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 한오수
출판 : 한국융연구원
출간 : 2017.09.29
가벼운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근 리뷰들의 서두만 모아보면 잘 지내고 있었는지 아닌지 혼란스럽다.
체감 느낌은 나쁘지 않았는데, 가만가만 따져보면 그냥 그랬던 것 같은 느낌.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겨울의 초입을 벗어나고 나서야 -밤이 길어지고 나서야- 깨지 않는 수면 리듬이 잡혔다.
그리고 잠이 길어지자, 꿈이 늘어났다.
사람마다 꿈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고 한다.
어떤 논문에서는 누구나 잠을 자면서 꿈을 꾸지만 깨어나면서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도 하는데-
꿈을 기억하지 못해도 별 문제는 없지만, 나는 기왕이면 잘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쪽이다.
(꿈 일기가 도움이 된다)
<꿈과 죽음>은 융의 후계로 불리기도 하는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의 저서로, 인간의 무의식 속 '죽음'에 대한 관념이 꿈에 미치는 영향과 실제 사례를 다루는 책이다. 두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250여 페이지, 주석을 제하면 본문은 훨씬 적은 양이라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고대 시대의 신화부터 융이 실제로 채록한 근현대 시대의 꿈까지 다양한 사례들에서 죽음과 관련된 상징, 연결되는 신화나 문화, 또 그것이 꿈에서 발현되는 양식들을 살펴본다. 어떤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여러 예시들을 모아서 살펴보는 쪽에 가깝다.
해서 다 읽고 나면 잠시 책이 전하고자 하는 전체 메시지에 대해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나는 그랬다) 내가 느낀 바로는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꿈은 상당히 많은 것들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꿈 분석을 받기도 어렵고, 관련 도서를 읽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면.
잠들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믿음이 가는 존재에게 '꿈으로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조언을 보여주세요' 정도의 기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의외로 선명한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이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하는 대부분의 출판물처럼, 죽어가는 사람을 다루는 데서 생겨나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여기에서는 오직 임박한 죽음의 사실에 대해 인간의 무의식, 즉 본능의 세계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하다.
- 주지하다시피 꿈은 조작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의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자체가 어떻게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시키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이때에는 상으로 드러나는 꿈을 올바르게 해석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는 보편적 인간의 구조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 꿈들을 그들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는 특히 약간의 민속학과 연금술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연금술의 전통은 공식적인 종교의 전승보다 훨씬 많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 그래서 본질적으로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측면의 주제들이 있다. 즉 1. 현대인의 죽음에 관련된 꿈과 임종체험, 2. 인간의 생애 후반기의 삶과 죽음에 관계하는 융 심리학의 기본개념, 3. 연금술적 서양 전통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내가 정통하다고 느끼는 세 영역에 대해서, 4. 그 외에 심령학 연구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도 간단히 논의하고자 한다.
- 죽음이 "치유"를 의미하고 계속 더 살 것이라고 위안을 주는 무의식의 메시지는 여기선 분명히 소망의 꿈으로 해석될 수는 없으며, 아주 잔혹하고 분명하게도 육체 삶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꿈을 인용할 것인데, 이 꿈들에서도 육체적 삶의 종말이 분명하게 묘사되지만, 위의 꿈과 마찬가지로 사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암시하는 진술들이 거의 항상 수반된다. 융은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이 죽음의 가능성을 알게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소위 피할 수 없는 의문스러운 것이 그에게 다가오면, 그는 이에 답을 해야만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만 한다. '이성'은 그에게 그가 들어가야만 하는 어두운 무덤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화는 그에게 죽음의 땅에 있는 다른 상들, 즉 도움을 주고 풍요롭게 해주는 삶의 상들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상을 믿거나 또는 약간이라도 신뢰한다면 그는 그 정도만큼 옳으며,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정도만큼 옳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무無, Nichts에 다가가는 반면에, 원형을 믿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삶의 발자취를 좇는다. 사실 둘 다 불확실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는 자신의 본능에 반하지만, 다른 하나는 본능과 더불어 함께 한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후자를 위해서는 득이 됨을 뜻한다."
- 그래서 나는 다음에 원형적인 죽음의 꿈을 설명하고 그것을 주로 이집트의 죽음의 의식의 상징과 그것과 관련이 있는 연금술의 상징으로 확충하고자 한다. 즉 사후 삶의 주제와 관련해서 공식적인 기독교의 보편적 관념에는 뚜렷한 간극이 있다. 사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성과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은 세계의 종말에, 신의 은전을 통해서 갑자기 일어난다. 이때에 과거의 육체는 어찌해서든지 원상 복구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비밀이며,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더 자세한 관념은 없다.
-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당시의 종교들에 비해 아주 새롭고 훌륭한 것으로 대비시키려는 열의에 불탔다. 그래서 예수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의 구체적-역사적인 면을 강조하고자 시도했으며, 아티스나 아도니스, 오시리스 같은 죽고 부활하는 고대 자연의 신에 연관된 모든 것을 부정했고, 이교도를 모호하고 불확실하다며 비난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프리드리히 뇌처 Friedrich Nötscher는 특히 이집트나 서남아시아의 사후관념의 불확실성을 강조하고 많은 구약성서의 표상들을 순수한 언어의 수사적 표현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커다란 상징의 빈곤화를 초래했다.
