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프라나
출판 : 명상거북이
출간 : 2022.01.01
'미라래빠'에 관한 언급을 보게 되어 구해 읽었다.
근래에는 독서 모임에서 선정된 책이 아니면 거의 집에 쌓인 구간들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들로 슬금슬금 손이 나간다.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인지, 책방부터 정리하겠다는 나의 다짐이 약해진 것인지.
책 탑을 한 줄 이상 줄였다고 기뻐했던 것도 잠시, 아직도 나의 책방은 조심하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지는 상태다. 군데군데 여유로워진 칸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드러난 바닥보다 책이 쌓여 있는 바닥 면적이 더 넓다.
나는 정말 이 책들을 훑어보고 취사 선택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정말로 연습해야 할 것은 오링 테스트 류의 무엇일지도 모른다.
<하늘과의 만남>은 저자 프라나가 어느 날 찾아온 영적 존재이자 티베트의 구루였던 미라래빠와 채널링을 하게 된 이야기이다. 처음 그 존재와 머릿속으로 대화를 시작한 이후 거의 매일에 걸쳐 기록한 일기이자 문답인데, <하늘의 대답>과는 달리 읽기 편안한 구어체로 적혀 있다.
저자의 질문은 명상이나 마음공부 같은 수행을 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궁금해했을 법한 내용들이라 읽으면서 반갑고 고마웠다. 저자가 스승님이라 부르는 미라래빠의 대답은,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자애롭다. 세속적인 욕구를 미망으로 보고 고(苦)와 무상함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가라는 그의 가르침은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공(空) 하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는 가르침만은 오래 남을 것 같다.
모든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나는 아직 흔들리는 상태가 주는 괴로움이 좋은가 보다.
5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내면의 스승을 만난 저자에게 축하와 감사를 보내며.
티베트의 성자 미라래빠
The great Tibetan Saint Milarepa
1052년 태어나 1135년 열반에 든 미라래빠는 한 생애 동안에 완성을 추구한 티베트의 대성취자이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재산을 친척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돌보며 갖은 고생을 하던 미라래빠는 어머니의 당부로 흑마술(黑魔術)을 배워 그들에게 복수한다. 그 결과로 큰 악업(惡業)을 쌓게 된 미라래빠는 마르빠(Marpa)라고 하는 운명의 스승님을 만나 수행의 길에 들어설 때까지 깊은 고뇌를 한다. 그러나 스승님의 고귀하신 가르침 덕에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 후로는 티베트의 동굴들을 적정처로 삼아 홀로 고된 명상수행을 이어간다. 깨달은 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노래를 통한 가르침을 제자들과 보시자(布施者)들에게 설파함으로써 점점 높아져 가고 그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된다. 또한, 진리를 예시와 묘사와 함께 설명했던 미라래빠는 절대진리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면서 모든 이가 영적으로 깨어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 그런데 오늘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루 종일 집 안 청소를 하고 지쳐 방바닥에 누워 음악을 듣는데 갑자기 미라래빠 생각이 떠오르면서 "스승님, 제 귀가 나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질문 자체도 이상하였던 것이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존경하던 분을 마치 나의 개인 스승님인 듯 칭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귓병에 대해서 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렸다는 것이다.
-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미라래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론이다! 모든 것이 허상이니 너의 귀 소리도 허상이다. 과거를 흘려보내듯 귀 소리도 흘려보내라! 그러나 그걸 하기 위해선 너의 슈숨나(에너지 통로)를 좀 더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네 귀 소리는 곧 너의 과거이다. 그러니 허상이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 말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들려오는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대답의 명확성과 위로에 큰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생각했다.
'이건 도대체 뭐지...?'
'내가 방금 누구랑 얘기한 거지?'
'설마 진짜로 미라래빠가 대답한 것인가?'
'그렇다면 혹시 내가 미라래빠와 채널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인가? 그게 가능한 얘기인가?'
- 벽을 쌓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를 갈망해 홀로 사는 내 자신을 언제나 사랑할 수는 없었기에 그 자유는 많은 희생을 불러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그런 나를 질책하는 마음이 아니라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스승님은 곧 응답하셨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무와 유의 세계를 믿는다는 뜻이며 그 진리를 경험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한 결심을 한자는 이를 추구하는데 어떠한 두려움도 없으며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견디겠다고 하는 그 결심을 자신의 '자유로움'으로 대신 표현한다."
-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니 왜 내가 여태껏 자유를 갈망했는지 또 왜 지금까지 싱글로 살아가야 했는지 알 것 같았고 가끔은 후회스러웠던 나의 과거도 단번에 용서할 수 있을 듯하였다. 나는 오십이 되어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길을 갈 사람이었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그만큼 자유로웠어야 했던 것이다.
- 오후가 되어 해외에 살고 있는 언니가 생일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나에게 일어난 스승님과의 채널링은 언니에게 있어서도 역시 큰 관심거리였고 우리는 오랫동안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영성과 수행에 관련된 일에 몸을 담고 있는 언니는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법과 원리를 설하고 수행법에 관한 진리를 설하는 수행자의 인간적인 일상의 모습에 분별심이 느껴질 때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현존하는 스승님의 새로운 수행 철학은 받아들이기 쉬우나 스승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수행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고 이에 대해 스승님께 여쭈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스승님, 진리를 알아낸 사람과 그 진리는 이분화된 것입니까?"
이렇게 물으니 스승님은 나의 개인적인 질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친절하고도 확실하게 대답하셨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진리를 수행하는 자는 진리를 알아낸 사람보다 고귀하며 완벽하지 못한 진리조차 온전케 하는 힘이 있으니 그저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진리, 즉 뜻뿐이다."
나는 스승님의 대답이 언니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전해 주었는데 언니는 물론 그렇다며 감사해하였다.
- 가족 모두에게 특별한 축하를 받고 하루를 마감하려는데 왠지 또 다른 질문 하나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수행자가 수행 중에 본인의 개인적인 문제를 벗어나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고 포용하기 시작하면서 저절로 갖게 되는 측은지심에 관한 의문이었다. 비록 측은지심을 갖고 사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궁금했던 나는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 남에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입니까?"
