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프라나
출판 : 명상거북이
출간 :
표지에 실린 그림이 <스페이스 미라래빠>라고 한다. 화가 분이 에너지 상태의 미라래빠 성자를 보고 그대로 옮긴 그림이라고 하는데, 화가 분과 그림 자체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저자의 지난 책을 읽어보면 이 그림을 구매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채널링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으니,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은 아닌 것 같고...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추가 정보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늘의 대답-미라래빠의 가르침>은 <하늘과의 만남-미라래빠와의 채널링>과는 어조가 완전히 다르다. 훨씬 무겁고 진중한 문체이며, 질문과 대답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질문들은 주제에 따라 정리되어 있는데, 마음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궁금해할 법한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설하는 답들이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모든 메시지를 접할 때도 기본적으로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내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나에게 가장 와닿는 것들, '지금'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흘려보내도 된다. 내 것이라면 언제고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다.
또한 새롭게 취하는 것들이 생기면 무엇을 보내야 할지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스스로는 모르지만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믿음과 새로운 믿음이 상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상태를 방치하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원인 모를 혼란을 겪고 있다면 내부의 방향성을 재검토하고 정렬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방향성만 확실히 정한다면 세부적인 내용은 다소 낙관적으로 두어도 좋다 -고 생각한다-.
내가 서있지 않은 땅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즐거운 공상으로 그칠 수 있다. 지금 위치한 곳, 그 지점을 확실하게 뿌리로 고정해야 한다. 그리고 목적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면 끝이다. 종착지는 언제고 변할 수 있다. 확실한 출발지와 그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목적지만 고정한다면 경로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공상이라고 선을 그어놓은 상상들은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달콤한지-
감사히 읽었다.
-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구에 현존하는 존재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이미 윤회를 경험한 존재이며 내세(來世)에도 윤회 바퀴는 계속 돌 것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생이 마지막이라 느끼는 이유는 의식이 무의식을 차단하여 자신이 마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단 한 번의 인생 경험을 선물 받은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영혼의 본질 이외에 유일무이한 것이란 없으니 지금 네 영혼이 입고 있는 육체도 단순히 껍데기, 즉 허상(虛像)일 뿐이다. 굳이 특별하다면 그 육신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과 처하게 되는 주변 환경의 조합에서 오는 유일함일 것이다. 그러한 특별한 관계성에서 너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깨달아 절대진리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태어나니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한 번 산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서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그 조건에서 얼마나 수행하며 또 수행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과연 나를 위해 마련된 환경 속에서 진실을 깨닫고 내 본(本) 영혼을 깨우며 악업(惡業)을 청산하고 선업(善業)을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을 이루는 것만이 지금의 생을 이를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로 생각되게 하는 이유여야 할 것이다. 하나 해내지 못한다면 네 영혼이 풀어야 하는 과제는 윤회를 통해 계속 반복되리라."
2020년 11월 4일
- "죽음의 형식에도 차이가 있나요?"
"물론 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난다는 것은 같으나 어떤 방식으로 떠나느냐는 개개인에게 알맞은 형식으로 각기 다르게 현현(顯現)된다. 수월한 탄생과 어려운 탄생, 편안한 인생 그리고 고통스러운 인생이 있듯이 죽음을 수월하고 기쁘게 맞이하는 사람이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고 느끼는 것들은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에 쌓은 업(業)으로 결정된다. 죽음의 모습뿐만 아니라 삶의 길이도 업에 의해 정해지는데 본인의 과제를 현세에서 이미 해결한 사람이나 전생의 악업(惡業)에 의해 그 업보를 받는 사람은 일찍 생을 마치게 되며 빠르게 다시 환생한다. 반면 오래 사는 사람들은 그만큼 영적 성장의 기회를 더 많이 받게 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업에 따른 삶을 살게 되므로 그 질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며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진실이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 역시 각자 헤쳐 나가야 할 인생의 큰 과제인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 없이 대광명(大光明)을 보며 편안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고 축복이나 이는 오직 살아생전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죽음을 명상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2020년 7월 6일
- "의미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남들보다 의미 있는 삶이 있는 것처럼 남들보다 의미 있는 죽음도 있나니 이는 영적으로 깨어난 자의 죽음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 역시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려면 마지막이 오기 전에 깨어나는 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때 한 치의 두려움이나 억울함을 느껴서는 아니 되니 참된 공성(空性)과 자비의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다른 이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다른 사람을 위해 죽지 않더라도 무명(無明)에서 완전히 벗어나 존재의 대진리를 깨달은 자는 어느 누구보다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리니, 이렇게 삶과 죽음은 어디까지나 극히 개인적인 싸움인 것이다. 반면, 평생 악업(惡業)을 쌓던 사람이 남을 돕고자 하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쌓은 업(業)을 상당 부분 청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인생은 짧고 죽음은 빨리 찾아온다. 그러니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어떠한 후회도 없기 위해 하루라도 미루지 말고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고한 수행만이 의미 있는 죽음을 준비하게 돕는 유일한 방편(方便)이기 때문이다."
