치며, 전투 때 무기로 쓰는 몽둥이나 갈퀴를 넝마 속에 넣고 다닌다. 적의 공격을 받으면 주둥이가 점점 들어가는데, 완전히 매몰되면 '뽀로'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전에 건포도를 주둥이에 넣어주면 주둥이가 뿅 하고 튀어나오며 기력을 회복한다. 

 



 
- "아무래도 신문에서 요즘 대학에 이상한 종교 동아리가 극성이라는 기사를 읽고 걱정되셨나 봐."
"그러시겠네. 그래, 뭐라고 대답했는데?"
"아실 것 없다고 가르쳐드리지 않았지.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교토대 청룡회라는 곳에서 호루모를 해요' 하고 말하겠냐."
 
- 나는 넓적한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고 나서, 들고 있던 밥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는 뚱한 표정으로 다카무라도 덮밥을 휘젓던 젓가락을 뚝 멈추었다. 
"잘 들어,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원하시는 건 진실이 아니야. 안심하시는 거라고. '공부 말고는 흥미가 없어서 동아리 활동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가입한다고 해도 근처 노인분들과 게이트볼이나 하는 모임들이에요'라고 하든가 '철도 모형 만드는 일에 미쳐서 일주일 내내 방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라고 적당히 둘러댈 수 있잖아. 안 그래?"

- 참으로 명쾌한 모범 답안을 알려주었건만 다카무라의 표정이 여전히 마뜩잖았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부모님께 그런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거든."

자못 의젓한 표정으로 다카무라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 "현실을 외면하지 마, 다카무라. 우리는 이미 버린 몸이야. 호루모 마굴에 발목 잡힌 지 어언 3년. 신입생을 꼬드겨서 차세대 희생자를 만드는 짓에 이젠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잖아. 귀신 무리를 봐도 감흥이 없어서 차라리 서글플 정도 아니냐? 남들 눈엔 뵈지도 않는 그 요상한 것들이 발밑에 정렬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을 수 있잖아. 까만 벌레가 긴 더듬이를 움직이며 주방을 제집인 양 돌아다니는 걸 보고 놀라서 소리 지르는 나 자신이 가끔 우스울 때가 있어 위험하기로 따지면 누가 봐도 귀신이 더하니까." 
그러자 역시 반론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다카무라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덮밥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남은 밥을 입 안에 쓸어 넣으며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좀 잘 설명드릴 수 없겠냐?"
"설명? 어떻게? 호루모 규칙이라도 조목조목 친절하게 해설해 드리랴? '양 팀에서 귀신을 천 마리씩 끌고 나와서 교토 시내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거예요. 교토대학 청룡회, 리쓰메이칸대학 백호대, 교토산업대학 현무파, 류코쿠대학 피닉스에서 각각 500대 회원들이 겨루죠.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경기지만 귀신이 전멸해 버리면 조금 곤란한 일이 벌어져요.' 이렇게? 아서라, 얘기해 봐야 공연히 불안감만 부채질하지. 애당초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귀신이 보이지도 않잖아. 인간은 결국 제 눈으로 본 것만 믿게 돼 있어. 네가 호루모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봐. 내가 너한테 '동아리에서 이런 걸 합니다' 하면서 불쑥 호루모를 설명하면, 너라면 믿겠냐?"

 

- 다카무라는 바닥을 드러낸 밥그릇 안쪽을 하릴없이 젓가락으로 휘젓다가 맥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믿지."
"그렇지? 세상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골이 있어. 그 골을 메우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나는 애초에 메울 필요도 느끼지 않아."
다카무라는 잠자코 젓가락과 밥그릇을 내려놓고 요구르트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도 이제는 김을 올리지 않는 기시멘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 <프롤로그>



- 누군가는 양대 시즈카의 거침없는 용맹함을 겐페이 전투(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낳은 12세기 지쇼. 주에이의 난 - 옮긴이)에서 활약한 여자 무사 도모에 고젠에 비유하며 요란하게 칭송했다. 또 다른 이는 양대 시즈카의 깊은 우정을 옛날 관중과 포숙아, 염파와 인상여(춘추시대 인물인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은 '관포지교', 전국시대 염파와 인상여의 우정은 '문경지교'라 하여 돈독한 우정을 대표하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 옮긴이)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평했다.

- 그런데 셋이 아니어도 양대 시즈카는 늘 시끄럽다. 양대 시즈카(靜)라는 제법 세련된 별명을 얻어놓고도 실제로 조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양대 시즈카는 늘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예를 들어 양대 시즈카가 한자리에 있을 때 수다가 끊긴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히에이잔 산허리가 아침 햇살을 받을 때까지 두 시즈카는 지치지도 않고 수다를 떨어댔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몸 안에 독이 쌓인다'라는 것이 양대 시즈카가 내세우는 으뜸 구호였다. 그 독이 묻은 화살은 온갖 방향으로 발사되었다. 지루한 대학 강의,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점장의 꽉 막힌 성격, 신문 판촉원의 막무가내 강매, 기타야마 카페들의 터무니없는 홍차 값. 그중에서도 화살촉이 특히 예리하게 번뜩일 때가 있었다. 그녀들이 토해 낸 독이 유독 가스가 되어 방 안에 똬리를 틀 때가...

- 기타야마의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눈이 한번 내리면 길가에 한참 동안 쌓여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파트를 나서다가 가로수 밑동 곁에 쌓인 눈을 보고 쇼코가 중얼거렸다.
"꼭 우리 같네."
본래는 아름다운 흰빛을 자랑했을 눈이 그을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지저분해진 채 처치 곤란한 쓰레기인 양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 꼴을 내려다보던 사다코가 앞으로 한 발 나서서 부츠 끝으로 눈더미를 냅다 걷어찼다. 눈덩이들이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지며 날아올랐고 깨진 단면에서 결이 거친 얼음 알갱이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파트 주인이 현관에 설치한 네온등이 부서진 눈덩이 단면을 붉은빛과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 '뭐야, 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하잖아.'
쇼코의 말을 빌리자면 이 여학생은 자기 속은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표정과 목소리, 말투, 행동거지가 전부 가짜였다.
쇼코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들이 왜 이런 여자를 에워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학생의 별것도 아닌 대답 한마디에 박장대소하는 남학생들을 보면서 쇼코는 뒤통수를 꽝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느꼈다. 여자가 이렇게 명명백백한 거짓말을 해도 옆에 있는 남자들은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여자도 그런 상황을 빤히 알면서 거짓말을 꾸며댄다는 것을 깨달았다. 쇼코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그런 거였어?" 하고 허탈하게 자문하고 말았다. 

- 사실 이때 쇼코 앞에 있던 소녀가 어느 정도까지 자각하며 행동했는지는 판단하기 힘들 것이다. 여자는 유치원 시절부터 여자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 소녀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쇼코와 비슷한 환경에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갑자기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뜻하지 않게 자신의 값어치를 알아버린 순간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여자'가 깨어났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쇼코는 무리에서 벗어나 비칠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머리 모양이 이상한 남학생이 어색한 동작으로 옆자리에 앉아 쇼코가 통 알아듣지 못할 만화와 탱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쇼코는 웃음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래요?" 하며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뜨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사다코는 도시샤대학에 다니는 이치조와 한큐 백화점 1층의 세계지도 앞에서 만나 바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았지만 잠자코 스크린만 쳐다보는 것이 왠지 아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둘은 기온의 가기젠(18세기 초에 창업한 교토의 유명 전통과자점 - 옮긴이)에 가서, 반투명 칡묵에 흑설탕 시럽을 발라 쪼록쪼록 소리를 내며 빨아먹었다.

- 비에 젖은 강변에는 나란히 붙어 앉은 연인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찾아온 인기척 없는 강변을 바라보며 사다코는 '여기야!'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다코는 귀어로 조용히 '전개' 명령을 내렸다.
검은 넝마를 걸친 귀신 100마리가 사다코와 이치조를 에워싸듯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 마지막으로 떨어진 귀신 두 마리는 물속에서 손을 뻗어 올려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버둥거렸지만 탁류에 맥없이 삼켜지고 말았다. 그 귀신 두 마리가 소리도 없이 가모가와 강변의 쓰레기처럼 사라질 때 두 사람의 몸에 '그것'이 찾아왔다.
나중에 양대 시즈카는 이렇게 증언했다.
귀신이 전멸하면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는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규 호루모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라고.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것이 몸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를 때 쇼코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언뜻 스쳤다.
'그러고 보니 훈련 때 기요모리 선배가 부하 귀신들이 전멸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
다음 순간 시조대교 한가운데에서 빗소리도 강물 소리도 버스 소리도 몽땅 뒤덮어버릴 기세로 양대 시즈카의 고함이 작렬했다.
"호루모오오오오오오-!"

 

- <가모가와 (소)호루모>

 


- 세 남자를 올려다보며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나는 그녀가 이제 어떡하면 좋으냐고 걱정하는 소리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런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몇 초가 필요했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그녀가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풍기는 정체 모를 위엄에 눌려 아르바이트생들은 지시대로 순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 길로 매니저 자리에 들어선 그녀는 주방 사람들과 잠깐이야기한 뒤 '오늘의 추천 요리'라 적힌 칠판에 분필로 글자를 적어 넣었다.
"구, 구스노키 씨가 매니저를 맡나요?"
"응."
분필을 움직이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요. 이런 게 어딨어요. 구스노키 씨는 근무한 지 2주밖에 안 됐잖아요. 더구나 오늘은 스무 명짜리 단체손님 예약까지 있는데."
"그럼 누가 할 건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주방과 홀을 연결하는 매니저 일을 해본 사람이 없었다. 보통은 점장이 맡고 점장이 없을 때는 최고참 직원이 담당했다. 