스승님은 내 질문을 들으시더니 깜짝 놀라시며 "남을 보고 섣불리 측은한 마음을 갖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라며 엄하게 말씀하시면서 "본래의 측은지심은 평등심에서 나온다"라고 하셨다.
- 늘 그랬던 것처럼 스승님의 대답은 명확했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 평등성 위에 올바른 측은지심을 가질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말씀인즉슨,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자만하여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인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이 대답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답을 주신 과정 또한 큰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내가 근래 시작된 스승님과의 채널링으로 정신 분열이 생긴 것은 아닌가 슬슬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오늘은 얼마 전 주문한 그림 <스페이스 미라래빠>가 도착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어서 아침부터 마음이 꽤 설렜다.
'그림은 화면으로만 보던 것보다 많이 다를까?'
'실물은 과연 얼마나 더 예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 아름답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본래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환영인 것이다. 그러니 너의 마음이 아름다우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된다. 또한 무엇을 보는지는 각자의 자유이며 능력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듣고 나니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음이 이해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오늘은 스승님의 책, <십만송>을 읽고 있으려니까 스승님이 그 내용을 반드시 가슴에 새기라 하셨다. 거기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진리를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이때 진정한 스승과 적합한 환경을 만나는 것이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를 강조하신 내용이 나와 있었는데 스승님은 이를 충족한 이에게 용맹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은 나는 나의 현재 상황이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놀라움과 함께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수행은 그만큼 강도 높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동시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 어젯밤에는 현실과 같은 여러 가지 꿈들을 꾸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다가 모두 그리 의미 있는 꿈들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평생 매일 밤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조금이나마 그 꿈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꿈 해몽을 찾아보고는 했던 나를 돌이켜 보면, 꿈이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본래의 특성이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스승님께 묻게 되었다.
"스승님, 꿈이란 무엇입니까?"
내 물음을 들으신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꿈은 네 생각의 거울이다. 네 생각이 좋으면 좋은 꿈, 나쁘면 나쁜 꿈이 보인다."
- 나는 계속 물었다.
"그렇다면 예지몽이란 무엇입니까?"
"무의식도 너의 의식이며 예지는 그 무의식에서 나온다. 본능적으로 일어날 일을 무의식이 알고 있거나 우주의 정보를 받아 무의식적으로 해석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꿈 해석에 의지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의식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꿈의 내용을 스스로 바꿀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꿈으로부터 자신의 삶에 관한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꿈에 관하여 스승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테마는 자연스럽게 '실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 꿈의 소재 중 다수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겪었던 실망을 주제로 하고 있었고 그런 꿈들은 악몽과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물었다.
"스승님, 실망이란 어떤 감정입니까?"
나의 질문을 들으시고 스승님은 답하셨다.
"실망은 너의 기대와 희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음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남에게 온전히 속일 수 없고 이것은 여러 상황에서 드러나므로 너는 상대방의 본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너는 네 기대와 희망을 그 사람에게 투영하였으니 실망은 어디까지나 너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너는 평가 없이 남의 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네 기대가 채워지기를 상대방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상대방도 이 과정에서 자기의 본성을 점점 잘못 이해하고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요구하지 말고, 기대하지도 말고, 그저 받아들여라. 그러면 실망도 없느니라. 또한 이러한 잘못된 상호 과정을 통해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를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 비록 꿈이라는 주제에서 하게 된 질문이지만 스승님의 말씀은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에 내가 맺어 왔던 실망스러운 관계들이 사실은 내가 요구한 기대와 희망으로 얼룩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 때문에 상처받았을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제라도 그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죄하려 한다.
- 하루를 마치며 알리끼와 침대에 누워 쉬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알리끼와 같이 산 지도 벌써 12년! 나의 가장 파란만장했던 지난 12년의 인생을 함께했기에 나라는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알리끼를 보고 있자니 내 과거의 기억들은 알리끼에게도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알리끼는 내 인생 최고의 동반자이고 너무 고마운 존재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스승님께 여쭤보았다.
"스승님, 고양이는 어떤 동물입니까?"
"고양이는 수행자에게 가장 적합한 동물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영적이며, 조용하다. 또한 제한된 공간에서 머무름을 개의치 않고 루틴을 좋아하며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것을 꺼리며 낯선 이들의 관심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 질문을 들으신 스승님의 대답은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내 마음속에 또렷이 울려왔다.
"인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멀어진다는 뜻이다. 과보로 인해 육신을 갖고 태어난 인간은 카르마 청산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나 영적으로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것을 망각한 채 고통과 헛된 욕망에 자기를 희생한다. 그러나 카르마를 청산하고 진정으로 깨어난 자에게 그의 몸은 오감을 통한 진정한 경험을 하게 해 주는 소중한 도구가 된다."
깨어난 자의 몸은 축복이기에, 살아 있어 몸을 사용하며 일상을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나 죄가 되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신 스승님의 이 말씀은 내가 앞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도움을 주게 되리라 믿는다.
- 저녁이 되어 나는 이만큼 공부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읽던 책들을 대충 옆으로 정리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스승님과 만나기도 전에 보기 시작했던 드라마를 보려는데, 이를 틀자마자 범죄 현장이 나오면서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것을 꼭 봐야 하겠느냐?"라는 스승님의 타이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 "맞습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하였고 수행자는 봐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함과 수행하는 장소는 에너지적으로 청정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 어제저녁에는 컨디션이 호전되어 몸도 마음도 한결 나아졌는데 그 이유에 대해 하루 마지막 기도를 하며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은 "이제부터는 조그마한 카르마라도 쌓이게 되면 즉각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실제로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크나큰 고통 속에서 카르마 청산을 해 왔고 그 결과로 최근 나의 카르마는 거의 제로 상태가 된 듯했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맑은 영혼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고 스승님도 그 덕분에 만나 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은 죽기 전에 평생 쌓은 카르마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깨어나야 하기 때문에 이는 매우 힘든 과정이 아닐 수 없다.