2020년 6월 26일
- "생각, 말, 행동으로 짓는 죄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무엇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죄의 무게는 다양한 경우의 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셋 모두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이 죄가 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쌓여 가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음침한 지하에 갇혀 있는 ... 언어로 표현되는 말의 죄, 생각과 말이 구체화되는 행동의 죄들을 절대 범하지 않도록 항시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0년 8월 16일
- "어리석음이 큰 죄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리석음은 무명(無明)에서 오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인들 그 지식이 자신의 무명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요, 오히려 더 큰 어리석음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한 번 진리를 깨달아 어두움을 깨친 자는 다시 어리석어지지 않으니 영적으로 깨어난 자는 더 이상 무지(無知)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또한 깨어남과 진리를 깨달음은 지식 습득과는 무관한 것이니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가슴을 열어 순수하게 하늘과 소통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명을 걷어 내고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배우고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야말로 자신뿐만 아니라 하늘에 죄를 짓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읽을 수 있는 기회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명상과 수행을 게을리하고 의심에 가득 차 진리를 왜곡하려 들거나 자만심에 들떠 더 큰 진리를 찾아 나서며 더 심오한 진리를 안다고 허풍을 떠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으며 신성한 진리세계의 큰 적이기에 결국 그 세계에서 제외되는 벌을 받게 된다. 게다가 그러한 자들은 중생들에게 오히려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려 하고 그들에게서 참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고 말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알게 해 준다.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들은 우주 만물과 신성(神性)으로부터 단절되어 끊임없는 실수와 악행을 저지르고 대광명(大光明)의 근원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니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도 모른 채 무명의 길을 걸어간다."
2020년 7월 10일
- "모르는 게 정말 약인가요?"
"그것은 모르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네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하등 필요 없는 세속잡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그런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요, 설사 알고 있다 하여도 너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니 아예 그것을 처음부터 모르는 편이 오히려 득일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나기 위한 진리 터득에 관한 것이라면, 이를 모르면 결국 독이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언가를 알았을 때 마음이 더 복잡해지고 근심과 걱정도 함께 늘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요한 사실이면 사실일수록 그런 성향을 띠게 되니 이는 일어나는 일들을 하늘에 모두 맡기고 그냥 지나가게 놔둘 수 없는 그들에게 무거운 심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보게 되는 진실들이란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 기후 변화 등 자신이 안다 하여도 손을 쓸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큰 재앙이거나 온갖 인간사와 관련되어 있어 당장 해결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일들이 대부분이니, 그런 문제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무능함과 절망을 느끼는 일뿐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일들이 각자 개개인이 영적으로 깨어나 살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극소수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대체로 진리에 무지(無知)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본래 무지하다는 것도 모르는 무명(無明)에 가려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르는 것을 아는 것보다 왜 모르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인간에게는 실질적으로 더 중요하다. 또한 왜 내가 모르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아는 것이 비로소 약이 되게 하는 일일지니 그것이 바로 진리를 향한 노력의 핵심이니라."
2020년 8월 31일
- "꿈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의식만 이동한다는 뜻이다. 현세(現世)에 살고 있는 너는 육체를 이용해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진정한 삶이란 육체가 있는 곳에서 유지된다고 생각하지만 육체는 어디까지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장소'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오직 너의 영혼, 곧 너의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잠을 잘 때 영혼은 육신을 떠나게 되므로 그 의식이 가 있는 곳이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꿈과 현실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입고 있는 영혼이 살고 있는 세계나 몸을 벗은 영혼이 살고 있는 세계 모두 같은 본질을 갖고 있나니 이는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세계이며 그 자체는 공(空)하다. 더불어 깨어 있을 때 무의식에 새겨지는 내용은 잠자고 있는 동안 꿈이라는 세계에서 구체화되고 형상화되며, 반대로 꿈속에서 얻은 지식이나 경험은 깨어 있는 세상에서 육체를 통해 반영되고 실현되므로 이 둘은 결국 같은 과정인 것이다. 그런 고로 수행을 계속하면 할수록 이 두 의식 세계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확실히 알게 되며 그 결과로 꿈과 현실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수승한 수행자는 의식의 이동이나 활동범위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점점 스스로 관하게 되나니 이는 그가 진실로 정행(正行)을 이해하고 이행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2020년 7월 25일