- "그럼 잘 부탁해."
그녀가 내민 칠판에는 언제 익혔는지 메뉴가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었다. 물론 옆에 일본어도 병기해서.
"괜찮아, 그동안 잘 봐두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에게 처음 보여준 웃음이었다. 왼쪽 볼에 희미하게 보조개가 됐다. 커다란 안경알을 빛에 반사하며 그녀는 짤막하게 선언했다. 

"그럼 시작해, 소년."

- 그날 기타시라카와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Ann's cafe'는 아무 탈 없이 조용했다.
마치 점장이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아니 점장이 있을 때보다 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8시가 되자 총 50석이 거의 다 찼다. 밝은 소란에 휩싸인 채 'Ann's cafe' 직원들은 문을 닫는 11시 30분까지 바쁘면서도 완벽하게 통제된 시간을 보냈다.

- 그날 저녁은 모든 일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거의 꽉 찬 테이블들에서 쉴 새 없이 주문이 날아들어도 그녀는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하게 지휘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임을 여기 직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홀 담당은 그녀가 전표를 내밀며 손으로 가리키는 쟁반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왕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매니저 자리에 가보면 인원수에 맞게 개인 접시까지 준비된 쟁반 위에, 가까운 테이블 순서대로 요리와 음료가 차려져 있었다. 점장이 지휘할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홀 담당은 그저 전표에 적힌 대로 가까운 테이블부터 순서대로 요리를 내가고 쟁반이 비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틈틈이 홀을 살펴보고는 각 테이블에서 주문한 요리가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지 점검했다. 열 개가 넘는 테이블을 살피고 조리 시간까지 계산에 넣어 주문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주방에 있는 요리사 세 사람의 작업 속도까지 계산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식당 한구석에서 그녀가 말없이 시간을 보낸 의미를 이해했다. 

- 요리가 완성되는 속도가 예상보다 늦어지면 그녀는 홀 담당을 불러서 음료 주문을 받으며 시간을 벌라고 했다. 역으로 주방에서 작업 속도가 예상보다 빠를 때는 접시에 담긴 요리가 빈 테이블을 재빨리 찾아내고 다음 요리를 내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냉정한 그녀의 목소리는 어제까지 본 그녀와는 생판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두 그녀의 지시대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가 잡은 지휘봉에 따라 주방 사람들과 홀아르바이트생들, 심지어 술과 요리까지 모든 것이 혼연일체로 'Ann's cafe의 밤'을 연주했다. 

- 나는 인사한 뒤 스쿠터 시동을 걸었다.
시라카와 거리 이마데가와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녀가 왜 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을까 새삼 돌이켜보았다. 마치 저기에 무엇이 버티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는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순간 그 일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시곗바늘이 벌써 오전 1시를 지나려 하고 있었다. 
'이런 부모님한테 한소리 듣겠는걸.'

나는 단단히 각오하고 핸들을 잡았다.
 
- "잠깐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어딘데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녀는 킁, 하고 콧소리를 내고는 이제야 햇살이 수그러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염라대왕 앞."
그녀의 말에 따르면 기온 남쪽에 예로부터 염라대왕이 있는 저승으로 연결된다고 전해 내려오는 우물이 있다고 했다. 

 

- "좀 뜻밖이네요."
차가 많이 지나다니는 좁은 길을 빠져나가며 뒤쪽을 향해 내가 말했다.
"뭐가?"
"구스노키 씨는 그런 데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요."

 
- 그녀는 맥 빠진 듯한 소리를 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심이 많고 적고 하는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학교에서 연구라도 해요?"
"그렇다고나 할까."
역시 맥없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무리 그래도 수학과에 서 염라대왕을 연구할 리는 없었다.
"혹시 그쪽 방면의 동아리?"
그렇게 물으면서 나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뭐, 그런 셈이지."

- 겐닌지 앞을 지나 잠시 자전거 페달을 밟자 붉은 칠을 한 대문 앞에 다다랐다. 문기둥에 '로쿠도친노지(六道珍皇寺)'라고 붓글씨로 쓴 목판이 걸려 있었다. 자전거를 멈추고 문 바로 앞에 있는 안내판을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정말로 터 안에 저승으로 가는 문으로 알려진 우물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 "근데 구스노키 씨, 우물 앞에선 진짜 놀라던걸요. 그런 일이 일어날 리도 없는데."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녀는 겸연쩍음을 감추려는지 필요 이상으로 뚱한 표정인 채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옮겼다.
"혹시 구스노키 씨는 그 우물이 정말 염라대왕과 연결된다고 믿었나요?"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않나?"
"저어... 구스노키 씨는 이과생 맞죠?"

- "물리나 수학 같은 걸 전공하는 사람은 보통 그런 걸 오기 때문에라도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스푼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마 그 반대일 것 같은데."
"왜요?"
"물리나 수학 세계에는 아무도 증명한 적 없어서 애초에 실재하는지 어떤지도 확실치 않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 주위에서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거니까 연구해 봐야 소용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데도 말이야. 그런 사람들이 하려는 것도 어쩌면 염라대왕을 만나려는 것과 같은 일인지 몰라.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존재를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개중에는 정말로 발견하고야 마는 사람이 있어. 있을 리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마 그런 사람은 염라대왕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스로 확신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빈 컵에 스푼을 내려놓았다.

-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다는 것을.
빨간 신호가 몹시 흔들렸다. 왠지 콧등이 따가울 정도로 시큰거렸다. 당황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둥근달이 둥실 떠 있었다. 고요하게 떠오른 하얀 덩어리를 보며 '이럴 때는 아니야, 달은 아니야' 하고 마음이 울었다. 
신호는 초록으로 바뀌고 나는 기타야마 거리로 들어섰다. 다카라가이케 상공으로 달이 하염없이 따라왔다. 


- <로마풍 휴일>



- 가모가와 강물을 바라보면서 발치의 풀잎을 손가락 끝으로 희롱하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의 식물들이 초록빛을 띠는 것은 엽록소를 함유하기 때문이다. 엽록소는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한다. 덕분에 식물은 에너지를 얻어서 이렇게 푸릇푸릇하게 자란다. 해님에게 화사한 빛을 받는 덕분에 이것들은 지금 배가 잔뜩 불러서 산들바람에 몸을 건들거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화가 치미는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 나는 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귓가에서 날벌레가 앵앵거렸다. 강가에 차락차락 쏠리는 강물 소리가 자동차 소음을 멀찌감치 떼어놓았다. 풀냄새에 휩싸인 채 나는 자문했다. 
똑같은 햇빛을 받는데 왜 풀이란 놈들은 배가 부르고 나는 이렇게 허기가 질까?
대답은 간단했다. 내 몸에는 엽록소가 없기 때문이다.
풀잎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도 엽록소가 있다면 이렇게 강변에서 따뜻한 햇볕에 싸여 졸음을 탐하기만 해도 나는 하루하루 에너지로 충만할 수 있겠지. 아아, 얼마나 멋진 일이냐. 나는 온종일 이렇게 느긋하게 해바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허기진 배는 가득 채워질 것이다. 매월 학비가 입금되기 전마다 겪어야 하는 이 허기도 영원히 안녕이리라. 

- 그런데 잠깐.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정말로 몸속에 엽록소를 갖춘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지? 당연히 몸뚱이도 풀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건 흡사 갓파(주로 물가에 산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전설 속 요괴 - 옮긴이) 모습이 아닌가.
"갓파라..."

나는 눈을 감고 인간이 몸속에 엽록소를 넣어서 갓파가 되는 세계를 상상했다. 점심시간이면 사람들은 일광욕을 하러 건물 밖으로 몰려나온다. 광합성 효율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모두 옷을 벗는다. 초록으로 변한 벌거숭이 사람들이 가모가와 강변에 뒹구는 풍경은 흡사 성냥개비가 정렬한 듯한 광경일 것이다. 강변을 따라 시조(四條), 고조(五條), 시치조(七)까지 이어지는 초록색 나무토막들. 후후후, 정말 기분 나쁜 풍경이겠군. 

- "뭘 그렇게 혼자 히죽거리냐? 기분 나쁜 놈 같으니.”
불쑥 목소리가 쏟아져 내려와 나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모자를 눈까지 눌러쓴 부들 같은 얼굴이 뒤집힌 채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모짱!"
나는 당황해서 윗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코앞을 지나다니는데도 혼자 히죽거리더군. 보나 마나 또 쓸데없는 공상에 빠져 있었겠지."

- "무슨 섭섭한 말을, 쓸데없는 공상이라니. 인류에게 참으로 의미 깊은 공상인데."
"그럼 말해 봐라. 내가 판단해 줄 테니."
"평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했지. 이것만 실현되면 온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질 거다. 비좁은 땅이나 자원, 사소한 것 때문에 아옹다옹하는 짓이 아주 우습게 될 거야." 