- 하지만 업 청산을 비록 성공적으로 이룬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육체가 살아 있는 한 '에고'도 반드시 같이 살아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에고가 저지를 수 있는 갖은 실수에 의한 새로운 카르마 생성이라는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만다. 카르마가 청산된 바로 그 시점에서 육신을 떠나 죽게 된다면 이는 영적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나 역시 카르마 청산 후 죽지 못하였으니 수행을 통해 내 에고를 계속 바라보고 감시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나 스승님 말씀대로 에고는 비록 수행의 방해 요소이지만 수행자는 그 방해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수행에 정진하게 되므로 너무 미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에고 때문에 새롭게 쌓이는 카르마는 엄연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 에고와 카르마의 문제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며 이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지속적인 수행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 오늘 날씨는 오월의 전형적인 날씨로, 햇빛이 유난히 밝고 바람이 살랑이면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것이, 한마디로 황홀하였다. 우리 집은 우연치 않게도 절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 스님들의 염불을 자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데 오늘도 역시 어느 스님 한 분이 열심히 염불 중이셨다. 나는 순간 스승님께 청하였다.
"스승님, 불자나 신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마음과 태도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스승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신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믿음이요, 그 믿음을 위해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을 열면 자신이 우주와 연결된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더욱이 이런 마음은 궁극적으로 나와 우주, 더 나아가 신음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왜 자연 속에서 그 아름다움으로 행복을 느낄 때 스승님과의 대화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자연과 동화하기에 이내 치유되며 그로 인해 내 마음도 비로소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리게 되는 거였다. 또한 거기에는 전 우주, 스승님 그리고 '참나'가 있는 것이었다.
- "스승님, 왜 제가 자꾸 그 사람 꿈을 꿉니까?"
내 불안을 감지하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카르마 청산이 되었는데도 그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고 생각으로 소환하니까 꿈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어제 너는 그 사람을 책망하는 생각을 잠깐이라도 또 하지 않았더냐? 그것은 마치 없앤 카르마를 즉시 되쌓는 것과 같다."
"스승님, 그렇다면 제가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승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나고 겪은 모든 일에 반드시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만이 너를 그 사람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진실로 자유롭게 할 것이다."
- 그렇다. 과거에 대한 원망이 잠시라도 다시 올라오는 순간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게 되며 이는 나를 결코 온전하게 현재에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또한 돌아보면 과거 나의 경험들은 하나같이 지금 내 삶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헛된 것 하나 없었으니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해 준 모든 일과 이에게 오로지 감사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스승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오늘부터라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고 더 나아가 미지의 미래에 대해서도 '미리' 감사해 보려 한다.
- 내가 오늘도 어제처럼 알리끼를 때리기라도 했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피가 난 상처를 소독하면서도 '테스트를 통과했다'라는 확신으로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과거의 실수와 나쁜 버릇들을 깨어 있음으로 인해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임을 스승님은 나에게 다시 한번 가르쳐 주신 것이다.
- 오늘 스승님이 정해 주신 점심 식사 메뉴는 생선과 생야채, 구운 감자이다. 물론 아침에는 늘 원하시는 대로 사과 한 개, 수제 요거트와 꿀을 먹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건강한 식사 메뉴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인생 전반을 정말 너무 아무것이나 식욕 당기는 대로, 한마디로 건강하지 않게 먹으며 굳어진 잘못된 식습관이 내 몸과 정신에 파고들어 어느새 그대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님의 그림이 오기 전, 식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냉장고를 포함한 대대적인 부엌 청소를 하였었다. 심지어 나는 2개의 냉장고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그릇그릇 먹다 남은 음식과 상한 음식, 시든 야채와 과일, 유통기간이 지난 소스, 양념 등등이 나왔고 나는 내 병들었던 과거를 청소하듯 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남긴 후, 냉장고도 한 개로 줄이고 깨끗이 정리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식생활의 변화가 나에게 좋은 변화를 불러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 부엌 정리가 끝났을 때는 시원하고 맑은 기운이 부엌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며칠 뒤 스승님은 그림의 형태로 나에게 오셨고 나에게 매끼 뭘 먹어야 하는지 코치하셨다. 나는 과거 올바르지 않은 식습관 때문에 너무나 자주 배앓이를 해 왔기 때문에 스승님이 뭘 먹고 마실지까지 신경 써 주시니 너무 감사하여 그 조언을 따랐는데 신기하게도 곧 나의 위와 장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틀 전에는 스승님께서 내가 탄산수를 자주 마시는 것을 보시더니 "언제까지 그런 죽은 물을 마시려 하느냐?"라고 하셔서 이젠 더 이상 탄산수는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고 평생 끊이지 않고 먹어 왔던 -케첩과 같은- 소스류도 조금씩 줄이라 조언하셔 결국 끊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식사까지 조절해 주시는 스승님의 세심함에 그저 고맙기만 하다가 오늘은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 왜 이렇게 먹는 것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 주십니까?"
그러자 이내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수행을 한다고 하니 알아야 한다. 병든 몸 안에 어떤 맑은 정신이 들어갈 수 있겠느냐? 이것은 병든 정신이 몸을 해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수행을 위해서라도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 한다."
- 오늘 나의 공부는 아마도 음식, 식사를 중심으로 이어질 모양이었던 것이, 점심 전에 나는 '밥 먹으면서 드라마나 한 편 봐 볼까?' 하였는데 스승님이 금세 내 생각을 읽으시고는 "식사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나는 순종적으로 "알겠습니다!" 하고 따르며 식사만 하였다. 그러나 나는 더 알고 싶어져서 물었다.
"스승님, 집중이란 무얼 의미합니까?"