- 비록 비성서적인 고대 후기의 종교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것처럼 불확실성과 외견상 모순을 지니고 있지만, 그 종교들은 죽음이나 부활, 그리고 사후의 삶과 관련해서 풍부한 상징적 표상세계와, 오늘날에도 현대인의 심혼을 늘 자발적으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원형적 상들을 전달해 주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무의식의 자발적 산물에는 공식적인 기독교 교의와 다른 차이가 있는데, 후자에선 인간이 부활사건에 완전히 수동적이다. 즉 신의 순수한 은전이 인간에게 육체를 되돌려준다. 이와 달리 연금술의 전통에서 연금술사는 연금술의 작업에서 이 작업은 물론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 이미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부활의 육신을 만든다. 이는 어떤 동양의 명상방법이 육체적 죽음을 넘어서 지속하는 내면적인 "금강체 Diamantleib"를 만들어내는 방법과 유사하다.
- 물론 오늘날에는 기독교 두 종파의 수많은 신학자들이 초기 시대 기독교의 견해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활은 "가까이 있는 기대"가 된다. 즉 죽을 때에는 직선상의 역사적 시간이 중단되기 때문에 "심판" 또는 (보로스 Boros에 따르면) 최종 판결은 사후 즉시 행해지거나, 또는 칼 라흐너 Karl Rahnerer가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사후에 "우주적"으로 되어 전체로서의 세계의 진정한 존재론적 원질료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그는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래서 부활은 더 이상 과거 육체의 원상회복으로서 생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 육체" 또는 일종의 "내면화된 물질"을 지닌 주체의 존속으로서 해석된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의 내면화" 또는 세계 배후의 과정을 단순하게 가정한다. 이와 달리 고대의 연금술사들은 늘 경험적으로 사후 삶의 비밀에 더 깊이 꿰뚫고 들어가고자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신화적 상징들을 만들어냈다. 이 상징들은 현대인의 꿈-무의식의 자발적 산물과 매우 유사하다.
- "'남성적'인 면을 따르는 의식의 세계사적 변화는 우선적으로 무의식의 지하적인 것- 여성적인 것으로 보상된다. 기독교 이전의 어떤 종교에서는 이미 남성적인 것의 분화가 아버지-아들을 특수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기독교 최고의 가치에 도달하는 변환이다. 만약에 무의식이 다만 보조적이었다면 그것은 어머니-딸을 내세움으로써 이 의식의 변화에 동반했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데메테르-패르세포네 Demeter-Persephone 신화에 필요한 자료가 준비되어 있다..."
- 마찬가지로 죽음의 문제는 이 보상과정이 행해졌던 영역이다. 주로 정신을 강조했던 기독교는 죽은 육체의 운명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육체는 세계의 종말에 신에 의해 기적을 통해 어찌해서 다시 만들어진다는 교의적 주장을 곧바로 내세웠다. 그러나 제1장에서 인용된 자료에서 보게 되는 바처럼 원초적인 '이교도의' 인간은 곳곳에서 육체의 의미와 죽을 때 육체 와해의 의미에 진지하게 대면했고, 육체에서 사후 영혼의 운명과 관계있는 "신비"를 추측했다. 연금술사들은 이 비밀을 다시 그들의 '원질료 Prima Materia' 또는 '미묘체 Subtle body, disambiguation'에서 추측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미묘체(가시적인 물질 그 이상의)를 구명하고자 애를 썼다.
- 앙리 꼬르뱅 Henri Corbin의 연구는 이슬람교에서도 역시 기독교와 유사한 상황이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도 수니파들의 빈약한 부활관념을 몇몇의 시아파의 신비주의자들이 풍부한 상징표상을 통해 보상하고 있다. 이들 시아파의 신비주의자들은 거의 모든 초기 그리스-이집트의 연금술이나 영지주의와 사상적 연관이 있음을 보인다.
- 그렇기 때문에 연금술적, 신화적 상징을 참조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사람의 꿈이 매우 빈번하게 연금술적, 신화적 상징표상과 유사한 상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안에 분명히 죽음의 과정이나 사후 삶의 표상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아직은 적당히 교리화되어 있지 않은, 죽음의 과정이나 사후 삶의 관념에 대한 심혼의 상들을 우리 앞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연금술사들이 "미묘체"의 문제에 열중하는 것은 주로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미라 의식이나 죽음의 예배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인간이 세계 기원의 문제나 탄생, 죽음 따위와 같은 어떤 수수께끼 같은 것, 낯선 것에 직면한 때에는 항상 그의 무의식이 상징적 "신화적", 다시 말해서 원형적 모델을 만들어내고, 이 원형적 모델은 빈 공간에 투사되어 나타난다. 또한 죽음의 비밀에도 투사되어 나타난다. 이 상징들을 그것은 상징이며,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 죽음의 꿈에서 나타난 거의 모든 상징은, 역시 그 외의 개성화과정의 경과에서 특히 그것이 후반기의 생애에 나타났을 때 생기는 상들이라는 것이 다음에 보여질 것이다. 에드워드 에딘저가 이미 진술한 바처럼, 마치 이 과정은 이전에 이미 의식에서 체험되지 않았다면 죽음을 앞두고 요약되어 (단축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개성화과정은 원래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더군다나 개성화의 꿈이나 죽음의 꿈은 그들의 원형적 상징에서는 원칙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 전통이 궁극적으로 의도했던 관념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정신과 물질이 하나의 사실에서 보여진다는 세계관에 대한 것으로, 따라서 그 세계관에서는 죽음은 다만 부분적으로 "물질"과 "정신"의 분리일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본질적으로는 정신신체의 변환을 뜻한다.
