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권교정] 왕과 처녀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1. 30. 00:00

본문

반응형

저자 : 권교정
출판 : 길찾기
출간 : 2007.03.19 


       

뭔가를 쓰고 싶어서 쓰는 건지, 써야 한다는 관성으로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결국 중요한 건 '쓴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것 아닐지.

 

그러나, 언제나 외부 영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내부에서 진짜 원인을 찾는 것보다 손쉽게 느껴지기 때문에.

가슴이 뛰는 작품을 읽지 못해서라고-

기록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하지 못해서라고-

그렇게 변명하며 숨게 된다.

 

독특한 그림체로 섬세하고 거대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 권교정.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주셨으면 싶다가도, 그저 안녕하시기만을 바라게 되는 이.

완결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맺음 지어지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돈다. 

완결, 이라는 매듭을 짓고도 이어지는 이야기들 역시 수없다.

한 인간의 삶 또한 '죽음'으로도 깔끔하게 끝나지 못하는데 미완결된 이야기라고 해서 피할 이유가 있을까?

 

좋은 이야기는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사람을 붙잡고 여운 속에 가둔다. 

그냥- 조금 일찍 그 안에 갇혔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권교정의 이야기에는 그런 매력이 충분하니까.

 

<왕과 처녀>는 작가 후기에서의 설명처럼 이어지는 세 이야기 중 가장 늦은 시대의 이야기이다.

<페라모어 이야기>, <청년 데트의 모험>, 그리고 <왕과 처녀>.

이 중 <페라모어 이야기>와 <청년 데트의 모험>은 한 시리즈로 묶여 5권까지 출간된 상태다.

 

<왕과 처녀>를 읽는 데에도 나름대로는 큰 결심이 필요했기 때문에-

<청년 데트의 모험>은 읽지 않으려고 생각했었지만-

풀리지 않는 부분들을 더듬어나가고 싶은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다 읽어버렸다.

(그래서 아직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까지도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말았다, 고 생각하는 착각에 갇히고 말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청년 데트의 모험>에서 떠들기로 하고, 여기서는 <왕과 처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영웅담', '위인전'에 등장하는 용사와 영웅들은 얼마나 고결한가.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 성인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로- '진짜' 그들은 어떠했을까?

한 사람의 삶을 그렇게 조각내고 편집하고 왜곡해도 되는 걸까?

 

반대로-

타인의 삶을 아무리 내밀한 곳까지 관음한다 해도-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아마 영원히 풀지 못할 난제일 것이다.

 

<왕과 처녀>에는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늙은 용사, 위대한 왕, 데트가 나온다. 

그리고 그를 동경하면서도- 그를 더욱 알고 싶어 하고 닮고 싶어 하는 청년 헨지가 있다.

세간에서는 늘그막에 들인 애첩이라고도 불리는 왕의 수양딸, 알데히드도 있다. 

 

헨지와 알데히드의 만남과 이끌림은 다른 수많은 이야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연스럽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데트는 말한다.

'너의 연애는 젊은 시절의 공명심에 취한 모험인가? 아름다운 처녀를 구금하는 나쁜 왕으로부터의 구출을 꿈꾸는가? 알데히드는 이제 자유다. 나는 내 딸에게 부와 명예와 자유를 주었다. 너는 어떠한가? 그런 그녀에게 당당하게 나타나 구애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음의 질문과도 같다.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약간의 마법을 벗겨내어도, 그것은 여전히 반짝이는가?'

'너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인가? 용기를 내고 싶은 것인가?'

'그것은- 얼마나 깊고 강렬한가?'

 

딸에게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옛 동료의 타박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거야'라는 데트의 대답이-

너무나도 와닿았다. 이미 모험을 떠났다 살아 돌아와 본 자의, '아직 모든 모험의 주인공은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의 이야기라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 봤던 <그린 나이트>에서 가윈에게 아더가 요구했던 바로 그 '이야기'. '너의 이야기', '너의 선택', '너의 모험'. 가윈이 아직은 'not yet'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헨지가 알데히드를 찾아갈지, 그대로 떠날지, 이도 저도 아닌 채 곁을 맴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작가와 독자는 젊은 데트를 본다.

5인의 용사들 사이에서 지워진 이름, 또 한 명의 동료 '라자루스'를 본다. 

데트가 진정으로 붙잡고 싶었을 그 찬란한 젊음의 흔적을 본다. 

 

이들에 대해서는, <청년 데트의 모험>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권교정의 그림체는 취향을 타기 쉽지만, 한 번 눈에 익고 나면 특유의 우아한 분위기가 아주 매력적이다. 다소 중성적인 분위기도 포인트다. 미완의 작품이 절대다수이며, 그나마도 절판된 경우가 많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섣불리 추천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미 교월드에 사로잡힌 이들끼리 잠시 담소를 나누는 정도로 그치도록 하자. 

이마 이치코에게 <백귀야행> 말고도 <문조와 나>가 있듯이, 권교정에게도 <GYO의 Real Talk>가 있다. 