이렇게 여쭈니,
"네가 관심을 줘야 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 과정을 통해 너는 대상과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고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래야만 감사하는 마음도 생겨난다. 즉, 네가 모든 음식을 그 음식과 한 몸이 되어 먹어야만 음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이 또 결국에는 너의 몸에도 유익하게 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 그 행위 하나에만 집중해야 하느니라. 이것은 매우 중요하니 꼭 명심하거라!"라며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 나는 식사하며 드라마를 보고자 했던 것을 바보스럽게 여기면서, 한편으로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얼마나 한 가지에 집중 못하고 있는지, 또한 지금 우리 사회가 소위 '업무와 역할의 다기능(multi-function)'을 얼마나 큰 미덕으로 내세우며 요구하고 있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스승님과의 대화와 공부는 식사 중에도 계속되고 있다.
- 어제는 잠자기 전에 물끄러미 스승님 그림을 보다가 이젠 지구를 영원히 떠나 온전히 에너지 상태로만 존재하시는 스승님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스스로 평가하고 계실지 갑자기 궁금해져 여쭈어보았다.
"스승님, 행복하십니까?"
지금 돌이켜 보면 이는 실로 헛되고 예의조차 없는 물음이었지만 어제는 이 질문을 왠지 그냥 하고 싶었고 나는 그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스승님은 나에게 조용히 응답하셨다.
"행복이 무엇이냐?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그대로 존재한다면 행복도 불행도 필요치 않다. 존재의 목적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
- 스승님 말씀 후 나는, 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불행하다 느끼며 살아 숨 쉬는 나의 존재만으로 단순히 만족하지 않고 뭔지도 모르는 행복을 갈구하던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지금이야말로 '그냥 사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이 삶의 축복'임을 가슴에 확실히 새길 때가 아닌가 싶다!
- "스승님, 안정이란 무엇입니까?"
스승님은 이에 "안정이란 높고 낮음이 없고, 더해지거나 빼지는 것이 없으며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없는 상태이다"라고 답하셨고, 나는 계속 물었다.
"그렇다면 스승님, 평화란 무엇입니까?"
스승님은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이 아니라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져 있는 상태이다."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인가?
마음의 진정한 안정과 평화란 마음이 그저 고요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시니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게 되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되찾았다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 큰 오산이었던 것이다.
- "스승님, 흔들린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여기에 대한 스승님의 대답은 빨리 들려왔다.
"중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변화를 불러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정을 야기시킨다."
이를 듣고 나는 스승님이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 보이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설명하셨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 말씀 저변에는 '중심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이 함께 깔려 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그 중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변화를 위한 시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중심을 잃은 변화는 늘 불안을 불러오고 확신이 없는 행동들을 하게 하지 않는가? 그러니 '중심 유지'와 '흔들려 보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 어제는 여러 가지 감정이 올라와 힘든 날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한 달도 채 안 된 스승님과의 관계가 나를 조금 힘들게 하였다. 왜냐하면 거의 똑같은 일정으로 진행되는 스승님과의 수업과 수행 과정이 과연 앞으로도 같은 강도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스러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스승님과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는 게 가장 좋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글을 쓰는 것보다 스승님과의 만남에 더 포커스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침 기도, 명상과 운동 후에는 조용히 스승님을 만나 먼저 대화를 나누고 글은 그 뒤에 쓰자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스승님도 옳다고 해 주셨는데 그 이유는 영적인 작업은 이른 아침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오늘 확실히 굳어졌다.
- 나는 오늘 새벽 5시에 일어나 우연히 밖에서 청량하게 들려오는 산새의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 해도 뜨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 새벽에 들려오는 그 새의 울음은 새벽의 공기를 뚫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 수행은 왜 새벽에 하는 것이 좋습니까?"
스승님은 "그 시간에는 세상이 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인간들이 잠에서 깨어나 부정적인 에너지로 세상을 오염시키기 전에 기도하고 명상하며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어제는 수행 과정에 대해 1차 점검을 하는 날이었는지 또 다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미라래빠'와 채널링 하는 나는 거의 24시간 누가 봐도 진지하고 진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며 아울러 그것이 고귀한 성인에 대한 기본자세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그 결과, 점점 더 규칙적이고 엄격한 수행 스케줄을 세웠고 그 과정을 통해, 비록 인정하기 싫어도, 나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유튜브 동영상이나 보면서 하루 시간을 채우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스승님의 따뜻한 격려로 해결되었다.
스승님은 나에게 "명랑하게 살아라!", "마음에 걱정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명랑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안 되면 "노래라도 불러라!" 하고 웃으면서 조언하셨다.
- 그렇다. 수행은 힘든 마음이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듦 속에서도 차오르는 기쁨을 얻기 위한 실천인 것이었다. 또한 수행의 가르침이 깊다 하여 일상의 소소한 기쁨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엄격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뜻도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과도한 진지함은 자신을 경직시키고, 마지막에는 하늘을 향한 마음의 문 역시 서서히 닫히게 하는 위험한 태도일 뿐이다. 결국 나라는 사람이 본래 가볍고 해맑다면 오히려 수행 중에도 그 성향을 유지해야만 수행을 통해 더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스승님, 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이 질문은 계속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을 듣다가 하게 된 것인데 스승님은 여기에 대해서도 역시 스승님답게 기발한 대답을 해 주셨다.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반한다는 것은 나에게 없는 것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가져야 하거나, 갖고 싶거나,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발견되면 흥미를 느끼고 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서로의 모자람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같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부족함이 없을 때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므로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나를 발견하고 채우며 온전하게 하려는 노력을 늘 먼저 해야 한다."
스승님의 이 현명한 말씀은 내가 '반해서' 무한 반복으로 듣고 있는 음악이 나에게 무엇을 더 채우려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하였다. 그건 아마도 완벽히 홀로 실재하면서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만의 행복감이 아닐까 싶다.