-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에게서 진정한 죽음의 꿈은 이미 생의 중반기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럴 때 그 꿈은 바로 임박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죽음을 잊지 마라-memento mori"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 자아가 삶에 대해 너무 어린 태도를 가져 자성을 촉구할 때 나타난다. 이와 달리 이 책에서는 꿈을 꾼 후 실제로 죽음이 나타나는 그런 죽음의 꿈들이 사용되었다.
- 제1장 시체의 "신비"와 "오시리스의 무덤"
자신의 사후의 삶을 상상하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 그리고 또한 죽은 사람이 사후에도 계속 살아가리라고 믿는 살아남아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을 육체와 거의 동일시한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이다. 우리의 자아정체성에 관한 모든 느낌은 육체와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오랜 역사적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미 항상 문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 즉 비교민속학의 연구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고대 문화에서 인간은 죽은 사람이 더 이상 그의 육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죽은 육체가 얼마 동안 계속해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다루어졌었기 때문에, 민속학은 "살아 있는 시체"의 주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많은 곳에서, 예를 들자면 인도 게르만 민족에서 사람들은 시체를 한 달 또는 그 이상 집에 간직해 둔다.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시체를 (짧은 기간) 방부제로 처리한다. 그리고 시체 앞에서 마시며 먹고 논다. 다른 민족에서는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할 때까지, 또는 완전히 골격만 남을 때까지 집이나 근처에 있는 비교적 깊지 않은 무덤에 보관하다가, 나중에 뼈를 더 깊숙이 매장하기도 한다.
-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죽은 자의 영혼은 아직도 가까운 주위에 머물러 있다. 많은 민족들은 이 시기에 죽은 자가 인쿠부스 Incubus(자고 있는 여성을 덮쳐서 성적 쾌락을 탐했다고 여겨지는 중세 유럽에서의 남성 몽마-역주)나 수쿠부스 Succubus(잠자는 남자와 정을 통한다는 여자 악령-역주)로서 살아남아있는 배우자와 성관계를 하리라 믿었다. 게다가 사자가 저승으로 떠나간다는 사상이 명백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시체를 죽은 사람의 대변자로 다루는 풍습이 계속 남아 있다. 특히 이것은 소위 죽은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관습에서의 경우인데, 이 관습은 거의 모든 민족에 퍼져 있었고,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있다. 많은 곳에서는 파이프를 머리 높이로 무덤에 꽂아서 죽은 자가 유동식을 "실제로" 받아먹도록 한다든가, 아니면 "숨을 쉴 수 있도록" 머리 높이에 오랫동안 구멍을 뚫어놓기도 한다. 음식을 제공할 때 사람들은 죽은 자가 정말로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으며, 무덤 위에 놓여 있거나 또는 장례 후 식사 때 제공되는 음식이 줄어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죽은 사람이 제공된 음식 자체가 아닌, 그 음식의 "연기" 또는 "증기"를 먹고 산다고 믿기 시작했을 때,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 필요한 물건을 단지 종이 위에 그려서 태움으로써 그 "그림"이 연기와 함께 저승에 이른다는 풍습(중국)에서, 이러한 "정신화"의 개념이 비로소 서서히 확산된 것 같다. 또한 다른 여러 곳에서는 장례식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옷을 입어 그 사람을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다시 말해서 시체 자체를 절대적으로 죽은 사람의 인격으로만 바라보지 않기 시작했다.
- 이것은 많은 민족에서 죽은 사람을 닮은 일종의 인형이나 상징적인 구조물을 만들어 시체를 대치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의 골디족은 죽은 사람의 침대 위에 흰 수건을 놓고 양편에 만다라 그림이 있는 베개를 놓았고, 그 앞에는 죽은 사람의 수호령인 아야미-폰얄코 Ayami-Fonyalko의 목상을 놓았다. 목상의 입에는 타고 있는 담배 파이프를 꽂았다.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모든 제물을 이 형상에 제공한다. 옛날에 중국인에게는 문고 Moon-Go라고 불리는 허리에 두르는 천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있었는데, 이 인형이 이와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이 이 형상에 있지, 더 이상 사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부의 한국인은 오늘날까지도 그런 죽은 사람의 모상을 만든다. 티베트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인 역시 "타마시로 Tamashiro", 즉 영혼의 용기를 만들어 장례식 때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그것에 옮긴다. 중국에서는 조상의 패가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고대 이집트인들이 세르다브 Serdab(분묘의 방으로 죽은 사람의 상이 보존되어 있음-역주)에 세워두었던 죽은 사람의 입상도 이와 유사하다.
- 이러한 풍습에서 죽은 사람을 시체와 원시적으로 동일시하던 것이 서서히 사라졌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람들은 시체를 "구체적 동일성"(용기)의 상징과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그의 가족을 방문하고자 할 때에는, 그는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임시 거처"를 갖고 있기 위해서 "육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예수의 이 잠언은 원래 무슨 의미일까? 죽음이 육체를 없애면 어떻게 생명이 "볼 수 없는 뿌리에서" 다시 살아난단 말일까? 도대체 분명히 구체적으로가 아니고, 상징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밀알"이 여기에서는 무엇을 뜻할까?