- "소유욕을 없애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유라는 것 자체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지고한 본성(本性) 이외에는 애초에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육신을 빌려 지구에서 살아가나 그 육신도 언젠가는 사라지거늘, 하물며 재산은 어떻겠느냐? 잠시 갖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모두 놓아 버리거나 잃게 될 것들이니 영원히 변치 않는 너의 것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을 하여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여전히 소유를 소중히 여기며 추구한다면 이는 그가 진리를 이론으로만 이해했다는 뜻이므로 그는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소유를 줄이는 것과 없애는 것, 설령 소유한다고 해도 집착하지 않으며 의미를 전혀 두지 않는 태도는 세상만사와 만물이 공(空)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증거인 동시에, 물질에 연연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비워 궁극적인 존재의 본질에 다가서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니 소유는 이러한 값진 깨달음을 방해하는 현혹물일 뿐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2020년 6월 17일
- " ... 맨몸으로 지구에 와 맨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네가 올바르게 살기 위해 보유해야 하는 것은 맑은 정신과 마음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건강한 육체 또한 네 영혼만 맑으면 저절로 얻을 수 있으니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일이란 가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필요 이상의 재산과 물건을 원하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제 몸 하나 간수할 정도만 소유하겠다고 끝내 결정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몸에 걸칠 옷 하나, 죽지 않을 정도의 양식, 두 발 뻗을 만큼의 잘 공간만 필요하다면 그런 것은 큰 계획과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참된 수행으로 공덕(功德)을 쌓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자립할 만큼의 보상이 하늘에서 주어지니, 이는 그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일이 이렇게 저렇게 굴러가 자연적으로 살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주는 자가 생길 것이요, 옷이 필요하면 그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잠을 자야 한다면 잘 수 있는 자리 역시 쉽게 찾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라! 삶에 대한 욕구와 기대치를 낮추거나 아예 없앨 수만 있다면 너는 자급자족하는 자연 속 여느 생명체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2020년 8월 9일
- "시야를 넓히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해야 할까요?"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여행은 인간사의 다양성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일 뿐 진리를 알아내고 경험하는 것과는 사실상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을 하는 도중에 깨달음의 길에 오르는 자가 간혹 있겠으나 그는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깨달음에 눈떴을 사람일 것이고 그렇기에 그의 영적 깨어남은 여행 자체와 무관한 일일 것이다. 만약 자기가 알고 있던 인식의 굴레를 벗어나 시야를 넓히는 것이 여행으로만 가능하다면 출가승(出家僧)이 적정처(適正線)에 머무르며 기도 수행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오히려 깨달은 자일수록 자신의 행동반경을 점차 좁혀 나가나니 이는 진리란 내가 어디에 있던 간에 찾고자 하면 찾아짐을 증명하는 것이며 세속잡사를 끊어 내면 끊어 낼수록 한층 수월하게 보이는 것도 진리임을 의미한다. 즉, 시야를 넓힌다는 것은 이것저것 모두 시도하고 경험함이 아니라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능력이 커진다는 뜻이니, 그러한 시야는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현혹되지 않아야 넓힐 수 있느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 여행을 통해 세상의 진풍경을 보고 체험하는 것 비록 좋으나, 그 과정의 마지막은 모든 것이 어딜 가나 같으며 최상의 삶은 내가 머무는 바로 이곳에서도 가능하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 그러므로 정신과 마음이 모두 손수 하늘과 소통하여 산 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우주 만물이 가르쳐 주려 하는 진실과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니, 이를 깨달은 사람은 남의 경험을 담아 놓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 메시지를 받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0년 9월 3일
- "별자리와 사주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그런 것들은 단지 한 생의 시작점을 알릴 뿐이다. 특정한 시점에 태어나는 인간은 그로 인해 지정된 출발 조건을 갖게 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 전반을 점치게 하지는 않는다. 만약 모든 사람이 일생 동안 예상되는 경로만을 밟아야 한다면 그 어떤 영혼도 이 지구라는 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지구는 무한한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곳이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영혼들은 여기로 와 자신의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업(業)에 상응하는 인생을 살며, 최상의 경우, 영적으로 깨어나 무명(無明)을 벗고 대진리를 깨닫게 된다. 여기서 인과응보와 업이 하는 역할은 어디까지나 삶의 외부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깨달음과 수행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사전에 계획된 미래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별자리나 사주 같은 것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주체성을 쉽게 잃어버리고 삶을 통해 내가 나를 직접 형성해 가며 완성하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되므로 항상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틀에 맞추어 살게 된다. 이와 같이 잘못된 믿음은 그 믿음을 되레 실제로 현실화시키는 강한 원동력이 되어 영의 근원적인 계획과는 다른 인생 경로를 가게 만드는 실수를 스스로 범하게 한다."
2020년 9월 6일
- "이름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주 만물은 스스로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름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특정한 이름이 주어지는 존재는 부가적인 의미를 함께 부여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름마다 품고 있는 고유의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존재가 의미 있듯이 하나하나의 이름 안에도 의미라는 것이 살아 있어 그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적으로 깨어났거나 수행의 경지에 이른 자는 이름 에너지가 자신의 존재를 범할 수 없게 버텨 낼 수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힘에 노출된다. 그렇기에 한 생명이 올바르고 순수한 에너지를 받으며 성장하기 원한다면 좋은 기운을 담은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으로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가 수행을 통해 스스로를 찾아 이름조차도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도움을 주기 위함이어야 한다. 더불어 이름의 의미와 그 생명성은 영향력이 없는 에너지를 갖고 있는 존재란 이 세상에 없음도 증명하니, 그것 때문이라도 만물을 아무렇게나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인생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를 통해 더 나은 나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을 구체화한다."
2020년 9월 11일
- "루틴을 좋아하는 것은 비정상인가요?"