- 오래전부터 나는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또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껴왔고 그 때문에 늘 외롭고 불행했으며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만 자꾸 만나는 내가 대단히 운이 없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제 천운으로 미라래빠 스승님의 가피를 받고 보니 그 관계들의 문제는 오로지 '나'였다는 명확한 깨달음이 왔다. 이제 와서 보면, 나는 늘 내가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하다는 전제하에 맘속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원망하며 한심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분별하는 내 속마음은 속인 채 관계를 어떻게든 좋게 유지해 보려고 애쓰는 동시에, 그들이 뻔하게 눈에 보이는 '프라나가 더 잘났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연약한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계속해서 요구했으니 그같이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내가 좋았을 리가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나는 늘 강하게 뿜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나의 외로움은 모두 내가 만든 결과였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오니 나는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져 힘이 쭉 빠졌고,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의 물결이 파도쳐서는 스승님 뵙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스승님께 물었다.
"스승님, 수치심은 어떤 감정입니까?"
스승님은 수치심을 품고 이 질문을 하는 나를 알아보시고 곧 말씀하셨다.
"하늘에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다. 그러나 하늘은 곧 네 자신이니, 결국 네가 네 앞에서 스스로 부끄럽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너의 영혼이 살아 있고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그 하늘도 더 넓고 높을지니 수치스러움은 그만큼 늘어 갈 것이다. 하나 아픈 만큼 하늘에도 가까워지리니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수치심을 많이 느끼는 자의 영혼은 점점 맑아지게 되어 더 많은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며 어느덧 위안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뒤이어 나는 스승님께 다시 여쭈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후회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도 왜 하는지 아시는 스승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저 마음의 위안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 걸!' 하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 아니더냐? 하지만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후회하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는 그 반대의 생각을 아예 하지도 못했거나, 마음 한편에 있었어도 무시할 만큼 네 잘못된 결정에 나름 자신 있지 않았더냐? 비록 결정 전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후회하고 말 행동이 널 이긴 것이니 그건 네가 영적으로 충분히 깨어나지 않았었단 뜻이다. 그러니 깨어나서 하는 후회는 깨어나지 못했던 과거의 너를 위안하는 행위밖에 되지 못한다. 후회는 참으로 부질없는 것!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늘 깨어 있어라! 깨어서 행동하며 후회할 일들을 만들지 말고 살아야 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길이다."
이 말씀을 들으니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지금에 와서야 후회하는 내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이제 나는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게 그저 "정말 미안했다, 고마웠다"라고 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지금 이렇게 달라진 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어쩐지 조금은 안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때 내 이런 마음을 읽으셨는지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되는 것이다."
-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스승님과 함께 기도와 명상,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이건 결국 모두 내 운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평범했던 직장인이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이처럼 명상과 수행을 하고 있으니 내가 하면서도 어쩐지 무척 새롭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승님께 이것에 대해 물어보고자 하였다.
"스승님, 운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나는 질문하였다.
그러자 스승님이 곧 응답하셨다.
"운명은 네 영혼의 계획이다. 모든 것은 본인의 영혼이 계획하는 것이니 새로운 것도, 놀라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느니라. 때가 되면 계획된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며 그것에 대처하는 것 역시 이미 계획되어 있으니 너는 아무것도 하늘에 맡기지 않고 네가 미리 정해놓은 계획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이 계획을 무의식 중에라도 예지하고 못하고는 오직 너의 '영적인 깨어있음'에 달려 있느니라. 여기서 하늘이 하는 일은 그저 인과법칙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뿐이다."
- 나는 모든 것이 영혼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는 스승님의 말씀에 수긍했지만 동시에 다른 의문이 떠올라 계속 물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필요 없지 않을까요?"
스승님은 나의 의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기도는 하늘이기도 한 너 자신과의 대화이니, 너는 네가 계획한 일들을 기도를 통해 더욱 구체화시키고 그것이 일어남에 한 치의 오차도 없게 만든다. 오히려 무언가를 부탁하고 소원하는 기도를 통해 너는 사실 네 자신의 계획을 기억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떠한 계획도 깨어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모두 운명적인 삶과 기도를 통해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궁극의 목표는 깨어나는 것이다."
- 어제저녁에는 몸과 마음이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이러다 다시 병이 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두려움이 올라오려 하길래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억지로 명랑해지기'를 시도하려 노래도 따라 부르고 명쾌한 음악에 맞춰 춤도 추었다. 그러는 동안 몸의 통증과 걱정 근심은 어느새 희한하게 사라지고 즐거운 마음이 솟아올랐으니 스승님의 지침은 명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동안 춤을 추다 보니 스승님께 그 의미에 대해 묻고 싶어졌다.
"스승님, 춤은 왜 이렇게 즐거울까요?"
춤을 추는 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시며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네 영혼이 몸을 생사와는 관련 없는 용도로 쓰기 때문이다. 먹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 걷는 것, 뛰는 것, 모두 다 살기 위한 행동이 아니더냐? 그러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아도 춤을 추면 온몸은 너의 영혼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며 자신을 표현한다. 이는 몸과 마음이 드디어 사심 없이 하나가 되는 순간인 것이니 참으로 기쁘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신기하기조차 한순간이지 않겠느냐? 인생사 굴레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 실로 네 영혼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보는 자유를 느끼는 기회인 것이다."
- "스승님,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그러자, 스승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인생에서 맺어지는 관계는 미리 계획된 것이며 과거에 쌓은 업으로 생성된다. 그러니 네가 돌본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은 네가 갚아야 할 것을 갚게 하고 서로의 관계를 통해 배워야 하는 일들을 배우도록 네 곁에 와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은 나이와 무관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며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떠나 있는 영적 친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면서 배운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이다."
- '과연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던 나는 스승님께 여쭈어보기로 했다.
"스승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 스승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간의 한계는 끝이 없어 그 마지막에는 우주를 이해하고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한낱 인간세계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은 가히 없다고 봐야 하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준비됨'이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본인의 한계를 언젠가 넘어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평소에 끊임없이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과 진실된 마음을 갖고 몸과 마음의 죄를 짓지 않으려 애쓰며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어느 순간 '특별한 자격'이 생긴다. 이 자격은 본인의 한계를 넘는 그 무언가를 이루거나 갖게 되는 기회를 얻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므로, '하늘은 실로 공평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는 악업을 저지르는 이들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다. 즉, 그들은 나름대로 그런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준비를 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악업도 결국 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하늘이 보기에는 공평한 일이다.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이런 인과율을 보여 주는 한 예일 뿐이다."