- 사람들은 아마도 요한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잠언을 역사적으로 연관시킬 때에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고대 후기의 즉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이나, 아티스, 아도니스, 탐무즈 Tammuz의 축제, 이집트의 죽음 의식 그리고 초기 연금술의 상징이 보다 보편적으로 알려졌었을 시기의 제설 융합의 사상을 암시하고 있다.
- 서양의 가장 오래된 연금술의 원전은 이집트의 땅에서 생겨났고, 그래서 처음부터 사후의 삶의 관념과 연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이집트의 문화는 매우 높은 정도로 그러한 관념을 지향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미라를 만드는 기술과 죽은 자를 위한 예배의식은 아마도 이러한 관점에서 존재했던 가장 중요한 것에 속하는 것이다. 1세기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 연금술 원전 중 하나는 이시스가 아들 호루스에 전하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이시스와 결합하고자 했던 첫 번째 창공의 천사는 "시간의 지나감 속에서 그리고 (하늘의) 회전운동에 따라서" 이시스에게 다가갔다. 호루스 자신은 부재중이었다. "이시스는 이집트의 성스러운 예술이 신비스럽게 준비된 호르마노우티 Hormanouthi에, 즉 에드푸(고대 상 上 이집트의 수도-역주)의 호루스 사원에 머물고 있었다. 이시스는 그 천사에게서 "금과 은의 제조"를 배워서 알고자 했기 때문에 그에게 저항을 했다. 그러나 그 천사는 비의의 중요성 때문에 그것을 알려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더 위대한 천사가 올 것이며 해결책을 줄 수 있으리라 말했다. 더 위대한 천사는 (추측건대 코레 코스모우 Kore Kosmow 원전에서 크네프-아가토다이몬 Kneph-Agathodaimon으로서 이시스를 가르쳤던 카메피스 Kamephis와 동일한 천사인) 암나엘 Amnael이다. 그의 표시는 머리 위에 있는 맑고 투명한 물로 가득 찬 역청을 바르지 않은 그릇일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암나엘은 이시스가 하늘과 땅의 이름으로, 헤르메스, 아누비스 Anubis, 케르코로스 Kerkoros(Kerberus, 지옥의 문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역주), 뱃사람 아케론에게, 그의 아들을 제외하곤 비밀을 지키도록 맹세케 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너일 것이며 너는 그일 것이다."
-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이제 가서 농부인 아카론토스 Acharantos (다른 판에는 뱃사람 아케론토스 Acherontos)에게 물어봐라, 그리고 어떤 씨앗을 뿌렸고 무엇을 거두어들였는지 배워라, 그리고 누가 곡식을 뿌리고 수확했는지, 누가 보리를 뿌리고 그것을 수확했는지 알아봐라."
- 이러한 암시에 자극받아서 이시스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인간을, 사자는 사자를, 개는 개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어떤 자연적인 것에 반하는 것이, 즉 기형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오래 존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자연을 기뻐하며, 자연은 자연을 정복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가 금에도 해당되며 "그것이 비밀의 계시이다". (원전에서는 이에 이어서 처방전이 따른다.)
- 불합리하게 보이는 이 원전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은 곡식과 보리 낟알에 대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이미 본래 무엇이 문제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시스의 죽은 남편인 오시리스가 "곡식"(밀) 그리고 "보리 낟알"로 불렸으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는 순간에 오시리스 신이 되어지는 모든 자 ...
- 인간의 임종자리에서의 사건은 흔히 실제로 매우 역설적이다. 마지막 즈음에는 특히 의식이 약화됨으로써 그간 너무 억압되었던 모든 것들이 뚫고 나온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순결을 지켰던 시인 안데르센 Andersen은 죽을 때 노골적인 성적 외설행위를 표현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방에서 도망쳤다. 흔히 죽어가는 사람이 대량의 혼란스러운 인상을 보고하기도 한다. 때로는 친척을 비난하거나 저주하기도 하며, 반면에 다른 인간들은 냉정하게 내면의 평온 속에서 죽는다. 내 관점으로 이것은 동일한 과정의 두 가지 면을 묘사한다. 어떤 사람은 아직 고통 속에서 대극의 투쟁 속에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이미 이 투쟁의 최종결과, 즉 만족과 대극의 합일이 예감되어지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인간이 생전, 이미 죽음이 다가오기 이전에 내면이 대극의 투쟁에 준비가 되어 있을수록 아마도 그는 더욱더 평화로운 종말을 기대해도 좋은 것이다.
- 에딘저가 옳게 해석한 대로, 이 녹색의 남자는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유사한 식물의 영이다. 꿈꾼 사람이 녹색의 남자를 보았을 때 처음 연상했던 개구리는 이집트의 개구리여신 헤켓 Hekket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 개구리 여신은 자주 미라 머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재생"을 의미했다. 그 여신은 초기 기독교의 무덤 위에서는 분명 "부활"의 명칭을 지니고 있었다.