"인생 자체가 루틴(routine) 이거늘 왜 그것이 비정상이겠느냐?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자에게는 윤회 자체도 하나의 루틴이요, ... 다 먹었다 생각하면 끝난 것이요, 아니라고 말하면 끝이 아니듯이 네가 하는 행동과 생각, 너의 과거와 현재, 미래, 더 나아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우주의 존재까지 모든 것은 네가 끝이 있다 믿으면 그 끝 생겨나고, 끝이 없다 하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진리에 맞지 않는 일이란 세상에 결코 없느니라. 즉, 어떠한 불행과 고통도 또 어떠한 기쁨과 즐거움도 내 마음이 원하지 않는데 시작되고 끝나지 않나니 이 점 명심하여 늘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관하여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늘 확신이 없는 불안한 삶만을 살게 될 것이다. 특히, 해야 할 인생 공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매몰되어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 없이는 어느 누구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도 받아들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내가 시작이라 믿는 일이 다른 이에게는 아직 시작이 아닐 수 있고, 내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이미 끝난 일일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이 때문에 새로운 고민과 문제를 만들지 말고 오로지 네 마음이 결정하는 대로 어떤 일의 시작과 끝을 결정해야 하느니라."
2020년 9월 23일
- "트라우마란 무엇이며 어떻게 치유됩니까?"
"트라우마(trauma)란 소화되지 않은 고통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잘 소화되어 몸에 흡수되기도 하고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무르기도 한다.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의식세계에 입력되는 정보와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한 발자국 떨어져 거리를 두고 그것들이 그냥 지나가게 놔둬야 한다. 그러나 경험한 일들을 '나'의 일부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의미와 이유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큰 고통을 느낀다. 또한, 이때 그들은 기꺼이 마음 가는 대로 작위적인 원인을 만들어 내므로 일어난 일은 결국 해결되지 못한 채 트라우마의 잔재로 남고 만다. 더욱이 그러한 트라우마는 '종결'되기 위해 반복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니 이는 같은 고통을 연속으로 경험하게 유도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니 자신의 모든 고통은 의식의 오류에서 비롯되어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었으며, 보이고 느끼는 현상들 역시 공(空)하기만 한 것임을 깊이 깨달아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어야 할 것이다."
2020년 6월 13일
- "외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외로움은 너 자신을 다른 사람을 통해 찾으려 하기 때문에 얻게 되는 마음이다. 너는 이미 완성된 존재로서 홀로 존재하기에 그 자체로 무한한 충만감을 느껴야 하거늘, 마치 네 자신을 잃어버린 양 찾아 헤매며 너라는 아상(我相)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고 증명받으려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관계에서의 만족감 혹은 관계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 더 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너를 찾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공덕(功德)을 쌓기 위해 맺어지는 것이니 이는 외로움을 없애고 기쁨을 얻기 위함은 절대 아닌 것이다. 반면, 자신을 밖이 아닌 내 안에서 느끼고 찾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또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는 감정의 풍요로움과 안정을 느끼게 되며 혼자 있는 것이 다른 이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 깊은 행복감을 선사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 결국 외로움은 남과 같이 있지 못해서가 아니고 나와 같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2020년 6월 16일
- "걱정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걱정은 집착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또한 집착은 버릇과도 같은 것이니 놔버리고 싶어도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자고로 이런 집착은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리기 어려워 생기는 것이요, 버릇은 그런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실은 좋아하여 생기는 것이니 생사의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지 않고서는 올라오는 걱정을 해소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너에게 자문해 보아라. '왜 그것들이 중요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집착하면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또한 생각하여라, 중요한 것이 과연 있는가를. 너의 참나는 본래 변함이 없어 태어나고 죽는 것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니, 세상사 이리 돌아가고 저리 돌아간들 특별히 변하거나 중요해지는 것은 가히 없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니 모든 근심 걱정은 너의 마음이 만들어 낸 놀음에 불과한 것, 이를 만들어 낸 네가 다시 끊어 내야 하리라. 또한 너를 걱정 근심으로 세상사에 연루시키면 시킬수록 윤회세계에 더 깊이 빠지고 말 것이니, 이점 명심하여 절대진리를 찾으며 명상하는 삶을 살아 세속에서 점점 멀어져야 할 것이다. 주어지는 대로 살고, 흘러가는 대로 살며, 행복이니 불행이니 잊고, 준비니 계획이니 하지 않으며, 기대와 실망을 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편안히 살거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너를 온갖 불행에서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2020년 6월 27일
- "올라오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화(火)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 화가 옛 감정들의 잔상인지 아니면 지금 새롭게 생성되는지를 관찰하거라. 이때 분명 너는 네 화가 전혀 새삼스럽지 않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화가 나는 상황들은 비록 변할지언정 그때마다 화를 내는 원인은 잠재된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기에 전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상황 자체는 화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똑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단지 한 사람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화를 내는 사람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반응하는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가 나면 상황을 탓하기 전에 어떻게 화가 올라오는지를 예의 주시하여라. 사람들이 갖는 화의 실체는 그들의 얼굴이 다르고 영혼이 다르듯 참으로 천차만별이겠으나, 이들 모두 어떤 연유로 갖게 된 자신의 잘못된 마음을 읽지 못하여 시달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왜 내가 '늘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가를 알아낸 사람은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근본적인 마음의 문제를 알아낸 것이니 화는 그만큼 자기표현의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 화가 올라오면 그 화살을 항상 먼저 네 스스로에게 돌리고 숨어 있는 요인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불어 이 과정은 너의 수행을 한층 심층적으로 진행시켜 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2020년 10월 30일
- "자살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자살 역시 영혼의 계획이니 갑작스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숙세의 업(業) 탓에 현세(現世)에서 시달리다 죽음을 선택하거나 현세에서 새롭게 쌓은 악업 때문에 자살하는 것 혹은 소위 남을 위해 목숨을 끊는 경우 모두 내 영혼이 짜 놓은 계획에 따른 결과이다. 또한 모든 자살 행위에는 '나'라는 자아를 외부의 압력이나 고통에서 구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즉, 거기에는 자아를 보호하고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는 명예롭지도, 성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특히 특정 단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이타행(利他行)을 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 역시 이원세계(二元世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징표일 뿐이므로 그리 명예롭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자아가 무너져 내릴 때까지의 고통으로 통회하고 업장(業障)을 정화하는 사람이야말로 죄를 축복으로 승화시키나니, 전정한 자살이란 육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살고 있는 모든 고통의 근원인 에고(ego)를 없애는 일인 것이다. 또한 불생(不生)하는 우주에는 태어남이나 죽음이 없어 업(業)을 정화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돌아가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기 매우 힘들며 자살의 이유와 강도에 따라 심지어 하천한 세계로 떨어지거나 삼악도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모든 자살자는 영적인 미숙함 때문에 자살을 원하게 되므로 이를 깨닫고 자신을 스스로 구조할 수 있을 때까지 윤회를 통해 비슷한 고통, 즉 각성(覺醒)의 기회를 받게 될 것이다."