 

- 하지만 아무리 우락부락해 보여도 모짱은 섬세한 사내였다. 내 방에 놀러 와도 혼자 말없이 책을 읽거나 노트에 그림을 그릴 때가 많았다. 모짱은 공학을 전공하므로 제도 숙제라도 하나보다 생각하며 들여다보면 대개 당구를 연구하고 있었다. 모짱은 당구 실력이 뛰어나서 나도 몇 번 내기당구를 했다가 푼돈을 빼앗겼다.
"당구로 깨달음을 얻고 싶거든."
종종 영문 모를 원대한 목표를 내세웠지만, 그 뒤 모짱의 연구가 열매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 한편 악보를 가져다가 열심히 들여다보기에 뭘 그렇게 폼을 잡느냐고 놀리자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카르멘>을 부르기 시작한 적도 있다. 정말로 악보를 볼 줄 아는지, 베토벤 교향곡을 혼자서 열심히 흥얼거렸을 때는 정말이지 말문이 막혔다. 녀석은 "소리는 색이야"라고 종종 말했지만, 모짱의 뇌리에서 반짝일 선명한 색채를 그의 연주에서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온몸에서 주체 못 할 에너지를 발산해 놓고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좋은 책과 좋은 악보만 있다면 나는 만족해."
그 동과 정의 신비한 조화가 모짱이라는 남자의 정수였다.

- 모짱은 산조, 시조, 가와라마치 외곽 지리에 이상할 만큼 밝았다. 모짱이 열렬한 '골목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종횡무진으로 얽히고설킨 갈림길들을 지나다가 낯선 골목을 발견하면 모짱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이쪽이야, 이쪽" 하며 등을 구부리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골목을 지날 때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오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 실제로 좁은 골목 끝에 난데없이 음식점 문살문이 나타나거나 더 안쪽으로 골목이 또 이어지거나 지장보살 사당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등 교토의 골목들은 신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는 모짱이 품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아마 그런 불안마저도 모짱에게는 흥분의 소재일 것이다. 모짱은 '여기에는 없는 분위기'나 '여기에는 없는 느낌' 같은 것을 아주 좋아했다. 평소 익히 보던 것이 전혀 다른 무언가로 느껴지는 순간을 그 좁은 눈으로 열심히 찾았다.
그것이 눈으로 오든 귀로 오든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모짱은 '언어를 외국어처럼 듣는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 예를 들어,
"오늘 날씨 좋군요."
하고 누가 말하면,
"오늘날씨조쿤뇨."
하고 굳이 다르게 끊어서 들었다. 그러면 일본어를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일본어가 중국어나 한국어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지."
모짱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발상과 행동은 나로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 책상 위에 흩어진 버려진 종이 가운데 한 장을 골라잡으려고 하자 험악한 얼굴로 녀석이 내 손을 뿌리쳤다. 부석부석하게 부어오른 눈꺼풀 밑에서 아주 무서운 시선이 날아왔다.
"알았다, 알았어. 안 볼게."
나는 항복한다는 뜻으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어려운 글은 곤란해. 알기 쉽고 가슴을 울리는 글이어야 한다고."

 

- 내 처지는 까맣게 잊고 엉터리 충고를 하면서 방석에 엉덩이를 올려놓을 때 문득 모짱 발치에 놓인 레몬이 보였다. 레몬은 어느새 접시 위에 두 쪽으로 잘려 있었다. 손을 뻗어 한쪽을 집어 들고 코에 대보았다. 과즙이 흐르는 싱싱한 단면에서 새콤달콤하고 귀족적인 향기가 났다. 조금 핥아본 순간 쓰디쓴 신맛이 혀를 찔렀다. 향기에는 있는 단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이 이상했다.

 

- 7월 16일, 거리는 한낮부터 마쓰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업무차 외부를 돌아다니던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무로마치 거리 록카쿠에 있는 전통과자점 샤쿠리에 갔다. 그곳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쓰게토' 아저씨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점을 사과하고, 그가 내준 호지차를 마시며 다니는 회사 이야기를 비롯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셋이라고 말하자 쓰게토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아베도 새파란 젊은이였는데."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때 문이 열리며 하얀 유카타에 학생모를 쓴 청년이 급히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리쓰메이칸에 다니는 이즈미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뒤 청년은 노인에게서 연회 장소를 전달받았다. 문득 청년의 유카타로 시선을 돌리니 검은 선으로 호랑이를 그린 하얀 천이 등에 붙어 있었다.
"아, 그렇군. 오늘은 전야제니까 시조가라스마에서 그게 있던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자 청년은 당황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초리를 던졌다. 하지만 내가 짧게 귀어를 말하자 이내 안심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요즘은 무슨 호루모를 하나?"
"야세 호루모입니다."
"아주 차분한 놈들을 데려왔군."
내가 웃으며 말하자 청년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시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가슴 앞에 학생모를 꼭 구겨 쥐고서 청년은 노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로?"
"요즘 용돈이 궁해서 시계를 전당포에 잡혔어요. 오늘 저녁 시조가라스마에서 제가 술시(오후 8시) 선언을 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친구한테 시계 빌리기도 부끄럽고... 그러니 오늘 저녁만 빌릴 수 있을까요?"

- 그렇다. 나는 모짱과 약속한 대로 쓰레기통에 버린 편지지에는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연애편지는 읽었다. 모짱이 읽지 말라고 한 것은 버린 편지지뿐이었다고 억지 핑계를 댈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짱의 연애편지는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난 글이었다는 사실이다. 편지지에는 한 청년의 진실한 마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 격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에 나는 그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 여학생이 그 편지를 받았다면 모짱의 사랑은 다른 결말을 맞았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모짱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까? 계기가 사라져도 모짱은 언젠가 원고지 앞에 앉아 펜을 들었을까? 엔지니어를 꿈꾸며 이과계에 입학한 모짱이 진로를 백팔십도 바꿀 만한 동력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었을까? 한편, 모짱이 문학계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 이렇게 '만약'이 쳇바퀴 돌듯 거듭되기 시작하면 내 머리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커다란 흐름 같은 것 앞에서 오로지 왜소한 나 자신을 확인할 뿐이었다. 다만 모짱의 작품은 앞으로도 영원히 세상에 남을 것이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매년 신문에서 기온마쓰리 기사를 읽을 때마다 나는 노인에게 맡긴 시계를 생각했다. 나와 모짱의 추억은 지금도 누군가의 품에서 흔들리면서 마쓰리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까?

- "가지이 모토지로(1901~1932. 소설가 - 옮긴이)는 평생 단 한 권의 책밖에 펴내지 않았어."
"그래?"
"작품의 무대가 된 마루젠 교토 가와라마치 분점이 문을 닫기로 결정했을 때 모두 가지이 모토지로의 책을 사러 오는 통에 폐점 직전 일주일 동안 문고본이 무려 천 권이나 팔렸다더군."
"호오, 거참 대단하네."
"마지막 날 영업시간이 끝나고 점원이 정리 작업을 시작하자매장 여기저기에서 손님들이 몰래 놓고 간 레몬들이 발견되었대. 하나같이 계산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 살짝 놓고 갔다는 거야. 몇 개나 있었을 것 같아? 전부 100개가 넘었다더군.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있나, 아베?" 
노래 목록을 들춰보는 내 옆에서 다카무라가 꽤 불만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길도 막히니까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시야네도 모임 장소로 향하고 있을 테니까. 그럼 이걸 마지막 곡으로 할까? ... 그런데 아까 가지이 모토지로의 책 제목이 뭐랬지?"
"교토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쯤은 상식인데."
기죽이는 말부터 꺼내놓고 나서 다카무라가 책 제목을 일러주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노래 번호를 눌렀다.

- 전주가 시작되자 나는 손에 쥔 회중시계를 목에 걸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가사는 볼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 다 입력돼 있으니까.
물론 노래 제목은 두말할 것도 없이 '레몬'이었다.

- <역자 주> 이 작품은 가지이 모토지로의 <레몬>을 패러디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결핵을 앓는 '나'는 내내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시달린 탓에 예전에 관심이 많던 음악이나 시, 문구점 마루젠에 대한 흥미를 잃은 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가 평소 자주 찾던 데라마치 거리의 청과물 가게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 가게에 드물게도 레몬이 진열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레몬을 하나 산다. 결핵으로 미열을 띤 손바닥에 그 과일의 차디찬 기운이 매우 흡족하게 느껴져 그때까지 시달려온 불안감도 얼마간 완화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동안 멀리해 온 마루젠에 들렀지만 '나'는 다시 불안감에 빠진다. 평소 아끼던 화집을 들춰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데 불만을 느낀 '나'는 화집을 쌓아 올린 책더미 위에 시한폭탄처럼 레몬을 올려놓고 마루젠을 나선다. 그리고 '나'를 불안에 빠뜨린 다양한 것들이 폭탄으로 상정한 레몬에 의해 폭파되는 모습을 떠올리며 홀로 흥분한다. 

 

- <연애편지와 레몬>



- 나는 태풍을 만나 한차례 비를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고양이 등 같은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1년 만의 재회가 끝나고 손바닥 안에서 열쇠가 땀에 젖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신 백화점 종이봉투를 껴안고 5층으로 향했다. 서고 문을 열자 묵은 책 냄새가 몸을 휘감아왔다. 이내 근질근질해지는 콧등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오른쪽 서가 앞으로 갔다. 