- 중세기에 녹색은 성령과 생명, 출산과 부활의 색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일종의 세계혼 世界魂 또는 모든 것을 채우는 생명의 영의 색이다. 꿈에서 춤을 추는 풀의 남자에 관한 그런 것은 수많은 유럽의 풍습이 보고하고 있다. 이 풍습에서는 봄이나 오순절에, 온통 풀과 나뭇잎으로 뒤덮인 젊은이가 물속에 집어넣어지거나, 또는 그 밖의 어떤 방법으로든 상징적으로 "살해"되고 그리고 다시 부활한다. 그를 흔히 "오월의 왕" 또는 "녹색의 조지 Georg" 등으로 부른다. 그 모든 것은 겨울을 이겨내고 새해에 많은 수확을 얻고 충분한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술의 의식이다. 때로 이 "오순절의 촌뜨기"는 호화롭게 치장된 벌채된 나무로 대치되기도 한다. 많은 곳에서는 그 나무를 묻어버리는데, 이것은 "죽음의 놀이"로 해석되었다. 항상 이 신화적 형상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과 계속되는 생명의 번성과 관계된다. 꿈을 꾼 미국인의 춤을 추는 풀의 남자는 아마도 역시 그러한 삶과 죽음의 원리의 상인 오월의 왕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원리는 식물을 통해 상징된다.
- 보후만 Vohuman 신은 하얀 쟈스민을, 샤트리바 Shatrivar는 바실리카 약초를, 남성의 신적 아니마인 다에나 Daena(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이며, 페르세우스의 어머니-역주)는 수백 개의 잎이 달린 장미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꽃의 에너지를 배열하기 위해 꽃을 명상했고, 그러면 그 에너지로 천사 또는 신의 힘 자체가 내면의 시야에서 빛이 났다. 그래서 꼬르방이 표현했듯, 꽃에 대한 명상은 원형적 세계에 있는 저 세상의 신적 존재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 고대 이집트인에 있어서도 역시 부활의 관념은 식물세계의 상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에게도 역시 꽃은 부활하는 육체의 측면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심지어 밀의 낟알과 꽃의 구근을 죽은 사람의 미라 붕대 속이나 시체 옆에 있는 저장 용기 속에 넣고는 그것에 물을 뿌렸다. 그것이 싹트면 완성된 부활의 표시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곡식미라"를 카이로에 있는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죽은 사람의 부활이 밀이나 꽃이 싹트는 것과 동일시되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습은 우리의 원문에서의 모호한 문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밀이 그들(식물 또는 광석)"을 보호해서 감싸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광석-식물은 시체이며, 이 시체를 아마 붕대 안에 있는 밀이 휘감고 있다.
- 코마리오스 원전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은 부활해서 "꽃이 핀다". 꽃은 사후의 존재 또 부활한 육체에 대한 널리 퍼져 있는 원형상이다. 오시리스 비의에서의 "깨어 있는 시간" 중에서, 네 번째의 낮시간에서는 소위 식물의 부활이 일어난다(그리고 바로 이어서 "동물의 부활"이 일어나는데, 이는 죽은 ... )
- "식물"(=광석)이 물을 통해 소생하는 것을 연금술에서는 역시 결혼으로 이해했다. 코마리오스-원전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 "그러나 나는 너희 중 호의를 가진 자에게 말한다. 만약 너희들이 식물과 요소와 광석(돌)을 그들이 있는 장소에서 보존하면, 그것들은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불이 그들을 시험하면, 그것들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중에] 불에서부터 영광과 빛나는 색깔의 옷을 입으면, 추구되었던 아름다움과 그것의 액체의 성질이 신성으로 변화되어 있음으로써, 그때 너는 그것들이 [이전의] 숨겨져 있던 영광에 비해 증가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태아가 모태 속에서 영양공급을 받고 빨리 자라듯이, 그들(연금술사)은 그것들(식물)을 불 속에서 양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산의 달이 가까워지면, 그(태아)는 방해받지 않고 나온다. 이 성스러운 기술(연금술의)도 역시 그렇게 진행된다. 항상 되풀이해서 굉음을 내는 홍수나 파도는 육체가 누워 있는 저승이나 무덤에서 그들(육체)을 다치게 한다. 그러나 무덤이 열리면, 아이가 모태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저승에서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엄마가 아이를 보듯이 이 아름다움을 보면, 그들은 이 기술에서 [즉] 우유 대신 물로 아이(시체)를 양육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기술 역시 자체가 아이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기술은 아이-[탄생]을 흉내 낸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완성되어졌을 때-보라, 그것이 봉인된 신비이다."
- "이제 나는 너희에게, 그 요소와 식물이 어디 있는가를 분명히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유(아니그마 anigma는 역시 수수께끼라고 부른다)를 가지고 시작하겠다. 가장 높은 장소, 숲으로 뒤덮인 산악지대로 가라. 그리고 너는 가장 높은 곳에서 돌 하나를 발견할 것이다. 돌에서 남성적인 것 arsenikon을 취해서 그것을 신성한 방법으로 희게 만들어라. 그리고 산의 중간의 길 위에서, 남성적인 것 아래에서 보라. 그곳에 그의 동반녀가 있다. 그는 그녀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녀에 대해 기뻐한다. 그리고 자연은 자연을 기뻐하며, 그것 밖에서는 그것은 하나로 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바다로 내려가 너와 함께 모래에서, 원천에서 소위 니트론 Nitron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들을 서로 합쳐라. 그것은 [그러면] 모든 색깔의 아름다움을 가져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없이는 그들은 하나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남성적인 것의) 척도는 그의 동반녀이기 때문이다. 보라, 자연은 자연에게 보답한다. 그리고 네가 모든 것을 균형 있게 화해시켰을 때, 그러면 자연은 자연을 이기고 서로 기뻐한다."