2020년 7월 9일
- "감사하면 왜 행복할까요?"
"감사함만이 모든 것과 화해하고 이를 용서하며 받아들이게 도와 병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정작 인과(因果)로 인한 일들을 겪을 때는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되어 감사함보다는 한탄이 먼저 나오게 되지만, 그것이 결국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도움이 되었으며 최상의 경우 내 영혼이 깨어나는 데 한몫한 요인이라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보이는 좋고 나쁨을 떠나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저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지름길인 것이다. 하지만 감사함으로써 행복해진다 하여 마음에도 없는 감사를 말로만 표현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며 눈물이 나는 그런 감사함만이 순수한 감사함이니 이는 자기 자신의 삶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순한 감정이다. 또한 과거와 비교해서 처지가 더 나아져서만 감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기에 참다운 감사함은 진심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기대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자신이 단순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이에게 생겨난다. 그러기에 하늘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이러한 감사함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가호(加護)를 내리고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2020년 7월 18일
- "부러움과 질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부러움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거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에서 나오지만, 질투는 그로 야기된 남에 대한 미움에서 나온다. 그러니 부러움은 어찌 보면 순수하고 긍정적인 에너지인 반면에 질투는 매우 부정적인 에너지인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부러움은 사랑의 표현이나 질투는 증오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부족하여 그것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질투보다 오히려 부러운 마음을 갖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그는 부러움을 통해 동경의 대상에게 애정을 표현하며 노력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반면 질투하는 사람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해낼 수 없을 것이라 사실상 전제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것을 갖게 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즉, 원하는 것을 얻을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처음부터 그의 관심은 갖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가게 되며 그 사람은 결국 미움, 곧 질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이 두 가지 감정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미묘한 두 감정은 겉보기에는 비슷하나 근원적으로 다른 부류의 심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이론일 뿐, 수행자라면 부러움도 질투도 모두 버려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그가 반드시 얻고자 하는 진리의 깨달음은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아닌 홀로 실현해야 하는 숙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만이 진정한 수행의 의미이며 목적이고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0년 8월 20일
-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시선을 끄는 것이 그의 관심을 받기 위한 조건이며 그 시선은 내가 뭔가 다르게 보여야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의 시선을 받게 되면 이것으로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받은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 대한 가치 평가를 상대방에게 맡기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됨을 감수하는 행위이다. 게다가 관심은 흔히 사랑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결국 갈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들판의 꽃이 어떠한 관심 없이도 아름답게 피고, 너무 높아 오르지 못하는 산도 사시사철 그 자태를 뽐내며, 무한 광대한 우주를 비록 여행하지 못하여도 그 아름다움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이듯 만물은 본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늘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지 않더냐? 그런 고로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생명은 오로지 인간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를 받기 위해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유년기를 넘어선 인간은 이 진리를 깨달아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위해 다른 이와 경쟁하는 고단한 삶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또한 남들의 관심이 더는 필요 없는 홀로서기란 곧 자율을 의미하나니,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인간은 반드시 마음 수행을 해야 한다."