- 허리를 살짝 굽혀 안을 들여다보니 아주 오래돼 보이는 빛깔의 나무상자 표면에 굵은 선으로 십자 표시와 그것을 에워싼 원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서가 전체를 눈으로 훑었다. 어디나 책으로 꽉 들어찬 가운데 그곳만 텅 비어 서적의 긴장감에서 격리된 인상을 받았다. 학회 자료와 <유레카> 과월호 사이에 몸을 웅크린 것 같은 나무상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나는 둥근 십자표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손이 상자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 '이게 뭐지?'
상자 속에 든 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오래된 책이나 서류가 나오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노란 유카타가 개켜져서 담겨 있었다. 과연 아주 오래돼 보이고 여기저기 좀이 슬어 전체적으로 희미하게 바래 있었다. 
목깃 부분을 만지자 까칠까칠한 천이 느껴졌다. 살짝 눌러보니 포개진 목깃 아래에서 파락, 하는 희미한 소리가 났다. 손을 집어넣자 뭔가 매끄러운 것이 느껴졌다. 끄집어내 보니 완전히 갈색으로 변색된 기름종이 뭉치 같은 것이 나왔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아주 가벼웠다. 얇은 천이라도 싸놓았나 생각하며 종이 한쪽을 잡고 살짝 들춰보았다. 
'이건 또 뭘까?'
종이 안쪽에 든 것은 편지였다.

- 우체국에서 나오던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멈춰 섰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넌 남자는 다시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섰다. 나도 마찬가지로 신호 대기.
남자 바로 뒤에 서서 나는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은 왜 촌마게 같은 걸 했을까?'

- 바로 뒤에서 보는 덕분에 잘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가발이 아니라 진짜 촌마게였다. 상투가 바짝 곤두서지 않은 것이 제법 자연스러워 보였다. 갓 면도를 했는지 머리 뒤에 드러난 피부가 하도 파르스름해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목 아래쪽만 보면 체크무늬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로 특별히 주목할만한 점은 없었다. 셔츠를 청바지 속에 넣어 입은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얼굴을 봐도 하얀 피부에 자못 상냥한 인상이었다. 그렇듯 어디를 봐도 평범한데, 단 하나 머리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자 남자와 함께 나도 걷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남자는 교토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시선을 조금 내린 채 대학으로 잠입했다. 

- "요전에 야마부키가 말했잖아. 상자에 원과 십자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고. 그거, 사쓰마 번을 나타내는 거야. 전에 드라마 <신선조>를 봤어. 그 표시도 나왔지." 
"오호!"
감탄하는 나에게 우는 계속 말했다.
"게다가"
"응? 뭐가 또 있어?"
"'ishin'이라는 단어가 있었잖아."
"응, '이신전'이라고 여러 번 나왔지. 뭐? 그 의미도 알아?"

"그건 아마 메이지유신을 말하는 게 아닐까?" ('유산'의 일본어 발음은 '이신' - 옮긴이)

- "그럼 야마부키도 'horumo'라는 경기를 모르는 건가?"
"어, 응. 들어본 적도 없어. 싱가포르에서는 어때?"
우는 고개를 저었다.

- 우산 밖으로 팔을 뻗어 난간에 손을 얹었다. 젖은 난간은 섬뜩하게 차가웠다. 어느새 가슴의 박동도 진정되었다. 그래도 녀석 얼굴에 아이스라떼를 뿌린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손등을 때리는 빗방울의 감촉이 느껴지다 멀어지다 했다. 그런 느낌이 몇 번 반복되다가 문득 ‘호루모 황룡진-부활의 3가지 조건'이 떠올랐다. 
'황룡진의 증거를 가지고 신사를 방문한다.'
'그의 것을 부리는 자와 함께 신사를 방문한다.'
그다음 세 번째 조건은 이랬다.
'그날 밤 그의 것을 가모가와 강에 기둥으로 바친다.'
가모가와 강에 '그의 것'을 제물로 던지라는 말일까? 어딘지 요란하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는 일이었지만, 설마 오늘 밤 내가 모르는 그의 것'이 우연히 가모가와 강에 떠내려갈 리도 없고. 

- 나는 가방에서 네 번 접은 '3가지 조건' 쪽지를 꺼내 시조대교 난간에서 가모가와 강으로 던졌다. 언뜻 강물을 들여다보았을 때 타원형의 검고 커다란 물체가 둥실 떠 있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곧 다리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음은 조금 진정되었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 녀석 얼굴뿐. 녀석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오만한 놈의 썩어빠진 근성을 늘씬하게 패줄 수 있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 문득 지난번 도서관에서 본 책에 실린 니지마 조 선생의 <한매(寒梅)>라는 시가 떠올랐다.

 

뜰에 핀 한송이 겨울 매화

눈바람을 무릅쓰고 웃음으로 피었다 

다투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스스로 온갖 꽃의 선구가 되었구나.


- 매우 멋진 시지만, 나는 결코 겨울 매화 같은 것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한겨울 추위와 바람을 올곧게 견뎌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그런 온화하고 겸허한 마음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녀석을 걷어차고 싶었다. 호되게 혼내주고 싶었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었다. '호루모'라도 좋다.  
 

- <도시샤대학 황룡전>



- "아, 저기 오네."
다다얀이 손을 흔들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야스시가 당황해서 입을 떼자 등을 보이고 있던 두 여자가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다다얀의 대각선 방향에는 연분홍빛 앙상블에 하얀 스커트를 입은 긴 머리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야스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헉' 소리가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상대방도 입을 벌린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이 씨."
"역시 사카키바라 씨네. 여긴 어떻게...?"
"어? 아는 사이야?"
다다얀과 사카친이 동시에 큰 소리로 말했다.

- 교토산업대학 현무파 498대 회장 사카키바라 야스시와 류코쿠대학 주작단 498대 회장 이이 나오코.
498대 간호루모, 통칭 '교코쿠 호루모'를 2년에 걸쳐 겨룬 두 사람. 거듭된 격전의 결과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 가이의 다케다 신겐(16세기 전국시대에 패권을 다투던 영주들로, 특히 두 영주가 겨룬 다섯 차례의 전투는 후세에 여러 작품으로 그려졌다-옮긴이)에 비유되던 두 사람. 호루모 역사에 길이 남을 호적수로서 교토에 명성을 날리던 두 사람. 
'교코쿠 호루모'가 끝나고 3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러 양웅은 도쿄 마루노우치에 우뚝 선 신마루 빌딩 5층 미팅 자리에서 재회했다.

- 두 사람의 만남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98대끼리 겨룬 '교코쿠 호루모'에서 당시 2학년이던 두 사람이 처음 겨뤘다. 그 뒤 2년에 걸쳐 교토 시내를 뒤덮은 '교코쿠 호루모'라는 격전 속에서 부딪히기를 네 차례 치고받는 난타전 속에서 그들은 그야말로 사투라 하기에 전혀 모자랄 것 없는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쳤다. 

 

- 두 사람의 전술은 대체로 좋은 짝을 이뤘다.
'흑'귀신을 이끌고 맨 앞에 서서 적진 깊숙이 침입해 위험을 돌보지 않고 과감한 돌격을 감행하는 사카키바라 야스시. 그 용맹한 공격은 전국시대 비사문천(毘沙門天) 깃발(비사문천은 사천왕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무신으로, 우에스기 겐신은 자신을 비사문천의 화신으로 여겨 그 첫 글자인 ''를 적은 깃발을 군기로 삼았다 - 옮긴이)을 나부끼며 전장을 휩쓴 에치고의 용(우에스기 겐신의 별명 - 옮긴이)을 방불케 했다.

한편 우선은 굳게 지킨 다음 신경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끈덕진 전투를 계속하다가 적이 공격하다 지치면 마침내 '적' 귀신에게 호령을 내려 휩쓸듯이 적을 공격하는 이이 나오코 그 두꺼운 포진은 풍림화산(風林火山) 깃발(손자병법에 나오는 '풍림화산'이라는 말은 바람처럼 움직이고 숲처럼 머물며 불처럼 공격하고 산처럼 지키라는 뜻으로, 다케다 신겐이 군기로 삼은 뒤 그의 군대를 상징하는 말처럼 되었다 - 옮긴이)을 등에 꽂고 전장을 노려보는 가이의 호랑이(다케다 신겐의 별명 - 옮긴이)를 상기하게 했다.

- 언뜻 온화해 보이는 풍모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야스시의 격한 전술은 어느새 '검은 태풍'으로 불리며 교토산업대 현무파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한편 언뜻 못 미더운 풍모지만 실은 어떤 남자보다 현실적이고 반석 같은 방어선을 펴는 나오코의 진은 '붉은 철벽'이라 불리며, 역시 류코쿠대 주작단의 대명사로서 다른 대학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 현재 류코쿠대 주작단은 나오코의 뒤를 이은 499대 회장 다치바나 미카에 의해 류코쿠대 피닉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을 바꾸는 문제로 당시 다치바나 미카가 주작단 선배들에게 정신없이 비난을 받을 때 나오코가 "이제는 그들이 주역입니다"라고 호소하며 관련자들을 만나고 다녀서 지지를 끌어낸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재학생들의 송년회 자리에서 나오코가 별생각 없이 "동아리 이름이 너무 이상해서 남자친구한테 차마 얘기를 못하겠어"라고 말하자 다치바나미카가 "맞아요, 정말 그래요" 하고 전적으로 동의한 데서 사태가 발단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만의 굳은 비밀이었다. 