- "보라, 현자여. 그리고 이해하라. 신랑과 신부를 합치게 하고 합일을 함으로써 이룬 기술의 성취를 보라. 식물과 그들의 차이를 관찰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축복된 물을 지니고 있는 구름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 "
-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함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처럼 종교적 전승은 다만 "사람들에게 아편", 또는 "소망의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그녀는 "무가치의 정신"에 빠져 있었고 불행한 악순환으로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 이러한 침울한 상은 레이몬드 무디가 보고했던 어떤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많은 그의 증인들은 일종의 환영 같은 죽은 유령들이 무의미하게 배회하는 일종의 "중간영역"을 체험했다고 보고했다.
- "사람들이 그들이 머리라고 간주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을 그들은 깊숙이 아래로 떨군 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완전히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이는 듯했고, ... 내게 수척하고, 무감각하며, 암울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영원히 무거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걷고,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따라야 할지, 누구를 고대하며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 그들은 고도로 혼란스러워했다. 이제는 그들이 누구였으며,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모른 채. 추측건대 그들은 자신이 누구였고,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상실했다. -그들의 정체성은 없어졌다."
- 이러한 사후의 삶의 음울한 상은 무디가 기술했던 빛의 체험보다는 훨씬 더, 모든 세상에 있는 수많은 유령-과 도깨비 이야기들이 구제받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배회하는 죽은 혼령에 관해 묘사하는 것과 일치한다. 우리의 꿈 경험 역시 아주 드물게만 아름다운 상으로 나타나는 무의식의 '저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꿈은 꼭 같은 정도로 자주 울적게 하는 장면을 구성한다. 인간이 죽기 전에 얼마나 심리적으로 성숙했는지, 그리고 자기의 관계를 찾았는지의 여부가 결정적인 것 같다.
- "내 그림들이 들어 있는 유럽 횡단을 위한 가방이었다. 하나는 대륙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을 가기 위한 것이었다."
- 그녀는 그곳으로(=서쪽나라로) 그녀의 일상의 태도(작업복)를 가져갈 수 없고, 내면의 정신적 보물은 가져갈 수 있다.
- 이미 언급했던, 마크 펠그린이 보고한 죽음을 앞둔 여인의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주제가 나타난다. 그녀는 다음의 꿈을 꾸었다.
- 나는 남편[아직도 살아 있는!]을 만났다. 그는 내게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와 이별을 했는데 갑자기 바닷가에 있었다. 해변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해변은 몇 개의 보트를 제외하곤, 텅 비어 있었다.
- 여행의 주제는 이집트의 죽은 자를 위한 예배에서 가장 상세하게 나타난다. 이 의식에서는 죽은 자의 "바우 Bau(영혼)"가 태양신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여행을 끝마친다. 내세의 여행은 태양의 운행을 따른다. 그것은 지하세계, "소카르의 동굴"로 하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많은 다른 영역, 부분적으로는 위협적인 힘에 의해 방해받는 영역들을 거쳐서 동쪽으로 간다. 이 동쪽나라에서 죽은 자는 다시 태양신과 더불어 젊어져 소생하게 된다. 그러면 그는 지하세계에 자신의 미라를 뒤에 남기고 바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태양신을 수행한다. 죽은 자의 진로의 목적으로서의 태양은 이미 언급했던 검은 수면궤의 꿈에서도 역시 나타났다. 그것은 개성화과정의 목적으로서 가장 높은 의식성을 상징한다. 수많은 고대의 문화와 아직도 현존하는 문화에서 매장자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이러한 관념, 즉 부활은 동시에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과 같은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 (그림 10) 일출이 어떤 Djed("영속"에 대한 문자와 오시리스의 상) 안에 묘사되고 있다. 이집트인에게 태양은 가장 높은 의식성을, 일출은 동시에 소생을 상징한다.
- 이집트에서 태양의 운행과 죽음-삶의 비밀과의 관계는 매우 특별히 풍부한 발달을 했다. 이집트인에게 태양은 모든 질서의 보증인이다. 즉 "밤, 어두움, 죽음은 인간에게 위험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천지창조 이전이나 밖에서, 다시 말해 질서의 밖에서 세계와 관계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이 크라 kra, 무존재 Un-sein라고 부르는 이러한 무질서에서 인간의 삶은 태양 없이 살 수 없듯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태양은 "죽음 후의 새로운 생명의 상징으로 ...
- 마니교에서도 역시 유사한 생각들이 있었다. 마니 자신이 알 타움 al-Taum(쌍둥이)의 천사를 통해 계시를, 그러니까 "대변인", 중재자이었던 도플갱어 Doppelganger(제2의 자아)를 통해 계시를 얻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그 영혼의 "스승의 상"을 본다. "영혼은 육체를 떠나자마자 그들의 구원자, 구세주를 본다. 영혼이 스승의 상과 그 곁에 있는 세 천사와 함께 올라가서, 진리의 재판관 앞으로 가서 승리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대변인"은 빛의 모습, 우주의 영의 출현 형태이다. 그 후에 영혼은 "빛의 신부의 방"으로 들어간다.