2020년 9월 9일
- "마음이 괴로울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즉시 죽음을 떠올리거라! 괴로워하는 마음도, 괴로워하는 마음을 품은 너의 몸도 모두 썩어 없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너를 괴롭히는 일과 사람 그리고 생각 역시 영원하지 않음을 명백히 가슴에 떠올려야 한다. 모든 것은 언젠가 다 지나가며 설사 지나가지 않더라도 그것들의 끝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니 이를 직시하여 너의 괴로움이 사실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육신은 머지않아 사라짐을 알면서도 자신의 영혼만은 온전히 보전하려 애쓰는 만물을 떠올리면 참으로 측은하지 않느냐? 또한 모두 잠시 살다가 죽어야 하는 같은 운명을 타고났으니 그 안에서 진위를 따지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들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우리 모두는 그저 죽음이라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어떤 이가 제아무리 큰 권력을 쥐고 너에게 고통을 준다 하여도 그 역시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구제하지 못할 연약한 영혼일 뿐임을 생각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너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임을 잊지 않아, 다른 에고(ego)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기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자비심(慈悲心)으로 포용하고 용서함으로써 너의 영혼을 항시 맑고 순수하게 유지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괴로움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고 죽음 앞에서도 떳떳하게 될 것이다."
2020년 9월 22일
- "부정적인 생각들은 어떻게 생기나요?"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생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평소에도 모든 일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나니 그의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잘못되어 가는 일들뿐이다. 물론 그 역시 좋은 결과를 열망하나 이는 그저 잡을 수 없는 꿈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비평하는 마음은 그 대상이 원래 가지고 있는 긍정의 힘을 늘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판단하려는 태도에서 나오나 그 근본에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걱정과 근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니 문제를 만드는 마음의 근원은 자신을 향한 부족한 확신이라 볼 수 있다. 즉, '내가 좋은 일을 보고 경험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연루된 일이 과연 잘 풀릴 수 있을까? 지금 아무리 잘되어도 무사히 끝날 리가 없겠지'라는 식의 끊임없는 불신의 생각들은 모두 내가 나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나오며 이 무의식은 곧바로 불안한 걱정으로 이어져 마지막에는 좋은 결말을 막는 마음을 만들고 만다. 그러니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나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비로소 긍정적인 사고도 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긍정적 사고란 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더욱이 모든 현상과 만물은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니 그 마음이 단단하고 믿음에 차 있다면 경험하는 것들도 자연히 좋은 결과를 내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이는 비판적 사고 자체가 무언가의 실체를 분석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라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역시 자신에 대한 부족한 믿음과 사랑을 판단하는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다."
2020년 9월 26일
- "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이는 세상의 어떠한 기준에도 자신을 묶지 않나니 그는 그런 자애(慈愛)가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원인이 될 것임을 터득하고 있다. 왜냐하면 남들이 말하는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결국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이를 배척하고 생태계까지도 파괴하지만, 그런 행위조차 나를 위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이기적인 예외들을 만들어 내어 끝내 나조차도 생존할 수 없게 하는 열악한 환경을 구축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을 위해 살지 않고 모두를 생각하느니라. 또한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애써 일하며 돈을 벌고 모으는 것도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나니, 이는 그에게 그저 자신을 옭아매는 덫일 뿐이다. 명심하라! 빠르고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를 위한다고 애쓰며 행하는 모든 세속적인 일은 그저 허망한 것임을. 내 삶이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는 사람만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한 사람인 것이며 그만큼 자신도 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
2020년 9월 30일
- "겸손이란 어떤 것입니까?"
"겸손은 비이원적 사고의 산물이다. 즉, 겸손이란 나의 생각과 주장이 옳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너와 나의 견해를 견주어 판단하지 않겠다는 마음 자세인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늘 말할 수 있는 이 태도는 결코 내 주장을 우위에 놓는 것도 남의 의견을 더 중요시하는 것도 아닌, 모든 것을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일직선상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러한 겸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니 겸손한 자는 사실 자신이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나 일부러 열등한 척하고, 다른 이에게 겸손함을 요구하는 자는 스스로를 낮은 위치에 두고는 열등감에 휩싸이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숨기면서 오히려 소위 나보다 월등한 이에게 자신 앞에서 겸손해지길 요구한다. 결국 이 둘 모두 자신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고 높이는 과정을 통해 이원적인 사고에 젖게 되므로 그런 마음으로는 진실한 겸손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자신과 남을 넓은 자비심(自卑心)으로 대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어떤 의견이든지 차별하는 마음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참된 겸손함을 얻고자 한다면 늘 네 마음을 들여다보며 모든 일을 비교를 통한 판단보다는 그 실체를 바라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0년 10월 8일
- "몸과 영혼의 연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내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고, 그 정보에 따라 몸을 움직여 행동하며 내가 하는 모든 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몸과 영혼이 분리된 채 깨어 있는 의식 없이 말과 행동을 버릇처럼 하면서 이를 자신의 성격이라 믿으며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렇게 행한 말과 행동은 남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깊은 신뢰를 주지 못하기 쉽고 그것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만 낳는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이라 믿는 불신의 악순환은 내가 나를 찾고 잘 이해하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과 행동의 이유를 꿰뚫어 보는 사람은 남도 그만큼 더 많이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먼저 내 속을 알아야 남의 속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이제 깨달았다면, 지금부터는 영적인 깨어남을 네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아야 하느니라."