- 정반대 전술을 쓰는 두 사람이 펼친 격투의 역사는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했다. '교코쿠 호루모'에서 양웅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싸웠다. 첫해는 나오코가 이끄는 류코쿠대 주작단이 현무파와 직접 맞붙은 큰 전투 -가와나카지마(나가노 시에 있는, 강으로 둘러싸인 섬처럼 생긴 삼각주 전국시대에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이 전투를 벌인 장소로 유명하다 - 옮긴이)는 아니었지만- 인 '주쇼지마 호루모'를 제압해 최고 영예를 쟁취했다. 하지만 이듬해 야스시가 이끄는 교토산업대 현무파가 복수에 성공해 일인자 자리에 올랐다. 
두 번째 해 최종전에서 주작단과 현무파가 직접 대결한 '가모가와델타 호루모'는 호루모 역사에 길이 남을 격전으로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 한참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상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조직이라는 필터로만 개인을 바라보는 생물이구나'
선입견 때문에 마음의 눈이 너무도 쉽게 흐려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한 야스시는 '그런데 이탈리아인은 어떻게 돼지고기를 이렇게 먹을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며 혀에 치즈 같은 맛을 남기는 피자의 생햄을 냉큼 해치웠다. 

- 직장에서 저지른 실수 이야기, 대학 시절의 추억, 아는 사람들 연애 이야기 따위를 차례로 펼쳐내는 가운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10시 반.
"이제 어떡하지?"
"7층에 테라스가 있다는데 잠깐 가보지 않을래?"
야스시가 제안했다.
"그래? 그런 게 있었어? 좋은 생각인걸."
사카친이 냉큼 찬성을 표했고 네 사람은 기분 좋게 살짝 취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식당을 나와 7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다다얀이 불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음력 초하루잖아."
"그걸 이제야 알았어?"
사카친이 냉큼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어째서 늘 그렇게 둔한지, 원."
얼버무리는 다다얀에게 사카친은 여전히 가차 없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야스시와 나오코는 문득 눈길을 맞추었다. 두 사람이 볼 때는,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오늘이 음력 초하루라는 것을 아는 일은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전무할 것 같았다. 

- 뚱한 말투로 대답하던 야스시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저게 뭐지?"
나오코와 같은 방향을 올려다보면서 야스시는 동작을 딱 멈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 끝에서 무언가 검은 것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 가까운 빌딩 창을 가로지른 그 검은 물체가 시야에 들어오자 야스시는 새나 박쥐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빌딩들 사이로 검은 물체가 하나둘씩 허공을 너울거리며 날아오는 것을 보고 새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 검은 물체가 한 번도 날갯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치고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마치 우주 공간을 관성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검은 물체는 직선 궤도를 그리며 공간을 이동했다. 야스시는 그 정체를 알아내려 시선을 모았다. 어쩌면 누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리모컨 같은 것으로 조종하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 하지만 테라스에서 약 5미터 높은 허공을 그 검은 물체가 천천히 통과할 때였다.
"아악!"
야스시와 나오코는 거의 동시에 기절할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건너편 빌딩의 조명과 테라스 조명등 두 개의 광원이 희미하게 비추는 그 검은 물체는 두 사람에게 아주 낯익은 모습이었다.

 

- 길이는 20센티미터 정도. 사람처럼 팔다리가 있지만 머리가 커서 4등신이라는 불균형에 빠진 모습이었다. 몸에 걸친 넝마가 바람에 펄럭펄럭 춤을 추었다. 머리에는 너무나 친숙한 주둥이가 진행 방향을 가리키듯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렇다. 야스시와 나오코가 교토에서 거침없이 부린 '귀신'이 도쿄 마루노우치 상공을 느긋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한 가지, 두 사람의 기억과 크게 다른 것은 귀신의 피부색부터 넝마까지 모든 것이 완전한 칠흑 빛깔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두 사람 모두 교토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 하늘에서는 변함없이 검은 물체들이 직선 궤도를 그리며 천천히 날고 있었다.
신마루빌딩을 따라 모퉁이를 돌듯 오른쪽으로 꺾어져서 마루노우치 나카 거리로 들어섰다. 신록 향기가 한밤의 시원한 공기에 섞여 코를 간질였다.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은 모두 불이 꺼졌고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양복 입은 사람들이 가끔 잰걸음으로 옆을 스쳐갔다. 빌딩 사이를 정적이 가득 채워도 밤하늘을 통과하는 귀신 행렬은 갈수록 북적거렸다. 하늘을 떠도는 귀신들을 올려다보며 그들을 거슬러 걷던 나오코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오이마쓰리가 코앞이네."
"벌써 계절이 그렇게 되었나."

- "사카키바라 씨는 애인 없어?"
나오코가 불쑥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뭐? 왜 갑자기..."

"흠, 하긴, 황금연휴를 하루 앞두고 미팅하러 나올 정도니."

"그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글쎄, 과연 그럴까."
나오코는 시치미를 떼고는 가로수를 스칠 듯이 허공을 산책하는 귀신을 눈으로 좇았다.

- "황금연휴에 시간이 되면 하루 정도 어울려줄 수도 있어. 영화라도 보든가."
"호, 꽤 적극적이네, 이이 씨."
"뭐랄까... 저런 놈들이 태연하게 날아다니는 걸 보면 머리가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지 않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야스시는 왠지 이해가 돼서 "그럼 영화라도 보러 갈까?" 하고 적극적으로 날짜를 잡았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교토에 있을 때 이이 씨랑 좀 더 많이 이야기를 해둘 걸 그랬네."
"동감이야."
귀신들의 유람 비행을 바라보며 편하게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에이타이 거리로 나서는 순간 동시에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근데... 어떡하지?"

- 나오코는 안내판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지만 어두워서 읽을 수 없었다.
"아니, 안 보여."
그러면서 나오코가 얼굴을 거두려고 할 때 택시 한 대가 두 사람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한순간이지만 두 사람의 눈에 안내판 글자가 보였다.
'수도유적-장문총(將門塚).'

- "혹시 그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 10세기 중엽에 활약한 무장으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천황임을 선언하고 독립국을 세우려다가 토벌되었다 - 옮긴이)의 목을 묻은 무덤..." 
나오코가 반사적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몰라? 다이라노 마사카도."
"미안, 입시 때 지리를 선택했었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핀잔을 주려는 순간, 어둠을 에두른 산울타리 너머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오코는 흠칫 놀라며 말을 삼켰다.

- "... 젠장,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건데?"
"뭐라고?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니야? 너희는 어떻게 불평밖에 모르니? 선배도 그렇지만 후배도 문제야. 뭘 하느라고 오늘 일을 깜빡했대?"
"응? ... 뭐, 마작에 빠져 있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마작? 바보 아냐? 오늘 우리가 마침 여기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냥 방치했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어?"
"몰라, 나한테 물어봐야 알 턱이 없잖아."
"모르긴 뭘 몰라. 이번 달에는 너희 쪽이 당번이니까 이미 결정된 일들은 확실하게 지키란 말이야."
"아니 물론 우리 쪽이 당번이지만 나는 오래전에 은퇴했잖아. 왜 나한테 화를 내고..."
"시끄러워. 빨리 하기나 해."
장문총터 안에서 흘러나오는 조금은 한심하게 들리는 말다툼 소리에 야스시와 나오코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표정에는 놀라움과 곤혹스러움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똑같은 생각을 보여주었다.
'어째서 다다얀과 사카친의 목소리가 들리지?'

- 마침 몸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귀신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는 나오코를 보고 사카친이 "나오코..." 하며 입을 뗐지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해 봐, 다다얀. 대학 때 무슨 동아리에서 활동했어?"

"어? 뭘 그런 걸 갑자기."
"사카이 씨도 오차노미즈여대에서 무슨 동아리에 가입했지? 말해 봐." 
야스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후려쳤다. 돌층계 위에 있던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뻣뻣하게 선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귀신들이 두 사람 몸을 거침없이 통과하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그럼 우리부터 말해 볼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야스시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토산업대학 현무파."
야스시의 손이 등을 툭 건드리자 나오코도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류코쿠대학 주작단."
긴 침묵이 장문총을 뒤덮었다. 그동안에도 귀신들은 검은 구름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 "아마 양쪽 다 할 얘기가 산더미처럼 많을 거야. 하지만 그전에 두 사람이 활동한 동아리 이름을 알았으면 좋겠어."
야스시의 억누른 목소리에 사카친과 다다얀은 딱딱한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카친..."
나오코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 사카친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 오차노미즈 내가 있던 동아리 이름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야스시와 나오코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배, 백호 히토쓰바시."
막힌 숨을 길게 내쉬고 다다안은 바닥에 떨어진 술병을 느린 동작으로 주워 들었다.

- 혼란과 의혹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는 네 사람. 마치 네 사람의 침묵의 무게를 짊어진 듯 귀신들은 잇달아 어두운 아스팔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피용."
"피용."
“피용."
땅으로 흡수될 때마다 애처롭고 허망한 소리를 희미하게 남기며.

 

- <마루노우치 정상회담>

 

 

-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다마미는 감격에 겨워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그래? 맛이 그렇게 형편없어?"
주방장이 당황하며 물었다.
"이렇게 맛난 생선회는 처음 먹어봐요."
다마미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조리사 한 명이 한마디 했다.
"요리가 맛있어서 울다니, 미스터 아지코(요리만화 <미스터 아지코>의 주인공으로 시식한 뒤 요란하게 감탄하기로 유명하다 - 옮긴이)인가?"
"아무래도 재미난 아이가 들어온 모양이네."
그러면서 조리하다 남은 조개회를 하나 더 주었다.