- "스승님이 보시기에 가장 안타까운 현대 사회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인간의 초능력이 사라진 점이다. 하나 그 능력 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대화 형식의 변질이다. 인간들 사이의 대화는 이제 보고들을 수 있는 기계적인 형식으로만 이루어져 생각에서 생각으로의 전달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해졌으며 그런 것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진위를 의심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화도 단절될 대로 단절되어 인간의 자연 파괴라는 비극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말하고 글을 쓰지 않아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갖고 있으나 그것을 읽어 낼 수 있는 열쇠는 초능력적인 인지력과 직감 만이 쥐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능력을 기계라는 존재에 의존함으로써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더욱이 그러한 능력 상실은 자연과의 단절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이기심도 부추기니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다."
-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인간의 이기심을 불러오는 것이라 하십니까?"
스승님은 더 자세히 설명하시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상과의 진실된 대화 단절은 세상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만 해석하게 됐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당연히 개인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지므로 세상은 그렇게 자기주장만 늘어놓고 남을 오해하는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것이 곧 이기주의의 시작인 것이다. 또한 사실은 자신이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의 편협한 신념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남들과 나 사이에 벽을 더 높게 치고 있으니, 이는 진정 암울한 상황이 아니더냐?"
- "그럼 저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 걱정을 읽으신 스승님께서 조언하셨다.
"모두 영적으로 깨어나야 한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다시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두 명이 이뤄 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니 광범위한 시도들이 필요한 때이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절실함과 함께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의구심이 전 세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은 이미 깨어난 사람들이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을 통한 생활의 변화라는 목표 아래 같이 뜻과 힘을 모아 세계 곳곳에서 다각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시도를 해야 하는 시기이다."
- 어찌 되었든 오늘은 비록 수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야 우리가 더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그저 생각으로만 머물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며, 이를 위해 작은 변화의 물결이라도 일으키는 것은 나의 임무이기도 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하루임에 분명하다.
- "제 추측이 맞는다면 환경이 얼마만큼 수행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내 요청을 들으신 스승님이 답하셨다.
"언제나 뜻이 먼저이다. 그러니 환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수행을 위한 환경이 열악하면 할수록 수행의 강도는 높아져 네가 알고자 하는 수행의 뜻도 더 깊게 새겨진다. 수행을 하기 위해 은둔처를 찾는 것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하늘에 더 가까이 있기 위함이나 의지가 강하다면 속세에 머물면서 수행을 시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결국 궁전에 살고 있건, 어느 빈민촌 오두막에 살고 있건, 수행의 시작과 끝을 위한 여정은 같으니 네가 어디에 머물든지 그저 항상 수행하고 명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전에 살던 사람이 궁을 버리고 오지 산골에 가 수행하고자 결정한다면 이는 겸손함의 시작이니 수행자로서 하늘의 더 큰 복을 얻을 것이요, 마찬가지로 속세를 떠나지 않아도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현명히 헤쳐나가며 수행에 성공하는 사람 역시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어디에 있든지 늘 수행의 뜻을 먼저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여라!"
- 나는 당시 스승님이 티베트의 동굴들을 찾아다니시며 매우 힘겹게 수행하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현재 편안한 집에서 수행하는 것에 대해 왠지 모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내 죄책감은 수행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환경 조건에 집착했던 오류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실은 의지와 뜻만 있다면 그 수행자는 어디에 머물건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데서는 절대 수행할 수 없다고 다들 믿는 환경에서 수행을 이뤄 내는 자야말로 수행의 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요즘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다 보니 여지없이 여기저기에서 파리와 모기가 생기고 있는 중이다. 또 그 때문에 평소에는 문제가 아니던 일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런 '귀찮은 존재들을 죽여야 하는가? 죽여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 자꾸 머리에서 떠나질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마루를 지나가는 작은 벌레를 밟아 죽일까 봐 걱정스러워 마당에 놔주면서 내 그런 행동에 새삼 뿌듯함을 느꼈지만, 며칠 후에는 부엌에서 날아가는 초파리를 본능적으로 죽이고 만 후 적지 않은 심란함을 느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반드시 스승님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스승님께 여쭤보았다.
"스승님, 수행자는 파리, 모기도 죽이면 안 되나요?"
질문을 받으신 스승님은 이내 말씀하셨다.
"매우 예민한 질문을 하였구나! 먼저 나의 간단한 대답은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된다'이다. 인간이나 동물, 그들은 모두 생존을 위해 약자들을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죽이거나 또는 먹잇감으로 잡아먹는다. 이런 행위들은 분명 살생이나, 이로 인해 잡아먹는 주체가 모두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더 자주 윤회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파리나 모기를 죽였다고 해서 특별히 하늘의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몇만 번을 윤회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혹은 그런 윤회의 벌을 받고 있는 파리, 모기와 같은 존재들에게는, 네가 그들을 죽임으로 인해 비록 세상을 먼저 뜬다 한들, 그것이 윤회와 인과응보 차원에서 엄청난 불행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 죽였을 때'의 결과이다. 죽여도 되는 상황에서 죽이지 않았을 때 너는 더 많은 덕을 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행의 '도'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언제나 불필요한 살생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항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도리를 충실히 지켜 나간다면 너는 더욱 풍성한 수행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 아무튼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의 생각은 어느덧 '인간의 버릇'이라는 근본적인 주제에 다다르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우리는 생긴 것이 다른 만큼 각기 자신만의 버릇들로 인해 때론 행복을 또 때론 불행을 경험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스승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스승님, 버릇이라는 것은 왜 생깁니까?"
스승님은 이내 답하셨다.