2020년 10월 31일
-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답하려면 당사자가 관계 맺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울리고 있는 듯하나 본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그에게 다가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원하는데 상대방이 오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성격이 내향적이기 때문이라며 그 이유를 대지만 이는 단지 핑계일 뿐이다. 도리어 근본적인 원인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의 결여, 무시, 두려움, 귀찮음 등등의 심리적인 문제들과 그것이 만드는 아우라(aura), 곧 방어막이다. 즉, 내가 세운 방어막을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상대방은 나에게 다가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거나 아예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방어막은 대부분 차갑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한층 더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니 문제의 발단은 늘 장벽을 치는 사람에게 있다. 그러나 수행자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수행에 입문한 자 역시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끊거나 혹은 더 이상 그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나 이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그가 만드는 거부의 장막도 부정적인 에너지 대신 중성의 에너지, 즉 중도(中道)의 에너지를 품는다. 이 받아들임도 거부함도 아닌, 단지 관계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사라진 마음 상태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크나큰 심적 평안함을 주기 때문에 그 수행자가 올바른 수행을 하면 할수록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늘어나게 된다. 즉, 편안하고 진실한 관계란 어딘가에 소속되어 남들과 무작정 어울려서가 아니라 모든 관계를 흐르는 강물처럼 자유롭게 놓아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다."
2020년 7월 21일
- "마음에 담지 않는 관계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소중한 관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 한 치의 속박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이는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 어떠한 고통이나 헛된 희망이 없어야 함은 물론,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각별한 의지도 갖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놔둔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애정이나 관심을 갈구하지 말고, 오고 가는 사람을 막지 않아야 하며, 인연의 결과를 기쁘거나 슬픈 일로 해석하여 마음속에 담아 두면서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 충실하되 '관계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매임 없는 편안한 마음상태를 항시 유지하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관계란 자고로 많은 기억과 감정을 만들어 내어 카르마(karma)를 생성시키니 이를 피하고 싶다면 네 자신을 '여관'과도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다들 한때 너와 머무르지만 시간이 되면 미련 없이 떠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디 그런 관계의 유한성을 늘 유념하여 만나고 헤어질 때 부질없는 미련과 회한을 품지 않도록 하여라."
2020년 8월 12일
- "모든 아픔은 늘 내 삶과 깊은 연관이 있으니 '나는 올바르고 선하게 살았건만 병이 들었다'라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남을 위한 희생적인 삶을 살고, 착하기만 하여 이용당하는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런 행위들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켜 내지 못했다면 그는 결국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그러려면 내 영혼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우선, 자신의 영혼을 위하는 사람은 나쁜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아 악업(惡業)을 짓지 않는다. 또한 그는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며 용서한다. 즉, 그는 상황을 언제나 불만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큰 비밀은 무조건적이고 지속적인 감사함이다. 천국 같은 인생을 살건, 지옥 같은 인생을 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참나를 찾아 보존함이니 이를 위한 기회를 주는 내 삶에 근본적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속히 이를 깨달아 삶이 가져오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여라!"
2020년 10월 4일
- "내가 다른 이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나요?"
"우리는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것들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은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저, 행복하고자 또는 불행하고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미 스스로 결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말과 행위를 하여 그가 느끼는 기쁨과 불행을 증폭시키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또한 이 논리는 네가 설사 행복한 이에게 고통을 주고 불행한 이에게 행복을 선사했다 하여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네가 전달하는 행복 혹은 불행의 에너지를 받는 사람의 감정은 얼마 안 되어서 자신이 믿는 행복과 불행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든다는 진리가 여기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즉,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본인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자를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고, 네가 아무리 훼방하려 해도 행복 에너지로 사는 이의 행복을 기어이 파괴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운명을 네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 혹은 하였다 생각하며 자만하거나 자책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런 생각들은 모두 너의 허상(虛像)이니라. 결국 너는 단지 한 사람의 삶의 여정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해 주고 동기를 부여할 뿐이니 그것 때문에 특별한 의무감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었다 생각하며 그 사람을 너에게 옭매지도, 누군가를 네가 불행하게 하였다 하여 너를 그에게 옭아매지도 말아야 한다. 대신에 모든 헛된 마음을 내려놓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운명과 의지대로 창조하고 살아가야 할 삶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남에게 한 말과 행동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면 그 사람과 너를 위해 간곡한 사죄의 기도를 올리거라!"
2020년 10월 17일
- "수행을 위해 가족과의 연을 끊는 것은 죄가 아닐까요?"
"아니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 모든 사람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족의 참 역할을 짐작할 수 있지 않느냐? 가족은 지구에 온 영혼들의 영적 체험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단체이기에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니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가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 그의 가족은 생명, 즉 연(緣)을 다한 것이며 이에 따르는 그의 탈퇴 역시 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간 쌓은 정과 사랑으로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을 유지하고 아직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와 축복을 보내는 것은 가족의 한 부분이었던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나비에게 허물은 이제 더는 소용없는 '집'일 뿐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철저히 개인적인 사안이니 가족을 누가 먼저 벗어나 영적 근원으로 되돌아가는가의 문제야말로 지극히 나 혼자만의 일이다. 그러니 때가 되었는데도 의무감과 애착 때문에 가족을 놓지 못한다면 오히려 너는 결국 윤회의 늪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윤회세계에 발을 묶이게 ..."