- 이러한 데려가는 쌍의 짝(도플갱어), 자기의 상은 이미 살아 있는 동안 신비적 황홀의 상태에서 체험된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이븐 아라비 Ibn Arabi는 환영에서 아름다운 젊은이로서,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무언의 대변자로서, 합성되지 않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포용된 자로서의" 그를 보았다. 이븐 아라비는 그가 카바 Ka'aba 신전을 돌아다닐 때 그 소년을 보았으며, 그를 이를테면 성스러운 돌의 영혼으로서 이해했다.
- 관습을 따르는 신앙인은 카바 신전에서 "생명 없는 딱딱한 미네랄"만을 보는 반면에, 이븐 아라비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본다. 이 젊은이는 상징으로만 말한다. 그는 환자에게 말했다. "내 본성의 조직과 구조의 질서를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내게 질문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은 내 자신에게만 관계되고, 나의 본질은 바로 나의 이름입니다. 나는 아는 것(지식)이며, 알게 되어진 것, 아는 자입니다. 나는 지혜이며, 지혜의 성과이며, 현자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말한다. "나는 익은 과일의 정원이고 전체성의 열매입니다. 이제 나의 베일을 들어 올리고 내 존재에 파묻혀 있는 선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읽으십시오."
- 동일한 원형의 자기상은 무디, 함페, 세이봄이 제시했던, 잠시 임상적으로는 "죽었었으나" 심장치료로 소생했던 사람들의 체험을 기술한 자료에서 훨씬 더 꾸밈없는 형태로 발견된다. 많은 그런 환자들은 특히 그들이 만났었던 빛 또는 "빛의 존재"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무디의 한 증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결히 표현했다. "나는 매우 강렬한 빛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러한 빛을 여기 지상에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그 빛을 원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개인적인 인격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요해와 완전한 사랑의 빛이었다." (그러더니 그 빛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 어느 다른 증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누우면서 좀 더 편안한 자리로 옮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방의 구석에서 빛이 보였다. 바로 천장 아래에, 그것은 빛으로 된 공 같은 것, 발광탄 같은 것이었다. 아주 크지는 않았고, 직경이 30~40센티미터 정도였는데,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빛이 거기 나타났을 때 어떤 느낌이 나를 엄습했다. 소름 끼치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완전히 평화스럽고, 전적으로 긴장이 풀어진 느낌이었다. 빛으로부터 손이 나와 내게 뻗치 ... "
- "공기 같은 푸른 유체"는 파라켈수스의 제자이며 연금술사인 게르하르트 도른에서 발견되는 진기한 표상이다. 도른에게는 모든 연금술의 작업은 소위 캘룸 caelum = 내면의 하늘을 만드는 데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는 그것을 추출된 육체적 생명의 정수, 즉 신의 형상을 꼭 닮은 상으로서 인간의 가장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내면의 "진리"로 이해했다. 이 액체를 증류하고 회전시키면, 사람들은 그것이 "두루 비추면서 빛나는, 그리고 가장 깨끗한 공기의 색으로 맨 위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밀스러운 내면의 하늘이 보여지게 된다." 이 푸른 공기유체를 만드는 것이 도른에게는 대극의 합일의, 즉 신적인 세계영世界靈과 하나가 되는 것의 최고 단계를 의미했다. 융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완전히 의식하는 인간은 자기,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자아를 대치하는 인격의 중심점에 넘겨지게 된다."
- 연금술의 원전의 기술에 따르면, 그렇지만 이것은 처음으로 시작하는 단계일 것이며, 계속 중요한 변환이 이 단계를 뒤따른다. 그것이 육체의 속박이나 자아의 소망과 욕구, 그리고 사는 동안에 지적으로 매인 의식이 우리를 속박하는 저 좁은 세계로부터 최초로 해방되는 것이다.
- "... 온기에서 약이 [생겨난다]. 이 약은 방해받지 않고 모든 육체를 침투한다."
- 여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재결합이 더 이상 대극의 합일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육체가 더 이상 "육체"가 아니며, 정신 역시 하나의 본성이 되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동화되고 통합되어진 육체-영혼이지, 거친 물질적 육체는 아니다. 그래서 후기의 연금술의 저자 페트루스 보누스 Petrus Bonus(13세기)는 그의 저서 <Pretiosa Margarita Novell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 붉은 돌로서 모든 것에 대해 찬미하였고, 미래를 예언하였다. 그들은 심판의 날과 세계 종말의 날이 오리라는 것과 이때에 죽은 자의 부활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부활에서는 모든 영혼이 그들의 첫 번째 육체와 결합되고 영원히 육체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육체는 찬미되고 부패되지 않으며, 커다란 광도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미묘함을 이루게 되어, 모든 단단한 육체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성이 영과 육체의 본성과 [동시에]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전래되는 것이니만큼 부분적으로 파손되고 희미하게 된 코마리오스 원전의 모든 문장을 상세하게 해석하는 것이 내게 가능하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잘 표현된 주제만을 발췌했다. 그러나 연금술에서 연금술의 영약(현자의 돌과 동의어)의 제조는 처음부터 죽은 자의 부활의 주제와 매우 연관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 최종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그중에서도 "안드리아스"로, 인간 형태의 입상으로 불리는 다소 딱딱한 것이며, 동시에 "치명적인" 영약으로서 원래는 약, 즉 모든 딱딱한 것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독, 약제로서 불려진다.