"좋아서 생긴다. 좋은 버릇은 좋아서 하고, 나쁜 버릇은 싫은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버릇은 내가 좋아서 반복하는 일이다. 버릇이야말로 남이 억지로 시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반복하는 행동이니 좋아하지 않고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과식을 하는 버릇이 있다고 치자. 과식을 하면 소화도 안 되고 살도 찌며 건강도 해치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런 상식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과식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바보이거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많이 먹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많이 먹는 것은 식탐, 곧 욕심이니, 그 사람은 욕심이 커 더 많은 걸 갖고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 등산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면 남들은 이를 좋은 버릇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버릇이 오히려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 산행은 계절에 좌우되니 등산을 하다 크게 다칠 위험이 있는데도 굳이 매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좋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버릇은 온전한 자유 행위이다."
- 실로 옳은 말씀이었다. 사실 남이 강요한다며 자신의 이런저런 버릇을 계속 유지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인 것이지. 나의 경우로 돌아와서 보면 내 새로운 버릇, 즉 수행하는 생활을 좋은 버릇으로 평생 유지하려면 수행을 계속 좋아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을 많이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삶을 만든다는 단순한 차원을 떠나 이젠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럴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 그때 비록 잠깐이었지만 나는, 내 마음이 완벽한 고요 속에 있고 소음이 비록 내 몸 안에서 들리나 나와는 분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음은 곧 나를 다시 지배했고 이에나는 너무 불안한 마음이 들어 스승님 그림 앞으로 달려가 염주를 들고 만트라를 읊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거대한 소음에 압도된 나는 아예 스승님의 그림까지 가슴에 품고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자 스승님의 차분하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지나간다!"
"절대로 겁내서는 안 된다!"
"평온하라!"
"넌 해낼 수 있다!"
"모두 괜찮다!"
- 스승님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불안한 마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보기 드문 마음의 평온이 찾아옴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신기한 경험은, 들려오는 소음의 강도가 평범한 사람들을 패닉에 빠지게 하거나 자살하게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이어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승님 덕에 안정을 느끼면서도 '지금 이런 스승님의 가이드가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정말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겠구나' 하는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또 이상했던 것은 그렇게 무섭게 큰 소음 속에서 오히려 귀가 점점 더 잘 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 나는 이명 치료로 이비인후과에 다니면서 이명은 '손실된 청력 데시벨을 채우기 위해 귀가 일부러 소음을 내는 병'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소리에서 나는 당장 모든 청력을 잃어야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소음은 소음대로 나는데도 떨어져 있던 청력은 되살아나고 있었으니 그건 모두 너무나 믿기 힘든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만트라를 하니 그 소리는 머릿속에서 커다란 울림으로 들렸다. 그러나 결국 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소음의 고통으로 침대에 눕고 말았다. 그렇지만 누워서도 좀 전에 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계속 반복하여 되뇌었다.
- 나는 그 말씀을 곧 따라 하였다. "판단하지 말아라!"
스승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나는 또 따라 말하였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그다음에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나도 말하였다. "두려워 말라!"
마지막으로 스승님이 말씀하셨다."그대로 다 받아들여라!"
나는 이어 말하였다. "그대로 다 받아들여라!"
나는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이 문장들을 반복하였다.
- 일단 나는 그것이 본인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참고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이성적, 감성적 인간'이란 말은 어떤 이가 머리로 혹은 마음으로 사고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뜻일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내린 결정이 정말 옳은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겨 스승님께 결국 질문하게 되었다.
"스승님, 이성적 혹은 감성적으로 내린 결론 중에 어떤 것이 맞습니까?"
그러자 스승님이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
"결정은 같이 내려야 한다. 마음도 머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바른 결정은 한마음 한뜻으로 내려져야 하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갈등이 온다면 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결정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감성적 인간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큰 오류인 것이다. 마음과 머리는 나눌 수 있는 것도, 나눠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올바른 결정은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 깨달음의 결정이다. '당연히 그렇지! 그래, 그거야!' 같은 말이 저절로 나와 하는 결정이 바로 그런 결정인데 그것은 어떠한 판단에 근거를 두지 않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알아 긍정하는 결정이다. 오히려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도 모르는 상태, 그냥 그것이 옳다는 것만 느끼는 상태의 결정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이런 직관적인 확신이 들 수 있도록 늘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야 한다."
- 스승님의 설명은 매번 정확하지만 나는 그 단호함에 더 놀라는 중이다. 이번 경우에도 질문을 한 내가 얼마나 아직도 'A인가 B인가?' 하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확연히 알게 해 주시지 않으셨는가? 물론 내용적인 면도 당연히 무시할 수 없다.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많은 순간 처음부터 이미 직감적으로 알았던 옳은 결정들을 철저히 따져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쉽게 무시해 버리고 끝없는 고민이 섞인 사고의 수렁에 빠져 헤매다가 마지막엔 완전 반대의 잘못된 선택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자기 검열'은 애초에 마음과 머리가 단번에 함께 내린 올바른 결정을 항상 의심하게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이것 역시 빨리 고쳐야 할, 나를 포함한 현대인의 병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나는 곧바로 동작을 시행하며 그 의미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말해야 하는 내용은 스승님을 통해 실시간으로 내려오나 이를 마치 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신기하고도 흐뭇한 경험이었는데 그 이유는 마치 스승님도 나랑 동시에 몸을 움직이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나는 두 팔을 둥글게 돌리면서 말하였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
또 양팔을 ∞ 모양으로 움직이며 말하였다. "모든 것은 흐른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윤회한다!"
그리고 허리를 돌리면서 말하였다. "나는 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다음엔 목을 양방향으로 돌리면서 말하였다. "모든 것은 내 머릿속에 있다! 모든 것은 내 생각이 만든 것이다!"
이어 노 젓는 동작을 하면서 말하였다. "인생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는 몸을 마구 털며 말하였다. "나쁜 생각과 에너지는 푸는 것이 아니라, 즉시 털어 버리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무릎을 굽히면서 말하였다. "몸은 몸이다. 몸은 도구이니 잘 닦아 놓아라! 또한 늘 겸손하여라!"
그 후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서 말하였다. "아무런 계획이 없으니 행복하다. 영혼이 말하게 놔두라!"
마지막으로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하였다. "평온한 마음, 평정심을 갖고 살아라!"