-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은 옳지 않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적으로 깨어남은 모든 것이 실은 환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접하게 됨을 의미하며, 이를 이해함은 세속잡사에 관심을 두며 썩어 버릴 자신의 몸을 가꾸고 치장하는 데 더 이상 불필요한 시간과 정성을 쏟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자가 겉치장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면 이는 눈먼 장님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몸과 마음을 청결히 유지함은 오히려 좋은 태도가 될 수 있나니,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통해 겉과 속이 같은 영혼을 가진 자신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당시 티베트에서 수행을 할 때 유독 걸인의 행색을 보인 것은 세인(世人)들이 그런 나를 보고 이원적 판단의 폐해에 대해 잠시나마 명상하기를 바라서였으니 그 또한 수행의 방편이었느니라. 그러니 수행자로서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가꾸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합이 되는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외모와 청결에 대한 생각조차도 수행의 단계에 따라 변화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즉, 만물의 본질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수행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니 몸을 돌보느냐 마느냐 같은 피상적(皮相的)인 문제는 주요 관심 대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020년 8월 18일
- "수행에 성공한 자는 죽음의 시기와 형태를 선택할 수 있나요?"
"죽음의 시기는 선택이 아니고 수행의 결과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 진리를 성공적으로 증득(證得)한 자에 한해서 현세(現世)를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죽음의 형태 역시 수행의 결실이니 성공한 수행자는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고통 없는 죽음이 올바른 수행의 척도를 재는 결정적인 기준은 아니므로 지고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들 역시 육신의 고통 속에 죽기도 한다. 즉, 지구에 알려져 있는 높으신 존재들이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수행에 실패해서가 절대 아니니 아픔이 동반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인 것이다. 게다가 존귀한 분들은 죽기 전 육신의 괴로움을 단순한 고통으로 여겨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이를 오히려 대광명(大光明)을 보게 돕는 또 하나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승화한다. 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게 죽어 가면서도 초연한 그들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니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마지막까지 교훈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의도하지 않는 수행자는 고통 없이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된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고한 수행 덕분에 주어지는 하늘의 축복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현실이나 안타깝게도 반드시 찾아오는 삶의 일부이니 그때 자신이 평생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수행을 통해 정견(正見)과 정행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여 죽음 또한 지나온 올바른 삶을 반영하는 현상이 되도록 스스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2020년 7월 31일
- "수행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인은 어떤 것입니까?"
"산란심(散亂心)이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흩어지는 마음은 실로 수행의 발목을 잡나니 속히 그 어지러운 마음의 이유를 찾아내야 하리라. 그것은 때론 습관적인 사념(思念) 혹은 수행이 가르쳐 준 공성(空性)의 진리를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거나, 에고(ego)가 준동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수승한 수행자는 모든 경험에서 유발되는 생각과 감정은 가슴에 담기지 않아야 함과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 흩어져야 함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마음을 항시 수행의 중심에 두어 어떠한 산란심도 일체 자리 잡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이 사실을 늘 유념하여 마음이 어수선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가슴을 활짝 열고 상념들을 흘려보내며 정리해야 한다. 또한 그때 하늘과 산, 바다 그리고 해와 달을 명상하여라! 왜냐하면 광대하고 부동(不動)하며 밝고 투명한 자연은 산란한 이에게 근간(根幹)을 되찾게 해 주어 흔들림 없는 꿋꿋한 믿음으로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만물을 향한 진심 어린 자비심(自卑心)을 가질 수만 있다면 수행자는 더 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자비심은 자신을 혼란하게 만든 사람들과 일들뿐만 아니라 수행 중에 산란해지는 수행자 자신까지도 가슴 깊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모든 혼돈을 없애고 치유하는 강력한 힘인 것이다. 그러니 반복되는 산란심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먼저 네 안에 있는 자비심부터 키워 나가도록 하여라."
2020년 8월 22일
에너지 그림 작가가 설명하는 스페이스 미라래빠
단 한 번의 생애를 통해 완전한 성불을 이루어 무한한 우주 공간과 하나가 된 티베트의 대성취자, 미라래빠가 그림의 형태로 나타났다. 일반적인 기대를 한참 벗어난 외계적 형상을 취한 미라래빠께서는 작가에게 자신을 <스페이스 미라래빠>라고 소개하셨다.
미라래빠께서는 생전 히말라야의 동굴 속에서 생명열을 증폭시키고, 에너지 몸체의 중앙통로(슈슘나)를 확장시켜 우주합일을 이루는 뚬모 수행을 주요 수행으로 삼아 정진하셨고 완성하셨다.
이 작품에는 생명열의 제어와 중앙통로의 정화와 강화, 확장에 대한 주요한 시각적 정보들이 녹아들어 있다.
머리로 판단하고 분석하기보다는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수행의 시각적 길잡이로 삼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안과 밖, 물질과 비물질, 빛과 어둠, 선과 악, 지구와 외계, 윤회와 열반, 이 모든 개념이 전부 중앙통로에 녹아 있고,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네. 악업에 물들어 이원의 노예가 된 마음으로는 이 심오한 이치를 받아들이기 어려우나, 지속적인 명상과 다르마에 대한 지극한 헌신이 있다면 어떠한 악업도 녹여낼 수 있다네. 깨달음을 향한 가장 빠른 고속화 도로는 오직 중앙통로이네."
스페이스 미라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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