권교정을 처음 접하는 분이시라면 끝이 없는 미로에 갇히시기보다는, <GYO의 Real Talk>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감사를 즐기시는 쪽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안다. 결국은 셜록과 마담 베리와 디오티마와 데트를 찾아 떠돌게 되리란 것을.)

 

오늘은 어쩐지 하츠 아키코의 작품이 생각나는 하루다. 

그렇구나. 

나는 기담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족> 이 책은 종이 품질이 너무 좋다. 세월이 흘러도 크게 삭지 않을 적당한 질감과 코팅과 색감의 내지로, 어린이 세계 명작 동화 전집 같은 책에서 컬러 내지로 쓸 법한 재질이다. 소장용 책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 얘기는 사실이기 때문에 유명한 거잖아. 50년 전엔 정말로 노이긴이 세상을 점령했단 말이야. 우리 할머니는 그때 일을 잘 기억하고 계셨어. 헨지 너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서 덜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궁성에서 반경 10킬로미터 안엔 50살이 넘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을 정도라고. 지금은 당시를 기억하는 건 노인들뿐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소설 같이 읽은 적은 없어. 여긴 당시엔 최대 격전지였으니까. 그래도 당시 노이긴에게 피해를 입은 곳은 우리뿐이 아니었는데 너희 나라에선 그게 이젠 그냥 얘깃거리일 뿐인가 보구나."

- 물론 알고 있었다. 그것이 꾸며진 얘기가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가 겪었던 사실이란 걸. 
그렇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시골출신의 보잘것없는 청년이 누구나 놀랄만한 모험을 겪고, 세상을 구하고 결국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 그 속의 이야기는 너무나 가슴이 떨릴 만큼 멋져서 나는 결국 주인공에게 질투를 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아아, 이건 그냥 이야기야. 너무너무 재미있는 모험 소설이라구.'

- "하긴, 넌 말하는 것도 여느 사막 태생의 행상과는 많이 달랐지. 말투는 고상한데 대신 엄청 유들유들한 태도로 손님들을 웃겨댔잖아. 그런 주제에 셈은 정확했으니 흔하지 않은 타입이었어. 투산의 행상은 열이면 열 다 사기꾼 같은 놈들이었는데. 묘하게 정직한 부분이 맘에 들었다."
"난 글자는 배웠지만 책은 잘 못 읽겠더라. 헨지는 데트 님과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

- "뭐, 이 녀석이 건장하길 하냐. 싸움을 잘하냐. 그렇다고 마법을 쓸 줄 아나.  장점이라고는 재빠른 것과 잔머리 굴리기 정도? ... 확실히 데트와 비슷한 것도 같다."
"하하, 그러니까 그 다섯 명 중 굳이 말하자면 데트라니까. 저 녀석 여자한테도 인기 많다고."

-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소릴 듣는 게 좋다.

장난기 넘치고 재치 있고 정의로운 데트.
데트처럼 되고 싶었다.

- "너희는 데트를 본 적 있냐? 어떻게 생겼어? 정말 이야기 속의 데트랑 같아?"

그러나 진짜 데트는 어떤 사람일까?
"헨지! 폐하! 폐하라고 불러! 국왕폐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여긴 수도 한복판이라고! 가디나가 아냐!"

"으아- 이 녀석들도 같이 불렀는데."

"우리가 언제? 폐하라고 불러."

"하긴 폐하의 이름을 마구 부르다가 경비병한테 걸리면 바로 감옥행이야."
 

- "그... 데트... 아니 폐하는 어떤 사람이야? 정말로 책이나 이야기에서와 같은 사람이야? 포어와 오센, 아니  왕비님과 대장군도 본 적 있어? 정말로 이야기 속에서처럼 굉장한 사람들인가?"

- 데트와 네 명의 동료들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제목으로 라라미드의 전역에 책으로, 연극으로, 시로, 노래로, 구전되는 이야기로 퍼져 나갔다. 대부분의 책과 이야기 속에서의 그들은 대체로 영웅적이었고 보통사람과는 다른 능력과 불굴의 의지, 용기 이런 것으로 둘러싸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 그러나 나는 그중에서 이녹이라는 시인이 쓴 '데트와 친구들의 이야기'라는 책이 가장 좋았다.

 

- 그 책에서의 데트와 동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수도, 잘못도 저질렀고 때때로 약했으며 겁에 질리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었다.

- "아름다운가?"
"응... 뭐 그렇겠지..."

"뭐 그렇겠지... 는 뭐냐?"
"초상화가 대부분 그렇지 뭐.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실제보다 예쁘게 그려주길 바라잖아. 아, 그건 신분과는 관계없는 건가. 암튼, 초상화들은 아무래도 실물보다 낫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고 봐."