- 오카미의 목소리에 쫓겨 다마미는 목직한 창고 열쇠를 들고 홀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화장실 옆 유리문을 열고 댓돌에 놓인 샌들에 발을 넣었다. 예상대로 중정의 공기는 살을 에듯 차가웠다. 어느새 싸라기눈이 날리고 있었다. 다마미는 주방 작업복 소매를 당겨 손아귀에 쥐고 옆구리를 팔로 문지르면서 "아, 추워, 추워"하고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정원을 깡충깡충 뛰어 가로질렀다. 

- 다마미의 시선 끝에 하얀 칠이 빈틈없이 덮인 2층 창고가중정을 흘겨보듯 우뚝 서 있었다. 겨우 10미터를 이동했을 뿐인데도 창고 앞에 다다랐을 때는 손가락이 곱았다. 옻칠을 한 두꺼운 문을 열자 녹슨 경첩이 메마른 소리를 냈다. 좌우로 연문 안쪽에는 인두로 지져서 그린 노란 여우가 춤추고 있었다. 
옻칠한 문 안쪽에 문살문이 있었다. 거기 매달린 둥그런 자물쇠를 잡자 차가운 무게감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 "어떡하지?"
벌써 눈물을 그렁거리면서 다마미는 '나베마루' 서체에 영향을 받았는지 초서체 비슷하게 써버린 '오타마'라는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제 이름을 낙서하다니. 더구나 이렇게 큼지막하게. 

- "수고했다. 꽤 늦었구나. 쥐라도 봤니?"
오카미가 묻자 다마미는 몸을 흠칫 떨었다. 창고 열쇠를 돌려주면서 다마미는 오카미에게 창고 구석에 있던 궤에 대해 짐짓 태연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아, 나가모치 말이구나."
화장을 진하게 한 오카미가 잠깐 뜸을 두었다가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나가모치... 라고 하나요?"
"아, 모르니? 하긴 뭐, 요즘 저렇게 커다란 궤는 집안에 마땅히 둘 데도 없겠지만. 예전에는 옷이나 각종 도구를 수납하거나 옮기는 데 썼지. 위에 막대기를 꿰서 가마처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다닐 수도 있었거든."

- 다카무라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온화한 다카무라의 표정을 보자 도저히 촌마게 같은 무모한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거침없이 촌마게를 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마미는 묻지 못했다. 묻고 싶었지만 역시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다. 
대신 다마미는 이렇게 물었다.
"그 밑에... 여전히 촌마게?"
대기실에는 두 사람 말고도 젊은이가 많았다. 따라서 '촌마게' 대목에서 자연히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럼."

-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다마미는 감탄했다. 그녀는 맑고 따뜻한 날 겐쿤 신사 도리이를 지나 후나오카야마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다 노부나가를 모신 신사로 유명하잖아."
"뭐? 그랬어?"
오다 노부나가라는 이름을 듣자 다마미는 시선이 흔들렸다. 어제 창고에서 벌인 일을 떠올리고 갑자기 콧속이 시큰해졌다.  

- "실은 요즘 내가 오다 노부나가한테 빠져 살거든. 그래서 올해 상투를 틀 때는 노부나가 스타일로 차센(말차를 탈 때 이용하는 거품기처럼 생긴 도구 - 옮긴이) 상투로 틀고 있어. 심에 나무젓가락을 넣어두면 상투가 쉽게 일어서거든. 아, 그렇지. 겐쿤 신사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다이토쿠지가 있잖아. 그 절에서 노부나가의 장례식이 치러졌지." 
다카무라는 점점 열을 올렸다.
"오다 노부나가는 참 재미난 사람이야. 자기 자식한테 '기묘(奇妙)'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그 밖에도 '작(酌)'이라는 이름도 있고 '인(人)'이라는 이름도 있고, 모두 아들 이름이야. 정말 제멋대로지."

- [이 몸은 글을 갓 배운 참이라 아직 서툽니다마는 그대 역시 서투시군요.

1일, 나베마루
오타마님]


- 다마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옻칠한 문도 열려 있었으니 누가 장난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좌우를 재빨리 확인했다. 창고 2층에도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마미는 판자의 붓글씨를 다시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다마미가 어제 본 판자였다. 크기는 물론 판자를 가로지르듯 새겨진 특징적인 상처나 모서리가 조금 깨져나간 모양도 눈에 익었다. 
문득 다마미는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이 글자를 읽을 수 있었지?'

- 어제의 '나베마루'라는 글자와 달리 뱀처럼 구불구불한 붓글씨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쩐 일인지 그것들을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뭐가 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기는 판자에 쓰인 글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오타마'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다마미에게 보낸 메시지일까? 너도 글씨가 서툴구나라니 공연한 참견 아닌가. 왠지 화가 났다. 

- "뭐, 상관없어."
다마미는 생각하기를 깨끗이 포기했다. 어차피 이제 다마미의 걱정거리도 사라졌다. 얼른 판자를 돌려놓고 작업이나 시작하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마미는 자기 오른손이 어느새 매직펜을 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할 틈도 없었다.
"자, 잠깐."
창고 속에 다마미의 비명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다마미의 오른손은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판자 표면에 쓱쓱 매직펜을 놀리고 있었다.

- '무로마치막부 6대 쇼군이 쇼군에 선출된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회장을 정해야 한다.'
이 결정에 따라 '무도'에서 엄정한 분위기 아래 사다리 타기가 행해졌다. 그 결과 뜻밖에 다마미가 선택된 것이다.
그렇다. 일찍이 무로마치 시절에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내에서 제비 뽑기로 쇼군이 되었다. 
고래로 제비에는 신이 깃든다고 했다. "회장이라니 당치도 않아" 하고 다마미를 포함한 모든 회원이 아무리 뜨악해해도 신이 임하신 결과였다. 일개 학생 따위가 불만을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제비로 정한 사항은 거부하지 못해. 이것이 리쓰메이칸 백호대에 대대로 전해지는 철칙이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 모두 호소카와 회장을 도와주자." 
변함없이 수염이 덥수룩한 구로다가 떨떠름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말하면서 리쓰메이칸대학 백호대 500대 회장 호소카와 다마미가 탄생했다.

- "아참, 다카무라."
"아, 예. 왜 그러십니까?"
다카무라가 공손하게 무릎 위에 양손을 얹고 얼굴을 돌렸다.
"음... 촌마게를 할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해 줄래?"
다마미가 내뱉은 '촌마게'라는 말의 강한 억양에 대기실에 있던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역시 손이 멋대로 움직였어?"
"맞아.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손이 가위를 들고 있더군. 어? 어떻게 그걸 알지?"
"됐으니까 하던 말이나 해봐."
다마미는 자기도 모르게 다카무라의 다운재킷 자락을 잡았다. 심상치 않은 다마미의 행동에 다카무라는 조금 움찔하면서 머리를 깎은 과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다마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아, 싫다. 진짜 싫어, 그런 거."

 

- "이봐, 왜 그래, 호소카와? 무슨 일이 있었어?"
다카무라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마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침 대기실 앞에 도착한 노란 셔틀버스에 말없이 올라탔다. 행선지가 다른 다카무라를 남겨두고 버스가 출발할 때 다마미는 그제야 그의 손수건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카무라는 대기실 문 앞에 서서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다마미의 머릿속에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 작년 6월, 리쓰메이칸대학 기누가사 캠퍼스에서 치른 리쓰메이칸 백호대와 교토대 청룡회 간의 호루모. 그때도 다카무라는 저렇게 중앙광장 잔디 위에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호루모오오오오오오-!"
굵은 고함이 어두운 기누가사 캠퍼스의 정적을 찢었다.
그 광경에 다마미는 간이 오그라들 만큼 놀랐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세 달 뒤 자기도 다카무라처럼,
"호루모오오오오오오-!"
하고 고함치는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호루모오오오오오오-!"
그렇게 허공에 고함을 지른 자에게는 훗날 뭔가가 찾아왔다. 어떤 이는 소중한 것을 빼앗긴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시시한 것을 빼앗긴다고 했다. 아니,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은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함을 지른 자가 그 뒤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다른 사람이 알기는 힘들었다. 대부분 개인의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카무라처럼 명백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랬기에 고함을 지르고 5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자 다마미는 '어쩌면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 않을까?' 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뭔가가 일어나 버렸나?' 하며 자기 편할 대로 해석했다. 그러나 '안이한 생각 아냐? 하고 구로다가 지적한 대로 마침내 뭔가가 찾아왔다.
사실 찾아온 '뭔가'는 아주 기묘한 것이었다.

- 앞면의 글귀를 읽은 다마미는 뒷면에 답장을 썼다. 자신이 옛 서체로 적힌 소로분(주로 에도시대에 편지나 공문서에 쓰이던 문어문. 어휘도 옛말이지만 일상적인 구어와 어순이 달라 현대인이 독해하기 쉽지 않다 - 옮긴이)을 술술 읽어내는 것에 대해 다마미는 그다지 신비함을 느끼지 않았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귀신을 빤히 보는 처지였다. 읽어낼 리 없는 글을 술술 읽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조금 이상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다마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판자 뒷면에 오른손이 멋대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 오른손을 못 보셨나요? 행방불명되었답니다(일본 펑크록밴드 The Blue Hearts의 <나의 오른손>이라는 노래의 가사 - 옮긴이)'하고 노래하며 돌아다니고 싶을 만큼 요즘 다마미의 오른손은 제멋대로였다. 매직펜을 쥔 오른손이 소로분을 술술 적어나가는 섬뜩한 광경을 다마미는 매번 눈물을 글썽이며 내려다보았다. 