- "안녕하시오, 아추 Achu(=변용된 자, 축복받은 죽은 자)여... 안녕하시오, 저승에 있는 자여. 너희들은 너희들의 (흰!) 옷으로 빛을 내도 좋다. 너희들은 레의 광휘로 밝게 있어도 좋다." 그래서 지옥서에서는 미라가 오시리스의 모습으로 싸여져 있다고 말한다. -이는 코마리오스 텍스트에서 죽은 자의 육체가 "신의 영광"(독사 doxa)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 이러한 독사 doxa의 주제는 이집트의 전통뿐만 아니라, 보다 이전에 페르시아인의 표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어쩌면 영지주의 문헌의 전달을 통해서 즉 독사, 영광은 페르시아의 흐바르나 Xvarnah의 표상을 생각나게 하는데, 흐바르나는 방금 죽은 사람을 만나며, "영광의 빛", "승리", "승리의 불"로 일컬어졌다. 미트라스 제식에서는 이 빛의 영광이 개인의 운명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죽어가는 자를, 그의 다에나 Daéna -저승의 아니마와 함께 밝게 비춘다. 이 영광의 상은 영혼을 불타오르게 하는 영적인 불을 통해 빛을 내는 조명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치유하는 인식의 빛으로서 죽어가는 자의 모든 영혼을 "감싼다". 영지주의의 토마스 문서는 바로 이러한 상을 포함하고 있다.
- 코마리오스 텍스트는 계속된다. 재결합 후에 집은 봉인되었고, "빛과 신성이 가득한 입상이 세워졌다". 이것은 아마도 묘실을 봉인하고 소위 제드기둥 Diedpfeiler(고대 이집트인들이 물체에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던 주물 숭배의 한 예-역주)을 세우고, 소위 세르다브 Serdab(고대 이집트의 분묘의 한 방으로 죽은 사람의 상이 간직되어 있다-역주)를 설치하는 이집트 장례식의 끝부분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입상(안드리아스)은 코마리오스 텍스트에서도 "아이콘"=상으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로 되어진 네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것을 ...
- 남자는 처음에는 은, 그다음에는 금으로 된다. 즉 일종의 살아 있는 금속의 입상을 나타낸다.
- 에드워드 에딘저에 의해 출판된 시리즈 중에는 다음과 같은 꿈이 있다.
- 나는 기이하고 전무후무한 장엄한 정원을 보았다. 넓은 사각형인데, 바닥은 돌로 되어 있었다. 약 1/2미터 간격으로 동원으로 된 물체가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브랑쿠시 Brancusi(프랑스의 조각가, 1876~1957-역주)의 "공간 속의 새"같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었고, 그것은 긍정적 의미가 있었으나,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 에딘저는 상징에 대해 확충작업을 했는데, 즉 중앙에는 넓게, 위와 아래쪽으로는 뾰족하게 되어 있는 금속의 기둥을 위로 솟아 정신영역으로 상승하는 남근의 비약으로 해석했다. 그는 이집트의 제드기둥을 유사한 것으로 보았는데, 장례식의 마지막에 이 기둥을 세우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이 기둥은 에트루리아 남자들의 무덤 위에 있는 남근묘석에 상응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프리스틀리 B. Priestley의 꿈(38쪽 참조)에 나타난 계속 지속하는 창조적 생명의 충동의 상으로서 춤을 추는 생명의 불꽃과 비교될 수도 있다. 인용했던 꿈에서 이 형상은 동으로 되어 있다. 융이 강조했던 바대로 금속은 어떤 낯선 차가움과 관계가 있는데, 이 차가움은 그 상징형상을 두드러지게 특징짓는다. 그 상징형상이 멀리 무기질의 영역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역시 연금술의 "돌"에 해당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 그것이 늘 그런지 아니면 특수한 경우에만 그런지? 융이 언급한 부분적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회의 가설의 흔적이 나타나는가? 등등.
- 오늘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커다란 불확실성이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확고히 신앙에 닻을 내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 에드워드 에딘저는 그의 책 <자아와 원형>에서 인용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일련의 꿈을 "형이상학적 꿈"이라 불렀다. 실제로 그 꿈들은 우리가 정신치료의 실제에서 만나는 보통의 꿈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주관적 단계로는 (즉 주관적 내면의 과정의 상징적 묘사로서는) 잘 해석될 수 없으며, 원래 (융이 말한 것처럼) "심리화"될 수 없다. 비밀스럽고 위험한 차단기가 우리를 갈라놓는 다른 현실에 대한 상징적 진술로서, 그들을 공간에 그대로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우리가 오늘날 이것을 인간의 정신에서 발견한 것은 현대의 물리학자가 역시, "우리가 소통할 수 없는" "우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현재 과학의 큰 전환점에 서 있다. 우리가 합리적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비밀에 둘러싸여 있다는 치유적 발견으로의 전환점에 있다. 더 큰 지적 겸손함이 시작임을 바라면서. 그러나 그것이 내게 질문과 연구를 외면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소수의 독자들은 C. G. 융의 방법으로 하는 꿈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훨씬 많은 깨달음을 밝힐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이것이 새로운 시달리게 하는 질문을 던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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