- 나는 다른 이야기 속의 완벽하고 영웅적인 그들보다 한결 이해하기 쉬운 이녹의 그들이 훨씬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 책을 도서관에서 훔쳐서 조각조각 떨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 "내가 이 모양이니 궁여지책으로 해본 소리겠지만. 하... 하지만 난 아무것도 원치 않아. 원래 결혼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 너는 좀 자는 게 좋겠다. 에이, 좋았어. 오늘은 함께 자주지. 자 이리 와서 눈을 붙여."

"하하... 당신 옆에서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게다가 넌 항상 라자루스 옆에서 자고 싶어 했지." 

 

- "잘 잤나."

"아, 모처럼."

"그거 다행이군."

"..."

"너는- 애정을 쏟을 만한 것을 찾아야 해. 네게 필요한 것은 그런 존재다."

그런가.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것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무언가를 사랑하기엔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지쳤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고 소중한 것은 노이긴의 죽음과 함께 급속도로 저물었다.

 

 

 

 

 

- "아, 이게 그 히드스플레..."
"그리고 이 팔찌는 백석토라고 템포의 시토스 산에서만 나는 특별한 흙으로 만든 거라죠. 아카디아에선 이게 대유행이랍니다."
"시토스 산? 아하- 카스카디아와 알데히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곳이군요!"
"... 다른 가게에서는 구하기 힘든 팔찌일 거예요. 한번 껴보세요. 자아- 어때요? 예쁘죠?"

- '분명 어딘가의 귀족이나 부잣집의 딸이겠군.'

"시토스 산에는 말이죠.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기로 유명한 두 자매가 있는데 이 팔찌는 둘 중 언니 쪽의 작품이죠. 이 물건들을 구하러 시토스 산에 갔을 때 하필이면 산에 고룡이 출몰했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지 뭐예요." 
"용? 용들이 아직도 남아있나요?"
'흐음. 험한 일은 해본 적도 없는 손에 햇빛은 본 일 없는 듯한 피부! 평범하고 심플한 차림이지만 모두 새것으로밖에 안 보이는군. 마치 이런 곳에 다니기 위해 갖춰 입고 나온 것 같이 말야. 게다가 카스카디아와 알데히드의 이야기는 구전문학이 아니라구. 뷸트란에선 금서이기까지 하단 말야. 집에 서고가 갖춰져 있지 않고서야.'
"고룡은 용이긴 하지만 고대의 용처럼 거대하고 강력한 용은 아니고요."

- "이 팔찌랑 반지 살게요. 얼마죠?"

"아, 예..."
"그렇게... 전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무척 즐겁겠죠?"

"아니... 사실 힘들고 고달픈 때가 더 많아요. 위험한 일도 많고."

"원래 대부분의 모험은 닥쳐올 때는 '괴로운 고난'에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잖아요. 하지만 생명을 잃지 않고 성공시킨 후엔 잊을 수 없는 모험이 되는 거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그럼-"





 

 

- "얼굴에 주름이 깊이 패이고, 또렷하던 모든 것이 침침해지고, 가장 특별한 시간들을 공유했던 친구들은 어느덧 하나둘씩 세상을 뜨고, 윤기 나던 머리칼도 수염도 새하얗게 변하고, 도톰하던 입술도 바싹 달라붙고, 튼튼하던 이빨도 이젠 온데간데없이. 이것 보렴. 어디로 보나 부인할 수 없는 늙은이의 손이야..."

- "그래서 붉은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바위만 딛고 위로 올라갔는데-"

 

- "악취미군, 데트."

"데어고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 심술을 부리다니. 물론 곁에서 보기엔 재미있었네만."

"나는 받은 대로 갚는 주의라서 말이야. 이 자리에 오른 뒤로 늘상 그래 왔어."

- "그래도 딸의 일이잖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거야. 그 녀석은 그 아이와의 연애를 모험이라도 하듯이 즐기고 있었겠지. 젊은이다운 공명심과 정의감에 도취되어서 말이야. 자- 하지만 이젠 어떻게 될까. 그 애송이 놈은 알데히드에게로 갈 수 있을까? 많은 부와 힘과 자유를 지닌 그 아이에게 여지껏과 같이 당당하게 나설 수 있을까?"

- "내가 부여해준 것에 의해 그 아이에겐 파리가 많이 꼬일 거야. 많은 것이 그 아이를 속이고 현혹하려 들겠지. 그러나 괜찮아... 정말 자유로울 때 제대로 의심할 줄 알아야 해."

 

- "... 그리고- 아직 모든 모험의 주인공은 나거든."
"하하하! 그나저나 그 청년은 어떻게 할까? 난 모르겠군. 예상하기 어려워."
"그래? 내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눈빛이었지만 어느 쪽이더라도 녀석이 졌어."

"호오? 그건 어째서지?"

- 연인을 기다리는 처녀가 한 명.

혼자서는 잠들지 못하는 고독한 노인이 한 명.
그리고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한 젊은 청년이 한 명.

- 밤도 깊었고 
아무도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데어고어는 이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몰래 많은 이야기의 끝은 어쩌면 사실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THE END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