- 아무리 판자를 무시하려 애써도 다마미의 오른손은 번번이 판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리 매직펜을 잡지 않으려 애써도 오른손이 탈의실 책상에서 멋대로 집어 들었다. 차라리 '고노하'를 결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른손이 근무표에 멋대로 '전부 가능'이라고 적어서 담당자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덕분에 다마미는 매주 6일을 꼬박 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불가항력이 작동하고 있었다.

- '가난은 애처로운 일이다.'
'돈 갚으라고 주변에서 아우성이다.'
'언젠가 갯장어를 먹어보고 싶다.'
'매일 일하다가 꾸중만 듣는다.'
이런 부끄러운 내용을 무엇 때문에 굳이 소로분으로 변환해서 써넣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사건들이 의도하는 바를 전혀 모른다는 데 다마미는 공포를 느꼈다. 

- 사실 다마미가 즐기는 것은 '나베마루&오타마'의 기묘한 통신뿐이었고, 나베마루라는 존재에 대한 흥미나 의문을 느낀 적은 없었다. 창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 사람 같다고 짐작했지만 그 이상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호루모에 관계된 자 특유의 '너무 깊이 들어가서 좋을 일 없다'는 경험으로 익힌 느낌 탓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나베마루에 대해 다마미가 파악한 정보는 통신 회수에 비해 의외로 적었다.

- 우선 나베마루는 다마미와 동갑이었다. 언젠가 다마미가 스무 살이라고 전하자 자기와 동갑이라며 놀란 적 있었다. 글이 서툴러 더 어린 줄 안 모양이었다. 괘씸한 남자 같으니. 
그리고 나베마루는 지금 문장을 훈련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일을 하는 젊은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는 듯했다. 그중에는 나베마루의 동생도 있는지, 동생의 기억력이 형편없다고 한탄한 적도 있었다. 요즘 시대와 다를 것 없는 동생 험담에 글을 읽던 다마미는 어느새 웃음을 지었다. 
나베마루의 특기는 창술인 듯했다. 어릴 적부터 훈련을 계속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던져 윗분을 지키겠노라고 충성스러운 말도 했다. 
매일 편지를 바라보며 '잘하고 있구나' 하고 다마미가 감탄한 것이 있었다. 판자의 날짜였다.

- 마침내 출발 준비가 끝난 듯했다. 옛날부터 교토는 '교(수도-옮긴이)'였지, 아니 옛날에 '교'였기 때문에 지금 교토가 된 건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다마미의 눈길이 멈추었다. '덴쇼'라고 되어 있다. 연호일까? 하루하루 지혜를 키워나가는 나베마루를 보니 듬직했다. 

- 카운터에서 다음번 기능 강습을 예약하고 층계 옆벽 앞으로 갔다.
1층으로 내려가는 층계 바로 옆 벽면에 지도가 붙어 있었다. 도로주행이 시작된 뒤이기는 해도, 실기 수업 때 벌인 실수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다마미는 교육과정을 척척 완수했다. 한때 꿈같은 이야기였던 아마노하시다테나 비와코 일주가 갑자기 손이 닿는 곳까지 다가왔다.

- 층계를 내려가 셔틀버스 대기실 문을 열려고 할 때, 유리 너머 한적한 실내에서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카무라."
두꺼운 책에 빠져있던 다카무라는 다마미를 알아보고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섰다.
"아! 오, 호소카와. 저번엔 미안했어."
다카무라의 무릎 위에 있던 책이 떨어져 다마미 발치까지 미끄러졌다. 다마미는 당황해서 책을 주워 내밀며 말했다.
"아냐, 미안한 쪽은 오히려 나지."
그리고 가방에서 다카무라의 손수건을 꺼냈다.
"돌려주려고 내내 가지고 다녔어. 늦었지만 다행히 만났네. 이거, 고마웠어."

- 힘겹게 저항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용하던 나가모치라고 들었다'는 오카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다마미는 도리질을 하며 책을 덮었다. 책 표지 가운데에 어떤 동그란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다마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 "이 그림은 뭐지...?"
다카무라는 다마미의 목소리가 변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 그거. 오다 가문의 문장. 오다 명자라고 해."
오이나 명자 열매의 단면을 그린 듯한데, 별로 비슷해 보이지 않지? 하는 다카무라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지금까지 매일처럼 보아온 그 무늬를 다마미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각형 꽃잎 무늬와 비슷한 그 그림이 금세 눈물로 아롱졌다.
"근데 오다 노부나가는 어디 살았지?"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다마미가 물었다. 

"살던 곳? 머물던 성 말하는 거야? 기요스나 기후 등 몇 군데 성을 전전했지만, 말년에 지내던 곳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즈치겠지."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다마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릎에서 책이 떨어져 다시 바닥을 굴렀다.
"어, 왜 그래? 호소카와!"
비명 비슷한 다카무라의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릴 때 다마미는 벌써 문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 왜 하필이면 오늘일까 생각하며 입에 넣는데 나베마루가 생각나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오, 정말 우네."
요리사들이 다마미를 보고 떠들어댔지만, 그녀의 표정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모두 거북한 표정이 되어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고노하'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베마루를 생각했다. 센본 구라마구치에서 버스를 내려 터벅터벅 걸었다. 구라마구치 거리 저쪽에 히에이잔 산이 새카만 파도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산 위에는 차갑고 맑은 공기에 싸인 무서울 정도로 하얀 달이 떠 있었다. 
 
- 하숙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학 도서관으로 향했다. 두꺼운 사전을 갖다 놓고 노트에 수없이 고쳐가면서 글을 썼다.
'혼노지에서 도망쳐라. 거기 있으면 안 돼. 아케치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아 죽게 될 터이니 지금 당장 도망쳐, 제발.'
우스울 정도로 짧은 글인데도 옛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분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났는데 왜 이렇게 언어가 다른지. 화를 내고 원통해하다 보니 또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다마미는 울지 않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하고 입술을 깨물며 무거운 사전을 계속 뒤졌다. 

- 나베마루의 새로운 글은 도착하지 않았다. 어제 다마미가 편지를 쓰지 않은 탓인지 판자 글귀는 '노부나가 님입니다' 그대로였다. 날짜는 6월 1일, 29일 다음에 갑자기 1일로 적힌 것을 보았을 때 다마미는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당시는 음력을 사용했기에 덴쇼 10년 5월은 29일까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불과 몇 글자를 주고받는 데 소중한 하루를 써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한편으로 다마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궤 안에서 날짜 규칙이 제대로 지켜진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 다마미는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와 매직펜을 꺼냈다. 그 종이에는 다마미가 아침부터 매달려서 작성한 초서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주고받은 편지로 나베마루가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업무 개시 전에 궤를 확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혼노지의 변은 6월 2일 새벽에 일어났다. 아직 기회는 있었다. 몇 시간뿐이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 
디자인을 베끼는 기분으로 다마미는 종이의 글자를 판자에 정확히 그려 넣었다. 감정을 놓아버리니 금세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마미는 그럴 때마다 손길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탁합니다, 이나리 신이시여, 나베마루에게 이 글이 전해지게 해 주세요-'

- 다 쓰고 나서 판자를 품에 껴안고 다마미는 눈을 꼭 감았다. 그날 밤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천장을 쳐다보면서 다마미는 가족이 무사하기를 비는 심정으로 나베마루를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베마루는 무려 400년 전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죽은 사람과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다. 앞으로 다마미가 아무리 나베마루를 위기에서 구해 주어도 나베마루는 결코 현대에 존재할 수 없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다마미와는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래도 다마미는 나베마루를 구해야 했다. 나베마루는 스무 살이다. 한가롭게 운전학원에 다니고 호루모를 하는 다마미나 구로다 등과 같은 또래였다. 그 사람은 창을 들고 전투를 해야 한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다마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못 견디게 나베마루를 만나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좋았다. 나베마루가 지금을 산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실컷 울고, 울다 지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다마미의 눈길은 황망하게 나무 표면을 방황했다. 방향을 홱 돌린 눈길이 같은 열 오른쪽에서 '가시와바라 고베'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다마미는 '6월 2일'에 가시와바라 형제에게 일어난 일을 전부 이해했다.
안내판 앞에서 다마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그럼 이게 마지막 심부름이겠네. 이걸 갖다놔 줄래?"
오카미는 카운터에 있던 꽃병 두 개를 창고 열쇠와 함께 탁자에 내려놓았다.
문살문을 열자 이틀 만에 접하는 창고 공기가 얼굴을 휘감았다. 다마미는 궤 뚜껑을 열고 꽃병을 내려놓았다. 세워놓은 관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뚜껑을 닫으려고 할 때, 문득 왼손이 받치고 있던 뚜껑 밑으로 오른손이 쑥 내려갔다. 다시 돌아온 오른손에는 판자가 쥐여 있었다.
다짜고짜 눈앞에 들이밀어진 판자를 보고 다마미는 숨을 멈추었다.
나베마루의 답신이었다.