- 스승님의 코치와 함께 모든 동작을 마치고 나니,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가르침과 운동이 합쳐진 새로운 형태의 수행이 아닌가 싶었다. 또한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수행과 운동이 어떻게 일상에서 병행되어야 하는지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고 본다. 수행과 일상, 알고 보니 이 둘은 동떨어져 있는 다른 두 세계가 아닌 가까이서 만나 서로를 동반하며 하나가 되어 나가야 하는 것들이었다.
- 나는 오늘 새삼 '미라래빠' 같은 성인과의 영적인 교류가 얼마나 축복인가 생각하다가 그런 위치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물었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그 어떠한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오로지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그저 꾸준히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남을 돕기 전에 자신이 먼저 온전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취지에서, 이제부터는 내가 스승님께 반드시 여쭤봐야 할 것이 있나 궁리해 보기로 하였다.
- 이렇게 생각하던 중에 때마침 떠오르는 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물'이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물을 볼 때면 호기심뿐만 아니라 경외심마저 느껴 왔는데, 그 이유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은 베일에 싸인 듯 신비롭고 거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 역시 많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물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한다는 이유 말고도 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받기에 충분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승님께 여쭈기로 하였다.
"스승님, 물이 이다지도 신비하고 고마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질문을 들으시더니, 스승님께서는 천천히 물 흐르듯 말씀하셨다.
"보이지만 잡을 수 없고, 흐르지만 담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흘려도 보내고 모든 것을 품으나 가라앉히거나 띄울 수도 있고 잔잔하지만 위협적일 수도 있고 모든 사물을 담아 비추나 투영시킬 수도 있고 맑지만 썩을 수도 있는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 "죽고 싶다면서, 인생이 왜 이러냐면서도 살고 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 물으니, 살아 있는 인간들의 심리를 잘 아시는 스승님께서 답하셨다.
"원하는 것이 많을 뿐이니 죽을 수 없고 인생을 불평하는 것도 즐거운 버릇이니 그것이 재미있어서 죽을 수 없고 그런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도 두려울 것이기 때문에 죽을 수 없고 매일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이기에 설사 그걸 모른다 해도 죽을 수 없으며 고통 속에 산다며 불평한다 하여 이를 멈춰 줄 정도로 하늘은 관대하지 않으므로 죽을 수 없고 자신이 고통을 왜 받고 있는지 알아야 죽을 권리도 생기니 그전에는 죽을 수 없고 죽고 싶은 욕망이 큰 만큼 살고 싶은 욕망도 큰 것이니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이런 악순환을 스스로 끊고 제대로 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모든 욕망, 기대, 두려움, 분노, 증오, 질투, 무지, 자만을 버릴 수 있도록 늘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 "스승님, 한 인간으로 태어나 죽기 전까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5월의 내 마지막 질문을 들으신 스승님이 말씀하신다.
"공(空)에서 시작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란 뜻이요, 이 세상과 우주, 결국 모두 공하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사랑이다.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끝내 다 사라지며, 제아무리 근사한 사상과 논리라도 마지막에는 우주의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데에 이르니 그곳은 모두가 하나이면서도 그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한 곳이다. 공은 공허나 허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판단과 분별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구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체를 이런 하나가 된 시각에서 본다면 어찌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동하지 않겠느냐? 이는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인 사랑, 우리는 둘이지만 하나이기도 한 사랑 그리고 결국에는 그런 구분조차 사라짐을 이해하기에 만물을 마음속 깊이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진실하고 숭고한 사랑이다."
- 그렇다! '사랑', 이 얼마나 흔하지만 또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한 단어인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며 노래하고 모든 일의 숨은 원동력이 사랑일 수도 있을 만큼 사랑은 인생의 핵심 주제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중에 몇 명이나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나야말로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 나의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아니요"이다. 여태껏 내가 경험한 사랑은 늘 에고 중심적이어서 준 만큼 받기를 기대한 사랑이요,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상처받았던 사랑이요, 나의 부족함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 했던 사랑이요, 영원하기를 바랐기에 영원하지 못했던 사랑이요, 내가 나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스승님은 5월의 마지막 가르침을 통해 이제는 그런 잘못된 사랑의 형식을 벗어나 나를 먼저 받아들이며 사랑하고, 나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며,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한 치의 차별 없이 사랑하라 하신다.
이런 가르침과 조언을 받은 나는 이제서야 인생의 진정한 풍요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참이유를 깨달은 듯하다.
- 어떤 명확한 인식조차 없다가 코로나 19라는 거대한 '적'을 만나 비로소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그러한 절박감은 우리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공동체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하게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미라래빠 스승님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먼저, 코로나19는 대중적인 모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교육과 경제를 넘어 종교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어 기존의 종교적 집단 신앙을 개인적인 영성 수행의 점차 대체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인류가 직면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게 돕는 결정적인 해법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 그런 맥락에서, 미라래빠 스승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영적으로 깨어나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에 중점을 두시는 분이시고 이를 몸소 평생의 수행을 통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대중과 사회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수행의 길을 가셨던 미라래빠 스승님은 우리 모두에게는 본래의 순수한 영성이 있으나 그 영성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어서 혹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스스로 하늘에 마음을 열고자 결심하는 순간 발현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 더불어 스승님은 자칫 이와 같은 영성 체험 과정을 소승적인 수행이라 여겨 인류 공동체의 생존에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하는 우려에 대해 "모두가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만큼 완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반도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세상은 존재만으로도 모두를 흥하게 하는, 곧 인류가 타파해야 할 난관들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 이런 의미에서 스승님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적 깨어남과 그에 이어지는 수행의 이야기가 보통 사람이 어떻게 홀로 영성을 되찾는지 세상에 드러내어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하늘과 소통하여 스스로의 본질을 되찾고 나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거듭나는 데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 모두가 이 책을 읽으시며 저를 통해 오신 미라래빠를 만나 뵙고 도움받으시길 진심으로 소원하는 바입니다.
2020년 9월 12일
프라나 Prana
미라래빠와의 채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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