- [당신이 보낸 글을 읽을 때는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으나 정말로 아케치 님이 기습했습니다. 동생과 함께 목숨을 바쳐 윗분을 지키겠습니다.이나가모치 속에 한 여성이 숨어서 도피할 타이니 아마 이 답신은 당신께 전해질 것입니다. 당신을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꿈 세상에 있는 것입니까? 꿈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언젠가는 당신 앞에 나타나겠습니다. 당신이 알아볼 수 있게 표식을 달고 나타나겠습니다. 아즈치 성에서 바라보는 비와코는 아름답습니다. 당신께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비와코 표식과 함께 반드시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부디 당신도 나를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이만 총총. 

6월 2일, 나베마루 

오타마님]



- 후반부는 글자가 어지러워져서 거의 읽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나베마루' 서명도 한 올의 선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맨 마지막의 '오타마 님'이라는 글자는 지금까지 본 것들 가운데 가장 능숙하게 쓴 '오타마님'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판자 위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가눌 수도 없게 뚝뚝 떨어졌다. 

- 점심때가 지나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가 오니 교습을 받기도 싫었다. 다마미는 브레이크 타이밍이 늦다고 교관에게 종종 주의를 들었다. 딱 맞게 밟았다고 생각했지만 조수석에 앉은 교관은 덜컹 흔들린 모양이었다. 비 오는 날이 싫은 이유는, 다마미처럼 브레이크를 밟으면 정지선을 살짝 넘어버릴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또 넘으면 도장을 못 찍어드립니다."
교관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 카운터에서 다음번 예약을 하고 층계 옆 지도 앞에 멈춰 섰다.
비와코 표식이란 무엇일까? 지도를 바라볼 때마다 다마미는 생각했다. 표식이라고 했으니 어떤 모양에 관계된 것일까? 자세히 보면 비와코 호수는 참으로 이상한 모양이었다. 뭐랄까, 야무진 데가 없었다. 삼각형 같으면서도 삼각형이 아니었다. 짓밟혀서 편평해진 액막이 치마키(띠나 대나무 잎으로 말아서 만든 떡으로 단옷날 먹는다 - 옮긴이) 같은 꼴이었다. 특징이랄 것도 없어서, 형태를 기억한 것 같아도 셔틀버스를 탈 때쯤이면 벌써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다.  

- '왜 저기 비와코가 있을까...'
"장난하지 마. 교관한테 들키면 또 야단맞는단 말이야." 

다카무라가 모자를 다시 쓰려고 하자 "잠깐!" 하며 다마미가 그의 손을 막았다.
"왜, 왜 그래? 호소카와?"
다마미는 놀라는 다카무라를 아랑곳하지 않고, 모자로 스며든 빗물로 축축한 기운이 남은 정수리 부분을 응시했다.

- 다마미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빨간 거... 왜 그런 거야?"
다카무라는 '뭐가?' 하는 표정을 짓고 다마미가 바라보는 부분이 어디인지 헤아렸다.
"아, 꼭대기에 있는 그거 말이지? 그렇군. 역시 눈에 띄지? 실은 어제 교토대 청룡회 회장 선거가 있었어. 그래서 회원들 만나기 전에 오랜만에 깔끔하게 면도나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런 게 생겼더라고. 땀띠인가 봐. 내 피부가 원래 좀 민감하거든. 요즘 계속 모자를 쓰고 다녀서 짓물렀나..."
"꽤 큰데... 그 땀띠."
"그렇지? 창피하게시리. 이상하게 진하네.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비와코... 처럼 생겼어."
"비와코 호수? 그렇게 생겼어? 아, 그래? 호소카와는 예를 들어도 재미나게 드는구나."

- "... 어, 근데 호소카와, 왜 울어?"
"아니야, 우는 게 아니야."
다마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소카와, 나를 만날 때마다 우는 것 같은데? 혹시 내가 그렇게 싫어?"
"그게 아니야, 언제 울었다고 그래."
고개를 젓는데 눈물이 방울방울 볼을 타고 떨어졌다.
다카무라는 당황해서 청바지에서 손수건을 꺼냈지만 이미 빗물에 젖은 듯했다.

- 다마미는 웃으며 손수건을 받았다. 다카무라의 정수리가 눈물로 아롱져 보이고, 마치 앞에 정말로 사무라이가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는 다카무라의 얼굴이 시야로 날아들었다.
다마미는 겸연쩍게 웃고는 아직도 속눈썹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 손수건을 접어 다카무라 머리의 비와코에 얹어주었다.
"고마워, 나를 발견해 줘서."
 

 


 


옮긴이의 말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얼마나 황당하던지. 
만화책 같은 표지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제목, 띠지에 적힌 '구아이우에에'라는 괴성 같은 의성어. 더구나 교토에 있는 대학의 동아리들이 귀신들을 부려서 전투 게임을 한다는 당황스러운 설정까지. 그래서 '아이들'에게 맞춘 라이트 노벨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 편 한 편 읽어나갈수록 처음 느낀 뜨악함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호루모라는 기이한 설정 속에서도 청춘의 고뇌와 풋풋한 연애 감정이 오롯이 살아 있는 것이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현대 젊은이들의 연애담과 호루모라는 황당한 판타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것이야말로 마키메 마나부가 일본 독서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힘이겠지요.
전작인 <가모가와 호루모>까지 구해서 읽고 나니 탁월한 이야기꾼이 또 한 사람 등장했다는 확신이 들고, 독자로서 '뜻밖에' 횡재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2006년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가모가와 호루모>의 속편입니다. 2007년 매달 한 편씩 6개월에 걸쳐 써낸 단편들을 단행본으로 묶어 냈는데, 전작 <가모가와 호루모>를 읽지 않은 독자라도 배경을 파악할 수 있게 <프롤로그>를 새로 보태 내놓았습니다.
말이 속편이지 성격은 전작과 크게 다릅니다. 전작이 호루모라는 '게임'이 중심인 장편소설이라면, 이 속편은 전작에 등장한 인물들의 사랑과 고뇌를 중심으로 그린 단편집입니다. 인물과 상황이 전작과 같을 뿐 줄거리가 이어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호루모 자체도 이야기의 먼 배경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전작을 읽으면 더 흥미롭겠지만 이 작품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호루모'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다룬 이야기가 일본에서 열띤 호응을 얻어낸 이유는, 캐릭터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청춘소설이 철저히 일본 전통에 밀착된 판타지와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판타지라면 기본적으로 다른 세계', '꾸며진 세계'가 설정되고 작가는 그 세계를 정교하게 구축해 리얼리티를 부여하느라 많은 공을 들이게 마련이지만, 마키메 마나부는 유서 깊은 도시 교토를 고스란히 이용합니다. 작가 자신도 이렇게 말합니다. 
"지명도가 뛰어난 고도는 수십억 엔을 투자한 세트 같아서, 그것을 잠깐 빌려서 글을 쓰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교토라는 배경은 '꾸며낸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교토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고도라도 나라나 오사카로 대체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캐릭터처럼 느껴집니다.  
교토는 794년부터 1868년까지 1,100여 년간 일본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교(서울)'라고 하면 교토로 알아들을 만큼 일본 전통문화의 정점을 이루는 도시입니다. 역사와 설화가 풍부하게 깃든 곳이어서 전통과 판타지를 결합하는 데 알맞은 무대가 될 만하지요. 

무대만이 아니라 '호루모'라는 기이한 게임부터가 일본의 '음양사(陰陽師)' 전통과 직결됩니다. 일본에서는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음양사들이 점성술, 천문, 달력, 퇴마 따위를 담당하는 음양료(陰陽寮)라는 관청이 있었고, 영화나 만화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아베노 세이메이도 10세기경 음양료에 천문박사로 임명된 음양사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아베 아키라는 그 음양사에서 따온 이름이고, 4장 <도시샤대학 황룡진>에서 도모에의 전 남자친구로 나오는 아시야 미쓰루도 아베노 세이메이의 적수였다는 음양사 아시야 도마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음양사는 시키가미(武神)라는 요괴를 병졸처럼 부렸다고 하며, 아시야 도만은 아베노 세이메이와 이러한 시키카미 대결을 벌이다가 패하여 도성 밖으로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에서는 이러한 전설이 그대로 '호루모'로 응용될 뿐 아니라 아시야가 아베에게 호루모에 패배하는 설정으로 고스란히 패러디됩니다. 

이 작가의 매력은 그런 재치 있는 판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시종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지만 '모짱'이나 '다마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청춘의 사랑과 고뇌가 가슴 찡할 만큼 순도 높게 그려집니다. 이러한 청춘소설이라는 측면이 약했다면 그야말로 만화 같은 이야기에 그치고 말았겠지요. 

무국적성이 두드러질 것 같은 판타지도 어김없이 작가의 문화적 배경이 작품에 배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는 자기가 사는 곳의 문화와 전통을 희석하려고 애쓰기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궈내서 활용하는 것이 커다란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다 건너 한국의 독자들은 일본 독자들과는 조금 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웃 나라의 문화를 즐기는 해외여행 같다고나 할까요. 여권도 가방도 필요 없는 여행이지만, 어떤 여행보다 알찬 교토 여행이 되리라 믿습니다. 충분히 만끽하시길. 


2009년 2월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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